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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21세기 기사도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0.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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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점 아줌마에겐 꿈이 있었다. 하나 뿐인 딸을 '사'자 직업의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꿈. 

  이유는 간단했다. 보통 딸 가진 많은 부모들이 말하는 그런 전형적인 이유랄까. '사'자 직업의 남자라면 능력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그러니 어쩐지 사내다울 것도 같고……. 확실히 노골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누가 매점 아줌마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속물들이 차고 넘쳐나는 이 사회에서. 어쩌면 차라리 그처럼 당당하게 떠들고 다니는 편이 훨씬 솔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매점 집안이 '사'자 집안을 가려내고 자실만한 형편처럼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엄연히 현실이 그렇다. 물론 동남권 최고의 비리 사학이라는 이 학교에서 단 세 군데 뿐인 매점 중 하나를 25년째 독점하는 것은 어지간한 연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허나 그래봐야 매점은 매점이다. 비록 매점 아저씨가 체어맨을 타고 다니지만 매점은 매점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남의 직업에 귀천을 따져서 안 되는 직업은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매점 아줌마의 사위관이 만천하에 화제가 된 것은 따지고 보면 아줌마 특유의 수다스러운 성격 때문이었다. 본래 매점 아줌마는 한국영화의 감초역할 배우 뺨치는 걸걸한 입담으로 유명했다. 오고 가는 학생들과 잠시도 쉬지 않고 토크 배틀을 벌이는 것으로 십리 밖까지 소문이 났을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아줌마는 치고 박는 폭로전의 와중에서 문제의 사위관을 입에 올렸다고 한다. 어쩌면 하나뿐인 딸에게 군침을 흘리는 늑대들의 접근을 원천 방어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매점이 공대 지하에 있으니 손님의 태반이 늑대 아닌가). 어쨌든 그게 단초가 되어 그 찬란한 사위관이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십리 밖까지 소문이 났을 정도다. 우리 학교 매점 아줌마는 '사'자 집안 남자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일단 화제를 모으자 모두가 매점에 들러 그 얘기만 줄창 물어댔고, 아줌마는 아줌마대로 나름의 디펜스를 펼치는 과정에서 더욱 더 구체적인 사위상을 정립해 나갔던 것이다.
 
  하긴 중요한 건 매점 아줌마가 아니다. 그 무남독녀 따님이다. 그녀의 이름은 별님, 부친되시는 매점 아저씨분의 존함이 라, 영자, 찬자인 관계로 그녀의 풀 네임은 라별님이다. 어렸을 적에 놀림 깨나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우리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존재와 더불어 화제의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 초코파이에 가격표를 붙이는 라별님씨의 모습이 눈부시도록 아릅답도다.
- 그럼 가서 말이라도 걸어봐. 
- 싫어, 임마. 들어갔다 어떻게 그냥 나오냐. 뭐라도 사서 나와야지.
- 그럼 가위 바위 보 해서 지는 놈이 가서 라벨링 용지 사오기다.
- 좋아, 라별님씨에게 라벨링 용지 사오기다.

  하루는 라별님씨가 C자 모양 브로치를 하고 온 날이 있었다. 그걸 본 환경파괴공학과 2학년 역세권이 말하길,
- 앗! 탄소라벨링이다.
  이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공대생들의 유머감각은 이래서 문제다.

  사실 별님이라는 이름은 트릴로지의 한 편 같은 것이다. 단독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햇님, 달님과 함께 있어야 비로소 완성될 것만 같은 그런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별님씨는 무남독녀다. 뭔가 이상하긴 하다. 매점 아저씨와 호형호제한다는 영선실 김씨 아저씨 6촌동생의 처조카가 마침 우리 학교 학생인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사연이 있기는 있단다. 뒤로 더 아이를 가지려고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별님씨 하나로 끝났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통상 햇님, 달님, 별님 셋을 순서대로 배열한다면 햇님이 제일 앞에 가는 것이 보통이다 (적어도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첫째에게 별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건 또 무슨 영문인가.  매점 아저씨와 호형호제한다는 영선실 김씨 아저씨 6촌동생의 처조카도 거기까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별님씨의 생년월일은 1978년 11월 11일. 생년까지는 몰라도 월일을 어떻게 알았나 따지지 마시길. 컴공과에서 배운 것도 써먹을 구석은 있으니까. 꽤 빠지지 않는 미인임에도 불구하고 1978년생인 별님씨가 아직 미혼에 솔로인 것을 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왈가왈부 말이 많기도 많았다. 남학생들은 대개 '사'자 집안을 운운하고 다니는 매점 아줌마의 터무니없이 높은 눈이 문제임을 지적했고, 반면 여학생들은 별님씨에게 의외의 성격적 결함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별님씨의 환심을 사려는 학생들은 대개 대학원생들이었다. 특히 결혼과 학위에 동시에 똥줄 타기 시작한 고년차 아저씨들일수록 빈번하게, 집요하게, 농밀한 방법으로 별님씨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런 사람들이 또 능글맞기는 능글맞아서 매점 아줌마와 죽이 잘 맞기도 했다. 군특수가상현실대학원 박사과정 6년 차 미연시는 아침마다 매점 아줌마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고.
- 아줌마, 저도 좀 있으면 박사인데 이것도 '사'자 직업 아닙니까?
  그러면 매점 아줌마는 싱긋 웃으며 어김없이 이렇게 대꾸했다고.
- 좋은 말로 할 때 꺼지세요.

  매점을 이용하는 많은 대학원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물론 별님씨를 힐끔 훔쳐보면서.
-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 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변리사? 교사?
  여기까지는 당연한 반응이다. 당연하다는 것은 이제와 되돌릴 수 없는 꿈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영영 멀어져 간.
- 영양사.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모두를 낄낄거리게 만들었다.
- 과연 아줌마가 자기 딸을 영양사한테 시집보낼까?
- 아무리 '사'자 직업이라도 말이야.
  다들 신이 났다.
- 인마들아, 그러지 말고 돌아가면서 하나씩 번갈아 '사'자 직업을 말해보자. 먼저 웃음 터지는 놈이 음료수 사는 거다.
- 변사.
- 간호조무사.
- 프로바둑기사.
- 퇴마사.
- 음양사.
- 장례지도사.
- 일제 순사.
  그날 게임에서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은 정치공학과의 공문도가 되었다.
- 아나운, 사.
  공대생들의 유머감각도 이따금은 괜찮다.


*


  파국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별님씨가 어느 날 갑자기 '사'자 직업 남자를 데려오기는 했으되, 영양사도 변사도 간호조무사도 장례지도사도 프로바둑기사도 퇴마사도 음양사도 일제 순사도 아나운'사'도 프로듀'사'도 아닌, 과거 '사'자 군단의 상징이었던 전직 삼성맨 양준혁도 아닌 기사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기사, 그러니까 나이트말이다. 나이트라면 블랙 나이트인가, 화이트 나이트인가, 다크 나이트인가, 아니면 그 유명한 '백악관 나이트'인가. 그 또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요즘 세상에 기사가 어디 있느냐고, 우리 중 누군가가 의문을 표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는 기사(騎士)도 없고 제대로 된 기사(記事)도 없지. 하지만 정말로 별님씨가 기사와 함께 나타났으니 정말 기사(奇事 - 기이한 일)가 아니겠는가.  이로 인해 한동안 매점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고, 모르긴 몰라도 19시 이후 매점을 닫은 다음에도 바람 잘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별님씨에게 유난히 애착을 보였던 군특수가상현실대학원 박사과정 6년 차 미연시 등 몇몇 아저씨들의 실망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음은 물론이다. 결국 이 분란은 별님씨가 기사 남자와 야반도주를 하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 몇몇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하고 정보를 교환한 결과 야반도주가 거의 확실한 것 같았다. 이에 대해서도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의 평가가 엇갈렸다. 주로 남학생들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통탄을 금치 못했고, 여학생들은 "자고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이라고 냉정히 논평했다.

  기사의 첫 등장을 목격한 것은 커피바리스타공학과의 권두언이었다.
- 당시 나는 매점에 있었다. 왕뚜껑에 찬밥 말아먹는 중이었다. 계란 하나 얻어보려고 매점 안쪽 창고를 기웃거리는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격양된 목소리로 험한 말들이 오고 가더니만 부스스한 차림의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는 나를 보았으되 보았음을 티 내지 않고 조용히 무시하며 지나쳐갔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가 바로 기사였다. 별님씨가 데려왔다는 남자 말이다. 남자는 자기 머리보다 훨씬 커다란 투구를 쓰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 눈만 붉게 빛났다. (TV 시리즈 '배틀스타 갈락티카'의) 사일런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근적외선 소변기 센서 같기도 했다. 사슬로 촘촘히 엮어진 갑옷을 안에 받혀입고 백합 문양이 새겨진 자주색 천을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나름 등에는 창도 차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워낙에 논-믹스매치라 어째 기사라기보다는 서울역에서 데려온 따끈따끈한 홈리스랄까, 뭐 그런 느낌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기사는 매점에 출근 도장을 찍고 하루 12시간씩 상주하기 시작했다. 목격자가 많고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그를 열심히 지켜본 사람은 순결공학과 석사과정 4년 차 초대졸일 것이다. 그 또한 별님씨를 열렬히 따라다녔던 남자 중 하나였으니 그 감정이 고왔을 리 없다.
- 기사 놈은 주로 매점 동쪽 구석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움직이지 않았다. 이따금 별님씨가 과자며 음료수를 챙겨다 주는 것 같았다. 기사 놈은 엄마손파이를 제외하고는 손도 대지 않았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 엄마손파이가 녀석에게 뭔가 에너지 공급원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기도 참 조용히 먹었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꾸준히 균일하고 끈기 있게 입에 밀어 넣고 씹었다. 그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카운터만 바라볼 뿐이었다. 별님씨가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그래서 매점 아줌마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괜히 기사 놈 근처에 와서 테이블을 닦았다. 진공청소기도 돌렸다. 괜히 자석을 늘어놓는가 하면 소금도 뿌렸다. 아무래도 매점 아줌마가 원하는 '사'자 직업이 기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기술사, 기능사, 그리고 석사, 박사 등과 마찬가지로. 

  기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군특수가상현실대학원 박사과정 6년 차 미연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미연시는 이베이에서 구했는지 어쨌는지 중세유럽의 기사 코스튬을 입고 매점에 나타났다. 그리고 진짜 기사에게 장갑을 던지며 결투를 신청했다. 바로 그 날이 우리가 기사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별님씨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기도 하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결투라는 로맨스 문고 수준의 소재가 많은 구경꾼들을 불러모았다. 고학생들의 고혈과 비리 사학 특유의 고름을 발라 성대하게 지어진 동문회관의 서쪽 담장 위에서 둘은 맞붙었다. 말 없이 칼을 부딪혔다. 이따금 지는 태양의 비명이 칼에 반사되어 더욱 도 위험하고 그만큼 인상적인 결투 장면이 연출되었다. 별님씨는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동전이나 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예닐곱 합을 겨룬 결과 양측의 칼은 정확히 한 차례씩 상대의 갑옷을 찔렀지만 결판은 그렇게 싱겁게 나버렸다.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반면 전공만 군특수어쩌고지 인터넷으로 구매한 갑옷의 내구를 장담할 수 없었던 미연시는 분수처럼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또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고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구경꾼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경찰과 구급대가 출등하기 전에 기사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날 밤 별님씨도 사라졌다. 매점 아저씨의 체어맨도 함께 사라졌다. 정황상 누가 봐도 명백한 야반도주였다.

  매점의 분위기는 그 사건 이후 크게 바뀌었다. 일단 매점 아줌마 특유의 걸걸한 입담이 자취를 감추었다. 토크 배틀도 사라졌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넋 나간 사람처럼 종일 멍하니 창 밖만 내다보는 매점 주인 라영찬 아저씨와 어우러져 더더욱 매점을 음침하게 만들었다. 그들 부부 또한 별님씨의 행방을 추적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글쎄. 별 도리가 없어 보였다. 우리에게 매점은 더 이상 즐거운 공간이 아니었다. 매점 벽을 타고 무성한 칡덩굴이 자란다는 소문도 있었고 매점 밑으로 강렬한 수맥이 흐른다는 얘기도 있었다. 우리의 유머감각도 데미지를 입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그 기사의 정체가. 그리고 기사를 '사'자 직업으로 봐야 하는지가.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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