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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코시투코 커크랜드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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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크랜드라고 혹시 아세요? 유명한 야구 선수 이름인데. 메이저리그 시절에 꽤 날렸다고 들었어요. 통산 59승에 통산 방어율이 1.79인데, 아 글쎄 그게 겨우 데뷔 5년만에 이뤄낸 기록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왜 5년밖에 안 뛰었느냐. 문제의 59승을 올리던 날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났다는 겁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 다섯. 그 다음 5년 안에 통산 100승 투수가 되어주리라 의심치 않았던 그의 은퇴를 두고 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팬들 중 더러는 너무 슬펐던 나머지 콧물도 흘렸다지요. 스물 다섯. 따지고 보면 야구만이 아니라 어떤 경력이라도 접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입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인생이 남은 나이이기도 합니다. 충분히 뛰고 성공적으로 은퇴한 선수들도 새로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하는 마당에, 채 서른도 되기 전에 반강제로 은퇴해야 했던 선수의 막막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겠죠. 이후 닥치는대로 생계 유지에 나섰다고 하는데 신통치는 않았다고 해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염전을 샀는데 장마가 지는 격이랄까요, 물논을 샀는데 가뭄이 닥친 격이랄까요. 결국 그는 끝내 자기 길이 야구 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커크랜드씨는 그 이후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고 해요. 최고의 투수가 되려던 꿈을 접고 최고의 투수코치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지요. 연수를 받고 몇 해간 더블 A와 트리플 A를 전전하면서 코치로 경력을 쌓았고요. 그러던 중 그에게 투수 조련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한 일본 프로팀의 초청으로 태평양을 건너게 됩니다. 당시 그를 직접 픽업했던 '시마이 덴죠 오사마리즈'의 무라까와 쓰지마 회장님은 커크랜드씨가 투수를 지도하는 방식에 큰 감흥을 받았다고 합니다. 쓰지마 회장님의 회고가 담겨있는 자서전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회전 스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간다>의 2권 339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 미스터 커크랜드를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휠체어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라운드에서 휠체어라니.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 아닌가. 신기하게 여겨 구단 관계자를 붙잡고 물었다. 저 남자는 왜 저기에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미국 놈이 하는 말이 저 사람이 자기네 팀의 투수 코치라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헌데 가만히 지켜보니 힘이 느껴졌다. 두 발로 걸어다니지는 못했지만 눈빛이 살아있었다. 투수들 허리 높이에서 꼼꼼하게 자세를 관찰하고 지적해주는 목소리가 다정하면서도 단단했다. 신기한 것은 직접 투수의 몸을 만져가며 교정해주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코칭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본 투수 코치들은 (당시만해도) 일단 틀린 자세를 빳다로 다스렸다. 어깨가 빨리 풀어졌다, 그러면 빳따를 맞았다. 키킹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래도 빳다를 맞았다. 제구가 산으로 갔다, 그때는 죽도록 빳따를 맞았다. 관찰과 대화로 조련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날 밤 커크랜드라는 남자를 따로 만났다. '투수란 마법에 걸린 날의 여친보다 예민한 존재'라는 그의 설명에 감복했다. 반해버렸다. 바로 그 다음 해부터 우리 팀에서 코치를 하기로 계약을 했다. 스포츠 사업에 손을 대고나서 그렇게 가슴이 뛰는 일은 처음이었다. 미스터 커크랜드에게 1군과 2군을 통틀어 투수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사례가 없는 파격적인 대우다. 감독에게도 이 미국인 코치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회장인 나와 동기동창으로 생각하고 대접하라고 했다. 감독은 정말로 미스터 커크랜드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시 일년이 지났을 때, 우리 '시마이 덴죠 오사마리즈'는 일본 최고의 투수 왕국이 되어 있었다. 특별히 신인 픽을 잘한 해도 아니었다. 몇년째 2군에서 굴러 다니던 재공품들이 명품 투수가 되어 올라오는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말도 안돼! 감독은 미스터 커크랜드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기 시작했다. 집에 제단마저 차렸다. 왜 아니겠는가. 데뷔 후 8년간 3승 15패에 그쳤던 만년 2군 투수가 어느 날 갑자기 송곳 제구로 리그 최고의 타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데. 그처럼 사실상 당시의 우리 '시마이 덴조 아시마리즈'는 2두(頭) 체제였던 것이다. 비사이로 막가, 도나까와 쓰지마, 산사이도 모까, 도끼로 이마까, 깐데 또까, 바케스로 피바다, 미끼업시 다나까, 도코다이 야마도라 등 역사에 길이 남을 당대 최고의 투수들이 모두 미스터 커크랜드의 작품들이다." (무라카와 쓰지마,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회전 스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도끼다시출판, 2권, 339페이지)

 


*


  바로 그 커크랜드를 만나러 갑니다. 한때 메이저리그의 촉망받는 유망주였고, 이후 한미일 3개국의 프로무대를 모두 경험한 베테랑 투코(투수코치)로 변신한 남자. 게다가 한국에 건너와서는 투수왕국 덩킹 도너츠를 완성하여 5년간 코시(코리안시리즈) 무대만 다섯 번을 밟아 본 남자. 이후 도너츠의 만류를 뿌리치고 (물론 다른 모든 팀의 구애 또한 뿌리치고) 한국땅에 말뚝 박고 사업을 시작한 남자. 어떤 경력보다 코리안 시리즈 출전팀의 투수코치였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남자. 그래서 스스로를 '코시투코 커크랜드'라고 부르는 남자. 현재 '코시투코 커크랜드'의 대표이사인 남자. 지금 만나려는 사람이 바로 그 남자입니다. 


*


  커크랜드씨가 운영하는 '코시투코 커크랜드'는 창고형 용병할인마트입니다. 좋은 용병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곳이고요. 그래서 당장 용병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저희 구단에서는 저를 자꾸만 그리로 보내 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뿐만도 아닙니다. 저희 구단만도 아니고요. 프로 10개 구단의 스카우트 팀이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드나들고 있으니까요. 왜냐고요? 왜 다들 하필 '코시투코 커크랜드'만 고집하느냐고요? 물론 일단은 싸니까요. 하지만 그뿐만은 아닙니다. 용병을 구하는 것은 쉽지만 좋은 용병을 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잖아요. 특히 투수는 로또입니다. 타자 용병의 경우, 성실하고, 품성 바르고, 적극적으로 적응하면 (너무 당연한 말인가요?) 뭐 크게 손해날 것은 없는 편입니다. 에버리지가 정말 에버리지라도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팀이 워낙에 클러치 능력이 있는 선수 하나 없는 심각한 물타선이라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용병을 쓴다, 뭐 이런 개념이 아니라면 셈은 간단합니다. 이 선수를 빼고 벤치의 국내산 선수를 넣는다고 했을 때 과연 차질없는 대체가 가능한가를 가늠해보면 됩니다. 대개는 아무리 메이저 승격을 못해 한국에 왔어도 일단 적응만 하면 평균적인 한국 타자들 이상은 쳐주기 마련입니다. 또 아쉬우면 아쉬운대로 다음 해에 바꾸면 됩니다. 하지만 투수 용병은 다릅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투수 자원은 넉넉한 법이 없지요. 선발 투수는 특히 그렇고요. 좋은 투수와 평범한 투수와 나쁜 투수의 차이가 너무 확연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각 팀마다 선발로 투입가능한 A급 투수들은 기껏해야 한두명입니다. 나머지는 B급 투수들 중에서 그나마 꾸역꾸역 막아 넘길 수 있는 투수들이고요. 비싼 돈을 들여 용병 투수를 데려오는 이유는 바로 이런 선발 로테이션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인데, 그게 실패하면 오히려 부담은 연쇄적으로 가중될 수 밖에 없지요. 가령 어떤 팀은 꾸준히 6이닝에서 7이닝을 막아주는 좋은 용병 투수를 뽑았고 어떤 팀은 2이닝에서 3이닝도 똥줄타게 만드는 나쁜 용병 투수를 뽑았다고 해봅시다. 그 영향은 비단 그들이 선발로 나서는 한두 경기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도미노처럼 이어져 두 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일입니다. 성실하고, 품성 바르고, 적극적으로 적응해도 성적이 나와주지 않으면 치명타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투수 용병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스카우터들 입에서는 이런 소리까지 나옵니다. 성실하지 않고 품성이 개처럼 나빠도 잘 던지는 놈이었으면 좋겠다. 잘 던지면 장땡인 것이 투수라는 포지션입니다. 투수 용병을 잘못 뽑았다가 팀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정말 한 순간이라니까요. 

  그렇게 중요한 투수 용병입니다.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사람을 통해 구해야지요. '코시투코 커크랜드'에선 커크랜드씨가 직접 엄선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커크랜드씨가 누굽니까? 한미일 3개국 프로 무대를 모두 경험하고 투수 코치를 맡았던 팀을 5년 연속 코리안 시리즈에 올렸던 양반입니다. 세계적 노하우에 한국적 감수성을 갖춘 안목이라는 얘깁니다. 그런 양반이 골라주는 용병이라니 믿음이 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지요, 또 실제로도 커크랜드씨 덕을 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프로 10개 구단에서 매년 두 차례씩 커크랜드씨에게 고급 케이크를 선물한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고요. 아마 케이크 말고도 알게 모르게 여러가지 경로로 여러가지 차원의 보답이 행해졌으리라는 것이 이 바닥 사람들 모두가 공공연히 공유하는 추측입니다. 

- 아저씨, 저예요. 
  2층 사무실에서 나오는 커크랜드씨를 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커크랜드씨 또한 저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아마 나머지 아홉 구단의 스카우트 팀장과도 비슷하게 지낼 겁니다. 휠체어를 밀고 내려온 커크랜드씨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능글맞게 물었습니다. 
- 무슨 일이야? 
- 무슨 일은요. 아저씨 보고 싶어서 왔죠. 
- 미친 놈. 
  아마 나머지 아홉 구단의 스카우트 팀장들도 비슷한 욕을 먹었을 겁니다. 
- 필요한 게 있으니까 찾아왔지 니가 그냥 나 보러 올 놈이냐? 
  꼭 고향의 깐깐한 노친네처럼 하는 말입니다. 
- 역시, 아저씨는 쪽집게시네요. 
  남의 영업집에 영업시간에 찾아왔으니 영업과 유관한 이유가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 이번엔 뭐가 필요하다는데? 
- 투수요. 
- 그럼 타자 골라오라고 나한테 보냈겠냐? 
- 하긴 그렇네요. 
- 뭐가 또 하긴 그래? 나도 타자 조련에 일가견이 있다는 걸 네가 모르나보구나. 
- 어련하시겠어요. 
- 물론이지. 내가 키운 타자만 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양팔 간격이야. 
  어느덧 한국 생활이 10년차인데도 이렇듯 커크랜드씨는 아직 표현이 서툽니다. "양팔 간격으로 나란히 세우면 서울에서 부산 거리에 이를만큼"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용병 투수에 관해서는 커크랜드씨보다 나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없단 겁니다. 
- 그래서, 어떤 투수? 
- 일단 잘 던지는 싱싱한 놈이어야죠. 
- 그럼 여기까지 와서 못 던지는 놈 데려가려고? 
  표현은 조금 서툴지만 역시 말싸움에선 네이티브 코리언과 붙어도 밀리는 법이 없습니다. 

- 그건 그렇고 요즘 장사는 잘 되세요? 
  피자를 입에 밀어 넣으며 넌지시 물었습니다. 
- 물론 너희들 덕분이지. 외제라면 환장하는 너희들. 
  커크랜드씨가 껄껄 웃었습니다. 듣고 보니 백번 맞는 말이네요. 저도 따라 웃었습니다. 웃느라 씹다만 피자가 그만, 입 밖으로 번쩍 튀어나올 뻔 했지요. 피자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외국인이라 외국식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크기도 크고 치즈도 듬뿍입니다. 이상한 토핑으로 장난을 치지도 않습다. 한 쪽이 어지간한 프랜차이즈 피자 세 쪽 정도 크기로 느껴진달까요? 
- 물량이 딸리지는 않고요? 
- 어디든지 경계 인간이란 있는 법이니까. 
- 경계 인간이요? 
- 그래, 꿈도 있고 의욕도 있는데 실력은 자기네 바닥 무대에 오르기에 아슬아슬한 사람들 말이야. 
- 예를 들자면요? 
- 자네처럼. 차이라면 걔네들은 태평양 건너 여기나 일본으로 건너 오면 '경계 안의 인생'을 누릴 수 있지만 자네는 어디 건너갈 곳도 없단 것이지. 
  입맛이 싹 달아났습니다. 아픈 데를 찔린 셈이니까요. 많은 스카우터들이 그렇듯 저 또한 선수로 야구계에 입문했었거든요. 하지만 1군 무대에서 뛰어 본 경험이라고는 여덟 경기가 전부였습니다. 1군에서 던진 공을 다 합쳐도 삼십 개가 될까 말까지요. (어쩌면 사십 개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2군만 전전하다가 옷을 벗었고 "야구는 못해도 사람은 잘 알아본다"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세평에 의해 스카우팅 교육을 받게되었죠. 어쨌거나 저쨌거나 팀장까지 올라왔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선수 시절의 실패만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아픕니다. 
- 농담일세.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 그렇게치면 내 인생도 만만치 않으니. 
  조금은 심했다 싶었는지 커크랜드씨가 어쩐 일로 위로를 다해주네요. 이런 말도 덧붙여서요. 
- 양이 모자라지는 않나? 클램 차우더, 아니 조개 스프라도 더 줄까? 
  양이 모자라긴요. 배가 터질 지경입니다. 


*

 

왼쪽부터 차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23세 우완 미키 스필레인. 백인이고요. 싱글 A 방어율왕 출신입니다. 다양한 구질을 바탕으로 나이답지 않은 경기 운영력이 장점이고요. 인물도 훤칠합니다. 얼굴 값을 할 기회만 원천봉쇄한다면 성적은 백퍼센트 보장합니다.
* 다음은 24세 우완 업턴 싱클레어. 역시 백인이고요. 더블 A에서 6년간 17승을 기록했습니다. 아주, 몹시, 무척 뛰어난 성적이네요. 
* 다음은 28세 우완 마리오 푸조. 백인이고요. 더블 A에서만 8년을 뛴 베테랑 선수입니다. 구속도 느리고 구종도 평범하지만 나이답게 노련미가 비상합니다. 과거 일본 무대에서는 적응에 실패한 이유는 남다르게 강한 체취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 점 유의하셔야겠고요. 
* 다음은 45세 우완 허먼 멜빌. 백인이고요. 흰 재킷을 즐겨 입는다고 해서 별명이 '백색의 멜빌'입니다. 백의민족이라는 한국 사람들과 잘 어울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다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선발 등판 간격을 15일에 공 55개 정도로 지켜줘야 체력 부담을 덜어줄 수 있겠네요. 
* 마지막 두 명은 파릇파릇한 신출내기 들입니다. 21세 백인 우완 엘모어 레너드와 로버트 펜 워렌. 고교 졸업 후 싱글 A 팀들과도 계약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커리어를 쌓을 새로운 기회가 필요합니다. 한국 무대는 이들에게 기회의 땅이 될 것입니다. 

커크랜드씨가 직접 담금질한 이 고품질 완소 투수 여섯을 모아 저희 '코시투코 커크랜드'에서는 패키지로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199만 9천달러(회원가)에 당신의 팀을 업그레이드할 이 싱싱한 투수 용병들을 만나보십시오.

 

- 여섯 명이 한 팩이라고요? 
- 식스 팩이다. 각자 배에도 식스 팩이 있기도 하고. 
- 하나씩은 안 팔아요? 
- 우리 영업 방침이다. 새삼스럽게 알면서 왜 그러냐. 
- 무슨 수로 용병 투수를 여섯이나 써요? 규정이 맥시멈 셋인데. 그것도 같은 포지션으로는 두 명 까지고. 
- 그럼 옆집이랑 나눠. 
- 아, 뭘 또 옆집이랑 나눠요? 
- '코시투코'에선 원래 그러는 거야, 짜샤. 
- 게다가 왜 다 백인이에요? 
- 그래서 싫다면 '백인-흑인 믹스 팩'도 있다. 219만 9천달러. 흑인 프리미엄이다. 
- 또 다 우완 투수네요? 
- 그게 불만이라면 '우완-좌완 믹스 팩'도 있다. 299만 9천달러. 좌완 프리미엄이다. 
- 45세 허먼 멜빌은 왜 저기 껴있어요? 
- 우리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냐. 이렇게 싼 값에 공급하는데 여섯 개에 하나쯤은 유통기한이 조금 짧은 것도 들어가고, 원래 '코시투코'에선 그러는 거다. 

- 마지막 두 명은 아무 검증된 커리어가 없잖아요?

- 원래 믹스 팩의 취지가 그런 거다. 다양한 맛을 즐기시라고. 프리토-레이 믹스 팩을 봐라. 레이즈도 있고 치토스, 도리토스, 러플스도 있지만 퍼니윤스도 한 봉지 들어가지.

- 퍼니윤스가 뭐예요?

- 내 말이. 
- 아... 아무튼 이 패키지는 조금 그래요. 
- 그러니까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말해 봐. 
- 검증된 투수를 원해요. 아저씨 마법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이 패키지에는 즉시 전력감이 없네요. 
- 그래? 그럼 다음 진열대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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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차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30세 좌완 찰스 부코스키. 흑인이고요. 아메리칸 중부지구의 '데미소다 트윈즈'에서 핵심 불펜 요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작년 43경기 출장하여 방어율이 2.04. 굉장히 뛰어난 성적입니다. 트리플 A 시절에는 선발조에서 2018년 3승 5패, 2019년 6승 6패를 기록한 바 있으니 약간만 다듬으면 충분히 선발로도 통할 투수입니다. 단점으로 지적받던 뛰어난 영적 교감 능력 때문에 한때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커크랜드씨와 동행한 14박 15일간의 인도여행을 통해 자아를 찾으며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한 단계 올라섰습니다. 나아가 영적 교감 능력을 타자와의 볼카운트 승부나 주자 견제에 활용하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최근 그의 9이닝 당 볼넷 허용은 0.29에 불과합니다. 그를 상대해 본 타자들은 하나 같이 도깨비 장난에 홀린 것 같다며 탄식하더군요.
* 다음은 32세 우완 윌리엄 깁슨. 백인이고요. 아메리칸 서부지구 '시애틀 매러디스'에서 백업 선발 투수로 3년간 활약한 경력이 있습니다. 방어율 3.67에 14승 16패. 이후 어깨 부상으로 세 차례 토미 존 수술을 거치며 시즌을 접었고 끝내 기량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작년까지 트리플 A에서 뛰다가 방출되었습니다. 커크랜드씨는 '커크매직 프로그램'을 통해 깁슨을 완전히 다른 투수로 탈바꿈시켰습니다. 하체와 상체의 균형을 완전히 뜯어 잡았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하체와 상체를 바꾸었습니다. 물구나무 서기를 하여 팔로 마운드 위에 서고 다리로 공을 던집니다. 토미 존을 극복하는 정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이죠.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기회 뿐입니다. 물론 당신네 리그에서 물구나무 서기 피칭을 제재하는 규정이 없다면 말입니다.
* 다음은 56세 좌완 프랭크 허버트입니다. 흑인이고요. 내셔널 중부지구의 '피츠버그 파이어폭스'에서 19년간 활약했습니다. 84승 32패. 통산 방어율은 4.72로 대단히 준수합니다. 18년 전 팀이 리빌딩에 들어가면서, 나이를 이유로 보직을 중간 계투로 전환시키자 이에 반발하여 뛰쳐나온 사례입니다. 이후 트리플 A를 전전하다 은퇴하고 나이 탓에 재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된 그는 커크랜드씨를 찾아와 자신을 '리모델링'해주길 간청하였습니다. 커크랜드씨는 그에게 불고기를 맛보게 하면서 한국 생활도 꽤 나쁘지 않으니 여기서 야구 인생의 2막을 열어보지 않겠느냐 제안했다고 합니다. 커크랜드씨와 합숙하며 단련한 결과, 허버트의 최고 구속은 147킬로 수준을 유지하여 나이답지 않은 짱짱함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려 45년의 야구 인생 동안 1만 경기를 뛰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야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상황별 시나리오가 그의 데이타베이스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 믿기 어려운 회춘으로 피지컬 요소까지 돌아왔으니 적어도 환갑의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 최소 3년간은 선발의 한 축을 맡아줄 수 있는 선수입니다.
* 다음은 31세 레이먼드 챈들러입니다. 백인이고요. '휴스턴 잭애스'에서 5년간 뛰었습니다. 28승 5패. 통산 방어율 5.08입니다. 정말 희소한 양완 투수라는 데 장점이 있습니다. 스위치 피쳐라고 들어보셨나요? 완손으로 던지고 오른손으로 던지고... (그런데 두손으로 던지면 안되나요?) 특이하게도 그는 우완으로 뛸 때의 성적과 좌완으로 뛸 때의 성적에 있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승패수는 물론이고 평균자책점에서부터 WHIP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표가 소숫점 둘째 자리까지 차이가 없어 실로 지켜보는 이를 소름끼치게 만듭니다. 좌타자와 우타자와 스위치 타자, 누가 나올 타선이건 가리지 않고 투입이 가능하게 때문에 좌우놀이에 미쳐있는 감독님들 사랑을 듬뿍 받을 선수겠네요. 
* 다음은 30세 셔우드 앤더슨입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건스'에서 3년간 뛰었습니다. 첫해엔 5승 5패로 평범했으나 다음 해에 9승 무패의 기염을 토하며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이 투수의 장점은 눈이 네 개 달렸다는 것입니다. 시험관 아기 제 1세대 중 하나로 초기 기관 분화에 문제가 생기면서 89도, 91도, 88도, 92도 간격의 전후좌우로 배치된 눈을 가지게 된 것이었죠. 보통 사람들이라면 제대로 초점과 원근 잡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앤더슨의 경우에는 다행히 신경과 감각 또한 그에 알맞게 자리잡혀 원형 영화관 상영용 필름처럼 주위 360도의 영상이 중첩과 혼재없이 온전하게 이해되고 있다고 하지요. 한 사람의 인간으로는 불행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야구선수로 이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겁니다. 1루, 2루, 3루, 어디에 있던 주자들이 꼼짝을 못하거든요. 그가 마운드에 있을 때 카디건즈 포수들은 98퍼센트에 육박하는 도루 저지율을 보였을 정도입니다. 그는 비유적으로도 문자 그대로도 주자 없을 때 상황과 주자 있을 때 상황에 전혀 차이가 없는 투수입니다.
* 다음은 33세 가르시아 마르케스입니다. 히스패닉이고요. '애틀랜타 브레이크스'에서 역시 3년간 뛰었습니다. 첫해엔 6승 8패, 다음해에는 마무리 투수로 변신하여 3승 23세이브, 그 다음해에는 4승 34세이브를 기록하였습니다. 통산 방어율은 6.28에 불과하지만 "똥줄은 타도 블론은 없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마무리 투수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실제 그는 마무리 투수로 출전한 2년간 64경기에서 단 한번의 블론 세이브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담이 예사 선수들보다 훨씬 크다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나는 김장은 알아도 긴장은 모르는 남자다', '남자라면 정면승부', '너는 쳐라, 나는 막는다'등의 어록을 지닌 그는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정면 승부를 고집합니다. 그 결과 홈런도 맞고(2년간 피홈런 39개), 3루타도 맞고(2년간 피3루타 21개), 2루타도 맞습니다(2년간 피2루타, 56개). 하지만 신의 가호를 받는지 악마의 가호를 받는지, 신기하게도 역전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믿기 어려우시다고요? 믿으세요. 지금 바로 그 타들어가는 똥줄을 경험하세요.

커크랜드씨가 직접 담금질한 이 고품질 완소 투수 여섯을 모아 저희 '코시투코 커크랜드'에서는 패키지로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599만 9천달러(회원가)에 당신의 팀을 업그레이드할 이 노련한 투수 용병들을 만나보십시오.

 

- 이건 순 사기 캐릭들이잖아요. 
- 믿지 못하면 그냥 돌아가서 손가락이나 빠시던가. 
- 누누이 얘기하지만 아저씨, 여섯들이 포장은 너무 많아요. 핵가족이 일반화된 현실에서. 
- 우리 영업 방침이라니깐. 자꾸 한 얘기 또 하게 만들래? 
- 아니 규정이 엄연한데 무슨 수로 용병 투수를 여섯이나 쓰냐고요. 
- 그럼 옆집이랑 나누라니까. 
- 아, 뭘 또 옆집이랑 나눠요? 
- '코시투코'에선 원래 그러는 거야, 짜샤. 


*


  사실 사장님은 저를 이리로 보내면서 비단 주머니를 하나 건네주셨습니다. 만약 커크랜드씨가 말을 빙빙 돌리면서 재공품, 잉여품, 만화 캐릭터, 사기 캐릭터로 시간을 질질 끌거들랑 열어보라는 당부와 함께였습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곤 숨어서 주머니를 끌러 보았습니다. 그 안에선 편지가 하나 나왔는데, 사장님 아닌 회장님이 저 아닌 커크랜드씨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커크랜드씨에게 건네주라는 뜻이겠지요. 서둘러 다시 나가려다가 문득 내용이 궁금해졌습니다. 비단 주머니를 끌러보라고만 했지, 편지가 나오거든 읽지 말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으니까요. 재빨리, 그러나 흔적이 남지는 않게 그것을 열어보았습니다. 두 장의 백지가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아무 생각이 없단 걸까요? 혹시 오렌지즙이나 오줌이나 오렌지 먹고 싼 오줌으로 제가 알아볼 수 없는 밀서라도 만든 걸까요? 몸을 가다듬고 화장실에서 나왔습니다. 

- 참, 아저씨. 이거요. 
- 그게 뭔데? 
- 저희 사장님이 전해드리라고 하시던데요. 
  커크랜드씨는 편지를 받아들었습니다. 제가 확인했던 백지 두 장 그대로를 확인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애써 태연한 적 하면서도 긴장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한미일 야구 관계자와 바디체크를 밥먹듯이 하는 저 산전, 수전, 공중전, 수중전, 토끼전, 심청전, 춘향전, 방자전, 극장전 다 겪은 남자를 놀라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커크랜드씨는 두어번 헛기침을 했습니다. 

- 자네 에드워드 워티스라고 들어는봤나? 
- 잘 모릅니다. 
- 최고 165킬로를 자랑하는 좌완 투수가 하나 있어. 키 백구십에 몸무게 구십. 나이는 스물 넷.
- 최고 구속에 속는 게 한두 번인가요? 
- 평균 구속이 150에서 155킬로라면 입맛이 좀 당기나? 
- 믿을 수가 없군요. 그런 투수가 여기 있을리 없잖아요. 제구가 미친 여자 널을 뛰듯 멋대론가요? 
- 영점 캘리브레이션은 끝났어. 내가 직접 나서서 생 노가다로 개조해냈지. 이젠 칼제구야. 
- 구속 빠르고 영점도 잡혔다? 그럼 구종이 저렴한가요? 
- 적절히 섞어 던지기 좋은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 가끔씩 포크. 뭘 더 바래? 
- 구속 빠르고 영점 잡혔고 구종도 다양하다? 멘탈이 문젠가요? 
- 과거엔 문제였지만 지금은 아니야. 결혼하고 가장이 되더니 몰라보게 심지가 단단해졌어. 
- 그렇다면 살짝 땡기네요. 그런데 지금서야 그런 선수를 보여주시는 이유가 뭐죠? 
- 아따, 짜식 더럽게 말 많다. 그래서 만나러 갈꺼야? 말꺼야? 
- 지옥에서라도 모셔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가 아닙니까? 당연히 따라가야죠. 
- 그래? 정말로 지옥에 가는데? 저는 어깨를 으쓱해보였습니다. 
- 지옥이든 연옥이든, 단테의 신곡이든, 그게 저희 스카우터들의 일이 아닙니까. 
  커크랜드씨는 제게 '지옥행 급행열차' 티켓 두장을 내밀었습니다. 
- 그래, 그런 자세가 참 마음에 들어. 나를 따라 나서지. 

  지이이잉, 소리와 함께 그의 휠체어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잰 걸음으로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는 또 한명의 경계인간에게 '경계안의 인생'을 선물할 수 있을까요? 동시에 우리 구단의 이번 시즌 또한 축복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가 좋은 일이 아닙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커크랜드씨와 함께 칙칙폭폭, 지옥행 급행열차에 올랐습니다. 
- 워티스 같은 선수라면 아마 1~2년 안에 다시 미국 무대로 돌아가겠죠? 
- 그렇겠지. 아직은 젊으니. 여기서 실력을 입증만 한다면. 하지만 용병이 원래 그런 게 아닌가. 
- 아쉽네요. 아저씨가 숨겨놓고 팔만한 녀석이라면 오래 같이 뛰었으면 좋겠는데. 
- 등잔 밑이 어둡구나. 그게 네 밥줄 끊어지는 첩경이다. 
- 하긴 그렇네요. 그런데 아저씨, 워티스는 왜 따로 떼어서 팔아요? 뭐든지 벌크로 때려 파는 '코시투코' 답지 않게? 그만한 희소성이 있단 건가요? 
- 그런 소리는 한 적 없다. 
- 뭐라고요? 또 여섯 명이 한 팩이라고요? 
- 지옥산 투수 여섯 명이다. 우리만의 영업 방침. 한번만 더 얘기하면 백번째다. 
- 무슨 수로 용병 투수를 여섯이나 쓰냐니깐요? 용병은 맥시멈 셋인거 아시잖아요. 
- 그럼 옆집이랑 나눠. 
- 아, 뭘 또 옆집이랑 나눠요? 
- '코시투코'에선 원래 그러는 거야, 짜샤.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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