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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육식주의자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5.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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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P. 베이컨(Chris P. Bacon)은 특별한 후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 냄새만으로도 '고기 먹은 자'를 분간해낼 수 있었다. 그 능력이 별난 후각상피세포에 기인하는 것인지, 별난 후각숭모에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별난 후각 중추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잡아내는 징후가 (고기 먹은) 죄인들의 구취에서 유래한 것인지, 피부 땀샘에서 유래한 것인지, 아니면 후면 가스 배출에서 유래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는 죄인들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되었다. 눈 한 번 깜박 하는 사이에 그는 '고기 먹은 자'와 '선량한 일반 시민'을 분간해냈다. 정확한 사정거리를 측정해 본 사람은 없지만 대략 100보 안 쪽에서는 능히 분간을 해내는 것 같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어느 정도 사실에 바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몰래 육식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믿어서 손해날 것은 없지 않은가.) 만약 정말로 그의 후각세포가 100보 밖의 특정 분자들만 잡아내 조합하여 판별할 수 있는 것이라면 (흠, 좀, 무서운 일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실로 훌륭한 화학 센서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은 미스터 베이컨에게 특별한 능력을 선물해주었고, 다시 그 능력은 미스터 베이컨에게 속세의 권력을 선물해주었다.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선물을 양쪽에서 받는다.) 채식 사회 채식 당국의 고위 지도부가 그의 능력을 사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크게 중용한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다음은 말 그대로 폭풍 승진의 연속이었다. 채식 감찰 시스템의 변화 역시 그를 계기로 이뤄진 것이었다. 가령 옛날에는 감찰관들이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했다. 그런데 미스터 베이컨의 등장 이후에는 양지에서 일하며 음지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또한 과거에는 육식주의 및 잡식주의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을 '진실의 수조'에 넣어 재판했다. (거 왜 유서깊은 방법 있지 않은가. 용의자를 수조에 밀어 넣고서 살아 있으면 유죄, 죽어 나오면 무죄.) 하지만 미스터 베이컨이 등장한 요즘에는 그런 야만적인 행위가 사라졌다. 대신 의심가는 자들을 '진실의 방'이라는 곳에 몰아넣고 미스터 베이컨이 직접 들어가 감별 작업에 나섰다. 100보 밖의 고기 먹은 놈도 잡아낼 수 있는 그의 신통방통은 '진실의 방' 안에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다. 스트레잇 채식주의자마저 억울한 죽음으로 무죄를 증명할 수 밖에 없었던 '진실의 수조'가 그나마 사라졌다는 점에서 다소나마 진보가 이뤄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미스터 베이컨의 지목을 받게 된 이들 중 자신이 육식했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항상 예외 없이 추가적인 옥신, 각신, 고문, 자백의 과정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명의 과정이 없는 점, 일종의 관능 검사에만 의존하여 죄의 유무를 따지는 방법이라는 점, 수사 착수에서 최종 판결까지 모든 과정이 특정 개인 한 사람의 능력에 의존하여 진행된다는 점 등에서 비판의 여지는 충분했다. 막말로 어느날 갑자기 미스터 베이컨이 권력자의 개, 아니 권력자의 코가 되어 지저분한 일을 벌인다해도 지금으로서는 제어할 길이 없었다. 실은 당국 내에서도 소수의 양심인들이 악용의 가능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냈다. 신녀 혹은 영매에 의존하는 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미스터 베이컨의 코를 따버리려는 우리 분리주의 육식저항세력의 노력은 지난 10여년 간 줄기차게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 나쁜 놈의 코는 (기능에 있어서도 물론 위협적이지만) 상징으로의 의미 역시 적지 않았다. 말하자면 채식 압제 시스템 그 자체이며 그 존재만으로 채식에 반하는 이들이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였다. 물론 미스터 베이컨의 등장 덕분에 끔찍한 '진실의 수조'가 사라졌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과거에는 연간 2천명의 시민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그 수조에서 희생되었다.) 공은 공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과는 과다. '진실의 수조'가 있으나 없으나 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잡혀간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었다. 익사 당해 죽는 게 아니라 고문 당해 죽기 시작했을 뿐이다. 어느 쪽이 더 낫고 어느 쪽이 더 못하단 소리는 차마 못하겠다. 나아가 채식주의자가 아님을 끝내 자백했을 때 총살형에 처해진다는 사실에도 여전히 차이가 없다. 고문 당하다 총살되느냐, 고문 없이 총살되느냐의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육식 혐의를 받는 시민들을 향한 사회적 인식 역시 쥐꼬리만큼도 나아지지 않았다. 미스터 베이컨이 사라진다면 과연 1만 3천 육잡식인들의 인권을 존중받을 수 있게될까? 그건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진실의 수조'가 부활하게 될 가능성도 크다. (인류의 역사라는 게 그렇게 '편안하게' 퇴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스터 베이컨을 노릴 수 밖에 없다. 설령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현금의 인류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다양성 존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결정적 반전의 계기는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슨 수로 100보 안쪽으로 잡입하냐는 것. 고기 먹은 놈이 사정권 안에 들어가면 귀신처럼 알아차리는 개코 고양이 목에 어떻게 방울을 달아내느냐는 것이 문제다. 여기 몇 가지 답이 마련되지 않은 질문이 있다. 
① 미스터 베이컨의 코가 고기 먹은 자를 감별한다면 그 정확한 작동 범위를 몇 보 부터라고 보아야 하는가?
: 전술했다시피 소문에 따르면 100보까지 감지가 가능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100보가 정말 100보의 물리적 거리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 뛰어난 능력을 가장하기 위해 동원된 표현적 차원에서의 100보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정말 정확히 100보라고 치자. 그렇다면 99보에서는 걸린다. 하지만 101보에서는 걸리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식의 작동이 가능할 수가 있는지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다.

② 미스터 베이컨의 코가 고기 먹은 자를 감별한다면 그 구체적 민감도는 어느 정도인가? 
: 다시 말하자면 육류 섭취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가령 소고기 한 점을 먹은 경우와 소 한마리를 다 먹은 경우가 같을 수야 없다. 붉은 고기와 흰 고기가 같을 수도 없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고기'를 섭취한 경우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음식에 포함된 육류 성분을 섭취한 경우는 명백히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스테이크처럼 그 조직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섭취하는 경우와 국, 찌개, 스프 등으로 국물을 낸 경우의 섭취하는 경우는 또 달라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만약 그런 차이에 무관하게 다 잡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③ 미스터 베이컨의 코가 고기 먹은 자를 감별한다면 실제 육류 섭취 후 그 개코에 잡히지 않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가?
: 소화, 분해, 흡수, 및 배설을 거쳐 육류 섭취의 흔적 또한 몸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 경과에 따라서 미스터 베이컨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기준이 달라질 것이다. 그가 진짜 영매나 신녀가 아닌 이상 소화액에 뒤섞여 이미 산산히 흩어졌을 육식의 징후를 잡아낸다는 것도 믿기가 어렵다. 만약 그런 차이에 무관하게 다 잡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역시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상기 의문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개탄했다. 국내의 열악한 데이터베이스 환경을 감안하지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미스터 베이컨을 제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행동은 그의 구체적인 능력에 관한 믿을만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섣불리 행동에 옮겼다가 실패하면 경호만 삼엄해지고 육잡식인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질 것이었다. 은밀하게 정보를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완벽한 계획을 수립하여 거사는 단 한 번에 성공시켜야 한다는데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레밍즈처럼 우루루 미스터 베이컨의 아가리로 (아니 콧구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절대 안될 일이었다. 우리는 한 번에 딱 한 명씩만 번갈아 미스터 베이컨에게 접근해보며 그 개코의 정확한 동작 및 감지 범위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러다 혹시 한 사람이 걸리면 그렇게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 한 사람이 도전하고, 또 그 다음 한 사람도 걸리면 그 다음에 또 한 사람이 나서고… 이런 식으로 이 대담하고 위험한 과업을 완성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니 우리에겐 총 열다섯 번의 기회가 있다. 동지가 열다섯명이니 기회도 열다섯. 세상에는 여전히 1만 3천으로 (비공식) 추정되는 육잡식 인구가 존재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육식권을 되찾고자 초개와 같이 몸을 던질만한 사람은 채 스무 명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으로 서글프기도 하지만, 늘 그런 법이다. 희생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지만 모두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면 소수의 희생으로 완성된 권리라도 결국 누려질 순간에는 공평하게 모두의 것이 된다. 그렇다고 모두가 몸을 낮추고 조용히 남이 나서주기만을 기다린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에서 제비뽑기를 했다. 공평하게 부담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설명한다고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합의한 조건 아래서 우리가 합의한 (미스터 베이컨으로부터) 일정 위치까지 다녀오는 것이 미션이 되겠다. 다만 그 망할 개코의 동작 및 감지 범위를 탐색하다가 혹시 체포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육식인임을 자백하지는 않기로 결의했다. 끝까지 잡아 떼고 혼자 뒤집어 써야 다른 동지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고문을 감내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 제 발로 나타났다가 붙들린 다음에 스스로 육식인임을 인정하는 범죄자가 (물론 우리는 우리가 범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아진다고 생각해보라. 필경 놈이 날카롭게 의심의 레이다를 가동시킬 것이다. 그러면 경호는 더 삼엄해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우리의 계획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첫 주자는 서로인 시장 야채가게 상인 휠렛 미뇽(Filet Minyon, 35세 남성)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어째 기운도 없고 머리도 안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육식 매니아 중의 육식 매니아다. 당첨 제비를 뽑아들고 그는 이미 각오가 되었다는 듯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만 이렇게 말했다.
- 대신 마지막으로 소고기 한 번 배터지게 먹고 가게 해주오.

  요청은 수락되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 동지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24시간 후 휠렛 미뇽은 기자로 위장하여 채식 당국의 프레스 룸에 들어갔다. 업적 자랑도 겸하여 직접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길 좋아하는 크리스 P. 베이컨이 매주 월요일 티본 체육관을 빌려 성대한 프레스 데이를 연다는 점을 노린 계획이다. 휠렛 미뇽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긴장했다.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휠렛 미뇽은 기자 출입증을 매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기자 출입증에 소형 위치 추적기가 달려 있었고 그 좌표는 오퍼레이션 룸의 전광판 위에서 점멸하는 붉은색 점으로 표시되었다. 우리 중 컴퓨터에 능한 자가 크리스 P. 베이컨의 자리로부터 휠렛 미뇽의 좌표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였고 그 미터법에 의한 결과를 다시금 (굳이) 보 단위로 환산하여 전광판 상단의 또 다른 전광판에 아라비아 숫자로 출력하였다. 108보, 107보, 106보… 휠렛 미뇽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105보, 104보… 지켜보는 우리조차 목 뒤로 육수가 줄줄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103보, 102보… 우리 중 더러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101보, 100보. 아! 탄성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100보인 것이다. 크리스 P. 베이컨은 (신이 내린 개코이자 육식인들의 저승사자라는 크리스 P. 베이컨은) 비록 순간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코를 후비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어떤 특별한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꿀꺽. 휠렛 미뇽는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섰다. 99보. 바로 24시간 전 소고기 5인분을 먹은 휠렛 미뇽이 정확히 99보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엇지만 그 대단하다는 미스터 베이컨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여전히 줄창 기자회견 용 원고만 검토하고 있을 뿐이었다.

  99보!

  우리는 흥분했다. 오퍼레이션 룸의 공기가 묘하게 달아올랐다. 일단 이 사실만 공개적으로 밝혀져도 크리스 P. 베이컨의 권력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될 것이 확실했다. (그러면 그렇지. 100보 밖에서도 고기 먹은 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정교한 데이터가 필요했다. 놈을 완전히 무너뜨릴 결정적 한 방이 필요했다. 우리는 휠렛 미뇽에게 일단 후퇴하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99보에서 고민 끝에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표가 나지 않게 기자회견장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이로써 실험의 방향이 구체적으로 설계되기 시작했다. 만약 휠렛 미뇸이 100보째에서 걸렸으면 우리는 골치 아픈 결정들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과연 24시간 전에 소고기 5인분은 너무 많았던 것일까?’ 와 같은 질문들에 답을 찾아야 했을테니까.) 하지만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나왔고 지금으로서는 다른 변인을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두번째 주자인 녹즙 판매원 해밀턴 버거(Hamilton Burger, 29세 남성)에게도 똑같이 일요일에 소고기 5인분을 먹였다. 그리고 24시간 후 월요일 프레스 데이에 참석시켰다. 해밀턴 버거는 미스터 베이컨으로부터 100보 거리까지는 자신있게 걸어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다음부터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눈을 감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햄버거의 모습이 폐쇄회로 카메라 한 구석에 잡혔다. 99보. 이제 휠렛 미뇽이 도달했던 지점까지 도착했다. 그는 (사실 숨이 찰 이유는 없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98보. 드디어 98보! (그 순간 지켜보던 우리들 중 일부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했다.) 하지만 다행히 햄버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98보! 정말로 98보!

  우리는 또다시 흥분했다. 오퍼레이션 룸은 열광의 도가니탕, 아니 도가니였다. 98보! 불과 24시간 전에 소고기를 5인분이나 먹어치운 범죄자가 (물론 우리는 우리가 범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98보 밖에서 얼쩡거려도 미스터 베이컨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저 멀리 희망의 빛이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미스터 베이컨의 능력은 예상대로 입에서 입을 거치며 다소 부풀려진 경향이 있어보였다. (짜식이 순 거품일세!) 하긴 100보라면 솔직히 말도 안되게 먼 거리이기는 하다. 10보라도 믿을까 말까인 마당에 말이다. 

  다음은 세번째 주자 사찰음식 전문가 바브 E. 큐(Barb E. Cue, 40세 남성)의 차례다. 역시 일요일에 소고기 5인분을 먹여 24시간 후 월요일 프레스 데이에 참석시켰다. 바비큐는 워낙 울렁증이 심해 보는 우리가 다 마음을 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업적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는 미스터 베이컨의 단상으로부터 100보 거리까지 쭈빗쭈빗 다가간 바비큐는 크게 한 숨을 쉬더니만 99보와 98보 거리까지 접근했고 마침내 한 걸음 다가간 다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97보! 정말로 97보?

  오퍼레이션 룸의 우리는 우주선 발사에 성공한 NASA 직원들처럼 (혹은 월드컵 우승팀 선수들처럼) 얼싸 안고 기뻐했다. 97보! 세 걸음이나 더 가까이 접근했다. 이쯤되면 단순히 미스터 베이컨을 제거하고 말고 차원의 문제가 아닌 듯 보였다. 이제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선 숨어 있던 육잡식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할 것이고 채식 사회 지도부 안에서는 내분이 발생할 것이다. 채식 감찰은 한동안 미스터 베이컨의 개코 권능에만 의존해왔으므로 그 기능을 잃고 코마상태에 빠질 것이고 우리 저항세력의 입지 역시 한결 넓어질 것이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다음 프레스 데이가 다가오자 네 번째 주자 해먼드 에그(Hammond Eggs, 55세) 아저씨가 나섰다. (마찬가지로 일요일에 소고기 5인분을 먹였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교적 97보까지는 무난하게 접근한 햄에그 아저씨는 십여분 동안 그 자리에서 돌부처처럼 서서 망설이던 끝에 어렵게 걸음을 떼었다. 96보. 예상과는 달리, 혹은 예상대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단지 긴장한 햄에그 아저씨가 바지에 소변을 지리는 바람에 주위에 작은 소요가 일었을 뿐이다. 

  96보!

  뭔가 이상하다는 반응이 우리 안에서 나왔다. 소고기를 5인분씩이나 먹은 사람이 무려 96보 거리까지 접근했는데도 그 대단한 크리스 P. 베이컨은 코만 후비고 앉았단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게 과연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 일인가. 누군가 이런 주장을 했다. ("크리스 저 새끼, 순 뻥카 아닐까?”) 일면 타당한 지적이었다. 문제는 이로써 우리 안에서 시작된 이상 기류다. 저들 안에서 일어나야 할 분란이 도리어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고도 신기하다. 우리 분리주의 육식저항세력은 졸지에 강경파와 신중파의 두 파벌로 나뉘어 우리는 격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니까 미스터 베이컨의 능력이라는 것이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니 혁명을 서둘러야 한다는 그룹과 미스터 베이컨이 함정을 파놓고 우리 모두가 ‘진실의 방’으로 돌진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조금 더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는 그룹으로 우리는 나누어졌다. 심지어 자주 포착되는 미스터 베이컨의 코 후비기가 단순 습관이냐 후각 센서의 캘리브레이션이냐를 두고도 서로 주먹다짐까지 벌였다. 누군가 이런 지적을 했다. (“크리스 그 새끼, 생각보다 영리한게 아닐까?”)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 남자의 대단한 코가 제대로 한 번 작동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조직은 설립 이래로 고통스러운 한 주를 보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시 일요일이 되자 작전의 방법을 두고 또 진통이 일어났다. 다섯번째 주자는 애리얼 V. 이건 (Ariel V. Egan, 28세 여성)이라는 이름의 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 (PETA)에서 일하는 아가씨였는데 그녀를 끌어들이기 위한 강경파와 신중파 사이의 신경전이 대단했다. 그녀가 마지막 만찬, 즉 소고기 5인분을 먹는 과정도 평조직원에게는 공개가 되지 않아 조직의 투명성을 놓고도 격렬한 몸싸움이 있었고 과학적 변인 통제의 실패를 우려하는 몇몇은 삭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오퍼레이션 룸도 반으로 나누어졌다. 강경파들은 오른쪽으로, 신중파들은 왼쪽으로 각각 모인 상태로 우리는 애리얼이 미스터 베이컨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당돌하게 100보 거리까지 성큼성큼 걸어들어갔고 그 다음에 간단하게 네 걸음을 더 들어가 한계선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만 한 걸음을 더 들어갔다. 95보 거리까지 말이다. 그리고 (이제 너무 반복되어 식상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95보!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규칙대로라면 그녀는 그 지점에서 거꾸로 돌아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갔다. 94보 거리. 오퍼레이션 룸은 긴장으로 가득 차올랐다. 의장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 강경파쪽에서 웅성거리더니만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후퇴 명령을 내리지 못하도록 의장을 끌어내리려고 하자 신중파쪽에서 그것을 제지하러 다시 앞으로 몰려나갔다. 몸싸움과 주먹다짐, 그리고 고성과 욕설. 그 사이에 그녀는 명령을 어긴 채 미답의 영역으로 접근했다. 94보, 93보, 92보, 91보. 90보 거리까지 가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나왔다. 그 사이 미스터 베이컨은? 염병할 코만 후비적거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무슨 일 좀 생겨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이제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이걸 쾌거라고 해야하나? 아닌 것 같았다. 이 사건으로 우리 내부의 결속이 더욱 빠르고 심각하게 와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첩자가 있을 것 같다는 은밀한 소문이 돌았다. 그 첩자의 정체를 두고 강경파는 ‘배신자’이라고 규정했다. 같은 첩자의 정체를 두고 온건파는 ‘혁명의 실패를 원하는 배신자들’그 첩자의 정체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정반대의 성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또 몸싸움과 주먹다짐, 그리고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누군가 한탄했다. 누군가 한탄했다. (“젠장. 이러다가는 채식주의자들에 잡혀 죽기 전에 우리끼리 싸우다 죽을 가능성이 더 높게 생겼다.”) 백번 맞는 말이었다.

*

  우리 안에는 이 불미스러운 사태를 진심으로 우려하는 소수가 있었다. 이들이 모여 새로운 노선을 만들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분리주의 육식저항세력의 제 3의 길’이라고나 할까?) 와해되는 조직을 우려하여 또 하나의 독자 그룹을 만들어 행동에 나서나는 논리는 다소 아리송하지만 인간 사회의 모든 일이 따지고 보면 사실 이런 식인 경향이 있다. 어쨌든 이들의 주장이란 강경그룹과 온건그룹을 머리 터지게 싸우게 만드는 문제의 ‘100보 프레임'을 (말하자면 일주일에 한 걸음씩 들어가려면 100주 동안 이 짓을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타파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는데 대담하게도 채식 사회의 주요 고위 인사 중 한 사람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채식 학자이자 채식 칼럼니스트인 살로만 류수디 교수였다. (‘자유기고가’를 ‘자유고기가’로 바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의 도움을 통해 우리는 7월 7일 채식절 행사장에 잠입했다. 한 달 동안 육식을 하지 않은 정예 멤버만을 선별하여 행사장인 그랜드 힐튼 호텔의 24층 연회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환기구를 기어들어가서 연회장의 위쪽으로 서서히 접근했다. 크리스 P. 베이컨이 도착하기 전에 그들의 허점을 찾아내는 것이 첫번째 미션. 크리스 P. 베이컨이 도착했을 때 약 2.5 미터 위쪽의 그들을 감지해내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하느냐를 알아내는 것이 두번째 미션. 위험도가 상당한 두번째 미션쪽을 염려하고 있는 우리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뭔가 타는 냄새랄까. 환기구에 냄새가 나는 것은 뭐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벌써 그들의 잠입을 눈치채고 함정을 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코 끝을 간지럽히고 침을 꿀꺽 삼키게 하는 타는 냄새라는 것이다. 고민 끝에 눈으로 확인을 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그들 중 두어명이 환기구 구멍을 통해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고 한다. 아아, 그 곳 연회장에서는 우리도 알고 있던 것처럼 채식 사회 고위 지도부 멤버들의 파티가 벌어지는 중이었는데… 그런데 그 파티가 고기 파티?

  산처럼 쌓여있는 고기, 고기, 고기. 심지어 우리 육식주의자들조차 본 적이 없는 그 많은 고기.

  그들은 말도 못할 허탈감에 환기구를 빠져나와 오퍼레이션 룸으로 돌아왔다. 강경파고 신중파고 제 3의 길이고 개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도 어이가 없다보니 웃음이 났다. 배를 잡고 웃었다. 횡경막에 진동이 올 때까지 웃다보니 눈물이 났고, 울다가 웃은 관계로 신체 은밀한 곳에서 기묘한 변화가 시작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간 희생된 동지들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가운데 각성의 순간이 찾아왔다. 정확히 이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진화하여 왔는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언제부터 인류가 채식을 하게 되었는지. 왜 육식이 금지되었는지.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 채식 사회의 지도층이란 사람들은 육식을 즐기고 있는 건지. 

  하긴, 어쩌겠는가. 이 행성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고기인 것을.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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