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도시괴담: 멜론과 콩나물
by 김영준 (James Kim)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를테면 수채구멍에 콩나물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습니까? 그냥 나물이래도 기가 막힐텐데, 무려 콩나물입니다. 그냥 구멍이라도 놀라울텐데, 수채구멍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만 사실 내가 더 묻고 싶은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신기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그 날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합시다. 일단 콩은 있었습니다. 없던 콩이 "짜잔" 하고 나타나 콩나물이 되었다면, 그거야 말로 기구절창할 이야기일 것입니다. 물론 그 콩이 본래부터 수채구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지사 깨끗하게 포장되어 냉장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것입니다. 콩들이 냉장고 안의 안락하고 시원한 자리를 잃게된 것에는 와이프의 역할이 컸습니다. 네, 와이퍼가 아니라 와이픕니다. 제 와이프로 말할 것 같으면 무식하고 뻔뻔하고 게으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게으른 여자와 결혼하면 현생이 고달프고, 뻔뻔한 여자와 결혼하면 전생이 고달픈 것이었고, 무식한 여자와 결혼하면 내생이 고달플 것이다." 그 말이 맞다면, 전 삼생(三生)이 고달픈 남자인 셈입니다. 제 와이프란 바로 그런 여자인 것입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멀쩡한 콩이 상한 줄 알고 싱크대에 내버리고, 그걸 치우기가 귀찮아 내버려둔 것이 물에 쓸려 내려가고, 그러다가 수채구멍에 걸리고, 또 그걸 치우기가 귀찮아서 내버려두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마개까지 잘 막아주고... 믿을 수 없지만 정말로 그랬더라는 말입니다. 그게 지난 주 목요일의 일이라고 합니다. 제가 출장을 가기 바로 전 날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제가 돌아온 오늘이 화요일입니다. 무려 닷새가 지난 겁니다. 닷새가 지나도록 싱크대며, 수채구멍이며, 음식물 쓰레기 수거통을 전혀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출장에서 돌아온 제가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식탁 위에 널부러진 그릇이었습니다. 더러는 파리나 개미가 꼬이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음식물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원래 그런 여자인걸요. 오히려 반들반들하게 잘 닦인 채 건조대에 열맞춰 올라가 있는 식기들을 목격했다면 그 편이 더 놀라웠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릇을 싱크대에 옮기고 물을 틀었습니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릇에 비누칠을 했습니다. 싱크대에 고인 물이 금세 지저분한 색깔을 띤 오수로 변했습니다. 저희 집 싱크대는 칸이 하나입니다. 다른 집들은 두 칸, 심지어 세 칸 짜리 싱크대도 쓴다고 하던데요. 저희는 집 면적이나 구조상 그렇게 넓은 공간이 나올 수가 없는 형편이라 그렇습니다. 그런 싱크대를 가진 사람들의 설겆이란 어떤 차원의 것일까요? 세제로 닦는 작업과 물로 헹구는 작업이 공간적으로 나누어질 것이고, 수도 호스도 길게 늘어나서 자유자재로 놀릴 수가 있겠지요. 그건 어쩜 설겆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예술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열었습니다. 배수구 마개를. 그리고 보았습니다. 바로 그것을요.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자라나 휘청이는 가냘픈 몸을 애써 가누고 있는 그 가련한 콩대가리들을 말입니다.
어찌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혹시 콩나물 콩을 직접 보신 적이 있습니까? 콩나물이 되기 전의 콩나물 콩 말입니다. 보통 콩보다는 조금 작지요. 쥐눈이콩을 쓰기도 하고 오리알태를 쓰기도 합니다. 제가 본 건 쥐눈이콩입니다. 집에서 직접 콩나물을 길러보고자 직접 구해온 것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냉장고에 있어야 할 콩들이 수채구멍 아래에서 스믈스물 자라고 있다니! 어찌 놀라 자빠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와이프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뭐야?" 와이프는 시큰둥하게 다가와 시큰둥한 표정으로 수채구멍의 시큰둥한 콩나물들이 시큰둥하게 흔들거리는 광경을 넘겨다 보았습니다. "그게 뭔데?" 그걸 몰라서 묻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콩나물 같은데?" "그럼 콩나물인가 보지." 뭐라고? 그게 수채구멍에서 콩나물을 발견하고 할 소리야? 이 여자야? 물론 명색이 잘 배운 교양있는 남자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콩나물이 여기서 자라나고 있느냔 말이야." 하지만 와이프는 어깨를 으쓱할 뿐, 그다지 충격을 받았다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감명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음은 물론이고요. "그냥 냅둬. 지들 맘이지." 저는 말입니다. 정녕 이런 여자와 살고 있더란 말입니다. 어쩜 콩나물보다 와이프의 존재가 사실 더 괴담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콩나물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
기겁한 저는 (쥐눈이콩을 애도하면서) 고무장갑을 끼고 수채구멍을 들어내었습니다. 사실 그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찝찝한 기분이 들게하는 일이어서 과연 장갑을 달랑 한 겹만 껴도 좋을지, 의문이 가시지 않긴 했습니다. 마치 모판에서 자란 정상적인 콩나물처럼, 문제의 콩나물들 또한 튼실한 뿌리를 구멍 사이 사이로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볕은 없고 통풍조차 쉽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온도며 습도며, 그 모든 조건들이 콩나물이 자라기에 부합하기는 했던 것일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해괴하고 망측한 현상에 대하여 분석하거나 논평할만한 지식을 저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일이 벌어졌으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요. 울렁거림을 참으며 그것들을 모아 긁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콩나물을 능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멜론이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멜론을 키우는 방법에는 눕혀 키우는 법과 세워 키우는 법이 있습니다. 참고로 음식물 쓰레기 수거통에서 키우는 재배법이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보았습니다. 분명 멜론 씨앗에서 줄기가 자라서 심지어 본엽까지 나온 상태였습니다. 멜론 한 통에서 속을 긁어내면 씨앗이 좀 많습니까? 그 좀 많은 씨앗이 너나없이 모두 잎을 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멜론 껍질을 포함한 음식물 쓰레기에 뒤섞여서 말입니다. 저 미련하고 게으른 여자는 멜론 속마저 대충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씨앗에서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어가는 중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 저는 보고야 말았습니다. 멜론은 단지 싹만 튼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줄기가 자라가고 본엽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안에서 기어코 과실을 맺고야 만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볕도 없고 통풍도 안될텐데! 온도며 습도며, 그 모든 조건들이 멜론을 키워내기에 과연 적절했던 것일까요? 과육을 살지게 한 양분은 대체 어디에서 얻어낸 것일까요? 혹시 그 썩어가는 남은 음식물이 그것을 키워낸 힘은 아니었을까요? 어쩐지 구역질이 났습니다. 무섭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음식물 쓰레기통을 방치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제 입으로 멜론이 들어온 적이 올해에는 없었습니다. 근 몇 년 사이에도 없었습니다. 저 없던 사이에 와이프가. 혼자 먹었을 가능성이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입니다. 분명히 밝혀두자면 참외라면 모를까 멜론을 혼자 먹어치우는 것은 치사한 일입니다. 그래놓고 흔적마저 치우지 않는 것은 더욱 치사한 일입니다. 투덜거리면서 저는 츄리닝을 걸치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었습니다. 제가 비우지 않으면 누가 비우겠습니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차가운 밤바람을 뚫고 아파트 단지 한 구석의 공동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까지 뛰어갔습니다. 코를 막고 수거함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뒤집어 들었습니다. 한때 먹을 수 있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먹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물질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그들과 닮은 물질들 위로 떨어졌습니다. 멜론 씨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멜론 줄기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주먹만한 크기의 구형 덩어리를 던져 넣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의 맨 위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울렁이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비 아저씨가 빼꼼히 고개를 디밀었습니다. "어이, 젊은 친구. 저거 멀쩡한 멜론 아니야? 아무리 봐도 멀쩡한 멜론인데?" 아저씨는 급기야 그 멀쩡한 멜론을 직접 집어들고 이리저리 무게며 부피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더니 통통 두드려도 보았습니다. "좀 작긴 하지만… 상하긴 커녕 아직 설익었는데 아깝게 버리는 거야?" 아아!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 메론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속도 메슥거렸고 무엇보다 언제 마지막으로 비워졌는지 모를 음식물 쓰레기통의 악취를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돌아오기가 무섭게 욕실로 향했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오면 바로 욕실까지 한 걸음이니 이럴 땐 집이 작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때까지도 와이프는 쇼파에 누워서 텔레비젼이나 쳐보며 망할 놈의 신선놀음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답답한 여자입니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내렸습니다. 깨끗하게 씻어낸들 음식물 쓰레기통이 음식물 쓰레기통이 아닌 다른 것이 될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뭐든지 해보아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모두 씻어내어야만 했습니다. 욕조를 쓰기 위해 샤워 커튼을 걷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아아! 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욕조 가득히 담겨 있는 머리카락을! 얼마나 될까요? 아마 10 리터 쓰레기 봉투로는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20 리터? 아니 50 리터 봉투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놀랍다기 보다는 역시나 무서운 광경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루에 몇 개의 머리카락이 빠지는지 아십니까? 보통 오십여개, 많게는 칠십여개가 아무 이유 없이 빠진다고 합니다. 저만큼의 머리카락이 모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육개월? 일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제가 이걸 못보고 지나쳤다는 뜻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건 또 뭐야?" 와이프는 시큰둥하게 다가와 시큰둥한 표정으로 욕조에 가득한 시큰둥한 머리카락을 시큰둥하게 넘겨다 보았습니다. "그게 뭔데?" 그걸 몰라서 묻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카락 같은데?" "그럼 그런가보지." 뭐라고? 이 여자야! 그게 욕조 한가득인 머리카락을 보고 할 소리야? 아무리 잘 배운 교양있는 남자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화가 났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더군요. 머리카락을 대충 걷어내어 배수구 반대쪽으로 모아 놓고 샤워기를 들어 욕조에 물을 뿌렸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눈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단단히 엉키어 타래를 이룬 그것들은 꿈쩍하지도 않고 욕조에는 물만 서서히 차올랐습니다. 배수구가 막혀도 단단히 막힌 모양입니다. 옷걸이를 구부려 배수구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막힌 것처럼 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걸리는대로 긁어 욕조 안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독특한 냄새가 피어 올랐습니다. 젖은 머리기름에서 나는 것이랄까요, 오래된 단백질에서 나는 것이랄까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방금 전 비우고 온 쓰레기통에 남은 부패한 음식물의 냄새는 설마 아니겠지요. 우웩. 돌연 구역질이 났습니다.
욕조를 가득 메운 거대한 머리카락의 뭉치는 마치 가발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스물거리며 조금씩 자라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씻다 만 쓰레기통이 뒤꿈치에 채여 뒤로 나동그라졌습니다. 와이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무식하고 뻔뻔하고 게으른 여자는 갑자기 어디라도 간 걸까요? 텔레비젼은 그대로 였지만 쇼파는 비어있었습니다. 바로 뒤에 있었는데 한 마디 말도 없이 어딜 간 걸까요? 문득 집이 비었다는 감각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텅 빈 집이라는 것을 온도로, 그리고 또 습도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오싹했습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싱크대를 돌아보니 배수구 마개가 들썩입니다. 콩나물입니다. 쥐눈이콩인지 오리알탠지 모르겠지만 분명 아까 깨끗하게 치웠던 콩나물이 또다시 대가리를 밀며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 돼! 뒤를 돌아보니 화장실 문틈을 새까만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며 밀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자라고 있었습니다. 또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아까의 그 진하고 매캐한 냄새가 거실 전체에 퍼지며 후각을 마비시켰습니다.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달음에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습니다. 문 바로 앞엔 누군가 서 있었습니다. 아까 그 경비 아저씨였습니다.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경비 아저씨는 저의 바람과는 달리, 난데없이 토악질을 시작했습니다. 입에서 멜론 속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참외도 아닌 분명 멜론 속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작은 멜론 씨들이 바닥에 떨어져 반짝거리며 줄기를 내었습니다. 그 줄기는 현관을 타고 올라 다시 잎을 내었고 어느새 주먹만한 과실도 맺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꿈인 것 같았습니다. 말도 안되고,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고, 앞뒤가 어긋나고, 그래 맞아. 이건 분명 꿈임에 틀림이 없어.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맙소사, 아팠습니다. 만약 이것이 꿈이 맞다면 꿈치고는 정말 고약한 꿈이라 해야할 것이었습니다.
(2011년 07월)
'낙농콩단 > Season 11-15 (2011-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6. 위켄드 업데이트 2 (0) | 2011.09.11 |
---|---|
145. 결혼만은 안돼요 (2) | 2011.08.14 |
142. 스팍과 커크 (0) | 2011.05.22 |
141. 슈피겔 임 슈피겔 (2) | 2011.04.24 |
140. 세번째 클론 (0) | 2011.03.27 |
블로그의 정보
낙농콩단
김영준 (James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