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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쿠퍼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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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퍼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19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 아주 무덥고 비가 많았던 해였지. 아마 자네들 중엔 그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친구들도 있겠구만. 그렇지? 옳지, 그럴 줄 알았어. 그만큼 오래된 이야기니까. 

  1987년 여름, 나는 타라클리아 시 경찰국의 교통과장이었어. 그때만해도 몰도바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되기 전이었으니 타라클리아 또한 소련에 포함된 도시 중 하나였지. 그 당시 타라클리아 주의 인구 2만명 남짓되었는데 그 주도인 타라클리아 시의 인구가 아마 1만명이나 되었을까 싶어. 그만큼 오래된 일이야. 지금이야 이렇게 배불뚝이 중년남자가 되었지만 그땐 나도 날렵한 몸매와 훤칠한 얼굴을 자랑했었지. 일단,

강력계의 갤러 형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지.

​  갤러는 정말 이상한 남자였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지. 거 왜 그런 유형의 사람이 있잖나. 언뜻 겉만 봐서는 멀쩡하고 평범한데 뭔가 가까이하기엔 찝찝한. 나중에 알고보니 속에 악마가 살고 있는 …….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정확하게 분간해 낸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한두 번 대강 봐선 절대 알아챌 수 없거든. 겔러도 그랬어. 그 남자에겐 예쁜 부인과 예쁜 딸이 있었지. 항상 자기 사무실 책상 위에 가족 사진을 올려놓고 사는 타입이었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타입 정도가 아니었지. 한두 장이 아니었으니까. 거의 한쪽 벽면이 사랑스러운 가족 사진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고. 세상에! 그런 사람을 누가 의심하겠어? 다들 입을 모아 그랬지. 강력계의 갤러 형사야말로 정말 가정적인 남자이며 그런 남자는 정말 흔치 않다고.

  무슨 얘기냐고? 음…… 이렇게 설명하면 어떻겠나? 그 가정적인 남자가 자기 가족들 사진을 붙여놓은 벽면과 마주보는 반대쪽 벽면에 자기가 맡은 범죄 사건의 증거 사진들을 붙여 놨단 말이야. 다시 말해서 겔러의 책상 앞에 앉으면 말이야 (물론 내가 직접 앉아봤단 말은 아니야). 오른쪽 벽에는 가족들의 사진이 있어. 아이의 아장아장 걸음마 사진, 아이를 안고 미소짓는 부인의 사진, 아이가 처음으로 세 발 자전거를 타던 날의 사진, 무지개색 꼬깔모자를 쓰고 조랑말 위에 올라탄 아이의 생일파티 사진, 유치원에서 백설공주 연극을 하는 아이의 사진, 자기 품에 안겨 곤하게 잠이 든 아이의 사진……. 그리고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는 거야. 그럼 뭐가 보이는 줄 알아? 어지럽게 코르크판에 압정으로 고정되어 있는 현장 사진들이 보이는 거지. 목이 잘려 피를 흘리는 시체의 사진, 붉은 피로 물들어 엉망이 된 침대 시트의 사진, 검은 피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나이프의 사진, 끔찍한 폭행으로 잔인하게 훼손된 신체 일부의 사진……. 혹시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어? 갤러 형사는 그런 사람이었단 말야. 그런 책상에 앉아서 태연하게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의 감수성을 지난 남자였다는 얘기야. 기자 양반, 자네라면 그런 남자와 친하게 지내고 싶겠나? 아마 아니겠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1987년에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때 사람들은 잘 몰랐어. 지금보다 사람들이 순진하던 시절이었잖아. 그저 겔러가 조금 의욕이 과한 타입이라고만 생각들을 했던 것 같아. 한 마디로 일벌레라는 거지. 가정적인 남잔데 자기 일에 너무 열심이어서 공주 드레스 입은 딸내미 사진과 '잭 더 리퍼'식 현장 사진을 마주보게 붙여 놓았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 더구나 알아낼 방법도 없었고. 요즘 같으면 인성 검사나 정신 상담을 받게 해서 걸러냈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절차가 없었잖아. 게다가 겔러가 평소에는 필요 이상으로 점잖고 멀쩡한 놈처럼 행동을 했단 말이야 (지가 뭐 바리톤이라도 되는 것처럼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이미지 관리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속아 넘어갈 수 밖에. 심지어 1987년과 1988년, 그리고 1989년까지 3년 연속으로 '올해의 친절한 직원상'을 탔다니까. 시 경찰국이 생긴 이래로 강력계에서는 그 상을 받아간 건 처음이었어. 말 그대로 놀랄 노자였지. 세상에, 강력계에 내방객이 있고, 그 내방객에게 강력계 형사가 친절한 인상을 줄 일이 있다니 믿을 수 있겠어? 안 그래? 물론…… 그때 내가 기분이 좀 안 좋았던 건 사실이야. 원래 '올해의 친절한 직원상'은 우리 교통과에서 싹쓸이하던 상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꼭 그런 이유로 겔러를 경계했던 건 아니야. 정말 그 남자에게는 섬뜩한 뭔가가 있었다고.
 
  휴, 냉수 한 잔 줄 수 있겠나. 목만 축이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불쌍한 쿠퍼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야.

 

*


   쿠퍼는 괜찮은 아이였어. 아니, 좋은 아이였지. 그 당시 파리 8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아마 학위 논문만 쓰면 바로 졸업이 되는 상태에서 끌려왔던 것으로 기억해. 기자 양반, 내 기억이 맞나? 맞지? 정말 아까운 친구였지. 냉전 시대가 아니었으면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그 애가 몰도바로 다시 불려 들어와서 시경 수습직으로 일해야 하는 일은 없었을거야. 기자 양반들은 그 애가 쓴 논문을 읽어 본 적이 있나? <태양 플레어 현상이 두뇌의 잠재력에 미치는 영향> 말이야. 당연히 자네들도 읽어봤겠지. 그 아이의 사건을 파헤치겠다고 찾아온 친구들이니. 묘한 매력을 지닌 논문이었어. 문외한인 내가 읽기에도 쉽고 논리도 정갈하더군. 뿐만 아니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정으로 시대를 앞서간 내용이었어. 그런 아이를 우리가 벼랑 끝까지 몰아세워 처참하게 짓밟고 망가뜨렸지.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네. 쿠퍼 같은 아이가 보다 자유로운 나라 – 아마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라 훌륭한 학자가 될 수도 있었겠지? 물론 그건 냉전 시대 구소련, 혹은 동유럽에서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비극이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러니 자네 젊은이들은 정말 오늘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불과 30년 전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어쩌면 우리 기자님들은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위선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정말로 내가 그 아이에 대해 신경을 썼다고 한다라면 1989년 6월의 비극을 막을 기회가 정말 없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 증거물 보관 창고 뒷편에서 혼자 차가운 샌드위치를 먹는 그 아이를 보았을 때, 차가운 화장실 한 구석에 주저앉아 눈물처럼 절망을 흘리는 그 아이를 보았을 때, 갤러 놈의 피비린내 나는 실험에 총알받이로 이용당하고 내팽개쳐지는 그 아이를 보았을 때, 목소리를 높여 나섰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야. 그 말이 맞아. 난 비겁했어. 그리고 타라클리아시경의 다른 이들 모두가 마찬가지였지. 분명히 우리 모두가 불이 났다는 건 알았어. 동시에 강 건너 일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지. 남의 일이니까. 일부러 나서야 할 만큼 묵직한 의무감이나 책임감은 없었던 것 같아. 어쩌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워낙 그 시대가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처럼 지내길 요구하기도 했어. 내가 어렸을 적 우리 할아버지가 즐겨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는군.  "용기가 없었다는 걸 절대 미안해하지 말아라."

 

*

태양 플레어 현상이 발생한 날에 기이한 일을 겪었다는 사람들 63명을 인터뷰했다. 그들 중 일부는 호기심에 자신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지어내기도 했지만 설득력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았다. 48명에 해당하는 이들이 그 날에 유독 평소에 비해 의욕적이고 활동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중 19명은 왕성한 두뇌 활동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갑자기 네 자리 곱셈이나 복잡한 연산을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19명 중의 5명이다. 이들은 자신의 확장된 두뇌 활동이 염력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일으키는 수준까지 확장되었다고 주장한다.
- 쿠퍼 세보타리의 논문 <태양 플레어 현상이 두뇌의 잠재력에 미치는 영향> 중에서 -

 

*

 

  쿠퍼가 경험한 일은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겔러 형사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네. 어차피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았나. 쉽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자네들도 금방 끝날 이야기를 들으러 여기까지 달려온 건 아닐테고 말이야.

  쿠퍼를 수습직으로 뽑은 장본인이 겔러 형사였어. 여기서 웃기는 건 당시 시 경찰국 강력계에서는 수습 직원을 뽑을 생각이 없었단 사실이지 (그때 형사과장이었던 양반에게 내가 몇 번씩이나 확인을 해봤다고). 이게 무슨 뜻이냐면 그 아이의 채용이 순전히 겔러 형사의 독단으로 이루어졌단 거야. 도대체 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지. 어쨌든 강력계에서는 수습 직원까지 앉힐 자리가 없었어 (여기서 ‘자리’라는 건 비유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정말 실체 그대로의 ‘자리’를 의미하기도 해). 강력계만이 아니라 형사과에 속한 어떤 계에서도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겔러가 그 당시 교통과장이었던 날 찾아왔던 거지. 자기네 수습직원이 앉을 자리를 교통과에 만들어 달라는 거야.

  솔직히 황당한 일이었지. 나는 말했어.
- 아니, 그쪽에서 뽑은 직원이면 그쪽에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갤러가 난처한 표정을 짓더군.
- 그게 쉽지가 않네요.
- 아니 왜?
-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과장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그때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어야 했어.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뽑았으니 자기 부서에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었던 거겠지. 난 그때도 겔러 형사를 (열렬히)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부탁을 (최선을 다해) 거절하려고 했었어. 기억을 더듬어 보면 겔러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애썼던 것 같아. 그 자식이 5일을 연속으로 매일 아침 내 사무실에 죽치고 있지만 않았다면 아마 절대, 절대,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내가 그의 부탁을 들어준 이유는,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오직 딱 하나 뿐이었어. 그 밥맛 떨어지는, 역겹고 소름끼치는 상판때기를 매일 아침마다 내 사무실에서 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교통과 안에 형사과 강력계의 수습직원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거야. 그렇게 쿠퍼란 아이를 처음 만나게 되었더랬지.

  다음 날인가 쿠퍼를 만났어. 쭈빗거리며 교통과로 들어와 공손히 내게 인사를 하더군. 첫인상으로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때 나는 다른 부서 수습 직원에게 교통과 안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누가 들어왔어도 퉁명스러웠을지 몰라. 그 아이는 나이에 비해 훨씬 어리게 보였고 눈이 무척 컸어. 눈이 큰 사람들이 겁이 많단 이야기를 들어봤나? 모든 사람들에게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아이에 대해서는 맞는 말이었어. 마치 겁 먹은 사슴처럼 얼어서 미세하게 떨고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야. 자유 세계에서 젊음과 온기를 만끽하다가 차갑고 경직된 고향 도시에 돌아왔으니 말이야. 게다가 그런 자신이 속하지 않은 부서에 군식구처럼 자리를 얻어야 하는 상황에 본인도 뭔가 불안한 암시를 받았겠지. 아무튼 그 아이의 눈동자가 토파즈 빛깔이었단 사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 머리칼도 같은 색이었는데 오후의 햇살이 반사될 때면 정말 영롱한 색으로 빛나며 보석으로 실타래를 뽑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어. 내가 과장이 심한가? 기자 양반? 못 믿겠다는 눈친데? 아…… 자네들이 가지고 있는 사진 속의 그 아이와는 눈동자며 머리칼 색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였군. 그래, 맞아. 변화가 있었지. 내가 처음 그 아이를 보았을 때와 자네들이 가지고 있는 그 아이의 사진이 촬영되었을 때, 그 사이에는 적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단 말이야. 1989년 6월의 그 일을 포함해서 말이야. 생각들 해보게. 한 영혼을 완전히 다른 영혼으로 바꾸어 놓을만한 사건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일일까를.
 

*


  그 해 여름은 아주 더웠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지. 원래 몰도바의 여름이 약간 습할 때는 있어도 그렇게 덥진 않거든. 다른 지역에 비해선 말이야. 하지만 그 해에는 끔찍하게 더웠어. 그 당시 나는 체면 때문에 항상 양복에 조끼를 항상 받쳐 입었었는데 얼마나 더웠던지 자리에 앉아 있는게 고역이었다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일어나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며 연신 부채질을 해댔어. 창문 밖을 넘어다 보니까 내 충직한 병아리들 셋과 어디서 굴러 들어온 남의 병아리 하나가 보이데. 물론 여기서 '남의 병아리'는 쿠퍼를 말하는 거야. 잔인하게 들리지? 하지만 어른이 되고 책임있는 자리에 오른다는 게 그런 거야. 모두를 지킬 수 없다면 내 사람이라도 지켜야 하는 거지. 교통과의 젊은 순경 셋은 내 두 어깨에 인생이 달린 아이들이었어. 그 아이들과 형사과에서 내팽개친 수습 직원 중 한족을 포기해야 한다면 답은 너무도 명확하지 않겠어?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겔러 형사가 내게 부탁했던 게 더 있었어. 교통과 안에서 자기랑 쿠퍼가 일할 공간도 달라고 했지. 그러니까 단순히 파티션 사이의 책상 하나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판을 벌일 장소말이야. 회의 장소라든가, 칠판이라든가, 별별 서류철 따위를 늘어놓고 일할 공간 말이야. 부탁을 들어줬냐고? 말도 안되는 소리! 단 칼에 거절했지. 교통과라고 자리가 남아 도는 건 아니었으니까.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께. 나는 강력반 애들이 가지고 다니는 그 서류철 안의 내용물조차 싫었어. 끔찍한 사람들이 저지른 일을 감정 없이 기술하고 사진으로 남겨 놓은 그 딴 것들 말이야. 물론 교통과의 일이 일류 호텔의 그것처럼 항상 깔끔하다는 것은 아니야. 우리가 하는 일에도 너저분한 부분이 있지. 그렇지만 그때 타라클리아는 말이야. 사람도 차도 많은 동네가 아니었다고. 신호 위반이나 주차 위반으로 딱지를 끊는 정도가 좋지 않은 축에 속했지.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적은 동네에서도 강력반이 필요한 일은 있고 그런 류의 일들에는 별도의 상한선이 없지. 최악의 일은 언제나 최악의 일일 뿐이야.

  나는 겔러의 부탁을 거절했어. 뿐만 아니라 단 칼에 잘라 말했지. 당신네 수습 직원이 강력 사건들의 보고서나, 현장 사진이나, 증거물이나, 범죄 수사 과정에 관련된 어떤 것이라도 교통과 안으로 들이는 것이 싫다고. 갤러는 알아 듣는 눈치였어. 쿠퍼도 교통과 안의 자기 책상에서는 조용히 서류 작업만 하는 것 같았어. 아마 갤러가 내 말을 전달했겠지. 감히 내 뜻을 거슬러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 해 그 여름의 유난한 날씨 때문인지 조금 예민해지데. 난 우리 병아리들을 불러 강조했지. 쿠퍼란 아이를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만약에 그 애가 뭔가 수상쩍은 일을 하면 바로 내게 보고를 해달라고. 우리 병아리들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렇겠노라 했어. 그 아이들 셋의 이름이 알렉세이, 이고르, 세이무어였는데 순박하긴 해도 참 착하고 바른 애들이었어. 난 언젠가 그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타라클리아 시경 교통과를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 알렉세이와 세이무어는 '그 사건'의 폭풍에 휘말렸었고 이고르는 그 땐 간신히 살아 남았지만 1991년에 교통 사고로 죽었지 (다들 사고라고 말했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어). 결국 나 혼자 이렇게 살아 남은거야. 살아 남아 늙고 병든 닭이 되는 것도 살아 남은 자의 특권인 걸까? 나는 아직도 답을 모르겠어.

 

*


  쿠퍼가 들어오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걱정했던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아? 수습 직원에게 일을 맡겨봐야 얼마나 많이 맡기겠어? 기껏해야 서류 정리 정도겠지. 어떤 레스토랑도 생초짜 키친 핸드에게 코코뱅, 푸아그라, 비프 웰링톤을 만들라고 요구하진 않잖아? 바닥을 청소하거나, 설겆이를 하거나, 기본 재료 다듬는 정도만 시킬 뿐이지. 마찬가지로 설마 수습 직원에게 탐문을 하거나, 취조를 하거나, 증거 분석을 하거나, 사체 부검을 하거나……,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요구하겠어? 내 영역(교통과)에서만이 아니라 자기들 영역(형사과)에서도 그런 일을 시키지 않겠지. 안 그래? 수습 직원인데. 그런데도 내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 해 그 여름의 이상 기후가 살짝 내 정신을 흐리게 만들었거든). 이번엔 나의 세 병아리들 중에 하나만 골라 조용히 불러서 당부를 했지.
- 쿠퍼란 아이를 유심히 지켜보도록 해, 이고르 코노발로프.
  이고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
- 쿠퍼씨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알렉산드로 멘시코프 동무.
- 나도 알아. 내 말은…… 꼭 우리 교통과 안에서만이 아니라 이 사무실 밖에서도 그 아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좀 지켜봤으면 한단 거야, 이고르 코노발로프. 
- 하지만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도 말입니까?
- 그래. 당장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말이야. 이고르 코노발로프.
  충직한 이고르는 고개를 끄덕였지. 내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한 마디 덧붙이긴 했지만.
- 개인적인 호기심입니까, 알렉산드로 멘시코프 동무?
 
  이상한 일인데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겠데. 할 말이 없어 멀뚱히 눈만 쳐다봤었던 것 같아. 이고르도 알겠다는 듯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지. 더 캐묻지 않고. 다시 말하지만 이고르 코노발로프는 내게 충성을 맹세한 좋은 아이였거든. 내가 대답을 못했던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이고르 말대로 개인적 호기심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해. 그 밖에도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물론 그렇다고 쿠퍼를 위해서 내가 그랬던 건 아니야. 설령 그 나쁜 놈에게 수습 직원이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한들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 게다가 강력계 소속의 수습이니 (굳이 따지자면) 교통과장인 내 책임도 아니었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더란 말이야.
 
  며칠 뒤에 이고르가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데. 한가지는 쿠퍼가 형사과에서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단 거였어. 강력계는 물론 다른 계에서도 그 애를 정식 수습 직원처럼 (수습 직원이 요리도 아니고 정식이 있고 안 정식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대하지 않더란 거야. 이고르가 들려준 다른 한 가지 이야기는 갤러 형사가 수습 직원을 뽑은 이유에 대한 것이었지. 자네들이 아는 그대로야. 그 개자식은 정말로 키친 핸드에게 코코뱅, 푸아그라, 비프 웰링톤을 만들라고 요구했던 거지. 더구나 자기도 만들 줄 모르는 걸 말야! 나중에 그 사실이 문제가 되었을 때 조사위원회에 불려갔을 때 갤러는 이렇게 항변했지.
 
- 막말로 내가 전자레인지를 하나 샀다고 칩시다. 냉동 펠메니(러시아식 만두)를 그 전자레인지 안에 넣고 3분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입맛을 다시며 꺼내려고 하는데 전자레인지가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 펠메니를 데운 사람은 납니다. 그러니 나한테도 권리가 있습니다. 내가 먹을 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데우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내 돈 주고 산 전자레인지로 내 돈 주고 산 냉동 펠메니를 데웠고, 심지어 다이얼을 3분에 맞추고 '조리' 버튼을 누른 것도 난데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망할 전자레인지의 눈치를 봐야한단 말입니까?
 
  부연하자면 여기서 전자레인지가 쿠퍼고 냉동 펠메니는 갤러가 벌였던 일이야. 가칭 '프로젝트 갤러'라고 불렀던 일이지.
 

*


  갤러 형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난 통화를 녹음했어. 자네들 중에는 80년대에 그게 어떻게 가능했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기억해 봐. 냉전시대 첩보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경험이 있는 친구라면 알 수 있을거야. 소형 녹음기를 부착해서 감청하는 것 따위는 그때도 쉬운 일이었거든. 아무리 교통과라도 명색이 소련 경찰인데 그 정도 어려웠을까봐? 거기다 내 부서 안에서 누가 눈칠 채겠어? 내 책임 중 하나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할 부서를 잘 관리하는 거였다고. 그 말인 즉슨 내가 설치하고 모른 척 하면? 아무도 알 길이 없지. 하여튼 그래서 내선 8763번으로 이루어지는 통화는 죄다 녹음을 했다고. 내선 8763번은 쿠퍼 자리에 따로 놓아준 전화였거든. 그 전화로 통화가 이루어질 일이라면 (드물게 총무과나 인사과에서 걸려오는 경우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전부 갤러와의 사이에서 오갔던 대화였을테니까.
 
  여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종이 뭉치가 전부가 당시 내선 8763번의 녹음 내용을 출력해놓은 거야. 꽤 양이 많지?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서 곰팡내가 날 정도야. 위원회에 소환되었을 때 공개를 하려고 정리해 놓았다가 그냥 다락방에 처박아 두었었거든 (그래, 맞아. 내가 비겁했던 건 사실이야). 들여다 보면 몇 가지 자네들이 흥미롭게 생각할만한 내용이 있어. 내가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 놓았는데……. 옳지. 여기 있네.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1988년 4월 13일 오후 1시 19분에 시작해서 1시 43분까지 이어졌던 통화 내용의 일부야. 본론으로 들어가는 부분부터 읽어볼께.
  

갤러: 그나저나 일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프로젝트는 시작했나, 쿠퍼 세보타리?
쿠퍼: 아직…… 입니다. 갤러 이그노비치.
갤러: 아직이라고? 왜 아직이지? 나하고 하기로 약속한 일 아닌가?
쿠퍼: 상황이 좀…… 여의치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쿠퍼는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였어.)
갤러: 무슨 소리야? 같다니? 기야 아니야?
쿠퍼: 여의치 않습니다.
갤러: 뭐가 여의치 않은데?
쿠퍼: 제가 그 일을 해야 한다면…… 실행 가능한 여건인지 먼저 고려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갤러: 자꾸 같다고만 하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라니까.
쿠퍼: 그러니까…… 부서 안에서 좀 꺼리는 분들이 있는 느낌입니다.
갤러: 느낌이야? 아니면 정말 그런거야?
쿠퍼: 정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갤러: 누가 그러는데?
쿠퍼: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갤러: 남들이 싫어한다고 안 하나? 그게 당신 일인데? 왜 우리가 돈 주고 당신을 쓰는데?
쿠퍼: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쿠퍼도 답답했던지 목소리를 높이더군!)
갤러: 무조건 해. 내가 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누가 뭐라고 그러거든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쿠퍼: 그게 말처럼 쉽지가…….
갤러: 그렇게 하라니까. 그게 당신 일이라고. 싫으면 그만 두어야지.
쿠퍼: …….
갤러: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는데 약속한 일은 지키라고. 난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제일 싫으니까.


  자, 이 대목만 봐도 갤러 형사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갤러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쿠퍼가 움직여주기만 바랐던 것 같아. 그 놈이 나중에 진술한 그대로, '내 돈 주고 산 전자레인지가 왜 내 말을 안 듣지?' 라는 식이었지. 자신이 뽑은 사람이니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마인드랄까? 조직 내 상하관계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어떤 일'을 지시했다는 게 (나중에 조사 위원회가 공개한 판정문의 표현을 빌자면)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여기서 핵심은 형사과와 강력계의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을 갤러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거야. 말하자면, 조직이 원하지 않는 일을, 조직이 모르는 사이에, 아랫사람에게 일방 지시하고선, 정작 본인의 책임은 회피했던 거지. 그 '어떤 일' - 나중에 ‘프로젝트 갤러’라고 불렀던 것 – 거기에 대해 강력계와 형사과에서는 나중에 전혀 아는 바 없었다고 딱 잡아 떼었어. 물론 실제론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해. 상당히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부서와 관련되어 귀찮은 일이 생기질 않길 바랐지. 갤러 또한 뻔히 그걸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밀고 나갔던 건데 (이 부분이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손으로 밀고 나갈 생각은 없었던 거지.
 
  거 참 웃기지 않아? 말하자면 이런 거야. 내가 어떤 일을 벌이고 싶다고 해봐. 너무 하고 싶고 꼭 해야 쓰겠는데 주위 사람들이 싫어해. 다 반대해. 그래도 해야겠어. 죽어도 해야겠기에 남들이 뭐라고 하던 아랑곳 않고 밀고 나가. 다만…… 내가 직접 밀고 나가진 않아. 딴 놈을 닥달해. 이상하지? 왜냐고? 왜일까? 나도 그 이유를 오래 고민해봤어.
 
  딱 한 가지 결론 밖에 나오지 않더군. 결국, 총알 받이가 필요했던 거야.

 

*


  위에서 허락하지 않는 프로젝트의 수월치 않은 진행을 두고 아래에 책임을 묻는 상사. 심지어 그걸 ‘약속을 어겼다’고 표현했지. 자네들이 직장에서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 아마 굉장히 짜증나지 않겠어? 나라면 그 자식이 얄미워 미쳐버렸을꺼야. 불쌍한 쿠퍼에게는 미칠 기회조차 없었지. 그 애에게 가장 난감한 상황은 그 ‘약속’이라는 걸 지키기 위해서는 전 부서(강력계는 물론 형사과 전체)의 심기를 거스르며 움직여야 한단 사실이었을 거야. 갤러 놈의 말대로 움직이면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겠지. 그렇다고 부서의 지침에 따라 갤러가 시킨 일을 하지 않으면 갤러 놈이 자기 말 우습게 듣는다고 지랄을 하겠지.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던 거야. 졸지에 이래도 죽일 놈, 저래도 죽일 놈이 된거지. 만약 그 애가 수습이 아닌 시경의 어엿한 정식 직원이었다면 그래도 딱한 마음이 좀 덜했을지도 몰라. 최소한 자기 입지와 권리는 있었을테고 그런 시간 또한 결국엔 경력의 일부가 되었을테니까. 운이 나빠 보스를 잘못 만난 셈이지만 그 정도 불운은 누구나 겪는 인생의 일부 아니겠어? 시간이 지나면 좋은 보스도 만나고 모두 보상 받는 날도 오겠지. 하지만 그 애는 수습이었어. 몇 년 왔다가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그 애가 죄인처럼 지목되어 온갖 비난을 다 뒤집어 쓸 때를 기억해. 너도 나도 혀를 차며 한 마디씩 했지. "그쪽한테는 이곳이 잠시 거치는 곳인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생업이 걸린 직장이야. 이런 식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되지" 형사과나 강력계를 지목해서 비난할 생각은 아니지만, 당시 그 일이 그 애를 쥐 잡듯이 잡아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단 점에서 그 놈들 역시 비겁하긴 마찬가지였지. 쿠퍼가 부서 안을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들이 싫었으면 당연히 먼저 갤러를 찾아가 따졌어야지. 그 애는 단지 갤러가 몰아세우는 걸 견디지 못해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거니 말이야.    
 
  정작 갤러는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골치 아픈 일에 책임을 질 생각이 없었어. 물론 앞서 들려준 기록을 보면 ‘누가 뭐라고 그러거든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라며 큰 소릴 뻥뻥 치기야 했지만 당시 햇병아리 신참 형사에 불과했던 그 자식이 그런 소리를 할 위치는 전혀 아니었어. 만약 정말로 누군가 연락해서 따지려고 들었다면 바로 꼬리내리고 깨갱했을 걸. 기자 양반들도…… 잘 알겠지만 말이야. 그런 상황에서 정말 자신의 어깨에 책임을 지고 나서려는 사람이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라고 말할까? 차라리 ‘내가 연락해서 해결할게’라고 말하지 않을까? 난 그게 책임있는 윗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해. 그 당시에 갤러는 정말로 자기가 책임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호기롭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야.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졌지. 아무도 갤러에게 연락해서 싫은 소릴 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래). 왜냐고? 부서에서는 공식적으로 그 프로젝트가 존재하지 않았잖아?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프로젝트의 추진에 대해 항의한다는 게 부서 내 다른 형사들 입장에선 껄끄러웠을 수 밖에. 직접적으로 갤러에게 뭐라고 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 하루 이틀 그냥 저냥 지나다보면 그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프로젝트가 서서히 돌아가는 모양이 눈에 거슬리고……, 그러면 어쩌겠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곳에 화를 쏟아내야지. 그 대상이 바로 불쌍학 선량한 쿠퍼였던 거야.

 

*


  이제 쿠퍼 그 애가 여기서 정말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해야겠군. 언론을 통해 이제까지 밝혀졌던 이야기들 중에 일부는 맞았고 일부는 틀렸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 자료들에 근거해서 이 사건을 조사해왔을 자네들이 알고 있는 것 역시 일부만 사실이겠지.
 
  경찰 일을 하다 보면 별의 별 끔찍한 경험을 겪게 되지. 신원 미상의 사체를 목격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일상적인 일이야. 당시 타라클리아주가 아무리 촌구석이었고 인구가 적었어도 일주일에 한두 건씩은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물론 그 대부분이 주도인 우리 시에서 일어났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신원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주도인 우리 시로 옮겨졌지. 다시 말하자면 타라틀리아 주에서 나온 존 도우(신원 미상의 사체)는 거의 백이면 백 우리 시경 지하실의 보관소에서 관리하고 있었단 거야. 갤러는 쿠퍼가 그런 사건들을 따라 다니길 바랐어. 일정 기간 동안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 인계할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타라클리아 주립대학에 의대생 실습용으로 넘겨지는데 바로 그 타이밍에 빼돌리라고 지시한 거지. 왜냐고? 외부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갤러가 단지 더 많은 피해자를 조작 기록하여 수사 케이스의 수를 부풀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해. (골 때리게도 후일 조사 위원회에서는 "도덕적으로는 옳지 않으나 수사관으로 의욕이 앞서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며 면죄부를 주었다지?) 하지만 사실은 달라. 충직한 이고르 코노발로프가 은밀하게 알아보았던 바에 따르면 메리 셸리의 소설에 나올 법한 놈이더군. 맞아. 빼돌린 존 도우들로부터 쓸만한 부위, 장기, 조직을 모아서 다시 바느질을 해서 마지막으로 루이지 갈바니식으로 전기를 가한거지. 물론 직접 한 게 아니었고 말이야. 빼돌리는 것도, 보관하는 것도, 분류하는 것도, 끼워 맞추는 것도, 시침질, 홈질, 감칠질, 상침질, 박음질도, 마지막으로 전기로 생명을 불어 넣는 것까지…… 죄다 쿠퍼를 닥달해서 진행시켰지. 내선 8763번으로 전화를 걸어서 말이야.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나니 1989년 여름쯤에는 144명 분의 '프랑켄슈타인' 조합이 만들어 지더군. 음……  '명'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지, 아니면 '건'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거기 예쁜 아가씨, 이름이 그레첸라고 했나? 상당히 역겨워 하는 표정이군 그래. 하지만 진실이란 대개는 역겨운 쪽에 가까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기자 아가씨도 알게 될꺼야. 음……혹시 내가 이야기했던가? 갤러 형사가 독실한 교인이었다고? 안 했었나? 처음에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언급했는 줄 알았는데. 하지 않았었나 보군. 휴, 나이를 먹으니까 기억력이 영 예전같지 않단 말야.

​  아무튼 갤러 형사가 교인이었고, 평균에 비해 유난스러운 믿음을 가졌었던 건 맞아. 거 왜 있잖아. 직장 내 기도 모임에 들어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들, 주일에 찬송가를 부를 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부르는 사람들,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주위 사람들을 반강제로 끌고 가서 예배당에 밀어 넣는 사람들……, 갤러가 바로 그런 유형이었어. 사람이 살다보면 (나이를 먹어가며 안 좋은 점도 많지만 좋은 점도 있는데) 세상의 아이러니 같은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라는 거야. 있잖아. 내 평생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들 열 명을 꼽으면 그 열 명 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었어. 단지 종교가 있는 정도가 아니지. 소름 끼칠 정도로 독실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신기하지? 종교가 없어도 좋은 사람일 수는 있다지만 단단한 믿음을 갖고도 나쁜 사람인 경우가 훨씬 많다니 말이야. 그런 놈들이 사는 방식을 알아? 그런 놈들은 신나게 나쁜 짓을 하고 남의 인생 갈아먹으며 살아. 어느 순간까지는 그래. 그러다 자기가 더 나쁜 놈에게 당해보는 순간이 오지. 그러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 세상 다 잃는 사람처럼 절망해. '나는 이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어찌하여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니까!'라고 말하지. 이를 갈며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 어쩌고 저쩌고'라고 목소릴 높이지 (물론 조사위원회에 회부되었을 때 겔러 놈도 그렇게 반응했어). 내 생각은 말이야. 어떤 경우엔 믿음이 일종의 강력한 합리화 기제로 작용하는 것 같아. 내 믿음이 이리도 견고하니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주의 뜻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지. 오히려 아예 종교가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훨씬 더 평균과 상식에 가깝다고. 그 사건 이후로 나는 교인이기를 포기했어. 그 전에는 열심히 기도드리고 살았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비로소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알겠더군.

 

*


  내가 얘기했던가? 그 해 여름은 정말 더웠다고? 그래…… 그건 얘기했었지?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쿠퍼는 울며 겨자먹기로 가칭 ‘프로젝트 갤러’를 진행시켜 나갔어 (충직한 이고르 코노발로프가 달라붙어서 매일 제법 상세하게 내게 상황을 보고해 주었지). 당시 타라클리아 시경 형사과에는 냉동고가 여섯 대 있었어. 영화에서도 봤겠지만 죽은 사람들을 보관하는 냉동고 말이야. 한 대에 열두 구씩 들어가는 크기였어. 당시 시경 내부에는 부서간에 심각한 정치 싸움이 있었고 (황당한 일이지만) 그래서 부서간에 그 냉동고를 공평하게 배분하기로 되어 있는 상태였어. 지금은 법의학자들이 따로 있지만 그땐 그런 일들을 죄다 외부에 맡겨야 했어. 부서별로 알아서 진행해야만 했다고. 우리 교통과가 두 대, 경무과가 한 대, 생활안전과가 한 대, 그리고 형사과가 두 대를 관리하고 있었지. 형사과의 냉동고 두 대 중 한 대가 강력계의 몫이었지. 당시 강력계에는 형사가 여덟 명이 있었어. 말인 즉슨 그 여덟이 맡은 사건에 대해서만 그 냉동고를 쓸 수 있었고, 심지어 그 안에서도 여덟 형사가 열두 자리를 나눠 차지하여 자기 사건과 상관 없는 경우엔 쓰질 못하게 했어. 부서 안에서도 그런 마당에, 설령 다른 부서에서 냉동고를 건드리는 일이 있으면 큰 싸움이 났어 (알아, 유치하지만 그때만 해도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거든. 시설이 워낙 부족했으니까).

  갤러가 어느 날 나한테 전화를 해서 말하데. “과장님, 저희가 교통과 냉장고 좀 쓸 수 있을까요?” 라고. 우리 교통과로 배정된 냉동고 두 대를 쓰고 싶다는 거야. 나는 당연히 난색을 표했지. 아무리 내가 과장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과 안에도 여러 팀들이 있었고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은 잘해야 한 대 정도였거든. 치사하게 굴 생각도 없었고, 갤러에 대한 개인 감정 때문만도 아니었어. 그보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였을 뿐이야. 한 번 허락해주는 건 별 일 아니지. 그런데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 걷잡을 수 없어지고 말겠지. 그러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교통과 냉동고 전체를 다른 부서에서 나눠 쓰는 상황이 올 거라고. 그래서 거절했지. 내가 듣기로 갤러는 경무과장에게도 전화를 했다더군. “과장님, 저희가 경무과 냉동고를 좀 쓸 수 있을까요?” 하고. 물론 경무과장도 거절했지. 경무과에서 냉동고가 필요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아마 텅텅 비어있었겠지만 말이야.
 
  나중에 나의 충성스러운 병아리 중의 하나인 알렉세이 카소프스키가 뒷 이야기를 들려주데. 몇몇 지인들을 통해 듣자하니 형사과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쿠퍼를 문제삼고 있다고 하더군. 강력계 앞으로 배정된 냉동고 한 대를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죄다 자기 것인양') 차지하는 바람에 다른 형사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거야. 자기들 자리를 침범한 것으로도 모자라…… 한 칸에 몇 구씩 겹쳐서 쌓고 있었다고 하데. 그 사실이 발각된 이후로 일부 그 아일 동정하던 사람들까지 차갑게 돌아섰다고 하더군. 상식 이하의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누구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 거야. 어째서 불쌍하고 선량한 쿠퍼가 그런 유쾌하지 못한 작업에 나서야 했을지에 대해선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 그 아이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던 갤러 형사의 의지 말이야. 갤러는 자신의 ‘작은 실험’에 적어도 100구 이상의 죽은 사람들 몸이 동원되기를 바랐어. 강력계 몫의 냉동고를 다 합쳐봐야 24구 밖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긴 했나 몰라. 더구나 그 중에 겨우 두 자리 정도가 (그것도 위의 허락을 받아야 쓸 수 있는 두 자리 정도가) 신참 형사인 갤러 몫으로 쓸 수 있는 최대치였고, 다른 과에서는 냉동고를 쓰지 못하게 했었으니……어디 한 번 산수를 해보라고.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처음에 쿠퍼는 갤러가 얻어낸 두 자리에 존 도우들을 넣기 시작했어. 죄의식을 느끼며 세 배수씩 쌓았고 창의력을 동원하여 다섯 배수씩 구겨 넣었지 (그때 그 애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몰라). 그러다 도저히 방법이 없는 순간이 왔어. 당시 통화 기록을 다시 인용할 때가 되었군. 내선 8763번에서 녹음된 내용 말이야. 1987년 6월 8일 오후 4시 17분에 시작해서 5시 07분까지 이어졌던 통화의 내용이야.
 

갤러: 내가 시킨 일은 순조롭게 잘 되어가고 있나, 쿠퍼 세보타리?
쿠퍼: 아닙니다. 사실……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갤러: 아니야? 또 뭐가 아니야? 무슨 문제가 있는데?
쿠퍼: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없습니다.
갤러: 뭐를?
쿠퍼: 존 도우…… 들이요.
갤러: 어째서 공간이 없는데? 위로 쌓으라고 했잖아.
쿠퍼: 지금 냉동고 두 자리에 열 구를 넣어 놓은 상태입니다.
갤러: 그래? 더는 안 들어가나?
쿠퍼: 예, 그렇습니다.
갤러: 잘 넣어봐. 비스듬히 끼워 넣으면 더 들어갈 것 같은데.
쿠퍼: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갤러: 알았어. 좋아. 그럼 옆에 빈 자리 없나?
쿠퍼: 있긴 있는데……. 샤샤 형사의 자리입니다.
갤러: 거기에 일단 놓지. 샤사가 뭐라고 하거든 내가 알아서 잘 말할테니까.
쿠퍼: 하지만…….
갤러: 뭐가 또 하지만이야. 그렇게라도 해야지. 자리가 없다고 마냥 손 빨고 있을 수는 없잖아.
쿠퍼: 꼭 이렇게 많이 보관하셔야 할 필요가…….
갤러: 이 사람아, 일단은 쟁여놓고 보는 거야.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도 모르고 어디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잖나.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진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자기 영역을 침범했다고 뿔이 난 샤샤 형사는 쿠퍼를 불러다 쥐 잡듯이 잡았어. "누구 허락을 받고 이러는 거요?" 라는 식으로. 쿠퍼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뭐라고 하겠어? 난 시킨대로 할 뿐이니, 가서 갤러 놈이랑 해결 보쇼? (그리고 어떻게든 결론이 나거들랑 제발 좀 나한테도 좀 알려주쇼?) 그 아이가 그런 성격이었다면 진작에 갤러의 멱살을 잡았겠지.

  사실 샤샤 형사는 좀 병적으로 예민한 사람이었어. 한 번 그런 일이 생기자, 강력계에 사건 사고만 생기면 쿠퍼를 잡아다가 취조해야 한다고 거품을 물었지. 나중엔 쿠퍼의 그림자만 보여도 히스테릭하게 변할 지경이었어. 쿠퍼가 냉동고 앞만 지나가도 소리를 질렀지. "누구 허락 받고 쓰시는 거요?" 높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쿠퍼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짓을 했는지 떠들어댔어. 샤샤의 말만 들으면 마치 부서의 모든 문제를 수습직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 같았지. 냉동고의 앞에 커다란 경고문을 붙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 나중에는 점심 도시락을 넣어 놓는 사무실의 식품 냉장고에도 붙였다고 하데. <외부인은 냉장고를 쓰지 마시오>라고. 여기서 외부인이라는 표현은 쿠퍼를 가리키는 것이었어. 출입 제한 구역인 그 곳에 실제 드나들 수 있는 외부인은 없었거든. 그나마 외부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쿠퍼였던 셈이고.  
 

*


  그 무렵에 나는 세 병아리들을 불렀어. 쿠퍼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알렉세이 카소프스키, 이고르 코노발로프, 세이무어 야블로코프, 세 사람 모두 퍽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더군. 마치 서로 미리 짜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 쿠퍼씨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 저희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단 한번도요.
- 다만……, 뭐랄까.
  그 대목에서 세 병아리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 받데. 뭔가에 대해 같은 의견이 있었단 얘기겠지.
- 쿠퍼씨에게서 악취가 납니다.
- 말도 못할 정도입니다. 견디지 못할만큼은 아니지만.
- 여름이 되니 더욱 심해졌습니다.

  쿠퍼에게서 악취가 진동했던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꺼야. 매일 같이 죽은 사람들의 몸뚱이와 씨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부하들의 그런 증언들이 제법 극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따로 있어. 말하자면, 세상의 이치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의문으로 인한 것이었지. 정말 악취 나는 마음을 가진 남자는 따로 있잖아? (그 아이에게 악취나는 일을 시킨 소름끼치는 형사 놈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선량한 그 아이가 썩는 냄새의 진원지처럼 인식되고 있느냐는 거야. 반면에 갤러 형사놈은 3년 연속 '올해의 친절상' 수상자였고, 가정적인 남자였고, 독실한 교인이었고, 다소 진하다 싶은 향수 냄새 외에는 어떤 악취도 풍기지 않았지. 난 그런 생각을 했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쿠퍼 그 아이라고 죽은 사람들의 몸이나 만지는 일을 하고 싶었을까? 그럴 줄 알고 여기에 왔을까? 그 아이의 잘못이라면 '혀를 잃은 대신 마음 속에 돌이 하나 생긴 것' 밖에 없잖아. 우리가 살면서 다른 이들에 대해 단정짓고 평가를 내리는 과정이라는 것이 말이야……. 과연 올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자네들은 이런 의문을 가졌을지 모르겠군. 정말로 갤러 형사가 개 같은 놈 중의 개 같은 놈이고, 그 개 같은 놈이 시킨 일이 그 개 같은 놈보다 더 개 같은 일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불쌍한 쿠퍼가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맞지? 당연히 그런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을거야.

  1980년대 몰도바에는 그런 규정이 있었어. 모든 젊은이들이 사회 기반 시설에서 일정 기간 (아마한 3년쯤이었을꺼야)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는 제도였지. 거기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어. 첫째, 당시 체제의 특성상 일손이 워낙 모자랐기 때문에. 둘째, 젊은이들이 자유주의에 물들기 전에 이미 사회 시스템 안으로 편입시켜 순응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격이랄까? 특히 쿠퍼처럼 서유럽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요주의 대상이었어. 자칫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로 성장할까봐 당국에서 겁을 냈거든. 경찰서, 소방서, 우체국 같은 곳에서 2~3년 정도 수습직으로 일하게 하며 그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교화 과정을 거치게 하고 싶어했지. 실제로 효과가 있는 전략이었어. 어떤 측면에서 보면 쿠퍼 같은 유학생들은 요주의 대상인 동시에 귀중한 자산이었거든. 그쪽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할 기반을 갖춘 친구들이기 때문에 적절히 사회주의 소프트웨어만 다시 인스톨하여 그리로 보내 놓으면 말도 못하게 유용할 수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스파이도 꽤 많았다고. 아무튼 그렇다보니 근무지 선택이 자유롭지 않았어. 한 번 결정이 되면 다시 바꾸기가 쉽지 않았지. 갤러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단 사실을 밝히질 않았던 거야. 미리 말했으면 쿠퍼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했을테니까. 물론 먹잇감이 덪에 걸려든 다음에도 진실을 말해주진 않았지. 왜냐면 갤러는 자신을 좋은 사람처럼 포장하고 싶어했으니까.
 
  자초지종을 알았을 때 문득 예전에 읽었던 신문 기사가 연상되더군. 갓 상경한, 세상 물정 모르는 처녀애를에게 건실하고 좋은 직장을 알선해주겠다고 꼬드겨서 모스크바 유흥가에 팔아버렸던 몹쓸 사람들. 상황을 파악했을 땐 계약을 되돌릴 수 없는데다 이미 빚과 위약금을 불어나고 있어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되는거지. 그런 처지란 어떤 기분일까? 상상들이나 해봤어? 서서히 자기 인생이 (하지만 분명하게)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아무 손을 쓸 수 없는 심정이란…….
 
  목이 엄청나게 타는구만. 아니, 물은 됐고. 거기 대머리 기자 양반. 자켓 주머니 속에 숨겨놓은 스미느로프(보드카)를 좀 나눠주지. 진실을 듣는 댓가로 술 한 모금이면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싶은데…….

 

*


  그 사건이 있고 10년쯤 지나고 나서 문득 진실을 캐고 싶어졌었어. 1998년과 그 이듬해까지였지. 나는 갤러를 알만한 사람들을 무작정 찾아갔어. 빚이라도 받아낼 사람처럼 채근해서 진술을 받아냈지. 자료가 있냐고? 없지. 그때는 나도 소형 녹음기쯤은 우습게 구할 수 있는 구 소련 경찰의 일원이 아니었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에트 연방은 진작에 붕괴했고 소형 녹음기는 이미 상점 가득 널려 있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 내게 남아 있을 우대권이 있기나 했을라나?) 그냥 길거리 커피숍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들은 이야기들이라 증거는 없어. 믿거나 말거나 그건 그대들의 자유야. 내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갤러 형사는 의사 집안의 막내였어. 아버지도 의사셨고, 할아버지도 의사셨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의료 행위를 겸하는 이발사셨지. 갤러의 두 형 또한 의사였어. 내가 알기로는 갤러 역시 의사가 되려고 했던 것으로 아는데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뭐가 잘 되지 않았던가 보지. 직업에 귀천이 있고 서열이 있지야 않지만 의사가 되려다 형사가 되고만 사람의 정서는 그렇지 않은가 보데. 갤러의 그 가식적인 치장 아래에 기괴하게 뒤틀린 영역이 생겨난 사연이 바로 그런 것이었지 싶어. 다들 입을 모아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 갤러 형사가 자신의 의사 형제들에게 심각할 정도의 컴플렉스를 느껴왔다고. 그래서 형제들을 깔아 뭉개고 위로 올라서고 싶어했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놈이 ‘프로젝트 갤러’를 고집한 이유도 짐작할만 해. 말하자면 생명의 정비공(의사)들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신)가 되고 싶었던 거지. 겸사 겸사 전시용 학위도 받아 챙기고.
 
  사람은 누구나 어둡고 뒤틀린 부분을 갖고 살아가는 법이라 갤러가 그런 욕망을 가졌다는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어. 저 혼자서야 경멸을 되갚아주는 맛을 음미하든, 제 형제들을 찍어 누르는 쾌감을 양분 삼아 살던 말던 남이 뭐라할 일이 아니지. 하지만 자신의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연료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갈아 넣었다고 한다면 그건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 갤러 형사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먹고 살만한 사람이었잖아? 딱히 아쉬울 것도 없었지. 요즘에야 경찰이 천대받는 직업이지만 그 당시 구 소련 체제 하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았거든. 집안도 풍족했지. 줄줄이 대를 잇는 의사 집안이라니까. 다시 말해서 갤러에게 학위는 액세서리와도 같은 거였어. 있으면 폼 나지만 없다고 굶을 일도 없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편에 쿠퍼가 있었지. 역시 학위를 받고자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아이는 순수하게 학생이었을 뿐이야. 아무런 기반도 경제력이 없었고, 본인의 의지로 시경에서 일하게 된 것도 아니었고, 강력계 수습직이 그 아이의 커리어에서 의미있는 경력이 될 것 같지도 않았지. 이 문제를 아주 단순화시켜서 그 아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이야. 자기 학위 주제를 연구할 시간에 남의 학위 연구를 대리해준 셈인 거야.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해? 난 아니라고 봐. 세상 돌아가는 이치란 말이야. 양손에 사과를 하나씩 가진 사람들이 하나를 더 가지려고 사과 한 개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쥐어 짜내는 식이 아닌가 싶어. 갤러 같은 놈들은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지.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니까. 쿠퍼가 사회 복무를 마칠 수 있도록 본인이 크게 힘을 써줬던 것처럼.
 
  오히려 큰 소리를 쳐야 할 사람은 쿠퍼였다고 생각해. 아까도 말했지만 그 애는 파리 8대학에서 심리학 박사과정을 밟던 도중에 귀국한 것이었잖아. 그런데 마침 그때가 태양 주기가 극대화되는 활동기였다고. 기자 양반들도 들어본 적이 있겠지? 한두 번쯤 과학 기사를 다루었던 경험도 있을 테니까. 그런 시점에 태양에는 흑점이 늘어나고 태양 플레어의 발생이 왕성해진다고. 그러니 그런 현상들이 인간의 두뇌 잠재력에 미치는 영향에 연구를 진행하던 쿠퍼에게도 아까운 시기였을 수 밖에. 그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남의 인생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9년에서 10년에 한 번 돌아오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야. 참 딱한 일이지. 물론 타라클리아에서도 나름대로 자료 조사나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파리만큼 자유롭기나 하겠어? 사상 경찰과 공무원들의 눈이 번뜻이던 시대에 말이야. 하지만 태양 주기의 극대화는 다른 방식으로 그 아이에게 영향을 미쳤지.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지. 나중에 나도 나머지 공부를 좀 해봤어. 그 무렵이 '솔라 사이클 22'라는 분류로 정의되던 시기였는데 주기의 최고점이 다름 아닌 1989년 6월이었다고 하데. 가장 많은 흑점이 나타났고, 유례없는 격렬한 폭발과 함께 끓어오르는 듯한 화염이 이글거렸고, 무서운 양의 고에너지 입자 폭풍이 우주로 쏟아져 나왔다는 거야. 우리가 영원히 잊지 못할 악몽의 밤을 보내던 그 해 6월에 말이야.

 

*


  이야기에 두서가 없어 미안하네. 이쯤되니 나도 무엇을 이야기했고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내가 어렸을 적에 가장 싫어하던 시험이 있었어. 역사적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배치하는 유형의 문제들……. 아무리 잘 준비해도 결국엔 헛갈리데. 그런 문제가 짜증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네 개의 사건 순서를 정확하게 맞춰놓을 자신이 있어도 마지막 하나의 사건이 어디 순서에 들어갈지 모르면 그야말로 말짱 꽝이 된다는 거야. 뭐랄까……, 일종의 변별력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 유형의 문제는 전혀 알지 못하는 학생들과 80%쯤까진 정확히 알되 찍을 운은 없는 학생들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지 (똑같이 점수를 얻지 못할테니까?) 아무튼 사건을 그런 식으로 배치해보자고. 그럼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쉬울테니 말이야.
 
① 갤러 형사가 사회 복무직(수습) 채용 공고를 게재함.
② 타라클리아 시 역사상 최악의 날을 도래하게 한 '그 사건'이 발생함.
③ 갤러 형사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갤러'가 시작함.
④ 쿠퍼 세보타리가 타라클리아 시경에 채용됨.
 
  기자 양반들이 모범생 스타일이라면 (혹은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고 한다면) 여기까지 보기가 네 개인 경우를 짜맞추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①은 1987년 2월의 일이야. ②는 다들 알다시피 1989년 6월의 대참사를 말하는 거지. 쿠퍼가 이 곳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프로젝트 갤러'가 시작되었으니 ③은 ④보다 앞에 올 수가 없어. 실제로 ④가 1987년 3월의 일이고 ③이 1987년 6월의 일이었지. 여기까지는 다들 어렵지 않게 맞췄을꺼야. 
 
  자, 그럼 마지막 보기 ⑤를 더하여 문제의 난이도를 올려보기로 하지.
 
⑤ 갤러 형사가 타라클리아 주립 대학에 이학 박사 학위를 청구함.
 
  물론 이건 맞출 수가 없는 문제지. 지금까지 내 이야기에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잖아. 이걸 맞출 수 있는 건 자네들이 기자이고, 또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 일종의 선행 학습을 해왔기 때문인 거지. 맞았어. ①-④-③-②-⑤가 정답이야. ⑤는 1989년 12월의 일이니까. 시의 절반이 쑥대밭이 되고 시경 건물의 절반이 날아간 그 사건 이후 채 6개월이 되지 않아 갤러 형사는 학위를 청구했던 거야. 그리고 그해 겨울에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지. 많은 사람들이 역사 문제만큼 싫어하는 산수 문제로로 넘어가 볼까? 학위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지. 일정 기간 이상 과정에 등록을 했을 게 아니야. 1989년 말에 청구를 하려면 적어도 최소 3년에서 4년 전에는 수학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잖아. 셈을 해보면 간단해지지. ①보다 늦게 학위 과정을 시작했으면 시간이 맞지 않잖아. 실제로 갤러 형사는 1985년 봄학기부터 카라클리아 주립대학에 등록이 되어 있었어. 다시 말해서 쿠퍼가 채용되기 2년 전이었지. 처음 몇 학기 동안은 근무가 끝나고 야간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던데 그 이후에 학위 연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 무슨 말이냐면 하필 그 시점에 갤러가 상부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단적으로 인력을 뽑아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야.
 

*


  '프로젝트 갤러' 회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되었습니다. 갤러 형사가 회의를 주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작지만 위험하며 대단히 신성모독적인 실험에 있어 구체적이고 정교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즉흥적으로, 깊은 고민 없이 일을 벌였습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왼팔을 잘라놓고 전기를 넣어보지. 한 네 마리쯤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몸을 지칭하며 분명 '마리'라는 단위를 사용했습니다.) 어쨌든 일주일 동안 저는 시킨대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결과였는지 아마 능히 짐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프랑켄슈타인의 부활'류의 신문기사를 읽으시거나 뉴스 보도를 들으신 적이 없을테니까요. 그러면 다음 주 회의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왼팔은 아니었어. 아닐 것 같았어. 오른팔을 잘라봐. 한 네 마리쯤 하지?" 물론 (당연히!)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갤러 형사는 '전기를 인가하여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전제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쉽게 성공할 수 없는 건, 오로지 넣어준 전기의 아주 일부만이 심장에 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엉뚱한 곳으로 전기가 새고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체의 특정 부위며 장기를 하나씩 제거하며 루이지 갈바니의 업적을 재현해보고자 하였습니다. 팔이나 다리로 새어나가는 전기의 손실을 막아도 여전히 생명의 불꽃이 되살아나지 않자 그 다음으로는 죽은 사람들의 몸에 있는 구멍을 남김없이 막아보기를 원했습니다. 액체도 하나씩 제거하여 따로 보관해 놓았다가 실험이 시작할 때 다시 넣어주길 원했습니다. 그러다 뾰족한 수가 없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왼팔이 문제였던 것 같은데……. 다음 주에는 왼팔을 잘라놓고 전기를 넣어보지. 한 네 마리쯤 하면 되지 않을까?" 마치 닥치는대로 밭에 뿌려놓고 그 중에 싹을 틔운 것이 있으면 취하겠다는 식의 진행이었습니다 (조악하나 가장 진실에 근접한 비유입니다).
 
  갤러 형사는 이 프로젝트를 굉장히 서둘렀습니다. 옆에서 지켜볼 때 조바심을 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마치 '내일은 없다'라는 자세로 매주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쏟아부으라고 제게 지시했습니다). 말은 쉬웠습니다. 쏟아부을 역량이라는 게 애초에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말입니다. 시경은 개인의 실험을 위한 공간이 아니며 누구도 제가 갤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의와 모욕을 받았습니다 (물론 샤샤 형사가 가장 지독하게 굴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버려진 지하실에 숨어 신을 조롱하려는 갤러의 고약한 장난을 실현하여 주었습니다. 어둡고 습기차고 악취가 진동하는 그런 곳에서 하루 종일 살 타는 냄새를 맡으며 지내다보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저도 모르게 서러움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갤러는 그 사실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사정하고, 빌고, 호소하고, 떼를 쓰고, 간청해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남자는 일주일에 한 번 회의실에 나타나 그 잘난 세 치 혀만 놀렸을 뿐, 직접 자기 손으로는 그 어떤 피로한 작업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땀흘려 가며 직접 해보았다면 그렇게 무리한 일을 벌일 수 있었겠습니까?
 
  무려 144구였습니다. 갤러 형사의 죄의 크기이자 제가 지어야 할 죄의 무게입니다. 시원이 분명하지 않다거나 인계할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한 때 생명이었던 144명의 영혼을 우리는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갤러 형사는 그들의 몸뚱이가 귀중한 자산이자 재료라며 단 1 그램의 살덩이도, 단 1 밀리리터의 체액도 버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남김 없이 모두 담아 냉장하거나 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검은색 비닐봉투나 타파웨어 도시락통에 넣어서 말입니다. 시경의 냉동고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소란이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매일 악몽을 꾸었습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기가 괴로웠습니다. 갤러 형사도 죄의식을 느꼈는지는 제게 묻지 마십시오. 그 남자는 5시 30분이 되면 백팩을 매고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몸을 시침질, 홈질, 박음질, 감침질, 상침질……, 심지어 공그르기, 새발뜨기, 휘갑치기까지 하느라 쩔쩔 매는 저를 아랑곳 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그 남자는 매일 아침 사내 기도 모음에 나가 목소리를 높여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그 남자는 죽은 사람들의 몸을 셈하며 '마리'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입니다. 저에게 그 남자의 죄의식에 대해 묻지 마십시오. 설령 저를 위해 준비된 지옥이 있다한들 그 남자가 갈 곳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후략)
 
- 쿠퍼 세보타리의 <경위 진술서> 중에서 -
 

*


  그때까지 쿠퍼 그 아이는 상상도 못했지. '프로젝트 갤러'가 갤러 형사의 개인 학위를 받기 위한 실험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솔직히 누가 알았겠어? 대학이나 연구소라면 한번쯤 의심했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보통의 평범한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해봐. '저 사람은 자기 업무와는 별개로 학위 연구를 하고 있을까?'라고 생각해보기나  하겠어? 여긴 경찰서였고 그 어떤 사람은 범인 때려잡는 형사였단 말야. 둘째로 갤러가 시킨 일이 어딜 봐도 연구처럼 보이지는 않잖아? 그 애가 <경위 진술서>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고 하데. '마치 닥치는대로 밭에 뿌려놓고 그 중에 싹을 틔운 것이 있으면 취하겠다는 식의 진행'이었다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난 주사위 놀이에 비유하고도 싶어.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숫자를 기록한다고 그것이 연구가 되는 건 아니잖아? 어깨 위로도 던져보고, 등 뒤로도 던져보고, 심지어 가랑이 사이로도 던져보고, 그래서 통계를 내었다고 한들 그 차이에 무슨 의미가 있어? 던진 횟수만 무작정 늘린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물론 나야 뭐 한낱 무식한 경찰 출신일 뿐이니까……, 고매한 학문적 세계엔 문외한이기는 하지만……. 어쟀든 내 생각은 그래. 그렇게 받을 수 있는 학위라면 나도 받겠네. 돈 주고 사람 고용해서 돌리면 되는 거잖아 (그러고보니 갤러 그 놈의 전자레인지 비유가 생각나는군). 어쨌든 자네들 중에 가방 끈 긴 친구들이 있다면 미안하네. 모두를 싸잡아 욕하려는 건 아니었어.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 갤러의 학위 연구임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쿠퍼가 순순히 그 일을 진행하여야 했을까? 까놓고 말해서 좀 골 때리는 일을 시킨거잖아. 아니, 그보다 더하지. 불법에다가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지. 그 아이도 물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 아이는 자기가 서류 정리 정도를 하다가 파리로 돌아가게 될 줄 알았거든). '왜 이런 일을 시킬까?'라는 의문도 가졌지. 하지만 적극적으로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하지는 못했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지 (물론 갤러는 그 의견을 묵살했던 것이고). 그래서 나중에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의견이 분분했다고 하지. '아무리 그래도, 법과 상식과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지시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맞아.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쿠퍼 세보타리는 시경의 수습직으로 있었던 것이고 어떤 업무 편람에도 그 애가 신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한 누군가의 사적 도구가 될 필요가 있다고 적혀 있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전에도 언급했지만 그 시절의 의무 사회 복무라는 것이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쿠퍼가 갤러의 지시를 거부했으면 갤러는 쿠퍼를 해고시켰겠지. 그럼 쿠퍼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았을꺼야. 무슨 법이 적용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뭔가가 적용되어 처벌을 받았겠지. 그러나까 '의무'라고 부르는 거잖아.
 
  무작정 그 아이를 감싸려는 건 아니지만 쿠퍼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고 그 애를 비난하는 건 좀 심하다 싶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옳지 않다고 말했어야 한다는 거지. 싫으면 싫다고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했어야 한다는 거지. (마치 성추행 가해자들을 감싸는 논리처럼 들리지 않아?) 시간이 많이 지나 그때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지금, 사람들은 훨씬 더 쉽게 말하지. 부당한 요구하면 적극적으로 거부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당시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을까?
 
  이 대목에서 다시 내선 8763번의 통화 내용을 복기해보자고. 1989년 6월 07일 오후 3시 42분에 시작해서 3시 51분까지 이어졌던 통화 내용의 일부야. 문제의 그 날 오후에 있었던 통화이고 긴 말 없이 아주 짧게 끝났지.
 

갤러: 다음 주에는 오른팔을 자르고 전기를 넣어봐. 한 네 마리쯤 하지, 쿠퍼 세보타리?
쿠퍼: 다시 오른팔을 말입니까?
갤러: 그래. 다른 구멍 다 막고 오른팔 없이 전기를 넣어본 적은 없지 않나?
쿠퍼: 사실…… 여러 번 해보았습니다.
갤러: 그래도 한 번 더 해보지. 이번엔 잘 될 수도 있으니까.
쿠퍼: 그런데, 지금 조금 오래된 분들만 남으셔서 사실 만신창이가 된 상태라…….
갤러: 신선한 '놈'이 없다고? 한번 잘랐다 붙인 것들이야?
쿠퍼: 예.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
갤러: 내가 쌩쌩한 놈들 백 마리쯤 넉넉히 준비해 놓으라고 항상 말하지 않았나?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는데.
쿠퍼: (아! 도망가고 싶다!)
갤러: 지금 뭐라고 그랬어, 쿠퍼 세보타리?
쿠퍼: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갤러: 이젠 거짓말까지 하나?
쿠퍼: …….
갤러: 당신이 도망가면 난 당에 보고할 것 같은데? 내가 그런 면에서 또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라…….
쿠퍼:  …….
갤러: 아무튼 그럼 바느질 꼼꼼하게 된 놈으로 쓰지. 오른팔만 다시 잘라내어 보고. 네 마리쯤.
쿠퍼: 예…….
갤러: 그리고 3층 강력계에서 그냥 진행하지. 다른 데 가서 하지 말고.
쿠퍼: 하지만…….
갤러: 뭐가? 또 누가 뭐라고 그러나?
쿠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다른 곳에 가서 하겠습니다.   
갤러: 아니! 내가 3층에서 하라잖나. 만약 누가 뭐라고 그러거든 나한테 직접 연락하라고 해! 


  그 날 통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세 병아리 중의 하나인 세이무어 야발로코프가 쿠퍼를 봤다고 하데. 서측 계단의 3층과 4층 사이에서. 축전기를 깔고 앉아 바디백 두 개를 안고 울고 있었다고 들었어. 안 봐도 비디오지. 갤러 형사가 시키는대로 바디백과 축전기를 안고 강력계 사무실에 올라갔다가 된통 욕을 먹고 쫓겨나온 거였지. 쿠퍼를 제지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샤샤 형사 아니었을까?) 갤러 형사에게 전화해서 따졌을 것 같지는 않아. 결국 또 불쌍한 쿠퍼만 새우등이 터진 거지. 바디백을 그대로 다시 들고 나가라고 한 놈도 대단한 놈이야. 그 무거운 걸 어깨에 이고 그 아이가 어딜 가겠어? 형사과 안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씩 하겠지 (어이 거기, 시체를 안고 다니면서 뭘 하는거야!). 교통과 안으로 들어오자니 내 눈치가 보였을 테니 자리로 돌아오지도 못했겠지, 그렇다고 그냥 바디백을 버리고 나 몰라라 하자니 갤러 놈이 지랄을 할테고, 그러니 할 수 없이 거기 숨어있었던 거지. 서측 계단은 왕래하는 사람이 적으니까. 세이무어는 마음이 착한 아이여서 그 광경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하데. 그 이야길 전해듣고 나도 모르게 발길이 서측 계단으로 향하더라고. 당시 내 사무실은 5층에 있었거든. 5층 난간에서 고갤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 봤지. 각이 안 나와서, 잘 안보이길래 살금살금 몇 계단 더 내려가서 그 아일 지켜보았어. 그때가 오후 4시 정도였고, 막 정점을 지났던 태양은 스러지기 전에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주홀색 광선을 쏟아내고 있었어. 그 아이의 옆 열굴이 살짝 달아오른 듯하면서도 상당히 슬퍼보였지.
 
  그런데 그 순간 서측 계단의 눅눅한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하더군. 착각인 줄 알았었는데…… 착각이 아니었어. 분명 공기가, 그 안의 분자들이 낮게 떨리고 있었지. 그 아이가, 쿠퍼가 웃고 있었던 거야. 그 웃음은 발작에 가까웠고 절망과 비탄의 음을 연주했지.  목 뒤로 서늘한 느낌이 들었어. 그 아이가 서서히 미쳐가고 있진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데.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야. 머릿속으로 되새겨 본 적은 많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힘들군. 누가 거기 물 좀 주겠나? 아니, 보드카는 이제 그만. 물이면 충분하네. 술을 더 마시다간 이야기를 끝맺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


   1989년 6월의 유례없는 격렬한 태양 플레어가 정확히 6월 중 어느 날에 정점을 찍었는지는 몰라. 구체적으로 몰도바에 가장 심하게 영향을 미친 날이 언제였는지도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렇게 믿어. 우주 속으로 쏟아져 나간 고에너지 입자들이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지구까지 영향을 미쳐 우리 뇌의 어느 특정 영역을 자극하는 일이 그 해 6월에 있었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 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영향의 지원지에 있었던 이가 있었다면 (공교롭게도 파리에서 태양 플레어의 영향을 연구했던 심리학도 그 아이) 쿠퍼 세보타리가 아니었을까. 그냥 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확실한 것은 그렇게 그 날의 비극이 시작되었고 우리에겐 잊지 못할 긴 밤이 시작되었단 거지.

 

*


  이제 이 긴 이야기의 끝을 맺어야 할 때가 되었구만. 문제의 그 날 난 세 법 비겁한 일을 저질렀어. 그게 바로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지. 부끄러웠으니까. 쿠퍼 그 아이를 둘러싸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을 느낀 나는 5층의 내 사무실로 뛰다 시피 올라갔어. 그리고 세 병아리들…… 알렉세이 카소프스키, 이고르 코노발로프, 세이무어 야블로코프를 불러 토카레프 TT-33 권총을 세 자루 꺼내서 나눠주었지.
- 이게 뭡니까, 알렉센드로 맨시코프 동무?
- 보이는 그대로야, 알렉세이 카소프스키.

  왜 권총을 나눠주려고 했는지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어. 하지만 난 그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길 바랐고 그날 밤 시경 어딘가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심상치 않은 일에 제대로 대응하기를 바랐거든. 그리고 그 예감은 결코 틀리지 않았지. 창 밖을 보니 날이 무섭게 어둑해지데. 조금 전까지 넘어가던 해는 온데 간데 없었지.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시가 조금 넘었는데 마치 자정은 훨씬 넘어선 한밤 같았어. 그래, 난 그 애들에게 총을 나눠주었지. 그리고 아랫층에 내려가 보라고 했지. 쿠퍼 그 아이를 주시하라고도 했지. 누굴 쏘거나 누굴 위협하라고는 안했지만. 바로 그때 천둥이라도 친 것처럼 쿵 소리가 났어. 골이 덜덜거리고 이빨이 욱씬거리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렸어. 난 소리를 질렀지.
- 어서 가봐! 다들!

  그리고 난 가지 않았어. 문을 잠그고 등받이 있는 의자를 문고리에 비스듬히 기대서 문을 열리지 않도록 막았지. 그리고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가서 같은 작업을 한 번 더 했어. (믿을 수 있겠어? 두 번씩이나!) 그리고 책상 밑에 숨으려다가 결국엔 옷장 안을 선택했지. 밧줄로 문고리를 감고, 한 손에는 콜트 M1911 권총을 들고, 한 구석에 소방 도끼까지 세워놓았더랬어. 뭐가 되었든 중요한 건 숨어 있었단 거지. 그게 그 날 내가 저지른 첫번째 비겁한 일이야. 후회가 되느냐고? 물론이지.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어? 덕분에 나는 그 날 그 사건의 대부분을 내 눈으로 보지 못했어. 어이, 거기 예쁜 기자 아가씨. 그렇다고 김빠진 표정을 하진 말라고.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 충분히 웃기는 일이겠지. 영화의 3분의 2쯤을 놓친 사람이 그 영화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벌리는 격일테니까. 내가 아랫층에 직접 내려가기 전까지 벌어졌던 일들은 내가 아닌 세 병아리들이 목격한 일을 전해 들은 것 뿐이야. 정확히는 충직한 이고르 코노발로프에게 전해 들었지. 알렉세이와 세이무어와는 다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으니까. 
 

*


  이고르는 이렇게 말했어. 이 파일이 나중에 그 아일 면담하면서 적어두었던 자료인데…… 어디 보자.

  3층으로 내려갔을 때 복도에는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어요. 밖은 고요했어요. 평소보다 빨리 어두워졌단 점을 빼고는 밖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돌풍은 커녕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어요. 그런데도 창문이 덜덜 떨리고 있었던 거죠. 무슨 뜻이냐면, 만약 뭔가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일은 안에 있으리란 것이었죠. 밖이 아니라. 알렉세이는 저보다 더 긴장한 표정이었고 세이무어는 저보다 덜 긴장한 표정이었죠. 그런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지만 전 그 점이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평소 두 친구의 성향과 정반대였거든요.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땐가?"라며 마음을 다잡았죠.

  강력계는 314호였는데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중이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어요. 3층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이 314호였으니까요. 저희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접근해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섰어요. 토카레프 TT-33의 안전장치를 조용하게 풀었지만 정말로 쏠 생각은 없었어요. 사실 남의 부서에 개인화기를 들고 기웃거리는 것부터가 평소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동무께서는 물론 잘 아시겠지만 우리 시경의 독특한 분위기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부서간의 '마이 웨이' 분위기. 다른 부서가 내 부서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대단히 싫어하는 분위기. 만약 우리가 권총을 들고 강력계로 뛰어 들어갔는데 어떤 문제 상황도 아니었다고 한다면 아마 퇴사하는 그 날까지 두고 두고 욕을 먹었을 겁니다. 특히 샤샤 형사 같은 눈꼴시린 놈들 있잖습니까. 저희를 볼 때마다 두고 두고 그런 말을 했겠죠. "거기서 뭐하는 거요? 혹시 우리 부서를 기웃거리려는 건 아뇨?" 그러니 젠장할,

다행스럽게도 문제 상황이었다고 해야겠군요. 심각했어요. 남의 부서 사람들이 안전장치를 푼 권총을 양손에 쥐고 나타나도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할만큼. 그 중심에는 그 사람이 있었죠. 쿠퍼 세보타리. 저희 교통과에, 구체적으로 저희 방에 자리를 하나 얻어 지내는 그 사람.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를 중심으로 공기의 소용돌이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어요. 무엇이라도 그 안에 말려 들면 바로 크게 원을 그리며 밀려 다니게 될 기세였죠. 책상이나 파티션들이 구부러졌어요. 종이장처럼요. 서류철, 연필, 볼펜, 메모지, 열쇠, 지갑, 머그잔 (세계 최고의 보스라고 프린팅 된) 등이 공중을 날아다니더군요. 마치 쿠퍼 그 사람이 태양이고 그 나머지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행성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알렉세이가 강직된 자세로 총을 치켜 들었어요. 어째 평소보다 너무 긴장해있단 사실이 마음에 걸리더니만……. 사실 알렉산드로 메시코프 동무는 저희에게 토카레프를 나눠주시면서 언제 어떻게 쓰라는 말씀까진 하지 않으셨죠. 위협만으로 사태를 제어하라는 뜻인지, 발포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를 제압하라는 뜻인지, 혹은 (조금 이상하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를 보호하라는 뜻인지. 아마 저희 세 사람이 각각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지 싶어요. 알렉세이가 이해한 건 첫번째와 두번째의 중간쯤 되는 것이었지요. 정말 쏠 마음까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알아요. 다만 긴장한 탓에 방아쇠를 당겼겠죠. 무의식적으로 근육이 수축했던 건지도 몰라요. 타앙! 거의 누군가 괴성을 질렀는데 강력계의 형사 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총알이 소용돌이의 가장자리를 타고 날아가 왼쪽 정강이에 박힌 겁니다. 그러자 샤샤 형사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쳤죠. "쏘지 말라니까! 절대로! 다들 총 내려놔!" 우린 그 말을 듣지 않았어요. 남의 부서 사람이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은 없었으니까.

  쿠퍼 그 사람이 안쪽으로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갓어요. 원이 넓어지며 더 많은 책상과 파티션이 부서지며 새로운 폐허가 생겨났고요.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잡동사니들은 더 많아졌어요.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어요. 저희는 그의 뒤에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가 짧게 천장을 올려다 보았을 때, 마치 광선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스프링쿨러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건 똑똑히 확인했죠. 뿐만 아니었어요. 겁을 먹은 강력계 직원들이 창문쪽으로 달라붙자 일제히, 거짓말처럼, 마치 단두대가 내려오듯이 창문이 내려와 닫히고 잠겼죠. 전 생각했어요. '하나님, 맙소사! 생각만으로 뭘 움직일 수 있단 말야? 말도 안돼! 내가 미쳤거나 아니면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봐." (유달리 몇 년 사이 염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대했었죠. TV에도 매일 눈빛만으로 숟가락 구부리는 사람들이 나오고…….) 쏘지 말라는 샤샤 형사의 비명에 가까운 지시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심지어 강력계 사람들도 그 말을 듣지 않았죠. 연달아 쏟아지는 총 소리는 마치 팝콘 튀기는 소리와 비슷했어요. 그 중의 일부는 공전 중인 잡동사니들에 맞았고 (세계 최고의 보스라고 프린팅된 머그잔이라던가), 그 중의 일부는 석고 천장이나 시멘트 바닥에 틀어가 박혔고, 그 중 딱 한 발이…… 세이무어의 가슴을 관통했지요. 마치 야구 중계에서 세이프와 아웃을 판정하기 위해 느린 그림으로 돌려보는 것처럼, 총알의 분명한 궤적이 다 보였어요. 아마 그 친구도 보고 있었을 거예요. 한동안은 본인도 믿지 못했죠. 전혀 현실적인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일단 현실임을 믿고 보면 그 다음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느린 그림을 돌려볼 필요도 없이 아웃이었죠.

  알렉세이는 얼어붙었고 저는 패닉에 빠졌어요. 강력계 사람들 중 일부는 날아다니는 물건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일부는 창문을 깨고 나가려다 부상을 입었죠. 다시 총질이 이어졌을 땐 강력계 사람들 몇몇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요. 총알은 쿠퍼 그 사람 근처에도 가지 못했어요. 샤샤 형사가 히스테릭하게 다시 악을 썼지요. "이 저능아들아! 총 좀 쏘지 말라니까!" 그때 저는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세이무어를 잃은 마당에 저희가 그 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얼음덩이가 된 알렉세이의 멱살을 잡아 끌고 뒤로 도는데…… 들어올 때는 분명히 보지 못했던 수십개의 바디 백이 그곳에 있었던 겁니다. 지퍼가 열려진 상태로.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동무가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


  그때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어. 어수선한 소음이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지. 총 소리가 한 발 들릴 때마다 납 덩이가 가슴에 하나씩 채워지는 느낌이었어. 늦던 빠르던 숨어 있기를 그만 두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 과장실 밖으로 나와서 교통과의 문을 열어 놓을까 말까 하는 찰나에 누군가 세차게 문을 흔들었어. 덜컥, 덜컥, 덜컥. 잠겨있단 걸 확인하자 큰 북을 치듯이 두들겼어. 깜짝 놀란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았지.
- 문 열어 주세요, 알렉산드로 맨시코프 동무! 제발요!
  알렉세이의 목소리였어. 본능적으로 동작을 멈추고 소리를 내지 않았어. 이빨이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어.
- 동무! 제발이요! 놈들이 쫓아와요!
  마치 문 뒤에 내가 있단 걸 아는 듯 했어. 무엇보다 '놈들'이라는 말이 등골을 오싹하게 하데. 도저히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어. 놈들이라니? 누구? 강력계 놈들? 물론 그렇지는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았어. 예감이라는 게 있었지. 난 숨을 참고 가만히 앉아 있었어. 오! 불쌍한 알렉세이 카소프스키! 난 그 아이가 끔찍한 괴성을 지르고, 지르고, 더 지르고, 지르다 못해 잦아들 때까지 그 자리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지. "용기가 없었다는 걸 미안해하지 말아라."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것이 그 날 내가 저지른 두 번째 부끄러운 일이었지.

  시간이 지나고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복도는 어둠과 피, 그리고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로 더럽혀져 있었어. 알렉세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너무도 확실했지. 이고르가 느꼈던 것처럼…… 알렉세이는 아웃이었어. 느린 그림으로 다시 볼 필요도 없었지. 그리고 어둠 속에서 흐물거리며 다가오는 기분 나쁜 형체들을 보면서 또 한 가지의 사실이 확실하게 다가왔어. '바디 백을 열고 나왔어!' 그 말이 메아리처럼 귓바퀴를 돌았지. 어떻게 되살아났을까? 메리 셀리의 방식도, 루이지 갈바니의 방식도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쿠퍼의 정신적 능력과 관계가 있단 생각이 들었지. 그 애가 수치스러움으로 떨 때 공기 중의 분자들이 진동하던 걸 난 봤으니까. 그래, 맞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디 백을 열고 나왔어!' 자세한 이야기는 너무 역겨우니 하지 않겠네. 난 내가 가졌던 콜트 M1911 권총과 소방 도끼로 발버둥을 쳤어. 살아 남기 위해. 5층을 빠져나와 4층으로, 4층을 빠져나와 3층으로 갔지. 누군가 불을 질렀는지 3층은 이미 복도까지 불타고 있었어. 거기서 이고르를 만났고 말이야.
- 무사하셨습니까, 알렉산드로 맨시코프 동무?
  난 고개를 끄덕였지. 사실이라 부끄러웠으니까.
- 알렉세이는 못 보셨습니까, 알렉산드로 맨시코프 동우?
  난 고개를 저었어. 사실이 아니라 부끄러웠으니까.

 

*


  이고르와 함께 1층 로비를 거쳐 빠져나올 때쯤 시경 건물은 이미 지옥처럼 타오르고 있었지. 빠져 나온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 겨우 대여섯 정도? 쿠퍼 그 아이는 주차장 한 가운데 앉아있었어. 좌절한 사람처럼 보였지. 몇 시간 전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그 대목에서 내가 가장 가장 궁금했던 건 갤러 형사 놈이었어. 정작 그 순간에 그 놈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그 날 3층에서 벌어졌던 일을 어떤 관점에서 보든 (미친 초능력자의 난동? 아니면 억눌린 약자의 분노?) 결론은 쿠퍼 그 아이와 갤러 형사가 만나야 끝나는 일이 아니겠어? 하지만 그때 정작 갤러 형사는 하필 외부에 있었단 말이야. 조사 위원회에서는 외근중이었다고 둘러댔지만 그 시간에 구체적으로 뭘 하고 있었는지는 누가 알겠어. 여느 때처럼 모든 일을 쿠퍼에게 미뤄두고 자긴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겠지. 어쨌든 그 운 좋은 개자식은 타라클리아 시경의 절반이 날아간 다음에야 연락을 받고 돌아왔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말이야.

  그 개자식은 메르세데스를 타고 나타났지 (그가 나중에 외근 중이었다고 주장했단 걸 잊지 날도록 해). 불쌍한 쿠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곳에 급히 세우고 뛰어 내렸지. 갤러 형사는 불타는 시경 건물을 보면서 외쳤어 "오! 하나님!" 죄인처럼 스스로를 학대하는 쿠퍼를 내려다보고 또 외쳤지. "오! 하나님!" 대충 하나님을 예순 번쯤 찾았을 꺼야.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는데 만약 그 자식이 하나님을 한 번만 더 찾으면 총을 들어 쏴버렸을지도 몰라. 아슬아슬하게 그 자식은 하나님을 찾는 대신 이런 말들을 했지.
- 뭐, 원, 이런 일이……. 당신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나?
- 사회 복무로 실격 아니야? 당국에서 잡아가야 할 것 같은데? 
- 오늘 프로젝트 진행하기로 한 날 아닌가?
- 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제일 싫어.
  혀를 잃은 대신 마음 속에 돌이 하나 생긴 그 아이는 어느 질문에도 대꾸하지 않았어. 그래도 갤러는 말을 멈추지 않았지.
- 난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라…….
  그리고 총을 들어 그 아이를 쐈어. 쓰러졌어. 그 아이가. 털썩하고. 주차장의 아스팔트 바닥에. 염력으로 총알을 저 멀리 날려 보내길 바랐던 내 생각이 틀렸는가봐. 아니면 처음부터 그 아이에게 염력 같은 건 없었는지도 모르지. 갤러 놈이 '하나님'을 한 번만 더 찾길 바라며 다가가던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 몸을 떨었지. 이빨이 금방이라도 빠져나갈 것처럼 아팠지. 손수건을 꺼내 총을 닦은 다음 갤러는 쓰러진 쿠퍼를 '트럭에 치인 동네 개' 보듯 하더니만 내게 다가와 말했어. '과장님, 나중에 증언 좀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난 고개를 끄덕였어. 왜냐고? 그렇게 그 개자식을 싫어하면서? 시경이 홀랑 타버렸는데 한 부서의 담당자로 내가 질 책임이 두려웠던거지. 그것이 내가 그 날 저지른 세번째 부끄러운 일이었어.

  젊은 이고르가 분통을 터뜨렸어. '책임이 있다면 저 놈 책임인데 어째서 저 놈만 무사한거죠?'라고. 또 '어째서 자신이 피해자처럼 행동한 거죠? 저 놈이 쿠퍼에게 해왔던 짓들을 우리 모두 봤잖아요"라고도 했어. 나는 그 애를 타일렀지.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세상은 순리대로 돌아갈 거라고. 결국에 저런 놈은 제 죄 값을 치를 거라고. 하지만 틀렸지. 악랄하고 영악한 갤러 놈은 잘 먹고 잘 살았고 거꾸로 선량하고 충직한 이고르는 2년 후 교통사고로 죽었지. 비겁하고 치졸했던 나만 입을 다문 댓가로 이렇게 이 자리에 남았고. 여기 계신 모든 기자님들이 아시는 것처럼. 조사위원회는 갤러에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어. 미리 결말을 예감한 듯 적어놓았던 쿠퍼의 경위 기술서도 소용이 없었지. 그 날 있었던 일은 누전 합선으로 인한 화재로 결론 났고, 쿠퍼를 둘러싼 기이한 현상들이나 바디 백 밖으로 걸어나온 존재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을 하지 않았지. 대신 몇 달 전에 사망한 노숙자들이 무시무시한 갱단원으로 둔갑을 했고 쿠퍼를 포함한 총상으로 사망한 직원들은 그들과 싸우다 순직한 것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졌지. 한편 갤러는 무사히 악세사리 학위를 받아, 형제들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배운 경찰'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어. 어디까지가 불쌍한 쿠퍼 세보타리를 희생시켜 만든 결과인지,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갈아넣어 만든 결과인지, 아무도 모르지. 구 소련 붕괴전의 시대 아닌가. 그땐 투명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저주받은 증인'으로 나는 그 이후에도 갤러가 잘 먹고 잘 사는 걸 지켜봤지. 가족 사진과 현장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는 병적인 감수성도 여전했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목소리를 높여 찬송하는 역겨운 신앙심에도 변함이 없었지. 남들 앞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점잖을 떨며 제 가벼운 실체를 숨겼던 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말이야. 이후로도 갤러는 '올해의 친절한 직원상'을 세 번 더 수상했지. 소련이 붕괴하고, 몰도바가 독립을 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차이는 없었어. 나쁜 놈들은 잘 살아 남아. 그것도 아주 잘. 

 

*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네. 너무 오랫동안 앓아왔던 진실이야.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해. 어쩌면 이 진실이 자라서 병이 되어 내 몸을 갉아 먹은 것은 아닐까. 얼마나 남았을까? 내가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 한 시간? 어쩌면 일분? 우리 부모님은 이런 말씀을 하며 나를 키우셨지. "용기가 없었다는 걸 미안해하지 말아라." 하지만 그 말은 틀렸던 것 같아. 나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쿠퍼 세보타리에게, 또 내가 지켜주지 못한 세 병아리들에게……. 자, 됐어. 내가 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을지는 자기들 자유야. 이제 기자님들은 가서 해야할 일들을 하시라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 본 것도 오랜만이라 적응이 안되니 말이야. 참, 그리고…… 아까 스미느로프가 남은 게 좀 있다면 저기 물병에 좀 채워주게. 지은 죄가 많아 지옥에서 심판 받게 되면 목이 좀 탈 것 같으니…… 그 전에 넉넉히 마셔두어야겠어.

(2015년 07월)

# Inspired by Mary Shelly and Stephen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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