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그의 이름은 모르모트 마이티
낙농콩단

070. 그의 이름은 모르모트 마이티

by 김영준 (James Kim)

  바늘은 아주 새침하게 살갗을 찢고 들어왔다. 물론 마이티는 그걸 볼 수가 없었는데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전에 다른 모르모트들이 어떻게 주사를 맞게 되는지 본 적이 있어서다. 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마이티는 언젠가 우연히 보았던 어떤 모르모트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경고등처럼 빨갛게 변해버린 눈, 안쓰럽게 발버둥 치는 네 다리, 부끄러울 새도 없이 드러난 보들보들한 배에 벼락 천둥처럼 파고드는 두꺼운 바늘의 뾰족한 끝. 그 날 이후 마이티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하얀 옷을 입고 반들반들한 파란 장갑을 낀 커다란 괴물의 손에 잡혀 그런 꼴이 된 채로 주삿바늘을 맞이하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결국엔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스스로 볼 길이 없어 몰랐지만 마이티는 자기 또한 언젠가의 다른 모르모트들처럼 흉하고 앙상하고 추레한 모습으로 울부짖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좀 서글퍼졌다. 바늘이 빠져나가자 비로소 긴장의 끈이 탁 풀리고 사지가 축 늘어졌다. 이윽고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따끔했던 자리에 다시 시원한 느낌이 서서히 퍼져나갔는데 그와 거의 동시에 잠이 쏟아졌다.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 마이티는 항상 그렇던대로 그의 안락한 (하지만 좁고 캄캄한) 우리 안에 있었다. 그가 이리로 옮겨지던 날, 주어졌던 집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안전 캐비닛이라고 불렀다. 안전이란 말이 그를 위해 안전하다는 것인지 그를 여기에 집어넣은 괴물들에게 안전하다는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방금 전의 그 일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몰라 마이티는 푹신푹신한 깔짚 속으로 파고든다. 오늘 아침에 새로 갈아서 그런지 보들보들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그냥 지금 이대로 천년이고 만년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괴물들은 하루에 한 번 깔짚을 갈아주었다. 그 곳은 몹시 어두워 시간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마이티는 배꼽시계의 천부적인 감각으로 아마 점심 무렵이 아닐까 짐작하였다. 점심이라면 논리적으로도 맞아 떨어진다. 왜냐면 괴물들은 깔짚을 갈면서 먹이와 물도 함께 갈아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의 식사시간에 맞춰 우리에게도 밥을 주는 게 아닐까, 꽤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마이티는 하루 중 그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종일 비비적대며 부서진 깔짚이며 퀘퀘한 악취를 풍기는 배설물이 불쾌해 견질 수 없을 그 때, 괴물들이 나타나면 두렵기보다는 오리혀 반가웠다. 뭔 짓을 해도 좋으니 제발 저 배설물과 배설물에 젖은 깔짚을 치워주었으면, 딱딱하게 굳은 사료 덩어리 대신에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새 먹이와 깨끗하고 신선한 물을 넣어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마이티는 그런 면에서 좀 유별났다. 자기가 뭉개고 자기가 부순 깔짚이 지저분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고 자기 몸에서 나온 배설물들이 역겨워 일 분 일 초도 견딜 수가 없었다. 원래부터 그랬는데 이 곳에 오고 나서 조금 더 심해진 편이다. 어떻게 저 더러운 것들을 한 방에 두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산단 말인가. "다른 미개한 놈들이야 그런 줄도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마이티는 그가 가진 대부분의 여가를 캐비닛 안을 깔끔하게 유지하는데 할애하였다. 부스러지거나 뭉그러진, 혹은 타액이나 털이 뭍은 깔짚과 사료 부스러기들을 캐비닛의 한 쪽 구석으로 모았고 그 곳에서만 변을 보았다. 일을 끝내면 항상 깔짚으로 덮어 눈에서 보이지 않게끔 하였음은 물론이다. 동시에 그는 아직 깨끗하고 빳빳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깔짚들을 반대쪽으로 옮겼다. 휴식과 숙면을 위한 그만의 안락한 공간이었다.

 

  대개 괴물들은 어김없이 비슷한 때에 나타났는데, 언젠가 딱 한 번은 무려 너댓 시간을 늦은 적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한 시간쯤이야 늦어도 표도 안 나고 알아차릴 만큼 똑똑한 모르모트도 없겠지만 네댓 시간이라면 이야기는 좀 다르다. 웬만큼 바보가 아니라면 올 때가 지났는데 오지 않는 것을 능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다. 그 때는 인내심이 어지간히 강하다 자부하던 마이티도 몹시 화가 나서 앞 발로 안전 캐비닛의 창살을 붙잡고 꽤액 꽤액, 소리를 질렀다. 다른 모르모트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방 안은 알아듣기 어려운 괴성과 울음으로 가득했다. 특히 마이티는 배설물이 자신의 캐비닛 안에 가득하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배가 고팠으나 하루 먹은 딱딱해진 먹이를 먹고 싶진 않았고 괜히 물도 오염된 것 같아 마시지 못했다. 목이 바싹바싹 타오르니 마이티의 불안감은 더더욱 심해졌다. 아마 괴물들이 조금만 더 늦게 새 깔짚과 먹이을 가지고 왔더라면 마이티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날 어째서 네댓 시간이나 늦어졌는지는 끝내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불을 켠 괴물은 마이티의 안전 캐비닛을 들어내 바닥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머리 위를 막던 철창이 사라지니 그나마 좀 마음이 편해졌다. 괴물은 손을 뻗어 마이티의 두 다리를 잡고 거꾸로 들었다. 온 몸의 피가 모두 머리로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괴물의 손은 매끄럽고 차가웠으며 무엇보다 컸다. 그가 한 번만 힘을 우둑, 준다면 가엾이 마른 마이티의 몸은 차에 깔린 것처럼 찌부러지고 말 것이었다. 특히나 이렇게 붙들려 있을 적에는 잘 발달된 근육과 꿈틀꿈틀 흐르는 혈관의 소리마저 생생하게 들려 적잖이 두려웠다. 물론 그들은 마이티를 그런 식으로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동안 먹이고 키운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괴물은 오래된 깔짚을 모두 검정색 비닐봉지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마대자루에서 새 깔짚을 퍼내 마이티의 캐비닛에 듬뿍 넣어 주었다. 비록 아슬하게 거꾸로 매달린 처지였으나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이티는 기분이 좋았다. 괴물은 마이티를 다시 캐비닛 안에 넣어 깔짚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고 뚜껑을 덮었다. 뚜껑에 있던 오래된 사료들 역시 예의 비닐봉지에 넣었고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 보이는 새 사료 덩어리를 올려놓았다. 하나, 둘, 셋, 넷, 모두 합쳐 일곱 개였다. 다음으로 괴물은 물통에 들어있던 하루 묵은 물을 모두 버렸고 들통에서 차갑고 신선한 물을 따라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꽃아 주었다. 마이티는 만사를 제처 두고 거꾸로 꽂힌 물통을 향해 달려가 꼭지의 끝을 물고 쪽쪽 열심히도 빨았다. 시원하고 달았다. 고슬고슬하고 보드라운 새 깔짚 위를 뭉그적거리며 마이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벌렁 드러누웠다.

 

*

 

  마이티의 안전 캐비닛에 룸 메이트가 생긴 것으로 그로부터 네 번 더 새 깔짚과 새 먹이가 찾아온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나흘 후일 것이다.) 그는 당연히 자신의 캐비닛이 자기 혼자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게다가 마이티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다른 모르모트와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이 곳에 실려오기 전, 그는 여기와 비슷한 어떤 컴컴한 방에서 태어나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갇힌 채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다른 모르모트를 본 것이라고는 오직 창살의 틈새를 통해 이웃한 캐비닛 속의 모르모트들, 혹은 일전에처럼 괴물의 손에 붙들려 주사를 맞는 모르모트들을 관찰한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나와 비슷하게 생긴 생물이 살아 숨쉬고 움직인다니!

 

  마이티가 받은 충격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불청객을 최대한 경계하며 예전의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으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보금자리를 빼앗을런지도 몰라. 내 먹이와 내 물, 그리고 깔짚. 어쩜 날 죽일런지도 몰라. 마이티는 자길 캐비닛에 넣어 가두어두는 괴물들보다도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룸메이트가 훨씬 두려웠다. 분명 이상한 일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랬다.

 

  룸메이트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적어도 나보다 두 배쯤 더 살지 않았을까?' 라고 마이티는 추측했다. 물론 마이티는 자기 나이를 몰랐고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한 번도 그런 걸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룸메이트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넸다. 
- 잘 부탁하네, 친구. 오늘부터 당분간 자네 캐비닛에서 신세를 지게 생겼어. 
  목소리도 확실히 노숙했다. 물론 그는 다른 모르모트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 아... 뭘요. 저기... 
- 내 이름은 '빅 치즈’라고 하네. 
- 저는 마이티에요.
- 그래, 마이티. 여기에 끌려온 순서를 따지면 내가 아마 선배일테지만, 지금까지 이 캐비닛은 자네의 독방이었으니 딱히 자네 뜻을 거역할 생각은 없어. 
- 고마워요. 
  마냥 믿을 수 없었음에도 마이티는 일단 안도감부터 느꼈다. 
- 고맙긴, 뭘. 당연한 거지. 내가 여기 살면서 지켜줬으면 하는 게 있다면 알려주었으면 해. 

  마이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동안 자신이 캐비닛 안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먹이를 먹고 어디에서 배설을 하며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좋은 깔짚을 모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먹이와 물과 깔짚은 언제쯤 들어오는지, 등등을 설명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빅 치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자네, 꽤 즐거워 보이는군. 
- 즐겁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즐겁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 글쎄, 아마도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플래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마이티와 반대쪽 구석으로 가서 드러누웠다. 


*

 
  이상한 룸메이트와의 생활은 그 후 일곱 번의 새 깔짚이 바닥에 깔릴 때까지 순조로웠다. 빅 치즈는 대개의 경우 마이티가 요구하는 규칙을 군말 없이 꽤 잘 지켜주었고, 오히려 혼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의존적 감정마저 - 과연 이게 정확한 표현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 들도록 해 주었다. 다른 모르모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멋진 일이었다. 둘은 함께 먹이를 먹었고 번갈아 물을 마셨으며 힘을 합쳐 깔짚을 정리했다. 빅 치즈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노련한 동작으로 마이티의 일을 도왔다. 아주 경험이 많아 보였다. 어떻게 이제껏 혼자 살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불편한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이티는 어느 순간 자신과 빅 치즈의 몸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전반적으로는 비슷하게 생겼는데…… 아주 조금 다른 것 같아. 과연 무슨 차이일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수록 그 궁금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이티의 머리를 메웠다. 처음에 그 성분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이상하게 바뀌어 상대를 향한 어떤 뭉뚱그려진 형태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 이 역시 과연 정확한 표현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 되고야 말핬다. 그는 태어나서 지난 일곱 날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다른 모르모트와 함께 살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뭘 해야 할는지 몰랐다. 모두가 잠든 때쯤에 슬쩍 일어나서 빅 치즈가 잠들어 있는 반대편 구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괴물들이 빅 치즈에게는 하루에 한 번씩 주사를 놓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는 새 먹이와 새 깔짚이 오는 시간도 아니었고, 그 보다 더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훨씬 늦은 시간 - 졸음이 쏟아져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몸이 무거워져 깔짚에 서서히 파묻혀갈 때쯤에 괴물은 나타났다. 그들은 불을 켜지 않았고 마이티와 빅 치즈의 캐비닛만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었고 빅 치즈만을 꺼냈다. 괴물은 손바닥에 빅 치즈를 올려놓은 듯 했으나 마이티 쪽에서는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언젠가 마이티가 맞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험하게 보이는 주삿바늘이 언뜻 보이고 나면 방이 떠내려 갈 것만 같은 빅 치즈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다른 모르모트들도 본능적으로 그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 모두 잠에서 깨 캐비닛의 창살을 잡고 꽤액 꽤액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곳에 온 이후로 딱 한 번 주사를 맞았을 뿐인데 왜 빅 치즈는 매일 맞아야 하는 것일까. 빅 치즈는 이 캐비닛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매일 그렇게 살았던 걸까?' 마이티는 자기 안에서 안쓰러움과 안도감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다시 괴물이 빅 치즈를 캐비닛에 돌려보내기 전에 그는 드르렁 드르렁, 잠을 자는 척했다. 물론 그 후로도 한동안 가슴이 쿵쿵 뛰어 잠들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


  마이티의 캐비닛에 빅 치즈가 들어온 이후 일곱 번의 깔짚이 갈리고 아홉 번이나 새 먹이와 새 물이 주어졌다. 둘은 여느 대와 다름없이 푹신하고 고소한 새 먹이 덩어리를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마이티에게는 이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버렸다. 
- 빅 치즈, 어때요? 행복하지 않아요? 
  역시 정신없이 먹이를 갉아대던 빅 치즈는 동작을 멈추고 물끄러미 마이티를 바라보았다. 하긴 이상한 일이기는 마이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역시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다른 존재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는 다른 모르모트와 같은 캐비닛 안에서 살게 될 줄 몰랐기는 했지만. 
- 방금 행복이라고 물었나? 행복? 
- 예, 맞아요. 난 알고 싶어요. 난 기분 좋아요. 당신도 나처럼 기분이 좋은가요? 
  빅 치즈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 기분이 좋으냐고? 이깟 복합사료 몇 덩이로 말이야? 이봐, 그만둬. 자넨 여기에 뭐가 들었는지도 아직 몰라. 
  빅 치즈가 꽤 많이 아는 눈치였기에 마이티는 궁금증이 동했다. 
-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은. 그럼 내게 그 이유를 말해 줄 수도 있겠군요. 
- 아서라, 순진한 친구여. 모르고 살다 가는 게 우리 같은 모르모트들에겐 축복이라네. 


  하지만 마이티는 포기하지 않았다. 빅 치즈가 알고 있는 것을 자기도 알게 된다면 그의 궁금증 일부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엔 빅 치즈가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다만 무거운 목소리로 다짐을 받아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 우릴 여기에 가두어 둔 것은 자네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동물들이야. 
- 그건, 알아요. 
  마이티는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거렸다. 
- 괴물들은 크고 우람하고 힘이 세지만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네. 머리가 좋고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지. 
- 괴물들이요? 
- 그래, 우린 그들보다 훨씬 작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만 그들에겐 또 그들 나름대로 두려워하는 것이 있거든. 우리가 잡혀 온 것은, 아니 태어난 것은, 몇 가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인 거지. 알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사실이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왜 하필 우리죠? 
- 저들과 우리는 유전자의 팔 분의 일쯤 일치해. 무슨 얘기냐면 굉장히 비슷한 몸을 지녔다는 거야. 
- 설마요. 저들은 이렇게 크고 우리는 이렇게 작은 걸요. 
- 몸집의 크기가 다는 아냐. 그러니까…… 아, 관두기로 하지. 그걸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까. 여하튼 내가 하는 말의 핵심은 말이야. 괴물들은 자기 몸에도 나타날 수 있는 어떤 현상을 우리 몸에서 강제로 일으키고 반응을 보는 거야. 혹은 그 현상을 증명할 방법을 시도하고 결과를 본다거나 하는 식이지. 예를 들면 귀리가 몸에 좋은지 나쁜지 알고 싶다고 해봐. 그럼 그들은 귀리의 양이 다른 사료를 여러 모르모트들에게 나누어 먹이고 어떤 차이가 생기는지를 관찰하는 거야.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들과 우리의 몸이 굉장히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얻은 결과를 그들에게도 일부 적용할 수가 있는 거지. 물론 이건 굉장히 단적인 예야. 귀리의 효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복잡하고 어려운 사실을 알아내는 게 그들의 목표야. 
- 가령 어떤 걸 말이에요? 
- 무서운 병이나 거기에 대한 치료약 연구랄까. 
- 그럼 저 역시도 뭔가 이유가 있어 여기에 있다는 뜻이로군요. 그럼 당신도요? 
  빅 치즈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물론이지.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 다. 
- 말해줄 수 있나요? 혹시 안다면 말이에요. 당신은 무슨 이유로 여기 있는 건가요. 
  빅 치즈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모르는 게 좋을 거야. 
- 아니요. 꼭 알고 싶어요. 

  마이티가 전에 없이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뜻밖에 빅 치즈는 체념한 표정을 했다. 
- 난, 저들의 노화 테스트 용 생물이야. 어떻게 늙어가는지, 늙어가는 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밝히기 위해 여기 가둬진 수많은 모르모트 중 하나야. 
- 그러니까, 당신은 보통 모르모트들보다 빠르게 늙어가고 있는 거군요. 아, 알겠어요. 이제는 알 것 같아요. 당신의 몸.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쇠약하게 보였어요. 거칠고 푸들푸들한 피부, 정리되지 않는 무성한 터럭, 후들거리는 다리, 하지만 눈동자만은 밝았죠.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그럼 당신이 매일 맞는 그 주사는 점점 더 빨리 나이를 먹게 하는 약이겠군요. 
- 총명한 친구, 모르모트로 태어나고 길러진 셈 치고는 제법이야. 
- 얼마나 남았나요? 당신은…… 당신의 시간 말이에요. 
- 글쎄. 이 안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걸 볼 수가 없으니.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 모든 생명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네. 난 그 섭리를 어긴 채 늙었지만 그렇다고 그만큼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건 아니야. 자네와 같이 깔짚 침대를 만들 수 있는 날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지. 하지만 슬프진 않아. 난 꽤 운이 좋은 편일런지도 모르거든. 이보게, 친구. 세상엔 정말 불쌍한 모르모트들이 많다네. 기억력이 사라져 친구도 못 알아보는 녀석도 있고, 충격을 느끼지 못하도록 신경이 조작되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녀석도 있지. 독성 병균을 주사받아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녀석도 있고, 평생을 뇌에 전극을 꽂고 살아야 하는 녀석도 있지. 난 그래도 그런 고통은 겪지 않고 살았어. 늙어 죽은 다음에도 쓸모가 있는 연구를 위해 존재하니까. 저들은 날 약물로 안락사시키지도 않을 거고 강제로 가스에 질식시키거나 머리를 잘라 죽이지도 않을 거야. 다만 죽은 다음에 갈갈이 찢어 해부하겠지. 하지만 뭐 어떤가? 그때 난 이미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텐데. 
  마이티는 자기도 모르게 분이 치밀어 올라 안전 캐비닛의 창살을 주먹으로 쾅, 쳤다. 
- 왜죠? 왜 하필 우리죠? 왜 우리가 괴물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거죠? 
- 저들과 닮았으니까. 게다가 우린 작고 세대교체가 빠르며 번식력도 좋으니까. 하지만 잊지 말게. 비록 몇 천 원에 팔려와 일생을 이 컴컴한 공간에 살지만 우리는 저 괴물들보다 나은 동물이라네. 우린 저들보다 더 큰 뇌를 가졌고 더 많은 생각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동물이라네. 또 두 발로도 설 수 있지. 괴물들은 아직까지도 두 발로 서지 못해. 본 적 있는가? 두 발로 서는 괴물을? 사료와 깔짚을 가지고 들어올 때 보았는가? 저들은 네 발로 걸어야 하기 때문에 짐을 등에 지고 기어 오지. 저들이 우리에게 주삿바늘을 찌를 때 손 모양을 보았나? 그들의 앞 팔과 손은 우리처럼 고도로 발달하지 않았어. 우리는 도구를 쓸 줄 알고 한때 문명도 이루었지. 세대 수명은 저들보다 훨씬 길었어. 길게는 삼만 밤 이상도 살 수 있었지. 한 번에 열 마리 스무 마리씩 번식하게 된 것도 저들이 우리를 실험용 모르모트로 만들고부터야. 우리의 유전자에 몹쓸 짓을 하고야 말았던 게지. 혹시 아는가?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에는 우리가 저들을 모르모트로 사용했을지. 부디 기억하게. 내가 있었음을 기억해주지 않아도 좋아. 다만 내가 자네에게 그랬듯 자네도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게. 숨이 다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라도 좋아. 많지 않아도 좋아. 다만 누군가가 기억을 하고 그 다음 누군가에게 전해주도록 말이야.


  마이티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 그런지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다만 그 이야기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뭔가에 얻어맞은 듯 한동안 멍할 뿐이었다. 빅 치즈는 생각지도 않게 많은 말을 하게 되었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띠고는 캐비닛의 구석으로 돌아갔는데, 그것이 마이티가 확인한 빅 치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그날 밤 괴물들은 빅 치즈를 잡아갔다. 예전처럼 캐비닛의 뚜껑을 열고 거꾸로 잡아챈 다음에 배에 주사를 놓았지만 다시 캐비닛에 넣어주지는 않았다. 다시 안전 캐비닛은 마이티만의 공간이 되었는데, 안전이라는 말이 그를 위해 안전하다는 것인지 그를 여기에 집어넣은 괴물들에게 안전하다는 것인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다. 그 후 빅 치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 방법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마이티는 급속히 기억력이 감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 깔짚이 들어왔는지, 저 먹이가 손을 대었던 것인지 아닌지, 모든 것이 분명하게 기억나지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빅 치즈가 들려주고 간 마지막 일갈만은 꼭꼭 새겨 기억하려고 이를 꽉 깨물었으나 마음처럼 쉽진 않았다. 그 소중한 기억은 점점 옅어져, 정말 있었던 일인지 그의 무의식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온 상상인지조차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마이티는 푹신푹신한 깔짚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아침에 새로 갈아서 그런지 보들보들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천년이고 만년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5년 11월)

반응형
블로그의 프로필 사진

블로그의 정보

낙농콩단

김영준 (James Kim)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