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더 이클립스 프로젝트
낙농콩단

183. 더 이클립스 프로젝트

by 김영준 (James Kim)

 

  남자는 지하철에 오르던 순간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낡고 허름한 차림새와 늘어 붙어 떡진 머리, 무엇보다도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몽롱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누군가 남자의 눈을 깊숙이,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 볼 생각을 했더라면 그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음에 놀랐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누구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쳐다보지도 말고, 신경 쓰지도 말아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피해 다른 칸으로 옮겨가라.' 이제까지 살아오며 축적된 경험은 그들에게 이런 진실된 충고를 건네고 있었다. 남자는 취객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어 비틀거리면서 주먹으로 닫힌 문을 건드렸다. 처음에는 천천히, 마치 도미노의 마지막 조각을 놓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다가가 맞닿는 순간에 뒤로 물러나왔다. 다음으로는 조금 빨리, 쾅. 이때부터는 건드린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분명히 부서져라 문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조금 더 빨리, 콰광. 그때마다  마찰과 충격이 빚어내는 파열음은 점점 더 커졌고 사람들의 이목도 점점 더 집중되었다. 빠르게 불안이 전염되었다. 아무래도 짜증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겐지 누구도 나서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이윽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방에서 불을 끄면 달이 보여요’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 내 방에서 불을 끄면 달이 보여요.
내 방에서 불을 끄면 달이 보여요.
하지만 불을 켜면 나는 없어요.
하지만 불을 켜면 나는 없어요.
뚜루 뚜루 뚜루뚜. 뚜루 뚜루 뚜루뚜. ♬

 

  이 노래가 처음 취입되었던 2037년 9월. ‘음향오행'의 사장은 처음 가사를 받아보고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뭐야, 이거 가사가 왜 이래? 지하철 스크린 쿼터 문짝에 붙어있는 걸 베껴오기라도 한 거야?
  그 말에 엔지니어는 이렇게 대꾸했다고.
- 스크린 쿼터가 아니라 스크린 도어 아닙니까?

 

*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2039년. 그리고 정확히 9월 하고도 1일. 인류는 파괴와 살육의 역사에 획기적 반전이 될 순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전쟁으로부터 소중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막아보자, 라는 아주 오래되고 당연한 생각이 드디어 구체적 실천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주요국 정상들, 문제국 정상들, 구색용으로 차출된 제 3세계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서를 교환하고 굳게 악수를 나누며 평화를 다짐했다. 순간 서로를 바라보며 하얀 이, 덜 하얀 이, 유난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들의 사진은 주요 언론사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 세계 미디어로 전송되었는데, 그 평화롭기 짝이 없는 가장된 미소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공존과 공영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 흔히들 전쟁을 빼놓고는 인류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맹목적으로 전쟁을 추종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감히 선언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은 이 행성 위의 단 한 사람도 전쟁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은  이 행성 위에서 단 한 닢의 동전도 전쟁으로 손실되거나 낭비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은 이 행성 위의 어떤 문화 유산도 전쟁으로 유실되거나 파괴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더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이클립스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을 똑같이 옮겨놓은 사이버 스페이스였다. 산이 있는 곳에 산이 있었고 물이 있는 곳에 물이 흘렀다. 야생이 숨 쉬는 곳에 야생이 있었고 문명이 자리할 곳에 문명이 있었다. 현실의 그 산이 아니고 현실의 그 물이 아닐지언정 사용자에게 현실과 동등한 감각을 제공해 주었다. 단지 좌우만 반대일 뿐이었다. 지구의 거울상, 혹은 또 다른 지구. 원숙 단계에 이른 가상현실 기술로 구현된 유사 이래 최대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공간을 섬세하게 구현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관광산업과 결부되어 왔다. 이클립스 안에는 뉴욕도 있었고 런던도 있었고 파리도 있었다. 콜로세움도 있었고 스핑크스도 있었고 타지마할도 있었다. 여행 다닐만한 시간이 없는 바쁜 직장인들에게 이클립스로 떠나는 가상의 여행은 상당히 매력적인 서비스였다. 헬멧을 쓰고 크래들에 누운 채로 약간의 약물과 약간의 최면과 약간의 전기 충격의 도움만 받으면 그들은 지구(물론 실제 지구가 아닌 지구와 똑같이 생긴 가상의 지구다) 어느 곳으로든 날아갈 수 있었다. 싸고 간편하고 편리했다. 짧게 말해 경제적이었다. 이클립스의 세계는 지구와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거나 종종 실제 지구보다 나았다. 보다 만족도 높은 여행을 제공하기 위해 개발자들은 점점 더 정밀한 지구를 이클립스 위에서 구현하고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구의 물리가 이클립스에서도 동등히 적용되기 시작했다. 기억과 경험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가상공간의 확장과 연동으로 한 개인의 가상 경험과 또 다른 개인의 가상 경험이 중첩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비디오 게임으로 치자면 싱글 플레이만 가능하던 시절에서 멀티 플레이가 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다.


  관광 산업에서 미덕은 보존이다. 현실의 명물이 손상되어도 이클립스 안의 명물은 멀쩡히 그대로일 수 있었다. 사람들의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무리 이클립스가 완벽하더라도 어차피 신기루 같은 가상의 세계가 아닌가.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그 안에만 남아있게 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아름다운 것들을 현실에 남기고 그 안에는 더럽고 추한 것들을 넣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모여 구체화되어 이른바 '판도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현실을 망가뜨리지 않고" 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여기에 반응하여 각 국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웠고 그 결과 불과 5년 만에 국제 연합의 주도 아래 세계 193개국이 참여하여 이클립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2039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물론 단지민심의 향방만으로 이런 변화가 도래했다는 것은 다소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실제로는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계산기를 두드린 사람들이 있었다. 월가의 검은 손들과 기업가들, 석유 재벌들과 군수업자들, 각 국 주요 정보기관과 곳곳의 무장세력에 이르기까지 이해관계가 고르게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사실 전쟁 장사는 관광 장사보다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업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사안의 일이 순조로이 진행되었을 리 만무했다. 음모론자들의 말처럼 프리 메이슨나 시온 수도회가 관여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일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관광 산업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대신 파괴와 살육의 아이콘들이 이클립스 안의 세계로 맞트레이드되었다. 현실의 탱크는 해체되어 건설용 자재로 사용되었고 대신 이클립스 안에서 가상의 탱크가 만들어졌다. 현실의 총과 칼은 해체되어 삽과 망치가 되었고 대신 이클립스 안에서 가상의 총과 가상의 칼이 지원되었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이클립스 센터가 세워졌고 그 상징은 비둘기로 정해졌다.

 

*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지하철에서 행패를 부리던 남자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 남자는 이클립스가 낳은 괴물이요 변종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낳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클립스의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클립스 안에서 그는 연합군의 하사였다. 어떻게 시작된 전쟁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편 먹은 나라들은 연합군이라고 하는지도 헛갈렸다. 언제부턴가 초등학생들 쌈질마냥 하루가 다르게 니 편 내 편이 바뀌었기에 그렇다. 남자는 아테네 방어선에 있었다. 현실의 아테네는 평화로웠지만 그 거울 속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남자는 그리스 국립 고고학 박물관 혈전에서 폭탄 파편을 맞아 오른쪽 다리가 날아갔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는 고통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건 환각일 뿐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그는 멀쩡히 두 다리를 땅에 디디고 설 수 있었다. 두 다리로 걸을 수도 있었다. 살도 뼈도 신경도 감각도 온전했다. 하지만 그는 오른쪽 다리를 느낄 수 없었다. 눈에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지만 목발을 사용했다. 당연히 통증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없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두려워했다. 남아 덜렁거리는 넓적다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릎이나 종아리나 발목에서 뭔가가 느껴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환상통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찾아가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약간의 약물과 약간의 최면과 약간의 전기 충격이 인위적 조합을 이루어 그의 뇌에 깊숙하게 남긴 상처는 2040년대 정신의학이 보듬을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이클립스 안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꼈다. 이클립스 안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이클립스 안 가상의 그는 여전히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런 그를 써주겠다는 군대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전쟁이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에도.

 

  이렇듯 전쟁은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평화라기는 조금 멋쩍었다. 하긴 이클립스의 등장으로 전쟁으로부터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했지, 전쟁 그 자체를 막는 길이 열렸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땅을 사랑하는 일'을 한 단어로 '투기'라 하지 않는 것처럼 '인명과 재산을 사랑하는 일'을 한 단어로 '평화'라고 하지 않는가 보다. 과거 톨스토이 시대에 말하던 '평화'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여전히 크고 작은 전쟁은 계속되는 중이었다. 단지 지구 위에서가 아니라 지구의 거울상인 이클립스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단지 더 이상 다치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없을 뿐이다. 가상의 자아가 다치고 가상의 자아가 죽을 뿐이다. 단지 더 이상 파괴되는 사회도 주저앉는 건물도 없을 뿐이다. 가상의 사회가 마비되고 가상의 건물이 붕괴할 뿐이다. 단지 더 이상은 현실의 숫자로 피해액을 추산할 수 없을 뿐이다. 현실의 사회는 전쟁과 무관하게 꾸역꾸역 돌아갔고 오히려 그 덕에 경제가 탄력을 받는 경우는 월등히 많아졌다. 적절한 전쟁이 있어야 경제에 기름칠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했다. 역사가 증명하는 부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클립스의 등장 이후 오히려 더 많은 전쟁이 더 사소한 이유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점점 그것에 무감해져 갔다. 이클립스 안에서의 전쟁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생활 터전을 파괴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전해지는 전쟁 소식은 아주 잘 만들어진 하이 퀄리티 비디오 게임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혹은 그날 있었던 스포츠 경기의 다이제스트 소식 같은 느낌을 주었다. 덕분에 이제 이런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비겁한 평화론자가 철없는 주전론자보다 낫다.'

 

*

 

  남자와 같은 사람들은 이 시절 어느 곳에나 있었다. 어디서든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겉보기에 멀쩡했으나 마음이 망가져버린 상태였다. 하나 그들 스스로는 마음이 아니라 다른 곳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팔이나 다리나 눈이나 귀를 말이다. 그리고는 그리워했다. 약간의 약물과 약간의 최면과 약간의 전기 충격을. 비관적인 현실과 충족되지 않는 욕구로 인해 그들은 사회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정부가 사회 질서 유지의 차원에서 이들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상황은 더욱 급격하게 나빠졌다. 체포되거나 사살되는 숫자가 늘어났다. 그들과 달리 이클립스 안에서 순조롭고 화려하게 공적을 세우고 무사히 현실로 돌아온 전쟁 영웅들에게 그 꼴이 마뜩잖았을 리 없다. 때문에 굴다리 아래나 천변 둑에, 혹은 폐기된 쓰레기장의 옆에 컨테이너 박스로 가건물을 세우고 전우회를 조직하여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밥값도 못하는 실패자 놈들은 자기들 손으로 청소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남자 또한 그들의 타겟이었다. 사실 그날도 지하철에 오르기 전까지 전우회의 맹렬한 추격을 받았었다. 재빨리 인파 속으로 휩쓸리지 않았다면 크게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남자의 정신은 아주 가끔씩만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한심한 처지를 한탄하며 눈물을 안주삼아 술을 퍼마셨다. 물론 술을 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시 정신을 잃게 되었기에 어차피 대부분의 시간을 맛이 간 상태로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기는 했다.

 

  남자와 같은 사람들은 이클립스 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클립스 안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사제 헬멧과 사제 크래들을 구했다. 사제 헬멧은 스쿠터 헬멧을 개조한 것이었고 사제 크래들은 착탈식 히노끼 욕조를 개조한 것이었다. 모두 마피아들이 법망을 피해 가상공간에서의 암거래를 위해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당연히 불법이었다. 약간의 약물을 구할 수 있었다. 약간의 최면은 훨씬 쉬웠다. 약간의 전기 충격도 위험하지만 가능은 했다. 관건은 배합비였다. 어떤 사람들은 양을 잘 맞추지 못해 이클립스가 아니라 사후세계로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물론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약물 중독, 감전, 심지어 과다 최면으로 죽기도 했다. 그래서 배합비 또한 자신 없으면 마피아를 통해서 그들의 레서피를 얻어 쓰는 것이 최고였다. 이클립스 내 블랙마켓에 밥줄이 달려 있는 그들은 자주 빈번하게 불법으로 이클립스를 들락거려야 했던 만큼 노하우가 있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경험한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 소굴로 찾아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

 

  히스토리 채널에서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아인슈타인이 말한다.

- 뜨거운 철판 위에 앉아있으면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지지요. 그러나 예쁜 여자의 무릎 위에 앉아있으면 1시간이 1초에 불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게 바로 상대성이죠.

 

*

 

  남자가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은 하늘 위를 떠가는 구름이었다. 그러니까, 이클립스 안에서의 마지막 기억 말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구름을 보며 정신을 잃었다. 현실의 그는 크래들에 누워 삼일 밤 삼일 낮은 꼬박 잠든 채로 있었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온몸의 아우성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전신이 골고루 아팠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오른쪽 다리였다. 현실의 그는 두 다리가 멀쩡했다. 이클립스 안의 그는 다리 하나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남자와 같은 사람들은 다시 이클립스로 들어가길 고집하는 걸까? 당사자가 아니고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기는 했다.

 

  남자는 36번 국도의 세 번째 주유소에서 차를 멈췄다.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사고 싸구려 탄산수를 마신 다음에 더러운 공용 화장실에 갈기다시피 소변을 보고 나왔다. 싸구려 백열등에 눈이 부셨다. 구식 롤러브레이드를 탄 주유소 직원이 보였다. 사무실 계산대에서 주유기까지 열 걸음도 되지 않을 작은 곳에서 롤러브레이드라니! 게다가 이런 촌구석 주유소에 그 정도의 기동력이 필요할 만큼 손님이 많이 몰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낡아 갈라진 아스팔트바닥을 탈탈거리며 직원이 그에게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실상 직원도 그게 전부요 손님도 그가 전부인 듯 보이기도 했다. 주유소 로고가 박힌 파란 모자 아래에서 직원의 눈이 빛났다. 아름다운 청록색이었다.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있는 것이 잘해야 스무 살을 갓 넘기게 보였다. 이 어린 소년일까? 이클립스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사람이? 암시장의 정보가 틀렸다면 상당히 낭패스러운 일이 될 터였다. 법망 안에서 용인되지 않는 것들을 거래하기에 암시장이었고 댓가는 그만큼 혹독했다. 채 아물지 않은 옆구리가 쓰렸다. 남자는 신장이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 가득 넣어줘. 달이 찰만큼 가득 말고 달을 가릴 만큼 가득.

  그 암호문이 소년의 표정을 야릇하게 만들었다. 비틀거리며 입 꼬리가 올라갔다.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금방 울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었다.

- 19불 99센트에요.

  소년은 목소리도 어렸다. 변성기마저 지나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기름은 꿀꿀거리며 남자의 낡은 머스탱을 채웠다. 소년은 말이 없었다. 남자가 도리어 조급해졌다. 뭐지? 왜 반응이 없지? 암호문은 맞는 것이었나? 방금 전의 그 표정은? 이 아이가 뭔가 알고 있긴 한 걸까? 참다못해 남자는 고개를 창문 밖으로 들이밀었다. 매캐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 이봐. 꼬마야. 이 시간에는 너밖에 없니?
- 맞아요. 항상 저 혼자예요.
- 그럼 네가 맞겠구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네가, 뭐랄까…… 방법을 안다고 들었는데.
  소년이 고갤 들었다.
- 무슨 방법을요?
- 이클립스에…… 들어가는 방법 말이야.
- 합법적으로요? 비합법적으로요?
  답은 너무 간단했다.
- 합법적으로 가는 방법을 촌구석 주유소에서 찾을 리가 있겠나.

 

  하지만 실소한 건 소년 쪽이었다. 당황스럽다 못해 웃음이 나온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무실로 탈탈탈 굴러갔다가 돌아왔다. 싸구려 빅 볼펜과 계산서를 내밀었다. 마치 아무 이야기도 없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남자가 먼저 묻고야 말았다.
- 어떻게 안되겠나? 난 꼭 가야 하는데.
- 왜죠? 왜 가고 싶어 하는 거죠? 
-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찾아야 할 것이 그 안에 있는 것 같아.
  소년이 키득거렸다.
- 오른쪽 다리. 이클립스에서 다쳐서 절단했었군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하지만 여기가 현실이에요. 아저씬 여기 있고요. 아저씨 다리도 여기 있어요. 멀쩡하게 붙어 있고요. 아무 문제없다는 데 제 한 달 치 시급을 걸죠.
- 모르겠어.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
-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어요. 많은 전쟁 참가자들이 겪는 일이죠. 극복하셔야 할 거예요.
- 가고 싶어. 가야만 해. 
- 그럴 가치가 없어요. 저한테 그런 부탁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 아니 의미가 있어. 그 안에 의미가 있어.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서 지폐며 동전이며 마구 꺼냈다.
- 돈은 얼마든지 낼께.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빨리 싸인이나 해주세요.
  남자가 사인한 영수증의 반쪽을 받아 들고 소년은 가버렸다. 심야의 적막한 주유소에는 바쁠 일도 없겠지만.
- 내가 엉뚱한 곳을 찾아온 건 아니야? 꼬마, 너 진짜 들어갈 수는 있긴 한거야?
  남자가 소리쳤다. 
- 영수증 뒷면을 봐요!
  꼬마가 대꾸했다. 

 

  영수증 뒷면에는 낡은 흑백 폴라로이드 사진이 흐릿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흙먼지가 자욱했고 멀쩡하게 보이는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좌우가 반대였다. 현실의 오른쪽이 사진 속의 왼쪽이었고 사진 속의 오른쪽은 현실의 왼쪽이었다. 이클립스 안이 틀림없었다. 사진은 고약할 정도로 초점이 엇나간 상태였고 결정적으로 흙바닥에 널부러진 사람의 몸뚱이를 피사체로 선택하고 있었다. 군복을 입고 총을 잃어버린 백지장처럼 하얀 사람믈의 파손된 몸뚱이를.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이클립스 안에서 찍어온 사진이기는 했다. 이클립스 평화조약이 발효된 이후에 현실에서는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꼬마가 직접 찍었든, 누가 찍어다줬든 그 사람에게 연결되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

 

  남자는 사제 헬멧을 쓰고 사제 크래들에 누웠다. 늘 불안한 느낌을 주기에 사제는 사제다. 이것들에 목숨을 맡기는 순간마다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옆구리가 아팠다. 결국 암시장에서 얻은 정보는 신장 하나의 값어치를 하지 못했던 셈이다. 남자를 다시 구식 사제 크래들에 눕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17차 시도.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벌써 열일곱 번째다. 앞서 열여섯 번의 실패가 있었다는 뜻이다. 남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다. 약간의 약물도, 약간의 최면도, 약간의 전기 충격마저 경험해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클립스 안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왜일까. 필요한 모든 조합이 다 갖춰졌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망이 깊어진 만큼 영혼도 말라 붙어갔다.

 

  붕 뜨는 기분. 조금만 더 떠오르면 뭔가가 나타나 자신을 인도해 줄 것만 같은 아쉬움. 항상 그 정도 선에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젠장! 그는 기억한다. 이클립스 안으로 파병되어 들어가던 그날의 느낌을. 그런 느낌들을 정성적 데이터와 정량적 수치로 만들어 기록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의 이 지극히 개인적인 시도에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과잉이었는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시행착오는 주관적인 결과만을 남겼고 시간은 그나마도 쓸어내려가 분석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너무도 막연했다. 약물? 최면? 전압? 세 가지 중 무엇을 손대야 하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레서피를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아는 사람 건너 건너 입수한 것도 있었고 꽤 비싼 댓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도 있었다. 그중의 단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남자는 좀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늘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 이봐요. 젊은 양반, 괜찮아요?
  뚱뚱한 백발의 노부인이 그를 잡고 흔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깨달았다. 지하철이었군. 맞아.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어. 어디로? 새로운 레서피를 얻으러? 아니면 노가다판을 뛰러?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 갑자기 벽에 머리를 쿵쿵 들이박더니 노래까지 부르더라고. 난 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하구려. 
  멀쩡하지. 나는 언제나 멀쩡해. 지금 이 현실이 멀쩡하지 않을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남자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이클립스 전우회. 남자와 같은 마음의 패잔병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자랑스러운 제대 군인들의 집단. 어떻게 알았는지 또 귀신같이 찾아낸 것이었다. 남자는 서서히 몸을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 다친 데 없어 다행이라우. 젊은 양반이 많이 피곤한가 보네. 압축 비타민 같은 걸 드셔보는 건 어떠우. 우리 딸이 A-3 지구에서 약국을 하는데…   
  노부인은 입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터질듯한 블라우스가 좌우로 출렁거렸다. 남자는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기회를 살폈다. 안내 방송에 집중했고 잦아드는 전동차의 진동을 느끼려고 애썼다. 오른쪽? 왼쪽? 열리는 방향의 문을 바라보지 않는 척했다. 그러다 지하철이 역에 멈추었을 때 (그 역이 어느 노선의 어느 역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리고 뛰었다. 전우회 놈들이 따라 내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인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다리가 아팠다. 그가 없다고 생각하는 오른쪽 다리가 아팠다. 그럼에도 달릴 수 있었고 오른쪽으로 쓰러지지도 않았다. 미칠 노릇이군. 난 없는 다리로 뛰고 있어.

 

  이제는 안전하다는 예감이 들었을 때 남자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역의 이름을 올려다 보았다. 유클리드 애비뉴(Euclid Avenue). 13-8 라인의 역으로 그의 집에서 열다섯 정거장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너무 멀리 왔나? 하긴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더 오고 덜 오고를 떠나서 그는 지금 가야할 곳을 몰랐으니까.

 

(2014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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