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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파라다이스 로스트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1.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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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 부부가 60인치 평면 텔레비젼을 산 줄 알았다면 스미스씨 부부는 절대 같은 모델의 50인치 평면 텔레비젼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50인치라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이유는 없었으나, 아시다시피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스미스씨는 옆집 부부를 싫어했다. 스미스 부인 역시 옆집 부부를 싫어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옆집 부부 역시 그들을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옆집 부부는 잘난 척이 심했다. 쳇! 딱히 잘난 것도 없으면서. 


  옆집 남자도 스미스씨와 마찬가지로 ‘마스 & 미스터 리사이클링’에서 일했다. 화성 표면의 너절하고 잡다한 쓰레기를 뒤져 쓸만한 것을 골라 파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너나 나나 ‘쓰레기 하이에나’ 인생이긴 마찬가진데 꼭 잘난 척을 하는 것이 문제였다. 옆집 부부는 그랬다. 좋은 가구나 가전을 들여놓으면 꼭 노골적으로 자랑을 했다. 스미스씨는 그런 그들을 불쾌하게 생각하였고 고로 경멸했다. 경멸을 표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그는 최소한 옆집 부부보다는 비싸고 좋은 물건들로 집을 꾸미기로 결심했더랬다. 

 

  물건을 팔면 병뚜껑을 받았다. 종이 돈이 사라진 이 시대, 이 세계의 화폐 단위다. 대량생산, 대량유통, 대량소비시대가 남긴 유일하고도 정직한 유산인 병뚜껑은 신기하게도 모든 화폐의 조건을 갖춘 것이기도 했다. 스미스씨는 벌어오는 병뚜껑의 대부분을 집 꾸미기에 투자했다. 물론 옆집 부부 또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사실, 모든 화성 이주민들의 삶이 그러하였다. 이미 몇 세기 전부터 화성의 표피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상태였고 하루가 멀다하고 더 많은 쓰레기들이 운반되어와 그 위로 뿌려졌다. 그리고 그 중에는 항상 쓸만한 것들이 섞여 있었다. 겉보기에는 딱히 쓸만할 것이 없을듯해 보이더라도 막상 뒤지기 시작하면 항상 돈 될만한 것들이, 아니 병뚜껑 될만한 것들이 있었다. 좋은 쓰레기들은 값이 꽤 나갔다. 잘만하면 주머니 안에서 짤랑거릴만큼 벌어올 수도 있었다. 그래도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더 많은 병뚜껑을 벌어와야 해. 그리고 그 중의 더 많은 액수를 집 꾸미기에 투자해야 해. 

 

  스미스씨는 매일 같이 가계부를 앞에 놓고 씨름을 했다. 알뜰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였지만 옆집 부부와의 경쟁이 언제나 순탄치만은 않았다. 솔직히 열세였다. 그가 라디오를 사면 옆집 부부는 오디오를 샀다. 뒤이어 그가 오디오를 사면 옆집 부부는 하이엔드 스피커를 줄줄이 연결한 거대한 스탠드 오디오를 샀다. 그가 간신히 게임의 균형을 맞춰놓으면 옆집 부부는 그 대단한 오디오에 홈 시어터까지 연결해버렸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가 선풍기를 사면 옆집 부부는 에어컨을 샀다. 그가 정수기를 사면 옆집 부부는 각얼음이 쏟아지는 정수기를 샀고, 그가 미니 바를 만들면 옆집 부부는 미니 바를 만들고 한술 더 떠서 지하실에 당구대까지 설치해 놓았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너나 나나 ‘쓰레기 하이에나’ 인생인 주제에. 딱히 더 잘난 것도 없을 인간들이 항상 더 좋은 물건을 사들이고, 또 굳이 그걸 자랑해가며 거들먹거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스미스 부인은 그의 팔을 잡아 끌며 이렇게 말했다.
- 옆집 사람들 말이에요. 여섯 개의 디스플레이가 달린 냉장고를 샀어요. 
- 뭐? 여섯 개라고?
- 어쩐지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차를 대접하고 수선을 떨더라고요. 
- 아니, 여섯 개라고?
- 그래요. 여섯 개란 말이에요. 

 

  쯧, 그는 혀를 찼다. 냉장고에 화면이 여섯 개나 나올 이유가 뭐 있단 말인가. 하지만 분명 동시에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의 냉장고는 화면이 하나였다. 대신 문짝이 세 개였다. 옆집 부부가 문짝 하나짜리 냉장고를 문짝 세 개짜리로 바꾸었기 때문에 (게다가 촐싹 맞게 그걸 자랑했기 때문에) 모아두었던 여유 자금까지 탈탈 털어 서둘러 장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마저도 이젠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냉장고에 문짝이 세 개여서 뭘 어쩐단 말인가? 그리고 왜? 아니 도대체 왜? 항상 옆집 부부보다 한 발씩 늦을 수 밖에 없는거지? 왜 그들을 뒤따라갈 수 밖에 없는거지? 이를테면, 있잖아. 내가 먼저 문짝 세 개 달린 냉장고를 하고 그들이 따라서 샀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먼저 여섯 개의 디스플레이가 달린 냉장고를 사고 역시 그들이 한 발 늦게 따라 사는 일도 가능했을거야. 그런데 현실은 항상 이런 식이지? 그들은 앞서 나가고 나는 그저 따라할 뿐이고. 도대체 왜? 

 

  그러나 종래에 가서 그가 마주한 것은 이번에도 항상 도달하는 그 결론이었다.
- 우리도 여섯 개의 디스플레이가 달린 냉장고를 사야겠어.

 

*

 

  잠에서 깨었을 때 스미스씨는 홀로 있었다. 토굴 특유의 건조하고 후끈한 공기가 뺨을 거칠게 간지럽혔다. 목도 텁텁했다. 그는 텅 빈 방에서 혼자 일어나는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기억에 따르면 (아니 기억이 정확하다면) 지구에 살던 시절부터 그랬다. 그는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까지 여전히 꿈 속에 있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하지만 그렇게 오래 효과가 지속되는 닥터 아야와스카는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언젠가는 개발될지도 모르겠지만.

 

  생각같아서는 닥터 아야와스카를 한 잔 더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발레스 매리너리스 (Valles Marineris)로 향해야 했다. 쓰레기를 주워 팔아 병뚜껑을 벌어 하루 빨리 여섯 개의 디스플레이가 달린 냉장고를 주문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스미스씨는 작업복을 갖춰 입었다. 지구의 삼 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화성의 중력과 그로 인한 희박한 공기, 그리고 극한의 조건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유일한 방어선이었다.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한 발 한 발 내딛어 지상으로 향했다. 몰아치는 모래 폭풍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내가 마주하는 것이 현실일까? 어쩌면 꿈이 아닐까? 꿈이 아니라면 여기가 일종의 사후세계 비슷한 것은 아닐까? 

 

  누군가 말했다. 볼을 꼬집어보면 꿈인지 생신지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꼬집혀진 그의 뺨은 여전히 아프고 얼얼했다. (아마도) 꿈은 아닌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림처럼 풍화하는 사막을 발 아래 딛고 서서 무엇이 현실이라 말할 자신이 없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잿빛 하늘을 머리 위로 이고 서서, 또 가끔 그 사이로 타지도 않고 비처럼 내리는 운석들을 보며 도대체 무엇이 현실이라 규정할 자신이 없었다. 오직 믿을 건, 그래 맞아. 오직 믿을 건,

 

닥터 아야와스카. 

 

수 시간 이상 지속되는 환각을 일으키는 이 강렬한 탄산음료를 통해 화성 이주민들도 과거 지구에서와 같은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다. 분명 기억 중추의 어느 구석에 남아있던 과거 경험의 잔영이 출력된 것이겠으나 대부분의 화성 거주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형 세트를 열심히 꾸민 만큼 누릴 수 있는 일종의 대안적 삶이라고 생각했다. 닥터 아야와스카와 짝을 이루어 판매되는 모형 세트는 가로 32 센티미터 세로 32 센티미터의 작은 주택 미니어쳐였다. 하나의 거실과 하나의 부엌, 그리고 두 개의 화장실이 딸린 세 개의 방으로 구성된 단층 구조였고 모델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누구에게나 - 잘났거나 못났거나, 병뚜껑이 많거나 적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 모형 세트만은 공평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미니어쳐 주택에 들어갈 수 있는 미니어쳐 가구와 미니어쳐 전자제품을 구입했고 끝이 가느다란 핀셋을 사용하여 모형 세트 내부에 조심스럽게 설치함으로써 만족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잔인한 현실인 화성의 토굴 대신에 그 안에 들어가 살기를 소망했다. 그 과정에 있어 닥터 아야와스카는 욕망의 방아쇠와 같은 역할을 했다. 가사 상태로 접어든 이들은 자신이 꾸며 놓은 모형 세트 안에서의 미니어쳐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은 현실의 기준으로 아주 잠시였지만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은 영원처럼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닥터 아야와스카가 환각을 유발한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지구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판매 금지되었던 음료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의 윤리적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이 대목에서 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환각 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복용자의 가사 상태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테이블 위 작은 모형 세트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하는 부분이다. 백이면 백, 닥터 아야와스카를 마시는 모든 사람들이 모형 세트에 한정된 환각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분명 이상한 일이다. 역사상 인류를 위험한 환상 속으로 인도한 다양한 천연 및 인공 물질들이 있었지만 그 효과는 보통 복용자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차원에서 저마다 다른 것들을 보았다. 닥터 아야와스카처럼 하나의 '틀'이, 마치 연극의 ‘세트’처럼 규정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과연 이것을 현실의 자장에서 자유로운 경험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는 부분은 오랜 논란의 원천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호사가들과 학자들이 화성의 이주지역으로 찾아와 이 현상을 연구했다 (정말로! 학문적 호기심 때문에?). 학자인 동시에 호사가이기도 한 이안 K. 스튜어트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남겼던 기록을 되짚어보자.

 

화성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토굴을 하나 임대했다. 화성 거주민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토굴 안에는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 침대 하나, 협탁 하나가 전부였다. 시골 고속도로 출구 근처의 싸구려 모텔 같았다. 당연히 창문은 없었다. 땅 속이니까! 닥터 아야와스카 한 병을 암시장에서 구해왔다. 모형 세트도 함께 구입하여 자그마치 10 퍼센트 디스카운트를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바가지를 쓴 거였다. 나는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세트는 모델 하우스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축소 모형 중 하나처럼 보였다. 별 다를 건 없었다. 닥터 아야와스카의 뚜껑을 돌려 땄다. 칙, 하고 탄산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났다. 순간 죄의식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금지된 음료’를 마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협탁을 열어보니 마침 성경책이 있었다. 이런! 이거 정말 고속도로 출구 근처의 싸구려 모텔 같군! 기쁜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다. 충분히 읽어 충분히 마음이 안정되고 나서야 비로소. 비로소 닥터 아야와스카를 마실 수 있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웠다. 살짝 수면 상태로 빠져드는가 싶더니만 눈이 번쩍 떠졌다. 나는 낯선 침대 위에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결코 화성의 토굴이 아니었다. 아주 깨끗한 방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거실이 있었고 부엌이 보였다. 방은 세 개였다. 화장실이 딸린 방이 두 개였다. 이런 구조의 집을 본 일이 있었다. 다만 안에서 본 것이 아니라 위에서 보았더랬다. 맙소사! 정말 모형 세트 안에 들어와 있는 거잖아? 믿을 수가 없었다.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이런 저런 일상적인 일을 시도해보았는데 (맞다.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는 것도 해봤다) 그 경험은 마치 진짜처럼 생생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닥터 아야와스카와 이 싸구려 모형 세트가 도대체 어떤 쿵짝이 맞기에 이런 환각이 펼쳐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엔 별 연결 고리가 없어 보였다. 음료의 화학적 성분이 뇌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자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처럼 구체적인 상황을 지정하고 유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보였다. 슈퍼 컴퓨터와 줄줄이 연결된 헬멧 따위를 쓴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때까지 화성 거주민들이 모형 세트에 너무 강렬한 집착을 가졌기 때문에 환각 속에서조차 그 안에 예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 여겼었다 (그게 나의 가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제 막 화성에 도착해 대충 모형 세트를 받아다가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뜨내기 여행자가 화성 생활이나 모형 세트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지구에선 성공한 명사로 그보다 열 배나 넓은 펜트하우스에 사는 나였다. 그딴 코딱지만한 집이야 쥐뿔도 관심도 없었다. 작은데 텅 비었기까지 하니 더욱 보기 싫었다. 이게 뭐야? 너무 휑하잖아,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가구를 좀 들여놓아야 겠어. 그리고 텔레비젼도 필요하겠지. 이왕이면 아주 큰 놈으로.  



*

 

  스미스씨는 그 거대한 동산을 '문명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한때 누군가의 삶의 일부이자 지표이기도 했던 물건들이 초라하게 적층되어 있는 더미를 말이다. 그 곳은 스미스씨의 일터다. 스미스씨는 여기를 뒤져 쓸만한 물건을 찾아다가 발레스 매리너리스에 있는 재활용 센터에 가져다 팔았다. 하이에나. 스캐빈져. 툼레이더. 프로운. 뭐라고 부르든 아주 새로운 종류의 직업은 아니다. 과거의 지구에서도 있었던 생계의 방법이다. 남의 집 쓰레기 봉투나 공공 장소의 쓰레기 통, 그리고 쓰레기 하치장에 숨어있을 잠재적 보물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다. 쓰레기란 한때 가치를 지녔던 것이기에 쓰레기다. 그 중에는 예전만 못해도 여전히 가치를 지닌 것들이 있다. 한때는 폐지와 재활용품이 최고였다. 종이는 항상 돈이 되었고 빈 캔이나 빈 병이나 빈 플라스틱 용기도 언제나 쓸모가 있었다. 물론 지구와 화성의 기준은 다르다. 스미스씨가 기억하는 그 시대 지구의 기준과 오늘의 기준도 다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쓰레기'로 간주하느냐 하는 것은 그 시간과 공간을 정의하는 하나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스미스씨와 같은 사람에게도 이제 더 이상은 폐지나 빈 캔이나 빈 플라스틱 용기 따위는 가치있는 쓰레기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폐기판이었고 폐유리였고 희소 금속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역시 전자제품이 최고였다. 일부 플라스틱 껍데기만 제외하면 버릴 것이 없었다. 인쇄회로기판은 말할 것도 없이 기타 고철 파트까지도 팔아먹을만 했으며 무엇보다 희소 금속이 풍부했다. 가령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퍼스널 컴퓨터는 보통 한 대 당 0.6 그램의 금과 5 그램의 은을 포함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시기에 많은 사용되었던 휴대전화 역시 금과 팔라듐을 비롯해 16종 정도의 금속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아! 좋은 시절이었지! 만들어 파는 법은 알았어도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던 빌어먹게 아름다웠던 시절! 물론 스미스씨가 직접 살아본 시대는 아니었지만.

 

  어제는 공을 쳤다. 일제 붐박스를 하나 찾았을 뿐이다. 붐박스라니.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가 나온 이후 단종되다시피 했던 것이고 임플란트용 뮤직 플레이어가 유행할 무렵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한 것이다. 그리 깊게 파내려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툭 튀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면 그렇지. 스미스씨는 혀를 찼다. 그나마 중요한 부분은 누가 이미 다 뜯어간 상태였다. 오늘은 어제보단 나아야 할텐데. 그는 두꺼운 보호장갑을 끼웠다. 모래 바람을 헤치며 정처 없이 걸었다. 언제 어디를 파헤쳐야 할지 감이 올 때까지. 이 일은 낚시와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명당을 아는 게 중요했고 행운과 직감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기다림이 중요한 정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 스미스씨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다. 바로 여기다. 이상하게 좋은 예감이 드는 지점이었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른 쓰레기 하이에나들은 적어도 백보 이상은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스미스씨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편했다. 너무 외진 곳에서 혼자 일하는 것도 위험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붐비는 곳에서 서로 부딪혀가며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주저 앉아서 바닥을 더듬었다. 빈 플라스틱 로션병이나 찌그러진 생수병, 빈 위스키 병 같은 것들이 손 끝에 채였다. 대충 집어 던졌다. 그가 기억하는 지구에서보다 훨씬 더 그림같은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야구 배트의 손잡이 부분이 보였지만 안쪽에서 어디에 걸렸는지 잘 빠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더듬어가며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을 치웠다. 낡은 카페트가 얽혀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카페트처럼 얇고 넓고 질긴 쓰레기는 골치 아프다. 그때 뭔가 뭉뚝한 것이 만져졌다. 나무 다리였다. 뭐랄까, 쇼파 같은 것이 뒤집혀서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뒤집어서 들어내야겠어. 그는 다시금 주변에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을 뽑아내었다. 뒤로 던졌다. 두 다리가 보일 때까지, 그는 두더지처럼 코를 박고 손에 걸리는 잡동사니들을 빼내 던졌다. 붉은 먼지가 풀풀 날렸다. 이 아래에 고장난 프린터 같은 것이 있는 거라면 정말 대박일텐데 말이야. 쇼파 몸체의 삼분의 일이 드러났다. 나무 몸체를 가죽으로 덮어 씌운 검정색 쇼파다. 언제쯤 유행하던 스타일일까? 20세기? 21세기? 이 일은 그에게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렛대가 될만한 것을 찾아 벌어진 틈 사이에 끼웠다. 단단히 발 디딜 곳을 고른 다음에 힘을 주어 쇼파를 밀어 올렸다. 15도, 20도, 그리고 25도. 그로 인해 쇼파 반대쪽의 쓰레기들이 달그락거리면서 새로운 위치를 찾았다. 30도, 35도, 그리고 40도. 그는 지렛대를 던져버리고 몸을 숙여 그 아래로 들어갔다. 양쪽 어깨로 받쳐서 천천히 들어올렸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그 방향 그대로 알아서 뒤집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랬다. 됐다. 가죽 쇼파가 사라지며 하늘이 보였다. 포보스와 데이모스가 보였다. 주저 앉아 새로 드러난 미지의 영역을 더듬었다. 깡통, 깨진 유리, 낡은 책, 어김없이 넘쳐났던 기대는 차곡 차곡 실망으로 변환되었다. 더 깊이 파내려가야 할까? 아니면 집어 치우고 떠나야할까? 하지만 그 순간 뭔가 묵직한 것이 잡혔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그는 하루 중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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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레스 매리너리스의 캐시 베이글에게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 자신의 별로 대단치 않은 직업을 대단히 좋아한다는 사실일 터였다. 그녀는 화성 거주민들을 대신하여 지구로 전자 쇼핑 주문을 대신 대행하는 일을 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일이 가진 사소하고 은밀한 부분들을 사랑하였다. 그녀는 남의 주문을 받는 일도 좋아했고 남의 주문을 넣는 일도 좋아했다. 심지어 그 배송 과정을 지켜보는 일까지 좋아했다. 한 마디로 천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발레스 매리너리스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 구역은 재활용 센터고 다른 한 구역은 쇼핑 센터다. 캐시 베이글은 쇼핑 센터쪽에서 일했기 때문에 재활용 센터쪽의 일은 잘 몰랐다. 하지만 저녁 무렵이 되면 하루 내내 수거한 값진 쓰레기를 재활용 센터에 들러 팔아넘기고 쇼핑 센터쪽으로 건너오는 건장한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퇴근 무렵의 그들은 긴장이 풀린 상태였고 주머니가 두둑했다. 이 시대의 화폐인 병뚜껑은, 그 옛날 종이 화폐보다 훨씬 더 희극적으로 지갑 두둑한 사람을 드러나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그 시간에 쇼핑 센터로 쳐들어와 성급하고 기계적인 소비를 일삼았다. 쇼핑 센터의 사장 트루먼씨의 표현에 따르자면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닥치는대로 사들이는' 고객들이었다. 캐시는 자기 일을 즐기고 사랑하는 프로답게 그들을 동경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기꺼이 노력했을 뿐이었다. 다만 캐시는 최근 들어서 단골 고객들 가운데 한 남자에게 설명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는 유부남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근래 들어 가장 기쁜 표정을 하고 캐시를 찾아왔다. 커다란 청새치를 마침내 잡아낸 쿠바인 어부 같은 표정이었다.
- 안녕하세요? 스미스씨. 좋은 일이 있으신가봐요?
- 그럼요. 좋은 일이 있답니다.
- 무슨 일인데요? 여쭤봐도 되나요?
  캐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혹시 자신이 이 남자에게 너무 노골적으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고 있었다. 물론 쓸떼없는 걱정이었다. 그녀는 활달한 스물 다섯살의 아가씨였고 쇼핑 센터를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친절했으니까. 반면 그 남자, 스미스씨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단서를 포착하기에는 너무 둔감했으니까.

  스미스씨의 들뜬 목소리는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경쾌했다.
- 사실은 오늘 대단한 걸 주워왔답니다. 그래서 제가 기분이 좋은 겁니다. 
- 어머, 정말이에요? 축하드려요.
- 고마워요. 이 일을 시작하고 이런 큼직한 걸 건진 적은 처음이에요. 오! 캐시! 할 수만 있다면 이리로 가져와서 보여주고 싶은데 안타깝네요. 재활용 센터에 팔아 넘긴 다음이라서. 하긴 쇼핑 센터로는 쓰레기를 끌고 들어올 수 없긴 하지만요. 하하하. 정말이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포기하려던 찰나에 그걸 발견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스미스씨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활기가 넘쳤다. 보통 때의 그는 과묵한 남자였다. 카운터 가까이 몸을 붙이고 숨소리가 닿을만큼 가까이서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처음이었다. 
- 정말 대단한 걸 주워오셨는가봐요.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빠르게 빼었다. 서부시대의 총잡이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그리고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것들을 카운터 위에 뿌리듯이 늘어놓았다. 병뚜껑. 족히 오십개는 되어 보이는 병뚜껑이었다. 
- 정확히 58 보틀캡입니다. 이걸 오늘 하루에 벌었습니다. 그것도 한 방에. 
  반대편 복도에서 매니져 해리가 지나가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신호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잡담은 집어치우고 빨리 물건이나 팔라는 뜻일 것이었다.
- 그래서 스미스씨. 어떤 상품을 구매하길 원하시나요?
- 냉장고요. 여섯 개의 디스플레이가 달린 모델로요. 
- 예, 알겠습니다. 여섯 개의 디스플레이가 달린 냉장고가 현재 세 가지 브랜드가 나와 있네요. 여기 카탈로그 68 페이지에 보시면 매리너 일렉트로닉스의 MX-13, 바이킹 일렉트로닉스의 VK-06, 피닉스 일렉트로닉스의 PN-E88. 이렇게 세 가지가 있네요. 각각 가격은 42 보틀캡, 48 보틀캡, 39 보틀캡입니다.


  그는 고민했다. 옆집 부부가 어느 브랜드의 어떤 모델을 구입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뿔싸! 미리 스미스 부인에게 물어볼 걸.
- 모델마다 특징이 있나요? 저희가 전에 쓰던 냉장고가 바이킹 일렉트로닉스의 V3-01인가 뭔가 하는 겁니다. 화면은 하나인데 문짝이 세 개입니다. 저는 차이를 잘 모르겠는데 와이프는 좀 불편하다고 하더군요. 그 전에 쓰던 매리너 일렉트로닉스의 그 모델 넘버는 기억이 안 나는데…… 홈 바가 여섯 개 달렸던 모델보다 말입니다. 문짝이 세 개이니 어쩐지 전기세도 더 헤프게 나가는 느낌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 스미스씨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매리너는 공간을 많이 나누는 칸칸냉장에 강하고 반대로 피닉스는 공간 분할을 되도록 적게 하되 파워냉장에 강하답니다. 바이킹은 그 중간 정도라고 하고요. 요즘은 워낙 화면 여섯 개 다는 게 유행이라 다들 그렇게 만들기는 하는데, 전문적인 차이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전기세가 걱정이시면 디스플레이 여섯개 짜리 모델은 가급적 추천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전기를 굉장히 많이 잡아먹거든요.
- 아니에요. 그래도 사야합니다. 옆집도 쓰는…… 아니 아무튼요. 많이 팔리기는 어떤 모델이 많이 나가나요.
- 대개 손님분들은 쓰시던 브랜드를 많이들 쓰세요. 매리너 쓰시는 분들은 계속 매리너 쓰시고 바이킹 쓰시는 분들은 계속 바이킹 쓰시고요.


  그는 일생 일대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하는 사람처럼 고민했고 삼십분이나 망설인 끝에 매리너 일렉트로닉스의 MX-13를 골랐다. 그 사이 매니져 해리가 십수번은 지나다니면서 캐시에게 눈치를 줬음은 물론이다. 오늘 일 끝나면 한 소리 듣기는 하겠는데.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 스미스씨. 서류에 여기와 여기와 여기, 그리고 마지막 여기에 서명해주시면 되요.
  그는 망설임 없이 쓱싹 서명을 했고 대강 병뚜껑을 헤어려보더니 마흔 두개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 결제되셨어요. 주문은 금일 여섯시 기준으로 들어가고 일주일 후에 배송될 예정이에요. 센터에 도착하는데로 제가 다시 한 번 연락을 드릴께요.
- 고마워요, 캐시. 아무튼 일단 사고 나니까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에요. 속이 다 후련하네요. 
- 뭘요. 별 말씀을.
- 그럼, 또 봐요.
  스미스씨는 그대로 몸을 돌려 출구로 향했다. 캐시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드물었다. 뭔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마도 쉽지 않겠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도대체 스미스씨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자신을 설레이게 만드는 걸까. 몇 초 사이에 그녀는 자문하고 또 자문해보았다. 그 옛날 지구의 컨트리 가수 블레이크 쉘튼을 닮았다던가, 푸른 빛이 감도는 눈동자의 한 구석에 깊은 우울함이 서려있다던가, 지구의 삼 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중력을 감안하더라도 멀대처럼 큰 키라던가, 그래서 스페이스 수트가 잘 어울린다던가. 뭔가 이유가 있을 게 아니야. 앞으로도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쇼핑 센터에 들릴 것이다. 그때마다 북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울릴 것이다. 어떻게 처신하여야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의 이 열병이란 순간 화산마냥 끓어올랐다가 거짓말처럼 식는 것이어서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앞으로 나가지 않고서는 헤어나올 수가 없는 것일까? 그녀는 잠시 스미스씨를 따라가서 불러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잠시 뒤, 운이 좋게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고 없이 불어닥친 태양풍 때문에 출구를 폐쇄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


- 스미스씨. 왜 한 번도 부인되시는 분과 같이 쇼핑센터에 오신 적이 없으세요?
   캐시는 행여 속마음이 드러나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 버려도 모으면 베리 굿’이라는 문구와 함께 존 웨인을 닮은 남자가 엄지를 치켜올린 그림의 마스 앤 마스터 리사이클링의 광고판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덜렁거렸다. 

- 별로 밖에 나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사람이.
- 그래도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자상한……. 
  하마터면 그녀는 자기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을 뻔 했다. 어쩜 방금 그 말은 무례했는지도 몰라. 그녀는 스스로를 타박했고 멋쩍었던 나머지 붉어진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경보가 발령될 정도의 태양풍이 이렇게 지나가는 일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있었다. 다만 대개는 예측이 가능했고 이번과 같이 급작스러운 사태는 드물었다. 스미스씨는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쇼핑 센터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커피숍도 미용실도 푸드코트도 치과도 아닌 그녀가 있는 상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했다.
-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 참 운이 좋아요. 집사람 같은 여자를 만났으니까요. 
  스미스씨는 어찌된 일인지 스미스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았다.
- 상당한 미인이실 것 같아요.
- 그럼요. 대단하죠. 항상 친절하고 매력적인 미소에 아름갑고 탐스러운 금발에…….


  상점 안을 둘러보던 스미스씨의 시선이 멈춘 곳은 모형 세트였다. 캐시의 모형 세트 말이다.  
- 모형 세트로군요. 캐시 것인요?
  스미스씨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가 그녀의 무엇에 관심을 가져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 예, 맞아요.
- 이렇게 잘 꾸며놓은 건 처음봅니다. 취향이 아주 세련되시네요. 원목 몰딩에 나무색 벽지에 가구도 모두 앤틱이군요. 게다가 평면 텔레비젼에 텔레비젼 달린 냉장고, 냉장고 달린 에어컨, 에어컨 달린 오디오. 정말 전자제품도 없는 게 없네요. 뭐랄까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적절한 조화랄까?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다른 누가 이런 멍청한 소릴 지껄였다면 그녀는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 스미스씨 아닌가! 
- 그냥 취미일 뿐이에요. 
  그녀는 수줍게 핀셋을 만지작거렸다.
- 어디서 마십니까? 캐시. 여기에 닥터 이야와스카를 마실만한 곳이 있습니까? 마땅히 누울 곳도 없고. 숙직실 같은 것이 있나요?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흥분에 들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저는 닥터 이야와스카를 마시지 않아요.
- 정말입니까? 그 좋은 경험을 일부러 거부한다는 말입니까?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 저는 뭐랄까…… 굳이 꿈 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지금의 저에 만족해요. 아…… 죄송해요. 기분 상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는데요.  
  그녀는 그 말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 괜찮아요.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 모형 세트를 왜 꾸밉니까?
- 말 그대로 그냥 취미일 뿐이에요. 이 일을 하면서 조금씩 미니어쳐 가구나 가전을 조금씩 얻거든요. 그래서 틈틈히 이것저것 채워넣었을 뿐이에요.
- 아깝지 않습니까? 이렇게 잘 꾸며놓은 모형 세트인데. 여기 들어가서 살고 싶단 생각을 한번도 안해봤나요?
  그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당장이라도 그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 제 인형들이 그 안에서 행복하게 잘 살겠죠. 켄(Ken)과 바비(Barbie) 같은 인형들.
  그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 뭐라고요? 아니 그런 바보같은…… 아니 미안합니다. 뭐랄까 캐시는 아직 순수한 사람이로군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캐시는 아직 어리니까요. 나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삽니다. 닥터 이야와스카를 마시고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 - 확장된 의식, 환각, 승천, 해탈…… 뭐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나의 하루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나머지,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쳇바퀴 돌듯 똑같이 씻고 먹고 일하고……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닥터 이야와스카를 마시고 꿈 속으로 들어가야 진정한 나를, 진정한 나의 생활을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다른 누군가의 값싸고, 무의미하고, 대체 가능한 도구일 뿐이구나. 이건 마치 다른 행성에서 눈을 뜨는 기분이구나. 화성에서의 삶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유 없이 반복되는 싸구려 영화 같은 겁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려다가 말았다. 지금은요? 지금의 당신은 아무 의미없는 건가요? 지금의 당신과 나는? 그러나 결국 뱉은 것은 겨우 이런 말일 뿐이었다.   
- 왜요? 스미스씨는 지금 그대로도 멋지신데요.
  35분간의 태양풍 경보는 그렇게 물러갔다. 

 

*



  일주일 후, 스미스씨는 가로 세로 6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상자를 하나 받았다. 매리너 일렉트로닉스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크기의 냉장고 미니어쳐가 있었다.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MX-13'이라는 글자가 돋음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었다. 그리고 애지중지하는 자신의 모형 세트 안에 내려놓았다. 이전 사용하던 냉장고를 치운 자리에 거짓말처럼 들어갔다. 모형 세트를 바라보았다.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꿈꾸고 이뤄왔던 삶이 그 안에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마르고 건조한 화성의 땅굴집이 보였다.그는 생각했다. '여기는 가짜다' 이제 진짜 세계를 만날 시간이었다. 그는 마셨다. 닥터 이야화스카를.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바라보았다. 여섯 개의 얼굴을 가진 새 냉장고를.
- 확실히 편하지?
  스미스 부인이 다가와 팔짱을 끼고 그의 어깨에 다정히도 기대었다. 바비 인형처럼, 탐스런 머리칼이 그의 뺨 위에서 찰랑거렸다.
- 그렇네요. 우리도 진작부터 바꿀 걸 그랬나봐요.
- 화면 하나는 항상 일기 예보에 고정해 놓으라고. 아침에 일하러 가려면 확인해야 하니까.


  물론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 보나마나 춥다. 보나마나 건조하다. 

  화성 살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2011년 01월)

# Inspired by Philip K. D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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