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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경쟁의 법칙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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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으며 몇 가지 깨닫게 된 진리가 있다. 첫째, 남 등쳐먹는 놈은 끝까지 남 등쳐먹으면서 산다. 둘째, 반대로 당하는 놈은 끝까지 당하기만 하면서 산다. 이러한 속성은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전자에 속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후자가 되는 경우란 없다. 원래 후자에 속했었는데, 아침에 벌떡 일어나 보니 전자가 되는 경우도 없다. 교집합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양쪽 다에 해당된다면 글쎄. 그건 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일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쑥스럽지만 나는 아무래도 후자쪽에 가깝다. 주로 당하는 놈이란 얘기다. 기구한 인생 간단명료하게 압축하자면 이렇다. "학교에서는 학점을 도둑맞았고 대학원에서는 논문을 도둑맞았고 사회에서는 실적을 도둑맞았다. 또한 가족사에 있어 유산을 도둑맞았고 연애사에 있어서 사랑을 도둑맞았다." 한때는 나도 남 부럽지 않게 순진하고 무구하여, 생으로 날 벗겨먹은 도둑놈들이 결국엔 천벌을 받을 줄로만 알았다. 권선징악, 사필귀정, 뭐 그런 옛 이야기의 교훈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게 그렇게 쉽게 결판 나는 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유인 즉, 그들 대부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꽤 나쁘지 않게 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점을 훔쳐간 친구는 좋은 회사에 들어갔고 논문을 훔쳐간 후배는 교수가 되었으며 실적을 훔쳐간 동료는 눈부시게 승진했다. 유산을 훔쳐간 큰 누나는 남프랑스에다 전원주택을 지었고 사랑을 훔쳐간 그 남자는 누구보다 성대한 결혼식으로 내 마음에 빠져나올 길 없는 감옥을 지었다. 다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잔다는 얘기다. 누구도 절대자의 응징을 받지 않았다. 누구도 제 꾀에 제가 넘어가 처참히 추락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권선징악? 그런 건 본래부터 없거나 이루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게 틀림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한 삼사십 년 후에나 영점이 잡힐 세상의 균형이라면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막말로 없으니만 못하지.


  인생의 외통수에 몰렸다는 기분이 들때면 나는 이렇게 항변하고는 했다.
- 놈들이 내 몫을 쌔벼가지만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겠소? 


  이렇게 말하면 남들의 동정을 받을 줄 알았다. 속에 맺힌 한이랄까 울분이랄까,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 말은 남들 보기에 "그냥 나 등신이요"라는 황홀한 고백,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냐, 너는 '등치는 놈'보다는 '당하는 놈'에 가깝구나",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가오는 트롤들에 포위당한 느낌이었다.


*


  당하는 놈은 왜 늘상 당하기만 하는가. 싸우는 법을 이해하지 못해서다. 좋게 말하자면 ‘경쟁의 법칙’이다. 그건 도덕이나 정의와는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당하는 놈들은 대개 이 부분을 혼동한다. 경쟁 또한 옳고 그름의 자장 안에서 동작하리라 믿는 순진함이 그들을 하릴없이 주저앉게 만든다. 다시 말해 이것은 지켜야 할 선의 문제다. 당하는 놈들은 대개 그 선을 상식에 맞추고 절대 그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반면 남을 등쳐먹는 놈들은 상식 밖의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어느 사회에나 상식 바깥에서 동작하는 영역은 있다. 그들은 설사 그런 수단과 방법이 그르거나 나쁘거나 혐오스럽거나 하더라도 절대 괘념치 않고 과감히 실행에 옮긴다. 진흙탕 개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만반의 준비가 갖춘 놈들을 손에 흙 안 묻히고 이길 도리는 없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당하는 놈들이 당하고만 사는 이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 당하는 쪽이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당함을 감내하고 살아갈 인내는 또 없는 놈이다. 툴툴 털어버리고 돌아설만큼 시원한 성격도 못된다. 무수히 부딪히고 깨지면서 당하는 놈의 운명에 맞섰지만, 결국 남에겐 작은 상처를 입히고 나는 큰 상처를 입는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유복한 집안의 자제가 아니면서 사회에서 힘 있는 지위에 오르지 못한 남자가 조직 생활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장사를 시작했다. (직장인들의 대표적인 착각이기도 한데) 일단 자기 장사를 하면서 사장님 소리를 들으면 대부분의 문제가 저절로 사라질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대신 다른 문제가 나타나기는 하겠으나 내가 사장님인데 그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어? 그런 한없이 나이브한 생각으로 시작한 장사다. 분야는 동네 커피숍이다. 꼴에 요즘은 커피 전문점이라고 부르는 분위기이니 기꺼이 편승하기로 한다. 이름은 ‘더 커피 플레이스(The Coffee Place)’라고 지었다. 한눈에 커피숍이라는 느낌이 들면서도 뭔가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라고 와이프가 좋아했다.


  커피 전문점. 허나 그 내용을 면면이 살펴보면 전혀 전문적인 구석이 없다. 프랜차이즈 따위의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비전의 기술과 특단의 레시피를 배워온 것도 아니다. 경쟁적인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도시에서 장사를 하면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작은 시골 마을을 찾아 내려왔다. 상권 분석이라고는 그 지역에 커피 비슷한 걸 파는 가게가 없다는 정도 밖에 하지 않았다. 점포 자리로 말하자면 원래 전파상이던 곳이다. 삼십 년 전에는 연탄가게였다고 들었다. 구불구불 난잡하게 이어진 주택가 골목과 골목 사이에 섬처럼 자리한 가게로 마음만 먹으면 유동 인구를 일일이 세어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손님이라면 동네 주민들에서 미성년자들과 커피믹스 세대를 뺀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 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욕심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다. 이 가게로 큰돈 벌 생각은 없다. 돈 욕심이 있었다면 대학생 여론조사에서 취업 선호도 1위를 차지한 전자회사를 때려치우고 커피나 팔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예 욕심도 없다. ‘찾아라 맛있는 TV’나 'VJ 특공대’가 찾아온대도 하나 반갑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회사 생활 때랑 정반대로만 사는 것. 그러니까 치열하게 치고 박으며 서로 뺏고 뺏기지 않고 사는 것. 조용히 오래, 길고 가늘게 싫증나지 않을 정도로만 사는 것. 쉽지 않은 일이란 사실은 알지만 이 정도 바람조차 쉽게 이루기 어렵다면 글쎄. 정말 이 사회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나의 소박한 꿈을 방해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문구점 김형이다. 처음 김형을 만나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나의 꿈은 심각하게 궤도를 이탈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김씨, 아니 김형은 우리 가게 ‘더 커피 플레이스’가 한창 공사 중이던 때 찾아와 친한 척을 시작했다. 이웃 간의 정이 어쩌고 하는 말로 운을 띄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나 또한 (외지인의 입장에서) 동네 사람을 알아두고 친해져서 나쁠 것 없으리란 생각으로 적당히 받아주었던 것 같다. 그의 문구점 ‘카피 카피 룸룸(Copy Copy Room Room)’는 우리 가게 ‘더 커피 플레이스’와 마주 보고 있다. 상호명에 드러나듯이 문구점에 복사집을 겸하고 있다. 김형은 나보다 네 살 위로 알고 있는데 (물론 확인된 바는 없다) 사전 교감 없이 그렇게 다짜고짜 시작한 형-동생 릴레이션쉽이다. 힘든 일 있음 뭐든 말만 하라는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실제 우리 관계의 작동 방식은 주로 그의 한탄과 푸념을 내가 들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는 했다. 물론 그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자기가 동네 뉴비인 나를 일일이 챙겨주고 있단 식으로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뭐, 거기까진 큰 불만이 없었다. 자기가 해준 것만 기억해고 자기가 받은 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김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김형의 본성에 간섭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 분명한 선만 지켜진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때부터 한 달간 김형은 토요일 저녁마다 삼겹살 세 근에 소주 두 병을 들고 우리 가게를 찾아왔다. 같은 군민이자 자영업자 동지로 정기적인 회합을 통해 친목을 다져야 한단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구 평화를 위해 순순히 따라나서 주고는 했다. 김형이 하는 얘기는, 대개 재미없었다. 되게 재미없기도 했다. 그의 관심사는 동네 처녀들의 옷차림과 같은 아주 사소하고 자잘한 것부터 작금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폭넓고 다양했으며, 연장자에 대한 경의를 담아 감히 단언하건대 대단히 저속했다. 척박한 동네 상권에서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 (문방구 주인이 교육자라면 페스탈로치에겐 신전을 지어 바쳐야겠다) 느끼는 회한이랄까 탄식이랄까 미련이랄까 꼬장이랄까, 하는 것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겨우 삼겹살 세 근과 소주 두 병에 그 모든 잡소리를 들어줘야 한단 현실이 거지 같았지만 정말 하해와 같은 인내심으로 거기까지도 참아주었다.


  본격적인 문제는 개업식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한창 인테리어가 마무리되고 홍보 행사에 열을 올리던 시점의 일인데, 갑자기 그의 태도가 일백팔십도 돌변해 내게 영문모를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긴 이야기를 짧게 정리하자면 우리 가게 때문에 자기 장사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 가게 간판이 무슨 봉황 날개만큼 크고 장대하여 그쪽 가게 간판을 가려버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이거 알만한 친구가 왜 이러나. 커필세. 커피. 그대가 내 바로 앞에서 장사하는 걸 뭐랄 생각은 없네만 하필 커피를 팔면 곤란하지.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우리 가게는 커피 전문점이다. 김형네는 문구점이다. 포지션이 겹칠 리가 없다. 그의 장사와 나의 장사는 포수와 치어리더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겹칠구석이 없다. 그 어떤 극단적이고 창의적인 시나리오도 커피숍이 문구점을 망하게 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 그럼 뭘 팔아야 하나요? 저희 가게는 커피 전문점인데.
  김형은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 모르지. 보쉬 전동드릴?
  개소리도 이쯤 되면 예술의 전당급이다.
 - 형님도 아셨잖아요. 저희 처음 이사 왔을 때부터 커피 장사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김형은 딱 잡아뗐다.
- 아니, 몰랐어. 그댄 나한테 그런 귀띔조차 해주지 않았지. 


  지난 한 달간 나는 3미터짜리 광고판을 세워놓았고, 약 560장의 홍보 전단을 뿌렸으며, 지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일 여덟 번씩 광고를 내보냈다. 김형은 일흔 번쯤 공사 중인 우리 가게에 노크 없이 들어왔었고 열일곱 번의 점심과 여덟 번의 저녁, 그리고 네 번의 술자리를 같이했다. 그때마다 개업 준비 중인 나의 가게는 화제에 올랐었던 것은 당연한 일. 커피라고는 자판기 커피와 다방 커피밖에 모르는 김형을 위해 나는 카푸치노와 카페오레의 차이에 대해 몇 번이고 강의해야만 했었다. 그의 말마따나 은밀히 귀띔을 해준 적이 엄밀히 없기는 하다지만, 내가 알고 그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을 남의 귀에 대고 재차 강조할 필요야 없는 것이다. 김형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기 가게 바로 앞에 커피 전문점이 생길 줄을. 그럼에도 그는 딱 잡아떼고 있으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 광고판 보셨어요? 저희 가게 앞에 세워놓은 그거. 3미터짜리.
- 봤지.
- 머그 컵에 까만 음료가 담겨있지 않던가요?
- 그랬지.
- 그게 뭔 줄 아셨어요?
- 한약.
- 어이쿠야. 그럼 배경 그림에 동글동글한 갈색 알갱이들, 못 보셨어요?
- 봤지.
- 그게 뭔 줄 아셨는데요.
- 구기자.
  그것 참 신장을 보하며 정력마저 돋궈주는, 억지 중의 상억지로군요.


  자칫 화를 낼 뻔했다. 하지만 나는 문명인이고 배운 놈이니 좋은 주먹 두고 말로 풀기로 마음 먹었다.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아무리 억지 대마왕인 그도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 좋아요.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난 커피 장사를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어요. 형님한테 일언반구 언급한 적이 없어요. 어쩌면 의도적으로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리고 짠, 어제 날치기로 개점을 했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팔아요. 형님 뒷통수를 친 거죠. 물론 그렇다고 가정하잔 말입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건가요? 그렇다고 가정할 때 말입니다.
-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가게가 망할 지경이야. 그대 때문에.
- 에이 설마. 참말로 형님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어떻게 우리 가게가 형님네 장사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쪽은 문방구이고 우리는 커피 전문점인데요.
- 내 말이 그 말이네. 그러니 서로 부딪히는 거고 그대가 내 나와바리를 침범한 셈이 되는 거지.
  너무 당당하게 주장하는 걸 듣고 있자니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지. 말도 안되는 소린지.
- 형님, 저희는 커피를 만들어 팔아요. 형님넨 문구를 떼어다 팔고요. 엄연히 다르잖아요. 커피 전문점 생겼다고 공책, 지우개가 안 팔리나요? 죄송하지만 그런 얘긴 들어본 적이 없네요.
  그는 태산과도 같은 심각함을 담아 이렇게 대꾸했다.
- 안 팔린다네.


*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김형의 항의는 계속되었다. 문구점 밖에 의자를 하나 갖다 놓고 앉아서 가만히 우리 가게를 노려보고 있다가 손님이 적은 시간을 틈타 득달같이 달려와 날 못살게 굴었다. 
- 그거 알아? 그댄 나와의 우정을 이용해 먹은 거라고.
- 뭘 먹었다고요?
- 우정.
- 뭐가 어쨌다고요?
- 이 친구 뉘우칠 줄을 모르는구먼. 그대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지.

  다음 날부터 김형은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카드 병정이라도 된 양 커다란 하드보드지를 목에 걸고 ‘더 커피 플레이스’ 앞에 드러누웠다. 경찰을 불렀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지 않았다. 하루 뒤 순경 몇몇이 와서 공짜 아이스 모카 라떼만 얻어 마시고 갔다. 상가번영회장 역시 관여할 생각이 없단 대답만 반복했다. 그들 모두 동네 토박이인 김형에게 호의적이었다. 굴러온 돌의 설움이랄까. 결국 좋으나 싫으나 내 손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써보지 않은 방법이 없었다. 화도 내어봤고 타일러도 봤다. 끝내 꼬리 내리고 사정사정 빌어도 봤다.
- 에휴, 형님. 커피 전문점이니 커피를 팔아야지 어쩌겠어요. 저희도 먹고 살게 좀 봐주세요.
  그러자 그는 슬로우 모션으로 스르르 일어나 앉아 홍콩영화의 주인공처럼 담배를 꺼내물었다.
- 알지.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대가 내 밥줄을 끊어놓고 있는 것을 어찌 두고 볼 수만 있겠는가.
  뭔가 결심했는지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석양 속으로 사라지며 그는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남겼다.
- 그건 그렇고 그대, 자꾸 말 끝마다 문방구, 문방구 하지 말게. 우리 가게는 '오피스용품 전문점'이라네.


*


  김형의 결심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채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은밀하게 휴게음식점으로 영업허가를 받고 시설 요건과 위생 교육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진작부터 진행되어 오던 것인지, 적당한 기름칠로 퀀텀 점프에 성공한 것인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문방구에서 커피를 팔겠다는 김형의 의지는 어떤 관계기관으로부터도 제지당하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시 이 조그만 마을에서는 군청 직원들조차 김형의 편이었다. 나의 항의는 번번이 묵살되었고 김형은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기어코 에스프레소 머신이 들어왔고 창가 쪽으로 켜켜이 쌓여있던 오래된 완구 선반이 사라졌다. 대신 가게 밖에 커피 테이블이 생겼다. 어디서 빌려왔는지 파라솔까지 끼워서 말이다. 또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가로 710 mm 세로 985 mm 짜리 블랙보드를 세웠는데 거기엔 노란색 형광 마커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커피 커피 룸룸

아메리카노 1,500원
까페라떼 2,000원
모카라떼 2,000원
카푸치노 2,000원
카페오레 2,000원

 

  어제까지도 분명히 김형네 가게 이름은 ‘카피 카피 룸룸(Copy Copy Room Room)’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커피 커피 룸룸(Coffee Coffee Room Room)’이란다. 모래요정 바람돌이도 놀라 자빠질 일이군.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 말이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푸치노와 카페오레의 차이도 모르는 남자가 문구점 한쪽에 커피 전문점을 열겠다는데 제지하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와이프도 펄펄 뛰었다. 전직 시 대표 양궁선수였던 그녀가 "앞 집 미친 사이코 새끼, 퍼펙트 골드로 쏴 죽여버리겠다"라며 뛰어나가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십 년 전 여리디 여린 천상 소녀였던 그녀가 이렇게 관운장보다 무섭토록 변해버린 것은 늘상 당하기만 하는 한심천만한 남편 때문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겁날 것은 없었다. 문구점에서 파는 커피보다 그래도 우리 커피가 낫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었다. 우리는 명색이 ‘전문점’이지 않은가. 저쪽 커피를 먹어 본 일은 없지만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무리 촌구석이지만 손님들도 다 알아줄 것이었다. 그럼에도 뭔가 설명하기 힘든 찝찝함이 있었다. 오늘은 김형이 아메리카노를 팔고 라떼를 파는 정도로 공격해오고 있지만 내일은 스콘을 만들고 와플까지 구울지 모른다는 예감이 있었던 걸까? 개싸움을 피하는 이유는 무서워서가 아니다. 결국 개가 되지 않고서는 아니면 이길 수 없는 것이 개싸움이기 때문이다. 김형이 계속해서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조치를 취해야만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또 좋게 말해서?
- 형님, 제발, 제발, 제발요. 정말 이러깁니까?

- 이러기라네. 이 모든 게 그대의 억지에서 시작되었음을 명심하게나.

- 무슨 억지예요.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안 팔면 뭘 파냐고요.
- 모르지, 필립스 전동칫솔?
  이런 예술의 전당. 억지도 적당히 부려야지.

 

  김형과 나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는 서로 마주 보고 자리한 두 가게 ‘더 커피 플레이스’와 ‘커피 커피 룸룸’사이의 전쟁이었고 내 입장에서는 '등치는 놈'과 '당하는 놈'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나는 김형이 상도를 어겼다고 생각했고 김형은 내가 자기 나와바리를 넘봤다고 우겼다. 오지랖 넓은 동네 호사가들은 이 전쟁을 '김의 전쟁'이라고도 불렀는데 김형이 김씨고 나도 김씨였기 때문이다.

 

*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형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화를 내기에 앞서 냉정함을 찾을 줄 안다. 종이를 찾아 테이블 위에 놓고 나와 김형의 주장을 각각 정리해보았다. 그런 내 모습을 한심한 눈길로 지켜보던 와이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주방 찬장 위에 숨겨 놓았던 답배갑을 찾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설은 이렇다.


  김형은 커피 장사를 할 의도가 없었다. 단지 즉흥적으로 나의 개업을 보고 따라하고 싶어진 것이다. 문구 장사는 확실히 요즘 세상에 신통치가 않다. 그 동네 그 자리에서 커피 장사가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가 개업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상권 분석이 끝난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커피숍 때문에 연필, 지우개가 안 팔린다는 강짜를 놓고 복수라는 미명하여 자연스럽게 커피 장사를 시작했다.


  김형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김형은 커피 장사로의 업종 전환을 계획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단지 우연히 나와 시점이 맞아 떨어졌을 뿐이다. 김형은 내가 자기 가게 바로 앞에서 커피 장사를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동네에 새로 온 사람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주었을 뿐이다. 나는 단순히 그의 미래를 좀먹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현재까지 철저하게 말아먹었다. 때문에 나는 김형의 커피 장사에 항의할 자격이 없고 오히려 사과와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지 싶다.


*


  ‘더 커피 플레이스'의 개업일은 12월 7일이었다. ‘카피 카피 룸룸’이 ‘커피 커피 룸룸’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장개업한 날은 12월 21일이었다. 딱 한 달 차이다. 이 기간 전후로 매출 그래프에는 분명한 변동이 있었다. 길게 고찰하고 자실 것도 없었다. 대강 물론 처음 며칠은 개업 효과로 단맛을 봤던 것일 테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면서 차츰 출렁출렁 평균 매상점을 향해 수렴하는 중이었을 게다. 그런데 한 달 후부터 돌연 3분의 2 수준으로 깎였다. 다시 2주가 지났을 때에는 다시 출렁출렁 반토막으로 수렴했다. 결국 누구 코에도 붙이기 어려운 그 작은 시장을 반으로 나누어 갖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 분명했다. 그 사이 얼굴을 익힌 동네 주민 몇몇이 앞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의심은 이내 확증으로 굳어졌다. 진짜,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다. 커피 전문점에서 파는 커피가 있고 문구점에서 파는 커피가 있는데, 같은 가격에 문구점에서 파는 커피를 사 먹는 사람이 있다? 같은 가격에? 왜? 차라리 레스토랑에서 찌개백반을 달라고 하지? 


  와이프가 몇 번이나 활을 들었다가 놓았다. 은퇴한지 십 년이 지났지만 사람만한 과녁을 놓치진 않을 것이다. 인중을 쏘려다가 명치를 맞출 수야 있겠고, 명치를 쏘려다가 인중을 맞출 수야 있겠지만, 어쨌든 맞추긴 맞출 것이다. 원인 제공을 누가했든 사람을 화살로 맞춰서는 아니되므로 나는 관운장의 기세로 출격하려는 그녀를 극구 말렸다. 그랬더니 또 숨겨두었던 담배갑을 찾아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갈수록 줄담배가 늘고 있었다. 십년 전 길에서 담배 냄새만 맡아도 콜록거리며 괴로워하던 그녀가 기관차처럼 죽음의 연기를 뿜어대게 된 것은 늘상 당하기만 하는 한심천만한 남편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서일 것이다. 분명 위기였다. 우리 가게도 우리 부부의 제 2의 인생도. 이 위기를 넘기려면  뭔가 수를 내야겠지만 어떻게? 또 좋게 말로? 


  김형과 나는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 신문을 집으러 나오다가 얼굴을 마주쳤다. 나는 내 가게 앞에서 그는 그의 가게 앞에서. 간혹 호기가 발동하면 그는 길 한가운데로 걸어오며 내게 도발을 걸었다. 꿀리지 않아 보이려고 나도 그와 마주하며 걸어 나가곤 했다. 흡사 오케이 목장의 결투처럼.
- 그대는 아직도 그대의 죄를 모르겠는가?
- 모르겠어요. 누누이 강조하지만 커피숍 때문에 문방구가 망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억지로만 들리네요. 
- 그대는 여전히 뉘우칠 줄을 모르니 답답한 노릇이다. 
- 참 내, 형님, 그럼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팔지 뭘 파냐고요?
- 모르지. 테팔 엑셀리오 컴포트 더블 그릴?
  그놈의 예술의 전당급 개소리.


*


  고민 끝에 특단의 조치로 메뉴 다양화를 시도했다. 전문점 커피와 문방구 커피를 감별해 낼 줄도 모르는 촌사람들이지만 여러가지 골고루 마셔볼 수 있단 식으로 접근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아직 겨울이니까) 티 라떼 세 종류와 (아직 겨울이지만) 프라푸치노 세 종류를 메뉴에 추가하였다. 그린 티 라떼, 타조 티 라떼, 블랙 티 라떼, 모카 프라푸치노, 스트로베리 프라푸치노, 그린 티 프라푸치노, 이렇게 여섯가지다. 솔직히 만들 줄은 몰랐다. 대강 인터넷 검색해서 흩어보고 따라 만들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티 라떼와 프라푸치노의 진가를 제대로 감별해 낼 정교한 혀를 가진 사람은 이 동네에 없었으니까. 뜻밖에 전략이 먹혔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확실히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다음 날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김형이 ‘카피 카피 룸룸’ 앞 블랙보드에 이렇게 적어 내걸었던 것이다.

<신메뉴 개시>

그린티 라떼 2,500
타조티 라떼 2,500
블랙티 라떼 2,500
모카 푸푸라치노 3,000
스트로베리 푸푸라치노 3,000 
그린 티 푸푸라치노 3,000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정신적 통로에 의해, 어쩌면 김형과 나는 아주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작두 타듯 똑같은 메뉴가 하루 사이에 나올 리가 없을테니까. (그런데 푸푸라치노는 뭐람?) 하루 만에 ‘카피 카피 룸룸’의 메뉴 가짓수가 ‘더 커피 플레이스’와 동률을 이루자 선점 우위 효과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또다시 듀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아니 그 듀스 말고. 옥상에 올라가 시위까지 팽팽하게 매겨놓고 가늠자를 만지작거리던 와이프를 간신히 막았다. 남편이 못났기로 와이프를 살인자로 만들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비디오 게임을 가르쳤다. ‘레프트 포 데드(Left 4 Dead)’라는 1인칭 슈팅 게임이었다. 그날부터 밤이면 밤마다 좀비들이 질러대는 괴성 때문에 잠을 설치게 되었다. 십 년 전 파리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연약한 소녀였던 그녀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백만 좀비를 사살하게 된 것은, 역시 늘상 당하기만 하는 미련천만한 남편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나도 내 목소리를 제대로 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싸움닭이 되어야 가족을 지킬 수가 있다. ’커피 커피 룸룸’으로 달려가 문을 뻥 걷어차고 들어가 카운터로 달려갔다.
- 형님,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 그대, 지금 뭐가 너무하다고 말하는 거지?
- 메뉴요. 우리가 새로 메뉴 추가하니까 바로 형님도 따라한 거 아닙니까.
- 그대, 웃기는 소리 작작할지어다. 이 메뉴는 내가 지난 석 달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개발한 것이란 말씀.
- 거짓말 마쇼. 석 달 전에 어디 형님이 커피 장사할 생각이나 했습니까?
- 생각했었지. 그대는 너무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 모르겠지만 그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커피 장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네. 신문에도 요즘 창업 특집 섹션에 많이들 보도되는 내용이지.
- 그 말을 누가 믿는답니까? 메뉴 도둑질이나 하는 주제에.
- 그대 좋은 지적을 해주었다. 푸푸라치노는 그대의 발명품인가. 티라떼는? 그대가 특허라도 냈는가?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이렇게 빽 소리 한 번 질러주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 푸라푸치노가 아니라 프라푸치놉니다. 베끼려면 좀 제대로 베끼던가!


*


  테니스에서 듀스를 깨려면 두 번 연속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법이다. 한 번으로는 게임을 끝낼 수 없다. 나는 모든 메뉴에서 가격을 500원씩 할인하는 아이디어를 내었다. 와이프의 결사반대를 뚫고 강행했다. 바로 다음 날 김형의 ‘커피 커피 룸룸’도 전 메뉴의 가격을 500원씩 할인하여 팔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김형은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자기 전략을 따라하는 거라고 화를 냈다. 다시 듀스. 분명 김형은 나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메뉴를 개발했다. 생과일주스를 추가했다. 딸기, 바나나, 키위, 토마토, 사과. 김형도 생과일주스를 따라했다. 딸기, 바나나, 키위, 토마토, 사과. 또다시 듀스. 오기가 솟았다. 스무디를 메뉴에 넣었다. 딸기바나나, 케일바나나, 케일키위, 시금치사과케일, 망고오렌지캐롯. 김형도 뻔뻔하게 똑같은 메뉴를 내걸었다. 바나나딸기, 바나나케일, 키위케일, 사과케일시금치, 캐롯오렌지망고. 또 다시 듀스. 혈압이 올랐다. 아이스크림을 들여와 팔기 시작했다. 김형도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또 다시 듀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쌍화차, 율무차, 생강차, 홍삼차를 추가했다. 김형도 질세라 응수했다. 쌍화차, 율무차, 생강차, 홍삼차. 또 다시 듀스. 오냐, 해보자. 영업 정지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옥상에 기름솥을 걸어 닭을 튀겨 팔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형 그 미친 놈도 닭을 튀겨 팔기 시작했다. 또 다시 듀스. 아이 염병할, 


  굴레를 좀 벗어나자.


  출혈 경쟁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메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재료비 부담이 눈사태처럼 늘어났다. 냉장고는 이미 과일과 아이스크림과 빵 생지와 생닭으로 터질 지경이었고 팔지 못한 재료는 버리거나 우리가 먹어 없애야 했다. 본업인 커피에 있어서도 신통치 않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한 번 500원씩 할인했던 가격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처음에는 2,500원을 아무렇지 않게 사 먹던 사람들이 일단 500원 할인되었다가 2,500원으로 원상복귀되니 그때부터는 나를 도둑놈처럼 쳐다보기 시작했다. 울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마치 노후 자금을 몽땅 슬롯머신에 털어 넣었는데 레버가 뚝 하고 부러진 느낌이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이! 한편 ‘레프트 포 데드’를 다 깨고 좀비를 다 때려잡은 와이프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울화병처럼 보였다. 아마도 울화병이 맞을 것이다. 가족을 지켜내는 건 가장의 의무. 난 다시 김형과 담판을 지으러 갔다.
- 형님, 댁은 도대체 양심이란 게 있는 놈입니까 없는 놈입니까?
- 그대, 형님에게 말투가 그게 뭔가. 누가 그런 식으로 말해도 좋다고 가르치던가.
- 그딴 거 몰라요. 이판사판입니다. 매일 우리 메뉴 베껴다 따라하는데 뭘 더 어떻게 참습니까?
- 증거라도 있는가? 아니라면 어쩔 건가? 그대 무고죄라고는 혹시 아는가?
- 막말로 우리 가게에 없는 메뉴가 여기 니네 가게에 있는 게 있습니까? 완전히 똑같잖아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 창의적으로 생각 좀 해봐요. 제발 이 딱한 인간아.
- 좋다. 내가 그대에게 나의 권능을 보여주겠다. 내일 아침부터 우린 그대가 상상도 못한 메뉴를 팔기 시작할 것이다.
  다음 날 ‘커피 커피 룸룸’ 앞 블랙보드에는 이런 신메뉴 공지가 나붙었다.

<신메뉴 개시>

홍어삼합


*


  나는 배운 놈이다. 좋은 대학도 나왔고 대학원도 나왔다. 번듯한 대기업도 다녔다. 가방 끈 길다고 자랑할 생각은 없지만 김형과는 노는 물이 다르다는 건 분명하다. 급이 다르다. 내가 저 수준에 맞춰 놀 수야 없다. 나는 교양있는 배운 놈이기 때문에 ‘커피 커피 룸룸’를 따라 홍어삼합을 메뉴에 넣는 유치한 방법으로 경쟁하지 않았다. 대신 휴게음식점으로 허가를 받은 김형이 휴게음식과 거리가 먼 홍어삼합을 버젓이 팔고 있단 사실을 관계기관에 신고했다 (가방 끈 짧은 김형은 이러한 나의 반격을 '꼬질렀다'는 속된 표현으로 정의했다). 결국 '커피 커피 룸룸’는 경고를 먹었고 15일 인가 영업정지를 당했다. 김형이 우리 가게 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걸 보니 속이 다 후련했다.


  바야흐로 이제 경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익명의 신고로 우린 서로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김형은 우리 ‘더 커피 플레이스'가 닭을 튀겨 팔았다는 익명의 제보를 넣었고, 나 역시 ‘커피 커피 룸룸’야말로 문구도 팔고 커피도 팔고 치킨까지 파는 흡사 롯데마트 같은 구멍 가게라고 익명의 제보로 응수했다. 며칠 후, ‘더 커피 플레이스’에서 술을 팔았다는 제보가 있다며 군청 직원들이 다녀갔다. 나는 ‘커피 커피 룸룸'에서는 술을 팔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미성년자한테까지도 술을 팔더라고 익명의 제보를 넣음으로써 멋지게 복수해주었다. 다시 며칠 후에는 위생 시설 기준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화장실에서 커피를 내린다나 뭐라나. 우리 위생 시설이 아무리 허접하기로소니 문방구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깔끔하게 되받아 되돌려 주었다. 저쪽은 화장실이 없는데 급할 때 어디에 용무를 보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마침내 나의 상상을 뛰어 넘었는 일이 일어났다.


  김형은 동네 사람들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커피 장사 방법을 고안해냈다. 어째 내 입으로 설명하기가 꺼려지는데, 젊은 아가씨들이 보자기에 커피를 싸서 ‘커피 커피 룸룸’를 종일 들락거리는 광경이 목격되었노라 돌려 말하면 충분한 설명이 될까. 황당했고, 이상했고, 괜히 덩달아 나까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와이프는 그 자리에 멈춰서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새로운 전략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상당히 뜨거웠다.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동네 남자들이 거진 다 ‘커피 커피 룸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심지어 옆 동네, 앞 동네, 뒷 동네에서도 난리가 났을 지경이니 할 말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동네 고등학생마저도 ‘커피 커피 룸룸’의 독특하고 혁신적인 서비스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강 이런 식의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 누나, 마끼아또 하나 말아줘요!
- 오케이, 동생들. 교실로 갖다 줄까?
- 그냥 운동장으로 갖다 줘요. 체육시간 끝나면 빨고 들어가게!
  아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고.


  뒷목을 잡고 ‘커피 커피 룸룸’로 달려갔다.
- 형님,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촌스럽게 꾸민 아가씨 하나가 껌을 짝짝 씹으며 내 앞을 막아섰다. (보디가드 나셨다.) 김형은 최종 보스라도 되는 것처럼 그 뒤에서 스르르 나타났고 말이다. 그는 어디서 배웠는지 과도 끝으로 이를 쑤시며 한 것 허세를 부렸다.
- 무슨 짓은 무슨 짓이긴 일종의 방판 전략으로 그댈 무너뜨릴 생각이라네. 어떤가?
- 뭔판이요?
- 방판.
- 그게 뭔데요?
- 방문판매.
- 누가요?
- 그대도 보다시피 여기 이 아가씨들이.
- 뭘요?
- 커피, 그리고 기타 등등.
- 어떻게요?
- 보자기에 싸서, 스쿠터에 싣고.
  하느님 맙소사!
- 형님, 지금 이 그림이 말입니다.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요?
- 전혀.


  나는 배운 놈이다. 커피 전문점 대 커피 전문점의 싸움을 막장 다방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김형의 수작에 놀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관계기관에 신고하면 김형이 더 이상 그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 방법도 있겠지만, 순간 뭔가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싸움닭이 되자. 내 가족을 지키자. 나는 천천히 우리 가게 ‘더 커피 플레이스’로 돌아갔고, 벽장을 열어 와이프의 양궁용 활을 꺼냈고, 화살통을 어깨에 들쳐 맨 다음, 결연한 심정으로 밖을 나섰다. (와이프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했다. 와이프는 양궁 시 대표 선수 생활까지 했지만 나는 아니다. 활이라고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인가 '디아블로'인가에서 써봤을까? 하지만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당하는 놈은 언제나 당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트롤은 활로 잡아야 제 맛이다.


  ‘커피 커피 룸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양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혼비백산 빠져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김형을 놓치지 않았고 재빨리 그의 머리를 겨냥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리 명사수라고 할 수 없는 내 손을 떠난 화살은 그의 종아리에 가서 박혔다. (결국 맞추기는 맞추었으니 다행이다.) 김형은 죽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동네 제일의 엄살꾼이니 그럴만도 했다. 김형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는데, 그 성분이 참회인지 분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이 왠지 약해져 일단 화살은 뽑아주려고 했지만, 힘을 제대로 못주는 바람에 대가 중간에서 부러졌다. 이제 그는 아까보다 몇 배로 죽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이게 다 형님 때문입니다. 아시겠어요? 
- 오, 죽겠다. 내 절대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 너는 조용히 문구 떼어다 팔고 나는 조용히 커피 만들어 팔면 서로 평화로울 일이었잖아요.
- 그대 그것이 무슨 궤변인가. 그대의 영역 침범에 맞서 나는 정당한 자위권을 발동했던 것 뿐이다.
  정말 그놈의 그대 소리는. 내가 왜 니 그대야?
- 누누이 제가 말하잖아요.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안 팔면 뭘 판답니까?
- 모르지. 한경희 스팀 청소기?
  아흐, 예술의 전당.


  어쩐지 모든 것이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냥 이런 사람들이다. 내가 평생 마주쳐 왔던 나쁜 사람들처럼.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돌아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했다. 김형 같은 사람과 더 상대하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더 도망갈 곳도 없었다. 애초에 큰 욕심 갖고 이리로 옮겨온 것도 아니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이제 너무 피곤했다. 그냥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나가는 내 등 뒤에 대고 빽빽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김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두고 봐라. 내가 이렇게 물러서나. 그대 이 새끼, 맹세코 콩밥 먹게 만든다. 그댄 내 억울함을 모른다. 평생 너 같은 놈들에게 당하고만 살았는데!

 

  그 말에 덜컥 웃음보가 터졌다. 하긴 이제껏 남의 등쳐 먹는 놈들 중에 자기가 남 벗겨먹고 살았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놈 하나 못 봤다. 정말 한 명을 못 봤다. 죄다 자기들이 피해자란다. 너도 나도 피해자인 세상인데 어째서 평생 당하고만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것 참 이해할 수 없는 이치다.

 

(2008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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