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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크라잉 씬 인베스티게이션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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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마이크로 튜브가 한 가득이었다. 손을 뻗어 한 주먹을 쥐었다. 어림잡아 열 몇 개 정도가 잡혔다. 누가 볼새라 얼른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만 할까? 아니야.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니 넉넉히 있어야지. 또 손을 뻗었다.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마이크로 튜브가 손 끝을 간지럽혔다. 한 움큼을 반대쪽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이제 정말로 그만 할까? 누가 보면 어쩌지? 혹시라도 남들 눈에 띄면 도둑 고양이처럼 몰래 들어와 훔쳐 쓴다고 또 입방아에 오를텐데.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나중에 눈치보며 구걸해야 하는 수고에 비하자면 잠깐 양심을 접어 놓는 것은 비교적 견딜만한 일이었다. 양쪽 주머니가 불룩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된걸까. 한때는 두바이 왕자처럼 모자람 없이 연구하고 실험하였던 내 처지가 도대체 어쩌다가!

 

*


  범죄 연구소에서 일한다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TV 시리즈물  덕분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은 길 그리섬이나 호레이쇼 케인, 맥 타일러 형사, 레이먼드 랭스턴 교수, 혹은 D.B. 러셀 등을 떠올리며, 나 또한 그런 종류의 멋진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리라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텔레비젼과 현실 사이의 간극, 뭐 이따위 차원의 문제 이전에 나는 투명인간과도 같았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이었던데다가 소속마저 조금 애매했다. 최소 세 개의 부서 안에 어정쩡하게 걸쳐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걸 핑계삼아 그는 세 개 부서의 모든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 사치를 누리기는 했다). 나는 크라임 랩에서 일했지만 어느 랩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랩이 따로 없었다. 사무용 책상 하나만 달랑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랩리스다. 집 없는 사람이 홈리스이니, 같은 원리로 랩 없는 사람은 랩리스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분석에 필요한 시약 및 재료와 기자재를 죄다 얻어 써야만 했다는 뜻이다. "하나 하나 재료며 소도구를 구걸해가며 무슨 놈의 실험을 하고 분석을 한단 말인가." 과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보스가 과학자 아닌 영매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사이언티스트들 사이에서 사이킥의 직원으로 일하는 기분을 아는가

 

  유행은 변한다. 뜨고 지고, 끓었다 식으며, 몰려왔다 몰려간다. 한때는 과학 수사가 각광을 받았다. 오랫동안 음지에서 묵묵히 인내한 세월을 모두 보상받기라도 할 기세였다. 직관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스타 형사들조차 과학의 영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모두가 묵묵히 보안경을 쓰고 랩 코트를 입었다. 이제 셜록 홈즈라도 어설픈 과학자 흉내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십 년. 또 시대가 변했다. 컨설턴트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것도 영매 컨설턴트의 시대가 찾아왔다. 사이킥이다. 분석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스타 과학자들조차 신내림의 영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모두가 굿판을 열었다. 이제 셜록 홈즈라도 어설픈 영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범죄 연구소에서 사이킥에게 정말로 일을 맡긴단 사실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영매에게 사람 구해 부리라고 그 귀한 인건비를 잘라줬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당연히 모르고 얻은 자리다. 누구도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 달리 미리 알아볼 방법도 없었다. 알았다면 당연히 다른 자리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사이킥 아래에서 하는 일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거다. 첫째, 사이언티스트들은 사이킥을 싫어한다. 둘째, 사이킥도 사이언티스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셋째, 그의 윗사람이 빌어먹을 사이킥이다. 그게 전부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사이킥은 제 3의 눈으로 결론을 내린다.

 

  아시다시피 사이킥들이 일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미리 결론을 내리고 근거를 짜맞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다. 오직 자신의 결론에 부합하는 증거만을 원할 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어떻게 내리는가? 영능력으로 내린다. 그러니까 사이킥이다. 본인은 영혼과 대화했다고 우긴다. 허나 그걸 무슨 수로 증명할 것인가.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그런 능력은 없어 그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알 도리가 없다. 다른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이킥들은 피해자 A의 영혼과 대화하고 B가 범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B가 범인이라는 결론을 뒷받침할 증거에 집착하게 된다. 용의자들의 모티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증거를 어떻게 분석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자기가 하는 짓이 프로파일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직원에게 자기가 필요한 증거만을 요구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문득 의문이 든다. 어차피 그런 식이라면 애초에 증거가 왜 필요한 것인가? 왜 증거를 분석하는가? 혹시 그냥 사람 갈구려고?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세상은 넓고 그런 인간도 물론 있다. 그런데 그의 보스는 조금 다른 종자다. 약간 뽐내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사이언티스트들에게 불만도 많다. 자길 영매라고 우습게 보는 사이언티스트들 앞에서 그럴듯한 증거와 화려한 그림으로 자신의 가설이 옳았음을 뽐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과학자 놀이'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고약한 코미디의 반복이 시작된다.


- 미스터 큐. 이번 우리 #437492 케이스에서 살해 도구가 뭐라고 결론이 났나?
  그는 나를 큐라고 부른다. 아마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 피해자의 상처 부위와 비교해 보았을 때 하키 스틱인 것 같습니다.
- 하키 스틱에서는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었나?
- 물론입니다.
- 피해자를 제외하고 하키 스틱에서 몇 사람의 DNA가 발견되었나?
- 세 사람입니다. 손잡이에 상피 세포가 일부 남아 있었습니다.
- 그 중에 B가 있나?
- 없습니다.
- 그럴리가 없을텐데. 분명히 B의 DNA가 나와야 맞을텐데.


  침묵.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개를 숙이고 입을 삐쭉거린다.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상념에 잠긴다. 결론은 언제나 같다. '어렵다' 아니면 '모르겠다'다.
- 모르겠다.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더욱 미칠 노릇은 이후 대화가 진행되는 방식이다.
- 그나저나…… 하키 스틱에서는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었나?
- 예,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렇습니다.
- 그런데 B의 DNA가 없었다고? 그럼 B가 안 만졌다는 뜻이네?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 살해 도구가 하키 스틱인 건 맞고?
- 맞습니다.
- 지난 번에는 야구 방망이 아니었나?
-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 연관 없는 다른 사건이었고요.


  침묵. 여전히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스가 그럴 때마다 나는 한없는 피곤함을 느꼈다.
- 어렵다. B가 범인인데……. 쉽지 않네. B가 하키 스틱을 안 만졌다고?
  이렇게 소리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졌을 수도 있고 만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니까! 이 답답한 양반아!
- 에라 모르겠다. 야구 방망이에서도 DNA를 찾아보지. 하는 김에 각목, 목검, 쇠파이프, 당구 큐대, 골프채, 과도, 벽돌까지 다 검사해보지. 다 해보고 결과 나오면 알려줘요. 
- 저, 하지만…… 현장에 그런 것들은 없었는데요.
- 그래도 한 번 해보지. 혹시 모르니까. 없었다고 손 빨고 있을 수는 없잖아.


  아니, 혹시 모르니까 한 번 해보자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심지어 현장에 그딴 것들이 없었다니까? 기가 막혔다. 처음에 나는 그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보스는 그것을 '항명'으로 받아들였다. 도리 없었다. 아무 샘플이나 가져다가라도 결과를 만들어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인근 공사판에서 각목을 빌려왔다. 동네 검도장에서 목검을 빌려왔다. 기관 보일러실에서 쇠파이프를 빌려왔다. 학교 앞 당구장에서 큐대를 빌려왔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에게서 골프채를 빌려왔다. 해보나마나 B의 DNA가 발견될 리가 없었다. (발견되었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 하고 말 실험을 열 번 하니 자연히 재료가 열 배로 들어갔다. 갖춰놓고 하는 실험이 아니라 남의 재료를 얻어야 하니, 아쉬운 소리 한 번이 아쉬운 소리 열 번이 되었다. 빌어먹을, 빌리는 인생이다.


  바로 이게 문제다. 나무만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우매함의 전형이다. 일의 순서가 틀렸다는 건 특별히 과학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렵지도 않다. 증거가 말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러나 보스는 그러지 않는다. 마음을 열지도 않거니와 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누구 범인인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예상대로 B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시간 낭비다. 비용 낭비다. 에너지 낭비다. 그 중 어느 것도 보스의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이었다. 나의 시간, 나의 비용, 나의 에너지.


이 작은 도시에 피해자만 아흔여덟 명이라고?


  아주 화창한 날이었다. 아흔여덟 번째 피해자가 발견된 날 말이다. 누구의 아흔여덟 번째 피해자인가 하면  ‘선로 위의 교살자’의 아흔여덟 번째 피해자이다. ‘선로 위의 교살자’는 이 작은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은 희대의 연쇄 살인마이다. 동시에 보스의 네메시스이기도 하다. 보스는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악마를 추적해왔다. 물론 보스가 직접 한 것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품 들어가는 일은 내가 했다. 보스는 그저 사장 놈 처럼 다리 꼬고 앉아서 “이거 해 봐요” 혹은 “저거 해봐요” 껄렁거리며 끼워 맞추기 퍼즐 놀이에 여념이 없었을 뿐이다. 피해자가 발견되면 우리는 (그러니까 나는) 장비를 갖춰들고 출동했다. 보스의 관심사가 오직 ‘선로 위의 교살자’였으므로 우리는 그에 관련된 사건만을 맡았다. 일단 현장에 나갔서 확인해보고 만약 ‘선교자(누군가 그 악마에게 이런 짧고 간편한 이름을 지어주었다)’와 관련된 사건이 아니라면 다른 팀에게 사건을 넘기게 되어 있었다. 다른 팀이 출동한 현장에서도 ‘선교자’ 사건임이 확인되면 우리에게 사건을 넘기게 되어 있었다. 이 연구소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뭔가를 넘겨 주는 일도, 반대로 넘겨 받는 일도 없었는데, 우리가 출동한 모든 현장이 ‘선교자’의 범행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물론 다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보스는 ‘선교자’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선교자’만을 생각했다. 어느 현장에서 어느 피해자를 보던지 ‘선교자’의 짓이라고만 단언했다. 동기? 과학적 증거? 행동 분석? 활동 주기? 살인마의 인장?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순간부터 그 사건이 ‘선교자’ 케이스로 다루어질 것을 알았다. 이번에도 보스는 이 것을 선교자 케이스로 간주할 것이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분명한 일이었다. 실제 선교자가 벌인 일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보스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내 전화를 받자마자,
- 선교자 케이스네요. 이제 몇 번째지요?
- 아흔여덟 번째입니다.
- 이 놈을 빨리 잡아야 하는데. 
- 저 선생님. 제 생각에 이번은 관련 없는 사건 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 무슨 소리야. 미스터 큐. 선교자 맞는 것 같은데? 
-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예전 사건들과 공통 분모가 없습니다.
- 무슨 소리야. 피해자가 살았나?
- 아닙니다. 
- 근처에 기찻길이 있나?
- 그렇습니다.
- 선교자네. 선교자야. 그렇게 진행하고 보고해줘요. 


  무릎을 꿇었다. 라텍스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피해자의 몸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살해당한 것이 아니었다. 살해 당하여 옮겨진 것이었다. 고집스럽게도 선로 위에서 바로 범죄를 저지르는 선교자와는 스타일이 달랐다. 한숨이 나왔지만 보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지난 아흔여덟 번의 경험으로 나는 다시 전화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스는 고집불통이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아흔여덟 건 중에 여든 건 정도는 선교자와 관련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인구 13만의 이 작은 도시에서 한 사람의 살인마가 25년 동안 백 명 가까이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백 명쯤 되면 연쇄살인이라기도 쑥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연구소의 웃음거리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보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장에서, 또 연구소에서, 다른 팀 직원들과 부딪히며 일하는 나는 안다. 나홀로 그 비웃음을 온 몸으로 감당하여야 한다. 보조 검시관이 다가와 커피를 건넨다. "또 선교자로 처리할 건가요?" 이미 그 말투에 다량의 조소와 미량의 경멸이 담겨있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여기엔 두 개의 현장이 있다. 하나는 저 밖의 현장이다. 사건 현장 말이다. 다른 하나는 안에 있다. 생계의 현장이다. 이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직업이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의무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명이기도 하다. 반면에 우리는 광대다. 광대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에 딱 좋다. 명색이 팀이라고 딱 두 사람 뿐인데, 하나는 영매고 하나는 단기 계약 중인 어중이 떠중이다.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다. 부끄럽다. 사건을 다루는 우리의 방식은 생계로, 의무로, 사명으로 이 일을 하는 숭고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을 것이다.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물론 가끔 억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나야말로 이 고약한 코미디에서 가장 억울해야할 사람이다. 과연 그렇다.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시키는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비겁한 변명 같지만 그 변명이 이 상황의 전부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내는 건 싸구려 용병의 주제를 넘는 일이다. 여기서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짧고 손쉽게 부려지다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면 그만인 값싼 운명이다. 나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구차하지만 시키는대로 할 뿐이다. 저들 중 몇몇은 그런 그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도 있을 터였다. 다만 그런 '이해'에도 으레 한계는 있기 마련임을 알고 있다. 그 어떤 너그러운 이해도 결국에는 그들 각자의 이해를 넘어서지는 못하는 법이다.


첫 번째 선교자 사건은 1989년 8월 25일에 보고되었다

 

  첫 번째 '선로 위의 교살자' 사건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월 25일이다.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통과한 날이기도 하다. 그 당시 보스는 열일곱 살이었다. 보스가 영매로 범죄 연구소에 들어오기 20년 전의 일이다. 피해자는 스물일곱 살의 여성이었고 굵은 밧줄로 목이 졸린 채 선로 위에 버려져 있었다. 밧줄에서는 (그 당시 감식 기술로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1993년과 1998년에도 각각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훗날 '선교자 케이스'의 성립 요소로 널리 알려진 내용은 모두 이 당시 세 건을 통하여 정립된 것이다. 피해자는 항상 이십대 중후반의 여성이었다. 발견되기 4 시간 안에 살해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공통적으로 전 날 밤 행적이 묘연하였다. 또한 목 위의 굵은 밧줄 자국은 어김없이 선명하여 그녀들이 살아있던 때에 만들어진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목을 조른 힘의 크기나 피해자들의 팔에 남은 억센 멍자국의 흔적을 감안하면, 범인은 한 사람이고 남성일 가능성이 컸다. 1989년의 관점으로도 그랬고 1998년의 보다 진보한 해석으로도 그랬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 주장에 반박할 근거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1989년 이후 십 년 동안 단 세 건이었던 선교자 사건은 이후 십 년 동안 열 건이 더 보고되었다. 그리고 지난 오 년 동안에 여든다섯 건으로 급증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총 아흔여덟 건이다. 보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 미스터 큐. 놈의 마성에 가속이 붙고 있어.


  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통계적으로는 물론 상식적으로도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으로는 역사상 어떤 연쇄 살인마도 이런 식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움직이던 자가 일정 기간 후에 서서히 출몰 빈도를 늘려갈 수는 있다. 여기까진 있을 법한 진화의 범주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놈은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간격으로 3단 변신을 했다.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는데 십 년이 걸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2단계를 다시 십 년이나 유지하다 3단계로 넘어가는 사례는 드물다. 정석대로라면 일단 2단계로 넘어선 다음부터는 가속이 시작되어야 맞았다. 그때부터 간격이 짧아지고 지수적으로 증가했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보스의 설명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결정적 이유다. 놈의 작업은 소의 식사같다. 노리고 외롭지만 끈질긴 장기전이다. 흡사 일 년에 내보내야 할 에피소드 수가 이미 정해져 있는 텔레비젼 드라마처럼 행동하고 있다. 전략이 정교해지거나 수법이 잔혹해지는 법도 없었다. 이십 년 이상 꾸준히 같은 패턴만을 고집했다. 우리가 쫓고 있는 자가 컴퓨터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사람의 충동의 동물이고 욕망은 이런 식으로 신중하게 진화하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사태를 설명할 유일하고도 무이한 가설을 말이다. 너무 쉽다. 간단하다. 누군가 선교자 케이스가 아닌 것을 꾸준히 선교자 케이스로 분류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면 이 사태가 온전하게 설명이 된다. 카피캣들은 물론 (고맙게도 언론에서 '선교자'라는 닉네임을 붙여준 덕분에 수많은 카피캣들이 나타났고 잡히거나 사라졌다) 전혀 무관한 사건들까지 되자 선교자 케이스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누구를 콕 집어 욕하려는 생각은 아니다. 다만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누구와 달리, 증거를 보자는 것이다. 첫째, 보스는 2009년에 범죄 연구소에 들어왔다. 둘째, 그 후로 5년 동안 이 남자는 '선교자'를 추적해왔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아흔아홉. 아홉 수는 언제나 쉽지 않다

 

  6월 28일. 아흔아홉번째 희생자가 발견되었다. 역시 더없이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다. 덥지도 앟았고 춥지도 않았다.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로 더없이 상쾌한 날이었다. 빛의 알갱이는 나뭇잎 위에서 보석처럼 잘게 부스러져 흩어졌다. 뺨을 간지럽히는 미풍은 꼭 냉방기에서 방금 막 나온 바람처럼 사근하고 친절했다. '오늘의 불쾌지수'가 0이라고 기상캐스터는 힘주어 말했다. 지난 번에도 이런 날씨였다. 항상 이런 날씨였다. 언제나 이런 날씨에 나는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향한다. 우연인지, 아니면 이 미친 도시의 날씨가 필요 이상으로 좋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사건이 '선로 위의 교살자'와 콩알 반 쪽만큼의 관계도 없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출발하기 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도심 한 가운데 있는 쇼핑몰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딱 10분만 둘러보고도 이 사건이 왜 선교자 케이스가 아닌지, 그 이유를 열아홉 가지 정도 나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버릇처럼 머리가 아팠다. 아스피린 두 알을 털어 넣고 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스는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현장을 직접 보는 일이 드물다. 언제나 전화로 설명해달라고 요구한다. 말로 어떤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범죄 현장을 묘사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직접 눈으로 보는듯한 생생하고 세세한 전달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사실이 아닌 감정이 개입된 부분이 없기를 바란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자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이 일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자리에서 전화 통화로만 전해 듣고 판단을 내리니 문제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항상 부족하다. 부족하다보니 그는 캐묻는다. 취조당하는 듯한 기분이 나로서는 좋지 않다. 그렇게 말이 오고 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오해가 생긴다. 오해가 생기면 그는 나를 원망한다. 내가 설명을 제대로 못해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마저 든다. '정말 나한테 문제가 있나?' 그런 생각이 나를 갉아먹는다.  


- 이번 사건은 정말로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 미스터 큐, 뭐가 그렇게 말이 안되는데? 피해자가 살았나?
- 아닙니다. 
- 근처에 기찻길이 있나?
- 없습니다. 그게 첫번째 문제입니다.
- 기찻길이 중요한가?
- 그렇습니다. 놈의 범행 장소는 언제나 선로 위였습니다.
- 꼭 선로 위만 되나? 선로 아래나 선로 옆은 안되나? 선로 위에서 죽이고 거기다 갖다 버린 건 아니고?


    나는 가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양반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나 한걸까?
- 하지만 증거가…….
- 증거가 영 아닌가?
- 예. 범행 수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 어렵다. 어렵네. 잠깐만. 느낌이 오는지 안 오는지 좀 볼께.
  길고도 짧은 침묵 (대단한 '고스트 위스퍼러' 나셨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 맞네. 느낌이 와.
- 하지만, 선생님…….
- 해야지. 준비 다 해놓았잖아. 어쩌겠어. 해야지, 마냥 손 빨고 있을 수도 없고. 
- 그게 다가 아닙니다.
- 또 뭔데?
- 사망 추정 시각입니다. 정확한 것은 검사해봐야 알겠지만 거의 하루 전 입니다.
-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 이제까지 희생자들이 4 시간 이내에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하루 가까이 지난 다음에 발견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상관 없지 않나? 23 시간이나 25 시간이나 그게 그거지. 48 시간이면 어떻게 49 시간이면 어떤가. 상관없어. 이번엔 선로 위처럼 탁 트인 공간에 버려진 게 아니니까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았나보지. 아무래도 발견되는데 시간 좀 걸리지 않았겠어? 어디서 발견되었다고?
  그 말이 신경을 건드렸다. 홧김에 퉁명스럽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 쇼핑몰 한가운데 입니다. 근처에 잘해야 몇백명 있었겠습니다.
  내 비아냥을 눈치채었는지 그 또한 썩 유쾌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 내가 책임질께. 그냥 선교자 케이스에 넣고 진행하쇼.

 

이 남자의 화법은 나를 미치게 만드네

 

  전화를 끊고 5분 후. 다시 전화가 왔다. 그 대단하신 영매 보스셨다.
- 미스타 큐. 그런데 그래서 몇 도라고?
- 예? 무슨 말씀이신지…….
- 왜  또 모르는 척 하고 그러나. 간 온도말이에요. 간 온도.
  아니, 누가 뭘 모른 척을 했다는 거지? 오락 가락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보스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대화를 진행했다. 생각 가는대로 화제 전환을 하여 남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의 주제를 바꿀 때 남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헤메는 것을 자기만큼 똑똑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단한 착각이다. 사실은 이렇다. 그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순탄치 않은 것은 그가 남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이기적이어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기 때문이다.   
- 어림 잡아…… 거의 25.8도입니다.  
- 그럼 24 시간이 넘은 건가? 확실한가? 
- 정확한 것은 실험실로 옮겨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체온이 이렇게 많이 떨어졌다는 것은 사망 후 상당히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 현장은 공기조화설비가 갖추어진 환경으로 온도, 습도 등의 주변 환경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25.8도면 거의 주변 환경의 온도에 가까워진 상태입니다. 쇼핑몰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 그래서 24 시간이 넘었다고?
- 넘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후 경직 상태를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하자면 이미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다시 물러지기 시작한 상태로…….
- 조금 아까는 간 온도로 확인했다고 하지 않았나?
- 몇 도냐고 물어보셔서 간 온도가 25.8도라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 아니, 이 사람아! 방금 전 분명 24 시간이 넘었다고 했잖아! 정확히 말을 해줘야지. 그래서 결론은 공식적으로 몇 시간 전에 피해자가 죽었다는 거야?
- 공식적인 사망 추정 시각은 여기서 알 수 없습니다. 연구소로 옮겨서 본격적인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현장에서 하는 것은 오로지 1차적인 추측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체의 온도에 근거한 사망 추정 시각은 여러 가지 요인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3~4 시간 이상 오차가 있을 수 있는 것은 감안하…….
- 우리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계산했었나?
- 예, 그렇습니다.
- 그런데 어떻게 아무도 몰랐지?
- 예? 무슨 말씀이신지…….
- 왜  또 모르는 척 하고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발견되지 않았냐는 말이야.
- 작은 상점 위에 있었습니다. 천정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아직도 몰랐을 겁니다.
-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그러니까 제발 좀 현장에 와서 보시라니까 이 답답한 양반아!
- 아닙니다. 설명 드리려고 하였는데…….
- 됐고! 아무튼 선교자 케이스인데 이런 실수 때문에 놓치고 지나가면 얼마나 아깝냔 말이야. 사망 추정 시각을 잘못 계산한 것 같은데. 다시 해봐. 내 생각에는 이번에도 6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거야.
- 다시 해 볼수는 있습니다만. 이미……. 
- 아니, 잠깐만. 근데 온도는 간에서만 재나? 그게 정확한가? 입에서도 재어 보고, 겨드랑이에서도 재어 보고, 항문에서도 재어 봐야 하지 않나? 저번에 조카 데리고 병원 갔더니 엉덩이에다 체온계를 꽂아 놓던데.
- 충분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직장의 온도를 측정하여도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어차피 연구소에 옮긴 다음에 검사를 진행해서 정확한 추정 시각을 보고드릴 것입니다. 저희가 더 이상은 굳이 현장에서 직장 온도를 확인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사체를 뒤집고 옷을 벗기는 과정에서 증거가 훼손될 수도…….    
- 아니, 하지. 해보지. 해봤으면 좋겠는데. 결과 나오면 연락줘요.


  어지러웠다. 보스가 이런 요구를 할 때마다 눈 앞이 캄캄했다. 라텍스 장갑을 벗어 던져놓고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정말 순수하게 멍청한 짓이다. 보너스로 기분까지 좋지 않았다. 자기 욕심으로 터무니 없는 지시를 내리면서 마치 아랫사람이 게을러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은근 무안을 주니 말이다. 물론 어쩌면 그의 말대로 사망 시각 추정이 틀렸을 수도 있다. 또한 범죄 수사에 있어 직감이나 그 이상의 초월적인 영역이 영향을 미침을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매번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아무리 그것이 가장 손쉽고 가장 간단한 설명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원인을 아랫사람의 실수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만물을 의심하는 것이 과학자의 자세지 무조건 남을 믿지 못하는 것이 과학자의 자세는 아니다. 과학자가 아닌 사람이 '과학자 놀이'를 하고 있으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잠깐만요." 바디 백을 실으려는 것을 만류했다. 다른 팀의 보조 검시관이 다가와 커피를 홀짝이며 묻는다. "또 선교자로 처리할 건가요?"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비웃음이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바디 백을 열고 피해자를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엉덩이에 체온계를 꽂으려 노력했다. 잘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창피했다.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예쁘게 잘 넣어보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푹' 꽃아넣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렇게 얻은 결과에는 의미가 없다. 현장의 다른 직원들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혹은 내 망가진 마음이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더러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더러는 경멸하는 티가 완연했다. '어떻게 저런 짓을 하지? 피해자에 대한 기본적 예의도 없나?' 혹은 '저 사람이 여기 일에 대해 뭘 알기나 할까? 소문에 따르면 이 바닥 경험이 없다고 하던데'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차라리 저 사람들이 소리내어 그렇게라도 말을 해줬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름과 치통은 늘 함께 찾아왔다.


  불필요한 실험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노출도 많아진다. 불필요한 노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를 상처입히는 '물질'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를 상처입히는 '사람'에 노출되는 것이다. 


  먼저 물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기본적으로 실험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하는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해도 화학 물질을 만지고 생물학적 시료를 건드리는 일이 건강에 좋을 수야 없다. 아무리 안전한 실험이라고 하더라도 하지 않을 경우보다 안전할 수야 없다. 나는 이미 이 곳에 오기 전에도 7년간 실험실 생활을 했지만 여기 범죄 연구소에 오고나서는 어림 잡아 만 배쯤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내게는 소속이 없다. 최소 3개 부서에 어정쩡하게 걸쳐 여기 사람도 아니고 저기 사람도 아니다. 이 팀에는 영매 보스와 나. 딱 두 사람 뿐이다. 품 가는 일을 영매 보스가 할리 만무하니 결국에는 나 혼자다. 그럼에도 최소 3개 부서에서 할만한 다양하고도 위험한 일을 적절한 안전 교육 없이 다 건드려보고 있다. 다양히도 몸을 버린다. 내 하소연을 듣더니만 짖궂은 여자친구가 말하길, 
- 니가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말이다. 
- 뭐?
- 대략 90% 확률로 미스터 베넷이나 로버트 마아치나 로버트 크라울리의 처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제인 오스틴 매니아들이여! 미스터 베넷을 기억하는가? 미스터 베넷은 아마도 '오만과 편견'의 다섯 딸들의 아버지다. 나머지 두 사람도 역사에 남을 딸부자다. 로버트 마아치는 '작은 아씨들'에서 네 딸들의 아버지. 그리고 로버트 크라울리는 '다운턴 애비'의 세 딸들의 아버지. 그녀는 영국식 드라마 광이었다. 물론 '작은 아씨들'은 미국 고전이지만 위기의 귀족 혹은 중산층 딸들의 결혼 이야기에 열광하는 본인 취향에 맞는지라 대강 거기까지는 인정해주는 듯 했다. 돌이켜보면 그 애는 여자다운 구석이 없었다. 무뚝뚝했다. 회계사 아니랄까봐 숫자 앞에서 차갑고 냉철했다.
- 단지 다섯이냐 넷이냐 셋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공감 능력이 망가지지 않고서야 이런 말까지 할 수야 없는 것이다.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위험한 실험을 많이하면 딸부자 아빠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짖궂은 농담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싫없는 농이 아니라, 더없이 진지하게 여자애가 정색을 하고 이런 말을 하니 내게는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여담이지만 (갑자기 삼천포로 빠져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우리는 헤어졌다. 4개월 후 청첩장을 보내왔고 5개월 후 카카오톡 사진에 세 쌍둥이 사진을 올렸다. 통통한 아들 쌍둥이였다. 아기 돼지 삼형제 같은 느낌이었다. 3 더하기 4 하기 5가 얼마인지 회계사인 그녀가 모를리가 없었을 것이다. 축의금 받은 이후 다시 연락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단지 다섯이냐 넷이냐 셋이냐의 문제였던 것 같다.


다음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험은 시키되 재료를 사주진 않았다. 보스는 연구소의 재료를 그냥 필요한만큼 가져다 써도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꺼내다가 쓰고 모자라면 관리자에게 이야기해서 채워놓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연구소의 생리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클립이나 압정이나 A4 용지나 모나미 플러스펜이나 스테이플러 심 같은 오피스 용품처럼 실험 재료도 어디까지나 '공용'의 개념이고 필요할 때 언제든지 가져다 쓸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연구소는 공중 화장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 저기요, 그거 누구 허락받고 쓰시는 거예요?
  매번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김없이 마음이 쓰렸다. 한때 '두바이 왕자' 처럼 연구하고 실험했던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 저희 영매 선생님께서 지시하셔서 쓰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변명하는 것처럼 들려 그런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미리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는 겁니까? 그냥 막 갖다 쓰시면 안되요! 
  저라고 그걸 모르겠습니까? 저도 미칠 것 같아요.
-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저희 선생님께서…….
- 누구랑 얘기했다고 하는데요? 나랑은 얘기한 적이 없는데.
  몇몇 높은 분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갔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 같은 처지에서는 자나깨나 말조심이 상책이다. 
-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채워놓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으니 말이 되요?
- 예, 그렇습니다.
- 그냥 막 갖다 쓰면 안되요. 앞으로 이쪽 실험실과 관련된 모든 건 나한테 와서 양해를 구하세요.


  매번 이렇게 끝났다. 그리고 다음에도 지겹게 반복될 것임을 알았다.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이런 문제를 (내게 영역 침범을 지시한 당사자인) 보스에게 이야기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쉽게 말하고는 한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할 정도로 쉽지가 않았다. 나도 잘난듯이 나이브하여 이런 문제를 윗사람과의 의논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 재료는 좀 그쪽 부서에서 가져다 쓰지?
- 저, 선생님. 그런데 미리 좀 실험실에 양해를 구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보스는 발끈하여, 
- 왜? 누가 못 갖다 쓰게 그러나? 
- 아니요. 그렇다기 보다는 뭐랄까……. 저쪽에서도 관리를 하셔야 하니까요. 어떤 경로로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맞는 말씀이고요. 보다 좋은 모양새를 갖추려면 아무래도……. 
- 못 갖다 쓰게 한다는 거네?
- 아니요. 그게 아니라…….
- 누가 그래요?
- 그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나 같은 처지에서는 자나깨나 말조심이 상책이다.
- 웃기네. 우리 영매들 아니었으면 이 범죄연구소가 있었을 수 있었을 것 같아? 
- 아니요. 저는 그렇게 말씀드린 적이 없고…….
- 그 얘기가 그 얘기잖아. 참나, 기가 막혀서. 하라는 연구나 열심히들 할 것이지.
- 그게…….
- 갖다써요. 나도 그쪽에 얘기는 해볼께. 일은 해야지. 그게 당신 일이잖아.


  결국엔 일이 이렇게 흘러간다. 어김없이. 흥분한 보스는 연구소의 높은 분들(정확히는 높은 분들이면서 자기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분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하소연을 한다. 그런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이 싫은 소리를 할 리 없으므로 “아무래도 오해하시는 것 같다"는 답변을 받는다. 그럼 보스는 증인으로 나를 채택한다. 애꿎은 내 이름이 오르내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분들에게 "못 쓰게 한 건 아니라 서로 서로 오해살만한 일은 하지 말자는 뜻이었던 것 같다"는 대답을 받아낸다. 그리고 "사실 그 쪽 연구원 분이 성격이 좀 예민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덤으로 오간다 (세상에! 나처럼 꼬리내리고 조심스럽게 하나 하나 양해하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문제는 그 높은 분들이 내가 실무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높은 분들과 다른 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론이 나왔다. 첫째, 결국 보스도 나의 동선에 제동을 거는 분들이 자기 말을 잘 안들어줄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자기도 불편하니까 직접 얘기하지 못하고 에둘러 더 높은 분에게만 징징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덤으로 나만 '일러 바치는 놈'이 되어버렸고.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영매들은 과학자들을 싫어하고 과학자들은 영매들을 싫어한다. 만고 불변의 진리다. 영매 컨설턴트의 시대가 십 년을 더 간들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혹은 알면서도 의뭉스럽게 무시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 얘기 다 되었으니까 우리 실험에 필요한만큼 갖다 써요.
  결과는? 뻔하다. 다시 이 문단의 맨 첫 줄로 돌아가는 것이다. "저기요, 그거 누구 허락받고 쓰시는 거예요?" 말이다. 이 말을 백 번 정도 들어보면 정신이 나갈랑 말랑 너덜 너덜한 상태까지 내몰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치미 뚝 떼고 "얘기 다 되었으니까 우리 실험에 필요한만큼 갖다 써요"라는 지시. 절박했다.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처음부터 다시! 끝없는 도돌임표. 시지프스의 바위. 고약한 농담. 한 쪽에서는 "가져오라"고 말하고 한 쪽에서는 "누구 허락을 받고 가져가시냐"고 말하고. 두 양반이 직접 만나 치고 박던 박고 치던 끝장을 보면 안되는 걸까? 먹고 살만한 높은 사람들의 힘겨루기에 끼어 들어가 한달에 150만원 받고 일하는 계약직 나부랭이가 이렇게 진땀을 빼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또 어이없고 또 슬픈 일인가. 한때 나는 블랙 코미디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일하면서부터 글쓰기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블랙 코미디를 쓰지 않아도 이미 인생이 블랙 코미디였기 때문이어었다. 


아 정말 다이소가 없었으면 어쩔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기도 하였다. 범죄 수사는 시의 세금으로 하는 것이다. 감식에 들어가는 일도 마찬가지로 세금으로 충당한다. 영매에게 일을 일부 나누어주었을 때는 일부 일을 하기 바란다는 것일 테다. 공간과 재료와 동선과 장비 사용에 민감한 건 모든 연구소의 공통된 문화이지만 상황을 이렇게까지 방치한다는 것은 조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영매에게 나누어 준 사건은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하긴 의미없는 '선교자 케이스'에만 3년째 목을 매고 있으니) 영매 보스가 이 범죄 연구소의 일을 하고, 시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 혹시 보스가 내게 숨기는 내막이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 뭔가 있기는 있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던가? 내가 이 범죄 연구소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맞기는 할까? 그렇다. 사회 생활은 이런 식으로 사람이 망가뜨린다. 그렇게 쾌활하고 생기 넘치던 내가 2년 만에 의심병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홧병이 날 것 같아 점을 보러 갔다. '영매는 영매로 잡아야지'라는 심정이었다. 그렇다. 사회 생활은 이런 식으로 사람이 망가뜨린다. 그렇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던 내가 급기야 점집의 문까지 두드리게 된 것이다.  
- 무슨 일로 왔어?
- 제가 직장에서 조금 힘든 상황이어서요. 앞으로 잘 풀릴 지 알아보고 싶어요.
  대강 내가 직장에서 어떤 이유로 힘든지를 점쟁이가 이해할 수 있을만큼의 이야기로 바꿔 털어놓았다. 보스라는 남자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점쟁이는 눈을 감고 뭐라고 뭐라고 꿍얼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이마 위의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흰자위 위의 실핏줄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입가로는 맑은 침을 흘렸다. 중력을 따라 코피가 흘러 나오며 두루마기를 적셨다. 탁자 위로 쓰러지며 산통, 산대, 산가지 따위가 파도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유명한 애기 보살이라는 그 집 안주인이 뛰어 들어와 남편을 들쳐업고 뛰었다. 삼일 밤낮 사경을 헤메었다는 점쟁이는 나흘째 되는 날에 특제 꿀물을 마시고 일어났다고 들었다. 바짝 말라붙은 목소리로 그는 내게 전화를 했다.
- 니네 보스. 내가 이길 수 없는 영매야. 머릿속을 들여다 보려고 했다가 내가 죽을 뻔 했어. 거기다 자기애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어. 남의 말 뒤지게 안 들으니 그만 포기해.
  점쟁이는 복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내게 몸 조심하라고 조언을 건넸다.


  영매 보스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니고, 그래서 결론은 <버킹검>이 아니라 <다이소>다. <다이소>에 정말 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이소>가 없었으면 인류의 발전이 한 템포 늦춰졌을 것임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① 살 수 있는 것은 사고, ② 만들 수 있는 것은 만들고, ③ 간도 쓸개도 없는 놈처럼 비비적거려 얻을 수 있는만큼 얻고, ④ 개길 수 있는 만큼 개겨서 재료 사용량을 최소한으로 관리하려는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이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다이소> 없이는 아무 것도 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핀셋, 포셉류. 시료를 다루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한다. 허나 다른 실험실에서 꺼내다 사용하기 껄끄러운 것 중의 하나다. 생각해보라. 당연하지 않은가. 언제 어떻게 무엇이 묻었는지도 모르는데 남들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좋은 핀셋은 비싸다. 사서 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이런 경우 <다이소>에서 2,000원짜리 족집게를 구매하면 일단 급한대로 불은 끌 수가 있다.  

품명: 족집게
재질: 스테인레스 스틸 외
원산지: 중국
수입판매원: (주) 쌍문산업
주소: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111-11
대표전화: (02) 123-4567

불필요한 인모 제거시 사용합니다.
인모를 잘 잡아주지 못할 때는 양쪽 끝부분의 이물질을 닦아 주십시오.

사용상 주의사항
1. 제품에 이상이 있을시 사용하지 마시고 소비자 상담실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유아의 손에 닿지 않도록 보관하여 주십시오.
3. 포장물 개봉시 손이 다칠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4. 족집게 이외의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5. 제품 끝이 날카로우니 사용시 주의하십시오.


  한편 해부대를 대신해 쓰기에는 <스카치 브라이트>의 은사 수세미가 제격이다. 폴리에스터 사와 폴리에스터 필름의 특수 연사 구조로 우수한 세척력을 자랑하며 각종 약품에 대한 내구력이 뛰어나다. 가로 13.5 센티미터이고 세로 18.5 센티미터이며 두께는 1.0 센티미터이다. 어림잡아 가로로 여덟 개에 세로로 열두 개 정도 꿰메어 연결하면 충분히 사체 하나를 뉘일만한 크기가 된다. 여기에 아래로 DIY용으로 나오는 MDF판을 대면 좋다. MDF판은 대개 가로 20.0 센터미터에 세로 30.0 센티미터 사이즈가 단 돈 천 원이다. 열 장 정도만 있으면 충분히 뒤집어 쓴다. 이렇게 하면 큰 돈 들이지 않고 훌륭하고도 튼튼한 해부대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사용시에는 은박지로 한 번 전체를 둘둘 감싸서 쓴 다음에, 사용 후에 지저분해진 은박지만 벗겨내 버리기를 권한다 (은박지 역시 <다이소>에서 단 돈 천원이면 다양한 사이즈의 제품을 구매 가능하다). 위생도 위생이고, 사비를 털어 일하는 것에도 한계는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이소>의 비닐 장갑도 훌륭하다. 예상보다 두꺼운 50매의 프리미엄 장갑이 여러가지 브랜드로 나와 있고 일반 장갑과 프리미엄 장갑이 반반 섞여있어 좋다. 비닐 장갑이라는 것이 실험할 때만 꼭 필요한 것이 아닌만큼 일단 근거리에 구비해 놓으면 요긴하게 쓸 일이 있기 마련이다. 지퍼 백도 마찬가지다. 여러가지 브랜드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쿡풀>을 선호한다. 사이즈도 다양해 목적에 따라 골라 쓸 수 있고 품질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계량컵도 몇 개 샀다. 메스 실린더가 없기 때문이다. 시약장이 따로 없는 입장에서는 화장품 상자들과 식품 보관용 유리병도 유용했다. 여기 저기서 몇 그램씩 얻어온 시약을 여기 저기서 빌려온 작은 100 밀리리터 시약병에 넣어 화장품 상자 가득 모아 놓았다. 식품 보관용 유리병에는 중요한 샘플을 담았다. 남의 실험실 구석 구석을 파고들어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리 잡았다. 속된 말로 알박기다. 하다 보니 얼추 이 팀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내가 개인적으로 투자하는 돈이 매달 2~3 만원 꼴이다. 이제는 특별히 필요한 게 없어도 <다이소>를 기웃거리고 있다. 가끔은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가끔은 장난 같기도 하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걸까? 보스가 뭘 해줄 의지가 없다면 나도 사보타주를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당연히 재료를 갖춰놓고 해야하는 일을 굳이 사비를 들여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지금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모든 것은 확률의 문제다. 매달 2~3만원을 투자하여 나를 상처 입히는 환경에 덜 노출시킬 수 있다면, 이를테면 열 번 맞을 돌을 세 번 맞을 수 있다면, 그건 내게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드디어 백 번째다. 기어이 선교자 케이스가 백 건을 채웠다

  다만 이번에는 새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전화 한 통과 함께 분류되었을 뿐이다. 나의 아주 특별한 영매 보스는 난데 없이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전화하여 얼마 전의 하키스틱 사건을 선교자 케이스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건 번호 #437492의 그 사건 말이다. 그 건을 '하키스틱 사건'으로 부르는 것은 살해도구가 하키스틱이기 때문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고, 이 양반아'라고 탄식할 뻔 했다. #437492은 전형적인 치정 사건이었다. 42세의 주부가 머리에 둔기에 맞아 사망하였고 남편이 유력한 용의자였다. 하키스틱에서 남편과 피해자, 그리고 신원 미상의 남자 한 사람의 혈흔이 발견되었다. 남편의 고집스럽게 뻣뻣한 백발이 인상적인 48세의 실업가였다. 이웃들은 남편의 사람 피 말리게 하는 수준의 의처증을 증언했다. 모든 것이 다 맞아 떨어졌다. 동기도 있었고 증거도 확실했다. 다만 그 대목에서 나의 영매 보스가 영매만의 특별한 능력으로 B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내 손으로 한 실험의 결과가 보스의 직감과 어긋날 때 당연히 나는 항상 전자를 신뢰했다. 때문에 내심 나는 연구소의 다른 책임있는 사람들이 제지를 걸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누구도 일체 우리 팀의 미련스러운 삽질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냥 '니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식이었다. 보스는 내게 아마도 살해 도구가 하키스틱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살해 도구가 맞다면 하키스틱에서 B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의 혈흔이 발견되었다는 분명한 증거를 무시한 채 그는 내게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을 포함하여 야구 방망이, 각목, 목검, 쇠파이프, 당구 큐대, 골프채, 과도, 벽돌 등을 죄다 다시 검사해보라고 지시했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그 생 노가다를 해가며 결과를 갖다 바쳤지만 당연히 어디에서도 B를 엮어넣을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후 보스는 한 번도 #437492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무의미한 노가다를 시켜 미안하다는 말도 안했다. 이미 피해자의 남편이 피의자로 기소되며 이미 마무리된 사건이다. 그런데 석 달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전화를 해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할 말을 잃고 수화기를 어깨와 턱 사이에 끼운 채로 창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날씨가 맑고 투명하고 화창했다. 아무래도 이 도시의 날씨는 정상이 아니었다.
- 그러니까, 이 사건이 선교자 케이스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거지요?
- 그렇지. 다행이야. 하마터면 빼먹고 지나가지 않았겠나.
- 저,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관련 없는 사건 같은데요.
- 무슨 소리야. 미스터 큐. 선교자 맞는 것 같은데? 
- 아닌 것 같은데요.
- 무슨 소리야. 피해자가 살았나?
- 아닙니다. 
-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지?
- 피해자가 둔기에 맞아 사망한 사건입니다.
- 둔기라는 게 중요한가?
- 그렇습니다. 교살이 아니지 않습니까.
- 꼭 교살만 되나? 독살이나 총살은 안되나? 혹시 끔살은 아니고? 
  끔살이라니. 이 양반아, 유머감각이라기엔 섬뜩하고 진담이라긴 더 끔찍하고.
- 그것이…… '선교자'라는 표현이…… '선로 위의 교살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랬지.
- 예. 그러니까요. #437492은 피해자가 둔기에 맞아 사망한 사건으로…….
- 어렵다. 어렵네. 이렇게 수사가 어렵다니까. 선교자만 잡고나면 앞으로는 수사 안 할까봐.
- 예…….
- 잠깐만. 느낌이 오는지 안 오는지 좀 볼께.
  잠시 침묵. 
- 선교자네. 느낌이 와.
- 하지만, 선생님. 피해자의 장례가 이미 석 달 열흘 전에 끝났는데……. 
- 해야지. 시약도 만들고 마네킹도 갖다 놓고 실험 준비도 다 해놓았잖아. 어쩌겠어. 다시 시신을 파내서 한 번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총점검을 해보지. 
- 하지만, 선생님……. 
- 오케이. 나 지금 바빠서. 일단 진행하고 보고해줘요.

 

하루 하루 쪽대본을 받아 연기하는 것처럼

 

  특수 마네킹을 끌어 왔다. 하나, 둘, 셋, 넷... 식은 땀이 절로 났다. 다섯, 여삿, 일곱, 여덟... 이 짓을 왜 해야하나 싶었다. 아무 의미 없는 짓. 생각해보면 이 팀에서 내가 한 실험이 항상 이런 식었다. 당일 아침에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지령을 받는다. 그리고 보스의 즉흥적인 생각을 몸으로 때워가며 구현한다. 지난 번에 이 건을 다루었을 때에도 그러했다. 이미 어지간한 상처 사진은 다 자료로 가지고 있다. 꼭 매번 해볼 필요는 없다. 아주 독특한 둔기가 아니라면 굳이 특수 마네킹에 상처를 내어가며 비교해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스는 그걸 원했다. 신선한 새 마네킹을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때려가며 짝을 맞춰 얻은 결과만이 의미있다고 여겼다. 특수 마네킹은 비싸다. 게다가 <다이소>에서 팔지도 않는다. 눈치보고 조심하면서 최소한으로 얻어 써야 하는 유형의 재료인 것이다. 인공 합성 혈액도 그렇다. <다이소>에서 팔지 않는다. 이 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혈흔 패턴 분석을 덱스터 모건 뺨 칠만큼 많이 진행했는데 한 번도 얻어 사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빌리는 인생의 애로점을 보스에게 이야기하면 그는 항상 이런 반응을 보인다. 공간과 재료를 둘러싼 그간의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전혀 기억을 못하는 것처럼.
- 다 같이 쓰는 공간이고 공용 물품인데, 왜 미스타 큐만 그런 이상한 말을 하지?
  그렇게 나는 또 절벽 끝으로 몰린다. 다른 실험실에 들어가서 재료를 꺼내오기를 거부하면 항명이 되고, 그렇다고 마치 007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기분으로 시키는대로 뭔가를 가지러 들어가면 어김없이,
- 저기요, 그거 누구 허락받고 쓰시는 거예요?
로 시작되는 익숙한 패턴의 트러블이 벌어진다. 싫은 소리를 듣기에 속이 터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기소 절차에 들어간 사건을 아무 이유 없이 (혹은 증명 불가한 영적인 이유로) 다시 끄집어 내는 것처럼 납득할 수 없는 지시를 수행하느라 한 번 먹을 욕을 두 번 먹는 게 화가 나는 것이다. 둔기에 의한 외상을 하루 아침에 질식으로 둔갑시키라는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누군가의 부질업는 희망을 실현시키느라 두 번 먹을 욕을 세 번 먹는 게 분통터지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백 번째 선교자 사건이라니. 말이 안되잖아!' 첫번째 증거는 이 케이스가 지난 5년 안에 여든 일곱 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영매 보스는 '미스터 큐, 놈의 마성에 가속이 붙고 있어'라고 설명했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 두번째 증거는 보스가 억지로 선교자 케이스에 끼워 맞춰가는 무리수를 던져가면서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기한이 정해진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물론 한 사람의 피해자라도 덜 발생하도록 빨리 놈을 잡는 것이 (정확히 말하면 수사관들이 그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하지만 보스가 서두르는 것은 빨리 놈을 잡는 것이 아니라 놈의 피해자를 하나라도 더 늘리려는 것이었다. 빨리 놈을 잡을 증거를 찾아내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케이스의 피해자까지 선교자 케이스로 엮어넣을 증거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분명 말이 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나의 심리적 상태가 정상이었다고는 하지 않겠다. 영매 보스로 인한 극심한 영적 스트레스와 명색이 생애 첫 직장인 이 범죄연구소에서 제대로 된 일원으로 인정방지 못하고 걷돌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나는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피해망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심지어 편집증 환자 취급을 받은 적도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건 정상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목소리믄 분명 이성의 것이었다.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감지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이건 상식이 아니다. 뭔가 있다! 분명히 뭔가 있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미스테리한 힘이 나를 움직였다. 나는 영매 보스의 사무실 키를 복사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점심시간 5분 전에 보안실에 달려가서 윗사람의 심부름을 하던 과정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우는 소리를 했고,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약간의 연기력을 발휘했다. 잠시 가슴을 졸였지만 그들은 끝내 별 의심없이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 열쇠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고 열쇠 집에 가서 복사한 다음에 점심 먹고 돌아오는 것처럼 연구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늦게 보스의 사무실로 은밀히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이것만 봐도 이 범죄 연구소가 얼마나 허술하고 낙후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 흔한 카드 키 시스템만 갖추었어도 나의 비밀 작전은 훨씬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다른 연구소들처럼 지문 인식기를  설치했다면 나는 보스의 엄지 손기락을 하나 잘라 왔어야 했을 것이다. 극도로 예민한 연구소들처럼 홍채 인식기를 설치했다면 보스의 눈알 하나를 도려내오는 수고를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구리 열쇠? 뭐야.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통과하던 1989년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웃음도 나왔다. 보스에게 한 방 먹인 듯한 기분이 통쾌했다. 지가 정말 용한 영매라면 지 사무실이 털릴 줄도 진작에 알았겠지. 

  CCTV가 없음을 확인했지만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라텍스글로브를 끼운 상태였다. 마스크도 끼웠다. <다이소>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보스의 컴퓨터는 비밀번호기 걸려있었으나 내선번호를 입력했더니 순순히 화면을 토해냈다. 바팅화면은 시장 바딕이나 다름없었다. 바로가기 아이콘과 작업 중인 문서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최근 작업한 문서' 항목을 열었다. 이 난장판에서 가장 합리적인 접근 경로였다. 첫번째 파일은 행정적인 것이었다. 범죄연구소 설립 20주년 행사 관련 협조 공문이었다. 두번째 파일은 가계부였다. 나는 남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사람이라 바로 창을 닫았다. 세번째 파일은 JPEG 이미지 파일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델의 화보가 떠올랐다. 나는 남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사람이지만 바로 창을 닫기는 힘들었다. 열 다섯개 파일에 차례로 서른 번의 클릭을 가하는 동안에 적절하지만 관련이 없는 자료들 혹은 부적절하거나 관련이 없는 자료들이 열렸다가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핵심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생각해보기로 했다. 선교자 사건과 관련하여 영매 보스가 전화했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떠올렸다. 7월 8일 아침. 수정한 날짜 순으로 정렬하였다. 7월 8일 오전에 수정되었던 파일은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워드 파일이었다. 파일을 열었다가 비밀번호 입력창과 마주했다. 또다시 내선번호를 입력하여 돌파하였다. 워드파일에 숨겨진 것은 박사 학위 청구용 논문이었다. 박사 학위? 영매 보스는 영매인데 왜 박사 학위가 필요하지? 별 관련이 없는 일처럼 보여 허탈했다. 굳이 그 내용을 살펴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영능력을 이용한 연쇄 살인마 행동 예측 모델> 나의 시선은 미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과 행을 따라 내달렸다. 뭐랄까, 논문이라기보다는 추리소설에 가까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매 보스 놈은 한 번도 과학 논문을 써본 적이 없는 듯 했다. 이딴 걸 심사하겠다는 심의위원장 이하 심의위원회 교수 놈들도 똑같은 놈들이겠지. 최소한의 학자로 자존심이 있다면 이딴 쓰레기를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논문은 25년 동안 100건 이상의 살인을 저지른 '선도자(선로 위의 도살자)’라는 희대의 연쇄 살인마를 추적하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특유의 영리함과 냉철한 직관으로 항상 연쇄 살인마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영능력을 이용한 그의 예측은 거의 정확하다. 하지만 멍청하고 게으르고 우둔한 조수가 매번 일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재료 없다고 하지 않고. 시간 없다고 하지 않고. 하지만 주인공은 너무도 젠틀하고 자상한 사람이어서 그 모든 실패를 용인하고 보듬는다. 나아가 놀라울 정도의 긍정과 낙관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타오르는 전의를 다진다. 물론 논문은 결과 및 토의를 쓰는 중에서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결론이 비어 있었다. 사실 이 대목에서 가장 황당한 것은 ‘예측 모델’ 비슷한 거라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름 끼쳤다. 온 몸의 세포 들이 들고 일어나 ‘뭔가 이상해!‘라고 외쳐대는 기분이었다. 분명 처음 읽는 것임에도 낯설지 않고 익숙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내가 그에게 제출한 지난 사건의 보고서 일부를 거의 옮겨다 넣다시피 했으니까. 너무나 명확했다. '선교자'의 뒤를 밟는 우리 팀 사건이 없이 그는 은밀한 임무를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 이 순간 우리 팀의 사건은 그의 논문 (혹은 소설)을 닮아가고 있기도 했다. 보스가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왜 그렇게 무리한 일을 만들었을까? 그는 자기 업무를 가지고 논문 (혹은 소설)을 쓰는 중이거나 자기가 쓴 논문 (혹은 소설)에 맞춰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을텐데,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진작부터 나는 그의 논문 (혹은 소설)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컴퓨터를 끄고 문을 닫은 다음에 조용히 실험실로 돌아왔다.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세상은 흑과 백의 문제가 아니다. 두부를 썰듯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모두가 회색 종자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좋은 사람이 다른 상황에서는 나쁜 사람이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심지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람도 물론 가능하다. 스스로는 좋은 의도를 갖고 결과적으로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의도를 갖고 결과적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문제고 모든 것이 회색이다. 영매 보스도 회색의 일부일 것이다. 연구소의 다른 사이언티스트들도 마찬가지로 회색의 일부일 것이며, 연구소에 드나드는 강력반 사람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란을 느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의 세계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면 대개 좋은 사람이었고 나쁜 사람처럼 보이면 대개 나쁜 사람이었다. 어찌보면 총천연색 동화책 안의 세계와도 다를 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 3D 최신 영화에 처음 등장한 2D 시대의 주인공처럼 외롭고 당혹스럽다. 


정말 기발한 엔딩을 찾았는걸


  눈물이 났다. 어떻게 생각하면 별 거 아닌 일인데 어떻게 생각하면, 또 별 거 맞는 일이었다. 이 정도에 상처받으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싶기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또 이 정도면 충분히 상처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스가 나에게 숨긴 것이 그 소설의 존재였을까? 이 범죄 연구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보스가 여기서 근무하면서 하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모르겠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아무래도 몸에 좋지 않은 걸 너무 많이 쐬여서 눈물샘이 망가진 건 아닐까 싶었다. 시원스럽게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척거리면서 볼을 타고 흘렀다. '운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망가진 수도꼭지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넘쳐 흐른 눈물은 목 부근에 이르러 실험복의 하얀 칼라에 축축하게 스며 들어갔고 크리넥스를 뽑아 눈을 비비는 사이에 장갑에도 묻어 났다. 장갑을 몇 번 벗었던 것 같기도 하고 좀처럼 수습이 안되어 맨 손으로 코를 풀기도 했던 것 같다.  '이거 크라임 씬 인베스티게이션(Crime Scene Investigation)이 아니라 크라이 씬 인베스티게이션(Cry-scene Investigation)이군', 잠깐이지만 뭐 그런 실없는 농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맞았지만 어쩌겠는가. 이 팀에는 나 혼자 뿐이다. 내 뒤를 봐줄 다른 사람이 없다. 다가오는 마감일을 맞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정확히 어디를 만지고 어디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다. 분명 생각보다는 많이 부주의했던 것이 틀림없다. 현장에서 채취한 시료의 일부에서는 나의 DNA가 검출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시료에서는 나의 지문(아주 또렷하고 온전한 지문이었다)마저 나왔다. 결과물을 출력해 놓고 들여다보자니 웃음이 터져나왔다. 울다가 웃으면 신체 일부에 극단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들었지만 도리 없었다. 길 그리섬이나 호레이쇼 케인, 맥 타일러 형사, 레이먼드 랭스턴 교수, 혹은 D.B. 러셀이라도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코미디다. 이 모든 게 그냥 한낱 싸구려 코미디일 뿐이다.
- 결과는 나왔나? 근데 뭐가 그렇게 재밌나?


  보스는 현장에 가지 않는다. 실험실에도 내려오는 법이 없다. 그냥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날이 있다. 보스가 생각이 있고 논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찬란한 부주의의 결과물에 실소하거나 꾸중을 퍼부어야 맞았다. 하지만 내 손에서 채어간 결과지를 확인하고 난 그는 하얗게 질렸다. 마치 영접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가스통을 뒷꿈치로 차서 종 울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의 표정은, 뭐랄까…… '어떻게 네 놈이 감히'에 가까웠다.
- 너였구나. 너였어. 네가 바로 선교자였어.
  기가 막혔다. 
- 설마요, 선생님,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 가까이에 있었어. 가까이에. 이렇게나 가까이에.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그는 전화를 찾았다. 떨리는 수화기를 들고 안전팀에 전화를 했다. 안전팀에서는 강력반쪽에 연결을 해줬고 보스는 "당장 무장 경관을 지하 3층 실험실로 보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장난치고는 고약하지 않은가. 사실 장난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장난보다는 진지한 그의 표정이 불쾌했다.
- 선생님, 1989년에 제가 몇 살이었는지는 아세요?
  아홉살? 여덟살? 이젠 나도 모르겠다.
- 선생님,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백 명이나 되는 피해자를 제가 죽였다고요?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잠시라도 눈을 떼면 내가 자기를 해코지라도 할 것처럼.
-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제가 범인이라면 왜 선생님께서 모르셨겠어요? 피해자의 영들이 진작에 말해줬겠죠.
- 입 다물고 있어!


  말하고 보니 약간 비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지. 아니야. 사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보스의 컴퓨터 안의 그 논문 (혹은 소설). 어떻게 설명할 건데? 남의 피와 땀과 눈물을 짜내서 자기 영달을 꾀한 놈이 아닌가. 그는 영매지만 범죄 연구소 정직원이다. 정년도 보장되고 대부분의 과학자들보다 연봉도 많이 받는다. 그런 자가 한 단계 더 올라가려고 누군가의 인생을 희생시키는 게 옳은가? 내게는 충분한 설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걸 위해서 남들한테 싫은 소리 해가면서 빌어먹을 빌리는 인생을 견뎌왔던 건 나였다. 면박, 좌절, 소외.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벌레나 그 밖의 또 어떤 흉측한 것이 된 것과 같은 깊은 우울함에 빠져들었고 축축한 늪에 빠져들어 다시는 두 다리로 지탱하고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었다.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오직 그가 주는 쪽대본에 맞춰 꼭두각시의 연기를 해왔는데…….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당신 장난감이냐?' 라고 욱하고 소리라도 질러봤어야 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소심해 빠진 성격 탓에 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이 가빠졌다. 오해를 받는 것은 그렇다 치자. 영매인 그에게 논리씩이나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제까지 실컷 총알받이로 써놓고 이제와서 경멸하듯 원망하는 그 눈빛은 좀 심하지 않은가. 그가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이 너무 싫었다. 보스는 그 동안 내가 시간을 끌고 일을 열심히 안해서 선교자를 못 잡고 있는 것처럼 은근히 무안을 주고는 했었다. 그런데 이제 의문이다. '선교자'라는 연쇄 살인마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 말이다. 


  경관 둘이 도착했다. 총을 겨누고 가까이 다가왔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팔을 뒤로 돌리게하여 수갑을 채웠다. 나는 그들에게만 들리고록 아주 작고 조용하게 말했다. "꼭 이러실 필요는 없어요." 그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 뒤에서 영매 보스는 배신감에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그의 믿음(내가 진범이라는)이 옳다면 분명 언짢은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 아래 깊숙한 곳에서 잠깐 올랐다 사라진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사람의 몸에는 650여개의 근육이 있다고 하는데, 찡그리는데에는 70여개의 근육이 필요하지만 웃는데는 단 12개만이 필요하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그는 12개의 근육을 모두 쓰지 않고 그 중 한두 개의 근육만으로는 웃고 있는 것이다. 확실했다. 그 표정은 마치 뭐랄까. ‘정말 기발한 결론을 찾았는 걸‘ 혹은  ‘이로써 올 가을에는 드디어 학위를 받을 수 있겠지‘ 따위의 생각을 애써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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