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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뚜루 블러드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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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루가 외국인이라고 하여 힘들 이유는 없다. 뚜루가 뚜루이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인터내셔널한 사람이다. 영국인, 호주인, 인도인, 이집트인, 그리고 방글라데시인 친구가 있다. 심지어 세 번째 여자 친구는 교환학생 신분의 프랑스 여자애였다. 그 아이와는 김건모의 노래 ‘잘못된 만남‘처럼 깨졌다. 나의 영국인 친구를 (앞서 언급했다시피 나는 아주 인터내셔널한 사람이다) 소개시켜 주었다가 그만 눈이 맞고 만 것이다. 어려서 읽은 이원복 교수의 만화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앙숙이라고 했는데. 그 아이들은 실제의 장미전쟁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장미전쟁을, 나만 모르는 사이에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극적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신촌 복판의 노래방에 혼자 들어가 벽에 머리를 박아가며 김건모의 전설적인 히트곡을 완창했다. 1절은 한국말로 부르고 2절은 영어와 불어를 섞어 불렀다. 그 정도로 나는 인터내셔널한 사람이다. 국제화시대에 걸맞는 참 인재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기업의 인사담당자들 밖에 없는 것 같다.


  뚜루를 처음 만나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로튼 토마토’의 선임 개발자로 새로운 파트너가 될 신입 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이전 파트너는 무려 54년을 여기서 일하고 방금 막 정년 퇴임한 파파 할배였다. 누구도 나의 새로운 파트너가 외국인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었다.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로다.) 뚜루가 바로 나의 새 파트너였다. 사실 나의 남은 계약 기간이 3개월이므로 ‘새 파트너’라는 표현이 조금 멋쩍기는 하다. 그냥 임시 파트너 정도라고만 해두자.


  뚜루는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녀가 외국인이라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비록 그런 이유만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뚜루는 말 그대로 호랑이상을 가진 여자였다. 전화를 받고 1층 현관으로 내려가다 처음 그녀와 마주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간 압도당하는 기분 때문이었다. 그녀도 본능적으로 그걸 알았던지 싶다. 자신의 맹수성을 희석시키려는 듯 그녀는 입꼬리를 크게 올려 웃어 보였으니. ‘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는 듯한 그 미소가 실은 더 소름 끼쳤다. 누구도 첫 만남에서 그런 식으로 웃지 않는다. 소름이 돋았다. 그 껍질 같은 웃음에서는 단 1 그램의 진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아가 만만치 않은 공력마저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보았다. 니가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필요에 의해 너와의 관계를 잘 다져놓을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네놈이 내 선임이고 나는 너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셜록 홈즈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뚜루는 나보다 네 살이 많았다. V국의 뚜루족 출신으로 한국에 온지는 5년이 되었다고 들었다. 뚜루족인데 이름이 뚜루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도 대한이, 한국이, 민국이가 있다. 한민족에도 한민이가 있다. 그러니 뚜루족의 뚜루라고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녀의 지난 5년 한국생활이 어떤 식으로 흘러왔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보면 성공적으로 적응해왔거나 그럴 의지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때까지도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고 한국 친구도 없다고 했다. 오직 V국 유학생 커뮤니티 안에서만 친구를 사귀어 왔다는 것 같았다. '코리안 타운'으로 어학연수를 떠나 있는 몇몇 친구들의 찬란한 회화 실력을 떠올리며 거기까지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더는 캐묻지 않았다. 


  나는 3개월 후에 퇴사할 예정이다. 이유는? 윗 선과 트러블이다. 나의 전 파트너 파파 할배는 퇴직하실 때가 되어 명예롭게 물러나셨지만 나는 퇴직하려면 35년이 남아 명예를 챙기며 퇴직할 수는 없었다. 배우 스콧 바큘라를 닮은 그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그쯤 해두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다 끝났으니 더 캐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로튼 토마토’ 연구소 내의 어두운 비밀을 캐고 다니다 파국을 맞았다. 사측에서는 말했다. 댁들은 개발자지 케토톱이 아닌데 왜 캐내고 다니고 지랄이시냐고. 틀린 말은 아닌데… 이 썩은 토마토만도 못한 회사. 이제와 푸념하면 어쩌겠는가. 3개월 남았다. 고로 뚜루와 나의 파트너쉽은 3개월 짜리다. 그녀는 일단 내게 인수인계를 받은 뒤, 3개월 후에 들어오는 새로운 직원과 (물론 그때까지 사람이 뽑힌다는 가정 하에) 짝을 이루어 본격적으로 일하게 될 예정이다. 그렇게 나와 할배가 벌였던 한 시대의 '버디 캅 필름'은 장엄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나로서는 나를 대체하게 될 인력이 빨리 뽑히길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이미 할배의 퇴직은 예정되어 있었고 내가 퇴사 의사를 밝힌 것도 1년쯤 되었는데 이제 겨우 대체 인력이 한 명이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한국인을 구하지 못해 기본적인 의사 소통도 되지 않는 외국인을. 윗 분들의 빛나는 센스에 아주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이 인터내셔널한 인수인계가 잡음 없이 원만하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아주 낙천적인 사람이거나 인수인계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당연히) V국말을 하지 못한다. 뚜루는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 그나마 영어가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나의 영어 구사가 아주 뛰어나지 않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 이전에 앞으로 뚜루가 맡을 일의 태반이 한국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불행항 사태의 책임을 내게 물을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재주껏 영어로 설명을 해주고 모든 관련 문서를 영어로 옮겨 적어 넘겨준다고 치더라도, 어차피 뚜루가 이 연구소 조직에서 일을 하려면 한국어로 말하고 한글로 문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뚜루는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고 읽고 쓰기는 전혀 불가능했다. 뚜루를 채용한 장본인이었던 윗 분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하기야 놀랄 일도 아니다. 사장만 하더라도 ‘로튼 토마토’라는 회사명이 토마토 소스를 팔아먹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위인이다. 그는 아직도 '로튼'이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 이름이라고 알고 있다. 그 남자의 지리학적, 언어학적, 그리고 경영학적 감각은 딱 그런 수준이다. 설마 뚜루가 한국말을 못하는 줄 모르고 뽑지야 않았겠지. 최종 면접은 자기가 보았을 텐데. 그럼 트집을 잡지나 말던지. 사장은 뚜루가 한글과 컴퓨터의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을 다루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스 개발자라고 그 프로그램 다룰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짜증을 내셨다. 
- 아래아 한글도 쓸 줄 모른다고? 그러면서 여길 지원했다고?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지원한 사람이 문제냐 뽑은 사람이 문제냐.) 한편으로는 뚜루가 안쓰럽기도 했다. 외국인인 뚜루가 '아래아 한글' 같은 특수한 국내 전용 프로그램에 익숙하길 바라는 것도 웃긴 일이거니와, 까놓고 말해 그 망할 프로그램은 근본적으로 하자가 있어 네이티브 코리안들인 우리조차 제대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외국인을 뽑아놓고 도대체 뭘 바란거야? 그럼에도 사장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고심 끝에 특단의 조치를 내렸는데 뚜루의 컴퓨터에 ‘한메타자’를 깔아주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이 남자가 혹시 저능아가 아닐까 의심했다. 그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타자 연습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로튼 토마토’에서 내가, 그리고 바큘라 할배와 함께 했던 일은 토마토 소스 개발이다. 여러분 중 누군가는 웃음을 터뜨릴지 모른다. 토마토 소스 개발자라고? 하지만 정말이다. 우리는 토마토 소스를 개발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토마토 소스 개발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듣자 하니 심지어 ‘닭강정 개발자’도 있다던데 토마토 소스 개발자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짜 임무는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낮에는 토마토 소스를 개발하지만 밤에는 뱀파이어 헌터다. 일종의 언더 커버, 그러니까 잠복 근무다. 우리는 ‘로튼 토마토’가 일종의 뱀파이어들이 신분을 숨기고 취업하는 곳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었다. 왜 하필 토마토 소스냐면… 뭐, 그렇고 그렇지 않은가. 놈들 입장에서는 식사하다가 옷에 흘려도 그대로 아침에 자연스럽게 출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맞받아 줄 생각으로 여기에 취직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놈들의 심장에 말뚝을 때려 박다가도 아침에 그 옷 그대로 자연스럽게 출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여러분 중에 뱀파이어에 대해 잘 아시거나 본인이 뱀파이어이신 분들이 있다면 (후자에 해당하시는 분들은 조금만 기다리시라. 우리가 곧 찾아갈테니.) 이 대목에서 의문을 제기하실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뱀파이어가 어떻게 아침에 출근을 하여 일을 한다는 거죠? 놈들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돌아다닐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팀으로 움직인다. 뱀파이어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시는 여러분들이니 아마 휴먼 서번트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파밀리어라고도 한다. 일종의 집사처럼 뱀파이어를 돌보는 인간들이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R. M. 렌필드(R. M. Renfield)를 기억하는가? 바로 그 남자가 서번트이고 파밀리어이다. 이들은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마스터인 뱀파이어에게 필요한 일을 낮시간에 수행한다. 물론 신선한 피를 구해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고 저택을 관리하는 것도 이들의 책임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생계 유지를 위해 돈을 벌어오는 것까지. 이들은 섬김의 댓가로 뱀파이어들에게 일정한 능력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로튼 토마토’에 적지 않은 수의 서번트들이 주간조로 들어와 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마스터, 그러니까 뱀파이어들마저 또한 야간조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이 ‘크리쳐 오브 더 나잇’들은 밤에 사냥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서번트 하나를 잡아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대꾸하더라. 외벌이로 입에 풀칠이나 하겠네요. 맞벌이를 안하고 혼자 벌어서는 버티기 힘들다고. 확실히 대한민국이 만만치 않은 나라인 것은 확실하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둘씩 '불멸의 존재'들에 잠식된 야간조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한 놈이 들어오고 다른 한 놈이 들어오고… 아마 그렇게 서서히 바꿔치기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케토톱도 아니면서 캐고 다닌 것은 바로 이 비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주간조로 일하며 뱀파이어의 서번트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조사하였다. 일단 증거가 확실해지면 야간조에 있을 그의 마스터와의 연결 고리를 찾았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면 놈들을 덮쳤다. 낮 동안에 먼저 서번트를 잡아 꽁꽁 묶어 고문하고 밤이 내리면 뱀파이어를 찾아가 심장에 말뚝을 박았다. 

 

  ‘로튼 토마토’의 사장은 저능아이기는 하지만 이 어두운 비밀에 연관된 인물은 아니었다. 그냥 직원들의 고혈을 짜내는 놈이지 흡혈과는 무관하다 (그런 배짱조차 없는 놈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토마토 소스 공장을 가졌을 뿐이다. 이 비즈니스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열정 또한 없기는 하다. 자기 공장이 뱀파이어와 그 졸개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일 거라고는 꿈에서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사장을 몹시 미워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 그 남자를 탓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자기 회사가 뱀파이어들의 취업 선호도 1위를 차지할 거라고는, 글쎄… 어지간한 상상력으로는 예상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장 놈은 그들이 '불멸의 존재'임을 알았으면 채용을 꺼렸을 위인이기도 하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떨어뜨린다고.) 아무튼 사장이 까맣게 모르고 있는 동안 서번트들이 주간조를, 그들의 마스터들이 야간조를 각각 잠식했다. 그리고 나와 바큘라 할배 같은 뱀파이어 헌터들이 숨어 들어왔다. 웃지 못할 코미디다.  


*


  근무 첫 날. 뚜루는 내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첫째는 집을 구하는 걸 도와 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차를 구하는 걸 도와 달라는 것이었고, 셋째는 휴대전화를 바꾸는 걸 도와 달라는 것이었고, 넷째는 연말정산을 도와 달라는 것이었고, 다섯 째는 비자 연장을 도와 달라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먹을만한 걸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장은 사람을 뽑아놓기만 했을 뿐이지, 뽑아놓은 사람을 어떻게 이 회사에 연착륙시킬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구소 내 다른 직원들의 도움과 관심 또한 전혀 기대할 수 없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사내 조직 분위기 자체가 원래 그랬다. ("나는 내 인생 살테니 너는 니 인생 사세요.") 두 번째로는 노조의 문제인데 나와 바큘라 할배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짜 소스 개발자가 아니라 잠복 중인 뱀파이어 헌터인데 어떻게 가입을 하겠는가? 들어가도 난감하고 들어가지 않아도 난감한 그런 상황이었다. ("노조에 들어올 것이 아니면 니들이 알아서 하세요.") 세 번째로는 다른 직원들 중에 누가 뱀파이어들의 서번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와 바큘라 할배가 정말 많이 잡아내었지만 더 있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러니 아무나 잡고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뚜루가 그걸 알리 없었다. 뚜루에게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을 이해시킬 방법도 없었다. 그녀는 ‘로튼 토마토’에서 일하길 원했고 (아니, 도대체 왜?) 타국 생활에 필요한 각종 크고 작은 지원을 누군가 해주기를 바랐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3개월 후면 퇴사하게 될 내가 말이다. 


  다만 상당히 직선적인 성격의 그녀는 요구 조건도 많았고 기준도 까다로웠다. 그녀는 원활한 비자 연장과 원활한 연말정산을 원했다. 또한 그녀는 할부원금 10 만원 미만의 34 요금제로 계약 가능한 (시중에 막 풀리기 시작한 최신 기종의) 하이엔드 휴대전화를 원했고, 500 만원 이하의 견적을 받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중고는 아닌) SUV 차량을 원했으며, 보증금 100 만원 이하에 월세 25 만원 이하의 (그러면서도 고시원은 아닌) 원룸을 원했다. 뭐랄까, 그녀에게는 현실 감각이 없었다. 대신 고집이 있었다. 고집이 정말 세었다. 수많은 '미션 임파서블'이 내 눈 앞에 사열종대로 헤쳐 모인 기분이었다.


  뚜루는 원하는 것들은 대개는 몹시 품이 들어가는 요구였다. 그걸 다 들어주기에 나는 너무도 바쁘고 예민하고 또 어엿한 인격체이기도 했다. 뚜루는 음식에 대해서도 까다로웠다. 한국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난리를 쳤다. 나는 V국의 음식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어디에서 절충안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직선적이고 뻔뻔한데다가 피해망상적이고 통제광적인 성격에는 진절머리가 났으나 그렇다고 그냥 굶길 수도 없고...  또한 그녀는 한국말로 지껄이는 전화가 걸려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자리로 와서 내 귀에 자기 전화기를 갖다 대었다. 어쩌라고? 의사소통 가능한 네가 상대하란 뜻이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도 간다. 말이 전혀 안 통하니 힘들기도 하겠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기도 했다.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누가 묻지도 않고 갑자기 뜨뜻한 전화기를 뺨에다 찰싹 갖다 댄다고 상상해보라. 누가 무슨 용무로 전화를 했고 말를 떠나서 짜증이 확 솟구치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예수와 석가와 알라를 삼단 퓨전한 성인 중의 성인이라 할지라도 그걸 매번 너그러이 넘길 재간은 없을 것이다. 급기야 이쯤되니 뚜루를 다루는 것이 어려운지 뚜루에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지 나도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보증금 100만원 이하에 월세 25만원 이하의 고시원 아닌 원룸을 (서울 안에서 이 정도 조건의 원룸이라면 그야말로 공상과학이 아닌가!) 얻어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지하방은 안돼, 습해!


  할부원금 10만원 이하의 34요금제로 계약 가능한 최신 휴대전화를 (스마트폰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했다) 얻어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2G폰은 안돼, 느려!


  500만원 이하로 견적을 받을 수 있는 괜찮은 경차를 (SUV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했다) 얻어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경차는 안돼, 약해!


  뚜루는 내가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서 자기 멋대로 알아보기도 했다. 급한 욕심에 나를 패싱하고 저 혼자 엉뚱한 계약부터 해놓았다가 마음이 변해 물러 놓기도 일쑤였다. 그 결과 벌어지는 분쟁은 (한국 사람인 죄로) 내가 다 뒤집어 썼다. 공인중개사에게, 휴대폰팔이에게, 중고차 딜러에게 멱살을 잡힌 것이 몇 번이었는지 몰랐다. 그런데도 뚜루는 나를 원망했다. 


- 난 잘 몰라요. 한국 사람 아니에요. 니가 안 해줬어. 설명을. 제대로.


  지하방이 습하면 처음부터 계약을 하지 말던가. 2G폰이 느리면 처음부터 도장을 찍지 말던가. 경차가 약하면 처음부터 타고 다니지나 말던가. 그러는 사이에 나는 원하지 않게 싸움닭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뚜루가 벌인 일을 수습하느라 공인중개사와, 휴대폰 팔이와, 중고차 딜러와 싸우고 또 싸웠다. 싸우고 들어와 뚜루에게 닦달을 당했다. 나이 많고 호랑이상인 그녀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꼭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끼인 군번 말년 병장의 심정이 이럴까? 하루가 다르게 지쳐갔고 또 미쳐갔다. 바큘라 할배가 보고 싶었다. 밤새 같이 신나게 말뚝 박던 시절!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뚜루 때문에 소스를 개발할 여력도 없었다. 뚜루 때문에 뱀파이어를 잡을 여력도 없었다. 인수와 인계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장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뚜루에게 빨리 '한메타자'를 가르치라는 초현실적 지랄을 멈추지 않았다. 아! 불운의 저격이 누구에게나 공평한지는 모르겠으나 모두가 방탄 조끼를 두르고 있는 건 아니로구나!

 

*

 

  세번째 여자친구. 프랑스 소녀. 나는 가끔 그 애를 떠올리고는 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 애 앞으로 두 명, 그 애 뒤로 또 두 명의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그 애만큼 특별하게 기억되는 아이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뚜루가 내 인생에 갑자기 등장한 이후로 더욱 더 그 애가 기억났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에도 영어 의사소통을 요구하는 특수한 상황이 나의 마음 속에 그런 기작을 일으켰다. 지금이야 인터내셔널한 천하의 융합형이자 통섭형 인재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영어가 많이 서툴렀다. 가장 기본적인 감정 표현조차 어려움을 느꼈다. 이런 저런 오해도 많았다. 그럼에도 손짓 몸짓의 비언어적 몸부림만으로 연애 전선의 먹구름을 거둬내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다. 프랑스에서 온 사랑스러운 금발 소녀. 그 애의 얼굴은 창백하다시피 하얗고 놀라울 만큼 작아, 프랑스 영화 속에서 방금 막 튀어나온 것 같은 따끈따끈한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고는 했다. 그 애는 '예비 치위생사'라고 할만한 과정을 밟는 중에 있었고 (선진 프랑스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치위생사가 되고, 무슨 연유로 이 동방의 작은 후진 나라에 교환 학생으로 방문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했던 것인지 잘은 모르겠다) 덕분에 나는 가끔은 치위생 전문 교육을 받아보는 호사도 누렸고, 가끔은 몸소 교보재가 되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기도 했다. 대개 장소는 자취방이었다. 그 애는 내게 올바른 칫솔질을 가르쳐주었다. 대신 이를 닦아주기도 했다. 치아 X-레이용 필름을 해당 치아에 가져다 대는 실습도 했다. 그 애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26번 치아와 27번 치아의 은밀한 뒷면을 쓰다듬을 때는 못생긴 내 대구치가 창피할만큼 미안했다. 그 애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 넌 가졌어. 긴 송곳니를. 그게 무섭게 해. 나를. 

 

  그리고는 깃털처럼 꺄르르 웃었다. 그럴 때면 축축하고 끈적한 나의 구강 환경이 너무도 쑥스러워 그 애의 가늘고 연약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입 안에 들어와 있는 무엇에게 어떻게 입을 맞출 방법은 없다는 물리적 딜레마를 뼈져리게 깨달아 아쉬움만 삼킨 채 돌아서고는 했다. 아, 보고 싶다. 지금은 지구 반대편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허우대만 멀건했던 그 영국 놈이랑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치위생사가 되기는 되었겠지? 그렇다면 아마도 지금은…… 수많은 프랑스 남자들의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있겠지?

 

*

 

  뚜루 때문에 나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대체 인력이라고 뽑아온 사람이 무슨 나를 종놈처럼 부리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어느날 바큘라 할배의 전화가 왔다.
- 어이! 키도, 잘 지내나?
- 별로요. 할배는요.
- 은퇴하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사장 놈을 더 볼 필요는 없지.
- 솔깃한데요.
- 그건 그렇고 지금 내가 보내는 메일의 링크를 한 번 열어봐.
- 뭔데요?
- 광고. 
- 광고요?
- 일단 보고 이야기하지. 

블러디 셋 모델 김남주에요. 저의 블러디 셋 광고를 보시고 여러분께서 절대 하시면 안되는 일은,
- 저도 김남주가 먹는 블러디 셋 주세요.
- 김남주가 먹는 블러디 셋 주세요.
- 블러디 셋 주세요.
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몸이 다르면 필요한 블러디 셋도 다르니까요. 내 몸에서 시작하는 영양설계. 그러니까, 
블러디 셋.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블러디 셋? 등짝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 이건…
- 대단하지? 놈들의 세력이 점점 더 커져서 이제 TV 광고까지 하고 있어. 
- 어쩌죠?
- 일단 몸 조심해. 첫째도 둘째도 몸 조심이야. 나도 몇 가지 알아보고 있는 것들이 있어. 놈들을 막을 방법을. 

- 은퇴하셨잖아요?

- 이제 소스 개발자가 아닌 거지. 하지만 놈들과의 싸움은... 글쎄, 과연 끝이 있는 걸까?

- 있었으면 좋겠네요.

- 조만간 곧 다시 연락하지.


  바큘라 할배의 이야기처럼 놈들의 세력은 커지고 있었다. ‘로튼 토마토’만 하더라도 그랬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있던 직원이 사라지고 없던 직원이 새로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어째서 이렇게 인력 순환이 급격하게 빨라진 걸까? 이젠 주간조의 몇 명이 서번트인지 야간조의 몇 명이 뱀파이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려움은 점점 심해졌다. 회사 곳곳에 쌓여있는 새빨간 토마토 소스병이 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흘려진 토마토 소스 방울만 보아도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직원들 입가에 묻은 진한 토마토 소스… 뱀파이어 헌터가 뱀파이어를 두려워해서야 쓰나? 마늘과 은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녔지만 (“어머, 개발자님. 오늘 무슨 향수 뿌리셨어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할배는 은퇴했고 나 혼자서는 저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 파트너는 뚜루인데 그녀는 정말 소스 개발자로 회사에 들어온 사람이다. 뱀파이어 헌터가 아니라. 아쉬운대로 뚜루라도 써먹어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뚜루를 데리고 저들을 막을 수 있을까? 

 

  고민에 빠져 있는데 사장이 지나가다 내 자리에 들렀다.
- 그나저나, 뚜루한테 '한메타자'는 가르쳤나?

 

  이런 미친 놈.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는데 눈치도 없이 기어코 한 마디 더 붙인다.
- 다음 달까지 한메타자 5천점을 못 받으면 아무래도 잘라야겠어.

 

*

 

  잠시 우리 회사 야간조 직원 일부, 그러니까 뱀파이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여기서 일하면서 알아낸 몇 가지 사실들. 


  첫째, 햇볕을 두려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햇빛이 닿으면 살이 타들어간다. 맨 눈으로 태양을 바로 쳐다보면 눈이 먼다. 그런데 그건 우리 보통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맨 눈으로 태양을 바로 보지는 마시라. 
  둘째, 박쥐로 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야간조를 급습했을 때 변신해서 날아 도망가는 걸 보았다. 

  셋째,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다. 그런데 그냥 그 정도다.
  넷째, 마늘을 아주 무서워하기는 한다. 다만 약간 개인차가 있다. 그 냄새를 싫어할 뿐이다. 그건 많은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다섯째, 은총알을 맞으면 죽기는 죽는다. 다만 어디에 맞느냐가 중요한데, 머리나 목이나 가슴에 맞는 것은 치명적이지만 신체 다른 부위의 주요 혈관과 주요 장기를 비껴 나가면 살 수도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건…… 우리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여섯째, 흡혈시 혈액형을 가려서 마시지는 않는다는 통념은 사실이다. 옛날에 쓸떼없이 진지한 사람들이 뱀파이어도 여러 혈액형을 섞어 마시면 급성 용혈성 부작용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했던 걸 생각하면 웃음만 난다. 


  *

 

  옛말에 제대를 앞두고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고 했다. 나도 그랬다. 퇴사까지 고작 3개월이 남지 않았고 뚜루의 뒤치닥거리에 진이 완전히 빠졌기 때문에 나는 뱀파이어 사냥을 잠시 멈추고 있었다. 나 혼자 휴전을 선언한 셈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혼자서는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뚜루를 데리고 사냥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니, 그랬더니 이 망할 놈들이 선제공격을 했다. 어느 날 주간조 직원들 열세 명이 톤파를 들고 우리 사무실을 급습했다. 그러니까 저들이 바로 뱀파이어의 서번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내 수첩에 요주의 인물로 올라가 있던 놈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놈들도 있었다. 정말 무섭게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뱀파이어를 사냥할 때 쓰는 도구들은 서번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총을 손에 닿는 위치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 바큘라 할배가 있었다면 크게 혼줄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뚜루가 놈들을 덮쳤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크고 우람한 토마토 혼합기 위에 서있다. 끈적끈적하게 갈려진 토마토 페이스트를 입가에 묻히고 웃고 있다. 송곳니가 '팽'하고 빛났다. 그것은 길고 뾰족하게 자라나 가파른 말단부로 토마토의 연약한 껍질을 찔렀다. 톡 하고 탄력있게 파고들었다. 과즙이 스며나왔다. 입가를 적시고 턱을 타고 내려와 생생하게 허공으로 자유 낙하했다. 꿈인가?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아! 바닥에는 직원들이 나뭇가지처럼 널부러져 있다. 바닥은 혓바닥처럼 축축하고 끈적하다. 뚜루의 입가에 맺힌 건은 토마토 페이스트가 아니었다. 피였다. 뚜루의 송곳니가 찔러 들어간 것은 잘 익은 토마토의 껍질이 아니었다. 주간조 직원들의 목덜미였다. 


  불길하게 형광등이 깜빡거린다. 첫 번째 남자가 쉽게 생각하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그림처럼 몸을 틀어 놈의 목을 물었다. B급 영화처럼 과장된 형태로 피가 튀었다.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하얀 와이셔츠를 흥건히 적셨고 뚜루의 하얀 블라우스도 흥건히 적셨다.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다. 뭐야? 왜 목을 물어? 그런 표정이었다. 두 번째 남자도 뚜루에게 목을 물렸다. 피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바닥은 이미 충분히 미끄럽고 또 매우 끈적거렸다. 뚜루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들이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저렇게 섞어 마시면 취하지 않나? 세 번째 남자도 덤벼들었다. 앞의 두 남자가 낡은 빗자루보다 더 볼품없게 말라 비틀어지는 걸 보았는데 무슨 용기와 배짱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결과는 지루할정도로 뻔했다. 뚜루의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서울 안에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5만원 이하의 고시원 아닌 원룸을 찾은 느낌이었다. 네 번째 남자도, 다섯 번째 남자도, 여섯 번째 남자도, 일곱 번째 남자도 뚜루에게 덤벼들었다. 레밍즈처럼. 나는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급성 용혈성… 그거 아니라니깐. 저렇게 A형도 훌훌 마시고, B형도 훌훌 마시고, AB형도 훌훌 마시고, 그리고 O형도 훌훌 마시는데. 누군가 스프링클러를 작동시켰다. 토마토 소스가 쏟아졌다. 마시지 말지어다. 저건 썩은 토마토들일 뿐일지니!


  마침내 뚜루는 열세 명의 주간조 직원들을 통째로 해치웠다. 그들은 거의 껍질만 남았다. 말 그대로 영혼까지 죄다 빨아들인 것 같았다. 뚜루가 뱀파이어인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짧은 시간 동안에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분명 그녀는 아침에 출근해서 낮동안에도 돌아다녔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항상 은십자가 목걸이를 매고 다니는데... 그래서 그렇게 나를 싫어하고 짜증을 내었나? 그건 그렇고... 나도 명색이 경력 10년이 넘는 뱀파이어 헌터인데 바로 옆에 뱀파이어를 두고 몰랐다면 망신 중의 개망신이 아닌가? 만약 뚜루가 뱀파이어라고 한다면 다른 뱀파이어의 서번트와 파밀리어들의 피를 빨아 먹어도 되는 건가? 그러니까 뱀파이어들끼리 서로 지켜야 할 상도덕이랄까 그라운드 룰 같은 것이 없는 걸까? 만약 뚜루가 뱀파이어라고 한다면 그녀에게도 서번트나 파밀리어가 있는가? 있다면 누군가? 그러니까 대신 집을 구해주고, 차를 구해주고, 휴대폰을 구해주고, 비자에 연말정산에… 아… 그렇구나... 

 

  뚜루는 내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뚜루의 본능은 이미 '팽'하고 역치값을 넘어섰다. 진작에 눈이 뒤집힌 것을 보아하니 같은 팀이라고 봐주지 않을 기세였다. 따끔할 거예요, 따끔. 어릴 때 병원에 가면 간호사 누나들이 항상 그렇게 말했었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얼마 안 있어 나갈 사람인데 이렇게 꼬인 군번이 또 있을 수 있나 싶었다.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인수인계가 또 있을까 싶어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룹 'U2'의 노래가 귓전을 맴돌기도 했다. 1983년의 히트곡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Sunday Bloody Sunday)' 말이다.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 시원하고 나른한 느낌 속에서 간호사 누나의 이미지가 서서히 떠올라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먼저 얼굴이 조막만해졌고, 그 담엔 콧날이 오똑해졌고, 그 담엔 입술이 그 담엔 탐스러운 금발이 치렁거렸고, 그 담엔 뼈 밖에 없다시피 깡마른 팔과 다리……. 맞아. 그 아이. 나의 세 번째이자 가장 특별했던 여자친구. 프랑스 여자 아이. 그 애가 속삭였다. 내 귀에 대고. "넌 가졌어. 긴 송곳니를. 그게 무섭게 해. 나를." (그런 말을 그 애가 정말 했을까?) 그러고 보면 요즘 유달리 그 애의 기억에 젖게 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런 나른한 쾌감이 긴장을 풀어 나의 가장 연약한 기억을 함께 불러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맞다. 아마 맞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결국, 그동안에 나도 종종 뚜루에게 강제 헌혈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쁜 년. 집도 알아봐 줘, 차도 알아봐줘, 휴대폰도 알아봐줘, 비자 연장해줘, 연말정산 도와줘, 세상에 나 같은 선임이 어디 있다고 피까지 쪽쪽 빨아 드셔. 아무리 '한국 방문의 해'가 국가적 과업이라지만 진짜 너무하잖아.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나를 욕했지. 불쌍한 외국사람 잘 케어해주지 않는다고. 지들이 대신해줄 것도 아니었으면서.

 

  사장이 들어왔다. 갑자기.
- 뚜루. 한메타자 5천점 받았어?

 

  평소 공장 안으로는 들어오는 꼴을 못봤는데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평생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황천길 특급열차 편도 예매로군.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쌤통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어, 쉭쉭. 뚜루, 물어!

 

  그러나 뚜루는 뒤집었던 눈을 다시 살포시 내리고 입가에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거듭 말하지만 그녀의 맹수성은 웃는다고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사장을 향해 달려갔다. 이런 애교 섞인 코맹맹이 소리와 함께.
- 사장니임!
  뚜루는 사장의 손을 붙잡고 몸을 배배 꼬았다.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처럼.
- 뚜루 넘었어요. 오천점. 잘해요. 할매타자.

 

  뚜루에게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들이 있다. 혹시 한국말을 잘하는 것은 아닐까? 일부러 못하는 척 숨기면서 간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에게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말도 어쩌면 거짓이 아닐까? 

 

(2013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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