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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배드 네고시에이터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0.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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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형은 수화기를 들고 일곱자리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여섯개째 누르다말고 다시 끊었다가 지역번호부터 다시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누르다말고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선이 아닌 경우 먼저 #15771577을 눌러야 하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팀원들 중 몇몇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켜볼 시간도 아깝다는 듯 자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에도 손형은 #15771577을 누르고 교환원의 지시에 따라 직원번호와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3등급의 보안번호를 꾹꾹 힘주어 눌러 입력하였고, 그 다음에서야 지역번호를 포함한 열자리의 번호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신호음이 가는 듯했다.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힌 그의 이마를 보자면 확실히 그랬다. 딸각, 소리와 함께 수화기 저 편에서 누군가의 숨소리가 전해져왔을 때 손형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여보세요? 김밥낙원이죠?

  손형은 사람 무르기로 유명했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데 대단히 서툴었다. 손형은 항상 휘둘렸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윗 사람에게, 아랫 사람에게. 휘둘리다 휘둘리다 심지어 김밥낙원 주인 아줌마에게도. 그래서인지 우리 케이비아이 (KBI: Kapyung Bureau of Investigation) 문헌정보팀 양산박 팀장은 부러 더 손형에게 이런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이런 심부름을 통해 손형의 물러터진 성향을 고쳐보겠다는 의도였다. 명목상으로는 그랬다.

- 아주머니 여기요. 김밥 좀 주문하려고 하는데요.

  아줌마가 뭐라고 그랬는지 손형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 아, 예. 죄송해요. 제가 얘기한 '여기'는 KBI 문헌정보팀입니다.

  우리는 손형이 통화하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손형이 하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 아닙니다. 국민은행 아닙니다. 가평수사국입니다.

- 아닙니다. 가평지구대는 옛날 이름인 것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손형이 아주 높은 사람하고 통화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 예, 그렇습니다. 낙농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쓰레기하치장 쪽으로 쭉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밥 심십줄인 것 같습니다. 두 줄은 야채김밥, 세 줄은 치즈김밥, 네 줄은 김치김밥, 다섯 줄은 누드김밥, 여섯 줄은 참치김밥, 열 줄은 충무김밥. 이렇게 삼십줄 시키려고 합니다.

  아줌마가 뭐라고 그랬는지 또다시 손형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 아닙니다. 올해로 사십줄입니다. 아직 미혼입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김밥집 아줌마가 손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직 미혼인 손형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예, 알고 있습니다. 바쁘신 시간이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냥 열 줄은 야채김밥, 열 줄은 치즈김밥, 나머지 열 줄은 참치김밥으로 주십시오.

  충무김밥을 시켰던 팀원 몇몇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김밥집 아줌마도 웃긴다. 주문한 대로 갖다주는 게 일단은 장사꾼 도리지. 허구한 날 메뉴를 통일해 달라니 말라니, 점심 시간을 피해서 시켜 달라니 말라니.

- 혹시 죄송하지만 12시 반까지 배달해주실 수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주소가…….

  손형이 다시 말을 멈추었다. 끈기있게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폼이 또 아줌마에게 휘둘리는 것이 분명했다.

- 그럼 12시 40분까지도 괜찮습니다.

- 아, 예. 50분까지라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늘 이런 식이다.

- 예, 제가 정문까지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아, 그럼 제가 낙농사거리까지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아, 그러시면 제가 가게로 직접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팀장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매 번 시키고, 매 번 같은 결과가 나오는데도, 매 번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팀장 놈도 사실 정상인은 아니다. 기가 찬듯 허허 참을 연신 내뱉었다. '허허 참'이라니까, ‘가족오락관'의 허참 아저씨도 생각나는 것이 팀장의 연배가 꽤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정팀장은 손형보다 네 살 아래다. 네 살 아래면서도 저리 당당히 사람을 부려먹을 수 있는 원천은 '사회생활이란 다섯살까지 맞먹는 것'이라는 특유의 지론 덕분이었다. 나이로 관계를 분절하는 것이 몹쓸 관습이기는 하지만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팀장자리에 안착한 정팀장 같은 사람이 할 소린 아니지. 손형이 전화를 끊자 정팀장은 손짓으로 (아주 무심하고 아주 배려없고 아주 기쁜 나쁜 손짓으로) 손형을 불러세웠다.

- 이봐요, 미스타 손! 뭐하는 거예요? 배달을 시켰으면 여기까지 당연히 오게 해야죠. 시간도 없는데.

  미스타 손, 아니 손형은 또 멈칫거리더니만 더듬더듬,

- 그게 지금이 최고 바쁜 시간이라고 하셔서.

- 그럼 왜 또 당신이 찾으러가?

- 경비아저씨가 정문에서 외부음식반입을 막는다고 하셔서.

- 다른 부서에는 배달음식 잘만 들어가던데. 그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본인 능력 부족이라고는 생각 안해봤어요?

-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들어온건지.

- 본인이 방법을 찾아야죠. 본인이. 팀장인 내가 할까요?

- 그게 그래도 기관 원칙은 원칙인데.

- 내가 미쳐요! 우리 돈 내고 우리가 시켜먹는데 왜 장사꾼 눈치를 봅니까! 당당하게 말해요. 갖다달라고.

  잔뜩 주눅든 표정으로 손형은 터벅터벅 전화기에 다가가 수화기를 어깨와 턱 사이에 끼우고 뾱뾱거리며 버튼을 눌렀다. 다시 김밥낙원에 연락을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정팀장이 소리를 빽 질렀다.

- 이 밥통아! 다시 전화해서 뭐라 그러게.

- 갖다 달라고, 당당히 말씀하라고 하셔서.

  그러게. 지가 시켰잖아. 이번에는 정팀장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으나, 워낙 철면피인 양반이라 저가 되려 소리를 빽.

- 그러니까. 빨리 해보라고요!

  보다 못한 내가 손을 번쩍 드었다. 정팀장이 ‘넌 가만히 짜져있지 왜 끼어드냐’는 표정으로 노려보았지만 뭐 지가 어쩔거야. 나이로 이러쿵 저러쿵 하긴 싫지만 어쨌든 정팀장은 나보다도 어리다. 

- 팀장님! 제가 대신 해결하겠습니다. 손요원님이 김밥 심부름할 짬밥도 아니시고. 

- 아따. 동료애 뭉클하네요. 그런데 미스타 김은 미스타 김 일이나 잘해요.

  어린 놈의 새끼가 꼬박꼬박 '미스타 김'이란다. 낙하산 맛을 보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눈짓으로 다른 팀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사실 정팀장은 우리 팀에서 제일 어리다. 다들 한 마디씩 한다.

- 그래요. 팀장님. 사환 여자애나 공익 남자애 시키죠. 손요원님이 김밥 주문 하는 건 좀 아니라고 봐요.

- 사환이랑 공익이랑 손잡고 다녀오라고 해요.

- 참, 둘이 사귄다는 얘기도 있던데.

- 정말요? 

- 며칠 전에 버스에서 공익이가 사환이 무릎에 앉아있는 걸 초현실전담팀 광선유 요원이 봤대요.

- 사환이가 공익이 무릎이 아니라. 공익이가 사환이 무릎에요? 좀 바뀐 거 아닌가요?

- 연상녀 연하남 커플이잖아요. 그럴수도 있겠죠.

- 이 놈들. 우리 기관은 사내 연애를 금지하고 있는데!

  다들 하하호호, 웃는다. 정팀장은 얼굴이 빨개져서 책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 다들 조용히 좀 합시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점심 준비는 미스타 손이 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이 팀의 리더로 일의 분배를 고려해서 신중하게 결정한 겁니다. 다들 따라주길 바랍니다. 이상 끝.

  신중은 개뿔! 팀원들 대부분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광란의 메신져 질주가 시작되었다. 정답게 오가는 이야기의 내용과 양과 질로 미루어 판단하건데 정팀장 저 놈은 아무래도 오래오래 무병장수하게 될 가능성이 커보였다. 한편 손형은 잠바를 챙겨입고 길을 나섰다. 그 등짝이 참 쓸쓸하게 보였다. 자기 차가 없는 손형이 김밥집까지 갔다오려면 만만치 않을텐데. 슬쩍 따라 일어나려는데 옆자리 이요원이 (탤런트 아니다) 내 팔을 붙잡고 속삭였다.

- 김요원, 그러지마요. 김요원까지 찍혀요.

  물론 손형이 잘하셨다는 얘기는 아니다. 김밥집 아줌마한테까지 휘둘릴 필요는 없다. 삼십 줄 정도면 당연히 배달해달라고 요구해볼 수 있는 양이다. 삼십 줄이 뭐냐. 열 줄만 되어도 그렇다. 요즘 김밥 한 줄에 얼마인 줄 아나. 세상에 2,000원이다. 아무 것도 안 들어간 디폴트 일반김밥이 2,000원이다. 참치김밥 같은 걸 열 줄 시키면 피자 한 판 값이다. 그것도 프리미엄급 피자 값이다. 일단 요구하고 배달 해주면 좋고 아니면 말면 된다. 손님은 왕이다. 정 뭐하면 배달해주는 다른 집에서 시켜먹으면 될 일이다. 메뉴를 통일하라고 요구 하지 않는 다른 집에서 시켜먹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까지 끌려다닐 이유가 없다. 김밥집 아줌마도 그걸 알기 때문에 손형에게만 유독 함부로 대하는 거다. 한 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정말 한도 끝도 없는 법이다. 처음부터 강하게 나갔어야 했다. 초현실전담팀에서 서른 한 명이 서른 한 가지 메뉴를 '베스킨 라빈스'적으로 주문했을 때도 군소리 없이 재깍 배달해줬던 김밥낙원 아줌마다. 손형이 무르고 만만하니 손형에게만 이러쿵 저러쿵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고 우리 문헌정보팀에만 주문을 거부하고 배달을 거부하고 자빠진 것이다. 그러니 이거 참, 사람이 너무 좋아도 문제다. 얼어붙은 문헌정보팀 분위기를 녹여보고자 우리 팀의 홍일점이자 공명점이자 애교 만점 이요원이 (역시 탤런트 아니다) 정팀장에게 다가가 아양을 떨었다. 언뜻 듣기로는 이요원의 막내동생이 정팀장과 동갑이라니, 참 이요원 입장에서도 못할 짓이기는 하다.

- 팀장님 화푸세효. 손요원님이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효.

  그러나 정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주 단호하게.

- 가르쳐야지. 김밥 아줌마 하나 제대로 다루질 못하는 사람을 어디다 써.

 

*

 

  한때 손형은 전설이었다. 당시 손형의 명망은 삼장법사를 모시고 천축국으로 향하던 미스터 손 못지 않았다. 기관 내부에서도 촉망받는 인재로 평가받았고 언젠가 KBI 대태러전담팀의 수장이 될 것을 감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네고시에이션 실패가 그를 망가뜨리기 전까지는.

  39전 39승 14KO. 마흔 번째 미션에서 실패하기 전까지 손형의 기록이다.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신출내기들이 대개는 손형을 오해한다. 심지어 손형이 공공기관 장애인 채용 T/O를 받아 들어왔느냐를 놓고 내기가 벌어진 적도 있다고 들었다. 맙소사!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손형은 항상 사람좋게 웃고, 자기 주장 없이 남에게 맞춰주고, 있는지 없는지 눈에 띄지도 않고, 말 좀 약간 더듬을 뿐이다. 단점을 꼽자면 사람 많은 곳에서 약간 공황 상태에 빠지는 정도다. 하나만 더하자면 강박적으로 물건을 정리 정돈하는 정도다. 그렇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얼치기 연수생들에게까지 우습게 보여도 될 사람은 아니다. 그 화려했던 시절에 대해 알 턱이 없는 낙하산 정팀장 같은 놈들에게 조롱당해도 좋을 사람은 아니다.

 

  때는 바야흐로 2011년 11월.

- 이봐, 네가 가진 카드를 모두 꺼내보이면 안돼.

라고 손형은 말했다. 한쪽 귀에는 헤드셋을 다른쪽 귀에는 이어폰을 끼운 채로 그는 쉬지 않고 말하고 쉬지 않고 들었다. 쉬지 않고 손짓을 했고 그 손짓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높고 낮은 현장 요원들은 쉬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뛰어다녔다. 잘 균형잡힌 몸은 방탄조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때 그 남자는 내게 있어 거인처럼 느껴졌다.

  당시 KBI에 갓 들어온 인턴요원으로 부서를 돌아가며 근무하던 나는 7월에 하필 대테러전담부에 배정되었다. 인턴을 보낼 곳이 있고 보내지 않을 곳이 있지 대테러전담부라니! 게다가 인턴에게 시킬 일이 있고 시키지 않을 일이 있지 테러 현장 파견이라니! 혼이 반쯤 빠진 상태로 우왕좌왕하던 나의 어깨를 잡고 손형은 이렇게 말했다. 

- 이봐, 네가 가진 카드를 모두 꺼내보이면 안돼.

  인질 열 명은 마을회관 지하 1층 지하실에 갇혀있었다. 테러범들은 10만 달러와 헬리콥터를 요구했다. 농사 끝난 벌판의 고랑 고랑을 따라 스산하게 찬바람이 불었다. 테러범들의 전화를 받아든 손형의 표정은 비장했다.

- 좋다. 원하는대로 준다.

- 걱정마라. 인질은 풀어준다.

- 믿는다. 열 명 다 풀어주나.

- 다섯 명 먼저다. 나머지 다섯은 함정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풀어주겠다.

  젠장! 손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안된다. 일곱 명 먼저 풀어줘라. 여자와 어린이가 우선이다.

- 일곱 명은 곤란하다. 우린 땅 파 먹고 장사하나.

- 그럼 요구 조건도 들어줄 수가 없다. 우리도 땅 파먹고 장사하는 건 아니다.

- 하는 수 없지. 한 시간에 한 명씩 인질을 해치겠다.

  긴장감이 돌았다. 침 삼키는 소리가 꿀떡.

- 일곱 명이다. 파이널 오퍼다. 7대 3이 아니면 협상은 결렬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나는 손형이 너무 모험을 한다고 생각했다.

- 좋다. 니가 이겼다. 우리가 한 발 양보한다. 6대 4다. 여섯 명 먼저 나중에 네 명이다.

- 좋다. 나도 그 정도에서 양보하겠다.

  헤드셋을 벗고 땀을 닦은 손형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성공이야. 애초에 여섯 명을 먼저 풀어내는 게 목표였지!

  요원들이 박수를 쳤다. 손형에게선 빛이 났다. 천주교 성인은 아니지만 정말 눈부신 남자였다.

  저 멀리서 헬리콥타가 부다다다 부다다다 날아오자 손형은 테러범들과 다시 연락을 시도했다.

- 헬기가 왔다. 더 필요한 것은 없나. 

- 있다. 막걸리 한 됫박만 넣어달라.

- 안된다. 음주운전은 금물이다. 니들이 오늘 마신 막걸리가 내일 니들 가족의 눈물이다.

- 그럼 빼빼로라도 하나씩 줘라. 내일 모레 빼빼로 데인데.

- 좋다.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니 두 개씩 주겠다. 

- 고맙다. 우리가 이짓 여러 번 해보지만 당신 같은 네고시에이터는 처음 본다.

- 칭찬은 됐다. 우리는 너희 인원수를 모른다. 빼빼로를 얼마나 준비하면 되겠는가.

- 한 사람 앞에 두 개씩이면 서른 네개다. 고맙다. 

  손형은 다시 헤드셋을 벗었다. 땀을 닦아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놈들은 열일곱명이군!

  KBI는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 우리 기관의 센트럴 도그마다. 손형의 목적은 단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헬리콥터가 부다다다 부다다다, 진짜로 오기는 했지만 잠시 빌린 것이었다. 빼빼로는 있었지만 10만 달러는 없었다. 손형이 시간을 버는 동안 특수기동타격대는 이틀 전부터 동구 밖에서부터 땅굴을 파서 마을회관으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일단 인질 여섯은 돌려받은 다음 놈들이 헬리콥터를 향해 놈들이 이동하는 그 어수선한 순간에 쾅쾅! 번개처럼 치고 들어가 놈들을 사살하고 나머지 인질 네 명을 구해내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헬리콥터가 부다다 부다다 부다 부다 마을회관 앞마당에 착륙했다. 조종사와 경찰 몇몇이 머리를 숙이고 종종 걸음으로 달려왔다. 한편 특수기동타격대는 보안된 회선을 통해 마을회관 앞마당 아래까지 파고들어와 대기중이라고 무전을 보내왔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등허리가 축축했다. 긴장을 애써 숨긴 채 손형은 놈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약속대로 인질을 풀어줘라.

  하지만 대꾸가 없었다.

-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반복한다.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헤드셋을 벗어 던지고 손형은 다른 요원들에게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고요하던 분위기가 부산해졌다.

- 모르겠습니다. 안에서 아무 신호도 잡히지 않습니다.

- 저격팀에서도 시야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 전화 라인은 살아있습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특수기동타격대가 치고 들어갔다. 그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기관 역사에 길이 회자될 참사의 현장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생존자 없음. 테러범 전원 사망. 인질 전원 사망. 사인은 가슴과 머리에 총상. 방금 전까지도 빼빼로를 몇 개 주니 마니 농담을 따 먹고 있었는데 헬리콥터 착륙하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밖에서는 총성을 듣지 못했다. 누구도 이상 징후를 포착하지 못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사입구와 사출구는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거나 기능하지 않았다. 보다 기가 막힌 일은 그 이후에 밝혀졌다. 스물 일곱 명 모두의 사망 추정 시간이 최소 여덟 시간 전으로 밝혀진 것이다. 검시 결과가 맞다면 손형은 사건 발생 직후 테러범들과 대화를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죽은 사람들을 상대로 네고시에이션을 했다는 얘기가 되었다. 오싹했다. 이해할 수 없는 참담한 결과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 책임을 미루기 시작했다. KBI에서는 특수기동타격대가 최소 여덟시간은 일찍 도착했어야 했다고 주장했고, 특수기동타격대에서는 결과적으로 KBI가 시간을 벌어주는데 실패했음을 탓했다. 윗선에서는 초현실전담부를 진작만들었어야 한다고 난리법썩을 피웠다. KBI 상부에서는 대테러전담부를 문책하겠다고 나섰다. 손형은 일종의 희생양이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한 감사위원은 손형에게 이렇게 호통을 쳤다.

- 귀신인줄도 모르고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를 운운했단 말입니까?

 

*

 

  이후 손형은 대테러전담부에서 물러났다. 현장지원팀으로 옮겼다. 기술지원팀에서라도 경력을 계속 쌓아갔으면 좋았을텐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상부의 지시와 현장의 의견 사이에서 우왕좌왕했기 때문이다. 좀처럼 조율을 하지 못했다. 맺을 땐 맺고 끊을 땐 끊던 냉철한 네고시에이터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모두가 의아해했다. 어떻게 사람이 한 순간에 저렇게 변할 수 있지? 다시 손형은 교육수련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적응하지 못했다. 쉽게 당황하고 쉽게 겁먹고 쉽게 공황에 이르는 그의 모습은 신입 요원들의 교육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손형의 떠돌이 인생이 시작되었다. 경영기획팀, 전략기획팀, 국제협력팀, 운영지원팀, 구매자산팀, 시설장비팀, 정보전산팀, 한경희스팀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나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는 사이 손형은 자연스럽게 우리 KBI의 번외 전력으로 분류되었다. 손형은 언제부턴가 신분 카드를 목에 걸지 않고 옷 속에 꽁꽁 숨기고 다니기 시작했다. 해가 거듭할 수록 강등되어 9급이 된 보안 카드와 팀을 옮길 때마다 늘어난 출입 카드가 옷 속에서 복잡하게 엉켜 일종의 굵고 단단한 밧줄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교수대에서 밧줄을 매달고 걸어나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손형은 항상 주눅들어 있었고 사람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다녔다. 국장님 앞에서 커피를 쏟아,

- 저 병신 커피 서빙도 제대로 못하네.

소리를 듣고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고 들었다. 보다 못한 부국장이 기회를 살펴 넌지시 국장에게 말을 했던 것 같다. 부국장이 좋은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단지 국장과 달리 그는 산재 소송을 염려하고 있었을 뿐이다. (후일 기관 변호인실의 대변인은 손형의 케이스가 산재 사유에 해당할 가능성이 상당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 전에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며칠 뒤 손형은 문헌정보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 년 전 인턴을 마친 내가 마침 문헌정보팀에 있었다. 반가웠다. 그러나 감자깡 빈 상자에 잡동사니를 담아 걸어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내가 알던 손형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어깨도 구부정했고 눈은 풀려있었으며 손도 떨었다. 말을 더듬었다. 더 이상은 천주교 성인처럼 광채를 내지도 않았다. 손형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 중 무식한 몇몇은 '자폐아' 아니냐고 수근거렸다. 유식한 몇몇은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해 논하였다. 안타까웠다. 손형 신화의 마지막 챕터를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문헌정보팀으로 와서도 손형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생활력도 제로고 협상력도 제로였다. (심지어 김밥집 아줌마에게도 당하는 처지가 아닌가!) 자기가 원하는 게 있으면 원한다고 의사를 분명히 해야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한때는 위험하고 지능적인 범죄자들과도 과감한 밀고 당기기를 마다않던 남자가 김밥 주문이나 회의실 예약조차 버거워하게 되어버렸다니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

 

  12시 30분이 되었다. 손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는 척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정문 쪽을 보았지만 손형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서늘했다. 그 날 날씨가 꼭 이랬지. 네고시에이터로 손형의 커리어가 끝나던 날. 마을회관 사건의 미스테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KBI 상부에서는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았다. 조사팀을 꾸렸다가 이틀만에 해체한 것도 이상했고 서둘러 조사 결과 파일을 폐기한 것도 이상했다. 물론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었다. 몇몇가지 근거 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척 외투를 챙겨입지 않고 나왔더니 추웠다. 몸이 덜덜 떨렸다. 손형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손형이 문헌정보팀으로 옮기고 나서 얼마 안되었을 때 화장실에서 단 둘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어깨를 움추리고 고개를 푹 숙인채로 손형은 소변기 앞에 서있었다. 내가 다가가 옆 소변기에 서자 곁눈질로 쳐다보더니만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 요원님, 요즘 어떠십니까? 우리 팀으로 오신지 이제 한 달쯤 되었나요?

- 네, 네. 괜찮습니다.

- 요원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내가 당신 마지막 현장 미션에 참가했던 인턴이라고 이야기하려다가 말았다. 괜히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할 필요는 없지.

- 예, 예, 그럴께요.

- 요원님 정말이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전 이제 3년차인걸요. 참, 학생때부터 요원님 팬이었어요. 요원님 쓰신 책도 다 읽었고요. 국정원 포기하고 KBI 들어가려고 가평에 내려온 것도 요원님 밑에서 일해보고 싶어서였어요.

- 아, 아, 고마워요,.

- 그러지 마세요. 요원님. 아무 이야기나 저한테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 아무 얘기나요?

- 그래요. 아무 얘기나요.

  그러자 손형은 내 귀에 대고 이상한 말을 했더랬다.

- 가평은, 한국의, 로즈웰인겁니다.

 

(201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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