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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 마지막 콩쿠르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4.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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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뭐가 어떻게 된거지?" “뭐지? 뭐가 어떻게 된거지?” 

헤이즐 너트(Hazel Nutt)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는 자신과 좌우가 반대인 또 다른 한 명의 20대 여성이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와인색 머리칼, 넓고 하얀 이마, 약간 겁이 많아보이는 커다란 눈, 끝이 뭉뚝하여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아했던 코, 그리고 자몽색 입술... 분명히 자신의 얼굴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거울 가까이 가져가 자신의 얼굴을 (마치 현미경 아래의 작고 낯선 생물을 관찰하듯이) 자세히 살펴보았다. 뒤이어 달력을 찾아 오늘의 날짜가 자기가 알고 있는 오늘이 맞는지 연과 월과 일을 꼼꼼하게 확인하였고,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진 낡고 손때 묻은 몰스킨 수첩을 꺼내어 넘겨가며 자신의 기억력을 테스트할만한 몇 가지 기억들을 더듬어 비교하여 보았다. 물론 이상한 느낌의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는데 그녀는 틀림없는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수첩 속 글씨의 필체 역시 그녀 자신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뭔가 달라졌다. 분명 뭔가 잘못되고야 만 것이다. 단 하룻밤 사이에 말이다.


*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바이올린계의 촉망받는 재원으로, 다음 세대를 짊어지고 나갈 유망주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녀는 신문이며 잡지마다 실렸던 기사들의 단어 하나 하나를 기억했고 기자회견이나 인터뷰 때보다 번쩍이던 카메라 플래쉬의 섬광과 뒤이은 잔상을 기억했다. 남들보다 다소 늦은 주니어 하이 1학년 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새삼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 역시 별 뜻 없이 잡았던 작고 날렵한 악기가 불과 5년 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국내 대회를 무서운 기세로 석권한 그녀는 스위스로 날아가 세계적인 바이올리스트 올라프 마이프렌자게이(Olav Myfriendsaregay)에게 사사를 받았다. 그리고 재작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3위를 했고, 작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녀는 2주 전 대협곡으로 날아왔다. 인생 최고의 도전을 위해.


  가스파로 디 살로 콩쿠르 (Gasparo da Salo Concours)


  호텔 창문 너머로 대협곡의 마른 바람에 펄럭거리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바탕은 붉은색이고 글씨는 흰색이다. 몇 회라는 문구가 없다는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콩쿠르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바이올린 콩쿠르. 이번 세기를 마무리하며 단 한 번. 그러니 만에 하나 다음 기회가 있다면 100년쯤 후일지도 모른다. 100년을 기다릴 수는 없는 재능있는 연주자들이 대협곡으로 달려왔다. 이 특별한 콩쿠르는 12월 29일부터 12월 31일까지 삼일동안 이루어지고 31일 밤에 최종 우승자가 가려진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영예는 새해 카운트 다운이 끝나며 해가 바뀌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특설 무대에서의 기념 공연이다. 이미 우승자와의 앙상블을 위해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정상급 연주자들이 줄줄이 며칠 전부터 대기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더없이 환상적인 공연이 될 것이고 우승자에게는 평생 다시 없을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승 트로피에 입맞추게 되는 그 혹은 그녀는 다음 세기를 이끌어 갈 빛나는 주인공이 되겠지.


  금세기의 12월 31일까지가 이전 세대의 것이었다면 바로 그 다음 1월 1일부터 펼쳐지는 세상은 새로운 세대의 것일테다. 헤이즐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제 겨우 스무살이었다. 그녀의 전성기는 아직 막을 올리지 않았고 아마도 새로운 시대에서야 펼쳐질 것이다. ‘모든 조건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어’ 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그것은 자만도 교만도 아니었다. 그녀가 최근 주요 메이져 콩쿠르에서 보여준 성과만을 놓고 보면 아주 허황된 꿈만은 아니었다. 3위와 2위를 차지할 수 있다면 거의 때는 무르익은 것이다. 어느날 1위에 올라서는 날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다. 주요 언론에서도 역시 그녀를 우승권에 있는 다섯명의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의 예감이 좋았다. 이런 종류의 일에 있어서 예감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 새로운 도전을 즐거운 맘으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약간의 긴장과 조금의 흥분을 애써 억누르면서. 그녀는 홀로 호텔방에서 크라이슬러나 생상스의 쾌활하고 밝은 곡을 연주했다. 적막한 공간을 부드럽고 아늑하게 채우는 선율 속에서 그녀는 상당히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좋은 예감. 컨디션이 좋을 때 나오는 미세한 징후들 (이를테면 항상 까다로웠던 박자가 정확하게 맞아들어가거나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변주에 스스로 놀란다거나 하는 것들)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내일 무대 위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바이올린처럼 활을 사용하는 악기에선 ‘활쓰기’가 특히 중요하다. 흔히 활쓰기의 3요소를 활의 속도, 활의 압력, 그리고 활의 위치로 꼽는데, 지난 밤 그녀의 연주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완벽하여 활의 속도와 압력, 그리고 위치가 한치의 낭비와 군더더기도 없을 더없이 효율적이었다. 그녀의 연주는 곡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돌았다. 더 없이 황홀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비발디와 비니압스키를 연달아 연주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청중이 없는 것이 심히 안타까울 정도의 우아하고 깔끔한 연주였다. 이대로 밤이 새고 해가 뜨도록 바이올린을 켜고 싶었다. 콩쿠르가 막을 올렸다가 막을 내릴 때까지.


*


  흔히들 바이올린은 음향학적으로 진화가 완성된 악기라고들 하지만 그 무한한 가능성을 끌어내어 쓰는 것은 전적으로 연주자에게 달렸다. 사실 연주자도 저격수와 비슷하다 (정말이다). 신체적 안정과 정신적 안정이 양립되어야 실력을 발휘할 수 있고 순간의 미세한 흔들림에도 결과를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적어도 콩쿠르 2주 내지 3주 전에 도착해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물론 언제나 그렇듯 예외도 있을 것이다)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이나 그 앞뒤의 복잡한 수속 과정에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아주 조금 예민해질 뿐이지만 그 차이가 빵! 과녁을 빗나가게 만든다. 특히 대협곡처럼 접근성이 좋지 않고 낯선 기후의 장소라면 더더욱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대협곡은, 특히 대협곡은 뭔가 이상했다. 신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미세하게 틀어지게끔 하는 묘한 기운을 지닌 듯 했다. 미적지근한 온도와 건조한 기후의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 때문인지, 아니면 붉은 암석으로 뒤덮힌 가파른 벼랑들의 장엄한 풍광 때문인지, 그 이유는 누구도 자신있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틀어짐의 정도는 어쩌면 2도, 많아야 3도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면 일을 그르치기에 결코 모자라지가 않다. 때문에 처음 며칠동안 그녀는 자기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요가나 명상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호흡을 조절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을 비슷한 처지의 콩쿠르 참여자들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또한 자기 암시를 통해서 실제 경연 상황에서의 압박에 대비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


  빛나는 재능이란 어쩌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 


  간밤에는 눈부셨지만 아침이 밝아올 무렵에는 이미 색이 바래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여느 날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떴을 뿐인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마음 속 깊고 깊은 곳의 은밀한 영역에서 생겨나고 자라나서 슬그머니 스며나와 몸을 적셨던 것이다. 무겁고 축축하게. 마치 간밤에 끙끙대며 써내려 간 연애편지를 다음날 아침 햇살을 맞으며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런 일이야 특별할 것도 없다. 연주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까닭없이 자신감이 떨어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순간이면 누구라도 현재를 회의하며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할 수도 있다. 문제는 하필 지금 그녀가 세기의 콩쿠르를 위해 대협곡에 와있고 오늘이 바로 최종심이 열리는 12월 31일이라는 사실이 되겠다. 


  그건 뭐랄까, '어젯밤처럼 완벽하게 해내긴 힘들거야' 정도의 생각이 아니었다. 지난 며칠의 본선 무대에서 그랬듯 ‘적당히 다음 단계에 올라갈 정도는 해낼 수 있을거야’ 정도도 아니었다. 어쩌면 완전히 생 초보마냥 바이올린을 전혀 다루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불길하고 고약했다. 아니, 그럴리가! 겨우 몇 시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그것도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잠이 들었는데.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헤이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악기를 찾았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바이올린을 다룰 때 마치 아기를 안고 어르는 것처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흔히 말하는 명가의 악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평생 바이올린을 만들어 온 이탈리아의 한 장인이 선물한 특별한 것이었다. 장인이 한 콩쿠르에서 우연히 그녀의 연주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장인의 바이올린은 소위 회자되는 명가의 명기들처럼 대단한 후광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좋은 재질의 나무로 오랫동안 숙성시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연주자라면 악기에 물들어 있는 정성스러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법이다.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진 앞판은 나뭇결이 생생하게 남아있었고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뒷판은 분명 15년 이상 자연 건조된 것이었다. 줄걸이판과 줄감개도 흑단이 아닌 장미나무였다. 두들겨보면 단단하고 속이 옹골차되 여백의 미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감각과 악기에 대한 감각은 함께 발달한다. 첫 눈에 헤이즐는 그 바이올린이 오직 자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 단 하나의 악기임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만족감이었다. 악기를 안는 순간의 느낌이 첼로나 비올라에 비해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물론 첼리스트들이나 비올리스트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리라). 마치 오직 바이올린만이 처음부터 연주자의 심리적 요소를 감안하여 설계한 악기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그녀는 가끔씩 마음이 불안하거나 집중하기 어려울 때면 바이올린을 안고 평온함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오늘만은 그렇지 않았다. 


  평온함이 아닌 불안감이 가시처럼 돋쳐 그녀의 마음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정말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으면 어떻게 하지? (어쩌면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헤이즐는 조심스럽게 활을 들었다. 조임쇠를 조심스럽게 조였고 그에 따라서 긴장이 풀려있던 활털이 빳빳하게 탄력을 퇴찾아 갔다. 송진을 꺼내 손잡이 바로 윗 부분부터 반대쪽 끝까지 부드럽게 발라주었다. 송진 덩어리가 국수 가락보다 얇고 가는 활털을 헤치는 동안 부서진 송진가루가 하얗게 흩날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스럽게 송진을 바르고 난 다음 부드러운 솔로 한번 더 고르게 묻어있지 않은 송진가루가 덩어리지지 않도록 털어주었다. 활이 준비가 되자 그녀는 오른손으로 바이올린을 들고 받침대를 턱에 가져다 받쳤다. 살짝 밀리고 살짝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왼손으로 활을 잡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또 부드럽게 감겨있는 네 줄 현에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부르르르 네 줄의 현이 떨리며 몸체가 진동했다. 그것은 울림통 내부를 휘돌아 예술적으로 계산되어 파여진 알파벳 에프(f) 모양의 구멍과 예술적으로 계산되어 만들어진 앞판과 뒷판을 타고 그녀의 턱으로 전달되어 왔다. 그야말로 예술적 떨림이었다. 


*


  "지금부터 최종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선언했다. 그 우렁찬 목소리는 깊고 깊은 협곡과 오색 암석을 따라 엷게 메아리 쳤다. 야외 무대 치고는 굉장히 좋은 음향 시설이라는 사실을 헤이즐는 어제의 (리허설을 겸한) 예심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연주를 위해 건축된 실내홀이 아닌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소리를 잡아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수하게 개발된 '그라뉼'이라는 물질 덕분이다. 무색무취의 이 가벼운 입자들은 자력을 가해줌에 따라 공중에서 원하는 모양으로 정렬된다. 이 입자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할 적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함께 모여 면을 이루게 되는 경우에는 진동과 소리를 통과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반사한다. 그것이 바로 그라뉼의 발명 이후 실내악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진 이유다. 그런 까닭에 '그라뉼'의 개발사는 (소재 업계의 여느 회사들과는 다르게) 여러 유명 음악재단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오늘의 이 대회 또한 그들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야외 홀의 바닥은 거대한 자석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자력은 이 홀의 가장장리로 갈수록 강해지고 중앙으로 갈수록 약해졌으며 마침내 자석을 켜고 오늘을 위해 준비된 121만 6430개의 그라뉼을 뿌렸을 때 홀은 거대한 반구형의 투명막으로 뒤덮이는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소리는 빠져나가지 못했지만 막은 더없이 투명하여 안에 있는 우리는 밖에 있을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협곡과 그것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저녁의 하늘 모두를 감상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무대에서 탄생하는 소리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감상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홀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볼 수 있었지만 홀 안에서 탄생하고 사라져가는 소리는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헤이즐와 함께 최종심에 올라온 경쟁자는 예상대로 W였다. W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영국 소년이었다. 헤이즐보다는 한 살이 어린 열여덟살이었다. 동전 던지기에 의해 순서는 W가 먼저 연주를 하고 그 다음에 헤이즐가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헤이즐는 객석 맨 첫째 줄에 앉아서 경쟁자의 연주를 지켜보게 되었다. 최종심은 독주로 진행된다. 어느 악기의 도움도 없이 홀로 바이올린 하나만 달랑 가지고 청중 앞에서 재능을 펼쳐 보이는 방식이다. 따라서 관심은 자연히 레파토리로 집중도었다. 과연 저 영국 소년이 무슨 곡을 선곡했을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그런 기가 막힌 선곡을 가지고 나섰을거야. 라흐마니노프의 <보카리제>나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쯤은 어떨까. W가 연주를 시작했다. 이런! 카를 폰 베버의 <사냥꾼의 합창>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기발한 선곡이다. 스즈키 교본의 첫번째 권에도 편곡본의 악보가 있을 정도로 기초적인 선곡을 왜? 처음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곡이니 만큼 역으로 실력을 드러내기에는 더없이 안성맞춤이라는 걸까? 이상한 일이지만 그게 더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경쟁자가 최고 난이도의 곡을 연주하는 것보다도 더. 그녀는 초조함을 느꼈다. 안 좋은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손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진심으로 그가 실수하거나 활을 놓치길 바랬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밤에 비하자면 오늘의 그녀는 명백한 불완품이었다. 지난 밤 사이 뭔가 설명할 수 없도록 형편없는 존재가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거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답을 구했다. 눈 뜨자마자 바이올린부터 찾아들고 시작했던 오늘 아침의 연습을 떠올린다. 기억에는 좌절과 절망이라는 단어만이 남아있었다. 활의 움직임은 삐걱거렸고 빗나간 소리는 귀에서 거슬렸다. '도대체 어젯밤의 그 굉장한 재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혹시 내게 남아있던 모든 행운을 어젯밤의 연습으로 모두 소비해 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헤이즐는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W의 실력은 어제 예심에서 봤던 것 이상으로 출중했다. 들판을 달리고 숲속을 헤치는 사냥의 기쁨! 어쩌면 베버가 들었어도 만족스러워 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황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곡을 가장 기본적이지 않은 수준으로 연주하다니! 이 콩쿠르의 취지에 어울리는 전략 아닌가?


  그녀는 무대에 오르지 않으려는 생각까지 했다. 난생 처음으로 수건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의 실력과 자신감이라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늘 아침과 같은 연주라면 백이면 백,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 것이다. 어쩜 기권이라면, 기권이라면 최소한의 부끄러움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선뜻 기권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협곡까지 날아오고 아흔아홉명의 도전자가 단 두 명으로 줄어드는 12월 30일의 대격전을 치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 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헤이즐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W의 연주가 두 번째 선곡인 쇼팽의 <야상곡 No.20>로 넘어갈 무렵 그는 가만히 자기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닥에 눕혀 놓았다. 아무도 모르게 그녀는 지퍼를 열었고 뚜껑을 살짝 벌렸다. 홀 안의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고 있었다. 케이스 안에는 그가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들어 있었다. 헤이즐는 한 손으로 그것을 쥐어잡고 긴장감을 이기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그리고 셋. 그녀는 바이올린 대신에 숨겨 들여온 것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홀의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청색 제복을 입은 몇몇이 그를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반구형으로 이 야외 홀을 감싸고 있는 백이십여만개의 그라뉼 때문에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안에서 메아리쳤다. 인간의 귀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함성이 밀폐 공간을 메아리치며 몇몇 사람들을 히스테리 상태로 몰아갔다. 무대 위의 W는 장승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는데 W의 등 뒷편으로는 뭔가 뾰족한 것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맞다. 그것은 분명 화살처럼 보였다. 살은 아주 자연스럽게 바이올린과 W의 몸을 하나로 꿰고 있었다. 원래부터 하나였다는 듯이. 그제야 헤이즐는 석궁이 들려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제복을 입은 자들이 아주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불이 꺼졌다. 누군가 전원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동시에 자석이 멈추며 백이십만개의 그라뉼들이 모두 중력의 노예가 되어 땅으로 땅으로 낙하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무색무취의 투명입자들 속에서 그녀는 무너져 가는 무대 위의 W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직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았다.

(200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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