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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그녀의 마지막 5분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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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마지막 5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5분이 마치 5일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의 일생을 정리하는데 5일 120시간인들 넉넉하겠느냐만은 어쩐지 그녀에게는 그 찰나가 충분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평생 혼자였다. 이렇다 할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엔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되는 것. 의외로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런 법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마지막 순간. 막상 일과 커리어에 대한 미련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녀 스스로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반면에 묘하게 엇나간 몇 번의 연인들에 과한 기억은 그녀에게 무의미한 가정법마저 늘어놓게 만들었다. 그때 만약에 그와 잘 되었다면? 그때 만약에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면? 그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아마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일단 유언장부터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 쓰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서 오십대 중반에 유언장은 무슨! 혼자였기 때문에 만약을 생각했던 것이고, 혼자였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경우에 대비해야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반려자나 아이가 있었다면 원룸 오피스텔 욕실의 차가운 바닥에서 그런 꼴로 마지막 5분을 보내지 않았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 일이란 이렇게 참 얄궂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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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한 출판사의 대표로 올해 막 53세가 되었다. 맨 바닥에서 시장을 읽는 감각 하나로 회사를 키워와, 6층 빌딩의 꼭대기 두 층을 차지하는 성공적인 오늘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다. 지금이야 규모가 좀 커져서 좋은 책, 나쁜 책 가리지 않고 모두 취급할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 예전엔 달랐다. 순전히 그녀의 뛰어난 감식안이 만들어 낸 성공이라 할 만 했다. 저돌적이고 날카로운 일터에서의 모습과 달리 그녀의 인상은 부드럽고 온화한 편에 속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호감을 느꼈다. 세련된 옷차람과 우아하고 기품있는 화술로 어딜가나 '여사님' 소리를 들었다. 심지어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를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의 표상'처럼 생각했다. 특히 막 회사에 들어온 젊은 사원들은 그녀를 동경했다. 금세기 초에 피구와 지단과 라울과 베컴을 보듯이, 오늘 날 루니와 카카와 메시와 호날두를 보듯이 경외의 눈길을 보냈다. 그녀가 원룸 오피스텔에 혼자 살면서 저녁은 900원짜리 편의점 컵라면으로 때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루 13시간씩 일하고 새벽에서야 퇴근하는 이유가, 단지 텅 빈 방에 혼자 있기 싫어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한밤중에 샤워 부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는 이유가, 단지 씻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어쩌다 미끄러운 욕실에서 비누를 밟아 넘어져도, 설사 그래서 타일에 머리를 부딪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응급 처치를 해주거나 119에 신고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대로의 존재였지만 사람들이 바라보는 모습과 많이 다른 존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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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에게는 위로 세명의 형제 자매가 있었다. 즉 4남매의 막내였다. 그리하여 다섯명의 조카가 있었다. 다섯 조카는 성격이 모두 제 각각이었다.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 아이들을 좋아했다. 특별히 아꼈다. 난 놈과 덜 난 놈이 있을지언정 하나 하나 다 정이 가는 아이들이었다. 그녀에게는 그 다섯 모두가 자식과 다름없었다. 결국 아이가 없었던 그녀야말로 형제 자매들 중에 가장 많은 아이를 마음에 두고 살아왔던 셈이다.

  변호사를 앉혀놓고 유언장을 작성할 때 그녀는 이 아이들을 떠올렸다. 재산 대부분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고자 하는 것이 평소 그녀의 생각이었지만 조카들에 한해서만큼은 특별한 감정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 부모들이 자식에게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려고 애쓰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다만 문제는 방법이었다. 조카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 돈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꺼림칙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게 고민이었다. 자신이 통장에 찍힌 숫자로 기억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터였다. 게다가 괜히 돈이 빌미가 되어 분쟁이라도 생기면 골치 아픈 일이었다. 분명히 몇몇 헤픈 놈들은 허툴게 날려먹고 말 것이었다. 많이 주면 많이 주는 대로 적게 주면 적게 주는 대로 문제가 생길 것이 안봐도 뻔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그녀는 3천만원이라는 액수를 정했다. 그녀는 조카들이 너무 적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남들이 보기에 너무 과해보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끝에 나온 액수가 바로 3천만원이었다. 3천만원이면 가장 넉넉치 못한 놈에겐 단비와 같은 느낌일테고, 가장 풍족한 놈에게도 싫지 않은 공돈이 생긴 셈이 될 것이었다. 직장인이라면 차를 바꿀 수 있을테고 학생이라면 졸업 때까지 등록금 걱정을 접어놓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미래를 위해 저축에 보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길 따라 자선 단체에 기부하거나 기타 좋은 일에 쓴다면 더욱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세뱃돈을 받은 것처럼, 평소엔 부담스러웠던 긴요한 일에 써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녀는 다섯 조카 모두가 자기 뜻을 알아주길 바랐다. 정확히 진심을 헤아려주리라 생각했다.

  다만 그 유언장을 집행할 순간이 이렇게 빨리 다가오게 될 줄이야. 
  매사에 철두철미한 그녀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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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조카는 그녀 큰오빠의 첫째 아들로 30대 중반에 이미 가정까지 꾸리고 있었다. 그만큼 가장으로의 부담을 가졌고 그만큼 이해타산에 빠르기도 했다. 때문에 변호사가 따로 있어 고모의 유언장을 읽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이상한 기대를 품게 되었다. 사실 진작부터 고모의 재산 규모를 대강이나마 파악을 하고 있었고, 따로 자식이 없는 고모가 평소 자식처럼 여겼던 조카들에게 굉장한 선물을 베풀고 떠나진 않을까, 든든히 미역국까지 들이켜 둔 차였다. 큰 집의 장손답게 그는, 할아버지가 고모에게 물려준 유산과 고모가 출판사를 경영하며 남겨둔 재산, 그리고 그 동안 불어난 이자까지 남김없이 계산에 넣고 있었다. 다섯 조카에게 똑같이 나눠주더라도 최소 1억 5천씩은 되지 않을까? 아마 충분히 그 정도는 될꺼야! 상상만으로도 신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고모가 자신에게 3천만원을 물려주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변호사로부터 전해들었을 때, 첫째 조카는 자기도 모르게 오래된 맥주캔에서 김이 새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고야 말았다. 이어 꽉 조였던 검은 넥타이를 한밤의 술집에서처럼 풀어버렸고 검은 정장 상의와 함께 구석에 던져 놓았다. 여기에 나머지 재산 대부분이 자선 단체에 기부될거란 이야기까지 듣게되자 그야말로 넋을 놓아 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여태까지 혼자 사는 고모한테 보내드린 정이 얼만데! 해도 좀 너무한 거 아냐? 사실이야 어쨌든 실망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추도식이 끝나고 변호사가 사람들을 모았을 때 까지만 하더라도 기분이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거지같았다. 애써 서울까지 올라오며 열심히 견적 냈던 핑크빛 재테크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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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조카는 첫째 조카만큼 약삭빠르지는 못했지만 나이가 나이인만큼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할 줄 알았다. 다른 조카들은 첫째 조카의 한숨 소리를 긴장이 풀린 탓에 나온 것으로 오해했지만, 둘째 조카만큼은 정확히 그 의미를 읽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친형제였으니까. 그는 자기 형을 속물 중의 속물로 생각했다. 한껏 계산기를 두드리며 서울까지 올라온 것을 이미 다 꿰뚫고 있었다. 아마도 병원 앞에 도착해서야 비통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연습을 했을 것이고 지난 3일 동안 그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꾹 참고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그렇다고 물론 그가 자기 형과는 완전히 반대 타입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형이 속물 중의 속물이라면 그는 그냥 속물 정도가 되고 싶었다. 어차피 세상은 99%의 속물과 속물로 오해받는 1%의 나머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애써 성인군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출판사 소유권의 행방이었다. 이제 출판사 대표가 공석이 되었으니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이었고, 그는 바로 그 '특단의 대책'이 바로 자기 자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유인즉 그의 직장이 고모의 출판사였고, 고모의 직원 중 유일한 혈육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이 사업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조카들과는 차원이 다른 안목과 경험을 겸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 그의 고모이자 고용주였던 그녀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래도 조카들 중에서는 네가 가장 사업가로 자질이 뛰어나 보이는구나" 라는 언질을 주었던 것이 그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변호사가 사실상 남들 손에 맡겨질 회사의 운명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허무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당장은 어린 조카의 경험이 부족해보였다면 멀리 몇 년 후를 내다보고 되찾을 '여지'라도 남겨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고모는 도대체 뭐가 그리 급해서 피 한방울 안 섞인 남들에게 기약 없이 회사를 맡겨버렸단 말인가. 순간 그의 무의식은 여러 가지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고모에 대한 좋은 기억을 라면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지하실로 보내버리는 작업과 고모에 대한 나쁜 기억을 굳이 꺼내와 테이블에 늘어 놓는 작업. 특히 그는 갑을 관계에 놓인 다음부터 고모와 있었던 일에 주목하였다. 따지고 보면 남이 아니라서 편했던 부분만큼 남이 아니라서 어려웠던 부분도 많았다. 남이었으면 서로 껄끄러워했을 일도 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야근 수당 없이 야근도 했고 특근 수당 없이 특근도 했다. 고모의 의사에 따라 지저분하고 품이 많이 가는 일도 군소리 없이 도맡아 처리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남겨주는 게 고작 3천만원? 거기다가 회사는 통째로 남의 손에 맡겨버리고? 그러고보니 그에게는 고모의 유산 3천만원이 퇴직금이 다름 없었다. 오! 정말 그러고보니 적어도 너무 적지 않은가! 그렇게 알차게 부려먹고도 달랑 3천만원에 입을 씻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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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조카는 쇼맨십이 강했다. 그녀 작은 오빠의 독자로 집안의 애지중지 속에서 자라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자기를 좋아하게 될런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뻔하다. 자기가 얼마나 고모를 사랑했는지 모두가 알 수 있게끔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필요할 때 눈물을 보일 줄 아는 것은 그의 가장 결정적인 능력이었다. 배우들도 어렵다는 눈물 연기를 그는 정말 잘 할 줄 알았다. 필요한 순간마다 폭포처럼 쏟아낼 줄 알았다. 물론 스물 아홉이나 먹은 남자가 뒤집힌 거북이처럼 바닥을 뒹굴며 질질 짜는 모습이 좋게 보일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자길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을 즐겼다. 가족들이 그의 연기를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그만 몰랐다. 3일 내내 밀대로 바닥을 닦아야 할만큼 많은 물을 눈으로 빼내고, 일곱 번 실신한 것으로도 모자라 꼬박 밤을 새고 식음을 전폐하여 병자처럼 말라갔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으면 친아들인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셋째를 그녀의 아주 젊은 연인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기어코 추도식에서까지 그는 입에 하얀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졌다. '우르르르 헐떡헐떡 헬렐레 하악하악 침질질 꺼이꺼이 중얼중얼 피시시식 하하하하' 등을 비논리적으로 배합한 소리를 뱉었다. 아는 사람들 중 충무로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당장 그를 촬영장으로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얼굴은 눈물, 콧물, 침 범벅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생각, 생각, 생각 범벅이었다. 그 생각이 진심으로 고모를 그리워한 결과였으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고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카드회사가 회원을 생각하는 마음에 견줄만 했다. 눈물과 콧물과 침으로 온 몸을 번들거리는 순간 속에서 그가 꿈꾸었던 것은 자동차였다. '혼다 어코드 2.4ℓ와 도요타 캠리 2.5ℓ 중 어느 쪽이 더 나에게 어울릴까?' 그런 셋째가 고모의 의도에 그나마 가장 만족한 조카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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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째 조카는 그녀에게 단 한 명 뿐인 여조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가장 관계가 소원한 조카이기도 했다. 어려서는 그럭저럭 친구처럼 지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벽이 생겨버린 느낌이었다. 그냥 그 정도. 가끔씩 명절 같은 날에 만나는 친척 어른의 느낌이랄까. 넷째는 이번에도 그냥 친척 어른을 만나는 느낌으로 나타나 그냥 친적 어른에게 보이는 정도의 애도만을 표했다. 대학교 3학년으로 아직 스물 다섯인 넷째는 그래도 사촌 오빠들만큼 머리를 굴리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눈치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빨랐다. 추도식 후 이모의 변호사가 가족들을 모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충 사촌 오빠들의 진도를 따라잡을 수는 있었다. ('다들 딱 봐도 꿍꿍이들이 있으시구만.') 넷째는 그것이 여자만의 직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여자의 직감과는 상관없는, 누구나 대강 눈치챌 수 있는 일이었다.

  넷째 조카는 이모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3천만원을 받게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기뻤던 나머지 하마터면 "쌩큐 베리 감사"라고 말할 뻔 했다. 약간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입꼬리를 따라 용트림을 쳤지만, 다행히 약간 모자란 세 번째 사촌 오빠가 마루 바닥을 뒹굴며 병신 짓을 하고 있어서 아무도 눈치채지는 못했다. 이후 변호사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넷째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후 넷째의 머릿속을 점유했던 생각은 딱 세 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이사. 다른 하나는 등록금. 마지막 하나는 유럽여행. 일단은 지금 사는 거지같은 옥탑방부터 벗어날 참이었다. 옥탑방의 추억을 운운하는 것들은 실제 그런 곳에 살아보지 않았거나 아직 정신연령이 중학생에 불과한 것이 분명했다 (모름지기 옥탑방이란 인류가 영위할 수 있는 다양한 주거 형태 중 가장 거지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여름방학이었다. 당장 방을 뺀 다음에 유럽으로 날아가 한 달을 신나게 여행할 계획이었다. 게다가 등록금! 이번 여름은 등록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첫번째 방학이 될 것이었다. 넷째 조카는 또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뻔 했지만 다행히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도요타와 혼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셋째 사촌 오빠가 아직도 마루 바닥을 뒹굴며 곱사춤을 추고 있는 탓에.

 

*


  올해로 스물 두 살인 막내 조카는 군인이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바로 입대한 그의 최고 관심사는 역시 사회에 두고 온 여자친구. 상황이 그러하니 휴가를 받아 나오는 순간부터 추도식이 끝날 때까지 내내 이모 생각이 아닌 여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나마 내내 일관된 한 가지만 생각했다는 점은 그의 사촌 형들보다 높이 평가해주어야 할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막내의 여자 친구는 완벽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의만을 제외하고는 완벽했단 뜻이다. 완벽하나 신의가 없는 여친이란 안전핀이 고장난 수류탄과 같았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완벽한 여자 친구가 행여라도 군필자와 바람을 피우지나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했다. 그저 한시 바삐 전화를 때리고 달려가 당장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때문에 이모가 남긴 유언이 있다며 변호사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을 때도 확 뿌리치고 달려나가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3천만원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는 달아오른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조카가 제대 후 등록금에 보태쓰기를 바랐을 것이 분명했으리라. 하지만 막내는 이모의 뜻과는 달리 남은 복무 기간 동안 여자 친구를 붙들어 둘 수 있는 '총알'이 생겼음에 기뻐했다. 물량 공세로 여자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날려버리기엔 너무 큰 돈이지만 온실에서 21년, 산골 부대에서 1년을 지내온 막내 조카에게는 그만한 아직 현실 감각이 없었다. 너댓번쯤 선물을 사줘도 충분히 남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모의 추도식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 친구 선물 고민하느라 정신 없는 철부지였다. 역시 가장 강력한 방법은 명품일 터였다. 막내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샤넬, 그리고 루이비통 중 어느 쪽이 여자친구에게 더 어울리는 브랜드일지 고민했다. 명품 가방 장전하고 기분 좋아진 여자 친구가 자기까지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생각을 하니, 그의 은밀한 특정 신체 부위로 자꾸만 피가 몰렸다. '헐, 타이거 우즈. 지금은 이러면 안돼. 이모 유언장을 듣고 있는 중이잖아' 라며 스스로를 엄히 다그쳤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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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언장 공개는 추도식이 진행되었던 교회 안쪽의 사무실에서 진행이 되었다. 조금 아리송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막대한 유산의 행방을 앞에 둔 그 시점에서 그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뿔뿔히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나중에 다시 한 자리에 모이려면 힘들 것 같다는 판단에 기왕 다 모인 참에 속전속결로 해치우자는 의사가 반영된 결과였고, 신도들 중 두 명이 그녀 유언의 공증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가능했던 일이었다. 도리는 아니겠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주일학교용 나무의자를 날라와 사람들은 열을 맞춰 앉았다. 어린이용이라 조금 작고 불편했다. 그녀의 형제, 자매들이 있었고 조카들이 있었다. 그리고 임원급 회사 관계자들 몇명이 참석했고 두 명의 공증인과 목사가 함께 자리했다. 결과는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였다. 장례 비용을 제외한 모든 재산은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조카들에게는 3천만원씩 남겨준다. 회사는 현재의 임원진이 최적의 인물을 선출하여 맡기도록 한다.

  첫째 조카는 애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손해 본 느낌이었다. 둘째 조카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들 손에 놀아날 것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셋째 조카는 바닥에 다시 또 드러누웠다. 닭이 홰를 치는 것처럼 버둥거리며 눈물을 흘렸으나, 실상 그 눈물의 성분은 닭보다는 악어에 가까워 보였다. 넷째 조카는 유럽 여행 스케줄 때문에 정신이 없어 머리가 좀 아팠다. 방학이 너무 짧아 아쉬웠다. 막내 조카는 뜻대로 되지 않는 혈액 순환에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어금니를 깨물고 되도록 슬픈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이윽고 자리가 파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목사는 가족들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며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녀를 잃어서 얼마나 유감인지를 말해주고자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띄엄 띄엄 쭈빗 쭈빗 모여있던 다섯 조카들에게도 다가가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분은 조카들을 참 아끼셨습니다.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들을 생각하셨을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목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5분. 그 짧고도 긴 시간 동안 그녀 마음에 맺혀있었던, 희미하지만 선명했던 장면은 아직은 어린 꼬마였던 다섯 조카들을 데리고 함께 놀이 공원에 갔었던 1993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2008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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