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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두고보자 마산댁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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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존재만으로도 다른 이를 압도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마산댁처럼 말이다. 남자는 처음 그녀를 마주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용수철처럼 곱슬거리는 파마머리에, 음향대포처럼 강력한 웃음소리에,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꿈틀거리는 입꼬리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의 형상을 지닌 눈초리에, 폭풍처럼 휘날리는 무지개색 월남치마에, 더 이상 잃을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을 정도다. 종종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용솟음치는 고수의 기에 눌려 자기도 모르게 움찔 뒷걸음질치는 하수들이 나온다. 심지어 고수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어떤 짓을 할 의도조차 없었는데도 말이다. 당시 남자의 기분이 딱 그랬다. 움찔하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가능하기만 했다면 정말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락트-인 신드롬’ 환자로 병원 침대에 4년째 누워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마산댁은 프리랜서 간병인으로 남자를 간호하러 왔다. 그 남자의 가족들 중 일터에 나가지 않고 간호 전선에 뛰어들어도 될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락트-인 신드롬'이란 다른 말로 감금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는 없음에도 여전히 심장은 뛰고 뇌는 생각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쉽게 말해 뇌와 몸의 대화가 끊어진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대뇌와 소뇌는 정상이나 뇌간의 일부가 손상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는 것 뿐이었다. 슬프게도 그 밖의 많은 일들이 불가능해졌다. 만지고, 말하고, 웃고, 울고, 먹고, 마시고, 걷고, 달리고 등등. 어린 시절 남자는 산 채로 관에 갇히는 악몽을 종종 꾸고는 했다. 악몽 속에서는 눈을 떠도 깜깜했고 눈을 감아도 깜깜했다. 누운 채로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또한 꿈이 괜히 꿈이 아닌 관계로 아무리 소리지른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울다 소리지르다 울다 소리지르길 반복하다가 지칠 무렵이 되어야 다행히 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꼭 지금 남자의 처지가 그랬다.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더 이상은 깨어 돌아갈 현실이 없다는 정도랄까.
  담당 의사는 그에게 눈깜박임으로 의사를 표현하도록 주문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눈깜빡임 한 번은 <예>이고 눈깜빡임 두 번은 <아니오>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제 이야기가 들립니까?
  남자는 한 번 눈을 깜빡거렸다.
- 제가 이 방에서 가장 잘생긴 의사라고 생각하십니까?
  남자는 두 번 눈을 깜빡거렸다. 

*

  물론 이런 식의 의사소통이 수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대단히 불편하고 번거로운 것이 사실이다.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유일한 방법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눈을 깜빡거리고 눈동자를 움직일 수 있음은 실로 다행한 일이었다. 눈은 이제 그의 눈인 동시에 혀이기도 했다. 눈이 혀보다 웅변적일 수 있다는 그 옛날 유명한 누군가의 지적이 새삼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몇 년 전 대충 보고 말았던 ‘잠수종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2007)’라는 영화 역시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영화 속 남자와는 달리, 다행히 남자는 두 눈을 모두 깜빡일 수 있었다. 비교적 괜찮은 거리감과 입체감으로 사물을 보고 있었다. 만약 눈깜박임에 익숙해질 수만 있다면 영화 속 남자보다 풍부한 표현이 가능할 것이었다. 익숙해질 수만 있다면.


  운동능력을 상실한 남자의 몸은 다양한 차원에서 남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가만히 누워있는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는 다른 환자들보다 손이 덜 가는 편이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기에 더더욱 상시 손길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사람의 정신 역시 근육과 같다. 사용하는만큼 늘어나고 사용하지 않으면 줄어든다. 남자는 사회에서 멀쩡한 몸으로도 감금증후군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다. 소외, 고립, 따돌림, 왕따, 전따, 은따 등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세계와의 소통 방법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 차츰 정신의 퇴화를 겪는다. 생각할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는 남자에게 대화를 걸어 정신이 반응하도록 일은 무척 중요했다. 남자의 가족들이 애써 마산댁과 같은 숙련된 프로페셔널 간병인을 데려온 이유다.

*


  마산댁의 경력은 과연 화려했다. 보통은 알선 업체를 끼고 들어가기 마련인 다른 간병인들과는 다르게 마산댁은 직접 환자 가족들에게 이력서를 뿌린다는 사실도 독특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걸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들은 잊을 수가 없을만큼 감탄스럽게 작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맡았던 환자의 77.8% (뇌사판정환자 포함), 환자 가족의 83.8%, 같은 병실 환자 가족의 92.3%가 무척 만족했다는 상세한 통계가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의 강력한 기능으로 구현되어 있는 대목에서는, 어우 정말, 모두가 할 말을 잃곤 했다. 그녀의 간병을 경험해 본 사람들의 추천사도 있었다. 2001년 마요병원에서 그녀의 신세를 졌다는 양산박 할아버지는 "비록 당시 6개월 이상 의식은 없는 상태였지만 마산댁이 항상 주변에서 따뜻하게 돌봐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읍니다"라고 고백했다. 2003년 자기 환자를 성심껏 돌보는 마산댁에게 감명을 받았더라는 문사철 비뇨기 전문의 역시 "간병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올 여름 단 하나의 선택 ★★★★"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마산댁은 남자 가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자의 아내가 오케이를 했고 딸도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남자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렇다. 그냥 지켜보았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간병인 따위가 누구건 관심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이 감금상태에서 벗어나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가족들이 자길 간병인에게 맡기지 않길 바랐다. 일 따위 그만 둔다고 당장 굶어야 할만큼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간병인이 아니라 가족들이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시간이 더 흐른 다음에야 어쩔 수 없겠지만 최소한 한두 달 만이라도. 하지만 가족들은 일터로 돌아갔고 그는 간병인 아줌마, 마산댁과 단 둘이 병실에 남겨질 수 밖에 없었다. 둘이 남기가 무섭게 그녀는 다짜고짜,
- 조지 클루니라고 불러도 되지?


  남자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못했다. 다짜고짜 무슨 얘기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마산댁은 그걸 못봤다. 다시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마산댁은 그것을 동의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그 날부터 남자의 이름은 조지 클루니가 되었다. 줄여서 조지라고 부르는 날이 많았다. 조지 클루니는 마산댁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였다. 남자는 조지 클루니를 딱히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멀쩡한 자기 이름을 두고 조지 클루니라고 불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뭐든 자기 멋대로 해버리는 마산댁의 막무가내식 행동이 거슬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남자를 조지 클루니라고 불렀다. 
- 조지 클루니, 잘 잤니?
- 조지 클루니, 밥 먹자.
- 조지 클루니, 우루루루, 사람 알아보나?
- 내가 하루에 소변은 세 번만 보라고 했니? 안했니?
  심지어 환자복을 갈아 입힐 때는 바지를 들추며 이런 말까지 했다.
- 방가, 리틀 클루니!


  남자는 절망했다. 간병인 아줌마의 노리개로 전락한 자기 신세가 서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눈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조지 클루니 같은 명배우라도 아마 눈동자 연기 혹은 눈깜빡임 연기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남자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눈에서 레이져를 쏠 수 있어 저 미친 여자를 혼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다시 이런 생각까지 했다. 차라리 총구를 입에 쑤셔넣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감스럽게도 역시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남자의 망막에 맺힌 절망을 마산댁은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 우리 조지, 완전 심심하구나!

*


  마산댁은 남자를 어린아이 대하듯 다루었지만 실상 남자보다 연배는 아래로 보였다. 만약 그가 예전처럼 멀쩡히 정력적인 사업가로 살아가는 중이었다면 절대 이런 상황은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이 사회 먹이사슬의 상부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졸지에 먹이사슬 최하단에나 있을 법한 여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구나. 그런 여자의 노리개가 되고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분했다. 한탄이 절로 나왔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음에도 몸이 떨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분명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그는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병원에 들린 가족들에게 '제발 좀 간병인 아줌마를 바꿔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코로 튜브를 넣어 양분을 받아야 하는 남자의 굳은 몸으로는 그 깊은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웠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동자 깊은 곳에 그 서러움을 떠오르게 만드는 것. 가족들은 그 슬픔을 발견하고 잠시 가슴 한 켠이 찡해옴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것이 '제발 좀 간병인 아줌마를 바꿔달라'는 신호임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럴 수록 간병인 아줌마에게 간절히 마음을 열었고, 또 마산댁 역시 가족들 앞에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 심려가 크시죠, 사모님. 하지만 조금만 힘을 내세요.
- 고마워요, 아줌마.
- 그나저나 사장님이 참 미남이세요. 이런 유능하고 멋진 분이 이렇게 계시면 안되는데.
  마산댁의 높은 평점을 비로소 남자의 가족들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남자는 답답했다. ‘그게 아닌데, 지금 저 여자에게 속고 있는 건데.’ 남자는 할 수만 있다면 낮시간의 사정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아내가 남자에게 물었다.
- 여보, 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남자는 <응>의 뜻으로 눈을 한 번 깜박거렸다.
- 그게 뭔데요?
  아내가 대답을 기다리는 걸 본 남자는 힘이 빠졌다. 그냥 말할 수 있다면 잘도 이러고 있겠다. 남자의 아내가 문제를 깨닫기까진 5분이 걸렸다.
- 아, 그렇죠. 그렇게 물어보면 안되죠. 이제 알겠어요. 아파요?
  남자는 <아니>의 뜻으로 눈을 두 번 깜박거렸다.
- 추워요? 아님 더워요? 
  남자는 <아니>의 뜻으로 눈을 두 번 깜박거렸다.
- 그럼 간호사를 불러다 줄까요?
  역시 두 번 눈을 깜박거렸다.
- 뭐지? 정말 모르겠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내의 모습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


  가족들이 모르는 마산댁의 실체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이 구역 친목대장 놀이.
- 호호호호호, 이것 좀 먹어봐요. 이게 진짜 홍삼을 갈아 넣은 거라서 피곤할 때 마시면 몸 안의 피로가 싹 풀린다니까.
  남자의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며 들고 온 음료수를 다른 환자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며 하는 소리다.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는 생색에 남자는 지쳐버렸다. 그걸 받으면서 고마워하는 사람들까지 괜히 밉고 짜증스러웠다.
- 고맙습니다. 잘 마실께요.
- 나한테 고마워할 것 없어요. 저 남자 거니까. 암튼 지루한 병원생활에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못 버텨요.
- 저 분은 어떤가요? 많이 안 좋으신가요?
- 그냥 뭐 식물이죠. 배만 볼록하게 튀어나온.
- 지금…… 안 주무시는 거 아니에요?
- 괜찮아요. 지가 뭘 어쩌겠어요.


  남자는 처음엔 귀를 의심했고 다음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 쥐었다고 생각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요컨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의 의문이다. ① 마산댁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다 높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② 보통 사람들보다 인간 존재를 더 경외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③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자의 고통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도대체 이건 뭐 초딩도 이런 초딩이 없다. 철 없어 하는 짓이 아니라 시간 때우며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마음이라는 점에선 초딩보다도 못하다. 사업하던 사람이 속물성을 논하는 것이 정당하다고야 못하겠으나 그래도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남자는 믿었다. 세상에는 그렇게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따뜻하고 인간적인 분들이 훨씬 더 많으리라고 말이다. 다만 그런 경우 저런 여자가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점에서, 남자는 신을 진심을 다해 저주했다. 그것도 모르는 가족들은 마산댁에게 늘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아니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다 돈 받아가면서 하는 일인데.)
- 아줌마, 미안해요. 힘들지 않으세요?
- 뭘요. 사장님께서 아주 얌전히 계시는 걸요. 
  오케이. 거기까지. 방금 그 말이 선을 넘은 것임은 너무도 자명했다.

*


가족들 앞에서는, 사장님
단 둘이 있을 때는, 조지 클루니
남들하고 수다떨 땐, 그냥 뭐 식물
어떤 게 진짜인지 몰라 몰라 몰라

*


  남자는 <예>와 <아니오>를 넘어 더 많은 표현이 가능하길 원했다. 그래야 비로소 저 악마같은 여자를 눈 앞에서 치워버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가령 영화 ‘잠수종과 나비’에 나오는 남자는 한쪽 눈만 깜빡여가며 책까지 썼는데 자신에게는 아직 양쪽 눈이 모두 남아있지 않은가. 대충 생각해봐도 영화 속 남자보다 곱절은 확률이 높았다. 일단 숙련이 되면 눈깜빡임만으로도 자음과 모음을 나누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왼쪽 눈을 한 번 깜빡이면 '기역', 왼쪽 눈을 두 번 깜빡이면 '니은', 오른쪽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아', 오른쪽 눈을 두 번 깜빡이면 '야', 그런 식으로 말이다. 재활 전문의가 다녀간 후 그는 희망에 부풀었다. 반면 마산댁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 조지, 그냥 편히 쉬지 왜 귀찮게 일을 벌이고 그래요.
  오냐, 두고보자. 남자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까지 날로 먹은 값을 톡톡히 치루게 해줄 참이었다. 


  재활의는 매일 한 시간씩 남자를 찾아왔다. 남자를 가르쳤고 남자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마산댁을 가르쳤다. 또한 의사는 일단 궤도에 오르면 가족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다분히 희망적인 얘기였다. 남자의 관건은 동시에 양쪽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일이었다. 예상보다 쉽지 않은 일이어서 어렵게 만든 문장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짧은 말 몇 마디조차 이렇게 쉽지 않다니. 그는 과거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했었던 성대를 울리고 혀를 놀려 의사를 전달하는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한쪽 눈을 깜빡여가며 한 권의 책을 완성한 영화 속 남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잘 나가는 사업가로 남을 밟고 일어서는 인생,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인생,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인생을 살았던 자기 자신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반성은 반성이고 복수는 복수인 법. 지금 당장 그에게는 해치워야 할 상대가 있었다. 정말로 일주일이 지나자 간단한 의사 표현이 가능해졌다. 일주일간 마산댁에게 수도 없는 굴욕을 당하면서도 남자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곧 찬란한 복수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재활의가 처음으로 마산댁에게 노트를 건넸다.
- 사장님, 받아적을께요. 말씀해보세요.


  의사 앞이라고 감쪽같이 '좋은 간병인 모드'로 돌아간 마산댁을 보니 다시 한번 울화가 치밀었다. 남자는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열심히 깜빡거렸다. 그가 처음 떠올렸던 것은 "쌍"으로 시작하는 욕이 상당수 포함된 거친 문장이었으나 눈깜빡임만으로 된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깨닫게 되어, 표현을 조금 완곡하게 바꾸었다. 마산댁을 열심히 받아적었고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 음, 음, 음, 다 적었어요.
- 한 번 읽어보세요.
- "저…… 주옥같은, 여자 좀 내 앞에서 재워" 라고 하신 것 같네요. 

  아니지, 아니지, 그게 아니지. 남자는 좌절했다. 세종대왕이 원망스러웠다. 어쩌자고 이리도 쓸떼없이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어서 후손들을 피곤하게 만드냐는 말이다. 첫째, 남자는 '주옥'이라는 단어를 의도하지 않았다. 쓰지도 않은 '이응'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자기가 깜빡인 횟수만으로는 '주옥'을 만들 수가 없었으니 조합형이냐 완성형이냐 문제를 넘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둘째, 눈 깜빡이기도 귀찮고 힘든 마당에 잔뜩 골이 난 남자가 친절하게 '여자'라고 두 음절로 지칭해주었을리도 만무했다. 셋째, 남자는 당연히 '재워'라고 말하지 않았다 (‘치워'라고 했을 뿐이지). 남자는 비로소 이 시스템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 받아적어야 하는 사람이 제대로 알아들을 의도가 없는 경우 굉장히 피곤해질 수가 있다는 것. 그 마음도 모르고 마산댁은 즐거워했다.
- 어머나, 사장님 고마워요. 정말 친절한 분이시군요. '주옥같은 여자'라는 칭찬은 또 처음 들어봐요. 하긴 제가 나이 들기에 아까운 여자긴 하죠. 내일 모레 육십인데 아직도 밖에 나가면 다들 아가씨로 본답니다. 게다가 제가 피곤할까봐 걱정까지 해주시니 정말 완전 감동이네요. 사장님, 땡큐. 그럼 전 잠깐 휴게실 가서 눈 좀 붙이고 올께요.

  이마에 뽀뽀까지 했다. 우웩. 물론 남자는 피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남은 인내심의 절반을 모두 사용해야만 했다. 두 눈으로라도 말할 수 있는 처지를 감사해야 함에도 남자는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세 번째 눈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 눈에 '엔터'나 '스페이스 바'나 '왼쪽 화살표'의 기능을 부여할 수 있었으면. 혹은 그 눈에서 레이져가 나갔으면.' 한편 그 옆에서 종이에 뭘 열심히 적고 계산하던 의사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하게 느낀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 환자분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이 ‘저 주옥같은 여자 좀 내 앞에서 재워’가 맞습니까? 
  남자는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물론 <아니요>라는 뜻이었다. 

(2008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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