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단군신화: 얼터너티브 판본
by 김영준 (James Kim) 사실 호랑군은 처음부터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있었습니다. 딱 한 명만 채용한다는 (주)환웅천황의 공고에 면접 대상자가 둘이라는 점부터 마음에 걸렸던 터였습니다. 두 명을 면접 봐서 그 중에 한 명만 뽑는다? 나머지 지원자들이 모두 발로 이력서를 썼거나 아예 다른 지원자가 없었다는 뜻일 텐데요. 요즘처럼 채용 대란인 시절에 설마 그럴 리가요. 특히나 다른 채용도 아니고 환웅천황님의 모집 공고입니다. 정규직이고요. 정규직이고요. 정규직입니다. 계약직보다 겨우 25만원 더 받지만 뭐 어떻습니까. 정규직인데. 4대 보험은 물론 기타 심지어 복리후생이란 개념마저 있습니다. 일단 붙으면 '인간처럼' 살 수 있을 겁니다. 무궁화 삼천리 온갖 금수들이 너도 나도 저글링 러시를 벌였을 것이 명약관화한데, 면접 대상자가 딱 둘이랍니다. 이건 뭔가 있어도 분명히 있는 거죠. 이를테면 누굴 찜해놨는데 티를 내면 안되니까 들러리로 한 명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던가... 어쨌거나 이 대목에서 호랑군이 내정자가 아니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럼 나머지 지원자 하나가 문제인데 그게 바로 곰양입니다. 곰군이 아니라 곰양이라는 뜻은, 호랑군와 성별이 다르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호랑군은 남성이고 곰양은 여성입니다. 호랑군은 평소 남녀사이의 평등 문제 따위에 목숨 거는 타입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만, 어쩐지 생각보다 대단히 불리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나 하는 찝찝함을 지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령,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 먼저 이 질문부터 가봅시다. 실례지만 곰양는 평소에 화장 자주 하십니까? 오늘은 하신 것 같은데.
곰양, 얼굴을 붉힙니다. 살짝.
-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만 예,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는 신경을 씁니다. 반면 평소에는 가볍게 로션만 바르거나 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도 보통 출근하는 날에는 예의상 중간 단계까지는 합니다.
면접관들 껄껄 웃습니다. 그것 참 훈훈한 분위기.
- 그렇습니까? 오늘은 몇 단곕니까? 10점 척도로 갑시다. 10이 100% 최고 역량을 발휘한 상태고 0이 쌩얼입니다. 어떻습니까?
- 8단곕니다.
면접관들 껄껄껄 웃습니다. 더욱 더 훈훈한 분위기.
- 단계별로 많이 달라보이나요?
곰양, 다시 얼굴을 붉힙니다. 뺨이 홍시보다도 붉게 물듭니다.
- 조금 그렇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잘 구분하지 못하실 정도입니다.
면접관들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마치 어엿한 숙녀가 된 딸을 대견히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들입니다.
- 그럼 오늘 화장하는데 몇 분 정도 걸리셨나요?
- 삼십분 정도 걸렸습니다.
- 그래요. 그럼 화장하는 순서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스킨, 에멀전, 엣센스, 크림, 선크림… 이 모든 이야기들이 호랑군에게는 너무 어렵습니다. 화이트닝, 모공, 탄력, 보습…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이야기인지 호랑군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렇다면, 곰양의 차례가 끝나고 호랑군 또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요? 호랑군은 눈 앞이 캄캄합니다. 오늘 내가 화장하는데 몇 분이나 걸렸나. 참, 한 적도 없지. 아침에 베이비 로션 조금 바르는 둥 마는 둥 했던 것이 전분데 이걸 몇 단계라고 해야 하나. 1단계? 2단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그 사이에 곰양에게 쏟아지던 면접관들의 질문이 마무리됩니다.
- 그래요. 알겠습니다. 곰양 수고하셨고요. 자, 다음은 호랑군.
화들짝 놀라 호랑군은 고쳐 앉습니다. 난 오늘 화장 2단계라고 하는 거야. 2단계. 호랑군은 단단히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 호랑군한테는요. 어디 보자, 이런 질문을 드리죠. 푸앵카레 가설(Poincare Conjecture)을 한 번 증명해 봅시다.
- 예?
- 해봐요. 증명. 시간은 충분히 드릴게.
*
환웅천황 밑에서 일하는 것,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전자, 화학, 철강, 의류, 식품, 금융, 유통 등 360여 가지 문어발 계열사를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남자 밑에서 일하는 것, 오늘날 모든 젊은이들의 꿈이라 한들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대졸 초년차들이 어지간한 중소기업 10년 근속지보다 많은 돈을 받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꼭 그뿐만은 아닐 겁니다. 사실 호랑군은 꼭 이렇게 크고 이름난 곳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몇 년 전까진 그랬습니다. 작아도, 혹은 이름이 없어도 내가 좋고 만족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왔더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경험해 보니 조금 혼란스럽더란 말입니다. 한때 호랑군은 돈보다는 여가가 우월한 가치라고 여겼습니다. 명예보다는 자아실현이 소중한 가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호랑군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주는 곳이어야 여가 또한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곳이어야 자아실현도 할 수 있는 곳이란 사실을, 결국 자신은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실패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유명 대기업에 출근하며 뻐기는 놈들이 돈을 많이 번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복지도 더 많이 보장되고, 더 많이 쉬고, 더 많이 즐기고 다양한 관계 맺음도 더 많이 누리고, 자아실현의 기회도 더 많이 얻고,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고, 심지어 고용까지 상대적으로 더 오래 보장된다니, 이게 말이나 된답니까? 스펙 경쟁에서 빠져나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펙 경쟁을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니 말입니다. 결국 호랑군이 원했던 꿈들은 크고 이름난 회사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을 버리기 위해 더 큰 욕심을 부려야 한다면 그건 좀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호랑군의 멘토 꺼꿀도사는 혀를 끌끌 찼답니다. 거대 조직의 비효율성, 사무적이고 계산적인 인간관계, 그리고 일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하는 터프한 근무강도가 싫다며, 호랑군이 듣도 보도 못한 동네 점빵 수준의 직장을 구할 때부터 충분히 예상되어오던 일이었습니다. 육천갑자를 살아본 꺼꿀도사는 천리안으로 그 모든 걸 진작에 내다보고 있었답니다.
- 거봐, 내가 뭐랬냐? 짜샤.
호랑군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 면목없습니다. 선생님.
- 괜찮다. 결국 뭐 살면서 배우는 게 아니겠냐. 짜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죠. 뭐, 배워놓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꺼꿀도사는 어깨 툭툭 치며 호랑군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망설였지만) 철없고 나이브한 제자에게 멘토의 도리를 다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길을 일러주기로 한 것입니다.
- 그럼 어딜 지원하면 좋을까요?
- 세상에 많고 많은 갑이 있겠지만 그중에 환웅천황만한 갑이 또 있겠냐?
- 그렇군요. 환웅천황.
- 그래, 이제 알겠냐? 짜샤. 거기 들어가려고 박 터지게들 싸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짜샤.
평소 온기결핍증으로 고생하던 꺼꿀도사는 멘토링의 대가로 호랑군을 삼십분간 껴안고 있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호랑군은 스승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지요. 이리 저리 호랑군을 쓰다듬던 꺼꿀도사는 호랑군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기도 하였고,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라는 소리도 했던 것 같고,
"어른들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는 소리도 한 것 같은데, 아무튼 그리하여 호랑군은 결국 (주)환웅천황에 지원서를 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서요. 물론 좀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간 되겠다는데 뭔 놈의 자격이 필요하답니까? 그냥,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면 안되는 건가요?
*
- 호랑군?
- 예?
- 뭘 멍 때리고 있어요? 어디 전구 나갔어요?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지.
물론 세상엔 별의별 희한한 면접이 있습니다. 상상 이상의 무개념 면접도 많습니다. 삼칠번 이상의 면접을 경험한 호랑군도 이젠 그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 불러다 놓고 친구랑 통화하는 면접관도 봤고, 채 5분도 되지 않아 마음에 안든다고 면접비 봉투 던져주며 나가보라고 하는 면접관도 봤으며, 면접시간 내내 새로 산 장난감('아이'로 시작하는 비싼 장난감들 말입니다) 가지고 노느라 정신 없는 면접관도 봤습니다. 심지어 그 중엔 사람 불러다놓고 그제서야 이력서를 슬슬 들춰보기 시작하는 면접관도 있습니다. 그러다 "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네"라며 그냥 가보라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단순 변심으로도 환불될 수 있는 인생. 이게 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다 보니 벌어진 일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저들로서는 조금도 아쉬울 게 없는 거죠.
- 저기 화이트보드 있어요. 냉큼 증명해 봐요. 푸앵카레 가설.
물론 호랑군은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푸앵카레 가설은 세계 7대 수학 난제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만약 그걸 증명할 수 있다면 아마 호랑군은 지금 이 면접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지도 않을 겁니다. 더구나 이 놈의 푸앵카레 가설이란 맨 처음 제안한 수학자 푸앵카레조차 수학적 증명에는 실패했던 것입니다. 만든 놈도 못하는 걸 무슨 수로 호랑군이 하겠습니까? 머리털 나고 한 번 들어본 적조차 없는데. 호랑군이 질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면접관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 중 둘은 상당히 기분 나쁜 것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호랑군은 울고 싶은 지경이었지요. 그냥 나한테도 오늘 화장 몇 단계 했냐고 물어봐주면 안되나?
면접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렇게 길게 느껴졌었는데 알고 보니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풍백과 우사와 운사가 호랑군과 곰양을 불러놓고,
- 면접비 대신 면접비 상당의 저희 제품을 드리고 있습니다.
라며 신단수 한 박스를 들려주었습니다. 신단수는 환웅천황그룹의 신제품으로 태백산 맑은 정기 고스란히 담은 초정리 암반수랍니다. 한 박스라고 해봐야 먹는 샘물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면접비 몇 푼 쥐어주는 게 그렇게 아까워서 이런 수작이라니!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한다니까요.
호랑군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집에 돌아갔습니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명확했습니다. 면접자는 곰양과 호랑군 단 둘이었고, 환웅천황의 면접관들은 곰양을 좋아했고 호랑군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곰양은 "오늘 화장 몇 단계 했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호랑군은 "푸앙카레 가설을 증명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성별을 떠나 사전에 뭔가 교감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내정자를 정해놓고 나머지 지원자들 몇몇을 불러와 들러리 세우는 악랄무쌍한 면접에 대한 소문은 그 역시 숱하게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 호랑군은 이런 문자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합격, 비록 1차지만 일단 합격한 것입니다. 잠시나마 호랑군은 이 면접의 공정성에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바보같이 너무 예민하게 굴었는지도 몰라. 곰양에게 유리했다는 것도 그냥 느낌이었겠지. 정말 내정자가 있지는 않았을 거야.
다음 날 14시. 호랑군은 면접장인 태백산 중턱에 도착했습니다. 곰양을 만났습니다. 면접자가 달랑 둘이었으니 충분히 예견되던 일이었습니다. 호랑군과 곰양은 잘해보자며 살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오늘은 몇 단계로 화장하고 왔냐? 이 지지배야'라며 욕을 퍼부었지만 말입니다. 13시 55분이 되자 풍백과 우사와 운사가 나타나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 실기 면접은 100일간 진행됩니다. 모두들 좋아하시는 서바이벌 형식으로 치러집니다. 두 분 중 하나가 못하겠다고 나자빠질 때까지 단두대 매치를 하겠다는 얘깁니다. 여기서 살아남는 분이 저희 (주)환웅천왕의 신입사원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 뜻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 이제 미션을 공개합니다. 미션은,
두둥. 소리와 함께 플랜카드가 내려왔습니다.
- 100일 동안 동굴에서 살아남기입니다. 두 분은 이제 주어진 음식만을 먹으며 동굴생활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동굴 밖으로 나갈 수는 없음을 명심해 주십시오. 질문 있으신가요?
곰양이 손을 들었습니다.
- 그게 단가요?
- 그게 답니다.
호랑군도 손을 들었습니다.
-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란 얘긴 아닐게 아닙니까?
- 동굴 밖으로만 나오지 않는다면 가만히 앉아있어도 됩니다.
아니, 뭐, 이 따위 시험이 다 있담. 이래서야 어떻게 사람을 평가한다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주)환웅천왕의 직원들이 추첨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 이 중에서 두 가지 음식만을 무작위 추첨으로 뽑아 100일 동안 넣어줄 것입니다.
투명한 유리통 안에서 몇몇 먹거리가 뱅글뱅글 돌아갔습니다. 그중에는 돼지고기도 보였고 닭고기도 보였습니다. 호랑군은 내심 제발 육류가 걸려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늘씬한 다리를 자랑하는 추첨원이 방글 웃으며 뽑아 올린 것은,
- 첫 번째 먹거리는 쑥입니다.
호랑군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뱉었습니다. 일이 이리되니 잡식동물과 육식동물이 100일 동안 같은 음식만 먹으라는 게 그리 공정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공정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한쪽만 밀어주는 짓거리인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 '아따, 내정자가 있구마잉'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별 수 있나요. 지금 이 대목에서 아쉬운 건 호랑군이지 저들이 아닌 걸요. 그저 나머지 한 가지 먹거리는 부디 육류가 나와주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긴장된 순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늘씬한 다리를 자랑하는 추첨원은 버튼을 눌렀고 미묘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추첨통이 무작위로 골라낸 다른 한 가지 먹거리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햇살보다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 두 번째 먹거리는 마늘입니다.
(2009년 04월)
'콩트와 단편 > Season 6-10 (2006-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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