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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 너의 말간 인공코를 바라보며 내 마음은 호수요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6. 2. 5.

본문

  인류는, 생각 외로 코를 진정으로 값지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 코가 역사를 좌우할 수 있었던 사례라고 해보아야 기원 전의 클레오파트라 정도랄까. 그러니까 파스칼의 그 유명한 말을 두고 하는 얘기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세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그녀의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고 인류에게 코는 그 중요성을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일단은 없어져봐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만큼 그 존재감이 불투명한 기관이었다. 물론 사실을 말하라면, 코가 없이는 인간이 살기도 어렵다는 것이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단지 그걸 깨닫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여타의 다른 소중한 기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편이랄 뿐이다. 후각의 소중함과는 별개로 코라는 기관 자체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말엽의 일이다.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부터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제겐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코가 너무 못생겼어요. 보기에 좋지 않은 건 둘째치고 너무 낮고 뭉뚝해서 그 흔한 선글라스조차 마음 놓고 써보지 못했어요. 줄줄 흘러내리거든요. 친구들은 제 입이 코보다 더 튀어 나왔다고 놀려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오똑하고 예쁜 코를 가지고 싶어요. 그래서 포옴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선생님,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저스틴 K, 직장인, 25) 

- 우리 동양인들은 대개 코가 낮고 뭉뚝하게 생겼습니다. 때문에 자칫 느리고 어벙한 인상을 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코는 얼굴의 정중앙에서 인상의 균형을 좌우하는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런만큼 세심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한 것이지요. 확고한 의지를 가진 분이라면, 제대로 문의하신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크레오파트라 성형외과'는 실리콘 삽입에 있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병원입니다. 원장 방유만 (Bang, You Man) 선생님은 국제미용성형학회의 홍보이사이자 대한코성형연구회의 부회장을 맡고 계신 분입니다. (크레오파트라 성형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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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프리카의 투와다리 부족은 인간의 영혼이 코 안에 깃든다고 믿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웃 부족과 전쟁을 벌일 때마다 적들의 코를 베는 행위를 통해 승전을 기념했다. 비로소 영혼을 앗아 그들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런 날이면 그들은 거칠게 도려내어진 '어떤 영장류의 신체 일부분'을 산처럼 무더기로 쌓아놓고 돼지를 잡아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투와다리 부족의 청년들 중 더러는 승리에 도취, 술에 만취한 나머지 ‘그 무더기’에 파묻혀 잠이 드는 일도 있었다고. 물론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깜짝 놀라 자지러질 듯 소리를 질러야 했지만. 지금 문명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는 그게 아주 역겹고 야만적인 행위처럼 보일런지 모르겠으나 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투와다리 부족의 코 숭배 역사에 대한 공시적 고찰>, 올라프 마이프렌자게이 (Dr. Olav Myfriendsaregay), 글로벌지오그래픽, 2098년 3월호, 192-19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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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류 P. 위너 (Drew P. Wiener)는 본인인식장치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삐비빅. 인증되었습니다.” 합성된 기계의 목소리에는 어떤 생기도 깃들어있지 않아 언제나 소름이 끼쳤다. 그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힘차게 문을 밀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드류는 ‘노즈테크놀로지스’의 5급 직원이다. 그는 코에 대한 모든 신기술을 개발하는 이 회사에 19년이나 근속했다. 그러니까 인기 록밴드 ‘부비강(副鼻腔)’이 데뷔하던 해에 입사한 것이다. 내년이 되면 아마 ‘부비강’은 ‘20주년 기념 앨범’을 낼 것이다. 그 또한 20주년 근속의 찬란한 기록을 세우며 영예롭게 승진할 것이다. 그러면 직급도 4급으로, 보안등급도 4급으로 조정될 것이다. 핵심 기술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아이디도 새롭게 발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되면 드디어 ‘코 가위’나 ‘코 높이 집게’나 ‘코 분비물 기반의 질병 진단 시스템’ 등의 기술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그는 ‘노즈테크놀로지스'에 잠입한 첩자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기술 첩자다. 그의 임무는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의 핵심 기술을 빼돌려 ‘피노키오시스템스’에 넘기는 것이다. 그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자그마치 19년 동안 묵묵히 ‘노즈테크놀로지스'로 출근했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감쪽같이 보통 직원들처럼 행동했다. 일을 나서서 떠맡지도, 없는 일을 애써 만들어 해결하지도 않았다. 정시에 출근, 정시에 퇴근이라는 보호색으로 일정한 인간 밀도 이하의 공간에는 존재했던 적이 없었고 인사 고과에 있어서도 언제나 ‘튀지는 않을만큼, 그렇다고 잘리지는 않을만큼’이란 기조를 지킴으로써 윗선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썼다. 19년을 버텼다는 건 그럭저럭 그가 임무를 잘 수행해왔다는 뜻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은 ‘노즈테크놀로지스’가 거의 25년째 독점하고 있는 분야다. 드류의 진짜 직장인 ‘피노키오시스템스’을 비롯, 30개가 넘는 코 기술 관련 기업들이 여전히 추격하지 못하고 있는, 말 그대로 핵심 중의 핵심 기술이다. 따라서 그 기술 자료나 다음 모델 시제품 등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1급의 보안 등급이 필요했다. 달리 말하면 핵심 이사진만이 접근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드류가 앞으로 20년을 더 근속해도 물론 거기까진 올라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오직 다섯 사람만이 나누어 간직하고 있단 비밀이니 당연히 택도 없는 일. 그는 문득, 19년 전 ‘피노키오 시스템'의 화장실에서, 아니 회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아련하게 떠올렸다. 
- 그럼 그때가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제가 최종적으로 보안 1등급까지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피노키오시스템스’의 회장 휴 잭스 (Hugh Jax) 씨는 오래된 애니메이션 ‘와키 레이스’의 악당 딕 대스터들리와 묘하게 닮은 양반이었다. 그가 잭스 씨를 보며 20세기의 만화 캐릭터를 떠올릴 수 있었던 까닭은 '피노키오시스템즈'이 ‘그림체 모사 시스템’으로 기반을 잡은 회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림체 모사 시스템’이란 이제까지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출판된 특정 작가의 모든 만화를 개별 요소로 분리하여 개별 데이터로 저장, 정렬한 다음에 새로운 콘티에 맞춰 부분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가령 20세기 만화에서 캐릭터의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 웃는 모습, 화난 모습, 우는 모습, 찡그린 모습 등은 일관된 유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어서 일단 데이터베이스만 구축되면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로써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와키 레이스’는 새로운 에피소드가 매주 방영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세대가 아니었던 드류 또래의 사람들까지도 ‘와키 레이스’와 딕 대스터들리에 익숙한 것이다. 잭스 씨는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 그건 따로 일러주지. 뭐, 그때가서 생각해보도록 하세.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하겠는가. 그런 연유로 드류는 팔자에도 없이 '노즈테크놀로지스'의 직원이 된 것이었다. 

*

  시종 드류의 머릿속에서는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과연 그때가서 일러준다는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임원이 되지 않고도 빠르게 보안등급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걸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왜 진작에 시도하지 않는걸까? 둘러치나 메어치나 여하튼 생길 방법이라면 몇 년씩이나 기다리지 않아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알 수 없는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일년, 이년씩 지나갔고 드디어 20년 가까이 지났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일단 30대 청년이었던 드류는 어느새 50대 중년이 되어 버렸다. 이제 정년을 생각하여야 할 나이인데 아직도 ‘피노키오시스템즈’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결국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려 뜻하지 않게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셈인데, 이제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그러는 사이에 코 기술 관련 시장은 나날이 팽창하며 '노즈테크놀로지스'는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으로 연 평균 20퍼센트의 매출 증가를 이루어냈고, 반대로 '피노키오시스템즈'은 지난 10년 사이에 영업이익이 3분의 1로 줄어들어 버렸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드류가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 기술에 접근하거나 말거나 ‘피노키오시스템즈'는 이 바닥에서 경쟁하기 어렵게 되지 않았을까? 전문가들도 업계에서 크게 뒤쳐진 ‘피노키오시스템즈’가 몇 년 안에 주저앉고 말리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아뿔싸! 드류는 자신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길을 잃은 어린 아이처럼 혼란스러움과 불안함이 밀려왔다. 계속해서 '노즈테크놀로지스'의 성실하고 눈에 잘 띄지않는 중년직원으로 살아야 할지, 아니면 언젠가 다가올 '피노키오시스템즈'의 지령을 기다리며 새로운 직장 생활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할지. 모든 변수와 다양한 가능성에 대처하며 살기에 20년은 너무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고 그는 이미 너무 나이들어 버린 상태였다. 이대로는 목적을 달성하고 '피노키오시스템즈'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새로운 생활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었다. 지금 이대로 '노즈테크놀로지스'의 직원으로 사는 건 어떨까? 물론 의도한 적은 없지만 얼결에 알고 보니 더블 크로스랄까? 아무려면 어떠냐. 꽤 나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하지만 ‘피노키오시스템즈’나 잭스씨는 드류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두지 않았다. 기술 유출이 심각한 범법 행위인만큼 보안을 최우선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소통은 철저하게 일방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일방의 전달 또한 끊긴지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갔다. 답답했던 나머지 드류는 매년 퇴근 후 '피노키오시스템즈' 본사 근처를 서성거리며 방법을 궁리하기도 했고, 잭스씨나 그룹 높은 사람들이 새벽마다 즐겨 찾는다는 고급 술집에 잠복하여 접촉의 기회를 엿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드류는 ‘이 양반들이 다 까맣게 잊어버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은행에 개설된 계좌를 통해 '피노키오시스템즈'으로부터 작전 지원금을 받고 있었는데 (업계에서는 이를 '총알'이라고 불렀다) 여전히 변함없이 매월 26일마다 입금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게 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지령과 총알이 함께 끊겼으면 그는 안심하고 임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채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었다. 지령은 있는데 총알이 끊겼다면, 그는 ‘피노키오시스템즈’와의 관계를 끊고 기술첩자로의 가짜 인생에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빌어먹을 총알이 계속 지급되고 있다는 사실, 드류는 이를 가장 까다로운 상황이라고 여겼다. 도대체 뭘 하라고 자꾸 지급한단 말인가. 그는 받은 총알로 빵을 사고 우유를 사고 과일도 샀다. 이중으로 봉급을 받는만큼 물질적으로 풍족하긴 했지만 돌을 씹는 것처럼 마음은 늘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말고 드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아주 오래된 질문을 던졌다. '나의 소속은 '노즈테크놀로지스'인걸까? 아니면 '피노키오시스템즈'인걸까?' 마치 그물에 걸린 것 같은 느낌에 숨이 막혔다. 벽에 갇힌 남자 - 문득 그는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 떠올렸다. 어떤 남자가 우연히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가 갑자기 능력이 사라지는 바람에 벽에 갇혀버린단 내용이었다. 그 사물화의 느낌. 바로 그것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드류를 답답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가방에서 기름종이를 꺼내 콧등을 문지른다. 사무실로 돌아가려면 다시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을 통과해야 했고 그 시스템에 코를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코를 깨끗이 씻어야 했다. 노폐물이 인식 시스템에 장애를 가져올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코 관리에 보다 주의를 기울였고 수시로 알콜 성분이 포함된 화장수로 콧등을 닦아냈다. 그건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공시설인만큼 최소한의 매너이기도 했다. 구석구석 깨끗하게 콧등을 문지르는 드류의 옆에 노머스 코트를 입은 한 장신의 백인 남자가 다가와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키가 6피트 5인치는 족히 되어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그가 회사 안의 모든 직원을 아는 것은 아니므로 낯선 얼굴을 마주쳤다고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어쩐지 불안한 기분에 그는 재빨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 연구개발팀의 드류 P. 위너 박사님 되십니까?
  드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머뭇거렸다. 남자는 개수대의 수독물을 틀어놓은 상태였고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은 수도꼭지에서 세면대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예, 그렇습니다만…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누구신지요?
- 저는 지적재산팀의 딕시 노머스(Dixie Normous)라고 합니다. 위너 박사님은 저를 처음 봤다고 하시는데 저는 박사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올해가 근속 19년차니까요. 박사님처럼 말입니다.
- 그러시군요. 이상하게 저는 기억이… 그런데 무슨 일이시지요?
- 다름이 아니고 제가 최근에 좀 재밌는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우리 회사 안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잠입한 기술 첩자가 있다더군요. 
- 아… 정말입니까? 
  드류는 조금 더 대범하고 영리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지금부터랍니다. 그 영광의 주인공이 글쎄, 우리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사람이라는 겁니다. 꽤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 남들보다 더 성실하고 남들보다 더 평범한, 그리고 더 묵묵히 불평없이 일하는 우수한 사원이라더군요.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닙니까? 저 같은 사람은 스파이만큼도 못하단 얘길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 그렇겠군요. 그러니까… 정말 그런 첩자가 있다면 말입니다. 
- 있습니다. 내사팀에서 직접 들었어요.
  노머스 씨가 웃음기 하나 없이 말했다. 단호하게. 드류는 이 불편한 자리를 뜨고 싶단 생각 뿐이었다. 노머스 씨가 뭔가 알고 접근한 것도 같았지만 그럴리가. 19년 동안 그는 사고 한 번 일으키지 않고 근속한 모범사원이었다. 마지막으로 '피노키오시스템즈'과 접선한지도 10년이 훨씬 넘었다. 그동안 공작은 커녕 공작 비슷한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갑자기 누군가 알아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 그렇군요. 그렇다면 정말 큰 일인데 말입니다.
- 저는 이 회사에 내사팀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신기하지 않아요? 그런 팀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 저도 몰랐습니다. 놀랍군요.
-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우리 모두 좀 조심하면서 살아야겠죠. 물론 찔리는 일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서 노머스 씨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웃음소리였다. 드류는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빨리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드류는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노머스 씨라는 남자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재빨리 연구개발부 사무실 안에만 들어가면 쫓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겁을 먹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뛰어선 안되었기에 드류는 뛰지 않는 한도내에서 최대한 빨리 걸으려고 애썼다. 식은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와 셔츠를 적셨다. 오십미터, 이십미터, 십미터……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오미터, 사미터, 삼미터…… 이젠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에 코를 갖다 대기만 하면 되었다. ‘노즈시스템즈’가 자랑하는 바로 그 기술의 집약체. “삐비빅. 인증되었습니다.” 그토록 오래 일해온 공간이었지만 기계의 건조한 목소리가 반갑게 느껴지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휴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밀었다.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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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머스 씨는 여전히 바깥에 있다. 잠긴 유리문을 통해 드류는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다. 그는 문을 열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연구개발부 출입 허가 명단에 등록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인증 오류가 나고 있다. “삐비빅, 인증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코를 대어 주십시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코를 다시 인식기에 들이밀었다. “삐비빅, 인증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코를 대어 주십시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으로 들이밀고 왼쪽으로 들이밀고 위에서 아래로 붙이고 아래에서 위로 붙였다. “삐비빅, 인증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코를 대어 주십시오.” 아마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이 없었다면 지금쯤 드류는 그와 하나의 공간안에 있게될 것이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연구개발팀은 지하 3층에 있다. 이 문을 제외하고는 나갈 수 있는 길이 없는 셈이다. 노머스 씨는 좀처럼 비켜주거나 포기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드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체가 뭘까? 그는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노려보기도 하고 어깨를 부딪쳐 문을 밀어보기도 했다. 쉽게 열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노머스 씨는 크고 넓직한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보였다. 마치 드류에게 똑똑히 보여주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번쩍거리는 나이프를 보며 드류는 남아프리카 투와다리 부족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인간의 영혼은 코에 깃들고 적의 코를 베어냄으로써 적의 영혼을 말살한다. 드류는 문이 열렸을 때 노머스 씨가 자신의 코를 도려내어 버릴 것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윽고 노머스 씨는 모자를 벗었다.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 인공코가 드러났다. 실제 코와 동일한 기작으로 작동하는 코 모양의 보형물을 인류는 약 10년 전쯤에 개발해냈다. 코가 신원 인식과 보안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사고로 코를 잃은 사람들에게도 코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중점적으로 개발된 기술이다. '저 딕시 노머스라는 남자도 그 중에 하나였던 걸까?' 드류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노즈테크놀로지스'에서 알아챈 걸까? 하지만 19년 동안 한번도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인걸. 혹시 어쩌면 ‘피노키오시스템즈'가 나를 제거하기 위해 보낸 사람일까? (하지만 왜 이제와서?) 도대체 정체가 뭘까?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누굴까? 벽 속에 갇힌 나의 소속은 '노즈테크놀로지스'일까? 아니면 '피노키오시스템즈'일까?' 저 문이 열리거나 깨지기 전에 결정할 수 있을까?

  노머스 씨의 말간 인공코가 희번덕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드류는 말할 수 없는 비현실감을 느꼈다. 잠긴 유리문을 통해 드류는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노머스 씨 또한 잠긴 유리문 너머로 드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스는 여전히 바깥에 있다. 즉 드류는 안에 있을 것이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가? 왜 인류는 여러모로 쉽고 유리한 지문이나 홍채를 두고 하필 코를 인식하는 보안 시스템을 만들어낸 걸까? 혹은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이란 정말 실존하는 것인가? 예컨데 아무 코나 가져다 대어도 열려버리는 것이 아닐까? 즉 우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기에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지 않는 한 진리가 아닌 것도 진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가짜 진리는 의심하는 순간 거짓이 된다. 정말로 ‘코 인식 보안 경비 시스템’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장담을 무엇으로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것을 본 기억은 이제껏 없었다. 단 한번도 의심은 없었다. 단 한순간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큰일일 것이다. 노머스 씨가 그 사실을 알게되면 당장에 유리문을 밀고 쳐들어 올테니 말이다. 노머스 씨는 바깥에 있었고 지금도 바깥에 있다. 그리고, 여전히 드류는 그 남자의 말간 인공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2006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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