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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티드 (Ghosted, 2023)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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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크리스 에반스는 이 시대의 산드라 블록이 될 수 있을까? 한때는 이렇게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전략이 신선한 카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식상하게만 보인다. 비단 새롭지 않음만이 문제는 아니다. 갈수록 이런 카드가 잘 먹히지 않는 까닭에는 달라진 상황의 영향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정관념과 배우의 성별에 대한 역할 분리가 상당히 공고하던 시절에는 이런 식의 예상을 뒤엎는 조합이 상당한 에너지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가령 피어스 브로스넌이 ‘알고 보니 영농후계자’이고 소피 마르소가 '알고 보니 스파이’라면 꽤 즐거운 상황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역으로 이용할 고정관념이 서서히 타파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지금은 아무래도 과거와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도 남성 배우가 당연히 스파이이고 상대역의 여성 배우가 ‘스파이의 여자’일 거라고 미리 전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애써 그 구도를 뒤집어 이용하려고 했다면 뭔가 새로운 접근법이 동반되었어야 마땅하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와는 달라진 배우들의 성향도 한 몫을 한다. 가부장 신화에서 바로 걸어 나온 듯한 아버지 세대나 마초적 호르몬으로 한바탕 샤워를 하는 그 다음 세대 액션 히어로들과는 다르게, '네 사람의 크리스와 두 사람의 라이언'으로 대표되는 지금 세대의 블록버스터 총아들에게는 과거에 ‘남성적 매력’이라고 부르던 부분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결여되어 있다. 에반스만 하더라도 나름 ‘캡틴 아메리카’로의 시대적 상징성이 있지만 액션 스타라고 부르기에는 그도 우리도 피차 부끄럽기만 하다. 브루스 윌리스, 실베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워제네거에서부터 제이슨 스타뎀, 드웨인 존슨까지를 떠올려보면 에반스는 사실 곱상한 농부가 맞다. 스타뎀 같은 남자가 농부여야 타격감도 있는 법이지 (물론 스타뎀의 캐릭터에게 ‘고스팅’의 개념을 이해시키는데 약 30분 내외의 시간이 필요할 수는 있겠다.) 에반스야 뭐 화훼에 양봉까지 얹어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아나 데 아르마스 역시 물음표가 붙는 선택이다. 어울리지 않는 뜻밖의 액션 롤을 강조하기에는 이미 꾸준히도 액션 영화에 출연하며 어설프게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註1). 차라리 커리어 초창기의 ‘블레이드 러너 2049 (드니 빌뇌브, 2017)’이나 ‘나이브스 아웃 (리안 존슨, 2018)’에서처럼 다소 투박했던 외모가 비장의 카드로 제시되던 시절이었다면 모르겠으나, 티아라 뱅크스와 한 시즌 동안 합숙이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변신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나마 그런 효과조차 없다. 냉정히 말해 에반스와 데 아르마스의 이런 형태의 조합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극 중 인물들이 거듭 강조하는 (당사자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둘 사이의 대단한 성적 긴장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와닿지 않는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라고 해봐야 (극 중 에반스의 부모로 등장하는) 테이트 도노반과 에이미 세더리스 사이의 푸근한 그것에 견줄 수준이다. 사실 그런 언급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애초에 의도한 구도가 잘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번 양보하여 최소한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더그 라이먼, 2005)’ 정도는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생각에 새삼 화들짝 놀랐다. 스타 파워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모든 면에서 기대 이하였던 과거의 평범했던 블록버스터가 갑자기 꽤 그럴듯했던, 아니 심지어 클래식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금세기 들어 영화 전반의 질적 하락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2023년 06월)

(註1) 액션에 별 재능이 없어 보이는데도 신기하게도 계속 액션 영화에 캐스팅이 되고 있다. 다음 출연작도 액션 영화, 심지어 ‘존 윅' 프랜차이즈의 스핀 오프 ‘발레리나(렌 와이즈먼, 2024)’의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일반 관객이 보지 못하는 어떤 매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노 타임 투 다이(캐리 후쿠나가, 2021)’에서부터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액션씬에서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을 찾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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