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바누아투 사람들은 왜 행복할까?
by 김영준 (James Kim)이상한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상한 일을 어떻게 규정하고 분류할 수 있겠느냐만은 크게 나누자면 이상한 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되지 않을까 싶다. ① 한 번쯤 있을 법해 보이는 일이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② 도저히 있을 수 없어 보이는 일이 간혹 실제로는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
예를 들어 부잣집 외동딸과의 연애와 같은 일은 후자에 속한다. 우리는 늘상 그런 건 텔레비젼 미니시리즈 및 연속극 속에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텔레비젼 안에서도 신데렐라 스토리는 있어도 그 반대 성별의 케이스는 없다). 하지만 막상 있으려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일. 그건 우유부에게도 그랬다. 그는 태어나서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부잣집 외동딸과 만나는 종류의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주택복권 1등에 당첨되는 상상을 하는 편이 보다 현실적이라 여겼다. 더구나 그 '부자'라는 표현이 그냥 하는 말로 부자가 아니라, 군(郡)도 면(面)도 읍(邑)도 아닌 도(道) 단위 스케일이라 되리라고는 정말 꿈에서라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도 단위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면 옛날로 칠 때 천석지기를 넘어 만석지기쯤 되는 것일 테다. 도에서 제일가는 부자? 이게 말이 되는가?
유부이 요즘 만나고 있는 그녀는, 정확히 말해 그녀의 집안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녀의 집안을 실질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그녀 아버지는 도에서 -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를 합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재력가였다. 남은 나머지 네 손가락이 전직 재벌 계열사 사장들과 낙향한 전직 장관들에 각각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자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직은 물론이거니와 현직으로도 정계와 재계와는 관련이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듣기로 그녀의 아버지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한국 전쟁 때 집안이 망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두 손밖에 없던 방년 15세에 쌀가게 배달 점원으로 시작하여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문을 쌓아 집안을 일으키고 들어오는 재물은 막지 않되 나가는 재물은 엄히 다스려 오늘에 이르렀노라고 했다. 또한 대한민국 근대사의 격동기를 필마단기로 버텨내며 학자로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쌓았고, 끝내 그에 반한 수많은 후학들을 거느리게 되었다고도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훌륭한 분이라는 정도는 유부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어쩌다가 정재계 유력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부자가 되었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는 그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유부는 그녀의 그런 배경을 모르고 있었다. 몇 다리 건너 소개로 만나 어쩌다보니 뒷통수를 긁적이며 만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녀가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좀 속물스럽지만 은근히 만족스러웠을까? 오히려 그런 그녀의 휘황찬란한 뒷 배경이 부담스러웠을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궁금하긴 하지만 지나간 일에 대한 가정이란 언제나 무의미한 것이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 비밀 아닌 비밀을 알게 되기까지 꼭 3년이 걸렸다. 자그마치 3년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이제껏 유부는 단 한 번도 '너희 집 부자야?'라고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유부가 그런 질문을 했었더라면 이제껏 단 한 번도 거짓말을 입에 올리지 않은 착한 그녀는 '응, 그래. 우리 집 부자야'라고 솔직하게 답해주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르면서도 물어보지 않은 건 순전히 그의 탓이다. 단 1퍼센트라도 그녀가 '부잣집 외동딸'일 가능성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유부는 뒤늦게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해보지만 역시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딘가. 결혼하고 나서야 무릎을 탁 치며 '아, 내가 결혼한 사람이 부잣집 외동딸이었구나'라며 알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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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남성 집단을 위 아래 20퍼센트를 뚝 잘라서 갖다 버리고 남은 60퍼센트를 체로 걸러 다시 위 아래 20퍼센트를 뚝 잘라내고 남은 60퍼센트를 원심분리(遠心分離) 했을 때 딱 중간에 위치할만한 지극히 평범하고 중간적인 사람이었다.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평범한 직장에 다녔으며 남는 시간에는 평범한 쇼파에 앉아 평범한 텔레비전을 보거나 평범한 컴퓨터 앞에 앉아 구름에 달 가듯이 정처 없는 평범한 웹서핑을 했다. 꿈은 이제 막 들어간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는 것이었고, 소원은 야근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 낙이라고는 월요일 화요일 저녁에 방영되는 대하 사극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운 좋게 꽤 괜찮은 차를 거저 하나 얻어서 아침저녁으로 끌고 다닌다는 점이 그만큼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인 사회 초년생 동료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사는 원인이기는 했지만, 그거 하나가 사실 전부였다. 어느 하나 특별날 것이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자동차도 유지와 보수조차 버거웠다.
우유부 (31, 회사원)
유부의 그녀 (28, 초등학교 교사)
그런 그가 자신이 '부잣집 외동딸'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것은 지난 3월, 처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기로 한 바로 그 날이었다. 설렘과 긴장과 흥분이 어지럽게 뒤엉키는 가운데 그는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정장을 꺼내 입었다. 일이 되려고 하는지 날씨마저 상쾌했다. 해는 가장 아름다운 높이로 떠서 가장 아름다운 각도로 볕을 내리고 있었고, 바람은 세상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불어와 세상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깔끔히 면도를 마치고 장쾌하게 애프터 쉐이브 로션을 바르면서 그는 몇 가지 가벼운 고민을 했다. 차를 몰고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걸어가는 게 좋을까? 역시 차를 몰고 가는 게 좋을까? 역시 그냥 걸어가는 게 좋을까?
우유부는 이름마냥 우유부단(優柔不斷)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젊은 나이에 자기 차를 몰고 다닌다는 게 능력 있는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한데 능력을 상징하기에 내 차는 너무 모자라 보이는 후진 모델이 아닌가? 더욱이 처음 댁으로 찾아뵙는 자리인데 냅다 차부터 몰고 가는 게 건방져 보이지는 않을까? 물론 자기 차를 가져왔다고 건방지게 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 버스를 타고 간다면 조금 걸어야 할 텐데 여름 공기의 여름 온도며 여름 습도로 인해 축축하게 땀이 나지는 않을까? 집이 단독주택이라 하던데 차를 몰고 가면 어디에 세워야 할까? 주차문제로 괜한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인근에 공용 주차장은 없을까? 고민하다 못해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그의 여자친구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러나 그녀 또한 우유부단하기로는 세계 챔피언 감이라서 (사실 유부는 그녀의 이런 면을 사랑한다) 속 시원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유부는 차를 가져가지 않기로 한다. 이런 특별한 날에 요구되는 첫째 덕목은 능력보다는 성실성과 개념 있음이라 여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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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차를 가져가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을 채 한 시간도 되지않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이 예상보다 굉장히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바로 옆에 있는 그의 그녀가 '부잣집 외동딸'일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하지를 못했다. 오로지 인적이 드문 급경사 오르막 길을 오르느라고 체력의 상당 부분을 소진하였을 뿐이다. 땀은 비 내리듯 흘렀고 와이셔츠는 축축이 젖었다. 상의를 벗어젖힌 지는 이미 오래다.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릴 무렵 그는 새롭고도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된다. 이제까지 옆에 두고 걸어온 저 단조로운 패턴의 돌담이 덕수궁의 것도 아니고 (당연하지. 여기는 서울이 아니니까) 대학 캠퍼스의 담장도 아니라는 것이다. 유부는 여자 친구에게 묻는다. 도대체 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돌담이 무엇이냐. 도대체 어떤 높으신 양반님네의 궁궐이냐. 그녀가 말하기를 그냥 가정집이란다. 가정집? 어느 가정이 도대체 이런데 살아? 일개 연대(聯隊)쯤이 모여 살기라도 하나? 그녀는 빙긋 웃는다. 그걸 보고 유부도 따라 웃는다. 자신의 목적지가 그 으리으리한 돌담집이고, 자기는 지금 그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가정집의 얼굴을 내밀러 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 까지다. 이윽고 그는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철옹성(鐵瓮城)의 돌담과 부처님처럼 웃는 그녀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러니까 여기가 너희 집이야?, 라는 표정을 하고서.
유부의 그녀 (28, 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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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 (31, 회사원)
담장의 길이에 비하자면 대문의 너비는 참 작고 간소하다. 참기름이라도 바른듯 반들반들 거리는 클 대에 문 문, 말 그대로 대문(大門)을 가로지나 영광스러운 성지(聖地)로 들어간다. 생각이 날듯하다 말듯하다, 뭔가가 정리되지 않은 말의 덩어리가 머릿속을 맴돈다. 분명 잊어버린 게 있는데 기억해내질 못하는, 그런 찝찝한 기분을 유부는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날카로운 이빨의 개가 컹컹 짖는다. 개마저, 나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이 집 딸을 데려가기는 힘들걸, 으름장을 놓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돌벽으로 나누어진 분리된 왕국(王國)에서 유부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고물이나마 차라도 끌고 오는 건데. 여기서부터는 우리 집이고 당신은 손님이니까 내가 안내를 해야죠, 라는 듯 왼팔을 가볍게 잡고 앞장선 그녀에게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푸른 잔디 사이로 허연 몸뚱이를 드러낸 징그러운 돌덩이가 징검다리처럼 현관까지 이어져 있었다. 돌다리를 하나하나 건너 그의 아파트보다 넓은 마당을 통과하면 제 2라운드도 무사히 마칠 수 있을 테지만, 이후 이어질 다음 라운드가 어쩐지 두려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행여 허튼짓이라도 하면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듯 개가 컹컹 짖었다. 덜컥 겁이 난 유부는 오른발과 왼발을 빠르게 교차시켰다. 뛰다시피 걸었다. 마치 '열전! 달리는 일요일'에라도 출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부의 그녀 (28, 초등학교 교사)
그녀의 개 (5, 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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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 (31, 회사원)
제 2라운드를 무사히 통과했다. 제 3라운드는 현관이다. 유부는 가사 도우미를 좌우로 거느리고 친히 마중 나온 '중간 보스', 아니 그녀의 어머니와 만났다. 이미 현관에 달려있는 카메라로부터 상방 75도에서 내려다 본 자신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실내로 전달되었을 것이고, 그걸 바탕으로 1차 감정을 마쳤을 터였다. 엄마 저희 왔어요. 다행이다. 참 든든한 지원군인 그녀가 어머니의 판단력을 흐리기 위해 선수를 쳐 주었다. 가까스로 유부는 한숨을 돌린다. 어머니는 그녀의 명민한 기동력에 타이밍을 잃었지만 아직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다. 유부를 감정하는 것은 분명 가사(家事)가 아닐 터, 그건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할 일이 아닐 텐데도 한 치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눈빛이 아주 매섭다. 유부는 조심스럽고도 멋쩍게 구두를 벗고 마룻바닥을 디뎠다. 조금 더 좋은 구두를 신고올 것을 그랬나. 없으면 큰 맘 먹고 하나 장만해서라도.
유부의 그녀 (28, 초등학교 교사)
그녀의 어머니 (54, 전업 주부)
그녀의 가정부 (45, 가정부)
그녀의 개 (5, 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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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 (31, 회사원)
그녀가 어머니를 제압할 수가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가정부나 똥개도 다소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녀의 적수는 아니었다. 개는 사람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고 가정부에게는 남의 집 가정사에 참견할만한 발언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이윽고 '2차 실물 감정'을 위해서는 보다 종합된 의견이 필요하다는 듯, 일군(一群)의 전문가 집단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녀의 작은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 그녀의 고모, 그리고 그녀의 조카들이다. 어솨요, 어서와요,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뵈어요. 유부는 삽시간에 십여 개의 눈으로 둘러싸인다. 어떤 눈은 호기심을, 어떤 눈은 경계심을, 도 다른 어떤 눈은 호기심과 경계심을 반반씩 담고 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남성 집단을 위 아래 20퍼센트를 뚝 잘라서 갖다 버리고 남은 60퍼센트를 체로 걸러 다시 위 아래 20퍼센트를 뚝 잘라내고 남은 60퍼센트를 원심분리(遠心分離) 했을 때 딱 중간에 위치할만한 지극히 평범하고 중간적인 말투로 또박또박 대답한다. 안녕하십니까? 가급적이면 진지하고 가급적이면 반듯하게 보이길 원한다는 정확한 발음과 억양이었다.
유부의 그녀 (28, 초등학교 교사)
그녀의 어머니 (54, 전업 주부)
그녀의 고모 (52, 전업 주부)
그녀의 작은 아버지 (50, 한의사)
그녀의 작은 어머니 (48, 교사)
그녀의 조카A (15, 중학생)
그녀의 조카B (12, 초등생)
그녀의 가정부 (45, 가정부)
그녀의 개 (5, 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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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 (31, 회사원)
그러나 유부는 갑작스럽게 긴장한다. 주변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면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랑이한테 물려갔어도 정신만 똑똑히 차리면 빠져나올 구멍이 있는 법이다.' 그는 현재의 판세를 냉철하게 분석했다. 고모의 파워를 가늠할 수 없지만 대개의 비슷비슷한 집안들의 모습에서 유추해 볼 때, 어머니와 비슷하거나 약간 더 강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되었다. 그래도 까짓 거 고모, 정도라면 믿음직스러운 그녀가 방어해 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조카들이야 어차피 꼬맹이들인데 일단은 염두에 두지 말도록 하자. 물론 이 어린 악마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니 기회를 보아 점수를 좀 딸 필요는 있겠다. 최악의 경우에는 용돈 몇 푼 쥐어주면 되는 것이다.
다음은 그녀의 작은 아버지. 말끔한 외모가 한의사보다는 대학병원 과장에 어울릴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 성격도 대학병원처럼 - 의뢰서가 없이는 만나기도 힘든 - 깐깐할 것만 같다. 첫번째 요주의 인물이다. 중요 체크다. 그녀의 작은 어머니 또한 깐깐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법한 인상이다. 학교 선생이라 하는데 다소 히스테릭했던 유부의 중 2 때 담임 선생님을 닮았다. 애들이 고생 좀 하겠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이름도 모르는 남의 제자들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숙부와 숙모가 셋트로 만만치 않아 보인다. 최종 결정에 그들이 얼마나 입김을 낼런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긴장을 늦춰선 아니 될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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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는 닭백숙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가족이 많다 보니 자그마치 아홉 마리나 된다. 가정부 아줌마를 빼고 그녀의 개를 빼도 자그마치 아홉이다. 그녀의 어머니, 그녀의 고모, 그녀의 조카 A, 그녀의 조카 B, 그녀의 작은 아버지, 그녀의 작은 어머니, 그리고 그녀. 이렇게 일곱이다. 여기에 유부를 더하면 여덟. 어라? 마지막 하나는 누구지?
맞다. 그녀의 아버지다.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를 합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재력가라는 그녀의 아버지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본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랬다. 조용필 아저씨처럼. 신승훈 오빠처럼, 이윽고 서재의 문이 삐그덕 열린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집에 결혼할 사람을 데려온다는데 이제껏 한 번도 내다보지 않은 무심함을 탓하기에는 그 등장이 너무도 엄숙하다. 유부는 절로 숨이 막힌다. 쥐색의 와이셔츠에 회갈색의 조끼에 검은색 뿔테안경에 반백의 머리칼에……, 그러니까 최종 보스, 아니 그녀의 아버지가 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 (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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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의 그녀 (28, 초등학교 교사)
그녀의 어머니 (54, 전업 주부)
그녀의 고모 (52, 전업 주부)
그녀의 작은 아버지 (50, 한의사)
그녀의 작은 어머니 (48, 교사)
그녀의 조카 A (15, 중학생)
그녀의 조카 B (12, 초등생)
그녀의 가정부 (45, 가정부)
그녀의 개 (5, 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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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 (31, 회사원)
오늘의 주인공은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만큼은 그녀가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부는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할 그녀를 십분 이해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우유부라고 합니다. 바보처럼 우물쭈물하며 그는 오늘의 판세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유부는 꼼꼼하게 살핀다. 자수성가, 쌀집 배달부, 고학, 격동기, 민주주의, 자본주의, 재물, 도내 다섯 손가락, 그녀의 아버지는 딱 그런 낱말들의 열거로 완성될 수 있을 또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어서 오게. 처음 뵙겠네. 이 애 애비되는 사람일세. 적절한 위엄과 적절한 예의를 뒤섞어 존대와 반말의 비빔밥에 얹어 적당한 친근감과 적당한 거리감을 보여주는 그 단 세 마디에 놀랍게도 유부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어, 내가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만다. 정말로 압도적인 레벨 차이, 경험치가 부족하다. 이제 고작 서른을 갓 넘긴 그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다. 정신을 번쩍 차려야만 할 보스 중의 보스를 만났다.
자, 모두 들지. 라는 말과 함께 아홉마리의 닭은 일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한다는 그녀만 주먹만 한 약병아리를 깨작거리고 있을 뿐 다들 맹렬하다. 닭을 뜯는 모습이 우아할 턱이 없으련만 앤틱풍의 식탁에 둘러앉아 이루어지는, 아마도 도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화려한 저녁 식사는 그조차 고상하고 품격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 대박증권에서 일한다고? 예 그렇습니다. 아무리 푹 삶아도 닭고기는 다른 것에 비해 좀 뻑뻑하다. 유부는 목이 막혀오는 느낌에 애꿎은 물만 들이켠다. 대박증권이면 맡기는 일마다 대박을 쳐주겠군 그래? 농담인듯 싶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나누어지고 쪼개져 가는 닭의 파편들. 부친께서는 뭐 하시는 분이신가? 학교에 계십니다. 학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십니다. 아, 선생님이시구먼. 어느 쪽? 예, 사학입니다. 신라사를 전공하셨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하. 요즘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유행 아닌가. '주몽'에 '연개소문'에 또 '대조영'까지……. 줄을 잘못 서셨네. 이번엔 농담인가? 농담이다. 그제야 그녀의 가족들은 하하 호호 웃는다. 유부도 따라 웃는다. 식구가 많아서인지 집이 넓어서인지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되돌아온다. 호호 하하. 그러고 나서는 다시 적막한 침묵. 그러는 동안에도 열여덟 개의 쇠젓가락은 닭의 가슴을 찢고 천천히 주리를 튼다.
요즘 우리나라 참 큰일이야. 다시 그녀의 아버지가 운을 떼었다. 아마츄어들이 너도 나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서 말이야. 그래선 안되는 건데. 그 옛날 감옥 한 번 다녀온 것을 가지고 민주투사가 되는 양 위세나 떨고. 과거사를 청산합네, 친일파 후손을 색출합네, 난리 법석을 떨고. 아무래도 백숙을 먹으면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걱정이 참 많다네. 지금 시국이 어떤 때인가.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길목 아닌가. 길목. 여기서 거꾸러지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중진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인데 말이야. 역시 백숙을 먹으면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모두의 분위기가 엄숙해져서 유부 역시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작은 아버지가 나서서 맞장구를 쳐준다. 맞습니다. 형님. 앞장서서 나라를 끌고 갈 귀한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선 안되는데 요즘 다들 개혁이다 뭐다 쓸데없는 짓에 손발을 꽁꽁 묶어놓고. 이래서야 어디 양놈들이랑 경쟁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역시 백숙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임에도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는 그녀의 아버지. 길길이 날뛰는 적막의 요정(妖精)들과 쇠모루보다 무거운 식탁 분위기와 엄숙히 찢어지는 잘 익은 닭의 피맺힌 절규(絶叫).
그런데 다들 그거 봤어요? 그녀의 고모 말이다. 미혼 여성들이 선호하는 신랑감 순위 말이에요. 결혼정보회사에서 조사를 하여 열세 등급으로 나누어 놓았다지 뭐예요. 아닌 밤중의 호들갑이다. 열세 등급이나 돼요? 그녀의 숙모가 맞장구를 친다. 그래서 1등급은 뭔데요? 판검사죠. 판검사. 달리 뭐가 있겠어요. 의사는 1등급이 아닌가? 한의사인 그녀의 숙부가 하는 말이다. 의사는 2등급이에요. 변호사랑 같이. 개업을 하면 2등급이고 개업을 안 했으면 3등급. 당신은 한의사잖아요. 한의사는 따로 있나? 한의사는 4등급이에요. 뭐야? 한의사는 개업 못한 의사보다 못하다는 거잖아? 치과의사도 4등급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럼 그다음은 뭔데요? 회계사쯤 되면 5등급, 행정고시 외무고시 패스한 고급 공무원이 6등급, 변리사가 7등급, 뭐 그런 식이죠. 거의 다 전문직이네. 대기업 평사원들은 어디에 나오나? 대기업 대리급 이상이 9등급. 그 이하나 중소 상장 기업 대리급 이상은 11등급. 7급 공무원이 10등급. 그럼 마지막 13등급은 어떤 사람들인데? 연봉 이천 이상의 보통 회사원들이죠. 연봉 이천? 설마 회사 다니면서 그것도 못 벌려고. 에이 설마가 아니라 그럴 사람들도 있다니까요. 작은 회사 다니면 처음엔 연봉 이천도 간당 간당하죠. 게다가 거기서 세금 떼고 뭐 떼고 뭐 떼야할 테니… 뭐 그렇다면 그렇겠지만. 만약 연봉 이천도 못 벌면? 그 아래로는 등급도 없지요. 허허. 무섭구먼. 하긴 그런 남자랑 누가 결혼하려고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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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아버지는 이 신랑감 직업 선호도 조사, 어쩌고 하는 대화에 끼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닭을 찢고 국물에 밥을 말고 있었다. 바짝 긴장해 있는 유부에게는 그것이 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런 속물적 분류법에 동의를 표한다던가, 반대로 '요즘 세상 말세야' 식의 한탄조를 뿜어 주었다거나, 아까처럼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던져 주었더라면 이만큼 부담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닭만 뜯었다. 닭의 살을 바르고 닭이 우러난 국물에 밥덩이를 넣고 천천히 뭉개었다. 침묵이 두려웠다. 연봉 이천을 간신히 넘는 그는 위의 신종 카스트 제도에 따르자면 13등급에 위치할 것이었다. 13등급, 위로 열 두 개의 등급이 층층이 올려 쌓여 있다는 뜻이다. 혹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이 나를 의식해서가 아닐까? 설마 그럴 리가. 주눅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유부는 이름처럼 우유부단하기 때문에 균형이 맞지 않는 평균대 위를 걷고 있기라도 하는 듯 마음이 불안하였다. 유부는 태어나서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부잣집 외동딸과 만나는 종류의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부잣집 외동딸의 집에 인사를 왔을 때 이만큼 숨막히는 침묵을 견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서 유부는 그녀를 찾는다. 그녀 역시 이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닭을 뜯는다. 닭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결을 따라 찢어진다.
켁,
아무리 푹 삶아도 닭고기는 다른 종류의 고기에 비해 좀 뻑뻑하다. 그 뻑뻑한 살덩이가 유부의 숨구멍에 걸렸다. 켁켁. 그 조밀하고도 단단함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켁켁켁. 무슨 일이에요? 모두들 유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유부씨? 왜 그래요?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려고 한다. 물을 좀 가져와. 그녀의 고모는 냉장고를 열고 보리차를 꺼내 따른다. 켁켁켁켁. 유부는 벌떡 일어난다. 밖으로 나간다. 화장실에 가려고요? 그녀가 부리나케 쫓아온다. 켁켁켁켁켁. 유부는 계속 걷는다.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화장실은 그 쪽이 아니라고요. 뒷통수 어딘가에서 그녀의 외침이 맴돈다. 달린다. 켁켁켁켁켁켁. 문을 열고 징그러운 징검다리를 한 달음에 뛰어 넘고 개가 짖든 말든 무시하고 견고한 나무 문을 열고 성지에서 벗어나 아까는 오르막길이었던 내리막길을 달린다. 올라갈 땐 뒤지게 길었는데 내려갈 땐 훨씬 짧게 느껴진다. 목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런지 다리가 더 빨리 움직인다. 평생 이렇게 빨리 달려 본 일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길거리의 누군가가 그를 따라 달려온다. 이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있다니 아마 칼 루이스쯤 되는 사람인가 보다. 그리고 말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게요? 몰라. 그런 거 몰라. 미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스위스도 아니고 우리나라는 더더욱 아니에요. 유부는 퉁명스럽게 되묻는다. 그럼 어딘데? 칼 루이스가 답한다. 바누아투예요. 바누아투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바누아투? 그게 도대체 어디야? 칼 루이스가 답한다. 몰라요. 나도. 유부가 되묻는다. 거기에 텔레비젼이 있답니까? 칼 루이스가 답한다. 그걸 모르겠어요. 그럼 자동차가 있답니까? 헉헉헉. 글쎄요. 사진을 보자면 자동차가 있을 것 같은 동네는 아니던데. 그럼 웹 서핑도 할 수 없겠네? 헉헉헉. 아마도 그럴걸요. 유부와 칼 루이스는 쉬지 않고 달리면서 대화를 주고 받는다. 그런데 바누아투? 헉헉헉. 그게 도대체 어디야? 헉헉헉. 칼 루이스가 답한다. 몰라요. 나도. 그런데 이 질문 방금 하지 않았어요? 유부는 머리를 긁적인다. 미안해. 워낙 숨이 차서 정신이 없어. 그건 그렇고. 헉헉헉. 바누아투가 어디건 무엇이건 어디에 붙어있건, 바누아투 사람들은 왜 행복한지 어떻게 행복한지 정말 궁금해지네. 헉헉헉. 저도요. 아주 궁금해서 밤에 잠이 안 와요. 칼 루이스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만약 알게 되면 이리로 좀 연락을 주세요. 유부도 명함을 건넸다. 혹시 형씨도 알게 되면…
우유부 (31, 회사원)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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