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34. 사장님은 야구광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0. 10. 10.

본문

  사장님은 야구광이다. 뿐만 아니다. 타고난 플레이어다. 사장님은 원 바운드 볼을 체크 스윙하여 안타로 만들어 내는 타격 센스를 가지셨다. 사장님은 포수가 매번 다이빙을 해야할 정도의 다양하고 폭넓은 구종으로 타자를 잡아내는 투구 센스를 가지셨다. 사장님은 1루를 밟지않고 2루 정복을 가능케 하는 주루 센스를 가지셨다. 사장님은 알까고 놓치고 더듬은 다음에도 넉넉히 주자를 잡아내는 수비 센스를 가지셨다. 가공육회사 ‘미트릭스’의 사내리그에서 구원자 사장님은 통산 238승 12패의 전설적인 투수다. 통산 일천 탈삼진에 딱 일곱개만을 남겨둔 상태다. 또한 사장님은 통산 3할 8푼 7리를 치는 전설적인 타자이기도 하다. 통산 홈런도 113개이니 충분히 강타자랄만도 하다. 그래서인지 사장님이 던지는 공은 오금이 저려 칠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사장님만 타석에 들어서면 심장이 쿵쾅거려 공을 던질 수 없다. 사장님은 어김 없이 모든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계시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구원자 사장님의 응원가로 회사 운동장은 떠내려갈 지경이 된다.

 

아침 해가 빛나는 (구원자!) 끝이 없는 바닷가 (구원자!)
맑은 공기 마시며, 자아, 신나게 (쿵쿵쿵! 날려버려!)


  뭐 이런 식이다. 상대팀으로서는 완전 기죽을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니기도 하다. 사장님은 아주 관대한 분이셔서 양쪽 팀에서 골고루 번갈아 활약하시기 때문이다. 어느쪽 더그아웃에서도, 어느쪽 관중석에서도 사장님은 환영받는 존재다. 때문에 우리 ‘미트릭스’의 사내리그에는 세상 그 어느 리그에도 없는 독특한 응원가가 존재한다. 1루측과 3루측에 상관없이 애사심을 자극하는 그룹 응원가이다.

 

미트릭스 없이는 못살아. 미트릭스 없이는 못살아.
미트릭스 없이는 못살아. 정말 정말 못살아.


  이런 노래 몇 번 따라불러주고 나면 회사 사랑하는 마음에 가슴이 벅차다 못해 목이 메인다. 우리가 평소에도 기왕이면 가공육회사 ‘미트릭스’의 제품을 애입하고 애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물론 회사가 잘되야 우리도 좋은 거라는 생각도 있어서겠지만) 이 응원가 때문이기도 하다. ‘미트릭스 없이는 못살아.’ 입에 착착 붙고 머리를 맴맴 돌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흥얼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사장님은 고등학교때까지 야구를 하셨던 분이다. 자기 말로는 청룡기에서 7연타석 홈런으로 우승을 이끌었다고 한다. 마지막 일곱번째 홈런을 극단적으로 당겨치며 만들어내던 과정에서 발목이 접질러져 동료들에게 업힌 채로 그라운드를 돌았다고도 주장하신다. 청룡기에서 7연타석 홈런이 나온 적이 있는지 사실 관계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진실은 멀고 당장 떨어진 업무는 과중하니 일단 미뤄두기로 하자. 사장님은 야구로는 진학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예의 그 7연타석 홈런의 전설을 완성하다 생긴 발목부상이 원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대신 사장님은 경영 수업을 받으셨다. 사장님의 아버지인 전 사장님의 뒤를 이어 사장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장님과 야구의 인연은 사장님이 사장님이 되면서 다시 시작된다. 어느 대학팀에도 실업팀, 심지어 사회인 팀에도 들어가지 못해 본 사장님이지만, 사장님이 사장님이 되니 자기 뜻대로 리그를 만들고 팀을 만들고 마음껏 왕 노릇하면서 뛰어놀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바로 그렇게 출범한 것이 그 이름도 찬란한 가공육회사 ‘미트릭스’의 사내리그다. “역시 돈만 있으면 안되는 게 없어” 라고 투덜거리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구멍가게라도 한 번 꾸려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사장님 욕하면 안되는 나라이니, 일단 닥치고 미뤄두기로 한다.

 

*


  가공육회사 ‘미트릭스’의 사내리그는 매주 한 경기가 열린다. 가장 볕이 뜨거운 시간이 오후 세 시경에 시작한다. 팀은 두 팀이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있고 ‘미드 스파르타쿠스’가 있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마스코트는 풍성한 수염을 자랑하는 섬세한 남성 캐릭터고 ‘미드 스파르타쿠스’의 마스코트는 명품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강인한 남성 캐릭터다. 이처럼 사장님은 리그의 창조자이자 절대자의 자격으로 양쪽 팀에 나름의 성격을 부여하셨고 그에 맞춰 선수를 선발하셨다. 동동식품 내 모든 남성 직원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진행하여 예쁘고 부드럽게 플레이하면 ‘요한 스트라우스’로 보냈고, 과격하고 터프하게 플레이하면 ‘미드 스파르타쿠스’로 보냈다. 사장님의 이분적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 기대에 보답해야 하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남자들은 ‘요한 스트라우스’다운 인사이드 베이스볼을 추구했고, ‘미드 스파르타쿠스’의 남자들은 ‘미드 스파르타쿠스’다운 아웃사이드 베이스볼을 추구했다. 사장님은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팀을 골라서 참여하셨고 우리는 그 하해와 같은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졌다. 사장님과 같은 편이 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사장님과 다른 편이 된다는 건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일요일까지 불러내 이렇게 부담을 주는 이 놈의 회사가 너무 사랑스러워 죽겠다” 라는 주장이 우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었지만, 누구도 사장님 앞에서 대놓고 말할 용기를 보이지는 못했다.

  사장님은 야구광이어서 직원 모두가 야구를 사랑하길 바란다. 사장님은 야구광이어서 직원 모두가 주말 사내 야구 리그에 참여하길 바란다. 허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으니, 진짜배기 야구광들조차 발을 들여놓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내 야구 리그다. 일요일 오후에 사장님과 어울려 하는 운동이 유쾌 상쾌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오후 3시에 게임을 시작하려면 늦어도 오후 1시까진 몸을 풀어놓아야 할 것이다. 어리거나 직급 낮은 직원들 경우에는 오전 11시에는 나와 운동장에 다이아몬드도 그려야 할 것이다. 토요일 저녁에는 단체 훈련까지 받아야 한다 (주중에 일 안 하고 훈련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요약하자면 주말의 강탈이다. 

​  가공육회사 ‘미트릭스’가 주중에 너그러운 회사라면 말을 안한다. 주 5일제는 개나 줘버리기 운동, 여섯시 반 출근 운동, 에브리데이 야근 운동, 프라이데이 회식 운동, 새벽 별 보기 운동, 지하철 막차 시간 연장 운동, 와이프에게 투명 인간 취급당하기 운동 등으로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회사가 주말까지 사장님 여가활동에 맞춰가며 운동을 해야 하니 힘들고 짜증나고 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휴식권의 종말이다. 

​  모두 다 함께 즐거이 운동했으면 좋겠단 사장님의 뜻. 아무도 그걸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장님이라고 우리의 모든 걸 가지려는 태도는 노 땡큐다. 계약서상 정해진 시간 안에서 우리의 노동력을 빨아가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여가 시간의 우리 몸과 마음은 마땅히 소중하게 보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건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이 몸은 물론 마음까지 강탈하려고 든다. 직원들의 영혼, 존엄, 사상, 철학까지 지배하려고 든다. 이건 사장님의 '욕망의 RPG'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대놓고 말해주고는 싶지만 어쩌겠는가. 사장님 욕했다간 자칫 공산당으로 몰리기 십상인 나라이니, 일단 닥치고 미뤄두기로 한다.

 

*


  사장님은 타고난 야구맨이지만 오히려 축구광이었으면 훨씬 좋았으리란 것이 우리 사원들의 중평이다. 확실히 그렇다. 굳이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면 아무래도 야구보다는 축구쪽이 수월한 편이다. 축구는 동적이다. 본능적이다. 여유도 많지 않다. 체력 소모가 극심하다. 반면에 야구는 그렇지 않다. 정적이고, 인내와 생각과 수읽기를 요한다. 여유도 우리지게 많다.  어느 위치에서 무얼 하든지 남의 플레이를 또렷하게 확인 가능하다. 사장이란 사람들은 대개 둔해 터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바보인 것은 또 아니다. 특히, 가식과 아부를 감지해내는 더듬이는 기형적으로 발달한 상태다. 누군가 비위를 맞추려고 (혹은 그 반대급부의 차원에서) 연기를 땡긴다면 못 알아챌 리가 만무하단 뜻이다.

  사장님이 옛날에 7연타석 홈런을 쳤는지, 새끼 손가락 하나로 글러브질을 했는지, 뭐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연세가 마흔 여덟이시다. 그런 남자가 238승 12패의 전설적인 투수이자 3할 8푼 7리의 고타율을 자랑하는 수위 타자가 된 것은 순전히 우리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야구는 복잡한 게임이다. 축구에 비하자면 훨씬 복잡한 게임이다. 축구에서 헛발질 한 번이면 될 일도 야구에서는 각본과 계산과 연기가 필요하다. 셋 중 하나만 어색해도 부자연스러운 냄새가 난다. 축구에서 그냥 미친 척 자빠지기만 해도 될 일도 야구에서는 스무 명 이상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펑고 일만개는 받아봐야 그림같은 핸드커프 연출이 가능해진다. 다이빙 일만번은 해봐야 습자지 한 장 차이로 공이 글러브를 피해가는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쯤되야 사장님의 의심을 사지 않는다. 

 

*


  사장님은 관대한 분이시나 승부욕은 엄청시리 강한 분이셔서, 젊은 애들에게 지고서 발 뻗고 주무실 양반은 절대 아니다. 타이어 치고, 타이어 끌고, 타이어 던지고, 밤을 새워 난리 뽕짝 블루스를 추시는 타입의 양반이다. 그 양반 타고난 성격을 우리가 뭐 어쩔 수 있겠냐만은, 사장님이 밤새서 빠다 돌리고 계시는 중에 누가 감히 편한 마음으로 퇴근을 하겠냐는 점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부장급 자리 지키면 차과장급 자리 지키고, 그러면 당연히 그 아래로도 얄짤없이 자리 지키고, 그러다보면 다 같이 그냥 주구장창 죽을 때까지 일만 하게 생겼다는 거다. 할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 하고. 정 만들어 할 일도 없으면 웹 서핑이라도 하며 시간 죽이고. 연차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반차는 내세에나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사장님은 그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러운 분이지만 히스테리가 없다고는 못하겠다. 자기가 베조스도 아니면서 ‘헤까닥’ 모드로 넘어단다. 자기가 게이츠도 아니면서 분노 발작을 일으킨다.  자기가 잡스도 아니면서 회전 포탑을 가동한다. 자기가 볼머도 아니면서 의자를 집어던진다. 자기가 머스크도 아니면서 마시던 커피를 탁자에 뱉는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만약 우리 구원자 사장님이 세계적인 IT업계의 거물 혁신가라면 우리도 어느 정도 그 지랄병을 참아줄 의향이 있다. 그런데 사장님의 회사를 먹여살리는 대표상품은 스틱형 소시지 ‘네오’고, 우리 회사의 라이벌이라고 해봐야 빌어먹을 ‘천하장사’와 ‘맥스봉’ 이 전부다 (우리 ‘미트릭스’에서 혁신이라고 할만한 것이라고 해 보아야 소시지에 어육 함량을 더해 원가를 절감하는 수준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사장님이 그런 세기의 슈퍼 디바들과 맞먹는 성정을 지녔단 사실이 우리를 미치게 한다. 나아가 그런 성향이 사내 리그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자기의 시즌 및 통산 성적이 떨어지고 있을 때, 어김없이 드러난다는 부분이 문제 중의 문제다. 

  고로 베스트 솔루션은 이거다. 우리가 연기력을 갈고 닦아 사장님께 최적의 만족감을 선물해 드리고, 회사 분위기를 아무쪼록 화기애애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눈치껏 퇴근도 하고 연차도 반차도 (현세에서) 쓸 수 있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이 편이 훨씬 싸게 먹힌다. 우리는 종종 과거 메이저리그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선수들이 얼마나 고충을 겪었을지에 대해 심도깊은 논의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었겠지, 뭐.

 

*


  내가 처음 ‘미트릭스’에 입사했던 그 날이 기억난다. 사장님은 내가 배트를 돌리는 모습을 보시더니,
- 넌 바이올리니스트로구나. ‘요한 스트라우스’에 들어가라.
라고 말씀하셨다. 스윙 폼이 아주 간결하고 부드러웠다는 얘기다.

​  어디서부터 내려온 지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주 일요일 경기에 바로 나는 선발로 출장하게 되었다. 사장님은 ‘미드 스파르타쿠스’의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르셨고 내 앞에 여섯 타자를 모두 줄줄이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괴력을 발휘하셨다. 사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벤치에서 보기엔 특출나게 못칠 공은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도 우리 팀 선배들의 방망이는 어김없이 허공을 갈랐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타석에 들어서서 공 하나를 그냥 흘려보냈다. 원 스트라이크. 정말 못 칠 공은 아니었다. 다음 공도 유심히 관찰하기만 했다. 투 스트라이크. 공 끝에 힘도 없었다. 세 번째 공이 날아왔다. 방망이를 짧게 잡고 가볍게 끊어쳤다. 공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2루수 키를 훌쩍 넘기는 중전 안타가 되었다. 팀의 첫 안타. 동료들의 환호를 기대하며 나는 박력있게 1루까지 달려나갔다. 우리 팀 1루 코치는 영업 2부의 강부장님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기뻐해주시지 않았다. 대신 내 엉덩이를 (토닥거려주는 척 하면서) 뭉클 꼬집으며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 돌았냐? 
라고 하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  그 경기에서 나는 팀의 3번째 투수로 등판하기도 했는데 하필 공포의 4번 타자 사장님과 딱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눈치 없이, 또 나는 절묘한 체인지업으로 사장님의 헛스윙을 유도했다. 원 스트라이크. 그 다음은 예리하게 꺾이는 슬라이더였다. 투 스트라이크. 우리 팀 포수를 보던 연구개발부 2팀의 박대리님이 기겁을 해서 뛰어나왔다. 그 역시 내 엉덩이를 (토닥거려주는 척 하면서) 뭉클 꼬집으며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 돌았냐?
라고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간 엉덩이 반대쪽을 세차게 꼬집어주겠노라며 (반대쪽 엉덩이가 아니라 엉덩이 반대쪽을 말이다) 무조건 자기가 요구하는 위치에 똥볼을 넣으라고 윽박질렀다.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세는 똥볼 던지는 자세가 아니었지만 그건 누가봐도 똥볼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통산 타율 3할 8푼 7리의 4번 타자가 아니라 지나가던 동네 중학생을 데려와도 쉽게 칠 수 있을 그런 공이었다. 당연히, 사장님은 망설임 없는 골프 스윙으로 좌익수 키 넘기는 2루타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행하셨다. 하프 슬라이딩으로 2루에 들어가 나라라도 구한 장군처럼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셨다. 허탈한 기분에 나는 박대리님을 바라봤는데, 포수 마스크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은 <잘했어, 바로 그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벤치에서 나를 주시하던 강부장님은 인자하신 웃음을 마치 <그래 그렇게 하는거야>라는 말을 표정으로 승화시킨 것만 같았다. 뭐가 야릇하게 심장을 부비 부비하는 이 느낌은 마치, 아,

바로 이런 것이 사회 생활이로군요.

  그라운드 안의 모든 남자들이 내게 달려와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토닥토닥해줄 것만 같은 뿌듯함. 마치 레벨 20의 견습기사가 당당히 레벨 1의 기사로 승급한 느낌이랄까.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


​  어렵게 얻은 교훈. 그렇게만 행동하면 사내에서 나의 입지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쩌면 사장님 눈에 들어 총애받으면서 승승 장구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허나, 내 마음속의 어떤 사악한 존재가 이상하고 허황되고 위험한 꿈을 자꾸만 내게 불어 넣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만큼 던지고 쳐보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사장님을 상대로? 사장님을 상대로!

  망상은 점점 더 집요하게 나를 옭아매었다. 언젠가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계급장 떼고, 에라 모르겠다, 사장님을 삼구삼진 잡는 꿈이다. 사장님이 던진 공을, 에라 모르겠다, 시원하게 갈겨서 장외까지 날려보내는 꿈이다. 동료들은 나를 소시오패스 취급한다. 두 번을 그랬다가는 사이코패스 취급할 기세다. 꿈속의 나는 초라하게 항변한다. '사장님이 친 공이라고 사장님은 아니잖아요. 사장님이 던진 공이 사장님은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비웃는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잠에서 깬 나는 매일 다짐하고 집을 나선다. 사장님이 짜놓은 무대 위에서 춤추고 싶진 않단 생각을 접어두기로. 짜릿한 반란의 충동을 넣어두기로. 

​  그런데도 가끔은 짜여진 각본을 어기고 불시에 돌발 행동을 벌여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실체를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아아! 나는 내 머릿 속의 이런 불순한 생각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이 그라운드 안의 어느 남자도 내 꿈과 충동과 망상에 동의해주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 또한 이 게임이 동근 공의 스포츠가 될 수 없음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묵묵히 따르는 것은 그들이 바보여서가 아니다. 직장이 달린 일이고, 생계가 달린 일이고, 가족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에 빌트-인(built-in)된 가장의 숙명 - 그 고단함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내 엉덩이를 뭉클 꼬집던 손들의 온도 - 나는 저 먹고 사는 일의 숭고함을 감히 탓하지 못하겠다.

 

*


  공포의 4번 타자, 사장님이 타석에 들어선다. 투수가 적당히 치기 좋은 볼을 던져줄 차례다. 아마 사장님은 적당히 건드려 놓을 것이다. 이번에는 타율 관리를 위해 사장님께 안타를 드려야 할 타이밍이니 안타성 타구가 아니라면 연기 깨나 때려야 할 참이다. 보아하니 모두가 자기쪽으로는 공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표정이다. 

​  나는 마운드에서 내려와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겼는데 (이처럼 잦은 선수 교체 및 포지션 변경은 "멀티-포지션을 소화하는 인재가 기업을 먹여살린다"는 말씀에 의한 조처다) 이럴 때 내야수에 땅볼은 최악의 조합이다. 뜬공은 조명 탓하며 눈 딱 감고 맹구 짓 한 번 하면 되지만 땅볼은 불가항력을 그림으로 연출해 보여줘야 한다. 외야수는 반 발자국만 느리게 움직이면 타구 방향이 좋아 빠져나간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데, 내야수가 반 발자국 느리게 움직이면 얄짤없이 티가 난다. 강부장님이 손짓으로 사인을 보내 수비 위치를 조절해주셨다. 통계상 사장님의 타구가 절대 닿지 않을 곳이다. 대충 둘러보니 극단적인 시프트여서 좀 웃기게 보이긴 했지만 상관 없었다. 통계대로만 흘러가주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  제발, 제발, 제발, 내 쪽으로는 땅볼이 오지 않기를. 딱, 똑, 똑. 사장님의 골프 스윙은 원 바운드 볼을 따라가 건드려 땅으로 굴려 놓았다. 투수 앞으로 향했다. 4번째 투수 인사부 권대리님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공을 (마치 대단한 강습 타구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글러브로 쳐낸다. 공이 오기도 전에 글러브를 오므리고 있었음을, 나는 봤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급 연기다. 저게 4호봉 대리의 노하우로구나 싶어 숙연해졌지만, 젠장할 권대리님 글러브에 맞고 방향이 틀어진 공은 2루수인 내게로 굴러온다. 재수 옴 붙었다. 힐끔 사장님을 보아하니 지금 잡아서 던지면 충분히 아웃될 타이밍이다. 죽고 싶다. 강부장님의 미소, 양대리님의 눈빛, 권대리님의 안도…… 동료들이 지금 내게 바라는 게 어떤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사장님을 1루에서 잡아내는 게 아님은 확실하다. 콩닥콩닥 튀겨오는 공에 내 가슴도 콩닥콩닥 거린다. 맹구 짓, 맹구 짓이 필요하다.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맹구 짓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맹구 짓. 반 발만 앞으로 나가야 할 걸, 한 발 앞으로 쫓아 나간다. 허공에 글러브질을 한다. 미친 척하고 공이 바운드를 튀길 때, 사뿐히 밟아본다. 자빠진다. 저녁 노을로 물든 하늘이 보인다. 성공했나?

  성공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걸 보니. 흙을 털고 일어나는데 유격수 경영지원부 양과장님이 다가와 엉덩이를 토닥거려준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설마 이러다 내 엉덩이 닳아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  한편 사장님은 2루까지 진루하셨다. 2루 바로 옆에서 2루수가 공을 잡다 자빠졌는데 2루까지 뛰어왔다는 건 기적의 주루센스가 아닐 수 없다. 구원자! 구원자! 환호하는 사원들 앞에서 사장님은 독립 만세를 부르듯 팔을 높이 벌리고 구국 영웅의 포즈를 취해보이신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정말 7연타석 홈런이라도 쳤는 줄 알았을 것이다. 

미트릭스 없이는 못살아. ​미트릭스 없이는 못살아. 
​미트ㅡ 없이는 못살아. 정말 정말 못살아. 

​  1루측 스탠드도 3루측 스탠드도 입을 모아 가공육회사 '미트릭스'의 공식 응원가를 부른다. 몇 번 따라불러주고 나면 회사 사랑하는 마음에 가슴이 벅차다 못해 목이 메이는 뭉클한 노래다. 사장님은 어디서 본 건 있으셔서 어퍼컷 세레모니를 연신 날리신다. 1루와 3루를 가리지 않고 터져나오는 함성에 귀가 떨어져나갈 지경이다. 맞다. 그렇다. 그라운드 안의 모든 선수, 심판, 관중이 이 남자 하나를 위해 일요일 오후에 이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마치, 북쪽 어드메에 있는 세습형 독재 정권과 비슷한 거 아닙니까?' 라고 묻고 싶어졌지만 어쩌겠는가. 사장님의 영험함에 토를 달았다가는 자칫 반기업정서를 가진 불순반동 분자로 찍히기에 딱 좋은 나라이니, 일단 닥치고 미뤄두기로 한다.

(2010년 10월)

반응형

'낙농콩단 > Season 6-10 (2006-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5. 21세기 기사도  (0) 2010.11.07
132. 배드 네고시에이터  (0) 2010.08.15
131. 동대표고 똥대표고  (4) 2010.07.18
130. 70대 담론: 70대가 문제다  (0) 2010.06.20
128. 나는 워커다  (0) 2010.04.25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