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글드 업 인 블루
낙농콩단

탱글드 업 인 블루

by 김영준 (James Kim)

  인공지능을 묘사하는 그림에는 주로 블루 계통의 색이 많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보통은 사용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의도라고들 많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인공지능은 또 다른 측면에서 블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울감을 이야기하는 블루 말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술적 진보가 가속될수록 사람들에게 우울과 무기력함을 야기하는 사례 또한 늘어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최신 기술에 대한 신기함에 매료되어 너도 나도 신이 나서 이러한 최신 도구들을 이용하기 시작할 수 있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마냥 신날만한 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써야 할 글을 대신 써주고, 내가 그려야 할 그림을 대신 그려주고, 내가 정리해야 할 자료를 대신 정리해 주고, 심지어 프리젠테이션 자료까지 만들어주면 당연히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 두말할 것 없이 효율적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도구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물론 일리는 있다.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머지않아 도태될 거라는 (다소 과격하고 앞서 나가는) 주장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렇게 쓰여진 글과 그려진 그림과 정리된 자료는 사용자의 개성을 서서히 차근차근 지워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용자의 존재까지 지워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요즘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리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일단 모든 일에 다 지름길이 생긴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모두가 아는 지름길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지름길만 찾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과거처럼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워나가는 시절이 좋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손수 공들여 방망이를 깎아보아야 본인만의 관점과 철학과 스타일을 가질 수 있는 법. 그저 깎아달라고만 외치고 뚝딱 만들어진 방망이가 쥐어지기를 바라기만 하면 어쩌면 더 이상 발전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한 강연에서 무려 절반 정도의 발표자가 프리젠테이션 생성기로 준비한 것이 틀림없는 발표자료로 발표하는 (참고로 인공지능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다) 것을 보았다. 그날 이후 파워포인트나 키노트 슬라이드 한 장 만들기도 힘들 정도로 의욕이 떨어졌다. 간혹 보이지 않는 손이 적당히 다듬어 놓은 것처럼 의심이 가는 논문들도 눈에 보인다. 설마 정말일까? 그냥 우연일까? 혹시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까? 어느 순간 모든 걸 다 의심하게 된다. 피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다. 그래서인지 논문을 쓰고 싶은 의욕도 영 살아나질 않는다. 정말 어떤 날은 한 줄 쓰기도 힘들 정도로 무기력하다. 옛날에는 정말 잘 쓴 논문들을 보면 자극도 받고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일종의 투지 같은 것도 솟아올랐었는데 (응?) 요즘은 그런 노력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비단 일에 대해서만 슬럼프가 온 것이 아니다. 블로그에 대해서도 점점 의욕을 잃고 있다. 요즘에는 인공지능 챗봇이 작성한 내용을 카피 앤 페이스트 하고서 그냥 당당하게 발행하는 블로그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루에 십 수개씩 그런 포스팅을 마구 남발하는 블로그들을 보면 의욕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다. 특히 블로그와 같은 플랫폼에서는 그게 바로 공멸로 가는 확실한 급행열차인데 너도 나도 올라타서 폭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이제는 정말로 블로그와 글쓰기의 장기적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자문하게 되는 요즘이다. 이십 년 넘는 긴 시간 동안 블로그를 운영해 오면서 온갖 기가막힌 유행을 다 지켜보았다. 식당 전면 사진과 메뉴판 사진으로 시작하여 본인이 먹어치운 음식 사진을 끝도 없이 나열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포스팅 방법이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나의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열심히 맛집 투어를 하시는 블로거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우물에 독을 푸는 저들과 달리 그래도 여러분들은 몸으로 직접 뛰어가며 오감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충실하게 기록하여 전달해 주시는데 말이다. 아니, 감히 이렇게 단언할 수도 있겠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마지막 희망이다. 언젠가 스카이넷에 맞서 싸우는 존 코너의 마지막 저항군이 되실지도 모른다.

 

(2025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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