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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바닐라 코카콜라

쇼트 펀트 포메이션/쇼트 펀트 포메이션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9.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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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일을 오래 해왔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상식을 뛰어넘는 상대를 만났다는 두려움이 들 때 그렇다. 지금도 그렇다. 이런 충격적인 광경은 평생 본 적이 없다. 현장에 들어 선 순간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후아, 지저분하게도 놀았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파트너의 과장된 탄식을 뒤로 하고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테스트 종이를 내밀어 널부러져 있는 알루미늄 캔의 마개에 묻어 있는 까만 액체를 적셨다. 그리고 그것을 혀 끝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어 보았다. 예상대로였다. 오렌지 바닐라 코카콜라. 나는 조용히 파트너를 돌아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가진 재주는 맛으로 코크를 감별하는 능력이다. 한 방울만 혀 끝으로 맛보면 코카콜라, 코카콜라 제로 슈가, 다이어트 코크, 다이어트 코크 카페인-프리, 코크 라이프, 체리 코카콜라, 체리 코카콜라 제로 슈가, 바닐라 코카콜라, 바닐라 코카콜라 제로 슈가, 시나몬 코카콜라, 시나몬 코카콜라 제로 슈가, 피치 코카콜라, 피치 코카콜라 제로 슈가, 다이어트 코크 버라이어티 (피에스티 체리, 제스티 블러드 오렌지, 트위스티드 망고, 진저 라임, 블루베리 아사이, 스트로베리 구아바 등), 심지어 멕시코산 코카콜라(멕시-코크)까지 다 감별해 낼 수 있다. 심지어 패스트 푸드점 디스펜서 ‘코크 프리스타일’에서 조합해 만들어 마실 수 있는 레몬, 라임, 진저 레몬, 진저 라임, 라즈베리 조합까지 다 알아낼 수 있다. 뭐, 그래서 코크 전담반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 덕에 먹고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오렌지 바닐라 코카콜라니! 이건 완전히 새로운 게임이다. 코크 전담반에서 ‘코크 위스퍼러’라고 불리는 나조차 이 맛은 조금 구별하기가 까다롭다. 기본적으로 바닐라 코카콜라처럼 살짝 달고 묘하게 느끼한데 시트러스 향이 난다. 오렌지 주스와 환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뒷맛이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오리지널 코카콜라 특유의 청량하고 개운함은 있다. 다만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이 짓으로 먹고 살려면 빨리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막 시장에 나온 이 따끈따끈한 신상 코크가 거리에 은밀하게 퍼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진작에 들었다. 오렌지와 바닐라가 괴상한 조합이라고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초기 물량이 달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궤짝으로 구해도 놓고 즐겼다는 건 좀 놀랍다. 프론트 데스크의 기록에 따르면 이 방에 투숙객은 한 명,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출입자도 한 명. 그래서 아직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저걸 다 한 사람이 마셨다고?) 결국 인근 그로서리 스토어를 탐문하고 유통 경로를 추적해 보아야 겠단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방 담당 메이드는 완전 고생하겠네요.” 따라 나오던 파트너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시 돌아보니 역시 대단한 난장이었다. 살짝 현기증을 느끼며 파트너에게 말했다. “다시 돌아올테니까 그때까진 치우지 말라고 해.”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복도로 나가 길게 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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