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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파트-타임 러버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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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자판기는 도시의 그늘을 따라서 들어섰다. 음료 자판기인가? (아니다.) 승차권 자판기인가? (아니다.) 과자 자판기인가? (아니다.) 담배 자판기인가? (아니다.) 그런 따위를 파는 자판기야 이제까지도 많았지만 이것은 조금 새롭고 특별한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이 한번도 보지 못했고 (어쩌면) 한번도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것이리라 장담한다. 이제까지 이것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까닭은 이렇다.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인류가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영역을 넘보는 기술적 뒷받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하면) 긴 세월 동안 인류가 쌓아올린 상식이라는 견고한 성과 이제까지 밝혀진 모든 과학적 사실, 두 가지 모두에 극적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가능’이 ‘가능’이 되었으니 완전히 새로운 시장이 탄생했다.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수요를 자극하여 깨워내었다. 여러분은 아마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실 것이다. 바로 하루 만기의 ‘계약 연인’을 판매하는 장치다. 맞다. 동전이나 지폐 따위를 넣고 원하는 남자 혹은 여자 (혹은 다른 옵션도 있다)를 구입하는 것이다.

 

  자판기, 즉 자동판매기의 역사를 되짚어 보자면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편의성과 은밀성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거래 당사자간 상행위를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은 자본가에게 인건비 절감 등의 효율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원하는 물품을 원하는 시간에 (무엇보다 ‘판매자를 대면하지 않고’)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대한 만족을 제공해 주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자신과 같은 존재인 인간을 대면하고 인간의 손을 거쳐 진행하는 거래보다 기계를 상대하는 거래를 더 편하게 생각하는 소위 현대인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들의 불가해한 속성이다. 급기야 ‘자판기 천국’이라는 일본에서는 자판기로 초밥도 팔고 티셔츠도 팔고 우산도 판다. 맥주나 와인까지도 애교다. 상할 수 있는 토마토와 시들 수 있는 꽃이 모두 자판기 안으로 들어간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자판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생긴 자판기는 ‘계약 연인’을 판매한다. 이 자판기의 이름은 ‘파트-타임 러버’. 최대 72시간까지 유지되는 계약 하에 연인을 제공한다. 장점은 두 가지다. 첫째,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절약된다. 둘째, 그렇게 맺은 관계의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도덕, 의무, 책임이 면제된다. 왜냐하면 ‘파트-타임 러버’가 판매하는 러버들은 (그렇다. 그들은 자판기 안에서 탄생되어 동전 혹은 지폐와 교환될 운명을 지닌 생명체를 ‘러버’라고 불렀다) 고유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자각있는 생명체로 간주되지 않으며 24시간 단위로 갱신되어 최대 72시간 후에 완전 소멸되는 운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파트-타임 러버’는 (당연히) 뜨거운 사회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간편하고 수월하며 뒤끝 없는 연애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거라는 주장을 펼쳤다. 현대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대개 사랑에 굶주리거나 욕망에 탐닉하는 이들 때문에 벌어진다는 점을 복기하자면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저수지는 결코 채워질 수가 없는 법이고 사탕이나 초콜렛처럼 있는만큼 더 탐하게 된다는 주장으로 맞대응했다. 내 생각은 어떻냐고? 글쎄다. 나는 인간 존재 자체가 ‘풀-타임 러버’로 운명의 한 사람을 골라 살아가는 좋은 취지에 만족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면 굳이 헌신과 정절을 정답인양 강요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

 

  어쩌면 이런 생각은, 음...... 내 유년기의 특수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리건주 토박이인 우리 부모님은 장미 농장의 막내딸인 어머니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여 열아홉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하셨다. 그때 아버지는 겨우 스물한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을 ‘칼스 주니어’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생으로 떠돌다가 막 포틀랜드 국제공항에서 수화물 처리 직원으로 첫 (진짜) 직장을 얻은 참이었다.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꽤 어린 나이에 결혼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 시절에 걸맞게 그 분들은 서로를 ‘운명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앨범 속 흑백 사진을 들추어보면 실제로도 꽤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던 듯 하다.) 그렇게 심심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처럼 보였던 그 분들의 로맨스는 무려 10년 뒤 뜻밖의 반전을 맞게 된다. 수화물 처리 중에 아버지가 27인치 핑크색 샘소나이트를 실수로 파손하였는데 그 일로 댈라스 출신의 동갑내기 카우걸과 한바탕 옥신각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해프닝은 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말 그대로 ‘Lost-and-Found’인 것처럼) 그리 오래지 않아 놀라울만큼 쉽게 아버지는 가정을 버렸다.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카우걸과 함께 떠났다.

 

  그때는 그 인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40대 중반으로 접어든 지금은 (어쩌면) 그 인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당시 아버지는 겨우 서른을 갓 넘긴 반-어린아이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남편 노릇과 아버지 노릇을 간편히 집어치워 버린 것이야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부일처의 결혼 생활에 라이프 타임 워런티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인류 공통의 숙제일 뿐 비단 그 빌어먹을 인간만의 문제라기도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실을 알만큼 나도 충분히 나이를 먹었다. 

 

  조금 사족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당시의 카우걸 또한 그 남자에겐 ‘운명의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보면 내가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인연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당시 시 외곽에서 20 에이커가 넘는 장미 농장을 운영하던 갑부 외할아버지가 사립탐정까지 고용하면서 집요하게 추적하신 덕분이다. (사립탐정이라니! 이 또한 그 시기의 시대적 분위기 물씬 풍기는 소재 아닌가!) 아버지는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공항을 옮겨 다녔다고 전해지며 (그 또한 재주라면 놀라운 재주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소재는 플로리다주 잭슨빌이었다 (잭슨빌에서 뭘 하고 먹고 살겠는가? 당연히 수화물 처리 직원이었겠지. 당연히 배운 도둑질이 그거 뿐인 사람인데.) 아무튼 요는 이거다. 아버지가 이상한 사람이었던 걸까? 물론 그거야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만의 문제였을까? 글쎄… 이 부분은 쉽게 답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

 

   ‘파트-타임 러버’의 포틀랜드 3호 자판기.

 

  나는 지금 보안 사무실에 앉아 창문으로 포틀랜드 중심가에 설치된 ‘파트-타임 러버’를 지켜보고 있다. 많은 주에서, 또 많은 도시에서 여전히 이 자판기는 윤리적 논쟁거리다. 하지만 포틀랜드에서만큼은 큰 말썽이 없이 자리를 잡은 편이었다. (그렇다! 그래서 포틀랜드다!) 물론 여기도 이 자판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리고 그런 의사를 과격하게 표현하려는 사람들 역시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보안 사무실이 있는 이유이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고용되어 있는 이유이다. 자판기를 파손하려는 사람들은 좌우로 자리 잡은 일곱 개의 폐쇄회로 카메라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뒤에서 번뜩이고 있는 세 개의 눈을 피할 재간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켜보는 눈이 세 개인 까닭은 이렇다. 일단 내가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고 왼쪽 눈 시력을 잃은 나의 부사수 찰리가 오른쪽 눈으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찰리는 이라크 파병 과정에서 사고를 당해 제대를 하고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 나는 그가 훌륭한 군인이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국가를 위해 희생한 노력을 당연히 존중한다. 하지만 그가 이런 일에 있어 적임자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참전 경력이 있는 제대 군인들의 공통된 문제 중의 하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다. (별개로 외상 후 스트레스가 없는 참전 군인은 조금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 문제가 없는 외상 후 스트레스 환자도 조금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그러니 찰리는 지극히 정상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알코올 중독 문제가 있는 건 정상적인 참전 군인에게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본사에서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녀석을 해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인데 (채용시에는 드러나지 않아 결격 사유가 아니었는데 채용 후에 드러나면 해고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게 당최 말이 되는 소린가?) 되도록이면 본사에서 찰리의 문제를 캐치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나는 녀석이 마음에 든다. 녀석도 나를 잘 따르는 편이다. 다른 녀석이 새로 와서 서로 맞추고 적응하는 것도 귀찮다. 가능하면 계속 이렇게 녀석과 내가 짝을 지어 일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파트-타임 러버’ 자판기는 내 자리에서는 아주 잘 보인다. 스테인레스 재질에 밝은 핑크색으로 도색된 자판기 위로 LED 스크롤러가 돌아간다.

 

  ‘그 혹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땐 빛을 깜빡여 신호를 보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포틀랜드가 의외로 이혼률이 높은 도시라는 사실을 아는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라스베가스, 탬파, 마이애미가 이혼률 높기로 유명한 도시라는 사실은 십분 이해가 간다. 하지만 포틀랜드? 아니 도대체 왜? 

 

*

 

  '파트-타임 러버’ 자판기를 사용하려면 먼저 회원가입을 해야한다. 회원가입에는 온라인 절차와 오프라인 절차가 따로 있다. 온라인 절차는 이름,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계정 따위를 넣은 다음에 100문항 분량의 설문조사를 포함한 신청서 작성하게 된다. 설문조사는 사랑과 연애에 있어 평소 그 사람의 생각들을 파악하기 위한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어 약 6만 5천자에 달하는 약관 동의를 거쳐서 소액의 가입비(29.9 달러)와 연회비(49.9 달러)를 결제함으로써 마무리된다. 한편 오프라인 절차는 신체검사인데 파트-타임 러버 인터내셔널 유한회사 (PTLI Ltd.) 본사 혹은 본사 지정 병원에 방문하여 검사를 받는 것이다. 본사에서는 온라인 수집 정보와 오프라인 수집 정보를 종합하여 회원 적격 판정을 하고 회원번호가 기재된 아이디 카드를 회원에게 우편으로 발송한다. 바로 이 카드를 이용하여 '파트-타임 러버’ 자판기를 이용할 수가 있게 된다. 하루 24시간 중 그 어느 때라도 말이다. 

 

  남은 절차는 여느 자판기 사용법과 다르지 않다. 아이디 카드를 세로로 세워서 마그네틱 테잎이 잘 읽힐 수 있도록 홈을 긁는다. 자판기는 이용자의 신원을 조회하고 ‘파트-타임 러버’의 회원 여부를 판단한 다음에 회원정보에 근거하여 구매자에게 어울릴만한 열여섯명의 여성 혹은 남성을 디자인하여 모니터로 출력한다. 가로로 네 명, 그리고 세로로 네 명. 얼굴을 고르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체형을 조정하고 피부색을 조정하고 헤어 디자인을 바꾼다. 자판기는 왼쪽 상단의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제공될 러버의 이미지를 렌더링하여 보여주는데 만족스럽다면 ‘완료’ 버튼을 누르면 되고 만족스럽지 않다면 ‘뒤로’ 버튼을 누르고 메뉴로 돌아가면 된다. 끝으로 1회 이용 금액 10달러에 해당하는 지폐 혹은 동전을 밀어넣으면 거래가 완료된다. 즉시 상품 배출구로 지름 15 센티미터의 러버-볼이 내려온다.

 

  폐쇄 회로 카메라를 통해서 나는 자판기 이용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폐쇄회로 카메라의 단조로운 저해상도 모노톤 화면이 지겨워지면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기도 한다. 자판기 이용자들의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된다 (보안 사무실은 3층에 있고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자판기와는 20 피트 정도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슬그머니 아이디 카드를 긁고 황급히 지폐를 넣은 다음에 부지런하게 (동시에 초조하게) 디스플레이를 이리 저리 조절하다가 상품 배출구로 튀어나온 러버-볼을 들고 황급하게 사라진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다. 재미있는 인간의 심리다. 

 

  러버-볼은 수신기가 내장된 플라스틱 구형 케이스다. 사업 초기에 어떤 사람들은 러버-볼의 이름 때문에 러버의 원료물질과 양분을 담고 있는 일종의 인큐베이터 용기인 것으로 오해를 했는데 (그럴리가!) 우리 회사는 물론 세상 어떤 회사에도 그런 기술은 없다. (도대체 어떤 상상들을 하는 것인가? 러버-볼을 바닥에 던지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속에서 러버가 나올거라고?) 러버-볼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 등장했던 콩트다. 캐스트들이 ‘파트-타임 러버’의 책임개발자로 분하고 나타나서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랩 코트를 입은) 빌 헤이더: ’파트-타임 러버’는 학문과 기술의 집합체입니다. 생물학, 화학, 물리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철학, 경영학, 연애학, 골상학, 사주운명학의 총체입니다. 이의 실현을 위해 서른 다섯 개의 전문 협력 업체가 힘을 모았습니다. 기계와 전자 전문가들이 자판기를 만들었습니다. 생물학자와 화학자와 물리학자가 생명의 발생과 분화를 위해 나섰습니다. 차가운 기계 덩어리 안에서 무슨 수로 생명이 탄생하느냐.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발벗고 나섰습니다. 

(랩 코트를 입은) 존 멀레이니: 이 자판기 안에는 생명의 재료가 들어 있습니다. 커피 자판기 담당 직원들이 정기적으로 커피 자판기의 커피가루와 프림, 설탕을 채워 넣듯이 우리 직원들도 정기적으로 이 생명의 재료가 떨어지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채워 넣습니다. 

(랩 코트를 입은) 프레드 아미센: 생명의 재료가 무엇이냐면 물, 흙, 공기, 불입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물은 생명에 필수적이며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헤라크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은 끝없이 순환하며 더 나은 형상을 향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이 공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요, 농축되면 물이며 극도로 농축되며 흙이라 하였습니다. 크세노파네스는 만물의 근원이 흙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도 흐르고 불도 나오고 공기도 스며 있는게 흙이랬습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앞 사람들이 제시한 네 가지 일원론을 싸그리 합쳐 4원소설을 만들었습니다. 저희 기술은 이 4원소설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랩 코트를 입은) 앤디 샘버그: 그렇습니다. 4원소서… Whaaaaaaat?

 

  이 재치있는 남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러버-볼은 그냥 구식 위치추적기에 그럴듯한 껍데기를 씌운 것에 불과하다.

 

*

 

  (주) PTLI에서 경비 일을 시작하고 그리 오래지 않아서 나는 이 사업의 핵심이 러버-볼임을 깨달았다. 구매한 상품을 바로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 사업은 자판기와 맞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러버를 만들어 내는 시간 동안 구매자가 자판기 앞에서 기다려야 한다면? 혹은 자판기 바로 앞에서 실상품을 수령하지 못한다면? 자판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전제하에서는 결코 파트-타임 러버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열풍의 근간에는 구석지고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고요하게 서 있는 자판기에 남들 눈을 피해 돈을 밀어 넣고 원하는 것을 받아 재빨리 주머니에 넣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가서 즐기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리고 러버-볼 기술은 그 간극을 메워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실 기술적인 면만 놓고 보면 이 사업은 자판기와 잘 맞지 않는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른 다음 코카콜라 한 캔이 떨어지기까지 시간 안에 클론을 완벽하게 합성하여 내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탄산음료처럼 자판기에 완제품을 가득 채워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래로 밀어 하나를 떨어뜨려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을 벌어야 한다. 러버 하나가 완성되기까지는 35분이 걸린다. 3D 프린팅을 하는데 30분이 걸리고 그걸 미리 준비된 뼈대에 씌우는데 4분 30초가 걸린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본사에서 사용하는 공식 용어는 ‘바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비된 캐릭터 정보를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본사에서 사용하는 공식 용어는 ‘소울’이다) 다운로드 받는데 30초가 걸린다. 빌리 홀리데이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디 앤 소울’인데 이 패키지의 준비의 35분이 걸린다. 세상에 자판기 앞에서 35분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35분을 기다려야 한다면 자판기 사업이 성립할 수 없다. 그건 자판기가 아니다. 때문에 일단 당장 소비자의 손에 뭔가 상품을 쥐어주고 보기 위해 러버-볼이 필요한 것이다. 

 

  ‘바디 앤 소울’의 결합이 마무리되면 계약 연인 ‘러버’는 지역 거점 창고를 출발하여 러버-볼이 위치한 지점으로 이동한다. 모든 러버의 위치는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되고 있다. 러버-볼의 위치에 도착하면 배송이 완료되고 활성화가 된다. 본사는 한 시간 이내 배송을 보장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35분의 제작 시간을 줄이지 않는 한 쉽지 않은 목표가 아닌가 싶다 (피자도 아니고!). 이미 로스엔젤레스나 뉴욕처럼 교통 지옥인 도시에서는 배달 사고가 무수히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로에서 이탈하거나 두 시간 이내로 활성화가 되지 않으면 러버는 다시 출발점인 지역 거점 창고로 돌아온다. 러버가 러버-볼의 위치에 도착하는 최종 지점을 우리는 활성화 포인트라고 부른다. 회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활성화 포인트 역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모니터링하고 있다.  

- 영감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활성화 포인트가 자기 집 주소가 아니라 호텔인 거 알아요? 심지어 자기 집을 바로 앞에 두고도 힐튼이나 매리어트에 간다고요.

  애꾸눈 찰리의 말이다. 뭔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 사람처럼 들뜬 목소리다. 다른 사람 인생의 숨겨진 페이지를 들추고 엿보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녀석만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활성화 포인트가 자기 집이 아니라 인근 호텔이라는 것은 ‘파트-타임 러버’ 사업이 내세우는 취지가 결국 긍국적인 변질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이미 그 자체가 이 사업의 일부인지도 모르는 일이고.   

 

*

 

  그녀. 이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파트-타임 러버’의 포틀랜드 3호 자판기는 이스트포트 쇼핑센터의 카메라 전문점 우측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 나는 보안팀의 야간조로 그것을 매일 12시간 동안 지켜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보통은 폐쇄회로 카메라로, 가끔씩 지겨워지면 사무실 창문을 통해 육안으로. 저녁으로는 대개 도미노 피자를 시켜먹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매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애꾸눈 찰리를 시켜 타코벨이나 치폴레를 사다 먹었는데 역시 정말 가까운 곳에 매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음식들의 공통적 문제는 먹고 난 다음에 마냥 자리에 앉아서 뭉개다 보면 어김없이 극단적인 소화불량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모니터 속의 흑백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면 다른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소화가 되지 않아 창가를 서성거리고 있었고 펄멜 담배를 물고 자판기가 있는 곳을 별 생각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펄멜이 반쯤 타들어갔을 무렵 나는 누군가 자판기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음을 알아채게 되었다. 그때가 저녁 10시 반쯤? 아마도? 흥미로운 반응이었다. 자판기 앞에서 쭈빗거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급한 마음에 순식간에 해치우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왜? 기도라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누구에게?

 

  내가 확인한 것은 그녀의 뒷모습 뿐이었다. 분홍색 헤어밴드, 포니테일, 가는 목, 약간 짧은 청 자켓, 허리께가 드러나는 티셔츠, 종아리까지 오는 블루진, 조금 가는 발목, 분홍색 런닝화. 매일 자판기 앞을 오가는 수백명의 사람들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었고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관심이 있었다면 아마 폐쇄회로 카메라가 전송하고 있는 모니터를 확인해서 앞모습을 보려고 했을 것이다. 다만 그 날 단 한번 주의 깊게 그녀를 살펴본 것으로 인하여 다음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새삼 더 자세히 지켜보게 되었고, 그러한 과정이 매주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그녀를 특별한 고객으로 인식하게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물론 여러 번 자판기를 이용하는 고객이 그녀 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용 빈도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을 특별 관리하는 것 또한 내가 맡은 직무 중 하나였다. 

 

  러버를 지나치게 자주 이용하는 고객은 확률적으로 문제가 많을 수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사에서 내려준 지침서의 한 구절이다. 쉽게 번역하면 너무 자주 뽑아가는 사람은 중독자라는 얘기다. 그런면에서 이 비즈니스는 다른 비즈니스와 차별화되는 지점을 갖는다. 일반적인 사업장에서는 자주 찾아와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을 ‘우수 고객님’ 혹은 ‘소중한 고객님’ 혹은 ‘VIP’라고 떠받드는데 우리는 거꾸로 그 사람들을 특별 추적 관리 해야하는 패러독스를 마주한다. ‘파트-타임 러버’를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예를 들면 에스코트 서비스처럼) 쓰려고 하는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 비즈니스를 ‘윤리적 딜레마’라는 이름의 위험에 빠뜨린다. 나와 찰리는 이미 한무더기의 그런 고객들 목록을 (대부분이 남자지만 꼭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지고 있다. 본사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가려 내는 프로파일링 항목도 작성하여 내려주고는 했고 ‘요주의 고객’들에 대한 회원 정보는 전국 지점의 보안 사무실과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긴밀하게 공유되고 있다. 

 

  그녀가 무엇이 그렇게 특별했느냐고? 글쎄 잘 모르겠다. 그냥 느낌이었다. 어쩌면 일주일동안 그 자판기 앞을 지나가는 수만명의 사람들과 별 다른 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주일동안 그 자판기를 이용하는 백명이 넘는 사람들과 별 다른 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 어김없이 목요일 저녁 11시에 나타난다는 점만 제외하면.매번 15분 정도 그 앞을 서성이며 하늘을 올려다 보며 뜸을 들이다가 그제야 동전을 넣고 러버-볼을 들고 황급히 사라진다는 점도 제외하면. 그리고 매주 반복해서 거의 똑같이 생긴 러버를 구입하면서 단 한 번도 24시간 후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았다는 점까지 제외하면.

 

  그녀는 왜 그런 ‘패턴’을 보이는 것일까? 전술한 것처럼 고객의 ‘패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본사에 보고를 해야할까? 설명할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나는 그녀의 개인 정보에 접근했다. 나중에 본사에서 알게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어쩌자고 무작정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안다. 어디에 사는지도 안다. 매주 목요일 자정에 러버-볼을 활성화한 장소도 알고 있다. (그래도 가정집이다. 힐튼이나 메리어트가 아니라.) 그녀가 고른 러버들의 외모는 거의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무의식적으로 선호라는 게 있다. 사람이 여러 차례의 선택을 반복 수행할 때 설령 항상 무작위로 다르게 골랐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상 그렇지는 않다. 비슷한 유형과 비슷한 패턴 안에서 반복을 했을 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짧은 금발에 넓은 이마, 약간 처진 눈, 커다란 입에 각진 턱. 표준보다 조금 더 건장한 체격.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경우는 대개 그녀가 아는 실존 인물 중에 비슷한 모델이 있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어떤 이유에선가 문제가 있어서 러버를 대신 자기 삶으로 들이는 경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보고된 사례 중에는 꽤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고 (사별한 연인 혹은 배우자라던가) 좀 속보이는 사연도 있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연인 혹은 배우자를 교체한다던가) 완전 너저분한 사연도 있었다 (복제한 연인 혹은 배우자로부터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던가). 그녀는 어느쪽에 가까울까? 일단 고객 정보상으로 그녀는 33세 미혼이었다. 포틀랜드 태생이고 다른 주로 이사한 적이 없었다. 결혼한 이력도 없었다. 연애 이력까지 우리가 수집할 수는 없으니 아마 남자 친구의 문제일 수는 있을 것이다. 30대 여성 고객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같은 외모를 갖고 자신을 더 잘 이해해주는 옛 남자친구’ 판타지 종류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경우라면 24시간 후 계약 연장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부분은 여전히 설명이 안된다.)

 

  ‘파트-타임 러버’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인큐베이터에서 태어난 사람 껍데기에 회원이 원하는 정보를 그대로 집어 넣었다는 지점에 위치한다. 러버가 자신을 잘 이해해준다고 느끼기 때문에 회원들은 만족하지만 실상 러버는 회원 자신이 입력한 정보를 그대로 출력하고 있을 뿐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자기가 쓴 일기를 보면서 일기장이 자기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준다고 감탄하는 격이다. 스스로 적어넣은 희망사항을 그대로 읊어주는 인공물에 위로받는다니 현대인들이란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지. 그러니 이른바 ‘운명의 한사람’을 찾아 전국의 공항을 떠돌았던 아버지의 무책임함과 바람기에 더 화를 내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이후 12주 동안 그녀는 매주 목요일 어김없이 오후 11시에 ‘파트-타임 러버’ 자판기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후 러버-볼을 들고 사라졌다. 약 15분 후 창고에서는 러버가 출발했다. 모두 비슷하게 생긴 러버들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신 러버로 가장하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보면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그녀의 비밀을 풀 수 있을까? 미친 소리 같은가?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보안 요원은 그런 짓을 하라고 뽑아놓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의심 사례들에 모두 이런 식으로 대응하려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는 일 중에 미치지 않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클론과 24시간 만기의 계약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부터 완전 미친 소리가 아닌가? 그 서비스의 회원 가입자가 미국에서만 700만명을 돌파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닌가? 전 세계에서 이용자 5,000만명이 넘어선 것은 미친 소리 아닌가? 그 서비스로 인하여 이혼하는 커플이 미국에서만 매주 백쌍, 전세계 적으로는 집계조차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미친 소리 아닌가?

 

  일단 미친 소리라는 점을 접어두고 생각해보면 기술적으로 아주 불가능한 아이디어는 아니다. 진짜 러버가 그녀의 집에 도착하지 못하게 만들기만 한다면 내가 러버인 척 행세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녀의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 러버들처럼 케이블을 연결하고 데이터를 다운로드 받지는 않지만 눈으로 보고 읽고 이해하고 외워서 배우처럼 연기를 할 수가 있다. 활성화 포인트인 그녀의 집까지 경로를 온라인 맵으로 보아 왔으며 필요하다면 어느 목요일 밤 그녀의 뒤를 밟아 어떤 길을 따라 어떤 건널목을 건너 집으로 향하는지 확인하는 방법도 있다. (그건 애꾸눈 찰리처럼 전직 군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난 두 눈이 멀쩡하지 않은가!) 여기서 유일한 문제는 그녀가 선택한 러버와 내가 외모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 부분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녀가 러버의 외모를 어떻게 설정했는지도 알고 있고 비슷하게 꾸밀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키나 체중 같은 부분은 물론 까다롭지만 머리 모양이나 수염 길이를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는 사람들 중에 방송이나 영화 분야에서 분장 기술 전문가들에게 부탁할 수도 있다. 변칙이지만 안경이나 모자 같은 악세사리를 트릭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 영감님, 카툰 네트워크에서 하는 모든 쇼가 게이들에 의해 제작되고 있단 걸 알아요?     

 

  바비큐맛 레이즈 감자칩을 입에 넣으며 (그 얇은 조각 17개의 칼로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찰리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으며 슬며시 웃어보였다. 찰리의 집중력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과거 군에서 특수 작전을 수행했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는 근무시간 내내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두 개의 화면만큼 들여다 본다. 하나는 폐쇄회로 카메라. 다른 하나는 텔레비젼. 내내 ‘틴 타이탄스 고’나 ‘토탈 드라마 아일랜드’나 ‘위 베어 베어스’를 틀어놓고 산다. 열 번도 더 본 에피소드를 또 보고 있을 때도 있다. 심지어 그는 직접 일어나 창문 너머로 자판기를 내려다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 내가 꾸미는 일에 있어선 그리 나쁜 소식이 아니다. 내가 나갔다가 몇 시간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찰리가 알아차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알아차릴즈음에는 근무시간이 끝날 것이다. 그때쯤 내가 슬쩍 문자메시지를 보내 먼저 퇴근한다고 던져놓으면 그의 생각은 내가 밤사이 사라졌다는 지점 근처까지도 다다르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판기에서 나온 러버-볼을 들고 집으로 향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서비스의 중요한 일부라고 믿는 그것은 커피숍의 진동벨과 비슷한 것일 뿐이다. 러버를 바로 만들어 자판기 앞에서 만나게 해줄 수 없으므로 (나는 과학자도 공학자도 아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안다) 시간을 버는 일종의 눈속임. 사실 러버들의 출발 거점은 보안 사무실의 뒤에 딸린 컨테이너 창고다. 말인 즉슨 나는 러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출발할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 또한 좋은 소식이다.) 바로 여기서. 창고 뒷문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 인파 속으로 섞여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최단 경로로 러버-볼의 위치를 찾아갈 것이다. 현대인들의 서로에 대한 무관심. 당신이 이 대목에서 당황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매일 그로서리나 잡화점을 돌아다니며 마주 치는 사람의 일부가 러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나는 진짜 러버를 붙잡아 비활성화시키고 그의 위치 GPS 트래킹칩을 뽑아내어 바지 주머니에 넣은 다음에 러버-볼이 있는 위치로 찾아갈 수가 있다. 그녀의 현관문을 두들기면 그녀는 감쪽같이 내가 24시간 만기의 계약 연인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러버처럼 연기하는 것은 조금 까다로울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들어간 정보를 고스란히 뱉어내는 러버들과 40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행동이 같을 수야 없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고민할 일이다. 일단 비밀을 밝혀내면 그 다음에는 러버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켜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 계획에 문제가 있나? 가만히 자문해본다. 모르겠다. 왜 이걸 해야하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주 목요일에도 나타날 것이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구매 내역은 본사에도 전산 관리되고 있을 것이다. 12주 연속 매주 목요일 11시. 눈에 띄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니, 벌써 눈에 띄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금 더 망설였다가는 본사에서 먼저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전에 그녀가 사라져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정말 그녀의 비밀이 궁금하다면 더 늦어지기 전에 선수를 쳐야한다.

 

*

 

  13주째 목요일. 그녀는 오후 11시에 자판기 앞에 나타났고 10분 전 러버-볼을 들고 출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바로 창고로 내려왔다. 난간에 턱을 괴고 기대어 그녀의 13번째 러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난 12개의 러버들은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번 팔려나간 러버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4시간 후 계약이 만료되면 그대로 본사가 지정한 곳으로 이동하여 분해 절차에 들어가니까. (물론 돌아온다고 해도 그들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분해 절차. 그들은 결국 물과 기름과 몇 가지 폴리머 덩어리로 나누어져 재활용 공정에 들어간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본사의 영업 기밀이므로 나로서도 잘 모른다. 이것은 만약 내가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경우 해결해야 될 숙제 중의 하나다. 빼돌린 진짜 러버를 어떻게 24시간 동안 보관했다가 본사 지정 장소로 보낼 것인가 하는 골치 아픈 문제. 

 

  13번째 러버. QVKXMXKDLAFJQJ0015. 복잡한 이름과 일련번호가 있지만 그냥 Q라고 부르자. 아닌가? 어쩌면 좋은 생각이 아닌 것도 같다. 어쩌면 이름이 녀석에게 인간다움을 부여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흉물스러운 몸체 위로 3D 프린터가 경쾌하게 움직여 만들어 낸 껍데기가 씌워졌다. 그리고 케이블이 연결되어 다운로드가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껍데기에 영혼이 들어가고 있단 뜻인데 전산에 입력되어 있는 구매자의 희망사항을 영혼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말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간이 단말기 속의 신호를 보았다. 러버 볼의 신호. 그녀가 향하는 곳. 러버가 찾아갈 곳. 나는 이미 도착점을 알고 있다. 그래도 어려운 문제다. 천천히 밖으로 나가 밴에 올라타 그녀의 집 근처로 향했다. 맞은 편 골목 앞에 밴을 세웠다. 초조하게 서성거리다보니 걸어오는 러버가 보였다. 뒤에서 러버의 목을 감쌌다. 과거 로스엔젤레스 경찰들이 ‘목조르기 기절술’이라고 부르던 방법으로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 방법은 러버들에게도 먹힌다. 기절한 Q를 밴의 뒷칸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를 비활성화시키고 주머니칼로 그의 트래킹칩을 빼내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여기까지는 아주 순조로웠다.) 그리고 나서 거울을 보며 미리 준비한 분장을 다시 한 번 점검한 다음에 밖으로 나와 차문을 단단히 잠궜다. 나중에 다시 활성화시켜서 폐기공장으로 보내려면 절대 Q를 잃어버려서는 안되었다. (이미 해고 당하고도 남을만한 일을 무수히 저질렀으니!)

 

  밤의 찬 공기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나는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마치 비밀 요원의 은밀한 작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집을 알았으므로 러버-볼의 위치를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블록을 따라 걷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 중 몇이 사람이고 몇이 러버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길가의 신문 가판대에는 빨간색 글씨로 ‘자판기에서 튀어 나온 러버들이 사람을 대신한다’는 제목의 자극적인 기사가 실려있다. 텔레비젼이나 라디오를 요즘 도배하는 이슈다. 직업 때문이 아니라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는 이야기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포치에 올라 벨을 누르기 전에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총 12가구가 사는 시내의 소형 아파트먼트. 이 중 5층이 그녀의 집이었다. 문득 실전에 투입된 러버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허리가 축축해졌다. (러버들이 땀을 많이 흘리기도 하나?) 겁이 났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미 무르기에는 너무 멀리왔다. 매주 목요일. 오후 11시. 무려 지난 12주 동안. 이번이 13주 째. 마침내 그녀의 비밀을 풀어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 목요일에도 같은 궁금증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문이 열렸다. 묻지도 않았다. 마치 올 줄 알고 있던 것처럼. (물론 올 줄 알고 있엇겠지. 내가 아니라 Q가.)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삐걱거리는 오래된 나무 계단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2층, 3층. 셔츠는 물론 드로즈까지 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갑자기 이렇게 소심해진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4층, 5층. 마침내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려있는 쪽이 나의 목적지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배달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사진으로만 봤던 얼굴이다. 가까이서는 처음 보는 앞모습이다. (뒷모습은 많이 보았다. 분홍색 헤어밴드, 포니테일, 가는 목, 약간 짧은 청 자켓, 허리께가 드러나는 티셔츠, 종아리까지 오는 블루진, 조금 가는 발목, 분홍색 런닝화 등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멀리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캐롤 킹의 ‘태피스트리’ 앨범에 수록된 노래인 것 같았다. 내가 사람인 걸 알아차렸을까? 긴장감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이윽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팔을 잡아 집 안으로 천천히 끌어 당겼는데 나는 더미 인형처럼 힘없이 딸려 들어갔다. 

 

*

 

   그녀는 블랙 커피 한 잔을 권한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마스터 베드룸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사이에 집을 둘러보았다. 특별하지는 않았다. 포틀랜드 시내에 있는 보통의 투 베드 아파트들이 다 그렇게 생겼으니까. 벽은 페인트칠을 한 노란색이었고 이케아와 피어 1으로 채워진 가구에서는 조금도 취향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 어떤 아파트에도 없을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처음엔 언뜻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낮은 조도에 눈이 적응하고 나서야 벽에 매달려 꿈틀거리는 것들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실험적인 미술가에 그림에나 나올 법한 모양으로 서로 어지럽게 엉켜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실 꿈틀거리지도 않는다. 그냥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온당한 의문 하나가 머릿속에 번개를 만들어낸다: 저들은 사람인가? 아니면 러버인가? 그녀는 매주 목요일 밤 11시에 러버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러버들은 이 집으로 왔다. 매주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리라는 법은 없다. 아니, 매주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빠르게 공간을 돌아본다. 하나, 둘, 셋… 여섯, 일곱… 열 하나, 그리고 열 둘. 모두 다 똑같이 생겼다. 모두 다 QVKXMXKDLAFJQJ0015처럼 생겼다. 그러니까 Q처럼 생겼다. 다시 말해서 모두 다 변장한 나처럼 생겼다. 지난 12주 동안 이리로 배달된 러버들이 모두 여기에 있는 듯 했다. 24시간 후에 본사로 회수되지 않은 이유는? 재활용 공정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열두개의 러버들이 트로피처럼 전시되어 있는 이유는? 역시 알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음악 소리가 커졌다가 문이 닫히며 다시 작아졌다. 캐롤 킹의 앨범이 맞았다. 문제의 그녀가 다시 방에서 나온 것이다. ‘Will You Love Me Tomorrow’ 나는 그 노래의 가사를 생각했다. 

 

Tonight you're mine, completely
You give your love so sweetly
Tonight the light of love is in your eyes
But will you love me tomorrow

Is this a lasting treasure?
Or just a moment's pleasure?
Can I believe the magic in your sighs?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그러는 사이에 정신이 희미해졌다. 캐롤 킹의 노래가 점점 더 멀리에서 들렸다. 사람 혹은 러버의 무리가 나를 빨아들인다. 그것은 마치 물과 기름과 몇 가지 폴리머로 구성된 어떤 농축액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권했던 블랙 커피!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녹아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어느 순간 옷이 사라졌고 알몸인 상태로 러버 재활용 공정의 농축액 혹은 뜨겁고 진한 커피에 뒤섞여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긴 터널이 보였다. 나는 이 만화경 속의 그림들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이야기는 결국 그녀와 열두 개의 러버를 둘러싼 비밀을 풀 수 없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단지 연인에게 상심한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었고 기이한 취향을 지닌 연쇄 살인마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파트-타임 러버’의 영업 비밀을 깨내고 싶어하는 경쟁사의 과학자일 수도 있었고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힌 욕망의 노예일 수도 있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고 그 거울 안에서 다시 나를 보았다. 환각은 러버 볼로 이어졌다. 러버 볼이 점점 커지더니 알이 부화하듯이 한쪽이 깨지면서 러버가 나왔다. 러버들이 나왔다. 줄줄이 이어나오는 광대처럼 러버들이 나왔다. 그들은 합창하듯 입을 모아서 소리쳤다. “내일이 되어도 여전히 날 사랑해줄 수 있나요?” 그 사이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매주 목요일 밤 11시에 창 밖으로 내다보던 그 뒷모습이다. 뒤이어 파트-타임 러버 포틀랜드 3호 자판기의 화려한 LED 스크롤러를 보았고 (“그 혹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땐 빛을 깜빡여 신호를 보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그림자 속에 애꾸눈 찰리가 하나의 눈으로 폐쇄회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도 보였다. 언뜻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아버지와 카우걸의 모습도 언뜻 지나간 듯 했다. 마지막으로 줄 지어 날아가는 철새의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은 짧았지만 길었고 선명했지만 흐릿했다. 모든 것의 마지막. 정신을 잃어가는 사이에서도 나는 이 다음 장면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2014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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