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41. 슈피겔 임 슈피겔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1. 4. 24.

본문

 

1. 약이 떨어졌다. 가방을 뒤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다. 약은 내게 시간을 지탱하고 형벌을 유예(猶豫)하게 한 힘이었다. 약이 떨어질 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이렇게 넋 놓고 앉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약이 떨어졌다고 약효가 금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건 '있다'와 '없다'의 개념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천히 생겨났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하늘을 날아가는 하얀 공처럼 아주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린다. 의사 말에 의하면 적어도 하루 동안은 약이 떨어졌다고 발작할 염려가 없다. 하지만 '약이 떨어졌다'는 현실의 인식이 끝내 나를 피로하게 된다. 단 일분 일초도 그 사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약이 없다. 가방 안이 비었다.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나는 가방을 거꾸로 들어 탁탁 털어낸다. 내용물을 손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래도 없다. 푹신하게 묵은 먼지와 함께 가방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두 개의 일회용 티슈와 쓰다만 AA 건전지, 그리고 기한이 지난 신용카드 고지서다. 더 이상 약은 없음을 알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다. 무거운 추에 꽁꽁 묶여있는 느낌이다.


2. 약이 떨어졌다는 생각을 머릿 속에서 지워낼 수 없음에 나는 창 밖에 다가선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가 맞은 편에 있다. 그 다음에도 똑같은 아파트가 있다. 그 너머에도 똑같은 아파트가 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끝없이. 그 모양새가 얼마나 똑같은지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하다. 아니, 거울 속의 거울을 보는 듯하다. 저쪽에 살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이 곳의 모습이 꼭 나와 같을 것이다. 즉, 나는 나를 보고 나는 나를 본다. 마주 보느니 서로다. 그 안의 또 다른 나는 약이 떨어졌을런지도 모른다. 약이 떨어졌다. 하루 정도는 발작할 염려가 없음에도 그걸 인식함으로 인해 피로하다.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방을 뒤진다. 탁탁 털어 내며 먼지 속에서 두 개의 일회용 티슈와 쓰다만 AA 건전지, 그리고 기한이 지난 신용카드 고지서다. 추의 무게감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잔상처럼 또다른 나에 매서웁게 새겨진다. 나는 그걸 아주 분명하고 똑똑히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있고 또다른 나는 또다른 여기에 있지만 알 수가 있다. 사실 알아야 하는 것이며 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흠칫 놀란다. 문득 반대편 B동의 속속들이가 꽤나 잘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A동에 살고 있거나 혹은 A동에 살고 있는 이는 나이다). 삿갓을 닮은 거실 전등의 모양이 보인다. 반쯤 쳐져 있는 블라인드의 독특한 색감이 보인다. 맞은편 벽으로 향한 텔레비젼의 위치가 보인다. 반대쪽의 쇼파 배치도 보인다. 생각보다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인다. 이만큼 가까운 줄을 미처 몰랐다. 어둠을 뚫고 보이는 그 집은 가깝고도 멀다. 멀지만 속속들이 보이기에 가깝다. 정말 저것이 맞은편 저 집의 모습인가, 나는 의문을 가진다. 혹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예의 그 약 기운 중 일부의 앙금이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내 눈을 흐리게 한 것은 아닐까. 잠시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어서 현실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은 무겁다. 어릇어릇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대충 어디서 뭘 한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망원경 따위도 필요치 않다. 맨 눈이면 충분하다. 도구를 사용하여 남의 집을 훔쳐본다는건 언제적 이야기인가. 도구가 없어도 가능한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달리던 내가 그걸 놓치지 않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여기는 의식이거나 혹은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미분(微分)된 의식의 집합체이며 무의식이 모여 의식을 이룬다. 


4. 반대편 B동의 그 집. 내가 들여다 보던 그 곳은 나의 집과 똑같이 닮았다. 쇼파가 놓여있는 위치가 닮았다. 나의 집에도 쇼파는 그 자리에 있다. 그 반대편에 놓여있는 텔레비전. 나의 텔레비전도 그 자리에 있다. 동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양주장. 나의 양주장도 그 자리에 있다. 같은 양주가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A동과 B동은 적어도 30미터 이상은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반쯤 걷어진 채로 어둠의 장막을 가려내는 블라인드. 나의 블라인드도 꼭 그만큼 가리워져 있다. 점점 예감이 든다. 오천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던 퍼즐조각이 차츰차츰 맹렬히 움직여 제 스스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려는 듯 예감은 적확하다.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차츰 창가로 다가온다. 나처럼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마치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듯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인정한다. 몇 십 미터가 떨어져 있다는 따위의 물리적 거리와는 상관없이 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은 겹쳐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중 A동 육층에 있는 남자가 나요 B동 육층에 있는 남자가 그다. 나의 집과 그의 집은 무척 닮았거나 완전히 똑같다. 그의 집과 나의 집은 완전히 똑같거나 무척 닮았다. 같은 집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의 약 또한 떨어졌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도 가방을 뒤졌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약을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5. 거울처럼 나를 보니, 두려움이 일었다. 뒤를 돌아보니 맞은편 B동의 그 집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다가온다. 여기는 나의 집인가 그의 집인가. 내가 만약 의심의 여지없이 나라면 나는 오늘 A동 육백십삼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는 A동 613호 나의 집이 분명하다. 다시 뒤로 돌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내 등 뒤의 집안 광경이 축소되어 맞은편 B동의 613호에 들어가 있다. 저기는 나의 집인가 그의 집인가. 아니면 객관화된 또다른 내가 바라보고 있는 또다른 나의 집인가. 약은, 만약 약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를, 나의 집은 그의 집을, 혼동하지 않았을까. 아님 그럼에도 혼동할만큼 나와 그는, 나의 집과 그의 집은 닮은걸까. 


6. 적막감을 이길 수 없어 나는 그녀를 불렀다. 고독을 이길 수 없을 때마다 나는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이름은 베티다. 한때 베티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났다. 정말로 매일이었을까. 하루 이틀쯤은 빼먹었을런지도 모르나 그래도 매일, 이라 해도 좋을만큼 자주 만났다. 그래 맞다. 베티와 나는 매일 만났다. 그 또한 한때의 이야기다. 나는 그녀의 긴 머리가 좋았다.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머리가 좋았다. 그녀의 뒤통수로 팔을 뻗어 그 무수한렀다. 가닥을 흩어보며 손 위에서 부수어지는 감촉을 느껴보고는 했다. 마치 손으로 파도를 들어올리기라도 하는 듯 머리카락은 밀려오고 쓸려갔다. 새 이불을 처음으로 덮어보는 날처럼 아주 포근한 느낌이었다. 이따금씩 베티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하얀 담배가 표적처럼 흔들렸다. 그럴때면 나는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여준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나는 허리를 조금 숙인다. 그럼 흑갈색 머릿카락은 그녀의 하얀 목과 어깨를 가지런히 쓸고 내려와 허공에서 그네처럼 출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담배 피우는 여자를 싫어하기 때문에 왼손을 뻗어 담배 끝을 잡아채 버린다. 지지지직. 고기 타는 냄새가 난다. 재떨이 위에서 주먹을 편다. 불만 붙었다가 꺼진 새 담배가 형편없이 구겨진 채로 낙하했다. 사실 베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피울 줄도 모른다. 그냥 입에 물고 시늉만 할 뿐이다. 딱히 의미가 없기 때문에 딱히 설명할 수 없다. 그딴 시늉을 왜 하느냐면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약간 숙여 머릿카락이 흘러내린 그녀의 모습을 좋아하고 뭔가 입에 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좋아하고 미간을 살며시 찡그리며 뭔가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낸게 담배다. 베티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담배를 가지고 다닌다. 나 또한 피우지 않을 담배에 불을 붙여주기 위해 지포 라이터를 가지고 다닌다. 


7. 베티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후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초조감을 이기지 못해 거실안을 우왕좌왕하며 나의 집을 둘러보고 맞은편에 보이는 그 집 거실 안을 훔쳐보고 얼음을 채운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채워 마시고 정서불안에 걸린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문을 연다. 마침 베티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일단 와락. 끌어 안고 본다. 더워. 좀 놓고 얘기해. 그녀가 말에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미 두려움이 신경의 곳곳을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솜을 채워넣은 베개보다 보드라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가슴 부근에서 출렁거렸다.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는 것 같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는 그녀의 질문이다. 나는 설명하고 싶지만 설명할 수가 없다. 반대편 B동의 저 집이 우리집과 닮았고 B동의 저 남자가 나를 닮았으며 고로 여기가 A동인지 B동인지 내가 나인지 그인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날 잘 알고 내 정신상의 문제를 잘 아는 베티라도 그것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돌았다고 할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친 놈’이라고 할런지도 모른다. 


8. 미친 놈. 예상대로 베티는 나를 '미친 놈'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천천히 베란다로 다가가 맞은 편에 있는 B동을 건너다 보았다. 내가 미친 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도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한번 확인해 보고자함일까. 그럼 그녀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과 완전히 똑 같은 저곳을. 그녀는 아무말 하지 않고 돌아와 쇼파에 걸터 앉았다. 천천히 다리를 꼬고 핸드백을 뒤져 담배를 꺼냈다. 입에 문다. 반사적으로 나는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그녀는 알맞게 고개를 숙였고 흑갈색 머릿카락들의 선이 미끄러지며 하나의 아름다운 면을 만들었다. 집중하려는 듯 찡그린 그녀의 미간이나 취한 듯 내리깔은 그녀의 눈, 그리고 볼록 튀어나온 볼을 바라보며 천천히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그 불을 쥐었다. 치지직. 손 안에서 폭탄이 터졌다. 손바닥이 홀랑 타들어가서 뜨거웠다. 고통과 통증이 신경줄을 타고 빠르게 뇌로 전달되어 들어갔다. 하지만 동시에 기뻤다. 엔도르핀이 샘솟았고 말로는 풀어낼 수 없는 만족감이 내게 평화와 안식을 주었다. 나는 말했다. 이제 좀 나아진 것 같아. 


9. 자긴 그게 문제야.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라는 그녀의 말이었다. 감당할 수 없으면 뭐든 믿어버리지. 감당 못하겠으면 그냥 감당하지 않으면 되는건데. 당신은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게 아니야. 저쪽 집은 당신 집이랑 같은 점이 하나도 없어. 얼굴도 보이지 않는 저쪽 집 남자가 당신과 닮았을거란 생각부터가 이상해. 이 깜깜한 밤에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어.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약이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거나 짓지 않았는데 베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 들었다. 맞지? 약이 떨어진 거지?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거고 그래서 나를 부른거지? 나는 뭐라고 대꾸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놈의 약, 약, 왜 그렇게 약에만 의존하려고 해? 약을 끊어도 충분히 살 수가 있어. 베티는 발악하거나 발악에 가까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약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약은 내게 시간을 지탱하고 형벌을 유예케한 힘이었다. 약이 없으면 시간은 끝나고 가혹한 형벌만 남는다. 모든 것의 분열 - 하나의 그림이 오천 조각의 퍼즐로 나누어지듯 그렇게 산산히 부서진 가루만이 남을 것이다. 


10. 베티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지금 내게 약은 떨어졌지만 지금 내게 그녀는 남아있다. 베티는 약이 아니지만 약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다. 약에 취하듯 베티에 취하면 나는 고통을 잊을 수 있다. 그 또한 중독, 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중독은 나쁘다. 하지만 그 나쁜 것마저 없으면 내 존재는 종말을 맞는다. 종말보다야 중독이 낫다. 베티를 뒤에서 버럭 끌어 안는다. 아주 잠시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녀의 핸드백으로 손을 넣었다. 조그만 담배갑이 손에 잡혔다. 딱 알맞은 크기다. 그 또한 황금의 비율로 계산되었다는 것이다. 뭘 하려는거야? 그녀가 물으나 아랑곳 하지 않는다. 뚜껑을 제끼고 한 개비를 꺼낸다. 그녀의 입에 물린다. 주머니를 뒤져 지포 라이터를 찾는다. 또 왜 그래? 왜 그러냐니. 항상 그랬듯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지. 주홍빛으로 잠시 밝아지는 그 얼굴과 집중하느라 찌푸린 눈썹, 그리고 복어처럼 부풀린 뺨 때문이지.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피울줄도 모른다는 그녀 때문이지. 오직 나를 위한 연출, 그 얼마나 완벽한 환상이라는 말인가. 드디어 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싫어. 그녀가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퉤, 하고 뱉어 버렸다. 그런 광대 놀음도 이젠 지겹단 말야. 


11. 그게 나를 화나게 한다. 약이 없는 지금 내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베티와의 놀음 뿐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담배를 가지고 다니며 피우지 않을 담배에 불을 붙여주기 위해 지포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는, 그게 바로 배려다. 그걸 광대 놀음이라니. 나는 다시 담배갑을 찾아 한 개비를 꺼낸다. 그녀의 손이 하얗게 날아와 쳐낸다. 싫어. 저 멀리 담배가 날아가서 데굴데굴 거실 바닥을 뒹군다. 너무한다. 나를 위해 조금만 더 나의 바보 같은 놀음에 동참해 줄 수는 없단 말인가. 가슴은 점점 두근거리고 앞은 점점 만화경처럼 돌아간다. 무수한 대칭적 형상으로 물든다.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베티의 손을 잡아 챈다. 그녀는 거실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나는 그 위에 앉는다. 양 팔로 베티의 양 팔을 짓 눌렀고 무릎으로 베티의 양 다리를 누른다. 베티는 버둥버둥 거렸으나 힘으로 내게 벗어날 수는 없다. 퉤. 침이 날아왔다. 차갑고 끈적끈적한 것이 얼굴에 묻었으나 그 기분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 허나 기분과는 상관없이 잘못은 잘못이고 벌은 벌이다. 베티는 벌을 받아야 한다. 내가 목격한 것을 틀렸다 말하고 나의 놀이를 거부한 벌을. 팔을 뻗으니 하필 가위가 잡힌다. 역시 딱 알맞은 크기다. 잡기가 좋다. 오른손으로 충분히 힘이 실리도록 잡아 몇 번을 내리 찌른다. 꺄아악. 귀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던 베티는 가슴팍을 몇 번 찔리자 이내 잠잠해진다. 어디선가 빨갛고 진득한 피가 물컹물컹 솟아 오른다.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어보니 온천물처럼 따듯하다. 가만히 귀를 가져다 대어보니 아기 때로 되돌아 간 것 같다. 행복했고 만족스러웠거나 만족스러우면서 행복하다. 그녀의 핸드백에 다시 손을 뻗는다. 담배갑에서 하얗고 긴 담배를 하나 스르륵 꺼내어 그녀의 입에 꽃아 놓는다. 손으로 잡았던 부분에 피가 묻어 검붉은 자국이 남았으나 어떤 면에 있어선 그게 더 매력적이다. 그녀의 보드랍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부챗살의 모양새로 바닥에 흘러내려 있다. 입에 담배가 꽃힌 채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대자로 누운 그녀를 내려다보니 기분이 무척 좋다. 최근 며칠간 이렇게 좋은 기분은 없었지 싶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왼손을 뻗어 그 끝을 잡는다. 그래, 베티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까. 치지직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하고 역겨운 냄새가 난다. 이제 별로 뜨겁지도 않다. 손바닥 안에서 형편없이 구겨져버린 담배를 피투성이 바닥의 아무데나 던진다. 


12. 나는, 천천히 일어나 손에 묻은 피를 옷에 닦고 베란다로 나갔다. 다시 한 번 B동의 그 집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분명 그 집은 이 집과 똑같이 생겼다. 베티가 그걸 확인하지 못한 까닭은 내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병신 천치로 생각하거나 약에 취해 사는 거짓말쟁이로 취급한다. 기분 나쁜 일이니 죽어도 싸다. B동의 육층이다.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다시 봐도 그 집은 우리집과 닮았다. 똑같다. 똑같이 닮았다. 베티는 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연함을 확인하지 못했다. 여기는 저기고 저기는 여기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두려움이 없진 않다. 거리와 상관없이 B동 육백십삼호는 텔레비전 화면처럼 분명하게 보인다. 거실에는 웬 피투성이 여자가 널부러져 있다. 저벅저벅, 남자가 걸어다는 그림자가 보인다. 내가 아까 보았던 그 남자이거나 그 남자가 아닐 것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걸어나와 베란다 앞에 섰다. 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남자의 몸에는 피가 묻어있다. 한 손에는 가위가 들려있다. 그 남자가 웃는다. 씨익 웃는다. 나를 향해 웃는 것인지 그를 향해 웃는 것인지 나와 그 모두를 위해 웃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2011년 04월)

반응형

'낙농콩단 > Season 11-15 (2011-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6. 위켄드 업데이트 2  (0) 2011.09.11
145. 결혼만은 안돼요  (2) 2011.08.14
142. 스팍과 커크  (0) 2011.05.22
140. 세번째 클론  (0) 2011.03.27
137. 파라다이스 로스트  (2) 2011.01.02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