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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여기는 섬이다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1.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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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팻 조. 어떻게 그가 볼트와 볼트 사이를 오가는지는 모르겠다.

 

*

 

   그 날의 콘소메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거의 동시에, 혀와 입천장을 모두 델 정도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목구멍 안쪽 깊숙히까지 남김없이 타들어 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하게 욱신거렸다.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에게 말이다 (사실 그 날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보다 '아빠'가 익숙할만큼 충분히 어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쑥쓰러움을 많이 타기도 했다). 


  다음으로 기억 나는 것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오던 묘한 느낌이었다. 차갑지만 따뜻했고, 거칠지만 부드러웠다. 이상한 일이지만 막연히 그런 감촉이며 그런 온도가. 아직 기억이 난다. 그럴리가! 그 난장판의 한 가운데서 그 느낌을 인지하고, 분석하여, 반응하고 어딘가에 기억하였을리가!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당황한 군중은 묵직한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아빠는, 아니 아버지는 팔이 빠질만큼 날 세게 잡아 당겼다. 아팠다. '따라갔다'기 보다 '끌려갔다'는 편이 더 어울릴 상황이었다. 스프 그릇을 엎었다. 콘소메인데도 유난히 질었다. 아버지 손을 잡은 반대쪽으로는 여전히 질퍽히 콘소메 묻은 스푼을 쥐고 있었다. 발이 땅에 닫지 않았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 따금씩 허공을 찼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차기도 했다. 그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그 날, 그 자리의 누구도 그럴 정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형 마트란 모름지기 '나쁜 친구'와도 같아서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내기엔 그닥 적절하지 않다.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 순간 대형 마트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그렇다. (자신있다면 반박해보시라!) 자연 재해든, 좀비의 습격이든, 핵전쟁이든, 테러든 간에…… 하여간 그런 때에 마트에 있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성을 잃은 쇼핑객들 사이에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그 날, 그 자리가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탕이었음을 감안하면…… 꽤 오래 버티기는 했다. 신의 도우심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꽤 오래 버티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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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팻 조의 방문은 언제나 우리 볼트를 들뜨게 했다.

  그가 오는 날 아침의 볼트는 공기부터 달랐다. 언제 고장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화기가, 언제 청소했는지 모를 낡은 필터로 뱉어내는 공기조차도 이상하리만치 신선하고 상쾌하고 설레었다. 팻 조가 온다! 간만에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시간이다! 소비로 비로소 행복해져야 할 때다! 

  팻 조는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처럼 뚱뚱했다. 그리고 흑인이었다. 하지만 징그러울 정도로 살이 찌지는 않았다. 그냥 어쩐지 리듬 앤 블루스를 잘 부를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체형일 뿐이다. 팻 조는 장사꾼이다. 장사꾼이라는 점에서 놀라울 건 없다. 장사꾼 없는 인류의 존속이 가능하기나 할까?

  놀라운 건 그가 일종의 지하 벙커라고 할 수 있는 볼트와 볼트 사이를 오가는 장사꾼이라는 점이다. 우리 볼트 안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용하고, 또 버리는 대부분의 물건은 모두 그를 거쳐서 들어온 것이다. 그를 거치지 않고 들어온 것은 없다고도 표현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바깥 세계와 우리 볼트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다. 

 

*

 

   총 면적 3,176평의 지하 벙커 볼트 151 - 냉장고와 오븐, 샤워실과 수세식 화장실, 심지어 헬스장까지 갖추어진 1,200만 달러짜리 시설. 이토록 훌륭하지만 볼트는 순전히 생존을 위한 시설일 뿐이다. 그렇기에 팻 조의 재림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히 단언하건데, 팻 조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등장하여 팻 조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응당 그랬어야만 하고, 아마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 볼트의 위, 그러니까 지상에는 야콘 밭이 있다. 지금은 어떤 꼴이 나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과거에는 그랬다. 원래 땅 주인이 퇴직금 털어 귀농하며 야심차게 심었다가 시원하게 말아드셨다는 바로 그 야콘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도 야콘 밭은 황량했다. 이미 진작에 핵참사를 맞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그 날이 오고 난 다음에 직접 보지는 못했다. 볼트 안에 있는 누구도 그 날 이후의 야콘 밭을 보지는 못했다 (당연하다. 이젠 볼트 밖으로는 나갈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팻 조라면 오고 가며 봤을 것이다. 언젠가 한두어번 그에게 넌지시 물었던 적이 있다.
- 조. 이 위의 야콘 밭은 어떻게 되었나요? 당신이라면 봤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 난장판이지. 꼬마야. 난장판이야. 그보다 나쁜 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팻 조는 씨익 웃었다.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우리는 2.3 톤의 철판과  25 센티미터 두께의 납판 세 개를 용케도 머리 위에 이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위에 갈아 엎어진 황량한 야콘 밭이 있다. 그 위에 소복히 쌓인 건 이슬도 아니고 서리고 아니고 세설도 아닌, 낙진이다. 과연 이 보다 나쁜 걸 상상할 수나 있을까. 물론 이렇게라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신의 도우심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 날의 사건은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말해 입 아픈 사실이다).

 

A. 새로운 거처에서 낯선 사람들과 뒤엉켜 살아하는 처지가 되었다.
B. 그런데 이 새로운 거처는 조금의 자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회색 콘크리트의 인공 공간이다. 즉, 지하 벙커다.
C. 우리는 이전과 다름없이 숨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삶을 영위했지만 아무래도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A와 B 그리고 C. 주어진 상황이 비슷했지만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게 받아들였다. 새로운 생활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그 날 이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 날을 잊을 수 없는 건 핵전쟁의 공포 혹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날이 바로 고아가 된 날이었다. 물론 수많은 아이들이 나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잊을 수가 없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패밀리 로망스’가 또아리를 틀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려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집착도 당연했다. 기억을 반복하며 변형되고 윤색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고, 맡을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다. 푸드 코트의 핫도그가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젊은 부부의 아기가 울었다. 어린 아이들이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저마다 쇼핑 카트를 쓸떼 있는 물건들 혹은 쓸떼 없는 물건들로 가득 채우고 남의 엉치뼈를 들이 박는 일이 속출했다. 나는 우리 쇼핑 카트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기억한다. 애로우헤드 생수 (1갤런, 6개 묶음), 고농축 다우니 섬유유연제 (129 온즈, 에이프릴 후레쉬 향), 세타필 모이스취 라이징 로션(16 온즈, 3개 묶음), 메디슨 화이트 치아미백제 (2 주 분), 페브리즈 액스트라 스트렝스 (27 온즈, 2개 묶음), 오랄비 치간칫솔 (6개입, 리필용), 존슨 앤 존슨 리스테린 구강청정제 (1.5 리터, 후레쉬버스트 향), RC 콜라 (20 온즈, 6개 묶음), 레이즈 감자칩 (패밀리 사이즈, 저염 클래식), 크리넥스 울트라 소프트 페이셜 티슈 (8상자 묶음), 허쉬 초콜렛 미니어쳐 번들 (18.5 온즈), 네이쳐 밸리 (BOGO, 스위트 앤 솔티 너트), 네슬레 마일로 밀크 코코아 (18.7 온즈), 네이키드 주스 (46 온즈, 그린 머신 푸르트 스무디), 파인애플맛 비타 코코 (11.1 온즈, 24개 묶음)……. 그리고 내 앞에는 콘소메 한 그릇이 있었다. 가지런히 놓여진 스푼과 함께.

 

*

 

 볼트 151의 구조는, 말하자면 원기둥 모양이다. 중앙에 통제실과 관리실이 있고 입주자들의 방이 그 주위에 원형으로 배치되어 여러 층을 이루고 있는 형태다. 2인 1실이 기본으로 하나의 방은 통상 5.6평짜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누구도 감히 정확히 재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졸지에 지하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이 중차대한 판국이라). 단순 계산으로는 1인당 불과 2.8평만의 공간을 할당받은 셈이지만 실제 지내보면 그렇게 협소하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는다. 상당히 넓게 계획되어 있는 공유 공간 덕분이다. 공동 주방이나 와인 바, 오락실 혹은 헬스장 같은 것들이 워낙에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좋은 호텔이라면 아무리 가장 형편 없는 방에 묵어도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그리고 통제실 위쪽으로 길고 어두운 복도가 있다. 그 끝이 바로 오버시어의 방이다.

  오버시어란 이 볼트를 관장하는 직책을 말한다. 이 곳이 학교라면 교장이 오버시어일 것이고, 이 곳이 감옥이라면 교도소장이 오버시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학교도 감옥도 아니므로 오버시어는 교장이나 교도소장 같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손으로 선출한 우리의 대표인 것은 또 아니다. 뭐랄까, 오버시어는 그냥 오버시어다. 이 볼트의 일부 같은 존재다. 오버시어는 볼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관리하고 결정한다. 그렇다고 독재자 같은 존재는 또 아니다. 누군가 규칙을 어기거나 선을 넘는지만 않는다면 어지간해선 남들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하여간 복잡한 남자다.


  팻 조가 우리 볼트를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들리는 곳도 오버시어의 방이다. 소문에 따르면 뭔가 희귀하고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오버시어의 방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크게 상관 없는 일이기는 하다.


  일단 오버시어의 방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오면 팻 조는 중앙 식당에다 짐을 풀어놓고 버번 위스키를 온 더 락으로 한 잔 마신다 (그러고보면 오버시어가 그에게 술을 권하지는 않았거니 싶다). 한 잔만 마셔도 그의 코는 빨개진다. 그리하여 거나하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그는 우리가 한두 달 전에 주문했던 물건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인기 품목은 대개 정해져 있다. 알토이즈, 맨토스 등의 사탕도 인기이고 M&M's, 허쉬 등의 초콜렛도 없어서 못 판다 (기라델리나 린트, 고디바도 아니고 앰엔앰즈에 허쉬?). 남자들은 술과 면도날을 자주 사고 여자들은 화장품과 구두를 산다. '대항해시대'는 이미 몇 백년이나 지난 과거의 이야기지만 여전히 커피나 향신료는 가치있는 상품이다. 생수가 비싸고 과일주스가 비싸며 탄산음료는 더욱 비싸다. 지상의 거의 모든 물이 오염되어 방사능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물지만 책을 구해다 읽는 현명한 사람들도 있다. 그에 반하여 독서가 더 이상은 유의미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더욱 현명한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 믿는다).


  팻 조에게 주문한 물건이 도착하기까지는 한 달에서 두 달 가까이 걸렸다. 긴 시간이다. 그 날이 오기 전, 지상에서의 일상을 살던 우리에게 한 달씩 기다려야 할 물건은 거의 없었다. 직접 상점에서 삯을 치루어 들고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화나 인터넷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배달되어 오는 것들조차 이틀 내지 삼일이면 손에 들어왔다. ‘익일특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머지 않아 ‘당일배송’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내 그게 너무 당연한 시대가 열렸다. 뭘 주문했는데 산간 및 도서지역이 아님에도 일주일 가까이 걸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운송장을 조회했다. 그래도 속 시원하지 않으면 판매자에게 전화를 했고 택배사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택도 없는 일이다. 여기  2.3 톤의 철판과  25 cm 두께의 납판 세 개 아래에서는 말이다. 여기에서 소비자의 위엄 같은 건 썩은 야콘만도 못하다. 이 곳의 주문 및 배송 규칙이란 너무나도 간단하다. 그저 팻 조가 해주기 나름에 달린 것이다.

 

*

 

 그 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변해버린 그 날, 우리는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 작별했고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지하 벙커 '볼트 151'에서 살게 되었다. '볼트 151'은 최고급 시설의 지하 벙커다. 회원비가 비싸서 아무나 들어오지 못했다고 들었다. 

  사실 내가 이 곳에서 가장 어리다. 이 곳에 어린아이라고는 나 밖에 없다. 만약 이대로 30년이 지난다면 이 벙커 안에는 나 혼자 살아남게 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30년씩이나 지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외롭다. 대개는 혼자다. 심지어 혼자가 아닌 순간에도 혼자다. 매일 꿈을 꾼다. 위로받기 위해서 꿈을 꾼다. 이 곳에 들어오기 전 몇 시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내용의 꿈이다. 꿈은 반복되고, 변형되고, 윤색되었다. 이제는 나조차도 꿈의 내용이 실제 있었던 일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그 날의 마트는 휴가철 해수욕장보다 붐볐다. 더욱이 사람들은 성나고 혼란스러워 하는 중이었다. 이 작고 푸른 행성에 되돌리기 어려운 비극이 닥쳤다는 걸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때까지 나는 어떤 안내도 듣지 못했다. 어떤 방송이나 신문도 보지 못했다. 어떤 책임자나 전문가의 설명도 듣지 못했다. 졸지에 콘소메를 떠먹다가 떠밀려 가던 중이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뛰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떤 사람들은 서로 시비를 걸고 주먹을 교환했고 물건을 훔쳤으며 불을 질렀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를 내었다.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좌절과 절망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마치 어디로 가야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던지듯이 나를 차에 태웠고 마트 앞 공터를 질주하였다. 잔디밭을 정복하듯 가로질러 철조망을 들이 받았다. 덕분에 73년형 고물 시트로앵도 잠시 동안 영화처럼 부양하였다. 몇몇 차들이 우리가 낸 길을 따라 허공을 날았다. 흡사 선구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덕분에 흙먼지는 매캐했다. 목이 막혀왔다. 숨 쉬기가 어려워 코를 킁킁거렸다. 손에서 땀이 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는 영화처럼 핸들을 꺾어 차를 세웠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젖은 수건으로 내 코와 입을 감쌌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꼭 막고 있어라.") 물론 당신도 그렇게 하셨다. 역시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트렁크에서 삽도 하나 꺼내셨다. ("내려라.") 


  차에서 내려보니 허허벌판이었다. 드라이아이스가 깔린 것처럼 발 밑으로 안개가 자욱했다. 다시 보니 갈아 엎어진 밭이었고, 다시 보니 썩어 문드러진 야콘이 보였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화창하여 나는 도대체 이 세계에 무슨 몹쓸 문제가 생긴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코와 입을 막은 수건이 괜히 답답하고 축축했다. ("여기가 어디에요?") 아버지는 내 질문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밭 한 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셨다. 그러더니만 당혹스럽게도 삽으로 땅을 후려치셨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니 갑자기 왜? 바로 그 때, 벼락같은 욕설과 함께 땅 속에서 사람 머리가 쑥 올라왔다. 야콘 밭 한 가운데 맨홀 뚜껑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내가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땅에서 솟아난 남자는 아버지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잘 다듬지 않은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남의 집 대문을 삽으로 치면 응당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치로 언쟁이 시작되었다. 요약하자면 볼트 멤버쉽(지하 벙커에 들어갈 수 있는 회원)의 자격 유효 여부를 놓고 붙은 싸움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가 멤버쉽은 사 놓고 연회비를 내다 말았다는 데서 남자와 아버지의 해석이 엇갈렸다. 원칙을 강조하든, 감정에 호소하든, 문제의 근원은 지하 벙커의 멤버쉽을 사놓고 진작에 공원 묘지에 자리를 잡으신 무책임한 할아버지에게 있었다. 고성이 오가고 몇차례 가볍게 욕설을 나눠 먹은 다음에 아버지는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순간 맨홀 뚜껑을 열고 건장한 청년들이 올라와 아버지를 제지했다. '두들겨 맞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울었다.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을 나동그라지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다. 그래봐야 중과부적이었다. 아버지는 덜 젊고 혼자였으며 청년들은 젊고 여럿이었다. 깡패 영화의 비장한 클라이맥스처럼 무너져갔다. 마침내 아버지는 쓰러졌다. ("이제 좀 말귀를 알아듣겠나?") 남자는 청년들을 거느리고 퇴장을 준비했다. 야콘 밭의 복판에서 하나씩 천천히 땅 속으로 사라져갔다. 구멍 안으로 한 발을 넣은 상태에서 남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눈길을 주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추한 꼴이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애만 데려 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힘이 없었다. 거역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하늘이 보였다. 그 다음에는 땅이 보였다. 언뜻 야콘 밭 한 가운데 대자로 누워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남자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맨홀 안으로 내려갔다. 사다리가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동그랗게 한 조각만 남은 하늘이다. 구름이 보였다. 섬뜩했다. 체리 빛깔의 구름이었다. 그리고, 뚜껑이 닫혔다. 


  그제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버지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냥 야콘 밭에 누워서 아버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손을 물었다. 심장이 경주하듯 내달렸다. 사다리를 손살같이 올라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 금속 덩어리에서 느껴지던 차가운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느낌이 손바닥 가득 장문처럼 새겨져 여지껏 남아있는 것 같다. 뚜껑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억센 손이 내 다리를 잡아 당겼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중력의 지배를 받았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내게 남은 바깥 세계와의 연결고리는 오직 한 장의 메모지 뿐이었다.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채로 구겨진 그것에는 아버지와 내가 장을 보려 했던 것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다우니, 오랄비, 세타필, 니베아, 네슬레, 페브리즈, 쓰리엠, 허쉬, 세노비스, 다농, 하인즈, 질레트, 듀라셀, 에비앙…….    

 

*


  볼트 151의 거의 모든 거주민들은 팻 조를 좋아했다. 당연하다. 위대한 조! 그가 없다면 우리는 물 한 병조차 쉽게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명쾌한 논리다. 나는 초콜렛을 퍽이나 좋아하는데, 오직 팻 조만이 초콜렛을 구해다 줄 수 있었으므로, 나는 팻 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다. 나에겐 초콜렛이 소중하듯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술이고 구두이고 커피이고 책이 간절할 것이었다. 치명적인 방사능과 낙진을 뚫고, 혹은 이미 그런 환경에 노출되어 변형된 인간이나 동물이나 그 밖의 무엇들의 위협을 뚫고 배송의 본연을 다하는 팻 조는 분명 성인까진 아니어도 성인과 비스무리한 사람이었다. 물론 팻 조는 진짜 성인이 아니므로 배송한 물건의 삯을 마다하는 일은 없었다.


  볼트 안 세계에서는 담배가 돈을 대신했다. 팻 조도 물건값을 담배로 받았다. 나를 제외하면 볼트 151에는 미성년자가 없었으므로 담배가 화폐이면 안될 도덕적 이유 따윈 없었다. 오히려 나에겐 잘된 일이었다. 이 볼트의 유일한 어린 아이로서 나는 유일하게 성공적인 '담배값 제태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른들과는 달리 공연히 태워없애는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수입을 올리기도 상대적으로 손쉬웠다. 볼트 안도 바깥 세계와 똑같다. 어른들이 충분히 직접 할 수는 있는데 선심하듯 아이들의 손에 맡기면서 뿌듯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있다. 잔 심부름이나 구두 닦이, 케이블 공사, 보안 시스템 프로그래밍처럼 말이다. 그리고서는 담배 몇 개를 건네 주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기들이 무슨 어른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나는 쉽게 담배를 벌 수가 있었다. 평균 하루에 다섯 개비 정도, 운이 좋은 날엔 열다섯 개비까지 벌어보았다. 허쉬 자이언트 밀크 초콜렛은 담배 세 갑 두 개비였고 허쉬 자이언트 아몬드 초콜렛도 담배 세 갑 두 개비였다. 40 그램이 아닌 192 그램의 '자이언트 바'이므로 그런대로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보통 2 주쯤 일하면 자이언트 바 하나를 사 먹을 수 있었다. 단지 밀크냐 아몬드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한 번은 팻 조가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 꼬마야, 허쉬 쿠키 앤 크림 바라고 들어봤니?
- 몰라요. 그런 게 있어요?
- 있었지. 과거에는. 
  그는 어디 낡은 잡지에서 오려낸 것처럼 보이는 빛 바랜 컬러 광고를 보여주었다. 
- 지금은요? 구할 수 있나요?
- 구할 수 없지.
- 팻 조, 당신이라고 해도요?
- 그래, 심지어 나라고 해도.
  침이 꿀떡 넘어갔다. 원래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일 수록 간절한 법이다. 허쉬 자이언트 쿠키 앤 크림 초콜렛을 향한 열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팻 조가 놓고 떠난 컬러 광고 쪼가리를 머리맡에 붙여놓았다. 그 하얗고 부드럽고 달달할 것이 틀림없는 속살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낮이나 밤이나, 부득이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열과 성을 다하여 그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맛을 짐작해보며 잠이 들었고 꿈에서 경험한 맛을 그리며 아침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났을 때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볼트 거주민들과의 거래를 끝낸 팻 조가 나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귓가에 속삭였던 것이다.
- 꼬마야. 놀라지마라. 구할 수 있을 것 같단다. 쿠키 앤 크림 말이야.
- 정말이요?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 그래, 정말로. 동부쪽에 아직 털지 못한 슈퍼마켓이 많단다. 그 쪽으로는 슈퍼 뮤턴트들이 드글거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접근이 쉽지 않지. 그런데 내 친구 하나가 여행 중에 운 좋게도 '자이언트 바' 몇 개를 구했다고 하는구나.
- 믿어지지가 않아요!
- 그런데 가격이 좀 세단다. 밀크나 아몬드보다도. 훨씬!
- 얼마나요? 얼마나 비싼데요?
  침이 꿀떡 넘어갔다.
- 희귀한 물건이라 하나에 네 갑씩은 쳐줘야 할텐데. 우리 사이에 그럴 수야 없지 않겠니? 그냥 세 갑 열 다섯 개비만 다오. 다섯 개비는 깎아주마.
- 좋아요. 다섯 개 갖다주세요. 그럼 얼마까지 빼주실 수 있으세요?
  아마 그조차 나의 승부사 기질에 놀랐을 것이다. 한 방에 다섯 개의 '자이언트 바'를 주문했으니 말이다. 팻 조가 감격하여 몇 개비를 더 빼주어 총액 담배 열일곱 갑에 거래를 진행하기로 했다. 


  허나 당시 내 수중에는 담배가 열두 갑 밖에 없었다. 다섯 갑이 더 필요했다. 더욱 더 악착같이 모아야만 했다. 대대적인 긴축 재정이 필요해 나는 탄산 음료를 끊었다. 코카콜라는 1.5 리터 한 병에 담배 세 갑씩이었다. 루트비어도 1.5 리터 한 병에 두 갑 여덟 개비는 내야 마실 수 있었다. 간혹 이름 없는 콜라, 이름 모를 루트비어가 나오면 한 갑에도 바꿀 수 있었지만, 그딴 쓰레기들에서는 머큐로크롬 냄새가 났다. 그래서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랜드가 중요한 것이다. 좋은 콜라 마시고 살면서 허쉬 쿠키 앤 크림 자이언트 바까지 맛볼 기회를 얻을 수는 없었다.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하나를 고르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이게 바로 어른의 선택이고 어른다운 소비이며 내가 여기 볼트 151에 들어와서 배운 것이다.

 

*


  볼트 151의 거의 모든 거주민들은 팻 조를 좋아했지만 물론 예외도 있었다. 단 한 사람. 127호 치퍼 영감님이다. 영감님은 단 한 번도 팻 조에게서 물건을 사지 않았다. 팻 조는 술도 판다. 좋은 술도 구할 수 있고, 아주 좋은 술도 구할 수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주당인 영감님이 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조금 의아하다. 물론 영감님은 매일 술을 마신다. 사실 절어서 산다. '캡틴 큐'나 '나폴레온' 같은 들어본 적도 없는 술을 늘 끼고 다니는데 어디서 구해오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그런 병을 하나 구해다가 싸구려 술을 채워 들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가하면 오버시어가 뒤로 몰래 영감님에게만 술을 선물해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거나 영감님이 이 볼트 거주민 중 최연장자이기 때문이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영감님은 이 볼트 거주민 중 최연소자인 내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어떤 이들은 치퍼 영감님을 치매 노인 취급한다. 영감님이 누구도 믿지 않을 주장을 반복하기 때문인데, 그 주된 레퍼토리가 바로 '여기는 외딴 섬이다'라는 주장이다. 영감님은 종종 내게도 다가와 귀에 대고 그 은밀한 말을 속삭이시기 일쑤다.
- 어이! 작은 친구, 절대 속지 마라. 여기는 외딴 섬이야. 
- 예?
- 여기는 섬이라고. 그것도 외딴 섬.
- 할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여기는 섬이라고. 저 놈들이 말하는대로 믿고, 저 놈들이 바라는대로 살게되는, 섬이라고.
- 저 놈들이 누구에요?
- 누구긴 누구야. 서로 배 맞추고 사는 오버 놈과 뚱보 검둥이 놈이지. 

  오버 놈은 오버시어고 뚱보 검둥이 놈은 팻 조다. 영감님은 '오버시어'라는 발음을 상당히 어려워하시는 편이어서, 그냥 줄여서 '오버'라고만 불렀고 대개는 '오버 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작 오버시어 본인은 연장자인 치퍼 영감님에게 상당히 깍듯한 편이었다. 영감님을 모셔다가 종종 자신의 방에서 독대를 하기도 했다 (사실 볼트 거주민 중 누구도 그런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영감님이 공술을 받아 마신다는 소문이 처음 흘러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치퍼 영감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나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되물었다.
- 할배요. 그러니까 여기가 섬이라면 도대체 어디가 육지라는 말씀이세요?
  신기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영감님은 돌연 넋이 나간 것처럼 눈동자가 흐리멍텅해졌고 아무 이유없이 침을 질질 흘렸다. 헤헤헤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딴청만 피우다 사라지기 일쑤였다. 마치 그런 기행을 통해 유일무이한 볼트 151 대표 치매 노인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작정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영감님은 단 한 번도 나의 반문에 명확히 반응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사건으로 상황이 급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팻 조. 어떻게 그가 볼트와 볼트 사이를 오갔는지 모르겠다.

  바꿔 말하면 다른 볼트가 있고 다른 생존자들이 있다는 얘기다. 누구나 간단히 그 정도는 추론할 수 있다. 단지 굳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이렇듯 평소에는 원리를 깨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생각 하지 않거나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볼트 안에서의 삶 대부분이 그런 식이다. 어떻게 공기정화시설이 돌아가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어떻게 상수 및 하수 시설이 작동하는가? 우리가 버린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가?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제공되는 음식들은 어디에서 난 무슨 식재료로 만들어지는가? 물론 궁금해하지 않아도 살 수는 있다. 그저 아주 생각 없이 먹고 쓰고 버리면 되는 것이다. 애써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고 있다.

 

*


  팻 조가 죽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 볼트 안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 비밀이 많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를테면 거주 구역 아래에는 연구 구역이 있었다. 또한 연구 구역 아래에는 거대한 설비 구역이 있었다. 발전기도 소각로도 정수 시설도, 모두 그 곳에 있었다.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라고 새겨진 철문 안으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땅 속은 우리가 경험한 땅 속보다 추웠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소각로 근처에 이르러서야 겨우 몸이 원하는 온도와 비슷해져 몸의 떨림이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각로 안에 쓰레기가 아닌 우리 친구, 팻 조를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복잡 미묘한 감정 안에는 이런 성분도 있었다. 언젠가 우리도 이 볼트 안에서의 삶이 끝나게 되면 저 안으로 들어가게 되리라는.

  팻 조를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났다. 볼트 안에 들어온지 한 달쯤 되었을 때다. 당시 나는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그리웠다.  내 방은 추웠다. 남의 방도 추웠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는 땅 위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 남은 내가 땅 속에 있었다. 아무리 시설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땅 속은 땅 속이다. 2인 1실이지만 룸 메이트는 친절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화난 얼굴로 다니는 중년 남자였다. 나같은 어린 애에게 관심이 없었다. 싸구려 술을 많이 마셨고 술병을 바닥에 깔아 놓았다. 나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관심이 없었다. 3주 후 침대보에 목을 매기 전까지 (그렇다. 그 끔직한 꼴을 가장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나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는 했다. 팻 조와 달리 그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알아가기에 3주는 짧은 시간이었다. 남자의 장례도 이번의 팻 조와 비슷하게 치뤄졌겠지만 오버시어와 직원 몇몇을 제외하고는 볼트 안의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의 빈 침대를 보면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저럴 생각이었다면 왜 기를 쓰고 여길 들어온 거지? 우리 아버지처럼 회원권인지 뭔지를 정말 간절히 필요로 했던 사람에게 선물하거나 기부하거나 양도하거나 증여하면 안되었던 걸까?

  다음 날 저녁 식사 무렵에 팻 조가 나타났다. 오버시어가 그를 데려와 거주민들에게 소개시켰다. 팻 조는 뉴스 앵커라도 된 것처럼 바깥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끝났다. 땅 위는 쑥대밭이 되었다. 어디가 덜하고 어디가 더하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 차이 따윈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지상에서는 치명적인 방사선을 피할 길이 없다. 물은 모두 오염되었다. 대부분의 음식들도 오염되었다. 살아 남은 인간들은 일종의 뮤턴트 괴물이 되었다. 살아 남은 대부분의 동물 식물 역시 변형되어 괴물이 되었다. 정부란 개념이 없다. 사라졌다. 지역별로 군벌이 난립하여 정부를 대신하고 있다. 이들의 보호 아래 뮤턴트가 되지 않은 아주 극소수의 인간들이 생존하고 있다. 이들에 거역하거나 반항하는 다른 이들은 강도단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강한 괴물이 약한 괴물을, 약한 괴물이 살아 남은 사람들을, 살아 남은 사람들은 또 자기들끼리 이합집산하여 강자가 약자를,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뭐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한 달만에 듣는 바깥 세상의 소식은 (온통 부정적인 이야기 일색임에도) 묘하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화롯가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는 심정으로 우리는 팻 조를 기다렸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아마 그때쯤부터 팻 조가 서서히 뭔가를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귀한 것들이었다. 그 날이 오기 전에는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혹은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들이지만 그 날 이후 볼트에 갇혀 살면서부턴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것들이다. 처음에는 그냥 선물로 주다가 수량이 많아지니 가격을 정해 팔기 시작했다. 하인즈 케첩과 A1 스테이크 소스, 그리고 타바스코가 등장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식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있으면 좋지 않은가. 이를테면 '멀티 비타민'처럼 말이다. 이 작고 푸른 행성이 절단나서 지하 벙커에 숨어살게 되었다고 금욕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잠들어 있던 욕망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냥 정수물을 마셔도 좋지만 기왕이면 생수가 좋을 것이다. 또 생수보다는 심플리 주스나 트로피카나가 낫고 한 발 더 나아가 건강을 생각하면 오드왈라나 네이키드쯤은 마셔야 좋지 않겠는가. 뒤이어 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가 등장했다. 입 안이 텁텁해. 리스테린이 필요했다. 이런 척박한 시대에 비타민이라도 챙겨 먹어야 하지 않을까? 미네랄은? 오메가 쓰리는? 너도 나도 세노비스를 주문했다. 다우니, 오랄비, 필립스, 테팔, 에비앙, 페브리즈, 크리넥스, 니베아, 네슬레, 쓰리엠, 질레트, 듀라셀…… 우리에게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팻 조는 그 모든 것을 구해다 주었다. 위대한 팻 조는 뭐든 구할 수 있었다. 그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 아라비카와 로부스타와 리베리카를 모두 구해다 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러고도 한동안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팻 조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허쉬 초콜렛을 권했다. 
- 꼬마야, 이거라도 좀 먹어봐라. 아주 맛있단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뭘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팻 조는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나는 이 볼트 안의 유일한 어린 아이인데. 급기야 팻 조는 숨겨두었던 개인기까지 동원했다. 그의 큼직한 천연 가죽 피리로 '내셔널 앤섬'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했다. 물론 지저분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못 이기는 척 하고 허쉬 초콜렛을 입에 넣어보았다. 몇 달만에 먹어보는 단 음식이었다.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는 나를 향해 미소지었고 나도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팻 조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이름에서 (아니 별명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그는 심각한 과체중이었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운동부족 상태였다. 의사가 아니어도 그가 성인병 고위험군이라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을 터였다. 볼트 151의 식당에서 가져온 물건을 나눠주고는 철퍽 쓰러졌다. 허쉬 쿠키 앤 크림 자이언트 바를 가져다 주기로 약속하고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그 날 팻 조의 장바구니 안에는 허쉬 쿠키 앤 크림 자이언트 바가 없었다.

  팻 조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볼트 151에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탄산음료가 바닥났다. 커피와 홍차도 모자랐다. 술도 동이 났다. 비타민도 떨어졌다. 지난 십여 년간 팻 조가 해오던 역할을 누군가 대신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팻 조는 우리 볼트에만 물건을 팔지 않았다. 볼트 77과 볼트 99, 그리고 볼트 131 등 생존자들이 거주 중인 다른 지하 벙커들에도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람들 또한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아니지! 심지어 그 사람들은 팻 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 그는 우리 볼트에서 죽었으니까!) 이제나 저제나 주문한 물건을 팻 조가 가져다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팻 조는 몇 가지 물건들을 남겼다.
  XL 방호복, M61 벌컨 기관포, 픽업 트럭 한 대, 프랭클린 플래너 한 권 그리고 메릴랜드 주의 지도.

  그 중 수첩과 지도에는 의외로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팻 조가 물건을 어떻게 공급받아 어디에 가져다 파는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직 낙진 속에 묻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마트들의 위치와 이미 팻 조와 같은 사람들이 물건을 모아다 저장해 놓은 연안 부두의 창고 위치까지! 그런 귀한 정보를 갖고도 손 놓고 지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움직여야 했다. 우리 중 누군가 팻 조의 역할을 대신 해야만 했다. 거주민 회의에서 엄숙하게도 제비뽑기가 시행되었다. 치퍼 영감님이 뽑혔다. 
- 최연장자인 영감님을 바깥에 내보내는 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반대했다. 두 번째 제비뽑기에서는 내가 뽑혔다. 최연소자인 날 바깥에 내보내는 건 상관 없는지 다들 말을 아꼈다. 심지어 난 아직 열다섯 살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볼트 안에서의 삶이 지루하거나 지루하지 않아서였던 것도 같다. 

  혹은 허쉬 쿠키 앤 크림 때문이었는지도. 

 

*


  팻 조가 남긴 모든 물건이 내게 주어졌다. M61 벌컨 기관포와 픽업 트럭을 포함하여.

  바깥 세상에서 막 들어온 팻 조의 모습을 우연히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육중한 덩치만큼이나 불편하게 보이는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어쩌면 심해 잠수복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꺼운 입자의 붉은 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댕으로 가득 덮인 상태였고 곳곳에는 흉측하게 피가 묻어 있었다. 검붉은 피가 아니라, 붉으면서도 초록 빛깔이 도는 그런 피였다. 섬뜩했다. 팻 조의 방호복을 입어보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치퍼 영감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어이! 작은 친구, 절대 속지 말게. 여기는 외딴 섬이야.
- 할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여기는 섬이라고. 그것도 외딴 섬. 그저 저 놈들이 말하는대로 믿고, 저 놈들이 바라는대로 살게되는, 섬이라고.
  상황이 상황이지만 어쩌겠는가. 게임의 룰은 맞춰드려야지. 
- 할배요. 그러니까 여기가 섬이라면 도대체 어디가 육지라는 말씀이세요?

 

*


  문이 열렸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쉬이이익. 방금 전에 빠져 나온 방의 공기를 제거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문이 열렸고 또 다른 방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쉬이이익. 같은 작업이 반복되었다. 세 개의 단절된 방을 통과하여 나는 마침 내 볼트의 입구에 다다랐다. 수십개의 밸브가 돌았고 바닥으로 하얀 연기가 깔렸다. 압력 밥솥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덜컥 문이 열렸다. 처음 내가 볼트에 들어왔을 때의 나이가 다섯 살. 지금 열 다섯 살이니 십 년만에 밖으로 나가는 셈이다. 그래도 아직은 땅 속이었다. 협소한 지하 동굴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문제의 사다리가 나올 때까지. 

  사다리를 보는 순간, 나는 그 사다리가 바로 '그 사다리'임을 알았다. 이걸 타고 올라가면 뚜껑을 열고 나가면, 무려 십여 년만에 바깥 세상으로 나가보게 되는 것이다.

  힘을 주었다. 잘 열리지 않았다. 뻑뻑했다. 더 힘을 주어 밀었다.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마치 누가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깨를 받치고 힘껏 밀어 보았다. 뻐엉, 하수구 뚫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빛이 쏟아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고 몸을 서서히 지상으로 옮겼다. 눈이 부셨다. 정신이 멍했다. 어느 정도로 멍했는가 하면, 

 

어디선가 "비켜요! 비켜!" 혹은 "저게 뭐야? 사람이야?" 혹은 "누가 경찰 좀 불러요!" 따위 말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고, 
요란한 경적 소리가 귀를 찢어 놓는 듯 했으며, 
수십 수백의 눈과 그보다 조금 더 작은 인공의 눈이 나를 향해 '찰칵 찰칵' 소리를 쏟아 내었는데, 
그건 마치 오래 전에 폐허가 되어버렸노라 믿었던 곳의 복판에서 초고층 빌딩과 십 년 후의 인류에게 포위당한 그런 느낌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었다. 

  숨이 막혔다. 과거 팻 조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조. 이 위의 야콘 밭은 어떻게 되었나요? 당신이라면 봤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 난장판이지. 꼬마야. 난장판이야. 그보다 나쁜 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2.3 톤의 철판과  25 센티미터 두께의 납판 세 개를 용케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 위에 갈아 엎어진 황량한 야콘 밭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 위에 소복히 쌓인 것이 있다면 이슬도 아니고 서리고 아니고 세설도 아닌, 응당 낙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위에는 도로가 있다. 차가 달린다. 빌딩이 있다. 사람이 산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어 변형된 인간이나 동물이나 그 밖의 무엇들이 아니라, 볼트 생존자들과 똑같은 (아니 오히려 더 건강할 것이 틀림없는)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다. 믿을 수 없다. 거짓말이다. 팻 조가 나를 속였을리 없다. 볼트 151의 유일한 어린 아이인 나까지 벗겨 먹었을리 만무하다. 그 초콜렛들이 그냥 세븐 일레븐에서 사들고 온 거라고? 그 코카콜라가 그냥 자판기에서 뽑아 온 거라고? 그 리스테린이 그냥 코스트코에서 대량 구매한 거라고? 말도 안돼. 이건 그냥 환각이다. 고약한 환각이다. 나는 지금 너무 충격을 받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환각임이 틀림없는 군중의 무리들 사이에서 아주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였다. 낯선 아줌마와 대여섯 살 짜리로 보이는 여자 아이를 대동하고 길 건너 편의 월마트에서 막 밀고 나온 따끈따끈한 카트를 밀고 있는 저 남자는……, 아버지? 아빠? 믿을 수 없다. 거짓말이다. 눈이 마주쳤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눈동자 안의 당혹스러움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무릎을 꿇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우니, 오랄비, 존슨 앤 존슨, 니베아, 네슬레, 크래프트, 피앤지, 쓰리엠, 허쉬, 세노비스, 다농, 마즈, 하인즈, 켐벨, 질레트, 듀라셀, 코카콜라, 펩시, 에비앙, 네스카페, 켈로그, 하이네켄, 레드불, 맥비티…… 라고 암송하면서.


(201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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