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빨리에서 생긴 일
낙농콩단

103. 빨리에서 생긴 일

by 김영준 (James Kim)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기원 후 8282년. 아직은 전후(戰後) 폐허 상태였던 빨리우드(Hurry-wood) 국민들 백 명에게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과연 백 년 후 이 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요?” 그중 48퍼센트의 빨리우드 국민(마흔여덟 명이다)이 “그렇다”라고 답했다. 반면 나머지 52퍼센트의 빨리우드 국민(쉰두 명이다)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놀랍게도 긍정적인 마흔여덟 명보단 의연하게 비관적인 쉰두 명의 존재다. 그들은 어째서 조국의 미래에 약간의 낙관과 조금의 환상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걸까? 나중에 가서 꼭 대답에 책임을 지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당시의 '질문'이라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선진국’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는 말이다. 백과사전에는 ‘선진국’을 이렇게 정의한다. “경제 개발이 앞선 나라를 후진국, 개발도상국에 대비하여 이르는 말 (두산백과사전 참조)” 쉬우면서도 은근 아리까리하다. 세계은행의 분류가 다르고 국제통화기금의 정의가 다르며 국제연합의 생각이 다르다. 애매하고 막연하며 사용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뜻이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는 용어임을, 사전조차도 쿨하게 인정한다. 경제 개발에 기준하여 제시되었던 최초의 정의와는 달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근래 학자들의 주장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나 'OECD 회원국 가입 여부,' 혹은 '인간 개발지수'야 분명한 근거가 있으니 그렇다고 칩시다. 도대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종합적' 판단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어쩌면 백 년 전 빨리우드의 그 쉰두 명 사람들은 비관적이거나 생각조차 귀찮아한 게으름뱅이가 아니라 날카롭게 우문(愚問)을 꿰뚫어 본 선지자들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들의 결연한 "아니다"는 '빨리우드는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선진국은 어떤 의미에서의 선진국인가"라는 뜻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오늘날 빨리우드 사람들은 백 년 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룩하고도 아직 자신들의 조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멀었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마흔여덟 명의 긍정 넘치는 꿈과 희망은, 여전히 입증되지 않은 것이다. 


*


  빨리우드 사람들의 국민성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은 ‘급하다’라는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라는 격언을 가졌음에도 그들은 절대 급할수록 돌아가지 않는다. 일하는 것도 빨리빨리, 노는 것도 빨리빨리, 밥 먹는 것도 빨리빨리, 술 먹는 것도 빨리빨리, 건물 지을 때도 빨리빨리, 건물 철거할 때도 빨리빨리. 그 '빨리빨리'를 통해 그들은 고도압축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동시에 모든 게 부실하고 위태한 사상누각의 사회에 살게 되었다. 한 시간 분량의 업무를 두고, 상사는 30분에 끝내 가지고 오라고 닦달한다. 부하직원은 오케이, 25분 안에 끝낼 수 있노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하지만 결국 30분 후 (심지어 25분도 아니다), 그들은 부실할 수밖에 없는 그 결과물을 수정 보완하기 위해 한 시간을 추가로 투자하는 상황에 놓인다. 효율을 추구하던 '빨리빨리'가 비효율의 원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근무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작렬하는 야근 속에 저녁 시간이 사라지고 매일 야근을 하는데도 주말까지 반납하는 기적이 펼쳐진다. 자연히 직장 생활을 제외한 모든 인생이 부실해지고 여가 생활은 꿈도 꿀 수가 없다. 퀵 백(Quick Back)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사회. 음미(吟味)라는 게 사라진 사회. 먹거리의 안전성에 그렇게나 민감한 빨리우드 사람들이 정작 식당에선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걸로 주세요"라고 주문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정크푸드의 위생은 염려하면서 매일 점심을 분식집 저질 김밥과 저질 찌개류 따위로 15분 안에 해결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이는 비단 식사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여가의 음미, 문화의 음미도 사라졌다. 15분 소나기 밥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모든 영역에 15의 법칙이 작동한다. 15페이지 안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책은 거부당한다 (사실 빨리우드 사람들은 오지게도 책을 읽지 않는다 - 세계 최고 수준이다). 15분 안에 눈길을 잡아끌지 못하는 영화 역시 거부당한다. 15초 안에 귀를 유혹하지 못하는 음악도 마찬가지다. 자리 잡고 앉아서 책을 읽는다고나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많은 빨리우드 사람들이 '사치'와 비슷하게 여긴다. 이는 '빨리 빨리'의 조급증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병폐, 다중업무처리(Multi-tasking)와도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다. 빨리우드 사람들은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대단히 능숙하다. 하나의 일에 오롯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비효율'로 정의하기를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들은 어김없이 최소 2~3개 이상의 추가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일터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MSN 메신져로 동료들과 잡담하면서,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간간히 걸려오는 전화도 받아가면서,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야식을 입에 밀어 넣으면서, 엄지를 바쁘게 놀려 문자메세지를 보내면서, 동시에 엉덩이를 긁는 정도는 빨리우드에서는 식은 죽 먹기이다.

  빨리우드의 사람들은 속도 결정권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진득하게 기다려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빨리우드의 거리에는 펭귄처럼 걷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뒤뚱뛰뚱. 뭐가 그렇게 급한지 앞으로만 레밍처럼 전진한다. 남의 생각은, 남의 걸음은, 남의 방향은, 남의 속도는, 남의 벡터는 고려하지 않는다. 부딪히는 일이 잦다. 그래도 서로 미안해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피차 너무 바쁜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해서 규칙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무용한 것이 된다. 건너지 말라는데도 무단으로 건넌다. 바빠서다. '내려가는 곳'이라고 엄연히 붙어있는데 기어코 바득바득 내려가는 사람들을 밀고 올라온다. 너무 급해서다. 에스컬레이터에는 두줄로 탑승하라고 아무리 캠페인을 해도 뛰어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한 줄을 차지한다. 역시 너무도 바쁘고 급해서다. 그런 빨리우드 사람들이 자동차를 만나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 연출된다. 신호가 바뀌어도 무조건 달리고 보는, 사람이 길을 건너도 일단 밀고 들어가 보는, 설사 뜻하지 않게 멈추더라도 정지선을 최대한으로 넘어서는, 일단 사람만 지나가면 신호와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가는, 바로 그것이 빨리우드의 운전 문화다. 언뜻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결코 빨리우드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몰라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알기 때문에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빨리우드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가 정직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정직할수록 손해보기 마련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사소함에 목매는 것이 대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규칙의 준수를 거부하고 무시한다. 혹은 약해보이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급하고 절박하기 때문에 약한 놈들 사정을 일일이 챙길 여력이 없어 - 약해 보이면 도태당하는 것이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한 지난 백 년간의 기억이었다.  

  빨리우드 사람들의 조급증은 정치와 시회의 진보마저 가로막고 있다. '점진적'이란 표현을 수용하기에 솔직히 그들은 너무도 바쁘고 급박하다. 자칭 보수도, 자칭 진보도 서로 의욕만 앞서고 몸만 달아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한다. 그걸 지켜보는 대중들 역시 가뜩이나 없는 시간에 그 난장을 이해할 여유가 없기에 "당장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관두쇼"라고 잘라 말한다. (마치 식당에서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걸로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빨리우드 사람들의 성질머리가 오늘의 사회가 어제보다 나아지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졌다는 뭔가 확실한 '물증'부터 내놓길 압박하다 보니 사회의 모든 변화 역량이 빨리빨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시안적 성과로 집결된다는 것이다. 체질을 개선해야 하는데 근육만 부풀리고 있다는 말씀. 빨리빨리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기술을 숭배하는 빨리우드 사람들은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단 두 가지만을 가진다. 말하자면 0과 1이다. 있으면 있고(1) 없으면 없어(0), 어중간한 것이 제일 싫어. 하려면 빨리하고(1) 안 하려면 관둬(0). 진보하거나 진보하지 않거나. 역시 0과 1이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성장하거나 성장하지 않거나. 0과 1의 디지털 문명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0.3은, 0.5는. 그리고 0.7운 존속하기가 어렵다. 소속을 분명히 해라. 너는 0이냐 아님 1이냐. 빨리빨리 대답해라. 우리 편이냐 남의 편이냐. 그 와중에 0.7이 사라지고 0.5가 무너지고 0.3이 제거되고 0과 1만이 남는다. 무(0)에서 유(1)로 진행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이제껏 수도 없이 그렇게 거꾸러졌다. 반면 유(1)를 무(0)로 무너뜨리란 아주 쉬워서, 일단 1에서 0.01만 무너뜨려 0.99로만 만들어도 빨리우드의 여론은 발칵 달아올라 빨리빨리 0과 1 중의 하나로만 모 아니면 도로 올인하자고 아우성을 치니, 대화와 타협과 토론이 자리 잡을 수가 없다. 지배계급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언론을 조종하고 여론을 호도하여 대중들끼리 싸우게 만들기에 딱 좋은 구조인데, 사실 빨리빨리 사람들은 워낙 빨리빨리 살기에 바빠 자기들이 새로운 유형의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도 잘 모르고 있다. 

  빨리우드 사람들이 0과 1의 이분적 사고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가진 건 오로지 인재뿐, 인재의 제일요건은 얼짱, 몸짱, 맘짱 아닌 기술짱'이라는 그들 특유의 기술숭배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빨리우드는 기술제품의 수명주기가 세계에서 가장 짧은 나라다. 한 가지라도 더 나은 성능을 가졌다면, 조금이라도 더 빠른 처리 속도를 가졌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용향을 가졌다면, 더 우월한 만족감을 선물한다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빨리빨리 바꾼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향상되었거나, 향상되지 않았거나. 선택 또한 오롯이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바꾸거나, 혹은 바꾸지 않거나. 역시 0과 1이다. 기술에의 집착이 물론 그만큼 기술의 발달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만큼 빨리우드의 조급증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면이 분명 있다. 휴대전화와 문자메세지의 편리함만큼 사람들은 더 빠른 연락과 답변에 강박하게 되었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만큼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지 못함을 견딜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째서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는데 그래서 그만큼 시간이 절약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편리한 만큼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빨리빨리 사람들은 워낙 빨리빨리 살기에 바빠 그런 고민조차 해보지 못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비열(比熱)이 낮은 사회, 빨리우드. 빨리 뜨거워지고 그만큼 빨리도 식는 사회. 이러한 경향이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스포츠다. 물론 스포츠에 대한 빨리우드 사람들의 애정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월등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가장 스포츠에 극성맞은 나라보다도 더 극성맞은 열광을 보이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어느 순간이란 국제적인 축구경기, 국제적인 야구경기, 그 밖의 각종 종목의 국제경기를 말하는 것이다. 빨리우드 사람들은 그 결과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자고 일어나면 바뀐다. 오프사이드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빨리우드의 국기로 옷을 만들어 입고 거리로 뛰쳐나간다. 베이스 온 볼스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판정시비에 괴성을 지르고 통곡을 한다. 허나 그런 열성이 스포츠 자체를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실제 그들 안에서의 스포츠란 일부 구기 종목을 제외하고는 진작에 고사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워낙에 사느라 바빠 잔인하게도 외면하던 그들이 드물게 비인기종목에 관심을 가져주는 건 개천에서 용이 났을 때, 특히 그 용이 세계 무대에서 세계 수준이라는 확인가능한 성과를 이루었을 때 뿐이다. 그런 때에는 전 국민이 골프 전문가가 되고 전 국민이 피겨 스케이팅 전문가이다. 빨리우드 사람들이 그런 류의 성공을 드물게 신뢰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랑하는 경제성장의 이유와도 닮았다. 세계무대에서,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맞다. 이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빨리우드는 자부가 없는 사회다. 열등의식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사회다. 슬프지만 그렇다. 자기들 안목을, 자기들 기준을, 자기들 법칙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저 선진의 권위로부터 인정받아야 비로소 좋은 것인가 보다 생각하는 것이다. 고유의 안목을, 고유의 기준을, 고유의 법칙을 확립하기까지의 길고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시간을 차마 견딜 수가 없기에 그렇다. 혹은 결코 선진의 것과 대등한 고유의 안목을, 고유의 기준을, 고유의 법칙을 갖지 못할 것이라 여기기에 그렇다. 


*


  빨리우드를 처음 경험한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그 속도감에 혀를 내두른다. 일상에까지 깊숙이 속전속결의 속도전이 배어들었음에도 너무들 당연시 여기는 것이 이상하다는 얘기다. 빨리빨리, 먹고, 자고, 싸고, 주고, 받고, 키고, 켜고, 말하고, 듣고, 시작하고, 끝내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왜 그렇게 빨리빨리 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그만큼 치열하게 사는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보다 행복한 삶에 있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허나 슬프게도 빨리우드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얼추 먹고는 산다는 나라들 중 최하위다. 국민 대부분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행복하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빨리빨리 죽어라고 달리는 것일까? 사실 잘 모른다. 내가 만난 빨리우드 사람들 중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반은 "다음에 시간 날 때 얘기합시다"라며 명함을 건네며 사라졌고, 나머지 반은 술이나 한잔하자더니 평균적으로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이 일 년에 마실 술을 한 번에 털어 넣더니만 취해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다면 빨리우드에 조급증이 있어 좋을 것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그렇게 애달파하는 빨리빨리 선진국에 도달해야 한단 강박이 더 이상은 과연 선진국이 무엇인지도, 또한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도 모르는 정체의 위기에서 계속 빨리빨리만 외친다고 뭐가 달라질 것인가? 그런데도 빨리우드에서 가장 큰 기업은 방송사들과 손잡고 이런 낯 뜨거운 공익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우리가 빨리빨리를 외치지 않았다면 IT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2008년 05월)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낙농콩단

김영준 (James Kim)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