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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반달 가슴곰의 이중생활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6.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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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은 잠이 많았다. 보통 하루에 열세 시간을 잤고 일요일에는 열일곱 시간을 잤다. 열세 시간을 잠다는 건 이런 의미다. 토요일 저녁 열두 시에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가 일요일 오후 한 시에 눈을 번쩍 뜬다 - 다가올 월요일의 특수성을 감안하자면 상상만으로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렇게 자면서도 형은 늘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듯 했다. 겨우내 동면을 취하지 못하고 덜컥 봄을 맞아버린 반달 가슴곰처럼 형의 꾸벅거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열세 시간을 자고 일어난 일요일 오후에 또다시 낮잠을 잤다. 다시 또 낮잠을 잔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의미다. 일요일 오후 한 시에 열세 시간을 자고 일어났는데 그래도 피로가 가시지 않아 오후 네시에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가 저녁 일곱 시에 눈을 뜬다 - 역시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주말이면 밤잠과 낮잠을 합쳐 열여섯 시간을 자는 형에 대한 엄마의 평가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인간아, 왜 사니?"


  형이 왜 사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엄마가 가지고 있었다. 엄마가 형을 세상에 낳아놓은 장본인이니까. 만약 엄마가 형을 낳지 않았다면 형은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엄마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꼭 학교 선생님처럼 말이다. 형 역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답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묻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그들 모자만의 특별하고도 예민한 화법이 아닌가 싶었다. 나 역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소비하는 형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삶의 이유랄까. 삶의 목표랄까. 결국은 날이 바짝 선 엄마의 질문 - "인간아 왜 사니?"로 귀결될 수 있겠으나 우리 집의 권력 서열상 형보다 아래쪽에 있는 나는 같은 말이라도 부드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형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의 이유나 삶의 목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내가 질문을 던지려고 하면 언제나 침대 위에서 곯아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괜히 멋쩍어진 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형의 별, 별들은 의문 부호를 그리며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나는 별이 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돌고 있는 것인지 몰라 눈을 감고 가만히 양팔을 벌려 보았으나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가 형을 낳지 않았다면 물론 '인간아, 왜 사니?' 따위의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 문제가 좀 곤란해진다. 형이 그때 태어나지 않았으면 내 포지션이 조금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면 어떻게 되는 것이었을까? 그냥 그대로 '형이 없는 나'가 되는 것이었을까? 로또 당첨금이 이월되듯 한꺼번에 형과 내가 세상으로 터져나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대학 추가 합격자 명단미냥 번호순으로 줄줄이 한 칸씩 밀려 내가 태어날 차례에서 형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순서는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정했으며 그럼 나는 언제 어디서 어느 집 자식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세상에 그런 걸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는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럴 적에도 어김없이 형은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침대 위에 뒤집어져 있었다. 나는 혹시나 형이 '체체파리'같은 것에 물린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알았는데 그런 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놈한테 물리면 아프리카 수면병에 걸려 잠이 장마철 비 오듯 쏟아져서 끝도 없이 잠만 자게 된다는 것이다. 

  체체, 라는 말은 '소를 죽이는'이란 뜻이라고 한다. 체체파리는 드라큐라처럼 사람의 피를 빠는데, 그 과정에서 기생충이 사람의 몸에 들어가 증식하게 된다. 이 기생충이 바로 아프리카 수면병을 유발한다. 물론 소가 아닌 사람이라고 무사할리가 없다. 끝도 없이 잠만 자다가 그대로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단다. 다큐멘터리가 끝났을 때 나는 가만히 형의 방문을 밀어보았다. 형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심히 걱정스러워졌다. 그렇게 불편하고 어려운 자세로도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거라면 필경 체체파리 - 꼭 체체파리는 아니어도 뭔가 비스무리한거에 물린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고심 끝에 나는 이 사실을 큰 누나에게 알리기로 했다. 엄마는 무섭고 아빠는 바쁘다. 적당히 무섭고 적당히 바쁜 고등학생 - 큰 누나라면 이 사실에 귀를 기울여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큰 누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라며 나의 걱정스러운 질문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사하라사막 근처에 사는 체체파리라는 놈이 한국에 있을 리가 만무할뿐더러 있어도 너희 형 같은 화상은 물지도 않을 거라는 것이다. 

  큰 누나는 주제에 고등학생이라고 보다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했다. 세상에는 기면증(嗜眠症)이라는 병이 있는데 그거에 걸리면 항상 꾸벅꾸벅 졸다가 시도 때도 없이 잠이 든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도 쿨쿨, 공부를 하다가도 쿨쿨, 텔레비젼을 보다가도 쿨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쿨쿨. 정말 세상에 그런 병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오싹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형은 발작적으로 갑자기 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잠을 원해서 잠에 끌리듯 자연스럽게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누나와 내가 기면증에 대한 제법 뜨거운 논쟁을 벌이는 그 순간에도 형은 침대 위에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말 그대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더러 실제로 형을 업어다가 엉뚱한 곳에 갖다 놓아보자는 주장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집안의 장손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쳐선 안된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아 그냥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나는 형과 한 방을 썼지만 깨어있는 형의 모습보다는 잠들어있는 형의 모습을 더 많이 보았다. 정치, 연애, 경제, 연애, 사회, 연애, 문화, 연애 등의 분야에서 남자 대 남자의 진지한 대화를 원했던 나는 항상 그게 불만이었다. '우리 형'이 '남들 형'처럼 번뜩이는 눈망울과 명민한 지도력으로 앞장서서 나를 '남자의 세상'으로 이끌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의 넘치는 고민과 더욱 넘치는 번뇌를 덜어주기에 형은 잠을 너무 많이 잤다. 평일에는 열시간을 잤고 주말에는 열여섯 시간을 잤다. 이래서야 진지한 남자 대 남자의 대화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늘상 곯아떨어져 있는 형을 대신해서 창문을 열고 밤 하늘에 형의 별을 하나 골라 정했다. 앞으로 너는 형의 별이야. 형에게는 반말을 할 수 없었지만 형의 별에게는 반말을 할 수 있었다. 형의 별은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진지하게 잘 들어주었다. 문제는 듣기만 하고 답해주지는 않았다는 것인데 진짜 형이 아닌 형의 별에게 거기까지 바란다면 너무 무리한 일이 아닌가 싶어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형의 별이 고민을 들어주고 고민에 답해주기까지 한다면, 진짜 형이 존재할 이유란 그야말로 동트기 직전의 작은 별처럼 희미하여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누차 강조했지만 형은 주말에 열여섯시간을 잤다. 다시 말해서 고작 여덟 시간을 깨어 있었다는 뜻이다. 인간의 적절한 수면시간이 여덟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어디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형은 인간의 적정 수면시간만큼만 깨어있고, 적정 수면시간을 지키는 인간들이 깨어 있는 시간만큼 자는 셈이었다. 뭔가가 뒤집어져 있었다. 위가 아래이고 아래가 위였다. 왼이 오른이었고 오른이 왼이었다. 나는 설겆이중이던 엄마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쳤다. "형이 뒤집어져 있어. 거꾸로야." 엄마는 퐁퐁의 세례를 받은 수세미로 뭇 식기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던 중이었으므로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듯 했다. "걔는 원래 엎드려서 자. 어려서부터 그랬는데 새삼스럽게, 뭘." 여덟 시간과 열여섯 시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 명확한 설명이 요구되는 시점이었으나 고작 열한 살이었던 내게는 그럴만한 표현력이 없었다. 실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형의 '뒤집어진 삶'에 조금 더 주목하기로 했다. 드물게도 형이 깨어있을 적이면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살곤살곤 접근하여 형을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아니, 어쩌면 먹잇감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형은 반달 가슴곰만큼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은 좌우로 떡 벌어진 어깨와 그런 어깨에 걸맞은 양팔과 그런 어깨를 지탱하기 위한 허리와 그런 허리를 지탱하기에 충분한 양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뒤에서 바라보면 어김없는 반달 가슴곰의 모양새였다. 누군가 내게 '실제로 네가 반달 가슴곰을 본 적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물론 할 말은 없다. 이 역시 체체파리처럼 텔레비젼에서 보았을 뿐이다. 지리산에 풀어놓은 열두 마리인가 열세 마리인가 되는 반달 가슴곰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반달 가슴곰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느냐, 혹은 반달 가슴곰에 대해 얼마나 학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형의 모습이 영락없이 반달 가슴곰을 떠올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이처럼 촘촘하고 잘 짜여진 논리와는 상관없이 '그냥 그러하기에 그렇다'는 식의 연상 작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누가 뭐래도 형은 반달 가슴곰을 닮았다. 미련하게 동면의 때를 놓친 반달 가슴곰. 그러다가 봄을 맞아 꾸벅꾸벅 조는 곰. '뒤집어진 삶'을 살고 있는 곰. 


*

 
  사람들은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서 서쪽으로 사그라들때까지의 시간을 낮이라 부르고, 그 나머지 시간을 밤이라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는 깨어 활동하고 밤에는 잠이 든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을테지만 인류의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람은 해와 함께 일어나 해와 함께 잠이 들곤 했다. 이때의 낮과 밤, 그리고 깸과 잠은 일대일 대응이었다. 해가 없어도 빛을 밝힐 수 있는 물건들이 발명되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형이 깨어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짧은 시간을 아끼고 아껴 형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건 마치 인기 스타와 한 마디라도 더 나누어보고자 애타게 기다리는 삼류 인터뷰어같은 느낌이었다. "형은 형이 얼마나 많이 자는지 알아?" 형은 아주 천천히 몸을 비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몰라." 물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자는 사람은 흔치 않아. 그것도 스무 살이나 먹어서 말이야." 이번에도 형은 "몰라"라고 답했다. 형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일분일초라도 잠을 더 자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위인전에서 읽었는데 말이야. 나폴레옹은 하루에 네 시간 씩만 잤대." 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거…… 미친 새끼 아니야?" 분명 몹시도 졸리운 목소리였다. 

  형이 나폴레옹을 어떻게 생각하던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쩜 하루에 네시간만 자도 충분하다는 나폴레옹의 말이 경솔했을런지도 모른다. 내 상식으로도 네 시간은 결코 충분히 터무니없는 수면시간이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형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갈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이제껏 형이 '나쁜 말'을 하면 곧바로 달려와서 일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그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 형이 '제길'이나 '열라' 따위의 말을 할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엄마에게 신속히 달려가 일러 바쳤다. 그에 비하면 '미친 새끼'는 정말 무척이나 나쁜 말일테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첫째로 하루에 네 시간씩만 잤다는 나폴레옹이 정말로 '미친 새끼'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었고, 둘째로 그 순간에 뭔가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났기 때문이다.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어쩜 파란 창공을 날아가는 작은 새 같기도 했고, 어쩜 너른 바다를 튀어 오르는 돌고래 같기도 했다. 어쩜 새와 돌고래가 합쳐진 것일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집중해서 잘 생각해보면 형의 '뒤집어진 삶'을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불분명한 이미지는 시간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정제되고 조금 더 깔끔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조금만 더. 너저분한 생각의 덩어리들이 이리 뭉치고 저리 뭉쳐가면서 점점 모양을 드러내었다. 조금만 더더. 드디어 덩어리에 위와 아래가 생겼다. 왼쪽과 오른쪽이 생겼다. 행과 열이 나누어졌다. 그래 맞아, 답을 알 것 같아. 아마 이게 답일 거야. 힘차게 부저를 눌렀다. 그렇다. 바로 그거다. 

  형은 두 개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

 
  형은 뒤집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무려 열여섯시간 동안 잠을 잤고 고작 여덟 시간 동안 깨어있었다. 형의 뒤집어진 삶을 바로 보지 않고 뒤집어 보기 위해 물구나무를 한다. 옛날부터 물구나무를 하면 집중이 잘 되었다. 생각의 속도도 빨라졌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출퇴근길의 교통체증처럼 답답하게 막혀있던 생각들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뚫려나갔다. 학교에서 시험칠 때도 물구나무를 서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꾸로 보는 세계에서 형은 여덟시간 동안 잠을 자고 열여섯 시간을 왕성히 활동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진짜 반달 가슴곰처럼 마치 영화 속 킹콩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 두 발로 서서 가슴을 두들기며 으르렁거렸다. 체체파리가 날아오면 머리통만 한 주먹으로 잽을 날려 격추시켰다. 형은 나의 영웅이었다. 엄마도 "인간아, 왜 사니?"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누나도 기면증을 운운하며 형을 무시하지 않았다. 바쁘디 바쁜 아빠도 이따금씩 방에 들려 형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셨다. 형은 정치, 연애, 경제, 연애, 사회, 연애, 문화, 연애 등의 분야에서 숱한 세월을 거치며 얻어낸 남자 대 남자의 진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건 정수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엑기스 중의 엑기스였다. 나는 더 이상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형의 별'을 찾지 않았다. 반말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았다. 형이 '나쁜 말'을 쓴다고 엄마한테 달려가 이르지도 않을 것이다. 뒤집어진 세계의 또 다른 형은 그야말로 형 다운 형이었고 내가 바라오던 형이었다. 

  물구나무가 끝나고 다시 본래의 위와 아래를 찾았을때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형을 발견하였다. 거꾸로 선다는 게 생각의 진행 속도에 도움을 주긴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세상'의 잠탱이 형보다 '거꾸로 세상' 속의 형이 더 좋았으나 영원히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가 있었다. 형이 '이 세상'에서 잠이 많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꾸로 세상'에서 너무 왕성하게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산과 바다를 넘나들며 모험을 하고, 악당을 물리쳐 공주를 구해내고, 열여섯 시간 동안 활동하고 인간의 적정 수면시간인 여덟 시간 동안 잠을 자고 - 그 여덟 시간 동안 이 세상에 돌아와 나머지 기운만으로 '이 세상'을 살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다. 두 집 살림이 어려운 것처럼 형의 이중생활 또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체체파리에 물린 것처럼 끝도 없이 잠만 자고, 기면증에 걸린 것처럼 아무 때나 쓰러져 자고, 반달 가슴곰처럼…… 그런 것이다. 형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거꾸로 세상'에서의 삶이 더 즐거웠을런지도 모른다. 어쩜 거꾸로 세상의 형이 진짜 형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어차피 거꾸로, 라는 말은 이 세상에 있는 나의 관점에서 임의로 정의한 말이니까. 그 곳의 형에게도 동생이 있을까. 그럼 그 녀석은 억세게 운 좋은 놈일게다. 정치, 연애, 경제, 연애, 사회, 연애, 문화, 연애 등의 분야에서 남자 대 남자의 진지한 이야기를 형과 나눌 수 있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서글퍼져 잠든 형의 등판을 보며 닭똥같은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는데 엄마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셨다. 설겆이 중이었는지 마미손 고무장갑을 양손에 낀 채였다. 침대에 엎어져 세상 모르고 잠든 형과 거기에 매달려 펑펑 울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더니 그만 한숨을 푸욱 내쉰다. "이제 아주 궁상을 셋트로 떠는구나. 셋트로. 이 화상들아, 왜 사니? 왜 살어?"

 

(200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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