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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넷 (Tenet, 2020)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0.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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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테넷’은 분명 흥미로운 주제를 실험적인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으로의 장르적 매력을 감쇠시키는 요인을 내재하고 있음을 마냥 간과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첫째, 제목이 의미하듯 거울과 같은 대칭 구조의 순환적 이야기를 구현하려는 의도는 물론 마음에 들지만 필요 이상으로 물리학적 설명에 천착하는 경향은 상당한 피로감을 준다. 둘째, 그럼에도 이론과 개념과 설명과 해석이 과학적 정확성 혹은 논리성의 측면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난해하거나 (혹은 어쩌면) 고의적으로 난해하게 보이도록 의도되어 있을 뿐, 실상 오류와 비약이 적지 않고 심지어 설정과 설정이 충돌하는 부분마저 있다. 셋째, 과학과 기술 그 자체보다는 인간과 철학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장르 고유의 중요한 미덕이 배제되어 있다. 당연히 그런 면에서 감독의 전작 ‘인셉션(크리스토퍼 놀란, 2010)’과 ‘인터스텔라(크리스토퍼 놀란, 2014)’ 좋은 비교가 된다.

  의아하게도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정작 사이언스 픽션으로의 핵심 요소들과는 무관한) 고전 느와르/스릴러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부분에서 만들어지는 듯 하다. 다혈질의 범죄 혐의가 있는 악당과 기이하리만치 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대의적 임무와 개인적 감정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주인공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예스러운 서스펜스를 연상케한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 그 유산을 유지하여 온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좋았던 부분을 떠올리게도 한다. 자유자재로 시간을 넘나드는 빠른 호흡의 영화에서 뜻밖에 여유를 부리거나 한껏 뜸을 들이는 순간들이 (이를테면 분노로 가득 채워진 사내의 눈동자를 응시하듯이 들여다본다거나, 여성 인물의 신체를 탐닉하듯이 화면 안에 담는다던가 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그리하여 의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사이언스 픽션으로의 매력. 즉, 시간 흐름의 조절이라는 핵심 아이디어가 과연 이 투박한 고전적 스토리를 흐뜨러뜨렸다가 단순 재조립하는 것 이상의 강력한 에너지를 지녔냐는 부분이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일례로 시간 역행은 작품의 시그니쳐 액션 장면들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소재이고, 물론 그렇게 연출된 노동집약적이자 기술집약적인 장면들은 대단히 매혹적인 눈요기 거리를 선물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은 큰 맥락에서의 사건 전개와는 관련성이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우선은 미시적인 단위에서, 그러니까 특정 장소(턴스타일을 두고 유리로 마주한 두 개의 방)과 특정 순간(인물이 시간 역행 상태로 접어들며 사건을 거꾸로 되짚어 나가기 시작하는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타임라인 상에서 정방향 전개와 역방향 전개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아가 거시적 차원에서의 사건 발생을 다시 재배열해보면 이제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타임 트래블’ 영화라고 불러오던 작품들에 비해 크게 새롭다고 할 수도 없다. 결국 이 야심찬 아이디어의 검증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패를 흔들어 뒤섞을 수 밖에 없었을텐데 그 부분이 뫼비우스 플롯과 맞물리며 혼란스러움만 극도로 가중시킨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원안의 환상적인 아이디어를 고스란히 구현할 완벽한 방법은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름값과 2억 달러에 이르는 제작비를 감안하면 분명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다. 

덧. ‘테넷’의 경우 관객을 영화관에서 출구로 입장시켜서 영화를 상영하고 엔딩 크레딧 이후에 비상시 대피요령과 광고 및 예고편을 보여준 다음에 입구로 퇴장시키며 마지막으로 QR 체크인을 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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