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호모 누메리쿠스
by 김영준 (James Kim)공문도(孔紋導)은 데스크로 다가가 마그네틱 카드를 건네었다. 권태감으로 흠뻑 드레싱이 된 여직원은 사무적으로 카드를 받아 들더니 아무 말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쭈삣거리고 있노라니, 고개를 쳐들어 가보라고 눈짓을 한다. 하는 수 없이 돌아 나오지만 마음은 편치가 않다. 지난해 10월, 문도는 딤섬그룹 - 화교계 다국적 기업이다 - 의 정기 사원모집에 지원하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마그네틱 카드 한 장을 건네고 돌아서 나왔다.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연락이 없어 며칠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을 때, 그들은 -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자동 응답기는 이렇게 말했다.
귀하께서는 아쉽게 탈락하셨음을 통보 드립니다.
비록 이번엔 인연의 끈이 닿지 않았지만, 저희 딤섬그룹에
귀하께서 보여주신 관심은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귀하의 무궁한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건승(健勝), 좋아하고 자빠졌네. 이런 망할 놈의 되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너네 회사에 들어가 평생 딤섬이나 만들고 만두나 튀길 성 싶으냐? 하고 문도는 고래고래 꽥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물론 자동 응답기에 대고 그런 소리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한편으로는 마음마저 편치 않았는데 역시 평생 딤섬이나 만들고 만두를 튀길지언정, 취업은 되는 게 되지 않는 것보다 좋은 법이기 때문이다. 당시 충격을 받은 문도는 곰의 쓸개를 씹어가면서 절치부심했다. 당시 그가 씹은 것이 정말 곰의 쓸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말 그것이 그거라면 아마 그는 야생동물 보호법에 의해 체포되었을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를 꼭꼭 씹었단다. 곰의 쓸개인지, 오징어인지, 문어인지, 쥐포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짐했단다. 다시는 이런 수모를 받지 않겠다고, 딤섬보다 훨씬 고상한 걸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그때 그의 나이 스물 하고도 여덟,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그의 카드에 기록된 그의 능력은 평균 57점이었다. 겨우 57점.
*
"오십칠 점이라구요?" 문도는 동사무소에서 카드를 갱신하던 날 펄쩍 뛰었다. 오십칠점이 말이 되냐. 육십 점 만점도 아니고 칠십 점 만 점도 아니고 백점 만점인데. 백점 만점에 오십칠 점이면 백분율로는 오십칠 퍼센트. 전국 상위 삼십 퍼센트에도 들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이야기렸다. 그게 말이 되냐는 말이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영어학원에 가서 한국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는 외국인 선생과 쑤알라 쑤알라거린지가 벌써 햇수로 2년이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토익 문제와 토플 문제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학원이 끝나면 곧바로 도서관에 갔다. 속이라고는 당근과 단무지, 그리고 시금치 밖에 들지 않은 김밥을 한 줄을 입에 물고 전력을 투구하여 책을 파고들었다. 무조건 암기하는 것이 그의 비법 아닌 비법이었는데, 이는 순전히 국민학교 때 애국가와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던 버릇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 페이지 한 바닥과 뒷 페이지 한 바닥을 다 외우면 기념 삼아 뜯어먹었다. 흑염소처럼 종이를 질겅질겅 씹어 먹고 있으면 도서관 앞자리 사람, 옆 자리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눈치를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온 신경을 한데 집중하여 다음 페이지를 외웠다. 가끔은 고향에서 어머니가 달여서 보내준 흑염소 엑기스를 뜯어 그 검고 찐득찐득한 액체를 꿀떡꿀떡 마셨다. 솔직히 맛은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이 되면 중국어 학원에 갔다. 중국어가 앞으로 뜬댄다, 라는 소문이 돌면서 중국어 학원은 언제부턴가 북새통이었다. 우아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중국말의 억양으로 인해 학원은 언제나 도떼기시장 같았다. 그런 아수라장에서 중국말을 배웠다. 투자한 돈이 얼마며 투자한 시간이 얼마 인다. 돈과 시간까지 알아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요컨대 나름대로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능력은 평균 오십칠 점이란다.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내용 증명서를 뽑아주세요. 정말 믿을 수가 없다니까요." 문도의 요구에 동사무소 직원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도는 얼굴에 힘을 있는 대로 주고 '당장 해결해주지 않으면 귀찮아 죽기 이전에 내가 널 가만 두지 않겠다'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직원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문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십칠 점'이라는 점수가 어떻게 계산되어 나온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깊숙한 곳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사람이 여기 책임자렸다. 문도는 소리를 질렀다. "저기 이봐요."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직원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원망으로 가득 담긴 눈을 하고서.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진작에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얼마나 좋아. 하여간 이 놈의 공무원들은 한 번에 말을 들어먹는 법이…
성명 (나이) | 인성 | 지성 | 신성 | 감성 | 창의성 |
공문도 (28) | 52 | 66 | 58 | 42 | 67 |
인성(人性)이 떨어졌다. 오십이 점이라니. 작년보다 십 점이 넘게 떨어졌다. 죽어라고 책을 뜯어먹은 그간의 노력으로 지성(知性)은 오점이 올랐다. 오점이 오르고 십점이 떨어졌으니 오점 손해다. 손해보는 장사다. 한편 그 와중에 감성(感性)이 육점 떨어지고 창의성이 일점 올랐다. 육점 빼기 일점은 오점, 여기서도 역시 오점이 빠졌다. 신성(神性)은 그대로다. 주일마다 교회에 꼬박꼬박 나갔기 때문일까. 결론은 작년보다 총점 십점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고로 평균은 이점 떨어지는 게 맞다. 오십구 점에서 오십칠 점으로. 동시에 문도의 인생도 오십칠 점짜리에서 오십이 점짜리로 격하되었다. 아까는 세부항목을 뽑아보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어째 보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주눅이 들었다. 축 처진 어깨를 질질 끌며 동사무소를 나가는데 어째 아까 그 까탈스러운 직원이 비웃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자.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평균 57점짜리 존재는 아니다. 어떤 이들은 평균 70점이고, 어떤 이들은 평균 80점이다. 입이 열 개가 있은들 오십칠 점짜리 인생이 할 말이 있으련만, 그래도 세상은 참 공평하지 못했다. 불공평했다. 인성, 지성, 신성, 감성, 창의성, 최소한 어느거 하나는 타고나야 할 것이 아니냐. 모두 고만고만한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든 올려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으니, 하나가 올라가면 다른 하나가 떨어지고, 다른 하나를 다시 올려놓으면 처음의 그 하나가 다시 떨어진다. 아주 환장할 노릇이다. 인성이 개떡 같으면 지성이라도 풍부하던가 (물론 그래서야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인성이라도 가득 들어차있던가 (물론 그래서야 먹고 살기 참 고단할 것이다). 둘 다 없으면 신성이라도 충만하던가. 차라리 성직자의 길로 나서 영혼이라도 구원받도록. 그런데 문도에게는 어느 하나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인성은 오십이, 지성은 육십육, 신성은 오십팔, 감성은 사십이, 창의성은 육십칠, 이 사회의 암묵적 커트라인인 칠십을 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전국 상위 30퍼센트에 포함될 만한 능력이 하나도 없었다. 상위 30퍼센트? 요즘은 ‘20대 80의 사회’니 뭐니 하는 말까지 유행하기까지 하더라. 맨 꼭대기의 20퍼센트에 드는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마당에 평균 오십칠. 그러니까 만두 튀기는 회사조차 들어가기조차 수월하지가 않은 것이다.
*
"하긴 자기가 능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 문도가 동사무소에 다녀온 일을 들려주기가 무섭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화를 내려다가 꾸욱 눌러 참는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지난번에 서울역에서 말이야. 영하 13도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와중에서 앵벌이 꼬마가 껌 한 통만 사달라고 애원했던 거 기억나?" 글쎄… 그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한 통만 사달라고, 집에 병든 어머니가 약을 못 써 누워 계시다고, 딱 한 번만 도와달라고, 그렇게 울고 부는데도 매정하게 뿌리쳐 놓고?"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랬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다. 사람의 기억력이 유지되는 시간은 사건의 중요도에 비례하는 법이다. 아무리 그녀가 "그러니까 당신 인성은 오십칠 점도 과하지" 따위의 말은 한다고 해도.
문도와 그녀가 처음 만난 것은 서기(舒淇 - 홍콩배우 서기가 태어난 해부터) 168년 1월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먼 옛날에 인류가 사용하던 '기원 후'의 서기(西紀)로 따지자면 2144년에 해당할 것이었다. 그들은 68년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1월마다 동사무소에 가서 카드를 갱신하여 일 년간 달라진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인성, 지성, 신성, 감성, 창의성으로 나누어져 기록된 카드로, 지난 1년 동안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자신을 계발(啓發)하느냐에 따라서 매년마다 각각의 숫자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원리로 데이터가 축척되는지, 판정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지난 일 년을 어떻게 살았느냐, 의 영향이 -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여 점수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숨어 운다고 해도 산타할아버지가 귀신같이 알고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지 않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그와 수많은 그들의 모든 것은 기록되고 숫자로 변화되어 차곡차곡 기록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서기 168년과 서기 169년은 문도의 인생이 정점(頂點)을 치던 때였다. 그날 문도는 자신의 평균이 5점이나 올랐음을 확인하고 서기 168년을 헛되지 않게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른바 동(洞) 내 최고 수준의 상승폭이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적 정보이기 때문에 대개는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지만 매년 1월마다 가장 많이 능력이 오른 이의 이름과 상승폭은 공개되어 모두의 축하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 해의 왕관은 단연 문도의 것이었다. 일 년 만에 평균 5점이 올라간 인간이 된다는 것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같은 해 세상 어딘가에 평균 6점을 올린 대단한 사람이 있어 텔레비젼 인터뷰까지 했더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평균 1점 올리기도 힘든 세상에서 평균 5점이면 정말 대단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벗들이 몰려나와 그를 들어 올렸고 하늘 높이 헹가래를 쳤다. 그는 당시의 기분을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갔다가 사뿐히 내려와서 사람들의 팔 무더기에 안겼고, 다시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감을 반복하던 와중에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평균 4점을 향상한 그 해의 차점자였다. 그녀 역시 그녀의 벗과 가족들의 팔에 안겨 하늘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공중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거짓말 같지만, 그와 그녀는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헹가래 쳐지던 와중에 말이다. 어찌 되었건 서기 168년 1월은 그들에게 있어 인생 최고의 한때가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169년과 170년에도 꾸준히 능력을 올렸다. 현재 평균 69점으로 70점대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당시에는 몇 점 차이가 나지 않던 그녀와 문도의 간격은 어느새 12점으로 벌어졌다. 어쩌면 앞으로 더 벌어질 수도 있겠지. 문도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능력이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자 최근 들어 그녀는 다소 답답해하는 눈치였다. 오죽하면 결혼정보회사에 가서 데이터를 뽑아오자고도 했다. 요즘 들어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이 있다는 소문은 문도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이 전국 상위 몇 퍼센트짜리 남자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의 모든 것을 숫자로 만들어 설명하는 세상에 이력이 나 버렸는데 남녀의 사랑마저 숫자로 확인받아야 하다니. 그러나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원한다면 공평하도록 자신도 전국 상위 몇 퍼센트짜리 여자인지에 대한 확인 서류를 받아다가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서기 171년을 사는 많은 연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찾아 헤치고 모임을 반복하는 것처럼.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정보회사의 검사를 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투덜투덜거렸음은 물론이다.
이름 (나이) | 외모 | 인품 | 학벌 | 장래성 | 평균 |
공문도 (28) | 48 | 58 | 56 | 42 | 51 |
평균 51점이 나왔다. 전국에서 중간쯤 가는 남자라는 소리다. 이걸 받아든 문도의 그녀는 큰 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48점이라는 외모와 42점이라는 장래성이 그녀의 웃음을 유발한 결정적 요인이었는데 그나마 인품이 제일 양호하다는 사실도 그 웃음이 멈추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눈물이 쏙 빠지게 웃고 나서 그녀는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렇게라도 웃게 해줬으니 한번 더 기회를 줘야겠지?"라고 알듯 말듯한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었다. 평균 51점이면 차여도 할 말이 없는 마당에. 그녀가 떠난 벤치에 앉아 공문도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22세기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22세기 사람은 없다"라고.
*
모든 것을 점수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서기(舒淇 - 홍콩배우 서기가 태어난 해부터) 108년에 시작되었다. 지구 정복을 노리는 프록터 앤 갬블 사(社)은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을 프링글스의 짠맛에 중독시키는 음모를 수행하여 왔다. 그리고 그 결과 지구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맛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염분과 트랜스 지방에 중독되어 버린 사람들은 이제 웬만큼 짜서는 짠 줄도 모를 정도로 무감해졌다. 이제 뭘 해도 심심해져 버인 것이다. 심심함을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포유류의 서글픈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바로 자기와 다른 사람과 사사건건 비교하는 것이다. 비교? 어떻게? 역시 비교는 숫자일 때 더욱 간편하고 명확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그래서 마찬가지로 수치화된 다른 사람의 모든 것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고 싶어 하게 되었다. 프록터 앤 갬블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대대적으로 국제연합에 로비를 취했고, 파라미터리즘의 본령인 일본의 시뮬레이션 게임회사 코에이 사(社)와 가이낙스사(社)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45억 지구촌민 전체의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이에 대항하는 무리들을 머릿결이 손상없이 살아있게 하는 '팬틴', 세계 1위의 비듬 샴푸 '헤드&숄더', 비 오는 날에도 내 맘대로 되는 머리 '비달사순', 나를 아는 친구 '위스퍼', 뽀송뽀송한 아기 엉덩이 '큐티', 오늘도 기분이 좋다 '페브리즈', 놀라운 가격의 전동칫솔 '크레스트 스핀브러쉬'의 가격조절을 통해 제압하였다.
서기 133년 데이터베이스는 완성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포함되었다는 그것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째 파트는 일반적인 개인정보에 관한 것으로 각국의 허울 좋은 전자 정부와 이동통신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둘째 파트는 바로 능력 파라메터에 관한 것으로, 이를 올바로 측정하기 위해 수많은 심리학자, 교육학자, 문명학자, 수학자, 통계학자, 그리고 공무원들이 동원되었다. 두번째 파트의 능력 파라메터란 어떤 사람 갑이 살아온 이력에 기초하여 인성, 지성, 신성, 감성, 창의성의 다섯가지를 숫자로 매겨낸 것이었다. 숫자, 라는 것은 참 편리하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본능적으로 편리한 것을 따른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 놈의 파라메터에 기준하여 사람을 평가하기 시작했고 기준이 옮겨가자 모두의 노력도 함께 따라 옮겨가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처럼 그것도 카드로 만들면 더욱 편하지 않을까? 아마도 훨씬. 그래서 이처럼 모두가 마그네틱 카드를 하나씩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신용 카드는 돈이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만 이 카드에는 사람의 인생이 달려있다. 카드 한 장이면 어떤 사람 갑(甲)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공문도는 여직 그 벤치에 앉아있다. 그의 손에는 예의 그 마그네틱 카드가 오롯이 놓여있다. 일분 일초라도 아껴서 평균 57점짜리 인생을 벗어나야 하는 그가 밤늦도록 그리 멍하니 앉아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또다시 중얼거린다. "22세기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22세기 사람은 없다"라고. 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웃어 제낀다. "22세기라는 말은 누가 만든 것인가, 22이라는 숫자는 뭘 기준으로 정해진 것인가." 다시금 돌연 역정을 낸다.
흥!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지.
이십팔 세의 공문도는 품에서 가위를 꺼내 손 위의 마그네틱 카드를 반으로 자른다. 반으로 잘라진 그것을 다시 반으로 자르고 또 반으로 자른다. 두 조각은 다시 네 조각이 되고 여덟 조각이 된다. 더 작게 잘라야 속이 시원히 풀릴 성싶으나 일일이 자르기가 귀찮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신문지 한 장을 주워 여덟 조각으로 나누어진 카드를 쓸어 담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화르르 타오르는 그것을 바닥에 던져 놓는다. 그는 그것이 모두 타버려 재가 될 때까지 어디 한번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기로 한다.
(2004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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