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오래된 비망록, 서기 이천이백구십년의
by 김영준 (James Kim)
날이, 많이 따뜻해졌다. 개구리가 개골, 하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날씨다. "아아, 나의 청춘만큼 아름다운 신록의 기운이여." 압둘 알할렘 자파리는 하늘을 향해 손기지개를 폈다. 올해로 일곱 살. 평균수명이 열다섯쯤 되는 23세기 지구에서 그는 벌써 인생의 반을 살았다. 몇 세기 전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러한 때 - 산술적 중년기를 '사이드 풀'에 비유했다고 한다. 수영장 레인을 헤엄쳐 반환점을 터치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파리는 수영이 뭔지 잘 모른다. 한 번도 물에서 헤엄쳐 본 일이 없다. 삼차원 홀로그램 사전의 S 항목에서 옛날 사람들이 물이라는 매체 안에서 어떻게 수영이라는 동작을 행했는지를 감상한 것이 전부다. 구경한 소감이란? 글쎄. 독실한 교인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대 지구인들의 수영이란 건 너무 남사스럽네. 저건 마치…… 수컷과 암컷의 교미 장면을 반반씩 나누어 보는 듯하군. 그러니까…… 수컷 따로 암컷 따로 말이야." 그가 무엇을 보고 그런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허나 그건 자파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23세기 지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과 유사 인간들 중에는 '수영'이란 걸 아는 사람이 없다. 과거 지구인들이 바다라고 불렀던 - 전 지구의 70.8퍼센트를 차지하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물이 아니라 새카맣고 찐득찐득한 석유였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내려다 본 사진이라는 검은 갈색의 지구는 홀로그램 사전에서 보았던 20세기 지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이 놈의 삼차원 사전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자파리는 투덜거리며 플러그를 뽑았다.
자파리는 쵸르노빌 화력발전소에서 일한다. 과거엔 체르노빌이라 불렀다는 곳이다. 체르노빌이 아닌 쵸르노빌인 까닭은 모스크바 공국의 러시아어가 만국 공통어가 되었기 때문인데 자파리가 태어나기 훨씬도 전의 일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다만 종전까지 만국 공통어였다는 뱅골어보다는 러시아어가 훨씬 더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불만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페르낭 라마즈 산부인과(註2) 신생아실에서 이미 러시아어문학 학사 코스를 밟았다. 물론 캘커타 왕국의 시대였다면 태어나자마자 뱅골어 문학부터 공부했을 것이고 그 나름대로 불만 없는 삶을 살았겠지만, 기왕에 모스크바 공국의 천하에 태어나 러시아 말을 배워두었으니 쨔르(註3)의 시대가 좀 더 오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자파리가 쵸르노빌에서 맡고 있는 일은 케레혼(Kerehwon) 공화국의 아오지, 길주, 명천 일대의 탄광에서 생산된 석탄을 쵸르노빌로 실어 나르는 것이다. 케레혼 공화국은 아시아의 동북쪽 두 개 국가와 한 개 부속 섬나라의 합병으로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다. "하필 케레혼이라니……." 처음 일이 정해졌을 때 자파리는 몸을 으스스하게 떨었다. 세계에서 가장 내전의 위협이 높은 나라를 드나들어야 한다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차라리 다른 동료들처럼 발전소 안에서 일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래서 때로는 감마 계급(註4)으로 생산된 자신의 유전자를 원망하기도 했다. 알파 계급으로 태어나 카불이나 트리폴리, 아니면 세계 경제의 중심 '가자 지구'에서 비슈트를 입고 사무직으로 일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자손 번식을 꺼리기도 했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일찌감치 불임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어쩜 다행인지도 몰라. 감마 계급의 유전자는 더 이상 자식에게 전해줄 필요가 없어. 그래봐야 비극의 순환일 뿐이야" 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남들처럼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웁기도 했다.
자파리의 생식능력에 이상이 생기게 만든 원흉은 쵸르노빌 화력발전소로 밝혀졌다. 작년 여름의 일이다. 그 굴뚝에서 나오는 시커먼 매연을 취해 실험용 쥐를 노출시켜 보았더니만 정자와 난자 모두에서 DNA에 이상이 생기더라는 연구 결과가 때맞춰 발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① 1밀리리터 당 정자의 수가 일반 쥐의 65.8%에 불과했고, ② 운동성을 유지하고 있는 정자 또한 5.5%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지는 등 불쌍한 모르모트의 불쌍한 체액 샘플에서 산출된 결과가 알려지면서 비로소 쵸르노빌 발전소 각 급 근로자들의 건강 이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다. 발전소측에서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평생 먹을 식수를 공급해 주겠다고 제의했는데 자파리는 일 분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식을 낳지 못해도 살 수야 있지만 먹을 물을 못 찾으면 살 수가 없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식수값을 생각해 볼 때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파리 외에도 많은 발전소 직원들이 그 제안을 환영했고 유쾌한 기분으로 도장을 찍었다. 물론 받아들이는 이외의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봐야 하는 게 옳았을 것이다. 발전소 측의 고용계약서에 따르면 자파리는 '업무수행과정에서 유해요인을 취급 및 폭로함으로써 질병 또는 건강장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지만, 의학적으로 인정될 임상사유가 나타나는 경우에도 보상 지급 여부가 필요하지 않은 을(乙)'로 분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의학적 임상사유의 예시로 제시된 각호의 첫 번째가 바로 '생식기능의 저하 및 장애'인지라 그야말로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물론 고용계약서 상에 표기된 자파리의 멋들어진 서명은 이미 그가 미처 태어나기도 이전인 '위대한 8주 차'에 - 맛쓰야아사나(註5)법이 정한 태아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는 시작점 -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리터 당 식수값이 무려 4000 루블에 이르는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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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따뜻해졌다. 자파리는 오늘도 석탄을 쵸르노빌로 운반해야 한다. 쵸르노빌의 입지는 감마 계급 수준의 지적능력을 갖춘 자파리의 눈에도 화력발전소를 짓기에 빵점자리가 아닌가 싶게 보인다. 반경 백킬로미터 안에 탄광이 남지도 않은 곳에 만들어진 석탄화력발전소이기 때문이다. 이 발전소가 세워진 것 또한 이백 년 남짓 전의 일인데, 그 이전의 키예프 인근지대의 역사는 무슨 용을 써도 찾을 수가 없다. 삼차원 홀로그램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 - 알 아이오딘, 알 루테늄, 알 세슘(註6)은 쵸르노빌의 자리에 과거에도 발전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석탄 화력과는 다른, 어떤 초월적 개념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발전소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럼 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 자파리의 물음에 철모를 쓴 그들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 뒤 살짝 눈짓을 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거기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그래서 누구도 이전의 쵸르노빌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 거지." 자파리는 그들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24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이때 그런 음험한 음모론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헤즈볼라(註7)가 모스크바 공국의 집권 여당을 차지한 공명 정대한 시절이 아닌가! 정보와 권력을 틀어쥔 자들이 시민을 우롱할 수 없는 시대다. 더 이상은 지구가 둥굴다는 헛소리를 지껄여도 믿는 사람이 없고 더 이상은 누구도 창조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감마 계급의 운송 노동자일지언정, 엄연히 세계 유효전력의 약 10퍼센트를 생산하는 지구 최대의 화력 발전소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자파리에게 지동설이니 진화설이니 하는 그런 뜬금없는 음모들은 못 배우고 못 가진 엡실론 계급들의 억하심정이 표출된 것으로만 보였다. 물론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각각 팔 하나, 다리 하나, 눈 하나가 많은 알 아이오딘, 알 루테늄, 알 세슘은 얼마나 불쌍한 엡실론 계급의 노동자들인가. 그들을 업신여기고 깔보는 것은 올바른 감마 계급인으로의 행동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공평하고 동등하다 주창했던 19세기 지구의 선지자 네이슨 포레스트(註8) 장군의 '불타는 십자가 법', 일명 KKK법을 위반하는 셈이 된다. 그런 차별과 박해는 루터킹주의자나 간디스트와 같은 안티-그리스도 집단들이나 벌일 일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런 악질들은 모두 잡아서 전기의자에 앉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파리는.
동료들의 배웅을 받아 쵸르노빌로 출발한다. 오늘도 석탄이 한 트럭 가득이다. 탄광에 직접 들어갔던 것도 아니고 옮겨 싣기만 했는데 숯이라도 바른 듯 얼굴이 까맣다. 멀리서 날아온 온기 어린 바람이 일곱 살 그의 콧수염을 간지럽힌다. 이런 기분을 참 좋아한다. 마치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뿌듯함이다. 그래, 비록 감마 계급의 보잘것 없는 노동자지만 뭐 어떤가? 이만하면 축복받은 삶이 아니겠는가? 성실하게만 살면 남은 일곱 해 동안 굶어 죽진 않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열여섯까지도 장수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발전소에서 평생 식수를 대주기로 했으니 먹을 물 때문에 거지가 되거나 부랑자가 될 일도 없다. 그에 비해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방금 떠나 온 케레혼 공화국만 해도 그렇다. 지방에선 다수 민족과 소수 민족의 충돌이 아침, 점심, 저녁 - 하루에 세 번씩은 일어난다. 좌익과 우익의 충돌을 말하자면 열 손가락으로 일일이 셀 수도 없다. 자파리 또한 그의 이름이 케레혼 공화국의 말로는 좌익을 (궁색한 설명이지만 그의 이름은 그들의 발음상 ‘좌파리’에 가깝고 이는 그들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꾸어 배열할 때 '이 좌파'가 된다고 하던가) 연상시킨다고 하여 세계에서 가장 험악한 우익무장단체 '주석궁에 탱크를'에게 피랍된 적이 있었다. 케레혼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정신병자들을 견디며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편 콜럼버스 대륙 사람들을 생각하더라도 자파리는 스스로의 복된 조건을 받고 태어났다. 지구에서 가장 외따로 떨어진 북아메리카의 콜럼버스 연합국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석유를 퍼다나느르라고 그들의 일생을 바친다. 바보들. 지구의 70.8퍼센트가 석유로 출렁거리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양동이를 싣고 해안가로 향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미친 사람처럼 '검은 국물'을 실어 담는다, 석유를. 누가 내 석유를 훔쳐갈까 평생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인간들이다. 왜일까? 그 무용한 것을? 석탄 같은 '검은 황금'이라면 모를까. 석유로는 배도 가게 할 수 없고 트럭을 움직이게도 할 수 없다. 석유로는 공장을 돌릴 수도 없고 발전을 할 수도 없다. 마실 수도 없고 (우웩!) 몸을 씻을 수도 없다 (우웩!). 세상에 제일 넘치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석유다. 그런데 콜럼버스인들은 그 석유에 평생을 걸고 석유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그것도 총으로 빵 쏴서 죽인다. 이상한 종자들이다. 그들은 석유가 미래의 대체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증류수가 없어도 석유만 있다면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유로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바보 같은 소리. 자파리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가능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멍청한 콜럼버스인들은 정작 당장 생존에 필요한 식수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세 살 이전에 죽을 확률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된 것이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보니 콜럼버스 대륙의 평균수명의 12.6세로 지구 평균보다 2.4년 가량 떨어지더라. 정말이지 그들은 23세기 지구에서 덜 교화된 인종의 상징이다. 답이 없다는 남아메리카 종족들보다도 더 하다. 간디스트도 루터킹주의자도 모두 콜럼버스 대륙에서 건너온 사회적 말종들이다. 온갖 악질 반사회적 분자가 판을 치는 곳이다. 세계 4대 성인 중 둘 - 네이슨 포레스트와 존 맥클레인이 태어난 위대한 땅에서 어찌 그런 집단들이 활개를 친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여태껏 콜럼버스인들은 마트료시카 인형, 불가리아 계산기, 아니면 니케 운동화의 하청을 맡아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무지하고 험악한 나라 대신에 키예프에서 태어났다는 건 얼마나 복 받은 일인가. 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자파리는 검은 구름과 까마귀 울음 소리로 가득한 유라시아 93번 국도를 통과하다가 말고 주수소(給水所)에 들렀다. 트럭의 연료가 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를 가게 하는 건 깨끗한 증류수의 힘으로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따라서 성능과 가격이 달라진다. 때문에 감마 계급은 일차증류수를 베타 계급은 이차증류수를 주로 쓰며 알파 계급만이 위대한 삼차증류수를 쓸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운송과정에 사용되는 연료는 주로 일차증류수다. 당연히 싸니까 그렇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발전소 높은 양반들은 안전이나 환경보단 그저 마진을 많이 남기는데만 관심이 많다. 그래도 일차증류수값이 생각보다 많이 오르지 않은 편이다. 얼마 전 세상 대부분의 물을 독점한 하미드 빈 압둘 알싸니 카타르 왕자(9세 6개월)가 말도 통하지 않는 다섯 살 터키 소녀를 성희롱하고 600 루블로 입막음하려던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터키의 총리는 "600 루블이라니요. 어쩌다 우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건 우리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라고 목놓아 울부짖어 전 세계 모든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래도 부끄러움을 느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인지 알싸니 왕자는 향후 일년간 증류수 가격을 동결하겠다고 선언했다. "다 되었습니다. 손님. 구십육만루블입니다." 연료탱크에 증류수가 만땅으로 들어찬 것을 확인하고 자파리는 비용 결제를 위해 쵸르노빌 플래티넘 직원카드를 내밀었다. 주수소의 알바로 보이는 소녀는 하이힐러브레이드를 신고 허리춤에 카드결제기를 차고 나타났다.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에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얇은 치어리더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카드를 결제기에 대고 긁는 동작이 그렇게 에너지가 넘칠 수가 없었다. '실로 고혹적이군.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요즘에들은 신생아 실에서부터 자극적 연예 오락물과 영국식 티블로이드를 보며 사육되어선지 발육이 놀랍도록 빨라.'
빨갛고 노랗게 반짝거리는 화려한 간판 - 후터스(Hooters)를 뒤로 하며 자파리는 주수소를 떠났다. 내내 방금 그 후터스 주수소의 알바만 눈 앞에 어른거렸다. 어디 그런 여자만 있다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정착할 텐데. 이윽고 그는 일곱 살 평생 처음으로 자기가 얼마나 간절하게 가정을 원하는지를 알아차렸다. "안 되겠어. 나도 반려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려야지. 불임인데 애는? 뭐 어디서 하나 입양하면 되겠지. 이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라는 서유럽 끝으로 가면 '리틀 맘'들이 길에 버린 사생아가 득실득실하다는데." 그는 며칠 전에 보았던 세계 최대의 신생아 밀매 조직 '캘커타의 마녀 테레사'의 전단지를 떠올렸다. 피부 색, 머리칼 색, 그리고 눈동자 색에 따라 단 돈 일천루블에서 일만 루블까지! 삼백 년 경력의 산파 마녀 테레사가 당신이 원하는 어떤 종류의 신생아라도 집 앞까지 배달해 드립니다 (배송료 무료, 단 산간 도서 추가 배송비 발생 가능, 익일 배송 원칙, 단 배송 상황에 따라 1~2일 지연가능). 자파리는 머릿속으로 꾸물꾸물 자기가 원하는 아이의 이미지를 그려보았다. 먼저 동화책 속에 나오던 것처럼 금발이었으면 좋겠고,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 아이면 어떨까? 치어리더 코스튬을 입히고, 허리에는 카드결제기를 채우고… 그 몽실몽실한 이미지는 점점 후터스 주수소의 아르바이트 소녀와 닮아간다.
*
드디어 쵸르노빌이다. 매주 다니는 길이지만 항상 새롭다. 저 위엄을 보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높은 굴뚝과 좌우로 덕 벌어진 콘크리트의 성을. 그 어떤 삿된 것도 주위에 들이지 않을 것 같은 저 차가운 완고함을. 꿀떡꿀떡 하늘로 뱉어내는 저 짙푸른 매연을. 얼마나 아름다운가! 흡사 좌우로 어깨를 쫙 펴고 앉아 여송연을 하늘로 피워 올리는 스위스 마피아를 연상케하는 장관 중의 장관이다. 아마 콜레오네 형제들(註9)을 한자리에 다 모아 놓아도 저런 가공할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바로 저것이 쵸르노빌이다. 지구 제일의 화력 발전소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 세계의 진정한 중심. 자파리는, 그곳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자랑스러웠다.
(2005년 04월)
(註1) Inspired by “2090년의 오래된 비망록” (Umberto Eco, 1997) * 이 콩트는 Umberto Eco의 한 칼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성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미네르바 성냥갑', 열림 책들, 56-59 페이지, (2004).
(註2) 라마즈 분만법을 창시한 프랑스의 산부인과 의사 이름. 라마즈 분만의 요체는 연상법과 이완법, 그리고 호흡법의 삼위일체를 통해 진통을 줄이고 출산 진행을 빠르게 유도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註3) 제정 러시아 때 황제(皇帝)의 칭호 (tsar-짜르 혹은 차르)
(註4) 감마 계급, 올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중에서 계급별로 생산되는 인간의 분법. 알파 계급-베타 계급-감마 계급-엡실론 계급 순.
(註5) 임산부용 요가 프로그램의 여덟번째 과정. 8주 차의 예민한 태아를 위해 심호흡을 중시한다고 한다.
(註6)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서 폭발 방출된 방사성 물질. 원자번호 53 아이오딘(131), 원자번호 44 루테늄(103), 원자번호 53 세슘(137).
(註7) 레바논의 무장 이슬람 조직이자 정당. 미국이 테러단체로 규정하는 무리 중 하나.
(註8) 필로 요새 학살사건을 일으킨 남북전쟁 당시의 군인. KKK단의 창립 멤버이자 초대 우두머리. 당시 흑인 노예 300여 명을 무참하게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불타는 십자가'는 KKK단의 상징.
(註9)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속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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