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왜행성 134340
낙농콩단

074. 왜행성 134340

by 김영준 (James Kim)

  오늘로 12연승이다. 세상에 12연승이라니. 이건 운이 아니다. 운으로 12연승을 할 수 있는 야구팀 따위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모르겠다. 해왕성이나 명왕성 쯤이라면 있을 수도 있겠다. 아참. 명왕성은 퇴출되었지.

 

  2006년 08월 24일, 국제천문연맹은 명왕성을 태양계 식구 명단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발견된 지 75년만의 일이고 75개국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결정한 일이다. 명왕성이 퇴출된 이유는 그 크기가 너무 작고 공전주기가 불규칙하기 때문이랬다. 명왕성의 지름은 약 이천삼백킬로미터인데 사실 이 정도라면 달 지름의 3분의 2 수준이라는 것. "적어도 행성이라면 삼천킬로미터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학자들이 제시한 명왕성 퇴출의 근거다. 이제 명왕성은 이제 한낱 왜행성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 이상은 행성이 아닐 명왕성쯤에 운만으로 12연승을 할 수 있는 야구팀이 있든 말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12연승은 혀로 자기 팔꿈치를 핥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12 다음은 13이다. 아마 13연승은 12연승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엘로샤, 인류에겐 13번째 콜로니가 있습니다. 

맞습니까? 멀고 알려지지 않은 지구라는… 

 

*

 

  나는 야구선수다. 직업을 말하는 거다. 취미는 그림이다. 특기는 그림이 아니라 야구다. 그래서 화가가 되지 못하고 야구로 돈을 벌어 먹는 야구선수가 되었다.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화가의 꿈을 접었을지언정 그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낮에는 야구를 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린다. 해가 긴 여름동안 나이트 게임을 치르게 되면 낮에 짬을 내어 그림을 그린다. 만약 밤낮으로 야구를 하게 되면? 글쎄. 나는 타고난 낙천주의자여서 설사 그런 비극적 상황이 도래해도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혹은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료들이 결코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부분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먹고 사는데 상관없는 일이잖아?

  아닌게 아니라 과연! 내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게 문제다. 먹고사는데 상관없는 일은 무조건 무용하다고 여긴다. 정확한 통계를 내긴 어렵지만 대충 조사해 보면 아마 백 명 중 아흔아홉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모두가 직업도 똑같고 취미도 똑같고 특기마저 똑같다. 나란히 손에 손을 잡고,

-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젓가락 한짝이 똑같지요.

라고 노래라도 불러야 할 모양새다. 살벌하게도 팬닝된 그 네모 반듯한 틀에서 누군가 벗어나려고 할작시면 압력이 가해진다. "딴짓하지 말고 맡은 일이나 제대로 잘해." 사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로봇에 더 잘 어울리는 강요다. 그들의 눈에 야구보단 그림을 그리고픈 야구선수는 팔이 세 개 달린 외계인보다도 이상한 존재다. 때문에 입단 후 삼 년 차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림에 대한 나의 갈증을 대놓고 표현하지 못했다. 숙소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선배들이 지나가다가 들여다보고 혀를 끌끌차며 타박하기 일쑤였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배팅 연습이나 더 하라는 식으로. 세상이 마치 ‘일’과 '일이 아닌 것'의 조합만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듯이. 그래도 우리 팀 팬들에게 들키지 않아서 그건 다행이다. 만약 이런 소문이 나면 크게 경을 칠 것이다. 내가 안타를 치지 못하는 날마다 취미 생활 좀 작작하라며 미니홈피를 찾아와 지적질을 할 것이다. 내가 결정적 찬스라도 놓치는 날에는 악플을 쏟아낼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불이라도 지를지도 모른다. 절대 소문이라도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

 

  여건이 여건인지라, 내 그림은 간단한 연필 스케치가 전부다. 전국 팔도를 일 년에 수백번씩 유랑해야 하는 야구 선수에게 좋은 그림 도구의 제일 조건이란 휴대가 손쉽고 간편해야 한다는 것이 전부다. 이젤을 세워놓고 판을 벌이고 붓을 골라가며 물감칠을 할 여유 따위는 없는 나에게 연필만큼 적합한 도구가 또 있을까? 연필에 대한 나의 애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연필만큼은 좋은 걸 쓴다. 야구선수니 배트에 더 신경을 써야겠지만, 난 연필을 고르는데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더 많은 감각을 집중한다. 연필과 야구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는 아마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B(무른 정도)와 H(단단한 정도)로 나누어지는 연필의 표기를 볼 때면 가끔 "이게 야구와 정말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1B, 2B, 3B는 꼭 1루, 2루, 3루를 지칭하는 것 같다. 4루는 없지만 4B는 베이스 온 볼스, 즉 '볼 넷'을 가리키는 한 가지 표기다. 1H는 안타 하나, 2H는 안타 둘, 3H는 안타 셋, 4H는 안타 넷. 너무 무르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아, 서로 중간에서 만나는 HB는 히트 뱃맨, 즉 몸에 맞는 공을 던진 기록을 연상시킨다. 그러니 연필을 사용하는 동안에도 결코 야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야구장에서 이와 같은 기호를 접하게 되어도 나는 어김없이 연필을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그림과 야구는 하나의 끈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아직까지 이런 얘기를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당연히. 그랬다간 바보 멍청이 취급을 받을 테니까.

 

  우리 팀이 이길 때마다 나는 연필을 한 자루씩 새로 깎는다. 오랫동안 반복하여 끈끈하게 몸에 익었으니, 이게 바로 버릇이다. 새 연필을 깎는 기분은 상쾌하다. 경기에서 이기는 느낌에 거의 필적하고도 남는다. 장내 아나운서가 끝끝내 우리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순간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쾌감과 새 연필이 사르륵 깎여나가 반들반들한 빗면을 드러낼 때 스며나오는 쾌감, 이 두 가지 성취감은 나의 안쪽 어딘가에 유사한 강도의 만족으로 단단히 인식되어 있다. 이를 증명할 방도는 없을지 모른다. 지는 날에는 연필을 깎지 않아서다. 한 번쯤 지는 날에도 새 연필을 깎아봄으로써 관계의 요체를 밝혀보고 싶은 심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지는 날에 새 연필을 깎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내게 그건 서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정서다. 최근 12연승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열심히 연필을 깎았다. 쓱싹쓱싹. 커터칼이 움직일 때마다 나뭇결이 벗겨지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어느새 열두 자루 - 이미 한 다스를 다 써버렸다. 길고 뾰족하고 또 단정하게 심을 드러낸 새 연필 열두 자루를 보면서 나는 12연승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된다. 12연승이란 75명의 전문가가 한 자리에 모여도 해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인 것이다.

 

  지난 보름동안 새 연필이 열두 자루나 생기는 바람에 난 좀 바빠졌다. 평소보다 더 많은 그림을 그려야 기분좋은 새 연필을 기분 좋게 소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이미 깎아놓은 새 연필을 보관하기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연필은 깨지기 쉬운 녀석이다. 특히 나처럼 사흘 혹은 나흘 간격으로 한 번씩 지방을 유랑하는 떠돌이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옷가방이나 개인배트를 챙기다 보면 아무리 필통 안에 단단히 고정시켰던 것이라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첨탑보다 뾰족했던 흑심이 보기 흉하게 부러져버린 뒤라던가, 겉으론 보이지 않아도 속에서부터 곪아가고 있다던가. 한두 자루라면 모르겠는데 이젠 자그마치 열두 자루가 그럴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이거 참, 너무 이겨도 문제로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혀를 끌끌 차고 스케치북을 넘겼다. 운동선수 치고는 고상한 취미로군. 누군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누군가 라커룸 구석에서 연필을 놀리는 내게 던진 말이었다. 어째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야구 선수에게 고상한 취미인지 의아했으나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그림을 그린다. 연필의 원리는 심이 뭉그러지며 종이 표면에 부서져 들어가 붙는 것이다. 쓱싹. 쓱싹. 쓱싹삭. 종이 위에 흑연이 부서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사랑스럽다.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 팀 동료들은 변태, 라고 놀린다. 그럴 때마다 적잖이 머쓱하여 마치 두 눈 멀쩡히 뜨고 꼿꼿이 서서 스트라이크 아웃, 이라도 당한 기분이다. 때문에 좀처럼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변태, 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팀 동료들을 변태, 라고 부르는 게 도의적으로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먼저 나를 변태, 라고 불렀으니 내가 그들은 변태, 라고 부른다 한들 전혀 변태, 적인 것이 아닐 테다. 만약 볼펜보다 연필이 좋다는 게 변태, 적이라면 그들과 나의 정신세계는 명왕성을 한 바퀴 돌아 이천삼백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제 지름은 이천삼백킬로미터입니다.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습니다. 행복합니다. 

 

*

 

  나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주전 3번 타자다. 포지션은 3루수. 운이 좋아서 무사히 프로팀에 들어왔고 운이 좋아서 3번 타자 자리를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4번을 못 치는 게 섭섭하지는 않다. 3번에는 3번 나름의 조건과 매력이 있는 거고 4번에는 4번 나름의 조건과 매력이 있는 것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었다. 3번이 4번을 동경하거나 4번이 3번을 부러워하면 그 팀에는 문제가 있는 거다. 바꿔 말하면 3번에 만족하는 3번과 4번에 만족하는 4번만이 제대로 된 팀을 만들 수가 있다. 나는 내 생활에 만족한다. 낮에는 열심히 경기하고 또 연습하고, 밤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다른 팀보다 대우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들 하지만 나로서는 딱히 불만이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문제없이 먹고살고, 그 이상 무엇을 바라야 할까? 바라는 건 없습니다. 행복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영 점 오 그램 쯤의 한숨과 일 그램 쯤의 경멸도 함께 담겨 있는 듯하다.

-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연봉 협상할 때 그런 얘기는 되도록 하지 말라고.

  고마운 충고다. 하지만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째서 있는 그대로 말하면 안되는 걸까? 어째서 있는 그대로 말하면 손해를 보고야마는 걸까? 다른 모두가 있는 것보다 부풀려서 말하니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이건 옳은 일이 아니다.

- 선배님들, 그런데 왜 꼭 그래야하는 건데요?

  그들은 내 머리를 툭툭치며 웃는다.

- 니 밥그릇은 니가 챙겨야 하는 거야. 인마, 자아의 리노베이팅. 창조적 혁신 몰라?

  문득 나는 명왕성이 그리워져 밖으로 나갔지만 녀석은 육안으로 보기에 너무 작고 멀었다. 

 

*

 

  태양계 행성들이 모두 모인 총회에서 명왕성은 질문을 받았다.

- 요즘 들어 자네의 존재에 의문을 표하는 자들이 많네. 얘기인즉슨 자네가 우리 클럽에 끼기에 자격 미달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답해주게. 지름이 얼만가?

- 제 지름은 이천삼백킬로미터입니다.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습니다. 행복합니다.

(만화처럼 크고 웅장하게 문자화 된, 헉, 소리를 내며 모두들 놀란다.) 

 

  75명의 전문가가 모인 자리에서 순진한 명왕성은 있는 그대로 말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이렇게 입을 모아 말한다. "적어도 행성이라면 삼천킬로미터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명왕성이 자기 지름이 삼천킬로미터라고 거짓말을 했다면 그는 태양계에서 행성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 일이킬로미터도 아니고 자그마치 칠백킬로미터인데…… 뻥을 치기엔 좀 심한 게 아닐까?

  룸메이트 방유만 (Bang, You Man) 형에게 물었다. 그는 나보다 두 살이 많고 우리 팀의 내 다음 타자, 즉 요한 스트라우스의 4번 타자다. 그의 포지션은 1루수인데 가끔 상황에 따라 코너 외야수나 지명타자로 출전하기도 한다.

- 그럼 정직한 대신 퇴출되던가. 어렵지만 그만큼 간단하기도한 선택에 달린 문제겠지. 

 

  어쩌면 세상은, 너무 살벌한 것도 같다. 승패를 내어야 하는 스포츠처럼 말이다. 심지어 몇몇 천문학자들은 명왕성만이 아니라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천왕성과 해왕성마저도 강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천왕성과 해왕성이 살아남은 건 지름이 그나마 오만킬로씩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채 삼천킬로도 되지 않는 명왕성은, 지구의 0.18배에 불과한 명왕성의 왜소함은! 이제 그는 행성의 지위를 잃었다. 그에게는 '왜행성 134340'이라는 초라한 일련번호가 붙었다. 그 이름이 어쩐지 슬퍼 나는 밤 사이 남몰래, 쓱싹쓱싹, 명왕성을 그려보았다. 당연히, 모른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태양으로부터 30 AU인지 40 AU인지 떨어진 그 곳을 상상해 보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 214년이나 걸려 공전하는 그의 고단함을 이해해 보려고 했던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강등되었거나 말거나 태양계의 일부로 공전한다. 침을 퉤, 뱉고도 도망갈 수 없는 그 끈끈한 인력이란. 이천삼백킬로의 명왕성이 잘린 건 잔인한 구조조정의 결과였다고, 나는 느낀다. 스토브리그에서 벌어지는 팀의 리빌딩처럼. 75명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필요 없는 건 도려내고 필요한 것만 남긴 결과다. 우리 '요한 스트라우스'도 지난 겨울 일곱 선수를 보호대상에서 풀었다.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뜻이다.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전화가 왔다. 비닐하우스의 바깥은 살 떨리게 추운 세상이라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그 낯선 목소리는 꼭 명왕성에서부터 걸려온 콜렉트 콜 같았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나는, 이 태양계의 법칙이라는 것과, 인력이라는 것과, 또 그 반대의 척력이라는 것과, 75명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떠올리다 잠이 들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끝끝내 새로운 비닐하우스를 찾지 못했다. 하나는 물려받은 유산으로 돼지갈빗집을 열었고 다른 하나는, 한강에 투신했다.

 

쓱싹 쓱싹 쓱싹…… 아, 오해는 하덜말어. 

이건 세상의 방정식을 푸는 소리야.

 

*

 

  인류에게는 명왕성을 탐사할 계획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워낙 멀리에 있어 쉽지는 않겠지만 정복욕이 강한 우리가 태양계 마지막 행성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둘 리가 만무할리가 있을까. 바로 보이저 1호다. 보이저 1호의 막대하고 복잡하고 수많은 임무 목록의 끄트머리에는 명왕성을 탐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 혹은 '마트 근처에 간 김에 장도 봐온다,' 정도의 헬륨가스보다도 가볍고 희박한 느낌이다. 그렇게 보이저 1호는 목성과 토성과 천왕성과 해왕성을 탐사했는데 명왕성에는 들르지 않았다. 예산도 부족했거니와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나.

 

  그래도 룸메이트 방형만은 날 이해해준다. 만사를 유하게 생각하는 그는 인생에 대한 기계적 척도를 들이대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편하다. 내가 방형와 가까워진 데는 룸메라는 표면적 이유 외로도 그런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야구보단 그림을 그리고 싶은 야구선수'란 다른 모든 동료들에게 '이상한' 존재지만 형에게는 '까짓 거 그럴 수도 있는' 존재다. 모두가 이상하다 찝찝하게 생각하는 '스트라우스'라는 팀의 이름도 그에게 '까짓 거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구단주 마음인 걸 어떡해? 누가 나서서 바꾸기라도 할 거야? 터무니없이 복잡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의 눈을 거치면 아주 짧고 간명한 식으로 수렴하게 된다. 그런 점이 부럽다. '까짓 거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인드로 바라보는 세상은 지금보다 열 배는 더 즐겁지 않을까. 비교적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나를 가끔 괴롭게 하는 것은, 동료들에게 ‘야구보단 그림을 그리고픈 야구선수’로 인식되는 스스로에 대한 압박감이다. 맞다. 나는 내가 ‘야구보단 그림을 그리고 싶은 야구선수’로 여겨지는 것이 싫다. 그냥 '야구선수'다 - 사족은 떼어버리고 그냥 거기에서 설명은 끝나야 한다. 이천삼백킬로니 삼천킬로니 하는 덧없는 설명은 떼어버리고 바라봐. 천왕성이나 해왕성이나 '왜행성 134340'이나, 행성은 꼭 그래야 한다는 준엄한 법칙 따위가 있는 걸까? 방형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국제대회에서 국가대표 유니폼 뒤에 자기 이름이 ‘BANG’이라고 적혀 있는 것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나 같으면 조금 창피할 것 같은데.) 하물며 취미생활 따위야. ’까짓 거 야구보다 그림이 더 좋을 수도 있지' 이런 게 방형의 사고방식이다. 난 그게 부럽다.

 

  12 다음은 13이다. 아마 13연승은 12연승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강한 확신이 있다. 가방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열어 본다. 이제까지 그린 그림들. 우리의 다음 경기 승리를 암시하고 있다. 정말이다. 이기면 이길 수록 더 많은 연필을 새로 깎는다. 새로 깎은 연필이 많을수록 더 많은 그림을 그린다. 더 많은 그림 속에는 더 많은 예언이 담기게 된다. 더 많은 예언 속에는 우리 팀의 미래에 대한 것도 있다. 엘로샤, 과연 인류에겐 13번째 콜로니가 있습니다. 요즘 난 '왜행성 134340'이 되어버린 명왕성을 향해 날아가는 하나의 탐사선을 그리고 있다. 인류 최초로 명왕성, 아니 '왜행성 134340'을 목적으로 쏘아 올린 무인 우주선이다. 미항공우주국 '나사'의 ‘뉴호라이즌호.' 그는 태양계의 외곽 궤도를 살펴보기 위해 2006년 1월 19일에 발사되었다. 가만… 국제천문연맹이 명왕성을 태양계 호적에서 파내어 버린 것이 2006년 08월 24일이니 출발하고 7개월 후에 목적지의 지위가 달라진 셈이다. 그건 어떤 기분일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도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자기의 인생이 변한다는 기분은? 세상에는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다. 역설적이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렇다. 그게 이 우주의 장대한 섭리인 걸까? '왜행성 134340'만큼이나 ‘뉴호라이즌호'의 신세도 가련하다. 그래서, 쓱싹쓱싹, 그리기 시작했다. 탐사선이 어떤 모양인지 잘 몰라 인터넷으로 '나사'의 홈페이지를 뒤졌다. 상상도 속의 그 탐사선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저 까만 밤하늘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인정하기에 너무도 피곤해 스케치북을 덮고 잠을 청했다. 늘어지도록 푸욱, 아주 깊은 꿈 속으로 들어가 내가 닿을 수 없는 저 미지의 우주 끄트머리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얻어올 수 있길 바랐다.

- 어이 3루, 자냐? 

  룸메이트 형이었다. 우리 '요한 스트라우스'의 4번 타자. 자는 줄 알았던 그가 부스스 일어난 것이다. 나는 어쩐지 '깬 척'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계속 '자는 척'을 했다.

- 자는가보네…

 

  형은 조용히 텔레비젼을 켰다. 리모콘을 누르는 소리와 텔레비젼 소리가 몇 번을 반복해서 들리더니만 이윽고 채널이 멈추었다. 여전히 나는 자는 척, 눈을 꼭 감은 채. 형은 조심스럽게 볼륨을 줄였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텔레비젼에서 흘러나옴이 분명한 그 소리가 무엇인지를. 형은 그러니까, '이상한 영화'가 나오는 케이블 방송을 보려고 아닌 밤중에 벌떡 일어난 것이다. 오! 우리 팀의 4번 타자여! 기어이 이름값을 하시는군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상한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면서 내 가슴도 따라 쿵쾅거렸고 눈을 떠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자는 척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데, 자는 척을 하려 해도 명왕성까지도 들리고도 남을 그놈의 소리에 신경이 쓰여 도통 집중할 수가 없으니. 그렇지만 만약 내가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형이 많이 민망할 텐데… 식은 땀이 바짝바짝 흐를 때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임무를 충실히 다 하고 있을 ‘뉴호라이즌호’를 떠올리려 애썼고 감히 비난할 수 없는 룸메이트의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욕구를 감싸주기 위해 나는 조금 더 눈을 꼬옥 감았다. 하지만, 쓱싹쓱싹, 연필 소리도 아니면서 텔레비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확실한 또 다른 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면서 그만 나는, 얼굴이, 명왕성만큼 붉어지고야 말았다. '이상한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구나 - 눈을 감고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 이런! 그건 형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쓱싹쓱싹, 침대는 파도처럼 흔들렸다. 하나님 맙소사! 어쩌자고 원 베드짜리 숙소를 잡은 거지? 그 소리가 쓱싹쓱싹, 흑연이 종이 위에서 부스러지는 아름다운 소리와 닮았노라 생각하자. 그래도 쓱싹쓱싹, 지금 우리 팀의 연승 가도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며 또 몇 개의 새 연필을 깎아야 할까? 그렇게 쓱싹쓱싹, 만약에 자기 지름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명왕성은 '왜행성 134430'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또다시 쓱싹쓱싹, 처음 뵙겠습니다. 90482 오르쿠스…… 이럴 때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팀의 4번 타자를 위해 꼭 감고 있으려던 나의 눈은 어느 사이 형의 눈과 마주친 상태고 난무하는 크리넥스 속에 사색이 된 형은 태연을 가장한 태연하지 않은 얼굴로,

- 아, 오해는 하덜말어. 이건 세상의 방정식을 푸는 소리야. 

라고 둘러댔다.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뉴호라이즌호'는 명왕…… , 아니 왜행성 134340에 2015년이나 되어야 도착한단다. 저 검푸른 우주 어딘가를 아직도 열심히 날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12연승을 하고 13연승을 기대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2006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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