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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앨리 (Nightmare Alley, 2021)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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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대표작 ‘나이트메어 앨리’의 처음 몇 챕터는 정말 아름답게 쓰여져 있다. 소설이 묘사하는 현실이 아름답다기 보다는 (실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대공황의 짙고 무거운 어둠을 밀어내는 소박한 희망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카니발에 모여든 인간 군상들의 허황된 꿈이나 무모한 공상, 혹은 막연한 기대 따위에는 분명 작은 촛불과 같은 희망이 남아있다. 하지만 야심만만한 젊은 스탠턴이 카니발을 떠나 성공의 계단을 한 단계씩 오르면서 상황이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는 아름다운 현실을 갈망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가 향하는 방향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악몽의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희망을 파괴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탠턴만이 아니라 소설 또한 아름다움으로부터 멀어진다. 비단 내용적 측면만이 아니라 구성 또한 기괴하게 변한다. 차츰 산만해지고 심지어 약간은 분열적으로까지 변한다. 마치 스탠턴과 함께 나란히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원작 소설과 길예로모 델 토로의 무비 어댑테이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 부분일지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는 기본적인 정서를 공유하면서도 스스로 붕괴하고 분열하는 원작 소설의 기묘한 전개까지 애써 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여기에는 델 토로의 전매특허인 섬세하고 정교한 설계가 있다. 일례로 전반부(1939년, 카니발)와 후반부(1941년, 버팔로)를 완벽한 대칭 구조의 상반된 세계로 구현하려는 의도는 거의 모든 구성 요소에 반영되어 있다. 예의 즉흥적이고 불가해한 무작위적 요소들을 전달하기 위해 예술적 방정식까지 세워야 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역시 평생에 걸쳐 몬스터들과 미스핏들에 애정을 보낸 그의 작품답게 그리 부자연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 작품의 백미는 남의 마음을 읽는 콜드 리딩 기술을 익혀 성공을 좇던 스탠턴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정신과 의사 릴리스 리터 박사를 맞닥뜨리는 전형적인 '야망의 함정' 이야기에 있다. 특히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악역인 리터 박사는 파괴의 여신 헬라보다 백만 배쯤 무섭고 철두철미한 지휘자 리디아 타르보다도 백 배쯤 무섭다.


  길예르모 델 토로는 이 프로젝트를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음을 일전에도 여러 차례 밝힌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그를 매료시켰던 고전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 (에드먼드 골딩, 1947)’를 아직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하필 월 구독료가 가장 비싼 HBO 맥스에만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가 이 컨텐츠의 어떤 부분에서 이끌렸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유감스럽게도 작가의 불행했던 운명과 작품의 당대 불운했던 평가, 그리고 이듬해 개봉한 영화의 박스오피스 실패로 이어졌던 '나이트메어 앨리'의 저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하다. 심지어 감독을 비롯한 초호화 제작진과 올-스타 캐스트를 자랑하는 이번 무비 어댑테이션조차 (1947년작과 마찬가지로) 박스 오피스에서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수상 실적이야 다소 운이 없었다 치더라도 흥행 실패는 운으로만 설명하기도 힘들다. 코로나 변이 감염의 급증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폭스 서치라이트 픽쳐스를 날름 집어삼키고 푸대접하는 어떤 코로나 같은 회사가 마케팅과 배급 전략에 조금 신경만 썼어도 이런 성적표를 받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202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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