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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 리얼리티 쇼: 마법의 성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5.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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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에 불이 들어옵니다.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자는 필요 이상으로 격양된 표정과 필요 이상으로 톤을 높인 목소리로 (보이지 않는) 텔레비전의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프로그램의 호스트를 맡은 휴 G. 에릭슨 (Hugh G. Ericson)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첫 눈에 반한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한때 저도 첫눈에 반한 여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잘 되지 않았던 듯 합니다만. 그런데 과학자들에 따르면 이 반응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수 초나 수십 분의 1초, 아니면 더 짧을 수도 있고요. 과연 어떤 요인이 그런 특수한 경험을 일으키는 걸까요? 외모? 향기? 분위기? 호르몬? 아니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지금 저 출발선에 대기 중인 50명의 늠름한 청년들에게도 해당 사항이 있는 이야기일까요? 올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 중인 생방송 리얼리티 쇼 ‘매직캐슬 위드 휴 G. 에릭슨 (Magic Castle with Hugh G. Ericsson),’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카메라는 야외 스튜디오와 넓은 경기장의 전체 모습을 높은 곳에서 보여줍니다. 진행자의 경기 규칙 설명이 이어진다. 미리 녹음된, 매 에피소드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설명입니다.
  “우리 프로그램의 규칙은 간단합니다. 한 명의 여성출연자가 매직 캐슬에 갇혀있습니다. 그리고 5 마일 떨어진 곳의 출발선에 50 명의 남성 출연자들이 대기 중입니다. 휘슬이 울리면 남성 출연자들은 유리성에 갇혀있는 여성 출연자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모험을 시작하게 됩니다. 마치 옛 동화에서 공주를 구하러 모험을 떠나는 기사들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1 라운드는 용암의 계곡, 2 라운드는 위험한 정글, 3 라운드는 녹아웃 스테이지. 여기까지 살아남은 단 한 명의 도전자에게만 유리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제 특별히 마련된 이 야외 스튜디오에서 오십명의 남성 도전자는 유리병에 갇힌 여성 도전자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모험을 펼치게 됩니다. 마법의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하는 기사의 이야기는 참으로 고전적인 소재임에 틀림없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젊고 용감하고 잘 생기기까지 한 기사들이 죽음을 불사한다면 더더욱 그렇죠.


  사회자가 왼손을 높이 들어서 스튜디오의 끝을 가리킵니다. 그 곳에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성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성의 망루에는 유리병 하나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바로 그 안에 오늘의 여성 출연자가 갇혀 있습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사악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저 성의 주인은 세 시간 안에 그녀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유리병을 잡아두고 있는 피아노 줄을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하였답니다. 자그마치 50 피트 높이입니다. 그러니까 약 15 미터 정도겠네요. 이제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여기 이 50 명의 건장한 남성 도전자들뿐입니다. 만약 아무도 마지막 라운드까지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녀는 15 미터 아래의 땅바닥으로 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전은? 당연히 보장할 수 없겠죠. 위험하다고요? 예. 위험합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는 언제나 지원자 중에서만 선발합니다. 방송국과 제작진은 결과에 책임지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아놓고요. 사회자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마치 약 광고의 마지막 부분처럼 보이지도 않는 작은 글씨를 화면 가득 띄우고 목소리를 낮춰서 빠르게 읽습니다. 자기들은 어떤 책임도 없고 분명히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밝혔다고요. 

 

  드디어 사회자가 오늘의 주인공, 공주를 소개합니다.
지금 마법의 성에는 진짜 공주보다 더 공주 같은 오늘의 출연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스사우던 대학 문학 전공자인 나디아 시모어(Nadia Seymour) 양입니다. 올해 20세. 고향은 뉴저지 주 글렌 리지입니다.
  사회자가 자신을 소개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합니다.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나디아입니다. 노스사우던 재학 중이고요. 문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나이는 스무 살이에요.
  시모어 양이 갇혀있는 유리병에는 여섯 개의 카메라가 60도 간격으로 달려 있습니다. 모든 방향에서 그녀의 모습을 전송할 수 있습니다. 금발 머리를 묶어 올린 그녀는 하늘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동화에나 나올 법한 유리 구두를 신었습니다. 조정실 기사들의 부지런한 노력 덕분에 그녀의 얼굴 표정은 물론 전신을 실시간으로 안방의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사회자는 라이브 쇼의 박진감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짓궂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녀의 돌발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던 것이지요. 또 그걸 이용해서 남성 도전자들을 자극하고 싶었던 것이고요.
- 혹시 시모어 양은 남자 친구 있습니까?
  시모어 양은 스무 살 아이답게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이렇게 답합니다.
- 아니요. 아직 없어요.


  반대쪽 저 너머의 메인 스튜디오에서는 50 명의 남성 도전자들이 너나없이 함성과 탄식을 내뱉습니다. 순간 짙어진 이산화탄소의 농도 때문인지 촬영장의 분위기는 더없이 엄숙해집니다. 지금 그들 50 명의 남성 도전자들은 서로 다른 여섯 개의 카메라가 전달하는 서로 다른 여섯 가지 화면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든 방향에서의 그녀를.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털 유리병 안에서 얇은 실크 드레스 한 겹에 감싸인 그녀는 정말로 공주 같아 보입니다. 사회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 노골적으로 공기를 달굽니다.
- 우리 시모어 양의 이상형을 말씀해주신다면?
- 그냥 잘생겼으면 좋겠고요. 키도 좀 컸으면, 그리고 유머감각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메인 스튜디오는 아수라판이 됩니다. 도전자들이 저마다 오십 가지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김새, 키, 유머 본능 등을 소리쳐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러나 어쩝니까.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에 그녀는 너무 멀리에 있는 걸요. 안 들립니다. 오디오 연결이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답니다. 항상 이게 안타까운 겁니다. 일방통행. 알듯 말듯한 사회자의 미소는 참 의뭉스러워 보입니다. 그는 이제 마지막 밑밥을 던집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 도전하신 남성 분들께 한 말씀하신다면?
- 여긴 너무 높아서 무서워요. 저를 꼭 구해주세요.


  도전자들은 광분합니다.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드립니다. 목젖이 보이도록 소리를 지릅니다. 정면에 고정된 카메라에 서로들 얼굴을 디밀고 포효합니다. 꼭 구해내겠노라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가문을 걸고, 고향을 걸고, 출신 학교를 걸고 그녀를 구해내겠다고 합니다. 그녀를 구해내는 도전자에게는 월계수 나무로 만든 '승리자의 관'이 주어집니다. 또한 그녀와 함께 '80일간 세계일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관건은 월계수 이파리 따위가 아니라 바로 그겁니다. 아름다운 오늘의 주인공과 80일 동안이나 함께 로맨틱한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것. 게다가 경비는 전액 방송국에서 (물론 광고주들의 지원을 받아) 부담하겠다니 짜릿함은 곱절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많은 도전자 중 단 한 사람만이 그 영광을 누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없을 수는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나머지 마흔아홉 명의 생명은 담보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이 리얼리티 쇼에는 1회분 촬영에 운이 좋으면 최소 마흔아홉 명, 운이 없으면 최대 쉰한 명의 생명이 투자됩니다. 하지만 18세 - 49세 시청률이 평균 6.6라면 나쁘지 않은 장사이기는 합니다. 무려 팔백만 명 이상이 텔레비젼 앞에서 이 쇼를 지켜보았다는 뜻인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감히 6.6의 시청률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


  제 1라운드는 용암이 흐르는 골짜기입니다. 양쪽 절벽 사이로 끓어오르는 용암이 흐르고 있습니다. 사회자는 멋들어진 말투로 그 위험천만한 지형을 설명합니다. 말로는 참 간단하군요.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그냥 뛰어 넘어가면 되니까요. 절벽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열기가 대단하군요. 도전자들은 이 쇼를 제작 지원한 여러 기업들의 로고로 어지럽게 도배가 된 운동복을 입고 지금 그 앞에서 쭈빗거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먼저 선뜻 나서서 뛰어넘어 보려고 들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선명한 검붉음하며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는 더운 기운으로 미루어보건대, 정말 정말로 뜨거워 보였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방청석에서는 야유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겁쟁이! 꺼져라! 나가 죽어라! 


  바로 그때였습니다. 도전자 중 어떤 체격 좋은 청년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숨을 한 번 들이쉬더니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났습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달려와서 거짓말처럼 용암이 흐르는 골짜기를 뛰어 넘었습니다. 방청객들은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사회자도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 8번 도전자의 아주 인상적이고 용기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장면을 우리 공주님도 보셨을까요?
  저 멀리 유리병 안에 갇혀 매달린 시모어 양이 재빨리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 정말 고마워요. 너무 멋지세요. 부디 여기까지 오셔서 저를 구해주세요. 이 안은 너무나 답답하거든요.
  사회자가 8번 도전자에게 물었습니다.
- 오늘의 공주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방금 용암을 뛰어넘어온 8번 도전자는 힘차게 외쳤습니다.
- 제 이상형입니다!


  확실히 8번 도전자의 용기가 촉매가 되었던 것일까요? 거짓말처럼 또다시 몇몇이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11번, 24번, 42번. 그제야 인간의 다리로 저 정도 너비의 골짜기를 뛰어넘는 일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빠르게 달려와서 힘차게 발을 구르고 점프. 간단하죠? 그들 역시 운동신경이 좋았는지 다행히 골짜기의 반대편 세상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방청객들은 더욱 큰 소리로 열광했습니다. 들뜬 사회자는 그들 하나하나를 치켜세우며 인터뷰했고, 카메라는 모든 각도에서 그들의 용감한 도전을 잡아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남들 따라나섰던 한 도전자가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습니다. 44번.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고, 뜨겁지만 적막한 용암에 한 입에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풍덩. 그리고 끝.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끔찍한 장면입니다. 아주 끔찍한 장면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사람의 미래가, 한 사람의 세계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으니까요. 잠시 동안 스튜디오는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용암보다 무거운 적막이 흘렀습니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하죠?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끔찍한 일이라도 너무 간단하게 일어나면 사람들의 현실 감각을 앗아버리기 마련이니까요. 사실 뭐 진짜인지 잘 모르겠잖아요. 비디오 게임에서 벌어진 일처럼 말이에요. 사회자는 빙긋 웃으며 요즘 유행하는 '엣지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정리합니다.
- 와! 뼈도 못 찾겠네요.
 방청객들은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시작으로 ’괜찮아’라고 연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서 남은 도전자들도 정말 괜찮은 줄 알고 너도 나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정말로 괜찮았고 나머지 더러는 결코 괜찮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도전자가 쉽게 사라질 때마다 침묵의 공백은 점점 더 짧아졌습니다. 그렇게 용암은 부글부글 스물여섯 명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스물네 명이 남았습니다. 저 멀리에서는 아직도 시모어 양이 애원합니다. 반짝 빛나는 유리병 속에서, 얇은 실크 드레스에 감싸여.
- 용감한 기사님들! 저를 구해주세요.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아요. 먹고 싶은 것도 많고요. 하고 싶은 것도 많아요.


*


  자. 제 2라운드는 정글 게임입니다. 준비된 1.5킬로미터의 정글을 먼저 헤치고 나가는 사람만이 통과가 되는 코스인 것입니다. 힘과 스피드가 있다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 안에는 독사와 악어와 그 외에 이름 모를 병을 옮기는 벌레들이 가득하거든요. 그러니까 운이라는 것은 물론 신의 축복이라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보통 2라운드의 도전자 중 삼분의 일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사회자는 너스레를 떨면서 저 정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간인지를 설명합니다. 도전자들은 긴장하지만 유리병에 갇힌 가엾고 연약한 공주의 모습(초대형 고화소 스크린으로 그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을 생각하면 차마 포기하지를 못합니다. 아직도 그녀의 고운 음성이 스물네 명 도전자들의 귓가를 메아리칩니다. 과연 그것은 환청일까요, 방송 중계일까요.
-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이요. 저는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요. 너무 무서워요.


  스물네 명의 도전자들은 용감무쌍하게 정글로 파고듭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들을 철저하게 따라갑니다. 무수한 인간 역정의 드라마. 그 말이 딱 어울립니다. 대자연과의 사투. 그 말도 딱 어울립니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치열한 경쟁. 그곳에서 펼쳐지는 도전자들의 남성미 물씬 풍기는 우정, 그리고 때로는 결정적인 배신. 경쟁자의 가방에 독사를 넣는 비열함. 경쟁자의 사체로 악어를 유인하고 자신들은 도망가는 대담함. 카메라는 그것을 남김없이 흡수합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카메라에 담길 수 없는 진실은 가치가 없습니다. 진실은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도전자들의 소름 끼치는 인간 본성 앞에 방청객들은 울고 웃는답니다. 무려 열아홉 명이나 되는 용감한 도전자들이 정글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저 습기찬 정글의 어디쯤에 어떤 모습으로 쓰러져 있을런지요. 이제 겨우 다섯 명이 남았습니다. 저 다섯 명 중 한 명이 바로 마법의 성에 당도할 용사입니다. 유리병에 갇힌 팅커벨을 드디어 구해내고 그 진실된 용기를 방송 만방에 떨칠 용자 중의 용자인 것입니다.


*


  자. 이제 제 3라운드까지 왔습니다. 녹아웃 스테이지. 천 길 낭떠러지 앞에서 그들은 카메라 앵글에 맞춰 나란히 섰습니다. 이번에는 50퍼센트 복불복 게임입니다. 다시 말해서 둘 중의 한 사람만이 살아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재 남은 사람은 다섯 명. 그러니까 뭐랄까, 짝이 맞지가 않아요. 막간을 이용해서 한 사람을 떨어뜨려야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지엄한 규칙에 따르자면, 이런 경우 아주 공정하게 떨어뜨릴 사람을 골라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방청객들의 인기투표라는 것입니다. 사회자는 아주 슬픈 목소리로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은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이 침울한 '돈키호테'들은 비장한 각오로 단상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친구들과 유리병에 갇혀있는 공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합니다. 어쨌든 이들은 대단한 행운아입니다. 이제까지 비명에 횡사한 마흔다섯 명 도전자들에게는 마이크를 잡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아름다운 스무 살 시모어 양과 이야기 한 번 나누어보자 못했으니까요.


  다섯 용사 운명의 지침을 쥐고 있는 방청객들은 사전에 나누어 받은 리모컨으로 떨어뜨리고 싶은 사람의 번호를 입력합니다. 사실 방청객들은 도전자 개개인에 대해서 깊이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릅니다. 용암을 넘고 정글을 통과하는 지난 몇 시간의 모습이 방청객들이 아는 그들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좋아도 오케이입니다. 그냥 싫어도 물론 오케이입니다. 불합리한가요? 천만에. 바로 이 점이 인기투표의 묘미인 것입니다. 아아! 드디어 투표 결과가 집행되었습니다. 과연 방청객들은 저들 중 누구를 가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을까요? 사회자가 큰 소리로 한 도전자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호명된 도전자가 서 있던 바닥이 거짓말처럼 무너집니다. 깊이를 알 수가 없는 허공으로 떨어지는 이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스튜디오를 메웁니다. 남은 이들의 안도의 한숨이 여운처럼 허공을 맴돕니다. 사회자는 심드렁하게 말합니다.
- 이래서 인기가 중요하단 겁니다. 그러게 좀 방청객 여러분께 점수 좀 따지 그랬어요.


  아마 방청객 중 아무도 죄의식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여러 사람의 사수가 동시에 총을 쏴서 형을 집행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순간에 수백 명이 버튼을 누르기 때문에 죄책감이라는 것도 그만큼 희석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네 탓인가요? 내 탓인가요?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이건 그냥 게임이니까요. 이제 정확하게 네 사람만 남았습니다. 휴! 이제야 녹아웃 스테이지를 제대로 치를 수 있습니다. 예정대로 그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서부의 총잡이’ 방식의 게임을 시작합니다. 약 330 피트 (100 미터에 해당합니다) 전방의 권총을 잡고 상대방에게 더 빨리 쏘는 사람이 승리하는 바로 그런 라운드입니다. 권총은 하나. 사람은 둘. 하나는 생명을 잃고, 하나는 영광의 결승전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그룹이 달려갑니다. 23번 도전자가 몸을 던지며 빠르게 권총을 잡습니다. 그리고 한 바퀴 굴러서 달려오는 15번 도전자를 그대로 쏘아 버립니다. 어라? 어렵겠다 싶었는데 정말로 맞았습니다. 사회자가 쓰러진 15번 도전자의 맥을 짚어봅니다. 그리고는 결판이 났음을 선언합니다.
- 23번 도전자, 제법인데요. 날아가던 새라도 어김없이 맞추시겠군요.
  쑥스러운 듯 먼지를 털고 일어서는 승리자를 향해 방청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처참하게 쓰러져 거적대기에 말려져 나가는 패배자에게는 경멸의 시선을 보냅니다. 유리병의 매끈한 표면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가며 머리를 빗던 우리의 공주 역시 역시 승리자를 향해선 그 아름다운 미소를 아끼지 않습니다. 
- 꼭 저를 구해주세요. 당신과 함께 세계일주를 떠나고 싶어요.


  두 번째 그룹도 달려갑니다. 9번 도전자가 간발의 차이로 권총을 집었습니다. 47번 도전자는 달려오다가 당황한 듯 멈춥니다. 9번 도전자는 안전장치를 풀고, 서서히 47번 도전자의 머리에 총을 조준합니다. 그러나 바로 쏘지는 않습니다. 그때 사회자가 끼여듭니다. 
- 아. 여러분 여기 이 두 분은 오래된 친구사이입니다.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군요.
방청석은 이 흥미로운 사실에 떠들석해집니다. 과연 9번 도전자가 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결국은 쏘지 못할 것인가. 왼편 남자는 이미 체념한듯이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도 여전히 오른편 남자는 망설이고만 있습니다.


  이때 갑자기 방송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 첫 번째 그룹에서 이미 통과한 23번 도전자가 성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9번과 47번의 대결에 끼어든 것입니다. 끼어든 23번 도전자는 남자는 47번 도전자를 쏘았습니다.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친구를 본 9번 도전자 남자는 화들짝 놀라 23번 도전자를 쏘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23번 도전자도 9번 도전자를 쏘았습니다. 결국 세 용사들 모두 머리에 총을 맞은 채 바닥에 널부러졌습니다. 사회자도, 안전 요원들도 너무 갑작스러웠던 나머지 채 손도 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돌발 상황에 사회자도 놀라서 식은땀을 흘립니다. 하지만 수습은 해야겠지요.
- 제작진 분들, 이번 도전자들이 민간인들이 맞나요? 어떻게 쏘기만 하면 다 머리에 가서 맞나요?


  애석하게도 진정한 승리자는 탄생하지 못했습니다. 황급히 광고로 넘어갑니다. 광고가 끝난 다음에 스튜디오에 가득 흐르는 아직 덜 닦인 피를 밟으며 사회자는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 아쉽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보시다시피 결과는 이렇습니다.  


  카메라는 유리병 속의 여성 출연자에게로 향합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클로즈 업.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질려 있습니다. 사회자가 그녀에게 말을 건넵니다.
- 시모어 양, 정말 유감이에요.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요?
- 사… 살려주세요. 멋진 남자도 세계 일주도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서 좀 내려주세요. 너무 무서워요.
-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그 말을 들어줄 도전자가 더 남지 않았는 걸요?


  사회자는 냉정하게 몸을 틀어 2번 카메라인지 3번 카메라인지를 바라봅니다.
- 생방송 리얼리티 쇼 ‘매직캐슬 위드 휴 G. 에릭슨,’ 안타깝게도 이번 주 역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방청객들도 함께 아쉬워합니다. 다음 주에는 부디 진정한 영웅이 나타나기를 기원하며 그들은 지엄한 프로그램의 규칙대로 입을 모아서 큰소리로 외칩니다. 유리병을 떨어뜨려주세요! 스무 살 시모어 양은 반짝반짝 크리스털 유리병과 함께 50 피트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15 미터 정도요. 당연히 유리병은 박살이 납니다만 그 안에 있던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영화 같은 장면이어서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사회자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활기를 찾았습니다.
- 올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 중인 생방송 리얼리티 쇼 ‘매직캐슬 위드 휴 G. 에릭슨,’ 지금까지 저는 휴 G. 에릭슨이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새로운 공주님, 그리고 새로운 오십 명의 도전자들과 함께 바로 이 시간! 당신을 찾아갑니다. 절대 놓치지 마세요! 

 

(2005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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