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9시 10분 서울행 은하철도 149열차 13호차
by 김영준 (James Kim)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그 다음이 뭐지?,
뭐긴 뭐야.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차장 아저씨가 다가와 표 검사를 하겠지.
*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 연휴를 불과 몇 시간쯤 남겨놓은 이 밤. 은하철도 149 열차 무궁화 열차는 화성을 떠나 지구, 지구 하고도 대한민국의 서울로 향하는 중이다. 예상대로 좌석은 매진이고 매진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모든 자리가 인간으로 꽉꽉 들어차 있다. 명절 연휴라는 들뜬 분위기 때문일까, 똑같이 매진이어도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다. 평소보다 더 많이 늘어놓은 짐과 평소보다 더 많이 달고 온 가족으로 열차 내의 공기는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이곳은 13호 차량. 영화관으로 꾸며진 ‘무비 클래스’ 1호, 2호 차량과 '퍼스트 클래스’인 3호, 4호, 5호, 그리고 ‘비즈니스 클래스’인 6호, 7호, 8호, 9호, 10호를 지나 ‘이코노미 클래스’가 시작되고 세 번째 연결된 차량이다. 15호 차량이 은하철도 149 열차 무궁화호의 끝이니, 문제의 13호는 이코노미 클래스의 정중앙에 위치하여 달리는 셈이다. 세상 사람들은 통상 13이 불길한 숫자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은하철도의 좌석 예매 시스템이라는 것이 순전한 선착순으로 앞에서부터 먼저 예약한 사람들에게 배정하는 것이기에 13호 차량이라고 차이가 있을 리 만무하다. 유달리 별나고 까탈스럽거나 말썽을 피우는 손님이 많을 확률도 없다. 또한 13호 차량은 12호 차량과 14호 차량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이 칸만 특별히 불운한 위험에 노출될 리도 없다. 그럼에도 알게 모르게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13호 만은 피했으면 좋겠다, 하는 푸념이 공공연히 떠돌고는 했는데, 이유인즉슨 어째 느낌상 13호에서 골치 아프고 피로한 일이 더 잦게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느낌상. 그거야말로 정말 정말 중요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어둠을 헤치고 달려가는 은하철도의 심장은 두근두근 뛴다. 고향 가는 길. 막강하고 위대한 산업화로 뜻하지 않은 타지 생활을 견디게 된 그들에게 지금같은 명절 연휴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기회다.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공부하고 고향의 경제 안에서 일하다가 역시 고향의 울타리 안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온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늙어가는 고향 중심적 인생이란 이제 팔도가 온전히 메트로폴리탄화된 대한민국에서는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치솟는 땅값에 거의 모든 기업과 공장과 연구소는 화성의 식민지로 옮겨갔고 그에 따라 해당 기업, 공장, 연구소, 물류센터, 콜센터 등의 종사자들도 기나긴 이주의 행렬을 그려내었다. 여기엔 식민지 지역에 일만 제곱미터 이하의 소규모 공장을 세우는 경우 사전 환경성 검토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새로운 정책의 통과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화성의 식민지는 당초부터 개인의 생활이 아닌 조직의 효율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으므로 그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만큼 촉촉한 편이 못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화성에 급조된 성냥갑 같은 원룸에 틀어박혀 기계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했고, 새벽마다 먼지바람 풀풀 날리는 화성제일천 근처에서 아쉬운 대로 콜록거리며 조깅을 했으며, 구내식당에서 고농축 영양식을 먹으며 식당 정중앙에 세워진 초대형 평면텔레비젼을 통해 고향의 아련한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 애써 가족들과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위안을 얻으려 했다. 내가 평생을 바라온 것이 겨우 이런 생활이었나? 더러는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음, 그래도 이런 전우주적 불경기에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군지 몰라도 그런 논리를 개발한 자는 토마스 에디슨,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헨리 포드에 견줄 천재가 분명했다.
*
어둠을 헤치고 은하철도가 포보스 주위를 통과한다. 포보스는 화성의 달이다. 형제도 있다. 데이모스라는 이름의 별이다. 화성은 두 개의 달을 가진 세계다. 서기 1877년 이 두 위성을 발견한 천문학자 아이샤프 홀은 마르스의 위성이니 마르스의 아들인 셈이라며 (센스있게) 그리스 신화에서 마르스신의 아들들 이름을 따다가 이 두 작은 별에게 붙여주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형제지간이라기에 서로 너무들 달랐다. 포보스는 데이모스에 비해 직경이 두 배나 길었고 질량이 다섯 배쯤 더 나갔는데 반면에 공전주기는 사분의 일에 불과했다. ‘수호지’의 무송과 무대처럼, 달라도 너무 다른 형제인 것이다. 게다가, 또 있다. 포보스는 매년 더더욱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반해 데이모스는 매년 갈수록 화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언제고 포보스가 화성에 충돌할 거라고도 했고 기어코 데이모스가 화성의 품을 떠날 거라고도 했다. 손목시계에 삼차원 영상으로 전해지는 그 소식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화성의 이주민들은 꼭꼭 씹어 아침밥을 챙겨 먹었다. "아 글쎄, 당장 내가 사는 동안 일어날 일은 아니잖아. 내가 죽은 다음에야 충돌을 하든 폭발을 하든 아님 무슨 발광을 하든 상관없지 뭐." 그들에게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란 한 알의 종합비타민만도 못한 것이었다.
아홉시 십분 서울행 은하철도 149 열차 무궁화 13호차가 포보스를 통과할 때 6B 좌석의 소년은 마침 종합비타민 셀레늄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다. '항산화(抗酸化)'야말로 화성 거주민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 소년의 생각이다. 화성의 삶이란 얼마나 산화적 스트레스로 가득하느냐는 말이다. 당장만 해도 그렇다. 지금 6B 소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차량 곳곳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다. 과연 그것이 울음소리냐 웃음소리냐, 혹은 웃음이나 울음으로 분리될 수 없는 제 3의 성질을 가진 소리냐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할런지도 모르지만, 아무튼간에 그 '소리'가 소년의 신경을 긁어놓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엄마 손, 혹은 아빠 손을 붙잡고 은하철도에 올라탄 이 미완의 생명체들은 자기 외의 다른 존재들을 배려하기에 너무도 어렸다. 물론 우리는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도 다른 존재를 배려할 줄 모르는 불완의 생명체들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그 사실은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 어린이는 나라의 소중한 미래다. 그렇다고 공공장소에서 어떤 행동도 용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사실 아이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부모의 책임이다. 그래서 소년은 부모라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콩나물 시루처럼 좁고 빽빽한 은하철도의 복도를 뛰어다니며 괴성을 질러대었다. 혹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열심히 나열했다. 혹은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가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특히 소년에게는 같은 열의 6D 좌석의 꼬마가 신경 쓰였다. 소년은 처음 들어보는 노래다.
은하철도, 은하철도, 아아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
바로 옆에 (6C 좌석에) 애 엄마가 앉아있음에도 전혀 제지하려고들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더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제지는 커녕 독려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 옳지, 옳지, 잘 부른다. 우리 아가.
한편 조금 떨어진 8A석과 8B석에서는 또다른 꼬마 악동 둘이 인기 홀로그램 텔레비젼 드라마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과 ‘역사상 최악의 하룻밤’의 스토리를 제 멋대로 섞어 제 나름의 언어로 소란스럽게 재구성하여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아직 뼈가 여물지 않아 정확한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렵지만 겉보기 등급으로는 대여설 살쯤. 상기 드라마들이 대여섯 살짜리가 보기엔 선정적이고 물질적이란 생각에 주위 사람들은 다소 아연해한다. 이상한 내용이 나올까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신경을 곤두세워 보지만 빠진 앞니 사이로 발음이 새어 정확한 내용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알아듣기가 힘드니 '짜증 나는 소음'은 '더 짜증 나는 소음'이 된다.
- 거기, 애 좀 조용히 시키시지?
아니나 다를까. 결국 누군가 짜증을 낸다. 13호차 10C석의 남자다. 참다 참다가 드디어 참다 못하여 폭발한 모양새다. 차량 안이 조용해서인지 모두에게 들린다. 뜨개질하던 노인도, 이어폰 낀 학생도, 쿨쿨 잠을 자던 아저씨도, 수다 떨던 아줌마도, 누가 먼저 나서줬으면 생각하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제 동작을 멈추고 소리의 진원을 바라본다. 정작 10C석 남자조차도 자기 말이 그렇게 쩌렁쩌렁 울릴 줄은 몰랐다는 듯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 뭘 그렇게 크게 얘기해요?
9B석의 애 아빠가 쏘아붙인다. 바싹 날이 선 목소리에는 황망함이 서려있다. 절대로, 결단코,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는 투다. 제 나름의 자리에서 제 나름의 방법과 각도로 은밀히 소리의 진원을 탐구하던 차량 내 모두의 시선이 그대로 고정된다. 이 소란히 결코 아름답고 건전하게 정리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다. 소년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아드레날린이 용솟음치는 기분을 느낀다.
- 뭘 잘했다고 지금 큰 소립니까?
- 그럼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 이 양반아, 여기 공공장소 아니야? 공공장소에서 애가 떠들면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야지.
- 그러는 당신은 공공장소에서 왜 목소리를 높이는데요? 우리 애가 떠들어서 정히 시끄럽고 피곤하면 따로 조용히 나한테 귀띔을 해주면 되잖아. 왜 소리는 빽빽 지르고 난린데? 왜 이렇게 창피를 줘요?
- 얼씨구나. 창피를 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창피한 건 아는데 댁의 애가 잘못한 게 없단 얘기요?
- 다섯 살 먹은 애를 어떻게 다섯 시간 동안 가만히 앉혀둡니까? 그런 재주가 있다면 어디 한 번 당신이 해보쇼.
⁃ 이것 봐. 정말 끝까지 잘못했다는 말은 안하지.
10C 남자는 답답하다는듯 혀를 끌끌 찬다.
이 때, 저 멀리 3D 좌석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 지팡이를 매섭게 들어 올리며 호통을 친다.
- 거기 젊은 양반들, 좀 조용히 좀 못하시겠소? 당신들이 더 시끄럽네. 말로는 공공이 어떻고 도덕이 어떠냐며 왜 정작 본인들은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 게요? 여기 당신들만 있는 게 아니잖소?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듯 예민히 대치하던 9B 남자와 10C 남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워한다.
-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건 저희 일이니, 어르신은 빠져 계십시오. 무려 스물 하고도 네 사람의 머리를 건너 9B 남자가 저 멀리 말한다. 그래도 상대가 노인인지라 최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투지만 그다지 예의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 뭐요? 이 양반들이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5C 좌석의 아줌마가 쩝쩝거리던 맘모스 빵을 내려놓고는 끼어든다.
- 그러는 할아버지는 누구신데요?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끼어들어 멍청한 질문을 던지는 거지? 저 노인이 누구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여튼 오지랖은 고칠 방법도 없이다. 5D 좌석에 앉아있던 5C 아줌마의 남편은 읽던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너무 창피해서다. 3D의 할아버지는 벗겨진 이마에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씨익, 웃는다. 웃을 때면 바늘구멍보다 작은 눈은 숫제 보이지 않는다. 어이구,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어째 보는 사람을 적잖이 불안하게 만드는 웃음이다.
- 경북 포항에서 온 이면박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저 뒤쪽 13열에서는 갑자기 아기가 울음을 터뜨린다. 귀청이 찢어지고도 남을 장군감 울음 소리다. 더러는 얼굴을 찌푸리고 더러는 그 짜증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경북 포항에서 온 이면박 할아버지는 극적으로 터뜨린 자신의 소개에 차량 내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에 적잖이 실망한다. 뻘쭘함을 애써 감추고 눈치를 살피다 하릴없이 자리에 주저앉는다. 9B 남자와 10C 남자는 그 난장판의 와중에서 여전히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기는 하다. 상황은 부인들이 끼어들면서 제 2차 폭발로 치닫는다. 그러니까 9A 좌석의 여자와 10D 좌석의 여자다. 9A 여자는 문제의 시초가 된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
- 아저씨, 저한테 살짝만 말해주셨으면 (애들 좀 조용히 시켜달라고) 좋게 끝날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9A 여자가 나서서 10C 남자를 공격하자,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10D 여자도 끼어든다. 마치 프로레슬리의 '태그-팀 매치' 같은 모양새다. 여자를 상대하는 데는 여자가 나서야 한다, 왼손타자를 상대하는 데는 역시 왼손투수라는 식의 논리처럼 보인다. 죄 없이 그 태풍의 눈에서 좌불안석으로 앉아있던 9C의 청년은 불쾌한 표정으로 이어폰의 볼륨을 높인다.
- 정말 기가 막히네요. 뭘 잘했다고 큰 소리는 큰 소리에요?
- 어머머, 이 아줌마가 웃기네. 지금 누가 큰 소리를 내고 있는데요?
잠시 분산되었던 13호차 승객들의 눈과 귀는 다시금 문제의 9열과 10열로 집중된다.
- 아니, 애가 시끄러운 건 당연한 거죠. 시끄럽지 않음 그게 앤가요? 어른이지.
- 그러는 그 쪽은 어른이 되어놔서 왜 시끄러운데요? 정말 사람이 부끄러운 줄을 모르네.
- 뭐가 어째요? 누가 부끄러운 짓을 했는데요. 애가 떠든 건 미안해요. 그건 미안한데 그렇다고 애를 그렇게 면박주시면 안 되죠. 왜 멀쩡한 애 기를 죽여요?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경북 포항에서 왔다는 3D의 할아버지가 다시 벌떡 일어선다.
- 거기 시끄러운 애기 엄마들, 면박을 주네 마네 하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 내 이름이 바로 면박이요.
아무도 이면박 씨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다. 9열과 10열의 상황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면박 씨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옆 자리인 3C 좌석이 비어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안방인 양, 구두를 벗고 발을 올려 비스듬히 누웠는데 통로 건너편 3A와 3B 좌석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이 마치 뭐라도 씹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
- 아니 왜 애새끼를 그 따위로 키워?
9A 여자와 10D 여자의 팽팽한 대치를 10C 남자가 뛰어 들어가 제압한다. 다소의 경멸이 녹아있는 눈으로 그는 9A 여자를 노려본다. 소리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부모 될 자격도 없는 여자라 말하고 싶은 표정이다.
- 뭐 애새끼? 이 새끼가 미쳤나? 남의 집 귀한 자식보고.
9A 여자를 커버하기 위해 9B 남자가 다시 링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 니 애새끼니까 당신한텐 귀하지.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고 하는거야. 너네 애놈의 새끼가 삼십 분 동안 쉬지도 않고 지껄이는 동안 당신은 뭐 했어? 아무것도 안했잖아.
- 그럼 멀쩡한 애를 쥐어 팰까? 다섯살짜리를 무슨 수로 조용히 시키냐고?
10D 여자가 재빨리 끼어든다. 부부의 팀워크가 보통이 아니다.
- 그러니까 댁의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거죠.
9A 여자도 놓칠새라 막아 나선다. 너는 내가 상대한다, 무협지에서 종종 보던 장면이다.
- 야, 어디서 함부로 가정교육을 운운해? 보아하니 새파란 게 어려 보이는데. 애 키워본 적 있어? 없으면 말을 하지마.
- 야? 어디서 야가 야야? 저 알아요? 언제봤다고 야야?
10C 남자가 부인을 제지한다.
- 자기야. 상종을 하지마.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먼. 이런 무식한 인간들이랑은 말을 섞질 말아야 해.
- 아이고, 퍽이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이때, 다시 경북 포항에서 왔다는 3D 좌석의 이면박씨가 다시 벌떡 일어선다.
- 거기 시끄러운 애기 엄마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실 내 이름이 바로 면박이요.
이번에도 누구도 이면박씨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면박 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 아니, 떠들었으면 우리 애만 떠들었어? 저기 쟤는 노래까지 흥얼거리던데. 그럼 쟤한테도 소리 한 번 질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쟤한테는 안 그러고 우리 애만 갖고 그래요?
졸지에 예의 그 시끄러운 6D 꼬마에게 불똥이 튀었다. 노래에 심취했던 (은하철도, 은하철도, 아아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 꼬마 말이다. '옳지, 옳지, 잘 부른다. 우리 아가'를 운운하던 6C 엄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벌떡 일어선다.
- 아니, 왜 당신들 싸움에 우리 애를 끌어들여요?
13열의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한다. 13D의 아기 엄마는 애를 달래고 어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근처에서 “어머, 모유수유를 하나 봐”라는 말을 한다. 여기저기서 지방 방송들이 한 마디씩 거든다. “애 모유 먹이는 게 분유 먹이는 것보다 더 좋은 거야”라는 말도 들리고 “객실에서 애 모유를 먹인다고?”라는 말도 들린다. "아니 무슨 기차에 수유실도 없으니 너무 딱하다"라는 푸념도 튀어나왔다. 그 아기 엄마의 상황이 사실인지는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순간 13C 자리의 젊은 남자는 (아마도 일행이 아닌 듯한) 몸을 부자연스럽게 통로 쪽으로 완전히 꺾은 상태로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부릅뜨며 (마치 귀신과 싸우는 것처럼) 천장 모니터의 한국철도 홍보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기는 하였다.
⁃ 다들 엠오유 이야기를 하니 내가 한 마디 합시다. 내가 바로 미스터 엠오유요. 지금도 화성에다 엠오유 좀 뿌리고 오는 길이오.
다시 한 번 경북 포항에서 왔다는 3D 좌석의 이면박 씨가 벌떡 일어서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유성만 굴러가도 웃음이 터지는 3A와 3B의 여학생들은 서로 마주보고 키득거린다). 대신 이 우주적 난장판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 - 문제의 8A 꼬마가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씬을 훔쳐간다. 형이 우니까 8B 꼬마도 따라서 운다. 아이된 생각에서는 엄마 아빠가 낯선 아저씨 아줌마와 험악한 표정으로 험악한 말을 주고 받으니 겁도 먹었을 것이다. 약동들이 용서받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 어쩌면 영리하고 당연한 선택 인지 모른다.
- 우리 도현이 착하지. 울지 마, 뚝.
9A 여자가 잠시 전장을 이탈해 아이를 달래려 애를 쓴다. 10D 여자도 애를 겁먹일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슬그머니 조용히 발을 뺀다. 남자들도 멋쩍었는지 잠시 먼산만 보고 있다.
- 엄마랑 아빠, 싸운 게 아니야. 뚝, 나쁜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 그런거야. 코 흥 풀고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봐.
9A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아무튼 그게 10C 남자를 열받게 만든다.
- 뭐? 나쁜 사람? 보자보자 하니까 이 여자가?
9B 남자도 팔짝 튀어오른다.
- 야! 남의 부인한테 이 여자라니! 응? 이 여자라니?
9B 남자와 10C 남자, 둘은 거의 동시에 일어선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키도 꽤 크고 체격도 막상막하로 건장한 편이다. 칼을 뽑아놓고 머뭇거리기에는 쑥스러웠던지, 두 손을 따로 둘 곳이 없었는지 살짝 망설이다가 서로의 멱살을 잡는다. 이미 와이셔츠의 두세 번째 단추는 떨어져 나간 상태다.
- 쳐봐! 쳐봐! 어디 한 번 경찰서까지 가보자.
- 이게 입만 살아가지고.
하지만 실제로 먼저 칠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어보인다.
13호 차량의 몇몇 승객들이 드디어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그냥 두고 보기에는 너무 일이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다.
⁃ 그러지들 마세요!
⁃ 적당히들 좀 합시다.
- 저기 아무나 승무원을 좀 불러봐요!
모두들 한 마디씩 하는 사이 마지막 14열에 앉아있던 군인 하나가 승무원을 데려오겠다며 12 호차 쪽 통로로 빠르게 뛰어간다.
- 아, 거기 젊은 분들 싸우지 말아요.
안전과 청결을 제일로 하는 은하철도 안에서 수박을 썰어 먹던 2C 자리의 할머니가 번개같이 달려간다.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깜빡 잊은 것인지 손에 과도를 든 채다. 2D 자리의 점잖은 중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수박파티가 잠시나마 중단된 것에 감사하는 표정이다. 도대체 은하철도 내에서 수박을 썰어 먹을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그것도 반 통이나 비닐랩에 싸와서. 과도를 든 2C 할머니의 등장에 멱살잡이를 하던 남자들은 다소 긴장한다.
- 어르…신, 제발 칼은 내려놓고 말씀하시죠?
- 아니, 난, 그냥 젊은 분들 싸우지 말라고. 애를 키우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건데, 나만해도 슬하에 여섯 남매를 두었다오. 그러다 보니 이래 저래 별 일이 다 많았다니까. 아 글쎄, 육이오 동란 이후에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그 설명을 하는 할머니의 손은 허공을 휘젓는다. 과도를 든 상태로.
그 순간, 14열의 군인과 승무원이 뛰어 들어온다. 13호 차량 안으로. 그러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춘다.
- 할머니, 칼 내려 놓으십시오.
- 승무원 양반. 그게 아니라… 내가 옛날 이야기를 조금 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랑 엄마 손을 잡고 내가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갔을 때…
항상 해병대 출신임을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승무원은 번개 같은 동작으로 2C 할머니의 손목을 쳐서 칼을 떨어뜨리게 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른발로 떨어진 칼을 차서 13호 차량의 반대쪽 끝까지 날려 보냈다. 여기저기서 탄성과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사람들의 입이 미처 다물어지기도 전에 승무원은 할머니의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을 뒤로 꺾어 무릎을 꿇렸다.
- 아이고, 내 관절염… 승무원 양반, 사람 잘못 봤어요. 난 그냥 이 양반들 싸우길래…
그러나 9B 남자와 10C 남자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얌전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있다. 부창부수라고 9A 여자와 10D 여자도 새초롬히 자기 자리에서 창밖만 응시한다. 어색할 정도로 갑자기 조용해진다. 갑자기 경북 포항에서 왔다는 3D 좌석의 이면박 씨가 다시 벌떡 일어선다.
- 내가 봤습니다. 난 모든 걸 알아요. 그 할머니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이 바로 면박이요. 그러나 승무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2C 할머니를 원래 자리로 모시고 간다. 옆 좌석 2D의 중년신사에게 묻는다.
- 선생님, 이 할머니 말씀이 사실인가요?
중절모를 움푹 눌러쓴 인자한 눈매의 중년 할아버지는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젓는다.
-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승무원은 인정사정없이 할머니를 끌고 나나고 중년 신사는 가방 속에서 휴대용 물티슈를 꺼내 충분히 끈적끈적해진 2C 좌석의 간이탁자를 닦는다. 이제 더 이상의 질펀한 수박파티는 없을 것이었다.
10C 남자는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9B 남자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린다.
- 짜샤, 넌 진짜 운이 좋은 줄 알아. 내가 너 콩밥 먹게 하려고 했어.
⁃ 해 봐! 할 수 있으면 해봐!
⁃ 콩밥 좋아하냐?
⁃ 그래, 좋아한다. 매일 콩 불려서 매일 해 먹는다.
10C 남자가 먼저 일어선다.
- 그런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계속 반말이야.
9B 남자가 바로 따라 일어선다.
- 반말할 만하니까 한다. 너 몇 살이나 처먹었어?
- 먹을 만큼 먹었다. 그러는 너는? 몇 살이나 쳐드셨길래 그러냐?
아이고 유치해. 아저씨들은 꼭 싸우다가 할 말 막히면 나이를 비교하더라. 화성에 식민지를 만드는 우주적 시대에 아직도 한없이 사소한 인간의 시간으로 몇 년을 비교하고 자빠졌으니. 6B의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래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멀었다니까.
- 민증 깔까? 너 이 씨, 오늘 죽었어. 나 마흔 넘었거든?
- 허! 이거 왜 이러셔. 나도 마흔 넘었어.
경북 포항에서 왔다는 3D 좌석의 이면박 씨가 다시 벌떡 일어선다.
- 난 진작에 육십 살도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 밑으로는 다 알아서 기세요. 그리고 계속 말하지만 내 이름이 바로 면박이요. 이면박. 제발 좀 자세히들 좀 봐요. 내가 누군지 기억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9B 남자와 10C 남자는 들은 척도 않는다. 13호 차량의 누구도 들은 척도 않는다. 이면박 씨는 분통을 터뜨리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9B 남자와 10C 남자는 멱살을 잡는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처음만큼 싸움구경이 재미있지는 않은가 보다. 하나 둘 서서히 눈을 돌려 자기 일을 하기 시작한다. 뜨개질하던 노인은 뜨개질을 하고, 노래 듣던 학생은 다시 이어폰을 귀에 끼운다. 잠자던 아저씨는 다시 안대를 끼운 채 잠을 청하고, 여학생들은 아무 이유 없이 다시 웃음이 터지고, 수다 떨던 아줌마들은 다시 이번 달 곗돈과 돼지엄마의 알 수 없는 행방에 대해 논한다. 누가 멱살을 잡거나 말거나. 6B 소년은 다시 셀레늄을 한 알 삼킨다. 종합비타민을 시간에 맞춰 챙겨 먹는 건 화성 거주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지혜다. 어둠을 헤치고 밤새껏 달려온 은하철도 무궁화는 이제 지구의 위성 달에 접근한다. 15분간 정차할 예정이라는, 그 이후에 30분을 더 달려 최종도착지인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차장의 방송이 흘러나온다.
(201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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