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월드컵 마케팅
낙농콩단

다시 한 번 월드컵 마케팅

by 김영준 (James Kim)

  월드컴은 망했지만 월드컵은 돌아왔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을 애써 배제하고 논하자면 온 지구촌이 축제의 설레임으로 들썩인다고도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축구로 인해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FIFA가 막대한 수익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서울방송이 독점 중계 수익으로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UST+9 동경 135° 기준 새벽 세시 반에 시작하는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위해 수백만 명이 밤잠을 포기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무려 40만 명이나 길바닥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실도 놀랍다. 연합뉴스와 스포츠 신문들은 4년 만에 또 암묵적 합의 버전의 길거리 도촬에 매진하고 있다. '멕시카나 치킨'에서 밤새 배달 영업을 하니 많은 이용 부탁드린다는 문자를 자꾸 보낸다. 그리스전에 굳이 베스트 멤버를 투입하지 않겠다는 아르헨티나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는 전국민의 성토 대상이 되었다. 바야흐로 월드컵 시즌이다.

 

  이때를 기다렸냐는 듯 기업들은 천문학적 광고비를 들여 새로운 광고를 전파에 실어보내고 있다. 월드컵 응원 열기를 주도하거나 독려하거나 슬쩍 묻어가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심할 경우에는 열 편의 광고가 지나가는데 여덟에서 아홉이 이런 유형의 광고인 경우도 있다. 여기에 축구와 상관없는 나머지 한 편의 광고가 고 정주영 회장이 영국 정부에서 차관 얻어 쓴 얘길 들려주는 '현대중공업' 광고라면 정말 우리나라가 너무 자랑스러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이른바 월드컵 마케팅. 솔직히 좀 낯 뜨겁고 뻔뻔하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직장인의 70%가 기업들의 월드컵 마케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설문 결과가 연합뉴스에 보도되었으니 말이다. 만약 정말로 이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평균 상식이라면 딱히 기업만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라고 봐야 한다. 외눈박이 나라에선 두눈박이가 비정상 취급 당하는 것처럼 이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라에선 못 받아들이는 쪽이 비상식일 뿐이다. 이 참에 정운찬 총리께서 아르헨티나의 3:1 승리를 예언한 한 야구 선수에게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아주시는 것도 좋겠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의문을 가져야 할 점은 세 가지다.

 

첫째, 왜 하필 직장인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는가. 그리고 직장인의 범주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다시 말해 축구가 직장인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직장인만이 기업 마케팅의 타겟(소비자)이 아니다. 그럼에도 학생이나 취업 준비생이나 주부에게는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직장에 적을 두지 않은 사람들은 심오한 기업의 세계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거나, 왈가왈부한들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둘째, 윌드컵 마케팅이라는 것의 범주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요컨대 치킨집에서 월드컵 기간 동안 콜라 한 캔, 치킨무 한 팩 서비스 해주는 것도 월드컵 마케팅이고 한국 대표팀이 이긴 다음 날에는 피자를 반 값에 팔겠다는 것도 월드컵 마케팅이다. 120만 원짜리 LCD 텔레비전을 월드컵 특별 행사 할인을 받아 108만 원에 구입한 사람이 월드컵 마케팅에 대한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할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이런 식의 시즌 특수를 노리는 마케팅은 장사꾼 입장에서 충분히 고려할만한 것이다. 반면에 기업 이미지의 제고를 위해 의도적으로 월드컵의 들뜬 분위기를 이용하는 마케팅. 즉, 대규모 텔레비젼 광고비를 집행하여 자기네 기업이 한국 대표팀 응원에 앞장서고 국민들의 응원에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고 포장하는 것은 좀 경우가 다르다. '직장인의 70%가 기업들의 월드컵 마케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단 한 문장으로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해 버리면 이 모든 구분의 경계가 뭉뚱그려 모호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소위 월드컵 응원녀들의 순수성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월드컵 응원기업의 순수성은 곧이 믿거나 대승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뭐가 어떻게 다른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셋째, 왜 이 내용이 주요 언론에 보도가 되었는가. 사실 위 설문은 한 취업 포털에서 직장인 육백여명을 대상으로한 월드컵에 대한 질문 몇 개 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첫 번째 의문이 허무하게 풀린다) "월드컵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업은?"과 "월드컵 마케팅 효과를 가장 많이 볼 것 같은 업종은?" 등의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 등 애초부터 질문이 TESAT(한국경제신문의 경제이해력검증시험) 수준의 사심 충만을 자랑했다. 또한 "월드컵 하면 떠오르는 연예인은?"의 항목이 뜬금없이 들어가 있는 등 애초부터 격식이 있는 설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굳이 주요 일간지와 아홉 시 뉴스에 보도될 만큼 유의미한 뉴스는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적절한 뉴스거리가 된다면 <직장인 28%. 월드컵 하면 떠오르는 연예인은 단연 김흥국> 또한 동등한 비중으로 동일한 빈도로 다루어져야 마땅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사실 '직장인의 70%'는 마법의 숫자다.


1. 직장인 70%는 5월에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
2. 직장인 70%는 점심을 20분 안에 해결한다.
3. 직장인 70%는 과로로 우울증에 걸렸던 경험이 있다.
4. 직장인 70%는 구조조정에 위기감을 느낀다.
5. 직장인 70%는 아침형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5. 직장인 70%는 낮잠 자는 자세가 불량하다.
6. 직장인 70%는 올여름에 휴가를 떠날 계획이다.
7. 직장인 70%는 후배 시집살이를 경험했던 바 있다.
8. 직장인 70%는 자율 출근제를 원한다.
9. 직장인 70%는 현재 직장에 불만족스럽다고 말한다.
9. 직장인 70%는 공무원 시험을 보길 희망한다.
10. 직장인 70%는 자신을 워킹 푸어라고 생각한다.
11. 직장인 70%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한다.
12. 직장인 70%는 자신을 회사 발전에 기여하는 인재라고 생각한다.
13. 직장인 70%는 사내 정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14. 직장인 70%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15. (기혼) 직장인 70%는 동료 등과 정신적 외도를 경험했다.

 

  상기 내용은 최근 2년간 취업 포털들의 직장인 대상 설문 결과가 언론을 통해 기사화된 것들이다. 어지간한 질문에는 70%가 떨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직장인 70%'라는 숫자에 큰 신뢰를 보낼 수가 없어 보인다. 이번 월드컵 마케팅 설문도 마찬가지다. 635명의 직장인 중에 501명이 '월드컵 마케팅으로 기업들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을 뿐이고 445명이 '그런 마케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라고 답했을 뿐이다. 전술했다시피 전혀 정교하지 않은 설문이었고 모집단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직장인 집단을 대상으로 설정되었는지도 불명확하다. 물론 이번 달 내내 언론이 월드컵 관련 뉴스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별 의미 없는 내용까지 긁어모아 뉴스로 만들어버리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 제목을 하필 <직장인의 70%. 기업의 월드컵 마케팅에 긍정적>으로 뽑은 것은 글쎄, 뭔가 이상한 의도를 숨기고 있는 부분처럼 보인다.

 

(201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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