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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캐치-44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3.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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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벌써 열두 번째 시험이다.

  칼 A. 채플린 (Carl A. Chaplin) 중위은 그 시험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중위는 열두 번이나 같은 문제로 시험을 보아왔다. 문제는 잘 바뀌지 않았다. 그 사이 출제 장교는 열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시험 문제만큼은 항상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중위는 열두 번째 똑같은 문제를 만난 열두 번째 시험에도 가뿐하게 합격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열한 번째 시험 때도 그랬고 열 번째 시험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중위에게는 심각한 암기력 문제가 있었다. 남달리 심약한 그는, '압박을 받으며 뭔가를 머릿 속에 입력하고 더 큰 압박을 받으며 다시 고스란히 출력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물론 글쓰는 속도가 느렸던 탓에 남들이 두세 문장을 쓰는 사이 그는 채 한 문장도 다 적지 못하기 일쑤라는 점도 문제긴 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그의 성적이 ‘별 볼 일 없다’ 외에 다른 표현을 쓰기 어려울 수준이었던 것 역시 그런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었을테다.

  굳이 두 번째 이유를 찾자면 문제의 시험을 대하는 그의 심리 상태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시험을 퍽, 무척, 대단히, 끔찍히 싫어했다. 내용상 그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배치되어 거슬리는 부분도 있었다. 어쩌면 그런 반감이 알게 모르게 무의식 중에 기억력에 영향을 미쳐 낙제의 영광으로 그를 이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시험은 에이레네섬에 주둔 중인 치카디 공수부대의 낙하산 대원들이 비행 및 낙하의 자격을 얻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일종의 안전 교육이었다. 채플린 중위는 낙하산 부대원이 아니었고 그런 비슷한 훈련조차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군종신부였다. 향후 만약에라도 공수부대원으로 활동할 예정이 없는 자는 시험장에 그 하나 밖에 없었다. 군종신부가 왜 비행 및 낙하 안전 필기 시험을 보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법도 했지만 실상 의문을 갖는 이도 없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공수부대원들이 채플린 중위가 자기들과 같은 낙하산 대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정말 그런 걸까? 혹시 내가 군종 신부로 가장한 공수부대원은 아닐까?’ 

  심약한 중위는 심각하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결론은 ‘그럴리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군종 신부일 뿐만이 아니라 심각한 고소공포증 환자로, 육군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 멀고 먼 에이레네 섬의 채플린 부대로 쫓겨오게 된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의 서류를 다루었던 행정관들이나 그의 서류에 서명했던 높으신 분들이 치카디 부대가 공군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긴 했는지도 의문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육군에서 쫓겨난 남자를 공군으로 보내버리다니! 우연이라기에는 무례하고 장난이라기엔 고약한 일 아닌가.

  중위는 군종신부로 에이레네 섬에 왔지만 그가 첫 일 년 동안 한 일은 두 가지 뿐이었다. 안전 교육을 받고 필기 시험에 떨어진 다음 재교육을 받고 다시 시험을 치는 것. 물론 그는 재시험에도 떨어졌다. 필기 시험에 두 번 떨어지면 공수부대원으로 비행하거나 낙하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그는 용케 낙하산 임무를 면피하고 고소공포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중위에게는 군종신부로의 보직이 엄연히 있었지만 누구도 그걸 기억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 매년 부대에서는 군종장교 모집 공고를 만들어 본국으로 전송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시간이 갈수록 채플린 중위는 군종 신부인 자신이 공수부대원으로 간주되고 있는 이 사태가 행정적 착오에 기인한 것이란 생각에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가장 큰 증거는 계급장이었다. 자신이 정말 신참 낙하산 부대원이라면 무슨 수로 부임 직후 다자고짜 ‘중위’로 복무할 수 있겠는가? 그건 누가 봐도 충분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치카디 부대의 어떤 남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중위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중위의 의도와는 다르게, 많은 공수부대원들은 군 경력도 일천해보이는 신참 낙하산 부대원이 중위 계급장을 달고 들어왔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채플린 중위가 높은 곳에 끈을 가진 남자로 일종의 '낙하산'으로 군에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했다. '낙하산'으로 들어왔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뿐, 낙하산 부대원으로 훈련 받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중위를 향한 뜨거운 불만의 중심에는 제시 W. 서전트 (Jessie W, Sergent) 하사가 있었다. 하사는 치카디 부대에서만 자그마치 7년 넘게 복무한 박힌 돌 중의 박힌 돌로, 갓 굴러들어온 돌이 자신보다 높은 계급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채플린 중위를 상대로 시비를 걸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반말을 찍찍하는 고참 하사 앞에서 신참 중위는 상당한 난이도의 인내심 테스트를 받아야만 했다. 사실 중위로서는 그런 하사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이유인 즉 군종장교는 보통 처음부터 중위 혹은 대위의 계급으로 시작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럴때면 중위는 신학교 신부님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고는 했다. 
- 그 자는 자네가 중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아닙니다. 신부님. 그 자도 제가 중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그럼 군종 장교라고 깔보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 사제들은 일반 병사나 장교들과 조금은 다른 체계에 위치한 존재 아닌가? 액면 그대로 하사가 중위를 대하는 태도를 기대하기는 힘들걸세. 원래 그 바닥이 그렇다네. 신경 쓰지 마시게나.
- 아닙니다. 신부님. 그 자는 제가 군종 신부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 자네가 신부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동일 병과, 동일 직렬의 상하관계라고 생각하면서 하사가 중위에게 찐짜붙는단 말인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신학교 신부님이 그런 표현을 썼다. 찐짜.
- 그래서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부님.

  항상 이 대목에 이르면 중위는 자신의 처지가 밖에서 맞고 들어와 부모에게 일러바치는 어린 아이처럼 느껴져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사를 상대하면 상대할 수록 유치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군대식 계급 따위의 위계 시스템을 혐오하곤 하였는데 지금은 그 시스템을 방어막으로 삼아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다니 말이다.

  사실 중위에게는 서젼트 하사의 공세에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정말로 어느날 고공 낙하를 지시 받기 전에 행정 착오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자신의 직속 상관 혹은 높은 위치의 책임자들과의 면담을 요청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비행 및 낙하 안전 시험 따위는 재쳐두고 말이다. 떨어지면 뭐 어떤가? 덩분간 비행 및 낙하를 하지 못하게 되면 다행 아닌가. 

  문제는 그런 중위의 태도가 '낙하산'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고 하사의 분노가 극에 달하도록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었다. 모욕감에 얼굴이 벌개진 하사는 "햇병아리 중위가 신성한 군인의 임무와 역사와 전통의 치카디 부대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 에이, 설마 무슨 사정이 있지 않겠어?
라고 주위에서 이야기할 때마다 하사는 더욱 더 목소리를 높여 철없는 상관을 비난했다.
- 여기 사정 없는 놈이 어디 있는가? 게다가 명색이 군인이라는 놈이 하기 싫다고 안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부터 썩어빠진 정신 상태를 방증하는 것은 아닌가? 저런 빈틈이야말로 히틀러 나치와 공산당들이 파고들기 딱 좋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라는 식의 레파토리로 말이다. 하사는 중위를 증오하고 또 경멸했다.

 

*

 

  하사가 제대로 눈치챈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중위가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을 통과하려는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중위의 입장에서는 그 의도적인 낙제가 생존을 위한 발악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열망을 가진 자가 중위만은 아니었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 처음에는 이념이나 가치가 본능을 압도했다. 허나 어떤 성스러운 전쟁도 (설령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십몇 년쯤 계속되다보면 무게 중심이 제 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미 전 전선에 걸쳐서 모든 병사가 도주 혹은 제대를 꿈꿨다. 고의적으로 생명에 지장이 없을만큼의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본국에서는 징집을 피하기 위한 온갖 편법이 난무했고 그 편법을 색출해내기 위해 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인력들이 투입되는 낭비가 행해졌다. 가장 용감무쌍하다는 공수부대원조차 삶의 열망에 압도당했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다. 실제 치카디 부대의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의 결시율은 44 퍼센트, 낙제율도 44 퍼센트에 이르렀다.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다음과 같은 조항 때문이었다.

 

[22-22 안전 교육에 관한 공통 규정] 
매 달 한 번 시행되는 안전 교육을 통과하지 못하는 자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안전하지 않으므로 한 달 동안 공수 부대 작전에 투입되어서는 안된다.

 

  처음 치카디 부대에 왔을 때 그는 당번병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 똑같은 문제가 복사되어 나오는 필기 시험을 한 달에 한 번씩 다시 치는 이유가 뭔가?
- 부대원들이 안전에 대해 무심해지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리마인드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안전이라니! 얼마나 훌륭한 목표인가! 하루에도 수십기가 격추되고, 수백명의 파일럿이 허공에서 산화되고, 수천명의 병사들이 피로 땅을 적시는 마당에. 안전한 출격, 안전한 비행, 안전한 귀환보다 그들이 더 바라는 것이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 안전 수칙을 달달 외우는 게 적의 십자 포화를 비껴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 예? 중위님?
- 아니 그냥 뭐랄까…. 낙하산이나 글라이더를 타고 들어가 적의 후방 및 거점을 타격하겠다는, 아주 안전하지 않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부대가 수칙을 외운다고 더 안전해질 방법이나 있을까 싶어서…….
  어린 티가 채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는 당번병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위님.

  미안한 이야기지만 전사자들은 모두 안전 교육 합격자이기도 했다. 만약 그들이 안전 교육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임무에 투입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적진 상공을 비행하거나 적진 위로 낙하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적진 한 가운데서 고립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적의 포위망 안에 낑겨서 바퀴벌레처럼 눌려 죽는 일도 없었겠지.

  반면 제시 W. 서전트 하사와 같은 자들은 매 달 어김없이 열정적으로 비행 및 낙하 안전 시험에 응시했고 우수한 성적(같은 문제에 기계적으로 같은 답을 적어내는 것을 과연 우수하다 표현할 수 있을까?)으로 통과했다. 신기한 것은 하사가 단 한 번도 실전 임무에 투입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군인 이전에 신앙인으로 그런 생각을 해선 안되겠지만, 솔직히 중위는 제발 좀 하사가 적진 한 가운데에 던져져서 특유의 화와 분노를 아군이 아닌 적에게 좀 쏟아부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 그 자는 임무에 투입되어선 안돼. 왜냐하면 미친 놈이기 때문이지.
  고바야시 마루 군의관의 말에 중위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 미쳤다고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 낙하산을 타고 들어가 적의 후방 거점을 타격하겠다지 않나.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짓을 하겠나?
  군의관은 껄껄 웃었고 중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 미치지 않은 공수부대원은 없는 줄 알았는데요.
- 하사는 조금 특이하지. 첫째로 치카디 부대에서 그 짓에 투입되지 못해 안달하는 자는 하사 밖에 없고, 둘째로 자기도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하거든.
- 만약 그 자가 미쳤다고 칩시다. 그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그건 안되네. 안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지.

  군의관이 언급한 것은 다음 조향이었다.

 

[44-44 제대에 관한 공통규정] 
자신이 미쳤단 사실을 아는 미치광이는 정말 미치광이가 아니므로 미쳤단 이유로 제대시켜서는 안된다.


- 그러니까 자기가 미쳤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제대시키면 안되고, 그래서 7년씩 저렇게 방치하고 있단 말이군요.
- 뭐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군의관은 더 없이 태평한 표정으로 얼음잔에 담긴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그냥 미친 척하고 작전에 투입시키면 안되는 겁니까? 정말 하고 싶은 모양이던데.
- 이보게. 난 군의관이지 어떤 권한도 없어. 더구나 듣자하니 높으신 분들은 그런 미친 자를 극도로 위험한 임무에 투입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 서로 자기가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데다가 거기에도 또 다른 관련 조항이 있거든.
- 또 다른 조항이라고요? 도대체 치카디 부대에는 몇 개나 되는 조항(Catch)이 있는 겁니까?
- 나도 잘 모르겠네. 한 백개쯤? 연대장인 커널 대령님이 조항이나 규정이나 편람이나 양식을 따위를 만드는 걸 엄청나게 좋아한다네. 옛날에 수도사관학교장일 때도 그랬다지. 4년 동안 중도 탈락한 생도가 한 명도 없었는데, 그게 다 대령님의 새로운 지침 때문이었다는 거야.

 

[졸업에 관한 공통규정] 
졸업 이수 학점을 다 채우지 못한 생도는 자퇴할 수 없다.


-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조금 마음을 편히 갖는 게 좋지 않을까? 자네 종교는 있나? 종교 활동이나 해보면 어떻겠어?

  군종 장교에게 종교가 있냐고 묻다니! 

  중위는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부대에는 말문 막히게 하는 일들이 상식 이상으로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고소공포증이 있어 낙하산 부대로 발령 받게 된 남자라든지, 위험한 임무에 적극적이어서 위험한 작전마다 배제되는 남자라든지, 미쳤기 때문에 미쳤단 이유로 제대할 수 없는 남자라든지, 사제에게 종교 활동을 권하는 남자라든지. 

 

*

 

  치카디 부대에서 고의 낙제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가 또 하나 있다면 페티 오핑턴 (Petty Orpington)중사였다. 중사는 17회 연속으로 안전 교육에서 고배를 마셔 17개월 째 임무에 투입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많은 상급 장교들이 뛰어난 군인인 중사의 개점 휴업을 아쉬워하며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정작 중사는 전혀 미련이 없는 눈치였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 임무 해제 혹은 제대할 뿐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제시 W. 서전트 하사와는 완전히 반대의 덫에 걸린 사내라고 할 수 있었다. 작전에 투입되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임무 해제 상태인 것이 서전트 하사의 케이스라면, 작전에 투입되고 싶지 않아하는데 모두가 임무를 맡기고 싶어하는 것이 오핑턴 중사의 케이스였다. 공통점이 있다면 서로 다른 이유로 둘은 각기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여기 치카디 부대에 꼼짝없이 묶여있다는 정도랄까. 채플린 중위는 도대체 이 부대 내에 얼마나 많은 ‘유휴 병력 자원’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핑턴 중사는 이름과는 달리 상당히 건장한 하드웨어의 소유자로 주위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실제로 파일럿 에이 에이의 말에 따르면 중사는 처음 몇 번의 작전에서 영화 속 액션 스타와 같은 결단력으로 망설임 없이 적진 상공으로 뛰어 내렸으며, 거의 시속 200 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로 떨어지면서도 전혀 여유와 위엄을 잃지 않았다고도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정작 중사와 함께 나란히 낙하하며 그 대범함을 목격했을 법한 대원들 중에는 아직까지 부대로 살아 귀환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 번의 작전 수행 때마다 중사가 소속된 분대는 적의 거점에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고, 아군의 지원이 이루어질 시점까지 버텨내는 데는 실패했다. 세 번 모두 중사는 홀로 살아 돌아왔다. 

  그런 연유로 치카디 부대의 모든 사람들은 중사의 아귀와 같은 생존력에 감탄하는 한편, 중사에게 '전우 잡아먹는 귀신'이 붙지나 않았을까 염려했다. 물론 개중에는 그가 입었을 어마어마한 정신적 외상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안다고, 아군의 지원이 끊어진 적진 한 가운데서 살아 돌아오기 위해 어떤 경험을 감수해야 했을지 대충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무렵부터 오핑턴 중사는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 낙제 퍼레이드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 하지만 오핑턴 중사가 고의 낙제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어떤 의미에서 고바야시 마루 군의관은 치카디 부대의 정보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게 뭡니까?
- 두 번째 기적적 생환 후 부대에서는 그 놈을 중사로 진급시키고 3박 4일인가 4박 5일인가 휴가를 줬었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데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 나름 상처를 보듬어주겠다고 생각해냈던 아이디어지.
- 어째서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까?

- 내가, 그러니까 군의관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난 신체적 외상 전문인 쪽이지 않은가. 이럴 때면 차라리 군목이라도 있었음 싶어. 혹시 아는가? 신앙의 힘이 도움이 될지.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바로 앞에 군종 신부를 두고 한단 소리가?

- 아무튼 오핑턴 중사가 갑자기 낙제를 하는 이유는 말야. 그 문제의 휴가 때 로마에 가서 진탕 먹고 마시면서 사랑에 빠졌단 거지. 이름이 미카엘라라고 했나 비비안나라고 하나. 안봐도 뻔한데 아마 매춘부가 아니었을까 싶어. 뭐, 그런 걸 두고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 사랑에 빠져서 일부러 안전 교육을 낙제한다는 말입니까?
- 목숨의 소중함을 알게 된 거지.
  군의관은 낄낄거렸다. 그의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음흉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었다.
- 사실 제대 신청도 무지하게 했다네. 아픈 척도 하고 미친 척도 했지. 그런데 어땠겠나? 자기 머리로 판단을 내려 자기 손으로 신청을 해서 이 미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은 그 놈이 더없이 제 정신이라는 증거거든. 그러니 얄짤없이 퇴짜를 맞았지.

  하지만 18번 째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에서 페티 오핑턴 중사의 기록 행진은 마침표를 찍고야 말았는데, 윗선에 과잉 충성을 하려는 출제 장교들이 중사의 답안지를 조작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낙제하기 충분한 오답을 적었던 중사는 크게 충격을 받아 상관에게 면담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야반 도주도 시도했으나 십 킬로미터도 채 못가서 다시 잡혀왔다. 중사는 탈영을 하고도 영창은 커녕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 그건 답안지를 조작했던 보이지 않는 손들이 부린 마술의 결과였다. 울며 겨자먹기로 중사는 다시 군의관을 찾아갔다.
- 군의관님,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 어떻게?
- 저는 정신 이상자인데 어떻게 작전에 투입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 후방에 병원으로 후송해주십시오.
- 그럴 수 없어. 귀관은 미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미쳤단 이유로 임무 해제를 받겠나?
- 저는 미쳤습니다. 분명히 미쳤습니다.
- 그걸 무슨 수로 증명할 건데? 귀관의 말은 근거가 되지 못해. 미친 놈이 자기 스스로 미쳤다고 하는 것 봤나?
- 그럼 아프다고 해주십시오. 죽을 병만 아니면 됩니다.
  중사는 군의관의 바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 난 못해. 적어도 이제는 못해.
- 뭐라고요?
  군의관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만 설명을 시작했다.
- 귀관이 나를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귀관에게 병이 있다는 진단을 내려줄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귀관이 나를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귀관에게 적어도 심각한 병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러니 내가 그런 걸 바랐다면 애초에 찾아오지를 말았어야 했네.  
- 군의관님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진단을 받는단 말입니까?
- 귀관은 그게 역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어. 내가 보기엔 귀관이 정신적으로는 물론 신체적으로도 온전하다는 게 이 상황의 핵심이라네.
  중사는 두꺼비만한 눈을 굴리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을 이기지 못해 테이블 위의 꽃병을 던져버리고는 군의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막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씩씩거리는 중사의 뒷모습을 보며 군의관은 혀를 끌끌 찼다.
- 이래서 부대에 군종 장교가 하나쯤은 필요한 법인데…….

 

*

 

  오핑턴 중사 사건은 채플린 중위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제 더 이상은 안전 교육 낙제가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도 알게 된 것이다. 이번은 우연히 넘어가더라도 다음 번에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번에는 어쩔 것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합격의 영예와 함께할지 누가 알겠는가? 

  마음이 급해진 중위는 보다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면담을 신청한 상관의 수가 치카디 부대에 존재하는 전체 장교 숫자보다 많다는 사실을 채플린 중위가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떻게 이런 난센스가 있을 수 있을까?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폭탄을 돌리는 느낌으로 매 달 꼬박 꼬박 안전 교육에 두 번씩 낙제했고 제시 W. 서전트 하사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쳤다. 급기야 중위는 신경 쇠약에 걸릴 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처럼 행정 오류로 엉뚱한 자리에 앉아 있는 군인이 치카디 부대 안에 아주 많지 않을까 하는. 이를테면 포목집 아들이 군의관으로 와서 붕대를 감아주고 있다든가, 마부여야 할 사람이 폭격수가 되어 상공을 휘젓고 다닌다든가, 평생 제식훈련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사내가 번쩍거리는 계급장을 달고 장교 목에 힘 주는 자리에 앉아 있다든가. 하긴 그건 역사상 모든 전쟁에서 으레 벌어졌던 거짓말 같은 일이기는 하지만.

 

*

 

  치카디 부대의 부연대장인 메이어 메이어 (Major Mayor) 소령은 마지막으로 중위의 발령 서류에 서명을 했던 상관이었다. 군종 장교와 공수 부대원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중위가 가장 먼저 찾아가 면담을 시도했던 상대이기도 했다. 

  소령을 만나기는 정말 힘들었다. 열 번에 아홉 번은 부재 중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가까스로 만남이 성사된 것은 중위가 에이레네 섬에 도착한지 거의 아홉 달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그 날의 충격을 중위는 잊을 수가 없었다. 소령의 방은 어둡고 퀘퀘한 냄새가 났다. 어린 당번병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중위는 호랑이처럼 매섭게 눈을 부릅뜬 위엄있는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압도당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경례를 올렸는데, 그러자 소령은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당번병!

  이렇듯 첫 만남부터 소령의 태도는 무뚝뚝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뜨악한 기분으로 소령의 방에서 쫓겨났던 중위는 한동안 다시 찾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오핑턴 중사 사태만 이니었어도 가급적 찾아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소령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당번병!

  쩌렁쩌렁한 목청에 건물이 진동하는 듯 했다. 중위의 발령 과정에 포함된 결정적 서명 중의 하나가 소령의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지만 소령은 중위가 누구인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치카디 부대에 중위 계급을 가진 남자가 자그마치 넷이나 된다고 하니 그 정도는 이해해줄 만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 저는 칼 A. 채플린 중위입니다. 아홉 달 전 치카디 부대로 파견된 군종 신부로…….
- 응, 그렇구만. 무슨 일인가?
  잠시나마 중위는 얽힌 매듭의 실마리를 드디어 찾은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군종 장교입니다. 그런데 저는 현재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우리는 군종 장교가 없는데?
- 제가 군종 신부로 여기에 왔습니다. 거의 일 년 전의 일입니다.
- 나는 자네의 면담을 받아들일 수 없네. 우리 부대 안에는 군종 장교가 없는데 군종 장교와의 면담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나? 귀관은 지금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요청을 하고 있네.

  절망적인 기분으로 쫓겨나는 중위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는데, 바로 그 때 벼락같은 메이어 소령의 일갈이 그의 뒷통수를 때렸다.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당번병!

  중위는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아아, 설마……. 희망과 절망이, 이유도 모르는 채 교차했다.
- 저는 칼 A. 채플린 중위입니다. 아홉 달 전 치카디 부대로 파견된 군종 신부로…….
- 응, 그렇구만. 무슨 일인가?
-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군종 장교입니다. 그런데 저는 현재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받아놓으면 좋지. 받으면 안되는 이유는 또 뭔가?

  조금 전과 다른 대답이 나온 걸 기뻐해야 할지.
-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러 이 곳에 왔습니다. 기초 군사 교육만 받은 제가 낙하산 훈련이라니요. 게다가 저는 고소공포증 환자입니다. 육군에서 저를 내보낸 사유가…….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당번병!

  갑자기 눈을 까 뒤집고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소령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소령의 어린 당번병은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와 달아오른 소령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주었다. 가끔씩 중위를 힐끔거리는 어린 병사의 눈동자 속에는 연민과 동정과 체념이 3분의 1씩 섞여 있었다. 그건 마치 <그래요. 그렇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중위는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덕분에 잠시 후 소령이 또 벌떡 일어나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렇게 고함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그 전에 여긴 어딘가? 당번병!

  어린 당번병은 할아버지 뻘 되는 소령의 잠자리를 봐주었고 기저귀를 갈아 주었으며 소령이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막사 밖으로 나왔고, 그때까지 안절부절 못하던 중위는 초조하게 문 앞를 서성서리다가 재빨리 당번병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노’로 시작해서 ‘망’으로 끝나는 그 단어를 자칫 입 밖에 낼 뻔했지만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넣어 다행이었다.
- 소령님께서는 5분에 한 번씩 기억이 지워지십니다. 다시 말해 5분 전 일은 기억 못하십니다.
- 지워진다고 했나? 주기적으로?
- 그렇습니다. 날아갑니다. 휘발됩니다. 일종의 리셋입니다.

  이런 휘발같은 일이. 오, 주여! 중위는 어이가 없던 나머지 반사적으로 성호를 그었다.
- 몇 년 전부터 그러셨던 건가?
- 제가 알기로는 5~6년 되었습니다. 그 이전 일을 기억하시는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 그런데 연대를 지휘하시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나?
- 그래서 부연대장 아니십니까? 연대장이 계시니까.

  중위는 탄식했다. 아아, 그럼 내 발령 서류를 확인하고 승인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 그럼 소령님 서명이 적혀 나오는 모든 서류는 연대장님을 통해서 처리된 것인가?
- 그럴리가요. 내용은 리터넌트 대위님이 보시고 서명은 대충 제가 합니다. 
  어린 당번병은 씨익 웃어보였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부적절해 보였을 수도 있는 미소였지만 중위에게는 적절함을 따지고 자실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 하다가 오늘, 내일 아니면 또 가까운 미래에 그는 적진 상공에서 내던져질 몸이 되었으니 말이다.
- 그렇다면 소령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자초지종을 5분 내에 압축 요약해서 소령님에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잊어버리기 전에 재빨리 이해시켜버리는 방법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지우개가 없는 다른 상관님을 통해 해결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대꾸할 힘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중위는 돌아서 몇 걸음을 걸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잠깐 사이 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그는 돌아서 소령의 방 앞에 여전히 서있는 어린 당번병에게 물었다.
- 자네 이름이 뭔가?
- 어윈입니다.

 

*

 

  며칠 뒤 페티 오핑턴 중사는 정말로 공수부대의 임무에 투입되었다. 파일럿이었던 에이 에이는 거의 시속 200 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로 적진 상공을 낙하하는 중사의 모습이 앞선 세 번의 임무와 다름 없이 늠름했다고 회고했다. 중사가 소속된 분대는 이번에도 적의 거점에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고, 아군의 지원이 이루어질 시점까지 버텨내는 데는 실패했다. 치카디 부대의 대부분은 이번에도 중사 혼자 살아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번만큼은 예상이 빗나가 중사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원들만 살아 돌아왔다. 채플린 중위는 가엾은 중사를 위해 기도했고, 미카엘란지 비비안난지 하는 이름 모를 가엾은 여인을 위해 기도했고, 마지막으로 가장 가없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를 했다.

 

*

 

  치카티 부대에서 가장 높고 빛나는 계급장을 가진 남자인 연대장 로널드 A. 커널 (Ronald A. Connell)대령에게 특별한 점이 한가지 있다면, 대령의 실제 얼굴을 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일 것이었다. 부대 안의 누구도 연대장이 백발인지 흑발인지 금발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적당한지, 몸매가 날씬한지 뚱뚱한지 볼품 없는지, 검은 눈동자를 가졌는지 푸른 눈동자를 가졌는지 갈색 눈동자를 가졌는지, 사팔뜨기인지 들창코인지 짝귀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 이상한 일임에도 치카디 부대의 누구도 그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기를 꺼려했는데, 이유인 즉 연대 안에서 유일하게 독수리를 달고 있는 남자에 대해 감히 가타부타 말을 꺼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렇게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음으로 하여 치카디 부대의 연대장 로널드 A. 커널 대령은 자신의 무존재를 존재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공식 채널로든 비공식 채널로든 커널 대령의 존재 에 대해 의문을 가진 첫 번째 남자는 채플린 중위였다. 그는 군종 장교라는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조속히 해결함으로써 비행 및 낙하 훈련을 받거나 가까운 미래에 비행 및 낙하하게 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베일에 싸인 연대장을 찾아 나서는 위험하고도 비밀스러운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대령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많아도 정말 대령을 자기가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기가 막힌 현실 뿐이었다. 분명 연대장과 얼굴을 비비고 살았을 연대 행정관들조차 결단코 ‘그 분’을 실제로 본 일은 없다며 학을 떼는 대목에선 급기야 바닥에 주저 않아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한술 더 떠서 연대장 공식 서류에 대리 서명을 한다고 알려진 리터넌트 대위라는 자의 정체 또한 찾을 수가 없었다. 부대 안에는 계급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군인이 많았지만 '리터넌트'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필경 누군가가 내세운 조악하고 성의없는 가명, 뭐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긴 한데……. 하여간 이거 참 돌겠군! 서전트 서전트(하사)에 메이져 메이어 메이져(소령)에 이젠 리터넌트 리터넌트(대위)라니!

  울며 겨자먹기로 채플린 중위는 커널 대령 대신에 대령의 당번병을 찾아나섬으로써 우회적으로 대령의 존재와 정체, 그리고 동선 및 거처에 접근해 들어가고자 하였는데, 알고 보니 대령의 당번병 또한 어윈 이등병이었다. 메이져 메이어 소령의 그 어리고 앳된 당번병 말이다. 소령의 당번병 이름도 어윈이고 대령의 당번병 이름도 어원이라기에 어째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싶더니만, 알고 보니 정말로 두 어윈이 같은 어윈일 줄이야.
- 또 병사라고? 아니, 도대체 이 부대 안엔 당번병이 병사 하난가?

  그 질문에 어린, 어윈 이등병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 그런 셈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일단 신병이 들어와야 당번병을 나누어 맡던지 제가 빠지던지 할텐데, 저희 부대에 신병이 들어오지 않은지는 꽤 오래되었으니까요.
- 나 원 참, 갈수록 태산이군. 이런 전시에 그러기도 힘들텐데 말이야.
- 모릅니다. 누구라도 신병으로 들어와야 이유가 뭔지 물어볼텐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니 도통 원인이 뭔지 모르겠네요.
- 예전에 자네는 연대장님을 본 적이 없다 했었지. 그러니 연대장의 당번병조차 본 적이 없는 셈이군. 연대장님을.
- 그렇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한 번도 연대장님 얼굴을 뵌 적이 없습니다.
- 리터넌트 대위라는 분이 공식적인 서류 대부분을 연대장 대리로 서명한다고 하던데 혹시 그 분이 누군지는 아나?
- 예. 그게 사실…… 제가 리터넌트 대위님의 당번병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 맙소사? 또? 병사가 부대 장교들 모두의 당번병이라도 된단 말인가?
- 뭐, 말하자면 그런 셈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어윈은 수줍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 내 생각엔 가명인것 같아. 왜냐하면 이 부대의 누구도 그런 이름을 가지진 않았거든. 자넨 혹시 누군지 만나봤나?
- 실은…… 이미 중위님도 만나셨습니다. 고바야시 마루 군의관님이 리터넌트 대위입니다.
  이 도대체 무슨…….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뒷목을 잡았다.

- 왜 군의관이 베일 속의 대위로 비밀스럽게 행세한다는 건가? 무슨 이유로?
- 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제가 언뜻 듣기로는 이렇습니다. 연대장님과 부연대장님의 임무 수행이 불가하시니 적당한 계급의 누군가를 내세워야 했다고…….
- 누구든 있었을 게 아냐. 다음 서열에 해당하는 분이 되는 문제를 어째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게다가 왜 군의관이?
- 만약 누구 한 사람이 나서면 권력을 차지한 것처럼 보일테고, 그렇담 필경 싸움이 날테니까요. 하지만 가공의 인물을 내세우면 그런 문제가 없어 편리하죠.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싸울래야 싸울 수가 없을테니까요.
- 맙소사.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어윈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차렷자세로 소리를 질렀다. '아닙니다! 중위님!'라고.

- 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혹시, 그러니까 혹시라도 연대장님까지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은 없겠나?
  어윈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 천만에요. 연대장님이 가공의 인물이라면 무슨 수로 연대가 돌아가겠어요?
  덥고 찐득거리는 날씨에 목덜미가 축축해졌다.

- 아무튼 좋네. 그렇다고 치세. 그럼 실제로 만났을 가능성이 있을 만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분명 어딘가에 계실 연대장님을.
- 부연대장님입니다. 이 막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 메이어 소령님? 기억이나 하실 수 있겠는가? 뭐랄까…… 소령님에게는 ‘그 문제’가 있지 않으신가?
  아무래도 노망이나 치매보다는 ‘그 문제’라는 표현이 완곡해 보였다.
- 맞습니다. 그래서 최근 5년 내에 만난 기억은 못하실 것 같습니다.
- 그럼 그 전에 만난 사람들 얼굴은 기억을 하시려나?
- 아마도 하실겁니다. 그 이전 기억에 대해서는 젊은 사람들보다도 맑고 또렷하고 명확하시거든요.
  어린 친구의 입에서 젊은 사람들이란 표현이 나오니 어쩐지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 좋네. 좋아. 한 번 해보자고. 그렇다면 대령님과 소령님이 언제부터 교류가 있으셨나?
- 제가 알기로는 두 분이 알고 지내신지 5.5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중위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당번병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뭐? 5.5년? 자네 농담하는 거지?
- 아닙니다. 중위님! 정로말 5.5년입니다. 5년하고도 6개월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 그렇담 어쩌란 말인가? 5년이 넘었으니 어차피 기억도 못하시겠구만.
- 그래도 시도는 해보셔야죠. 연대장님을 굳이 만나셔야 한다면요. 지금으로서는 소령님의 기억력이 유일한 단서일 겁니다.
  어째 이 어린애에게 농락당하는 느낌이야. 중위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중위는 몽타주 화가를 수소문했다. 바보같은 짓처럼 생각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비행 및 낙하 훈련을 실제로 받고 전장에 던져지기 전에 자신이 군종 신부이자 극심한 고소공포증 환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윈 이등병의 말처럼 소령의 해면 덩어리 전두엽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단서이기도 했다. 어찌어찌 몽타주 화가는 불러올 수 있었다. 관건은 소령의 ‘그 문제’로 5분마다 흐름이 끊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작업을 마칠 수가 있겠냐는 부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그 전에 여긴 어딘가? 당번병!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나를 그리나? 그 전에 너를 그리나? 당번병!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그 전에 난 또 누군가? 당번병!

  소령은 5분에 한 번 꼴로 발작을 일으키며 당번병을 찾았다. 어윈이 백 번 이상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야 그림은 가까스로 완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찬란한 결과물 앞에 중위는 할말을 잃었다.
- 빌어먹을, 이 얼굴은…….
  어윈 이등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존 웨인이로군요.

 

*

 

  군의관 고바야시 마루 (Kobayashi Maru) 대위에게는 세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 첫째, 앞서 채플린 중위가 지적한대로 그 남자는 정보통 중의 정보통이었다. 아니, 정보통의 수준을 넘어 실상 부대 내 모든 정보가 고바야시 마루를 거쳐 유통되고 있었다. 둘째, 그 남자는 부대 내 실세로 권한도 막강했다. 이는 물론 '정보가 곧 권력'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치카디 부대의 특수한 상황 - 즉, 연대장이 베일에 싸인 남자 혹은 존 웨인일 가능성이 있고 부연대장은 치매 늙은이 혹은 노망난 늙은이이라는 상황 - 때문이기도 했다. 셋째, 그 남자는 부대에 꼭 필요한 존재이자 어딘가 모르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꼭 필요한 존재인 이유는 독일-이탈리아 동맹군과 대적하는 최전선에서 그 남자가 군의관의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반면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 남자가 일본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바야시 마루 대위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는 했다.  
- 우리 연합군의 적이 누구지?
- 나치 히틀러와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 놈들이지!
- 옳지. 그런 마당에 연합군 부대의 군의관이 일본계라는 사실에 안심해도 좋단 말인가?
- 절대! 안심해도 안 좋지!
- 그럼 우린 어찌해야 하는가?
- 눈에 불을 켜고 놈을 주시해야지!

  이러한 수많은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고바야시 마루 군의관은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지들이 못 믿겠으면 어쩔 건데?’ 라는 식의 두둑한 배짱 덕분이었다. 전쟁통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특히 기술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부족했다. 전쟁 전에는 군의관이 다섯 명 편성되어 있던 치카디 부대이지만 지금 남은 건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가장 가까운 아군 부대는 20 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었고 거기에 군의관이 남았는지 안 남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갓 기초교육만 받고 끌려온 햇병아리 의무병의 손에 몸을 맡길 생각이 아니라면, 유일한 군의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바야시 마루는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 맞아, 이 분이 연대장님이야!
  연대장의 몽타주를 본 군의관의 반응은 채플린 중위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 존 웨인 아닌가요? 이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몽타주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군의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만 이렇게 말했다.
- 그럴리 없어. 이 분이 커널 대령님일세. 좀 닮긴 했지만 존 웨인은 아니야.
- 어떻게 아십니까? 연대장님을 뵌 사람이 없다던데요. 메이어 소령님을 빼고는.
- 뵌 적이 없으니 맞다는 것이지. 뵌 적이 있다면 나조차 사진 속의 남자가 연대장님이 아니라 존 웨인이라고 생각했겠지.
  더 이상은 어디서부터 말이 되고 어디서부터 말이 안되는 건지 따질 기운도 없었다. 중위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자기 앞에 있는 남자가 이 망할 놈의 부대의 실세라지 않는가. 정말 그렇다면 그의 병과와 보직이 바로 잡히기 위해서는 좋던 싫던 결국엔 이 남자의 손을 거쳐야 할 것이었다.

- 아무튼 좋습니다. 어쨌든 저는 연대장님을 만나야 합니다.
- 그걸 나한테 얘기해서 어쩌자는 건가? 난 군의관 나부랑이에 불과한데. 내가 귀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아주는 것 밖에 없어. 그나마도 이젠 깨끗한 걸로 해주기 어려운 상황이고 말이야.
  중위는 배에 힘을 잔뜩 넣고 힘을 주어 말했다.
- 저는 '리터넌트 대위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군의관님이 아니라.

  알듯 말듯한 표정으로, 군의관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얼음잔에 스카치를 따랐다. 떠오르는 얼음들이 서로 부직히며 딸랑 딸랑 소리를 냈다.
-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지. 나는 열여덟살 때까지 깡촌 중에 깡촌에서 살았어. 차가 없이는 시내에 나갈 방법이 없을만큼 정말 외진 곳이었지.
-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 쉬쉬, 들어봐. 당시 나는 도시 여자애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차가 꼭 필요했단 말이야. 급기야 열여덟살 되던 해엔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로 빨간색 시트로앵 2CV를 사달라고 졸랐어. 그랬더니 아버지가 뭐랬는줄 알아?
- 뭐랬는데요?
- 일을 해서 돈을 벌면 차를 사주겠다는거야.
- 그래서요?
- 그래서라니.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일감은 모두 도시에 있지. 도시에 나가려면 차가 있어야 하니 일을 구하려고 한다면 차가 있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던 거야. 차가 없이는 일을 못 구하고 일을 못 구하니 아버지는 내게 시트로앵을 사주지 않았지. 
-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상관이야 없지. 물론.
  스카치를 홀짝이길 멈춘 군의관은 서성거리길 그만두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 정리해봅세. 귀관은 연대장을 만나기 위해 리터넌트 대위가 누군지 찾아다니고 있어.
- 그렇습니다.
- 만에 하나 귀관이 리터넌트 대위라는 작자를 찾았다고 가정하자고…….
- 찾았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죠! 찾았지 않습니까?
  '이 답답한 인간아!'라는 표정을 하며 군의관은 쿠바산 시가를 꺼내어 뭉툭한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 하여간에 가정해보자고, 이 답답한 친구야. 그럼 그 자가 귀관과 연대장님의 만남을 주선해줄까? 그러면 '리터넌트 대위'라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신이 대신 부대의 중대한 일을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일텐데? 그럴 수야 없겠지. 그건 부대의 평화와 지휘 체계를 확립하려는 연대장님의 의중에도 어긋나는 일이니. 그러니까 설령 자신이 진짜 리터넌트 대위라고 할 지라도 그 사실을 부정할테고, 그러니까 귀관은 리터넌트 대위를 찾았기 때문에 리터넌트 대위를 통해 연대장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야.
- 그게 도대체 뭔 소립니까? 그냥 만나게 해주면 되는 문제잖아요!
- 연대장 면담도 시트로앵과 마찬가지야. 이룰 수 없고 가질 수 없단 말이야! 이 돌대가리야!
- 여기서 시트로앵이 왜 나와요? 저는 군의관님 어릴적 사연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요!
- 하여튼 나는 리터넌트 대위란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연대장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위치도 안되고!

  채플린 중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그럼 뭡니까? 저는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끌려가서 몇만 미터 상공에서 그냥 던져지란 말입니까? 낙하산 부대원으로 여기 온 게 아닌데도 말입니까?
- 전시에 뭘 또 일일이 따지나? 더구나 자넨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도 받았잖나? 시험도 통과한 적도 있던데?
- 낙하산 부대원으로 잘못 소속 되어 있으니 교육을 받았죠. 교육을 받았으니 시험을 쳤고, 시험을 치다보니 어쩌다 통과한 때도 있었던 거죠. 젠장할, 그 시험이 뭐 별거라고. 이제까지 문제 한 번 바뀐적 없는 우스꽝스러운 시험이란 말입니다.
- 어쨌든 교육을 받고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 인해서 귀관은 확실한 낙하산 부대원으로 인정을 받았어. 그렇다면 그냥 은밀한 정체성에 대한 자네만의 가설을 접어두고…… 그냥 낙하산 부대원인 셈 치고 살면 안되겠나?
- 진짜 낙하산 부대원은 가만 두고 왜 엄한 사람 등을 떠미는 겁니까? 서전트 하사는 작전에 안 내보내잖아요.
- 서전트 하사는 미쳤으니까. 미친 놈의 손에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순 없잖나.
- 나도 미쳤다고요.
- 전에도 이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 빌어먹을! 수천 미터 상공에서 던져진단 말입니다. 난 고소공포증 환자라고요!

  분을 참지 못한 중위는 분을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났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군의관의 침낭이 들어있는 가방을 걷어쳤다. 다만 의외로 제법 단단하였기 때문에 발이 돌아가는 듯한 묵직한 고통이 전혀져 왔다. 젠장! 되는 게 없구만. 중위는 신음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소통스러워하는 중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의관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 자네 종교는 있나? 종교의 힘을 빌어 평화를 찾는 건 어떤가?
  중위는 몸을 뒤틀며 대꾸했다.
- 백 번도 더 이야기했지만 내가 군종 신붑니다. 더 이상 무슨 믿음을 가지라는 소린 하지 마십쇼!

  태연하게 싸구려 성냥으로 고급 시가에 불을 붙이려 노력하며 군의관은 이렇게 대꾸했다.
- 이러니까 이 부대에도 군종 장교가 필요하긴 해. 다들 너무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니까.

 

*

 

  언제부턴가 채플린 중위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끔찍하리만치 방치당하는 신세였고 거대한 무관심 속에서 홀로 썩어가는 중이었다.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었고 털어놓은들 누구도 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위는 고소공포증 환자였지만 폐소공포증 역시 어떤 기분의 증세를 동반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대원들은 <공수 부대에 들어와 자신이 공수 부대원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공수 부대의 작전을 위한 교육 훈련을 받지 않겠다는 남자>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 공수 부대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럼 누군 원해서 왔나?
- 까라면 무조건 까는 게 군인이지. 어딜 감히!

  군인다움으로 무장된 그들의 인지 체계는 명쾌한 이진법을 선호했다. 백번 양보해 설령 중위의 주장이 타당하더라도 그것이 변명의 여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된 일이든 일단 왔고, 임무가 주어졌으면 충실히 하는 게 군인 아닌가? 확실히 시스템이 실패할 확률보다는 개인이 부적응할 확률이 그들에게는 훨씬 그럴 듯한 설명이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시대 또한 그걸 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하기야 사연 없이 전선에 내밀려 온 사람이 어디 있겠어.

  중위의 억울한 사연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높은 사람들은 없으니만 못했다.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한 사람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고 다른 한 사람은 금치산자나 다름없었다. 둘 중에 한 사람을 통해 나버지 한 사람에게도 비로소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에 접근하기란 가히 뫼비우스의 띠 위를 내달리는 일에 비견할만 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원점으로 되돌아아오게 되어 있었으니까. 출구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더 절망케했다. 

  가령 군의관은 중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만한 사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연대장이나 그에 준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중위의 문제를 보고해 줄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고, 설령 그것이 여의치 않는다면 군의관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진단서를 써줌으로써 우회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권한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군의관은 애써 개입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마도 단지 귀찮았거나 중위가 겪고 있는 상황이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어진 시련이 견딜만한 것이든 견딜만하지 않은 것이든, 어차피 남의 일이면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시간은 정처없이 흘렀다. 전쟁은 내일 끝날 것도 같았고 어쩌면 영원이 끝나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다보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혹은 또 가까운 미래에 중위는 낙하산과 배낭 하나를 등에 매단 채로 허공에서 던져질 것이 분명했다.

 

*

 

  그리고 그 해 7월 19일. 급기야 중위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드디어 치카디 부대에 공식적으로 군종 장교가 부임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군종 신부, 중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특히 고바야시 마루 군의관은,
- 크리스찬 쉐퍼드 (Christian Shephard) 중위! 이름부터 더할 나위 없이 군목스럽군! 
라며 크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채플린 중위로서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제는 그가 군종 목사로 이 부대에 왔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설령 알게된다고 한들 어느 누구도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대체품'이 있으니까. 목사와 신부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전시의 군대에서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목 쉐퍼드는 중위의 딱한 사연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군의관이 채플린 중위를 '관심 사병'이 아닌 '관심 장교'로 지목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위의 연대장 면담 신청 건 수가 평균을 크게 웃돌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치카디 부대 전체의 나머지 장교들이 연대장 면담을 신청한 건 수를 모두 다 합쳐도 채플린 중위 한 사람의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장교들은 연대장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럭 저럭 상황에 맞춰 지냈다. 무사히 살아 남은 채로 전쟁이 끝나기만 바라는 것이 오직 그들의 관심사였다. 오직 유별나게도 채플린 중위만 히스테리를 일으켰고 무엄하게도 연대장의 실존 여부까지 의심해가며 이리 저리 소문을 캐고 다녔던 것이다. 이런 길 잃은 양들을 다독이는 것이 군종 장교로 부임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이라고 군목 쉐퍼드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 길 잃은 양이 하필 장교에다가 자신과 같은 계급씩이나 된단 사실이 조금 껄끄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 들어오세요. 한 번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채플린 중위는 군목의 눈치를 살폈다. 쉐퍼드는 아무리 봐도 썩 호감가는 외모는 아니었다.
- 연대장 면담을 신청하셨더군요. 그것도 아주 많이. 지난 일 년 동안 마흔 여덟번이나 말입니다. 거의 매주 연대장을 만나보려고 애쓰셨단 뜻이로군요.
- 글쎄요. 여기서 방점은 '마흔 여덟번이 많은 횟수다'라는 부분보다는 '그 마흔 여덟번 중 단 한 번도 면담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데 찍혀야 하는 게 아닙니까?
- 그렇군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면담 신청 사유가 뭐였습니까?
- 바로 잡아야 할 일이 있는데 아랫선에서는 해결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분을 만나려고 했던 겁니다.
- 그 바로 잡아야 할 일이 뭐였습니까?
- 사실…… 저는 군종 신부로 이 부대에 왔습니다. 쉐퍼드 중위님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상대가 새로 온 군종 장교다보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과 안도가 교차하는.

- 군종 신부라고요? 그런데 서류에 따르면 현 소속은 공수부대로군요. 그런데 계급상으로 보면 장교이고요. 말하자면 장교로 오신 분이 병이나 부사관들과 함께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아무도 저와 이야기를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분명 이상한 상황인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그래서 가장 높은 권한을 가진 분을 만나려고 했던 거로군요?
- 맞습니다. 긴 이야기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런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단 생각에 중위는 감정이 복받치기 시작했다.

- 행정 착오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확인하고 정당하게 바로 잡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무작정 방치를 하냐는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당사자가 느낄 고통에는 요만큼도 관심 없다 이겁니까?
- 비행 및 낙하 훈련을 받는 게 고통스럽습니까?
- 교육은 받으면 되고 시험은 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고소공포증 환자인 사람을 굳이 매달 비행 및 낙하 훈련 대상자로 올려 놓는다는 부분을 저는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심함에도 정도가 있는데, 이쯤 되면 정말 잔인한 것 아닙니까?
- 할렐루야! 그러니까, 귀관이 고소공포증이라는 겁니까?
-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비행 및 낙하 훈련을 원하지 않아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 저런, 정말로 고생이 많았겠네요. 마음이 아픕니다.
  중위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지요. 제 당번병을 통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어윈 이등병을 보며 중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카디 부대에 장교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어린 어윈 이등병이 수발 들어야 할 대상도 한 명씩 늘어나고 있었다. 저 친구도 불쌍하지. 여기엔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하지만 군목과의 뜻하지 않던 면담으로 중위는 다시 한 번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마침내 길고 어두운 터널 끝에 한 줄기 빛이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옭아매던 도돌임표를 지워낼 방법을 찾은 것처럼.

  며칠 후 군목은 중위를 찾아왔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걷자고 말했다. 어느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후끈한 열기가 달궈진 땅에서부터 올라왔고 볕은 손을 베일만큼 날카로웠다.
- 조금 알아보았더니 규정이란 게 있습디다. 상관과 면담을 하려면 지켜야 하는 절차 같은 겁니다.
- 물론 규정이 뭔진 알고 있습니다.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중위는 대꾸했다.

- 중위가 원하는 연대장 면담을 성사시키려면 면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 저도 작성했습니다. 그것도 수도 없이.
  군목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양식이 틀렸더군요. 여기 마지막에 도장을 받아야 하는 위치가 있습니다.
- 도장이야 대령님을 만날 수 없으니 못 받았습니다. 연대 행정관들에게도 없는 도장을 어디에서 받겠습니까?
  군목은 헛기침을 했다.
- 편람이라는 게 있더군요. 부대 운영을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던데…….
- 예, 압니다.
- 읽어보았나요?
- 물론이죠. 읽어보았습니다.
- 편람에 따르면 상관 면담을 희망할 경우 어떻게 하도록 있는지 기억 합니까?
- 기억까지야 못합니다. 그걸 외울 필요까지가 있습니까?
- 편람에 따르면 서명을 받지 않으면 면담 신청서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위는 걸음을 멈추었다. 찌는 듯한 더위 때문인지 이미 속옷은 축축히 젖은 상태였다.

-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 그러니까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하지 못했기에 면담 신청이 불가했다는 뜻입니다.

 

[44-6B] 상관 면담의 신청에 관한 공통규정
가. 연대장 등의 면담 사유가 발생하는 경우 해당 장교는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하여 연대 행정실에 제출한다.
나. 유효한 면담 신청서는 양식 작성 요령에 준하여 작성한 것이어야 하며 하단에 연대장의 서명을 받은 것이어야 한다.
나. 단, 면담의 신청 성사에 대한 결정은 연대장이 그 중요도에 따라 판단한다.
다. 면담의 중요도는 통상 다음과 같은 가중치로 산정되어
  1) 부대 운영 업무에 관한 안건: 가중치=1.5*(10/남은 기한 일수)
  2) 부대 교육 훈련에 관한 안건: 가중치=1.0*(10/남은 기한 일수)
  3) 부대 이벤트 행사에 관한 안건: 가중치=0.5*(10/남은 기한 일수)
  4) 개인 사유에 관한 안건: 가중치=0.1  

 

- 하지만 연대장님이 계시지 않으니 도장을 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군목은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 물론 그렇습니다. 도장을 받아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하여야 연대장님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 서류든 뭐든간에 도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 도장을 받아야 연대장님을 만날 수 있죠. 연대장님을 안 만나고 어떻게 도장을 받습니까? 그러면 도장을 받으러 가서 면담을 하면 안되는 겁니까?
- 안되죠. 왜냐하면 공식적으로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해서 접수하지 않았으니까.
- 맙소사! 설마 영원히 못 만날 거란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중위가 목소리를 높이자 군목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아무리 논쟁해봐야 의미가 없단 말을 하는 겁니다.
  물론 중위도 그것이 군목의 탓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 편람. 그렇다면 그 멍청한 편람을 고치면 안되는 겁니까?  서명을 받지 않아도 면담이 가능하게 되면 이 논쟁을 거듭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 상자 밖으로 나가자는 이야기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 그런데…….
- 편람의 수정에 대한 편람 규정 또한 따로 있습니다. 여기 편람집의 이 대목을 읽어보시죠.

 

[44-9B]. 편람의 추가, 수정, 및 삭제에 관한 공통규정
나. 편람의 수정 사유가 발생시에는 연대장 면담을 통해 연대장에게 보고하고 연대장 면담을 신청하여 연대장과 협의 후 연대장의 윤허 아래 수정하도록 한다.

 

  중위는 군목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연대장님에게 어떻게 보고를 합니까?
- 연대장 면담 신청을 해야죠.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갖추어서.
- 설마. 농담이시죠?
- 농담 아닙니다.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모래 포대를 걷어찼다. 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싶은 기분이었고 실제 주저 앉기까지도 했다. 모든 게 절망스러웠다. 이만큼 답이 없을 수 있을까 싶었다. 군목 쉐퍼드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 그리고 품에서 삼단접지를 꺼내 중위에게 내밀었다. 접지를 펴면 교인과 하나님 사이의 길이 끊어지고 접으면 다시 길이 이어지는, 그런 아기자기한 만화가 인쇄된 종이였다. 나지막히 귀를 울리는 쉐퍼드의 목소리가 중위의 귓전을 맴돌았다.

- 종교가 있습니까? 제 생각엔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오! 주여! 이제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

 

  공수부대 수송기 파일럿 에이브러햄 알바레즈. 사람들은 그를 '에이 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파일럿 이름으로 적당하지 않기로 따지자면 에이 에이(A.A.)만한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고사포, 다시 말해서 대공 화기(anti aircraft)의 약자가 A.A.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이 에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모는 수송기를 타고 적진 상공을 비행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유쾌한 선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수송기의 이름이 <더 그랜드 파이널>이라니 더욱 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기 더 어려운 느낌이었다.

  꼭 이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작전에 투입된 대원들의 귀환 확률도 대단히 낮았다. 본디 고립 상황에서의 작전 수행을 전제로 하는 공수부대의 성격상 평균 생존 확률 자체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어서, 작전의 성패에 따라 '모 아니면 도' 격으로 귀환하는 것이 보통이기는 했지만, 그런 열악한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파일럿 에이 에이와 그의 애기 <더 그랜드 파이널>과 함께하였던 대원들의 무운이 정규 분포 안에 들었다고 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같은 해 8월 23일. 중위는 훌륭한 성적으로 9월 비행 및 낙하 훈련 안전 교육에 낙제를 맞았다. 그러나 합격했다. 페티 오핑턴 중사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처참하게 떨어져가는 고의 낙제율로 인해 합격자의 수가 모자라자 어거지 합격을 시켜버린 것이었다. 오! 주여! 그간 위험하다는 이유로 투입되지 않았던 서전트 하사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미친 놈조차 작전에 내보내야 할 정도로 전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다. 

  군종 신부이자 고소공포증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중위는 낙하산 부대원으로 9월 작전에 바로 투입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시칠리아에 주둔 중인 이탈리아 제 3 보병연대의 병참 기지를 폭격하고 배후를 침으로서 기반 시설을 무력화하겠다는, 또 하나의 무모한 계획이었다. 연대장이 부재중이고 부연대장이 치매 노인이며 장교 수십명의 수발을 이등병 소년 하나가 다 책임지고 있는 막장 5분 전 상황에서 과연 이런 계획은 누가 세워서 내리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에이레네 섬에도 가끔은 싱그러운 지중해의 바람이 불었다. 중위는 삼일 밤낮으로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보내준 것은 오직 따뜻하고 물기 서린 지중해 특유의 바람 뿐이었다. 

  '이제 내일이야.' 당장 지금이라도 그가 군종 장교라서 공수 부대 작전에 투입되면 안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주면 좋겠지만, 대전을 벌이고 있다는 세계는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였고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기적을 기대하기에도 너무 늦지 않았나 싶었다. 중위는 어윈 이등병을 불렀다. 연대장의 당번병이자 부연대장의 당번병이자 군의관의 당번병이자 리터넌트 대위의 당번병이자 새로운 군목의 당번병이기도 한 그 어린 소년 말이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는 이등병의 손을 굳게 잡고 당부했다.
- 그 동안 고마웠네. 몸 조심하고. 전쟁이 끝나면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이등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 안에서 여전히 휘발성 기억력에 시달리는 메이어 소령의 괴성이 들려왔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자넨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다음으로 고바야시 마루 군의관을 찾아갔다. 나름 군의관도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평소와는 태도가 달랐다.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고 웅얼거리며 말을 돌렸다.
- 사실 이제까지 우리는 연대장님이 만들어 놓은 조항과 규정과 편람과 양식에 준거하여 살아왔다네.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면 연대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 압니다. 연대장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걸.
- 미안하네. 자기 손주들 똥귀저기 갈아주는 문제에 대해서도 양식과 편람을 만들어 놓을 위인이니 어쩌겠나.
  문득 중위는 존 웨인 닮은 남자가 아기 기저귀를 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그래도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격납고는 부대의 오른쪽 끝에 있었다. 서둘러 지은 티가 너무 났는데, 그건 실제 서둘러 날림으로 지었기 때문이었다. 주변 경관이 워낙에 절경이라 마치 군대에게 강제 점령 당한 휴양지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 부분 역시 강점중인 휴양지인 것이 사실이기에 그리 보이는 것이었다. 중위는 에이 에이를 찾아갔다. 어차피 그는 수송기가 뜨고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미리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필요했다. 에이브러햄 알바레즈 하사. 에이 에이가 중위의 마지막 카드였다.

 

*

 

  에이 에이는 쾌활한 미소와 까무잡잡한 피부가 인상적인 덩치 좋은 남자였다. 부대를 말아 먹을 작전 성공률을 기록 중이면서도 매사에 긍정적인 이 파일럿은 어울리지 않게 로맨틱한 구석 마저 있어서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약혼자와 그리스의 코르푸 섬에 가서 살겠다고. 그 곳의 해변은 절경이라는 말 외엔 다른 표현이 허락되지 않을만큼 아름다워서 평생 살아도 지겹지 않을 정도라고.
- 그럴 겁니다. 중위님. 아름다운 집을 짓고 평생 그 곳에 눌러 살 겁니다.
  아마 그때마다 버카충, 버카충 하며 폭죽 터지듯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로부터 바람에 실려온, 그들의 현실 도피를 막는 소리였다.

  중위가 자신의 사면초가 상황과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에이 에이 역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워낙에 긍정적인 성품 덕분인지 대강 이해가는 척 하고 중위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배짱 좋게 승낙했다. 절박했던 중위의 입장에선 그 덩치 큰 사내가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 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중위님,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아십니까?
- 징집되거나 뭐 그래서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사실 여기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전쟁 중인데.
-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 경력이 없으면 취직이 어렵다더군요. 그런데 취직을 해야 경력이 쌓이죠. 그러니 취직을 하지 못하므로 경력을 쌓을 수 없고 그럼 결국 경력자가 아니므로 취직 자리를 구할 수가 없게 되는 개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죠.
- 몰아붙일 의도는 아니네만…… 하려는 말이 지금 상황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가?
- 아니요. 그냥 그렇다고요. 솔직히 중위님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진 않습니다만,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이는 무한 루프에 대해서는 저도 경험한 바가 있단 말입니다.
  에이 에이는 배짱 좋게 웃었다.

-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중위님. 전쟁을 끝내버리면 됩니다. 그럼 중위님도 어울리지 않는 군복을 벗고 시골 마을 성당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저도 약혼자와 그리스 코르푸 섬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거고요.
- 기특한 생각이구만.
- 농담 아닙니다. 중위님. 정말 저랑 같이 전쟁을 끝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자고요. 당장 오늘 밤에라도 날아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머리 위에 불벼락을 내립시다. 그럼 일본 놈들은 자동으로 항복할 겁니다.
  중위는 기운 없이 웃어보였다. 그 한 없는 낙천적 태도가 부러워서였다.

 

*

 

  9월 7일. 은밀하고도 요란하게 작전은 시작되었다. <더 그랜드 파이널>은 20명의 공수 대원들을 태우고 적진 상공 위를 비행하였고 귀청 떨어질 듯한 고사포 소리가 버카충, 버카충, 하늘을 찢었다. 파일럿 에이 에이는 요령껏 위험을 피해나가며 낙하 위치로 접근하였고 공수 부대원들은 서전트 하사의 지휘 아래 한 명씩 한 명씩 공중으로 뛰어내렸다. 흡사 절벽 끝으로 돌진하는 레밍즈의 무리를 보는 것 같았다. 18명의 낙하에 이어 마지막으로 뛰어 내리려던 서전트 하사는 한 명이 덜 낙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꼴 보기 싫은 놈. 구석에서 병신처럼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채플린 중위에게 다가가 하사는 악을 썼다.
- 중위님, 같이 가셔야 합니다.
  하사는 다시 한 번 군대의 계급 체계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자기 낙하산도 제대로 못 매는 이런 무기력한 인간을 '중위님'이라고 불러야 하다니! 아마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그 소문은 진짜일 것이다.
- 중위님이 고소 공포증이 있으시답니다! 하사님!

  에이 에이의 말이었다. 버카충, 버카충,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가 뭔가에 맞아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촉박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가는 고사포의 먹이감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하사는 중위를 끌어 안았다. 그 정도 곡예는 격추 당하는 상황에 비하면 위험한 것도 아니리라. 하나, 둘, 셋! 하사는 몸을 날렸고 순간적인 충격과 함께 뭔가 얼얼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 혼자 낙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위는 낚시줄에 묶여 <그랜드 파이널>기의 몸체에 단단히 묶인 상태였다. 덕분에 하사와 한 몸이 되어 낙하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넋이 빠져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에이 에이는 대 자로 뻗어버린 중위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고소공포증이 있기는 한 듯한데? 연기라기에는 너무 리얼하잖아? 그렇다면 군종 신부라는 주장도 사실일까? 그런데 군종 장교가 왜 비행 및 낙하 훈련을 받아야 하지? 훈련을 받았다는 건 군종 장교가 아니었단 뜻인가? 버카충, 버카충, 날아오는 포탄을 날렵하게 피해가며 에이 에이는 정말이지 지금이야말로 신의 가호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느꼈다. 젠장! 진작에 믿음을 좀 가질 걸.'

- 중위님! 중위님은 종교가 있습니까? 
  그 말이 스스로 생각해도 적잖이 우스웠던지 매사에 낙천적인 파일럿은 상황의 심각성조차 잊은 채 배를 잡고 껄껄껄 웃고 말았다.


(2013년 12월)

# Inspired by Joseph H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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