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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 오렌지 그리워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6.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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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드맨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확신했던 미래 중에는 맞는 것도 있었고 물론 당연히 틀렸던 것도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핵 전쟁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전에 성사 여부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하셨다. 그는 (당신도 그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인류라는 족속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셨다. 못 미더운 족속의 못 미더운 사고능력을 감안할 때 미구에 사단이 나고 말리라 믿으셨던 것이다.

  물론 인류의 미래를 비관했던 남자가 우리 올드맨 한 사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확신의 정도랄까, 절망의 깊이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우리 올드맨은 어지간한 비관론자들의 표준 분포를 멀찍이 벗어나는 곳에 계셨음이 틀림없다. 전 재산을 털어 넣어 방공호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확신이 없이는 그런 일을 벌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멀쩡한 집을 허물었다가 땅 속 깊이 방공호를 만들고 그 위에 집을 다시 올리셨다 (가족들은 공사 기간 동안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했다). 그게 내 나이 네 살 때의 일이다. 세 살 터울의 하나 밖에 없는 누나 샐리는 일곱 살이었다.

  그때부터 방공호는 내내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 남매와 함께. 우리 집 아래. 지하실 아래. 서류상으로는 40 피트 깊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측정해 본 적이야 물론 없지만 느낌상 그랬다. 오래 전에 한 번 내려가 본 적이 있었는데 40 피트라기에는 너무 오래 걸렸다. 아마도 400 피트. 어쩌면 4,000 피트. 아니, 그 보다 더 깊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에 늘상 배치되어 있던 시공업체의 팜플렛에 따르면 방공호에는 두 개의 방과 주방, 그리고 수세식 화장실이 하나 딸려있다고 했다. 수도와 전기도 갖추어져 있다. 헤파필터가 달린 공기 정화기와 에어컨과 적당한 크기의 냉장고도 있단다. 모델하우스의 분양 홍보 자료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볕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과히 나쁘지 않아 보였기에 나는 인생의 굴곡을 마주할 때마다 당장이라도 각박한 지상생활을 때려치우고 짐 싸들고 방공호로 내려가고픈 충동을 느끼곤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괜한 고민이었다. 어차피 언젠가 이렇게 내려오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편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상의 생활을 즐겼을거다. 



*


  인류에게 핵 전쟁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2006년 6월 6일 6시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CNN 뉴스에 따르면, 어쨌든 그렇다. 당시 나는 갓 구운 토스트에 딕슨스 딸기잼을 바르고 있었고 누나는 막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를 헤어 드라이기로 말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출근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 이거 출근을 하라는거야? 말라는거야? 
  투덜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핵 전쟁이라니! 너무 막연한 소리 않은가? “6시 경으로 추정됩니다.” 그 또한 막연한 소리 아닌가? 
- 딱 666이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누나가 말했다. 테이블 한 편에서 나는 꼼꼼하게 토스트 구석 구석 잼을 발랐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금발머리를 가진 누나는 맞은 편에서 잘 마르지 않는 머리칼 끝을 매만지고 있었으며, 앵무새가 된 앵커는 “초유의 사태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초여름의 보석같은 햇볕이 아침 창의 가장자리에서 산란하며 반짝이는 빛알갱이를 흩뿌렸다. 살며시 열린 창틀 사이로는 살랑거리는 바람에서는 단 한 줌의 적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 음, 출근하지 않고 늘어지게 자고싶어. 
  천천히 한 번 기지개를 켜고 늘어지게 하품을 한 다음 배를 두드렸다. 한 입 베어물은 토스트의 시큼하고 달콤한 뒷맛이 묘한 방식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밤새 아우성치던 속도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 어떻게 할꺼야? 
- 뭘? 
  누나가 물었다. 
- 핵 전쟁인지 햄 전쟁인지가 일어났다며.
- 그래서? 
- 할아버지가 때가 되면 꼭 들어가 있으라고 당부하셨잖니.

  누나는 식탁 옆에서 맨손 체조를 하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누나를 ‘꼬맹이 샐리’라고 부르던 시절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반복해 온 아침 운동이다. 더 없이 진지한 체조 동작을 따라 누나의 금발이 춤을 추었다.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그 말의 무게는 솜털처럼 가벼워 어째 웃음이 났다. 아! 핵 전쟁! 그게 바로 이거로구나. 그런데…… 피식. 핵은 개뿔. 신록은 마냥 푸르르기만 하구만. 바깥에선 새들의 수다스러운 지저귐이 들리는 걸. 나는 허리와 엉덩이 사이 명확히 경계를 나눌 수 없는 어떤 곳을 벅벅 긁으며 열쇠를 찾아 나섰다. 방공호 열쇠 말이다. 싱크대, 냉장고, 가스레인지, 세탁기, 식기세척기, 심지어 모든 찬장을 다 뒤졌다. 엉뚱하게도 열쇠는 냉동실에서 나왔다. 
- 야! 누가 할아버지 유품을 냉장고에 넣냐? 
  누나는 배꼽을 잡았다.
- 지구가 생각보다 뜨거워졌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랬어. 
  난 입을 삐쭉 내밀었다. 

  누나와 나는 방공호 열쇠를 하나씩 나눠가졌다. 새삼 기억이 새로웠다. 어려울 건 없었다. 올드맨은 때가 닥쳤을 경우를 대비하여 우리에게. 충분한 연습을 시키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육을 받았고 한달에 한 번씩 실습을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이런 수준의. 준비를 강요받진 않았을 것이다. 도움이 될 날이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기분이 묘했다. 처음 겪는 핵 전쟁에 이렇게 능숙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다만 문제는 초여름 특유의 나른함이었다. 
- 졸려. 
  누나가 말했다.  
- 나도. 
  이하동문이었다. 우리는 잔뜩 귀찮은 표정으로 천천히 열쇠를 들고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나는 현관 신발장 앞으로, 누나는 지하실 계단 초입으로 각각 가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 귀찮아.
  누나가 말했다.
- 나도.
  이하동문이었다. 느릿느릿 전등 스위치를 삐걱거리며 떼어내자 숨겨진 녹슨 열쇠구멍이 반짝하고 빛을 내었다. 
- 난 준비됐어. 
- 나도. 

  지하실 계단 앞에 서 있는 누나가 들을 수 있도록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 돌린다. 
- 셋에 돌리기다. 알았지?
- 하나, 둘, 둘의 반…….
  나는 다시 한 번 배를 잡고 웃었다. 30년대 뮤지컬 음악처럼 명랑과 낙관에 물든 누나의 웃음소리가 집 안쪽에서 들려왔다.
- 셋!
  우리는 정확히 동시에 열쇠를 찔러 넣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른쪽으로 힘차게 돌렸다. 

*


  우르르 꽝. 천둥 소리와 함께 집이 흔들렸다. 꽝! 꽝! 꽝! 몸이 휘청거렸다. 순간 시야가 흔들리며 사물이 여러 개로 보이는 듯 했다. 나는 누나와 합류하기 위해서 재빨리 지하실 입구로 뛰어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꼭 열쇠가 두 개이고 열쇠구멍을 멀리 떨어뜨려 놓았어야 할까? 정말 멍청한 일 아닌가!
- 잠깐. 내려가기 전에 뭐라도 챙겨야 하지 않을까? 혹시 모르잖아. 
- 혹시 모른다고?
- 만약에 다시 올라오기 어렵게 되면 말이야. 진짜 핵 전쟁이라면 그렇지 않겠어?

  텔레비젼은 켜져 있었고 CNN 앵커는 여전히 "초유의 사태입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만 있었다. 아직 애틀랜타의 뉴스룸이 날아가진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방으로 달려갔다. 티셔츠 몇 벌과 세면 도구, 남성용 스킨 로션 세트와 헤어 왁스, 에드거 앨런 포 단편집과 빅 볼펜, 그리고 연습장 한 권을 챙겼다. 샘소나이트 캐리어를 끌다보니 마치 여행이라도 떠나는 기분이 되었다. 한편 누나는 나보다 시간이 곱절이나 더 걸렸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필요한 온갖 종류의 의상과 장신구, 화장품을 죄다 짊어지고 갈 참인듯 했다. 아니, 샤넬, 루이비통, 안나수이가 이 판국에 무슨 소용이 있다고? 
- 어이, 아가씨! 땅 속에서 무도회라도 열 참이야? 
  누나는 날 흘겨보았다. 그 참에 재빨리 부엌을 뒤졌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던져넣었다. 생각보다 당장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 이런 말 조금 웃기지만…… 핵 전쟁이 터질 줄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걸 그랬어.
- 어째서? 
- 미리 알았으면 진작에 월마트나 코스트코라도 갔다왔을 게 아니야. 
  누나도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말이 맞아. 갑자기 땅콩 버터가 있었으면 좋겠어. 
- 크런치로 아니면 크리미로? 
- 크런치로. 
- 나도. 지금이라도 다녀오면 안되겠지?
- 아쉽지만 너무 늦은 걸 어떻게 해. 이제 지하로 내려가야 하잖아. 
- 맞아. 이제는 내려가야지.

  누나와 나는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 밖의 하늘은 여전히 눈부시게 파랗고 평화로워 도저히 핵 전쟁이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수준의 무섭고 끔찍한 일이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믿기가 쉽지 않았다. CNN 앵커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 듯 쐐기를 박았다. “초유의 사태입니다.” 빌어먹을, 애틀랜타는 아직도 안전한 모양이었다.

*


- 자, 내려가기 전에 인사는 해야지. 
누나가 말했다. 
- 엄마 안녕. 
- 아빠 안녕. 
- 그리고 할아버지도 안녕. 

  이로써 우리는 지상에 남아있는 모든 기억과 미련에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서서히 지하실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단단하고 메마른 계단은 신발을 신고도 그 냉기를 느낄 수 있을만큼 차가웠고 지하실 깊숙한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6월이라는 계절을 무색하게 할만큼 차갑고 서늘했다. 일단 문을 걸어 잠그니 그나마 있던 한 줌의 빛도 까맣게 사라졌다. 어둠. 끝없는 암흑. 고요. 끝없는 침묵. 오로지 누나의 숨소리만 들렸다. 누나는 나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 어둡지않아? 
- 견딜만해, 생각보다는.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내가 말했다. 
- 어쭈. 쪼그만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남자라고 제법 용기가 있는데? 
  뒤따라오던 누나가 중얼거렸다. 너무 어두워 목소리만 들렸다. 
- 왜 일어난걸까? 핵 전쟁말이야. 
- 핵 전쟁? 
- 아까 뉴스에서 그랬잖아. 또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방공호로 내려가고 있는거고. 
  누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 아참, 맞다. 그렇지. 

  얼마나 내려갔을까. 드디어 좀 팔을 펼 수 있는 공간이 나왔고 비상 전력으로 돌아가는 붉은 색 전등이 보였다. 휴우. 이젠 좀 살 것 같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벽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올드 맨은 이 벽의 두께가 3.5 피트라고 했었다. 벽의 중앙에는 보기에도 육중하게 느껴지는 철문이 하나 있었는데 은행 금고처럼 단말기에 비밀번호를 입력한 다음에 양손으로 잡고 돌려야 하는 휠 핸들이 부착된 문이었다. 비밀번호! 우리 가족 말고는 여기 내려와 볼 사람도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올드맨은 우리에게 문단속의 중요성을 누차 역설하셨지만 정말로 방공호에 들어가야 할만큼 심각한 사태라면 낯선이가 문을 두드리는 것 정도는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하리라.
- 누나, 비밀번호가 뭐 였는지 기억해?
  정말로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 당연한 거 아니니?
  누나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키패드에서 6을 찾아 세 번 눌렀다. 올드맨의 고약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니, 오늘이 6월 6일이고 문제가 6시경에 시작되었다니 예견이라고 봐야할까? 통상 암호로 훌륭하게 기능할만한 조합과는 거리가 먼 세 자리 연속된 숫자를 누르고 나니 문은 힘없이 열렸다. 내심 기대하였던 위엄이나 웅장함과는 거리가 있는 입장이어서 어쩐지 싱거운 기분이 되었다. 

  문의 반대편 역시 춥고 어두웠다. 더 큰 문제는 아래로 향하는 나선 계단이었다. 나는 남자답게 앞장서 내려가고 누나는 뒤에서 따라오게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슬슬 어지럼증이 일었다. 게다가 덤벙이 누나는 자꾸만 발을 헛디뎌 내 등에 부딪히며 가슴이 철렁하게 만들었다. 그래놓고 혀를 빼꼼 내밀며 한단 소리가, 헤헷 미안?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정말 누가 데려갈지 걱정이다. 또 한편으로는 부딪히는 순간에 자꾸만 누나의 볼록한 가슴이 내 등에 와닿는 느낌이 묘했다.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 지금 깊이가 얼마쯤 될까? 40피트? 400피트? 4,000피트?
- 모르겠어. 정말 끝도 없네.

  올드맨은 한번도 그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없었다. 우리가 무사히 방공호에 도착하는 방법 이외엔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심지어 우리는 저 아래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단지, 내려가야하니 내려갈 뿐이었다. 처음이면서도 마치 평생 습관처럼 그래왔다는 듯이.

*


  나선 계단의 끝은 땅 속 깊은 곳 어딘가였고 그 끝은 다시 길고 어두운 복도로 이어졌다. 복도를 따라 백 걸음만에 다시 휠 핸들이 달린 철문이 등장했고 그 안이 바로 말로만 들어오던 방공호였다. 

  방공호 내부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같았고 동시에 기대와 다르기도 하였다. 생각보다 훨씬 좁아서 팜플렛에 제시된 홍보용 사진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거실과 방 두 개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작기는 하지만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다. 똑딱 스위치를 누르니 전기도 번쩍 들어왔고 수도꼭지를 돌리니 물도 찔끔 나왔다. 땅 속 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숨 쉬기에 그닥 어려운 점은 없었다. 공기청정 시스템 덕분이겠지. 올드맨은 낙진이 지상을 뒤덮을 경우에도 방공호 안에는 쓸만한 공기만 들어올 수 있도록 수천개의 필터를 복잡하고 철저하게 배치했노라고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설계도는 엔터프라이즈 호를 만들고도 남을만큼 많고 복잡하고 또 알 수 없는 기호로 가득하여 누나나 나로서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재차 물으셨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우리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것 하나만 알아두렴. 바람은 힘이 촘촘한 곳에서 뜸한 곳으로 물처럼 흐른단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확인해보니 어쨌든 잘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원리를 이해할 필요도 없다. 고민할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 내가 이 방을 쓸께.
- 나는 이 방을 쓰지. 
  누나와 나는 방을 하나씩 나누었다. 방은 두 개고 우리는 두 사람이니 수요와 공급이 딱 맞았다. 분쟁이 날 것이 없었다. 나는 방금 '내 방'으로 이름붙여진 공간으로 들어가 가져온 짐을 정리했다. 침대 옆 협탁의 서랍을 열었더니 킹 제임스 성경이 나왔다. 올드맨 다운 발상이다. 샘소나이트 가방을 열고 짐을 옮기려고 하였지만 생각해보니 사실 별 것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킨 로션이나 헤어왁스나 방공호 안에서는 크게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다. 서랍을 열고 한 번에 쓸어 넣었다. 빅 볼펜과 노트는 서랍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 놓았다. 어쩜 이렇게 바보같은 것만 챙겨왔을까. 아둔한 머리를 탓하며 간이 침대에 풀썩 몸을 뉘였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종종 내려와서 정리를 해놓을 것을 그랬어!
  옆 방에서 누나가 말했다. 같은 방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선명하게 들렸다. 하기야 내 방과 누나 방은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석처럼 붙어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 전적으로 동감이야. 
  아마 누나로서는 그 남다른 물욕의 결과물들을 모두 싸짊어지고 내려오지 못한 것이 퍽이나 한스러울테다. 인류에게 핵 전쟁이 닥치게 될 것을 그 누가 미리 알았으랴. 이처럼 어느 평화로운 날 아침 갑자기 다가오리라는 것을 말이다. 알았다면 우린 좀 더 여유를 두고 천천히 삶의 모든 부분을 이 완벽한 방공호 안으로 옮겨두었을 것이다. 물론 후회는 부질없다. 그게 인간의 한계다. 닥치기 전에는 좀처럼 구체적으로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 

  누나는 또 하나의 미련을 생각해냈다. 아까도 같은 얘기를 했었지만…… 
- 땅콩 버터가 한 병 있었으면 좋겠어. 
- 크런치로 아니면 크리미로? 
- 크런치로. 
-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더더욱 그립다. 그렇지? 
- 응. 듬뿍 퍼내어 얇게 빵에 바르면, 입 안에서 오도독거리며, 얼마나 고소할까? 

  상상만으로도 바르르 떨렸다. 식품 저장고에 저장된 먹거리의 상태가 우리의 그리움을 배가시켰다. 저장고 안에는 온통 말린 과일과 말린 채소류, 견과류, 그리고 육포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린 자두, 말린 바나나, 말린 키위, 말린 파파야, 말린 사과, 말린 산딸기, 말린 체리, 말린 포도, 말린 복숭아, 말린 배, 말린 무화과, 말린 파인애플, 말린 고구마, 땅콩, 호두, 피스타치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말린 것들이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지상에 올라가면, 어쩌면 만물이 저렇게 변해 있을 수도 있겠지.
- 전부 다 술 안주감이네. 
  누나의 지적은 간결하나 정당했다. 반박의 여지 없이 술 안주 감이었다. 올드맨이 마지막으로 방공호에 내려와보셨던 것도 아마 2년 전쯤일 테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내려오지 못하셨을 것이다. 고로 이 저장고의 모든 식품, 아니 말린 식품들은 최소 2년 이상 묵은 것들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 먹어도 될까? 
- 뭐, 그냥 말린 건데. 별 탈이라도 있겠어? 
  나는 말린 바나나를 입에 넣고 아작아작 소리내어 씹었다. 아직 눅눅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바나나향은 향긋하면서도 고소했다. 누나도 나를 따라 말린 바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리곤 말했다. 
- 여기 있으면 다른 건 몰라도 다이어트만큼은 확실하게 되겠네. 그렇지?

*


  지상의 시간으로 일주일이 지났다. 누나와 내가 방공호로 내려온 이후로 말이다. 일주일은 지상과 지하의 차이를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일상에서 기어코 결핍된 것들을 찾아냈고 (땅콩 버터!) 예기치 않게 과잉인 것들 또한 찾아냈다. 이를테면 말린 복숭아, 말린 파파야, 말린 무화과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 며칠은 씹는 맛이라도 있었다. 견과류의 고소함과 건과일의 쫀득함이 지하 생활의 무료함을 덜어주는 부분은 물론 있었지만 그것도 한 두번이지. 벌써 우리는 지겨워졌다. 무엇보다 목이 말랐다. 타는 듯이 말랐다. 물을 마셔도 잠시 뿐. 갈증은 이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런데, 
- 정말 핵 전쟁이 일어나기는 한 걸까? 
  말린 과일 무더기 속의 말랑말랑한 것들만 골라 꼭꼭 씹으면서 누나가 물었다 (급기야 이젠 뭘 씹는 소리만 들어도 목이 말랐다). 누나의 질문에 대해서라면…… 나도 그게 이상했다. 
- 그러게 말이야. 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데. 
  가만히 벽에 귀를 대어보았다.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누나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 바보야. 여긴 아주 아주 깊은 땅 속이라고. 그리고 그 콘크리트 벽의 두께가 얼만지나 알아? 위에서 설령 대단한 일이 벌어졌대도 아마 아무 소리도 안 들릴꺼야. 
  누나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난 바보라는 말이 싫었다. 
- 내가 왜 바보야? 
- 바보니까 바보라고 부르지. 이 바보야.

  누나만 아니면 그냥! 확 대들려다가 말았다. 온기를 지닌 상대라고는 우리 둘 뿐인 이 곳에서까지 철없이 치고박고 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실로 핵 전쟁이 있었냐는 물음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었다. 방공호에는 여전히 전기가 들어온다. 여전히 수돗물도 나온다 (끔찍할 정도로 수압이 약하기야 하지만). 공기 순환도 제법 잘 되어 숨 쉬는데 큰 불편함은 없다. 온도는? 딱 적당할만큼 서늘하다. 습도는? 열이나 습기로 인해 불쾌감이 들지는 않을 정도다. 역시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고 있다는 얘기다. 
  정말로 핵 전쟁이 터졌다면 전기나 수도가 예전과 다름없이 공급될 수 있을까?
  그럼 그때 그 뉴스는? 혹시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내려왔던 것이 아닐까? 
  듣고보니 일리가 있었다. 핵 전쟁이 시작은 되었으되 전면전으로 이어지기 전에 차단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예컨대 영화에서처럼 슈퍼 히어로들이 합심하여 상공의 그것들을 모두 우주 저 멀리 내던져버렸다면 지금쯤 지상은 아주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일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우리 남매는 일주일을 더 버텼다. 온갖 말린 것들과 함께. 

  그리고 더는 버틸 수 없어 조심스럽게 입구의 휠 핸들을 돌려 문을 열었다. 백 걸음 길이의 좁은 복도를 따라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나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누나가 앞장을 섰는데 세상 편한 차림새라 (하얀색 민소매 티셔츠에 한 뼘 길이의 리바이스 데님 반바지를 입었다) 나로서는 혀를 끌끌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어이 아줌마, 의상 참 적절하네요. 저 위가 황무지로 변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누나가 힐끔 흘겨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의 의무로 정말 저 왈가닥을 누가 데려갈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것만 봐도 그렇다. 나선 계단을 올라가겠다는 사람이 블록힐 샌들을 신고 나왔는데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숨이 나오지 않겠는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허옇게 내놓은 다리가 남사스러워 나는 몇 계단 더 떨어져 따라가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발목과 발뒤꿈치에 시선이 닿았다. 하얗고 작은 발. 근육의 탄력. 힘줄의 반복운동. 다시 속도를 내어 몇 계단 따라 붙었다. 걸음에 따라 리바이스 데님의 가장자리 트임을 따라 완연한 곡선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입이 바싹 말랐다. 남매지간이기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지만 누나가 예쁜 축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예쁜 축? 아니 그 이상이지. 꼬맹이 샐리 때부터 누나를 따라다니는 남자 애들이 집 앞에 줄을 섰으니까. 우리 마을은 물론 카운티 전체를 놓고 봐도 우리 누나만한 인물이 없긴 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카운티 최고의 미인과 방공호 안에 단 둘이 있는 것이다. 

  다시 우리는 철문 앞에 도착했다. 그 밖에는 정 든 우리집의 지하실로 향하는 또다른 계단이 있을 것이다. 거의 지상 가까이 온 셈이지만 아무런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철문에 귀를 대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나도 다가와 철문에 귀를 대었다.
- 문을 다시 열어볼까? 열리기는 하는거지?
  올드맨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일단 한 번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아 머뭇거렸다. 솔직히 겁도 났다. 다시 올라가 두 눈으로 지상의 상황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정말로 핵 전쟁이 터졌다고 한다면 멋모르고 나갔다가는 큰 사단이 날 게 아닌가. 문을 밀었지만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누나도 달려들어 문을 밀었다. 어림도 없었다. 열심히 문을 미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민소매 티셔츠가 밀려가며 가슴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을 누나는 몰랐던 듯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평생 함께 살아왔고, 나는 매일 아침 속옷 차림으로 땅콩 버터 샌드위치를 오물거리거나 우스꽝스러운 맨손 체조를 하는 누나를 지켜보곤 했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당황하거나 긴장해 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절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뿐인 내 누나. 꼬맹이 샐리.

  우리는 하릴없이 되돌아 내려왔다. 우리는 너무 지쳤고 우선 모든 결정을 내일로 미루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건과일이나 견과일만 대충 집어 먹은 다음에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누나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단지 간이 침대가 불편하여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오! 주여! 협탁을 열고 킹 제임스 성경을 꺼냈다. 펼쳤다가 덮었다. 그 안에 답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


  세상은 고요했다. 이따금씩 숨소리만 들렸다. 누나의 숨소리다. 방공호의 육중하고 두꺼운 콘크리트 벽과 달리 우리 방 사이의 벽은 한없이 얇았다. 새근 새근 숨소리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린 파인애플을 조금식 떼어 입에 집어넣고 꼭꼭 씹었다. 목이 무슨 사하라 사막이라도 된 듯이 바싹 말라 텁텁했다. 물이 켰다. 살려면 이 말린 것들을 먹어야하고 먹으면 물이 킨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여전히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나오지만 그대로 마셔도 될거라 장담하긴 어렵다. 만약 핵 전쟁이 일어났다면 바깥에서 끌어오는 물을 함부로 마셔선 안될 것이다. 또한 거꾸로 그 물을 마셔도 된다는 얘기는 바깥에 핵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렵고 복잡하다.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프다. 에라 모르겠다. 말린 체리를 입에 털어 넣었다. 언젠가의 물기를 모두 잃어버리고 형편없이 부피가 줄어든 이 원초적 덩어리들은 입 안에서 버쩍거리며 흩어졌다. 새콤하고 달콤했다. 기분마저 끈끈했다. 또 침이 말랐다. 이제까지 그랬듯 눈 딱 감고 수도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 마시면 될 일인데 오늘따라 더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이런 내 어지러운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누나는 잘도 잔다. 이 판국에 잠이 잘도 오는가 보다. 슬그머니 문을 밀고 방 안을 들여다보니 이불도 걷어차고 쿨쿨 잘도잔다. 다 큰 처녀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야. 거듭 강조하지만 정말 걱정이다. 누가 데려갈런지.

  조용히 누나 방으로 들어갔다. 누나 옆에 가만히 누웠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나란히 누워본 게 언제였더라.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옆으로 돌아 누나의 얼굴을 마주보고 눕는다. 가까이서 조목조목 따져보니 꽤 예쁜 얼굴이기는 하다. 아버지보단 엄마를 더 닮은 게 분명해. 사실 서로 말은 곱게 안 해도 누나의 마음 씀씀이가 항상 나를 챙기고 있었단 것을 알고 있었다. 다섯 살 터울의 누나는 어떨 때는 꼭 엄마처럼 나를 대했다. 그러니까 누나는 누나고 또 엄마이기도 함 셈이다. 누나는 새근새근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때마다 과일 향기가 올라온다. 무슨 향이었더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복숭아같기도 포도같기도, 혹은 키위나 파파야같기도 했다. 달큰한 냄새에 코가 간질거렸다. 잠들기 전에 말린 과일을 잔뜩 집어먹은게 분명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향기는 더 진해졌다. 고소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땅콩버턴가? 이 안엔 그런게 없을텐데. 어쩜 누나는 나 몰래 땅콩버터를 숨겨가지고 내려와 몰래 그 부드러운 것을 숨겨 먹었는지도 모른다. 확증을 잡기 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코와 코가 맞닿을만큼 가까이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무슨 향길까? 복숭아도 아니고 땅콩버터도 아니다. 이건 아마도…… 오렌지같다. 오렌지향이다. 햇볕에 단단하게 익어서 튼튼하고 노란 껍질을 가진 오렌지, 방금 우악스럽게 껍질을 까낸 신선하고 물기많은 오렌지, 입 안에 한껏 집어넣고 씹으면 시원하고 달콤한 과즙이 폭죽처럼 터질것 같은 그 오렌지. 취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응,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오렌지, 오렌지가 그립다. 오렌지가 그리워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진원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깜짝 놀랐다.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분명 도의상 그래서야 아니될 것이다. 근데 하지만…… 아무렴 뭐 어떠랴. 지금은 인류가 핵 전쟁으로 존망의 위기에 놓인 비상 시국이 아닌가. 지상의 법칙과 지하의 법칙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상의 도덕이 그대로 엄수되기를 바라는 건 무리한 일이다. 세상은 고요했다. 땅 속으로 한없이 깊은 곳에서. 3.5 피트 두께의 콘크리트 벽 안에서. 일 톤의 육중한 문 뒤에서. 이따금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 남매의 무의미한 들숨과 날숨 안에서. 

 

(2006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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