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45. 결혼만은 안돼요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1. 8. 14.

본문

  탁형은 내게 여자친구의 존재를 숨겼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주말마다 서울 집으로 상경하는 나의 생활 패턴을 십분 활용하여 데이트를 즐겼던 것 같고, 그런 상황을 바탕으로 더 오랜 기간 동안 여자친구의 존재를 비밀로  간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우연히 빨래통에서 검정색 꽃무늬 플레어 자켓과 쫀쫀하기는 하지만 남자 다리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치마 레깅스를 발견하여 형님을 크로스 드레서로 몰아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리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세상 참 무섭고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도 하나 틀리지 않은 것이다.


  물론 탁형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축하할 일이다. 당연하다. 나는 싸이코패스도 소시오패스도 아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그냥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이다. 꽤 괜찮은 사람이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꺼이 기뻐할 줄 아는 진실로 아름다운 심성의 소유자다. 나는 기꺼이 그가 35년간의 눅눅하고 퀘퀘한 솔로 생활을 청산하고 하루 빨리 화목한 가정을 꾸미기를 기원한다. 나아가 아들과 딸 구별 말고 되도록이면 많은 자식을 낳아 국력 신장에 기여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닐 뿐이다.

 

*


  현재 나는 지방시에 있는 탁형의 28평 아파트에서 기식 혹은 기생하고 있다. 넉 달째다. 기한은 아직 없다. 탁형은 물러 터진 사람이라서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빌붙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애써 먼저 작별을 고할 생각은 없다. 나는 이 작고 황량한 지방시에 잠시 내려와 일하는 '서울 사람’으로, 어떤 경우에도 지방시에 따로 살림을 내어 정착할 생각이 없다. 지방시는 지방이면서도 집세가 서울 못지 않다. 원룸의 경우 보증금 500만원을 걸고 월세 35만원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사람 살겠다' 싶은 수준인데, 잘은 모르지만 그 정도라면 서울에서도 충분히 좋은 방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닐 수도 있다. ‘서울 사람’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우리 회사는 잘난듯이 자린고비여서 주거 비용에 관한 어떤 언급도 회피하고 있다. 적어도 당장은 보태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겐 그가 단 하나 남은 동아줄이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엮인 이 하나 없는 황량한 도시에서 그의 아파트는 내게 남은 단 하나의 희망이다.


  여자친구의 진실에 대한 울며 겨자먹기식 고백 이후, 탁형과 나의 동거에는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서로의 사적 영역을 공식적으로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 작성된 장장 16페이지에 이르는 개정 동거 계약서는 한 사람이 (그러니까 탁형이) 여자친구분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이 (말하자면 내가) 눈치껏 알아서 자리를 비켜 외출하기로 하는 것을 대략적인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조항은 반대로 향후 내가 연애를 시작하는 경우에도 똑같은 혜택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니, 그러고보면 탁형은 참 관대하고 괜찮은 남자가 아닌가 싶다. 멀쩡한 자기 아파트를 남의 연애 장소로 제공하고 기꺼이 밤거리를 방황하겠다는 집주인이 각박한 요즘 세상에 어디 흔한가. 탁형은 비밀 연애를 들켰다는 사실을 상당히 부끄러워했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살짝 안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왕 들통난 김에 더 이상은 눈치보지 않고 빈번하게 여자친구를 소환하겠다는 의지마저 내비쳤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왜 집주인이 군식구의 눈치를 보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새로운 동거 규칙은 내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첫째로 탁형의 여자친구가 나타나는 주말마다 어차피 나는 운명처럼 어김없이 상경할테니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고, 둘째로 나는 원래 숨길 것이 없는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로 설령 만에 하나 숨길 것이 있더라도 이 작고 황량한 도시로는 절대 가져오지 않을 천상 '서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탁형의 여자친구분이 방문하시는 빈도가 조금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더 이상은 나를 의식할 필요가 없어져 한결 데려오기가 편해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그 분이 언제부턴가 주중에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 조금 의아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탁형은 현관 안쪽 문에 넥타이를 걸어놓았다. 탁형의 아파트는 (외람된 말씀이오나 28평에는 어울리지 않게) 현관이 이중으로 분리되어 있어 문도 두 개이고 열쇠도 두 개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에 신발장과 다용도실을 거쳐 안쪽 문을 하나 더 따서 들어가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넥타이가 걸려 있는 곳은 바로 그 안쪽 문의 바깥쪽 문고리였다. 축 늘어져 혀를 내밀고 걸려 있는 감색/은색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볼 때마다 절로 웃음이 났다. 넥타이를 고르는 탁형의 감각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그 유난스러운 신호 체계가 나를 실소하게 만들었다. 넥타이라니! 알아서 눈치껏 피해주겠다는데! 미리 문자메세지나 카카오톡을 보내줬으면 되었을 일을! 아마도 영화나 외국 TV 쇼에서 보고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이리라. 그런 날이면 나는 잽싸게 구두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잠시 긴장하였던 어린, 아니 늙은 연인들은 현관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탁형의 28평 영지는 지방시의 신 시가지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베란다에 나가면 시청과 교육청이 작은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도시의 심장이 훤하게 내려 다보였다. 공원을 둘러싸고 상업지구와 번화가가 꿈틀거리고 다시 그 사이 사이로 아파트 단지들이 조밀하게 침투한 형상이었다. 지방시의 홍보 관계자들은 (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 꼴을 '한국의 센트럴파크'라는 말로 포장했다. 웃기는 소리다. 그래도 솔직히 지방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명색이 신 시가지라서 서울의 번화가를 축소해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 들고 그러면서도 깨끗하고 유동 인구는 1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정든 고향을 떠나 외롭게 살고 있는 내게 여유와 사치를 선물해 주는 익숙한 브랜드의 익숙한 간판들. 오! 그들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는 나의 외로움을 포근하게 보듬어 주었다. 오! 서울에서 마시던 맛 그대로의 에스프레소 콘파냐여! 


*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확실히 탁형의 여자친구님이 행차하시는 일이 많아졌어.' 

  개정 동거계약서 발효 이후 석 달 동안 벌써 여섯 번이나 나타났다. 주중에만 말이다. 내가 알 수 없을 뿐이지 주말에도 뻔질나게 만났을 것이다. 빈도가 잦아졌다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든 진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든다. '만약에 형님이 그 여자분과 결혼하면 어떡하지?' 괜히 나 혼자 소설을 쓰는 걸 수도 있지만 원래 소설이란 게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닌가. 탁형 같은 쑥맥에게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본인도 그걸 알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 요즘 들어 같은 단지 꼬마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도 수상하다. 아 글쎄, 길을 가다가 애들만 보면 예쁘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어디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유전자가 깨어나서 그의 귀에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아빠가 될, 시간이라고."
 
  나는 은근히 탁형의 의사를 떠보려고 노력했다. 구체적인 생각이랄까 계획 따위가 있는지 궁금했다. 탁형은 펄쩍 뛰었다.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강한 부정 안에서 나는 작은 실마리를 캐치했다. 이 형님이 또 완전히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언제고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형님은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마음의 준비는 해 놓아야 한다. 만약 탁형이 결혼하게 되면 나는 정든 그의 영지를 떠나야 한다. 혹시 형님이 사정하며 붙잡지는 않을까? 혹시 예비 형수님이 천사의 현현과도 다름이 없는 분이어서 군식구의 존재를 너그러이 용납하시진 않을까? 혹시 예상치 못한 새롭고 슈퍼-쿨한 양식의 동거도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외국 시트콤처럼? 아마 어렵겠지?

  현재 나는 매달 탁형에게 15만원의 생활비를 지불하고 있다. 5만원은 관리비 보조의 명목이고 10만원은 공동 생활비 보조의 명목이다. 언뜻 보면 과하지 않은가 싶지만 계산기를 두들겨보면 절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주말을 제외하고 한 달 평균 19일에서 20일을 이곳에서 묵고 있다. 하루로 따지면 하룻 밤에 7천 5백원짜리 객실을 얻은 셈이다. 이 근방 가장 가까운 모텔이 대실 2만 5천원에 숙박 5만원이다 (오해는 마시라. 단지 길에서 나누어주는 전단지를 봤을 뿐이다). 심지어 이 근방 멀티방 야간 정액요금조차 3만 2천원이다. 도도한 솔로보다 구차한 군식구 신세가 더 아름다운 이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은 안된다. 지금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의 지방시 파견 근무가 끝날 때까지 1년, 아니 9개월, 아니 단 6개월, 정 안되면 5.5개월 정도만이라도 형님이 결혼 생각을 미뤄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나도 안다. 이런 나의 바람이 너무도 이기적이고 미성숙하며 또한 몰상식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탁형이 결혼하는 순간 길바닥으로 내몰려서 거처를 알아보아야 할 판인 걸. 아파트 전세는 꿈도 못 꾸고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이 원룸 월세인데, 전술했다시피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5만원은 되어야 나의 높은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다. 보증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월세 35만원이 다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관리비는 또 별도이며 도시가스비도 별개다. 그 순간 인터넷 사용료, 케이블 시청료, 정수기 렌탈비, 공기 청정기 렌탈비, 비데 렌탈비 등등이 사치의 영역으로 올라가버리는 것이다. 나는 탁형을 선배로, 또 친구로 대단히 좋아하고 그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지만 지금은 안된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지금만은 안된다. 절대 안된다. 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시트콤 ‘투 앤 어 하프 맨(CBS, 2003-2015)’에서 찰리 쉰의 연애를 지켜보는 존 크라이어의 심정으로. 아마 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바람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다고만 단정하진 말아주시라. 나란 존재가 탁형에게 짐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까놓고 말해 탁형도 내 덕에 그 동안 적지 않은 이익을 보았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탁형의 28평 아파트는 지어진지 20년이 넘은 노후된 건물에 150세대 남짓한 비교적 적은 세대수로 평수 대비 살인적인 관리비를 자랑하는 곳이다. (내가 은밀하게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인근 다른 아파트에 비해서 평균 5만 3천원씩은 관리비가 더 나온다. 그 부담을 덜어주었던 것이 내가 관리비 보조 명목으로 매달 형님에게 내고 있는 5만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있다고 한 달에 관리비가 몇 천원씩 올라가는 것은 아니므로 탁형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한편으로는 내 덕에 탁형의 생활 수준 또한 한 단계 올라갔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얹혀 살면서 그냥 정수기가 얼음 정수기가 되었고, 그냥 공기청정기가 항 바이러스 필터와 피톤 치트 키트를 장착하게 되었으며, 그냥 노즐 비데가 클린 온열 시트와 콤보를 이룬 은나노 노즐 비데가 되었다. 책상 하나가 두 개가 되었고 의자 두 개가 네 개가 되었다. 매달 생활비 보조 명목으로 내가 부담하고 있는 10만원이 이런 마법을 가능하게 했다. 덩달아 식탁도 풍성해졌다. 두 사람이 신경을 쓰다보니 냉장고도 항상 넉넉하게 들어찼고 그때 그때 식재료며 음료수를 사다 채우는데 들어갔던 비용은 탁형에게 상납하는 15만원과는 별개로 나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었다. 탁형이 혼자 살았을 때는 아침을 걸렀다고 들었다. 그래도 내가 앞치마 두르고 나서서 그래도 겨우 조식 뷔폐나마 입에 칠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이 뷔폐는 미니 크로아상, 턴오버, 머핑, 베이글 등의 베이커리와 커피, 오렌지주스, 자몽주스, 우유, 저지방우유 등의 음료 바, 그리고 멜론, 칸탈로프, 딸기, 파인애플, 포도 등의 과일바로 구성된다.) 와플 기계를 들여 놓은 것도 나였고 네스프레소 캠슐 커피 머신을 사다 놓은 것도 나였다. 죽은 빵도 살린다는 발뮤다 오븐 토스터는 누구 덕에 생겼을까? 물어 입 아프지 않을까? 호텔 미니 바처럼 항상 냉장고에 페리에 두 병과 코카콜라 두 캔과 닥터 페퍼 두 캔과 하이네켄 두 병과 버드와이져 두 병과 오색찬란한 각종 미니어처 양주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매일 체크하고 신경쓰는 사람이 있으니 가능한 일 아닌가!) 그러니 의식주 및 기타 문화생활에 걸쳐 이 황량한 집에 내가 불러 일으킨 혁명은 가히 원시 인류에게 불의 발견에 비할만한 것이라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었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와서 날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겠다고?

*


  오늘도 탁형은 집에서 연애중이다. 안쪽 현관의 문고리에 감색/은색 스트라이프 넥타이가 팔랑거린다. (감색과 은색? 진지하게 정말로?) 이번 달 들어서 벌써 일곱 번째다. 점점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시계를 보니 시침도 7과 8의 사이에, 분침도 7과 8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서울에서 일한다는 분이 정상적으로 퇴근해서 도착하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아니, 자타공인 '서울 사람'이자 매주 서울과 지방시를 왕복하는 사람으로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불가능하다. 보통의 직장인이 한 달에 일곱 번씩 이럴 수는 없다.   

  구두를 운동화로 갈아신고 다용도실의 바구니에서 운동복을 꺼내어 입었다. 다시 나가려다 말고 탁형의 지저분한 아디다스 운동화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검정색 구찌 레더 펌프스를 내려다 보았다. 앞코가 뾰족하고 작고 깜찍한 끈모양의 무늬가 달려 있었으며 우아하게 뻗은 힐의 높이는 4인치 정도? 가격은 내 생각에는 어림잡아 800 달러 아니면 900달러? 형님 여자친구의 취향이나 씀씀이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신발 속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호기심과 악의가 뒤섞인 묘한 감정으로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발로 건드려 그 구두 한 짝을 쓰러뜨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탁형의 여자친구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전술한 것처럼 대개 주말에는 이동 경로가 엇갈려서 서로 볼 일이 없었다. 서울에서 일한다는 그 분은 주말이 되어야 지방시로 내려온다고 들었다. 지방시에서 일하지만 서울에서 사는 나는 주말이 되기 무섭게 (사실은 금요일 오후 5시 59분부터) 서울로 올라간다. 반대로 일요일 오후에는 내가 지방시로, 탁형의 여자친구가 서울로 각각 이동한다. 내가 그녀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일요일 오후 늦게 탁형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오만가지 남자 냄새 사이로 부드럽게 코를 간지럽히는 한 조각의 화장품 향기 뿐이다. (그러니 빨래통에서 의문의 여자 옷을 발견하기 전까지 내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닌 것이다.)

  탁형의 여자친구분은 어떤 사람일까?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궁금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탁형은 내게 그 분을 소개시켜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사실은 단편적인 몇 가지가 전부다. 첫째는 빨래통에서 발견한 청바지 등의 일상복들이다. 사이즈는 55이며 허리는 25인치와 26인치의 중간으로 추정되었다. 둘째는 현관에서 만난 구찌, 프라다, 페레가모, 지방시, 마놀로 블라닉 등 훌륭하고 아름답고 결정적으로 비싼 명품 구두들이다. 사이즈는 230 정도이고 굽 높이는 1.5 인치부터 6 인치까지 봤다. 분류상으로는 스트레토 힐에서 오픈토 힐과 웨지 힐을 거쳐 플랫폼 힐까지 확인한 바 있다. 평범한 운동화 따위는 한 번도 못 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 대단하신 형님의 여자친구는 항상 잘 차려입고 여기에 내려온 다음에 (빨래통에서 발견된 일상복처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지내다가 주말이 끝나면 다시 잘 차려입고 서울로 올라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기기 분석 장비들보다 더욱 예민하고 정교한 나의 코 끝에 걸린 랑방 향수다. 물론 그 전에 안나수이 라뉘드 보헴도 있었고, 엘리자베스 아덴 그린티도 있었고, 발렌티노 도나도 있었기는 하지만 요즘들어 유난히 자주 잔향을 남기는 랑방의 향수가 있는 것이다. 이름이 뭐더라? 과일향 속에 향긋한 꽃향기가 섞여서……. 옛날 여자친구 중 하나가 이 향수를 썼었는데…….  랑방, 랑방, 랑방……,

랑방의 메리 미 (Merry Me).


*


  나의 우려는 불안이 되었고 이내 다시 공포로 진화하였다. 이봐, 존 크라이어, 자네도 내 심정 이해하지?


  보통 금요일 오후엔 회사에서 바로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지방시를 떠나고 싶어서였고, 조금이라도 빨리 서울특별시에 도착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탁형의 아파트로 달려가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탁형이 도착하기까지 2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둘의 관계가 급격히 발전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취하고 싶었다. 이 사람들과 같은 과년한 연인들의 경우 사소한 무드가 강렬한 촉매가 될 수도 있는 법. 로맨틱에서부터 애로틱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도록 미리 심술굿 한 판을 벌일 참이었다. 먼저 냉장고를 열고 신김치와 새우젓 뚜껑을 열어 놓았다. 금방 짠내가 냉장고 밖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다음으로는 빨래통에서 탁형의 양말을 꺼내 거실 쇼파 밑에 밀어 넣어 놓았다. 쉴 틈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 탁형의 또다른 양말을 돌돌 말아 밀어 넣음으로써 양변기를 막아 놓았다. 찬밥을 전자레인지에 60초 데워 우유와 고르곤졸라 치즈와 잘 반죽하여 침대 프래임 아래에 발라 놓으니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여 침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라, 예방 차원에서 침대 협탁 옆 서랍에 과일향 피임 도구과 원 스텝 임신진단키트, 십자가와 묵주, 그리고 성경책을 (혹시 모르니 킹 제임스와 뉴 인터내셔널을 한 권 씩) 넣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거실로 달려 나와 CD 보관장을 열고 약간이라도 야릇하거나 몽환적이거나 끈적한 노래가 담긴 앨범은 모두 꺼내어 가방에 집어 넣었다. TV 스탠드 아래의 DVD 보관장을 열고도 전연령 관람가와 12세 관람가를 제외한 모든 영화를 꺼내 가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맞다! 소돔과 고모라와 진배없는 케이블 TV! 지방 케이블 지부국에 전화를 걸어 서비스를 끊어달라고 사정하였으나, 금요일 밤이라 기사님들이 다들 퇴근하셨다고 하니 도리가 있나. 직접 셋톱박스를 분해하여 부품을 조각 조각 앞 베란다 구석에 숨겨 놓았다. 아! 맞다! 인터넷 스트리밍도 문제다. (젠장, 요즘 애 키우는 부모들은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군!) 모뎀도 마찬가지로 분해를 하여 뒷 베란다 조각 조각 구석에 숨겨 놓았다. 숨 돌릴 틈 없이 거실 스탠드의 전구를 전구색에서 주광색으로 교체하였고, 마지막으로 보일러를 내려 놓았다. 다시 온도가 올라가려면 아마 시간 좀 걸릴 것이다. 제까짓 것들이 추워서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판에 엉큼한 생각할 틈이나 있겠어? 그쯤이면 완벽했다. 서둘러 불을 끄고 문을 잠근 다음에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가 아슬아슬하게 서울행 버스를 잡아 탔다.

  물론 죄책감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달리 방법이 있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야경 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의문이 보슬보슬 떠올랐다. 첫째, 왜 그 여자분이 항상 지방시로 내려오는 걸까? 나는 한 번도 탁형이 서울로 올라가 그 여자분을 만나는 걸 보지 못했다. 혹시 가끔 주말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럴 수도 있었을까? 형님이 서울에 올라왔다가 일요일에 다시 내려가면서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 거라 믿긴 어렵다. (“임마, 나 지금 서울이야. 같이 내려가자!” 이게 그 형님의 스타일이다.) 둘째, 정말로 그 여자친구분은 어떤 사람일까? 탁형의 인물이 워낙 시원치 않은데다가 용기있는 자와도 거리가 있으니 확률상 미인은 아닐 가능성이 크기는 했다. 하지만 그간 목도한 명품 구두의 릴레이로 미루어 볼 때, 집이 좀 살거나 돈을 잘 버는 것 같기는 했다. 다만 확실한 철학과 충성 없이 무조건 명품을 모은다고 취향이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니 진짜 소셜 클래스가 어떤지는 두고 봐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과일-꽃 콤보 향수를 즐겨 뿌리되 탁형의 사정권 안에 있는 나이일테니 30대 초반 아무리 빨라도 20대 후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키는 160 센티미터라고 우기고 싶은 156 센티미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체중은 47 킬로그램이라고 우기고 싶은 52 킬로그램이며, 쓰리 사이즈는 34-25-35가 아닐까 추정된다. (순간 ‘내가 지금 질투라도 하는 건가?’ 란 생각이 들었는데…… 설마! 말도 안돼! 내가 그 인간을? 미쳤다고?) 상기와 같은 추정의 근거가 무엇이냐면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럴 것만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 있는 것이다.


*


  긴 여행 끝에 버스에서 내렸다. 9시 13분. 탁형의 연애를 방해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뺐겼던지 평소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다. 저녁을 거른 탓에 어지러웠다. 터미널 대합실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눈 앞에 탁형이 탁 하고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지방시에 있어야 할 사람이 서울특별시 서초구 신반포로 194에 위치한 강남고속터미널 있는 것이다. 나를 발견한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게다가 한 쪽 무릎을 꿇고 내게 반지상자가 틀림없어 보이는 어떤 것을 내밀었다. 이 또한 어느 영화나 외국 TV쇼에서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하는 것일테다. 
- 형, 여기서 뭐하는 짓이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상자를 열려고 했다. 지방으로 돌아가야 할 지방 사람들과 지방을 막 탈출한 서울 사람들이 뒤섞여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보았다. (쪽팔림에도 레벨이 있다면 이건 올림픽 레벨의 쪽팔림이라 할 만 하다.)
- 창피하게 이게 무슨 짓이냐니까?
  그는 기어코 상자를 열었다. 반짝 빛나는 것이 분명 반지였다. (다이아몬드 반지? 정말로?)
- 지난 번 프로포즈 이후로 네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은 알지만.
  그의 말이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인간이 아무래도 정신이 나갔나보다. 아무리 세상이 고속으로 변했기로소니 고속터미널 한 가운데서 남사스럽게 이래도 되냐는 말이다. 
- 미쳤어? 빨리 일어나. 사람들이 쳐다봐.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를 둘러싼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마치 좋은 구경이라도 났다는 듯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창피해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탁형을 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잘 비켜주거나 잘 비켜주지 않았다. 등 뒤로 탁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어느 쪽이냐? 지킬이냐 하이드냐? 아니면 빌리 밀리건이냐?” 라는 말도 들렸고, “야! 당장 돌아오지 못해?” 라는 말도 들렸으며 ”지방에서 살기가 그렇게 싫어?" 라는 말이 들렸다. 심지어 모양 빠지게 “이거 다이아몬드야, 알아? 0.2 캐럿이기는 하지만!” 이란 말도 했다. 고속 터미널의 사람들이 비웃는 듯 했다. 모든 말이 창피했다. 그래, 싫다 싫어. 난 천년 만년 서울에서 살거다! 댁네 아파트는 직장 때문에 잠시 머무르는 (하루 7천5백원짜리) 값싼 숙박 시설일 뿐이고 난 거기서 평생 살 생각이 없어!

  귀를 막은 듯이, 눈을 감은 듯이, 마구 달리다 발을 삐끗하여 넘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몇 년치 쪽팔림을 오늘 다 겪는구나. 재빨리 일어나 발목을 주무르며 나동그라진 구두를 끌어 모았다. 이런, 굽이 나갔다. 고칠려면 압구정까지 가야하는데. 그러고보니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이 구두의 브랜드마저 오늘 따라서 기분 나쁘게 들린다. 지방시라니! 하필 지방시라니! 나는 엄연히 서울특별시민인데 말이다. 어쩐지 서러워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소매 끝에서 옅은 과일 냄새와 그보단 강한 꽃 냄새가 미풍처럼 퍼져나와 코를 간지럽혔다. 나는 탁형의 집에 두고 온 그 많은 살림에 대해 생각했다. 청바지, 자켓과 같은 일상복에서부터 드레스와 구두와 핸드백까지. (빨래통에서 발견했던 검정색 꽃무늬 플레어 자켓과 쫀쫀하기는 하지만 남자 다리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치마 레깅스도 생각났다.) 탁형의 집에 다시 가서 그걸 찾아와야 하는데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다시 그 집에 간단 말인가? 탁형이 출근한 사이에 몰래 들어가 짐을 싸가지고 나오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의 지방시 파견 근무의 기간 동안 나는 어디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뭐랄까, 세상엔 서러운 일이 너무 많다.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오직 서울 시민으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해주는 에스프레소 콘파냐 뿐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익숙하고 편안한 사치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바삐 걸음을 옮겨 서울의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2011년 08월)

반응형

'낙농콩단 > Season 11-15 (2011-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7. 여기는 섬이다  (0) 2011.10.09
146. 위켄드 업데이트 2  (0) 2011.09.11
142. 스팍과 커크  (0) 2011.05.22
141. 슈피겔 임 슈피겔  (2) 2011.04.24
140. 세번째 클론  (0) 2011.03.27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