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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빨대 탄생

낙농콩단/Season 16-20 (2016-202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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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누군가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 커트 보네거트 -


  이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타란티노나 린치를 흉내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첫 장면이 바로 이 영화같은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자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미스테리도 없다. 반전도 없다. 궁금한 일도 없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어난 일은 일산화탄소 중독이다. 거 왜 다들 영화에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좌절한 남자들이 차고 문을 내리고 밀폐된 자동차에 앉아 배기가스 흡입으로 비극을 끝내려는 방식을. 충분히 고민한 결과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홧김이었을 수도 있다. 후회가 남을까? (물론 당연히 남겠지!) 그렇지만 이 대목에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안 저질렀어도 똑같이 후회는 남았으리라는 것.

 

*

 

  에보니를 처음 만난 건 ‘비너스 클럽’에서였다. 흔하고 흔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괴담처럼 청운의 꿈을 품고 그레이하운드에 오른 시골 소녀가 도시의 호된 맛을 보고 가장 밑바닥의 무대로 굴러 떨어진 이야기. 25년 업력의 작곡가로 나는 그런 케이스들을 열 트럭도 넘게 보아왔다. 아니, 열 트럭이 뭐냐. 아마 백 트럭은 될 것이다. (그리고 한 트럭에는 적어도 만 명씩 타고 있다.) 이 일을 하다보면 많은 스타 지망생들이 내게 조언을 부탁한다. 그러면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절대, 절대, 절대, 아무 대책 없이 LA행이나 뉴욕행 그레이하운드는 타지 마라.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은 페기 소이어의 시대가 아니다. 굳이 무작정 상경할 이유가 없다. 성공할 재능이라면 시골 구석에 있어도 성공한다. 성공할 사람도 섣불리 대도시로 건너와 무심하고 잔혹한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가면 그만큼 꿈으로부터는 더 멀어지는 역설이 빚어진다. 성공과 실패의 경계에 있는 어중간한 (사실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 케이스들의 경우 백이면 백, 어김없이 시급 10 달러도 못 받는 웨이트리스에서 끝난다. 운 좋게 클럽 주인의 눈에 들어 작은 무대에서라도 노래를 하다가 유명한 프로듀서나 음반사 관계자나 혹은 극작가의 눈에 띄이는 일이 있을까? 아마 확률로 따지면 ‘메가 밀리언즈’에 당첨될 가능성과 비슷할 것이다. 여기서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운까지 나빴다라고 하면 다음 역은 질 나쁜 술집 혹은 저급한 클럽이다. (옛날에는 뷔를레스크라는 재능과 존엄성의 꽤 그럴듯한 절충안도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요즘엔 남은 선택지가 많지 않다.) 그리고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통장 잔고와 심리적 방어선이 함께 무너지면 결국 종착역은 스트립 클럽이다. (그 다음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커브사이드 픽업 서비스라고만 해두자.) 아무튼 핵심은 이거다. 이 몰락의 급행 열차에는 중간에 내릴 곳이 없고 반대 방향으로 갈아탈 수도 없다. 그러니 애시당초 어설프게 올라타지 않기를 권하는 것이다.


  뭐, 에보니도 그런 케이스였다. 캔자스주 브라이트번 출신의 시골 소녀가 스타가 한 번 되어보겠다는 달콤하고 당돌한 꿈을 안고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로스엔젤레스로 넘어온 전형적인 이야기. 안 봐도 비디오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 애는 4년을 그 바닥에서 떠돌다가 겨우 스물세살에 ‘비너스 클럽’까지 내려갔다. (뭐, 그 내려가는 속도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할 문제는 아니다. 누구말마따나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지 않는가.) 중요한 건 그 날 ‘비너스 클럽’에 그 애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날 그 자리에 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처럼 사회적으로 성공한 점잖은 인물도 가끔은 뒷골목 술집이나 싸구려 스트립 클럽의 군중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비슷한 부류의 으스대는 인텔리 속물들과 어울리고 싶고 싶지 않을 때. 남의 눈을 피해 방탕하지만 점잖은 자유를 누리고 싶을 때. 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나는 충동적으로 아무 곳에나 골라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혼 후에 그런 경향이 조금 심해진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는 비번에 버번을 즐기는 트럭 운전사나 아마도 아가씨 없을 건달들, 혹은 머리에 피도 마르다 말았을 대학생들 사이에 섞여서 어둠 속에서 싸구려 칵테일을 홀짝이면서 우아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가 없는 무대 위의 쇼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뭘 기대를 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뭘 기대하겠는가? 만인의 연인 새틴이 공중에서 그네를 타고 내려와 무명 시인의 여리고 섬세한 마음을 훔치기라도 할까?) 폴대를 위로 아래로 오르내리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공연을 선보이는 댄서들 몇몇이 지나가고 검소한 의상을 더 검소하게 만드는 과정을 끔찍할 정도로 느리게 보여주는 댄서들 몇몇이 지나간 다음, 거의 새벽 세시가 넘어갈 무렵이었나 에보니가 ‘덜컥’ 나왔다. (순서로 볼때 ‘비너스 클럽’에서 그녀의 위계 순위는 거의 맨 밑바닥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갑자기 흥미가 돋았던 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뮤지컬 ‘시카고’의 넘버 중 하나인 ‘록시’에 맞춰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쇼를 시작했기 때문인데 (존 칸더와 프레드 앱이 봤다면 상당히 불쾌했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들이 평생 만들어 온 작품들이 건강한 자영업자들의 건전한 사업장을 배경으로 하는 건 또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조금은 주의깊게 바라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 애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감지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버지는 흑인이고 어머니는 베트남인이라고 했다. (뭐? 그런데 캔자스주에 살았다고?)  참고로 공연은 정말 형편없었고 심지어 그 애는 어느 끈을 당겨야 속옷이 내려가는지조차 모르는 듯 서툴게만 보였다. 그러면서도 장례식장에서나 (물론 조문객이 아니라 그 날의 주인공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과도한 화장은 끔찍했고, 거칠고 과장되게 뱀처럼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쇼의 핵심이라 생각하는 심각한 몰이해는 도무지 눈 뜨고 봐주기가 힘들었다. 전반적으로 번잡하되 보고 있자니 심히 안쓰러운 비효율적인 공연이었다. 그렇다. 이 끔찍한 이야기는 이 잘못된 만남으로 시작된 것이다. 나는 잘못된 때에 잘못된 곳에 있었고 잘못된 게임에 잘못된 칩을 걸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뭔가를 발견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재능을 나는 볼 수 있었다고 증명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술기운에 판단력이 흐려졌을 수도 있다. 뭔가 되었든 나는 그 날 내 운을 시험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미에 세 번 노미네이트되고 한 번 수상한 작곡가 겸 작사가로 나는 내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모험씩이나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쓴 곡이 빌보드 싱글차트 10위 안에 통산 여섯 번 들어갔고 그 중의 두 곡은 3위까지 올라갔다. 첫 번째로 제작한 뮤지컬도 토니 2개 부문을 비롯하여 드라마 데스크 어워즈, 아우터 크리틱 서클 어워즈, 드라마 리그 어워즈, LA 위클리 씨어터 어워즈 등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뭐하지만) 꽤 훌륭한 축에 속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내가 받았던 최고의 찬사 중에는 ‘우리 시대에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있다면’으로 시작하는 것도 있는데 너무 쑥스러우니 그 이후 문장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원석들이 나의 오피스와 나의 다음 뮤지컬 '쎄 마그니퓌끄 - 어 콜 포터 어드벤쳐 (C'est Magnifique - A Cole Porter Adventure)’ 프로덕션에 알아서 가지런히 줄을 선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미 성공한 가수나 배우들로부터도 전화를 하루에 백하고도 서른 통쯤 받는다. (물론 내가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비서 미세스 잭슨 여사가 받아 전해주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굳이 싸구려 스트립 걸 여자애를 골라서 말을 섞어볼 이유가 없었다. 그 정도 잠재력을 가진 애들은 널리고 널렸다. 집에 일천리터 들이 양문형 냉장고 두 개 가득 음식을 쌓아놓은 사람이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져 그나마 먹을만한 걸 찾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 날 이후 나는 이 질문을 수없이 내게 되풀이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영혼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비참한 기분과 싸워야 했다.) 내가 무슨 예수 염병할 그리스도도 아니고 밑바닥 인생을 구원해서 위로 끌어올려 주려고 했던 것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양쪽 폐에 배기 가스를 트렌타 10잔 (혹은 벤티 12잔) 용량만큼 가득 밀어 넣고 비참하게 운전석 위에 나자빠진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도대체 뭐에 홀려서 그런 짓을 하고야 말았던 것인지 말이다.


  ‘비너스 클럽’의 뒷문으로 통하는 골목은 거의 시간 여행용 웜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의 시대 이후 변한 것이 없다. 누렇게 색이 바랜 스프레이 낙서. 낡고 녹슨 철제 쓰레기통.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을 운명인 더러운 고양이들. 똑같이 그 길에서 태어나 더러운 고양이에게 물려죽을 운명인 더러운 쥐들. 거지, 마약상, 그리고 거지 겸 마약상. 온갖 싸구려 클럽, 온갖 싸구려 선술집, 온갖 싸구려 식당의 뒷문이 연결되는 혈관 같은 곳이다. 모두가 그 곳에 모여 너구리를 잡기 때문에 그곳을 통과하려면 공포영화 속 특수효과만큼 진하고 끈적끈적한 안개를 헤치고 나가야 한다. 공연 이후 에보니가 거기에 있을 거라는 사실은 감으로 알았다. (그 클럽의 먹이사슬과 위계 체계를 감안할 때 그 애에게 무슨 대기실이나 개인 공간 따위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다른 쇼걸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말을 걸었을 때 그 애의 첫 반응은 꺼지라는 것이었고 당연히 ‘그냥 가세요’ 정도가 아니라 F로 시작되는 험한 말이었다. (맞다. 그 말을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 조용히 꺼졌어야 했다.) 아마 어처구니 없게도 자기를 돈으로 사려는 부류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고급 레스토랑의 20 온즈급 서로인 스테이크라면 그애는 스트리트 타코, 아니 (어머니쪽 혈통의 뿌리를 감안하면) 스트리트 분짜/짜조였으니 (이게 인종차별적 발언일까? -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 쓸떼없는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런 오해를 할 법도 했다. 누가 봐도 그 애는 상태가 좋아보이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상경한 시골 소녀가 그레이하운드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서서히 부패가 시작된다고 친다면 이미 4년이 지나서 이십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그 애는 거의 좀비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다. 이미 슈퍼 좀비였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썩은 멀티-컬쳐럴(multi-cultural), 바이-레이셜(bi-racial) 좀비. 저 안에서 네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는 말을 건네자 그 애는 담배 연기를 내 얼굴 위로 훅 뿜고 다시 한번 꺼지라고 말했다. 역시 좋은 말은 아니었다.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세상에는 때묻지 않은 원석도 충분히 있는데 왜 굳이 심하게 때묻은 원석을 골라서 뭔가 해보려고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많은 설명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선택과 지나간 행동에 굳이 이론을 세워 설명하려는 것도 나처럼 너무 배운 사람들의 고질병이다.) 어쩌면 높은 난이도의 작업일수록 그만큼 높은 성취도가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때묻지 않은 원석을 캐내어 성공적으로 세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난 당연하지 않은 일을 해보기를 원했다. 완전 가치없고 도저히 쓸 수 없다고 판정난 돌쪼가리를 주워다가 살려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 애가 나와 함께 하는 아이들과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기 때문에 팀 구성에 다변화를 꾀하려는 측면에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령 나의 전 와이프는 소문난 야구광이었는데 만약 여러분도 야구광이라면 아마 이런 설명이 쉽게 와닿을 것이다. 제구력이 정교한 투수들로 선발 로테이션을 채우고 있는 팀은 간혹 강속구 유망주에 대한 이상한 로망을 품는다. 설령 그 유망주가 심판의 머리쪽으로 시속 100마일짜리 공을 갈길 정도로 컨트롤이 개판 오분 전이더라도 말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는가? 

 

  여러분이 나처럼 음악광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콜 포터를 존경한다면 이런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거두어 가르치는 아이들의 찬란한 라인업에 곱게 드레스를 입고 ‘So in Love’를 부를 수 있는 아이들은 꽤 있다. (솔직히 사실 전부다.) 나에게 없는 건 정규 방송의 주파수 밖에 있는 아이들 - 그러니까 ‘My Heart Belong to Daddy’를, 혹은 ‘Too Darn Hot’을 소화할 수 있는 아이다. 그건 뭐랄까… 살짝 끼가 있어야 (그것이 좋은 끼인지 나쁜 끼인지는 일단 논외로 해두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우리 아이들에게 ‘Love for Sale’을 부르게하면 마치 새서미 스트리트 주제가처럼 들린다. 나는 그 곡이 1930년 발표 당시부터 논란을 불러온 원래의 그 선정적인 암시를 (가사를 기억하시는가? 참고로 ’Love for sale/ appetizing young love for sale’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정도 살려낼 수 있는 기괴한 재능이 있는 아이가 하나쯤은 필요했다. 공연에는 여러가지 타입의 캐릭터와 그에 맞는 배우들이 필요한 법. 설령 내가 선호하는 유형이 아니라도 가끔은 필요한 상황이 있고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두고 순전히 다 내 책임이라고 인정할 생각은 없다. 탄탄대로를 달리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장본인은 나인데 그 책임까지 철저하게 독박을 쓰라면 조금 억울한 일 아니겠는가. 괜한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앞서 말한 그대로 그 애 에보니가 문제가 조금 많았다.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슈퍼-좀비였다니까!)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근본부터 좀 문제가 있었다. 캔자스주 브라이트번. 거 왜 사람들이 항상 이야기하지 않는가. 브라이트번 출신은 믿으면 안된다고. 절대 믿으면 안된다고. 백이면 백, 결국 뒷통수를 친다고. 그런 기질이 있다고. 참 웃기는 것이 나는 항상 그런 이야기를 듣고 웃어 넘겼다. 나같은 엘리트 리버럴들 (혹은 스스로를 그 범주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공정함, 그러니까 PC라는 이름의 치명적 아킬레스건이 있다. 인종, 여성, 성소수자, 지역색 등의 범주화 문제에서 우리는 항상 정교한 균형을 잡기를 원하고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평범한 편견쟁이 사람들과 선을 긋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과잉 역반응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데 세상 이치란 참 묘해서 그러면 또 꼭 이 허점을 파고드는 의외의 상대들이 나타난다. 마이너리티와의 균형을 잡으려는 메이저리티 소속의 사람에게 접근해 자신의 마이너리티를 레버리지로 삼아 필요한 것을 빼내려는 작은 괴물들. 딱 에보니가 그랬다. 그 애는 캔자스주 브라이트번 출신의 바이-레이셜/하프-아시안 성소수자 고아 소녀라는 어마어마한 레버리지를 휘둘렀다. 2019년 기준으로 이쯤되면 완전 스트레이트 플러시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 발언을 함부로 했다가는 트위터가 불바다되는 일이 허다하다지만 나는 빌어먹을 트위터나 염병할 페이스북 계정이 없거니와, 또 이제 더는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니 더이상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 애의 영악함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다. 혹은 할 말이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당한 놈이 병신’이라는 진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돌이켜보면 처음에 버릇을 고쳐놓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순수한 아이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쇼 비즈니스 업계에 물들어 완전히 맛탱이가 가버렸다는 뭐 그런 이 바닥의 흔하고 흔한 이야기와는 또 결이 다르다. 에보니는 처음부터 완벽한 구제불능의 기질을 보였다. 그 애는 자신의 레버리지를 적극적으로 휘둘러 다른 사람을 이용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브라이트번 출신에 대해 말하는 그대로) 단물이 더 나오지 않을 듯하면 뒷통수를 치고 떠나는 유형의 잡것이었다. 그 애의 경우 내게 빼갈 수 있는 단물은 역시 나의 재능과 경험과 경력과 인맥이었을 것이다. 그걸 바탕으로 수렁에서 벗어나 4년전 설레는 마음으로 로스엔젤레스에 가져온 달콤하고 당돌한 꿈을 되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내 명함을 받아 들고 별 관심 없는 척을 했던 그 애는 불과 3일만에 내 오피스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콧대를 한껏 높이고 시건방을 떨더니만 배역을 얻을 수 있겠다 싶으니 이내 영리한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 태도가 누그러졌다. 내가 노래 연습과 안무 연습이 좀 필요할 것 같다고 했을 때는 사이클롭스처럼 눈에서 레이져가 나왔지만 (그러니까 쥐뿔도 없는 주제에 쥐뿔도 없단 남들의 지적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류다) 의외로 또 구체적으로 디렉션을 주니 열심히 따라 해보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내가 그 애에게 주려고 생각한 역할은 ‘My Heart Belong to Daddy’ 장면에 등장하는 ‘주점 코러스 걸 13’이었다. 나중에 발견한 사실이지만 내 입장에서도 그 애를 활용함으로써 얻을 이점이 있기는 했다. 공연의 스폰서들이 우려하는 ‘화이트 워싱’ 타령을 피해가는데 그 애의 인종적인 배경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20세기 초중반 인디애나 출신의 백인 부잣집 도련님이 무려 예일대를 졸업하고 백인 중심 사회에서 유명 작곡가로 성공했다는 이야기에 지나치게 백인 배우들만 출연한다는 지적질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 요즘에는 ‘키스 미 케이트(Kiss Me Kate)’를 리바이벌하면서 ‘Too Darn Hot’ 씬을 흑인 배우들로만 구성하면 인종차별이란 소리를 들을 거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이거 포기와 베스도 쌍으로 배를 잡고 웃고 갈 일 아닌가?) 뭐든지 괜찮던 시대는 아득히 오래 전의 일일 뿐이다. 이제는 ‘뭐든지 안 괜찮아’다. 정말이다.


  아무튼 코러스 걸 13. 보시다시피 이름도 없고 인종적 다양성을 안배한 총 열세명의 코러스 걸 세트 중의 한 명일 뿐이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도 아니다. 단 한 장면이고 무대에 등장하는 시간을 모두 합치면 6분 4초다. 6분 하고도 4초. 잘못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부분들 때문에 나는 그 애를 내가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참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멀리는 파라켈수스부터 가까이는 마리 퀴리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는 상대를 다루면서 결국 호된 댓가를 치루지 않았는가. 


   그런 유형의 인간들이 보통 그렇듯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손에 넣기까지 에보니는 우리 오피스에 녹아들려는 것처럼 보이려는 적극적인 연기를 했다. 사람들이 브라이트번 출신에 대해 말하는 몇 가지 성향들이 드러난다는 평가는 있었다. 이를테면 자기가 필요할 때는 사근사근하게 다가왔다가 용무가 끝나면 칼 같이 돌아서 선을 긋더란 이야기가 나왔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어느 대도시 출신에 부잣집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를 다닌 것처럼 신분 세탁에 라벨 갈이를 열심히 하고 다니는 것으로도 여기 저기서 말이 나왔다. 멍청하게도 나는 그런 소문을 우리 오피스에 바글바글한 귀티 흐르는 좋은 집안 백인 소녀들에게 열등감을 느낀 결과일 거라고 안이하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 일일이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전술한대로 나는 전설적인 콜 포터의 전설적인 음악들로 재구성한 주크박스 뮤지컬 ‘쎄 마그니퓌끄 - 어 콜 포터 어드벤쳐’를 제작 중이었고 한편으로는 장차 제 2의 캐서린 젠킨스를 꿈꾸는 여러 크로스오버 싱어 지망생 몇 명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그 애는 ‘주점 코러스 걸 13’으로 어느 정도의 나의 관심을 끌고자 생존 본능을 발휘했다. 아무튼 한동안은 내 말도 꽤 잘 들었고 비서인 미세스 잭슨 여사의 말도 잘 들었다. 나는 나의 설계대로 이 아이를 내 공연의 BBQ 소스 겸 타마린드로 활용하고자 A부터 Z까지,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또 메이저에서 마이너까지 공들여서 가르쳤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에보니는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자신의 방어진을 구축하는 일종의 스펠을 걸었던 것 같다. 다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 애는 자신의 출신 지역 (캔자스주 브라이트번), 인종 (바이-레이셜/하프-아시안), 성별 (여성), 성적 지향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본인이 성소수자라고 주장했을 뿐 딱히 근거는 없었지만), 딱한 경험 (고아로 떠돌다 비너스 클럽으로 불운하게 흘러 들어갔다는 곱씹어 보면 참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 등을 골고루 활용하여 불쌍하면서도 존중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캐릭터를 구축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오피스의 곱게 자란 온실 속의 화초들은 이 고단수 슈퍼 하프-아시안 좀비를 (아마 비너스 클럽의 독종 댄서들과 기싸움에서도 살아 남았을) 상대할만한 아이들이 되지 못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 깜빡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상한 일은 ‘My Heart Belong to Daddy’ 장면의 잡음이 끊이지 않으면서 시작되었다. 코러스 걸 12가 그만두고 코러스 걸 11이 다리가 부러졌으며 코러스 걸 10은 실종되었다. 배역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사이에 에보니는 스물스물 기어 올라와 코러스 걸 10이 되었지만 그 번호 자체는 관공서의 대기 번호표처럼 단순 순서에 불과하여 크게 의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엑소더스는 그쯤해서 그치지 않았다. 코러스 걸의 대오 이탈이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했다. 아가사 크리스티도 이마를 치고 혀를 내두를 일이었다. 새로 사람을 뽑아 충원해도 불과 이삼일이면 학을 떼고 나가버렸다. 후일 입수한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연습실에서 고성과 눈물이 마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이유를 물어보면 다들 고개를 숙이거나 말을 얼버무렸다는 사실이다. 아아! 그때까지도 나의 아둔한 머리는 진실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한 영역에 있노라고 생각했고 나의 왕국 안에서 내가 지닌 힘을 과신했던 것 같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야구광이었던 전 와이프 식의 비유를 가져오자면 이렇다: 전술한대로 나는 기교파 투수들과 강속구 투수들을 모두 로스터에 등록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들이 같은 라커룸을 써야한다는 부분에서 발생하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는가? 결과적으로 그 장면의 코러스 걸은 다섯 명이 되었고 세 명이 되었고 끝내 한 명만 남았다.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겠다.) 이 역대급 왈패는 모든 걸 자기 중심의 경쟁 문제로 생각하며 자기에게 할당된 포지션 이상의 것을 원했다. 뭐든지 가장 앞자리를 원했고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자기가 받아야 했다. (아니, 고작 6분 4초 등장하는 '주점 코러스 걸’ 열 세명 중에 제일 앞 번호를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코러스 걸 1번이 무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나 베르나데트 피터스급 대접을 받는 줄 알았던 걸까?) 그 애가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씩 앙상블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정 자체가 남이 하는 일에는 샘을 내는 스타일이고 모든 일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밥상을 엎는 못된 심보가 있다고 했다. (아니, 도대체 지가 뭔데?) 어느 날부턴가 모든 아이들이 질색팔색을 하였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애가 그 장면의 메인인 돌리 윈슬로우 역을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요구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기가 돌리 윈슬로우를 맡고 뒤에 열세명의 코러스 걸을 따로 뽑아 자기를 백업하게 하라는 것이다. 모든 배우들이 언더스터디를 준비하기 마련이지만 아무 일도 없는 멀쩡한 주연 배우 자리를 아무 경력 없는 코러스 걸 13께서 친히 거두어가겠다는 소리는 농담치고는 고약했다. 당연히 나는 이 황당한 요구를 당연히 나는 무시했다. 특히 돌리 윈슬로우 역할을 맡은 케이틀린 제임스 양은 오랜 시간 공들여 가르친 나의 제자 중 하나였다. 나는 에보니에게 본인의 역할을 상기시켜주었다. 코러스 걸 중의 하나로 주인공 돌리 윈슬로우를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속마음을 번역하면 그 장면이 너무 화이트 워싱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본인이 해야할 임무라고.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자존심이란 본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피와 살과 영혼과 자존심은 공평하게 있는 법 아니겠는가. 나의 진심어린 충고를 이 슈퍼-듀퍼, 바이-레이셜, 하프-아시안 테러리스트가 알아 먹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진 일은 확실히 나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바로 그 날 저녁 케이틀린이 졸피뎀을 60알 먹고 응급실로 실려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 응급 처치와 위 세척이 빠르게 이루어져 아무 일도 없었지만 몇 주 후 케이틀린은 회복을 위해 공연에서 빠지고 당분간 학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내게 전해왔다. 진실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참담한 인과관계가 있었다. 후일 밝혀진 진실은 에보니가 예의 그 사이클롭스 눈깔을 하고 주머니칼을 휘둘러가며 협박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돌리 윈슬로우 배역을 내어 놓으라고!) 그렇다. 이것은 진실로 새로운 상황이었다. 이 골 때리는 미꾸라지는 나 역시 한 번도 다루어보지 못한 종류의 미꾸라지였다. 이제까지 내가 겪은 가장 큰 문제는 정말 예쁜 목소리를 가졌으나 치즈케이크 팩토리를 너무 사랑하기에 매번 드레스 사이즈를 바꿔야 하는 롱 비치 출신의 십대 소녀 정도였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둠 속의 문제가 드러나고 난 다음에 나는 에보니를 내 사무실로 불렀다. 그 애는 맹세코 결단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항변을 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쏟으며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내게는 증거가 있었다. 같이 일하는 사운드 엔지니어 중에 닥터 “닥” 페퍼라는 친구가 있는데 (자기가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아트 페퍼의 숨겨진 자식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별명이 ‘산타모니카의 닥터 하이젠버그’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이 별명은 이 남자가 지하실에 실험실을 차려놓고 뭔가 위험하고 중독성 있는 것을 생산, 유통, 판매하는 부업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런 일에는 위험이 따르고 보안의 문제에 극도로 신경을 쓸 수 밖에 없기 마련이고,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이 동선 곳곳에 스파이 캠을 심어 놓았는데 그 동선 중에는 우리 오피스의 일부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내 영역 내에서 감히 스파이 캠을 숨겨 두었다는 사실에 순간 화가 났지만 당장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 스파이캠에 찍힌 영상에 따르면 에보니는 다른 아이들이 내가 정해준 노래를 녹음하는 문제를 두고 정말로 주머니칼을 휘둘러가며 협박했다. 또렷하게 녹음된 음성에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온갖 찬란한 욕지거리의 퍼레이드는 물론 “니들 몸에서 부검을 하기 전엔 발견할 수 없는 곳을 담뱃불로 지져버릴테다”라는 충격적인 내용마저 있었다. 이렇듯 증거가 확실한데도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그 애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강한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다 눈물 콧물 짜며 억울하다고 우기는 것을 보며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서늘한 기분이 경추부터 요추까지 파도타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거짓말이 습관인 애들이 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절대 못 고친다. 어려서부터 완전히 뇌 구조가 잘못 잡혀있는 애들이다. 이런 애들은 순전히 부모 책임이고 가정 교육이 잘못된 것이다.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걸 고쳐주려고 하거나 옳고 그름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려고 노력하거나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런 유형의 애들은 그렇게 자기를 좋은 마음으로 대하려는 사람들까지 철저히 이용해먹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나쁜 건지도 모른다는 게 핵심이다.) 그냥 무시하고 거리를 두는 게 답이다. 그제서야 나는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물론 나의 비서 잭슨 부인은 연장자다운 경험과 푸근한 지혜로 나보다 먼저 진실을 깨우쳤다. 어느날 그녀는 퇴근하는 나를 붙잡고 뜬금없는 선문답을 던졌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고전 명곡의 가사를 인용하여 말이다.) 
- 조지아주는 복숭아로 유명하고, 메인주는 랍스터로 유명하고, 로드아일랜드주는 당신으로 유명하죠. 
- 부인,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다들 알다시피 캔자스주는 곡물로 유명하지만… 그중에서도 캔자스주 브라이트번은 뭐로 유명한지 알아요? 
  그제야 나는 무슨 말인지 감을 잡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뒷통수.

 

  그즈음부터 나는 이 악독한 반쯤 검은 악마를 (물론 살아있는 신세에 이런 표현을 썼다간 아마 PC 나치들에 의해서 트위터가 하얗게 불타올랐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 애를 우리 오피스에서 내보내야 한단 점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했다. ‘쎄 마그니퓌끄 - 어 콜 포터 어드벤쳐’ 출연에서 제외시켜야 한단 사실도 자명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남몰래 사립 탐정을 고용하여 그 애의 고향으로 보낸 것이다. 사람을 쓰기에 앞서서 사전 정보 수집이 부족했다는 자책도 있었고 (그런데 사실 코러스 걸 13까지 일일이 뒷조사를 하고 뽑을 수야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도대체 어떤 부모들 사이에서 이런 괴물이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일단 문제의 에보니 브라운 양의 출생증명이 확실하지 않았다. 아홉살이 되기 전까지 어떤 공식적인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워낙 시골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충격적인 것은 에보니의 양쪽 부모가 모두 집안에서 사고로 사망한 상태인데 사인이 모두 미상이라는 것이다. (보고서에 있다는 ‘마치 레이져에 잘린 듯한 상처’라는 표현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시기는 약 5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얼추 에보니가 로스엔젤레스행 그레이 하운드를 타기 거의 직전이지 않을까 싶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캔자스주 브라이트번. 한 번 수 틀리면 자길 키워준 부모까지 뒤퉁수를 치는 사람들의 고향. 어쩌다 그 평화로운 농촌 지역의 한 가운데 그런 마을이 생겼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교양있는 배운 사람이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그런 PC하지 않은 발언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 아닌가.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때부터 내 귓가에 대고 누군가 계속 은밀한 속삭임을 불어 넣는 기분이 들었다. (어이, 뒷통수를 조심해!) 


  먼저 처리할 일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그 애의 어두운 과거와는 별개로 내 일을 방해하지는 못하도록 해야했다. 다른 아이들을 위협한 일에 대한 단죄 역시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나는 전속 변호사에게 문의하고 난 다음에 에보니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그 애는 처음엔 찾아와서 울고 불고 사정을 했다. 다음엔 찾아와서 웃음도 눈물도 싹 지우고 협상을 했다. 세번째에 찾아와선 눈을 부라리며 협박을 했다. 무단 계약 해지라나 뭐라나. 속된 말로 완전 골 때리는 일이었다. 그러더니만 어디서 하이에나식 교통사고 전문인지 낙상사고 전문인지 삼류 변호사를 하나 물어와서 시비를 걸길 시작했다. (저 마음대로) 에이전트를 구하고 (저 마음대로) 다른 회사와 계약을 하더니 급기야 (저 마음대로) 가수로 데뷔를 한다며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겨우 그 따위 노래 실력으로 말이다. 


  거기까지야 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나의 아이디어를 거의 그대로 빼내가서 자기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한 것이다. 콜 포터의 명곡으로 구성된 재즈 보컬 앨범. 이렇게 스테이지와 스크린의 명곡들을 리메이크하는 이런 경우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까다로운 문제가 생긴다. 편곡한 본인인 나는 명백한 유사성을 볼 수 있었지만 (특히 내가 그 애에게 집중적으로 연습을 시켰던 ‘My Heart Belong to Daddy’를 비롯하여) 제 3자인 남들에게는 둘러치나 메치나 그냥 흔한 커버 버전 중 하나처럼 들릴 수 있다. 나는 확신했다. 그 망할 것이 사무실 컴퓨터와 내 맥북 프로 혹은 두 가지를 연결한 드롭박스에 몰래 손을 대었음이 분명했다. 다만 증거가 없었다. 닥터 페퍼의 스파이캠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개인 사무실까지 커버하지는 못했다. 억울해서 분통이 터졌지만 사면초가였다. 누가 개망나니 아니랄까봐 변호사도 꼭 저 같은 개망나니를 구했고, 에이전트들이란 열에 아홉은 싹이 나기도 전부터 열매를 따려는 개망나니들이고, 새로 계약한 회사도 정상적인 업계의 일원이라고 할 수 없는 개망나니 같은 곳이었다. 이런 경우에 나처럼 점잖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나는 잃을 것이 많지만 저쪽을 잃을 것이 없다. 나도 개싸움에 능하지 않고 내 변호사도 개싸움에 능하지 않은 반면에 그 망할 미스 블랙 사이공은 매우 개싸움에 능하고 저쪽 변호사는 그냥 개나 다름이 없었다. 막연히 사실 관계에 있어서는 당연히 우리가 이길 것처럼 보이지만 아시다시피 법을 두고 벌어지는 일들이 늘 그렇지만은 않다.        


  그 애의 협박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자주 그러하듯이) 나의 우상 콜 포터라면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니 막말로 빈티지 헐리우드 시대에 어느 되바라진 계집애가 위대한 콜 포터가 작편곡한 곡을 훔쳐가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 시절이었다면 아마 붙잡아 묶어놓고 엉덩이에 호되게 매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예일대를 나오신 신사 작곡가께서 그러셨을 거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분은 ‘키스 미 케이트’와 같은 작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엉덩이를 때리는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으리라 감히 백퍼센트 확신할 수 있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감히 그럴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 변호사가 가까스로 그쪽 앨범의 발매를 막았다. 그러자 에보니와 그의 변호사는 그것을 홍보에 이용했다. 그래미 위너이자 토미 노미니인 거물 프로듀서 겸 제작자가 한 마이너리티 신인 가수의 앞 길을 막고 있다고. 특히 자신의 스트레이트 플러시 패를 거듭 강조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언론의 초점이 맞춰진 찰나의 순간에 2차 공격을 시도했다. 어처구니 없게도 ‘핫 위클리’이라는 이름의 3류 타블로이드 잡지에 미투를 선언한 것이다. 그 애가 구체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그 애를 가수로 만들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으로 내 방으로 끌어들였고 그 애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어떤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맙소사! 또 입 아프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만 나는 이 바닥에서 꽤 인기가 좋은 사람이다. 내가 만약 이성애자로 이 인기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아름답고 지적이고 훌륭한 여성들과 교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마다 파트너를 바꾸어가며 일년 365일 내내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팀을 위해 뛰고 있었단 말이다. 나의 우상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업계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이 폭로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내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는 했다. (이런 걸 보면 나의 또 다른 우상 밥 포시는 정말 호시절을 살다 갔다. 그때는 있던 일도 없던 일이 되었지만 지금은 없던 일도 일단 미투 운동에 편승하면 있던 일이 된다. 이렇게 전가의 보도처럼 이를 악용하는 저런 인간들 때문에 진실된 피해자들의 목소리마저 오해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검댕은 검댕이고 한 번 묻으면 지우기 어렵다. 일단 한 번 말이 나오면 진실의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진다. 우리 오피스의 몇몇 아이들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부모 손에 이끌려 떠났다. 결국은 진화를 위해 나의 전 와이프가 나섰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와의 인터뷰를 통해 (상대 언론의 수준만 보아도 그 버러지와 레벨이 다르다는 것이 보이는가!) 나와 갈라서기로 한 이유가 나의 AC/DC적 성향을 존중하기 위한 결단이었으며 자신은 전 배우자이자 여전히 좋은 친구인 나의 행복을 바라고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는 나의 우상 콜 포터의 아내 린다 포터도 백기를 들만큼 숭고하고 희생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전직 코러스 걸 13을 방으로 부르고 그 앞에서 바지 지퍼를 내렸다는 최근의 폭로에 대해서는 짧은 실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일단 불길은 사그라들었지만 이 일련의 사건들은 내게 큰 자괴감이 들게 만들었다. 
- 어린 애가 보통은 아니네.
  전화를 받기 무섭게 나의 지혜로운 전 와이프가 던진 말이었다.
- 그러게 말이야.
- 내 생각엔 아무래도 당신에게 빨대를 꽂은 것 같은데?
- 뭐라고?
- 빨대 말이야. 빨대.
  입맛이 썼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으므로 반박할 재간이 없었다. ‘스타 탄생(A Star is Born)’이 아니라 ‘빨대 탄생(A Straw is Born)’이었다.
- 도대체 어디서 그런 애를 찾았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대답했다가는 아마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사실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쯤해서 일이 일단락될 줄로만 알았다. 괘씸한 마음에 치가 떨리기는 했지만 그냥 뭐 밟았다고 생각하고 잊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었다. 뜻밖에 먼저 그만두지 않은 쪽은 에보니 쪽이었다. 정말? 아… 정말이다. 며칠 후 공격은 나의 충실하고 지혜로운 비서 잭슨 여사를 향해 들어왔다. 퇴근길에 그녀의 차를 향해 표지판이 떨어진 것이다. 이 염병할 산타모니카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는 아닌 것은 아닌데 적어도 백주대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만큼 완전 개판이지는 않다. 경찰은 표지판의 절단부가 레이져로 잘린 듯 하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여 수사를 진행했지만 그런 말을 일반에 공개할 수는 없었다. 나도 경찰 내부에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들은 것인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아나킨 쌍놈의 스카이워커라도 다녀간 것이 아니라면 필경 그 망할 멀티-컬쳐럴, 바이-레이셜 슈퍼-듀퍼 악마랑 무관한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 에보니가 잭슨 여사의 안부를 묻는다며 (UCLA 산타모니카 메디컬센터가 아닌) 내 사무실을 찾아오면서 의심은 거의 확신이 되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병문안을 가려면 환자에게로 가야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애의 태도는 결코 병문안을 온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처음 우리 사무실에 왔을 때 백조들 사이의 검은 오리처럼 보이던 그 애를 위해 잭슨 여사가 얼마나 잘해주었는지를 돌이켜보면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뒷통수를 조심해!) 내 방으로 따라 들어와 책상 앞에 앉더니만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발목에 문신이 보였다. 장미와 해골로 범벅이 되어 있는 문신을 보며 (맙소사! 밤새 에드 하디랑 놀아나기라도 한 거야?) 아마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잡것이 내가 만든 괴물이라면 반드시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야겠다고. 빅터 염병할 프랑켄슈타인의 심정으로.


  사람들은 말한다. 복수는 차게 식혀서 먹어야 제 맛이라고.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그게 식어서 알맞게 맛이 들기 전에 내 복장이 먼저 터지게 생겼다는 것. 물론 그 애의 나쁜 습관을 생각하면 언젠가 말보로 레드가 내 대신 복수를 해줄 것이란 사실에는 의심이 없다. 하지만 그게 10년 뒤인지 20년 뒤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거기에는 나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지가 않다. 그건 복수가 아니다. 복수는 나의 목적과 이유와 의지가 반영되어 정확한 방법과 명확한 메세지를 동반한 형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시적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고의적으로 아주 거지같은 노래를 써서 재능 없이 가수를 꿈꾸는 그 애에게 가련하고 헛된 희망을 던져주는 것처럼. 단물과 독물을 구분할 최소한의 문화적 소양도 없는 그 년이 거지같은 노래를 부르고 거지같은 비평가들에게 시달라다가 커리어를 거지같은 방법으로 마감하고 ‘비너스클럽’으로 돌아가는 상상은 더없이 유쾌했다. 그러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커브사이드 픽업 서비스 업종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아마 신이 공평하다면 알아서 자연스럽게 마땅히 그런 조처를 해줘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 양반은 무심하고 무감하며 도통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몇 달 후 닥터 페퍼가 흥미로운 정보를 물어왔다. 소문에 따르면 에보니가 비강 주입형 드러그에 맛이 들렸다는 것이다. 골 빈 애들이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으레 일어나는 일이다. 알코올로는 더 이상 스릴을 느낄 수 없으니까. 늦던 빠르던 일어날 일이었다. (적어도 말보로보다는 조금 빠르게 골로 보낼 수 있겠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리고 그 또한 역시 엄밀하게 복수가 아니었다. 자기 좋자고 쾌락을 탐하다가 거품 물고 죽어 나자빠지는 걸 지켜보며 복수를 했다고 만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지점에 아주 조금이라도 나의 의지가 개입하여야 비로소 복수가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닥터에게 이 점을 설명하자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 형님, 꼭 그렇게 어렵게 해야합니까?
- 이봐, 페퍼. 요즘 대중문화가 전반에 걸쳐 왜 예전만 못한지 알아? 시적이지가 않아서야.
- 아, 형님은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어요. 세상에, 이 형님 때문에 미치겠네…
  닥터 페퍼는 말을 멈추고 골똘이 생각하더니만 리갈 패드 한쪽을 찢어서 빅 볼펜으로 벌집 모양의 선을 마구 그려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대학 때 그런 걸 화학식이라고 불렀다.
- 형님, 쉽게 말씀드릴께요. 화합물 A와 B와 C가 있다고 칩시다.
- 오케이. 거기까지는 따라가겠어, 닥.
- 그 되바라진 어린 검은 악당이 (참고로 저는 반쯤 흑인이라서 이런 말을 해도 인종차별이 아닙니다) 요즘 즐기는 여가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A입니다. 적당량이 들어갔을 때는 기분이 좋고 여러가지 유쾌한 효과를 일으키겠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체내 농도가 일정량을 넘어가면 치명적이죠. 보통은 그 선을 넘지 않을텐데 왜 오버도즈로 죽는 사람들이 생기느냐. 첫째, 환각 효과가 판단력을 흐리기 때문이고 둘째, 서서히 내성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속된 말로 약빨이 듣지 않기 때문이죠. 
- 그래, 그러면 B와 C는 뭔데?
- B는 A에 안전핀을 다는 거고요. 그리고 C는 이 안전핀을 잘라내는 거죠. 
- 그 말 뜻은… 
- B를 넣어 효과를 막아놓았다가 C를 넣어 한 방에 터뜨려버리는 거죠. 그러면…
- 할렘의 슈가힐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란 뜻이로군.

 

  닥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우리 오피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문화적이고 교양있는 방식을 정말 사랑했고 여전히 그것이 그립다.) 그는 구체적으로 B와 C가 어떤 물질인지에 대해 밝히지 않았지만 알려준다고 내가 이해할리 만무했다. 물론 실제 생화학 반응의 경로는 훨씬 더 복잡해서 베니스에서 시작해서 베로나로, 다시 크레모나로, 파르마로, 마두타, 파두아로 줄줄이 이어지는 식인데 아무튼 중요한 것은 파두아까지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쉽게 A-B-C 반응이라고 해두자. 닥은 세가지 다른 성분의 드러그를 합성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이 동네의 드러그 유통 시스템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경로로 에보니의 손에 (아니 코에?) 들어가는지를 꿰뚫어보고 아마존 프라임의 정기 배송처럼 순서대로 그 애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처럼 보였다.
- 이봐, 닥터 하이젠버그. 만에 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은?
- 형님, 토끼, 양배추, 그리고 여우를 보트에 태워서 강을 건너는 이야기 아십니까? 농부는 한 번에 두 가지씩만 가지고 보트에 탈 수 있는데 농부가 없는 사이에 남겨두면 서로 먹어버릴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요. 
 - 물론 알지. 
 - 모든 경우의 수에서 피를 보지 않고 끝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던가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톰, 딕, 해리나 해리, 딕, 톰이나.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다. A-B-C 반응이 차례로 일어나기까지 겨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최소한의 변수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경찰의 전화를 받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정말? 이렇게 빨리?) 내가 상대했던 그 맹랑한 계집 좀비가 얼마나 맛이 간 녀석이었단 뜻인가. 한편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도 들었다. 겨우 이런 하류 막장 실격 인간을 상대하느라 그래미 위너이자 토니 노미니인 내가 이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서였다. 


  에보니 브라운-응우옌의 장례식장에서 (맙소사! 응우옌? 갑자기 엄마 성을 붙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나는 침통한 표정을 짓느라 애를 썼다. 특히 관짝에 누워있는 미스 블랙 사이공의 평화로운 얼굴을 (비너스 클럽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과도하게 화장을 떡칠한 그 애의 얼굴을)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 보았다. 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비탄에 빠진 나의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을 했겠지만 실상 그 순간에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다 끝났다. 프랭크-앤-퍼터. 너의 미션은 실패했다.”

 

*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여러분들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일단락이 되었는데 (왜 이 이야기의 출발점에서처럼) 나는 비극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는가. 아마 이런 예상을 하실 것이다. 나의 은밀한 복수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서 평생의 명성과 업적을 궁지로 몰았고 마지막 탈출구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구나.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천만에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 반쯤 검은 실란트로가 지독한 악의를 품은 유령이 되어 나타나 또다시 나를 참을 수 없을만큼 괴롭했던 것일까? 그럴리가 있겠는가. (지금이 M.R. 제임스나 에드거 앨런 포의 시대도 아니고!) 그렇다면 나의 죄책감이 서서히 나의 영혼을 갉아먹어 더는 견디지 못하였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신의 유머감각이란 얼마나 고약한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나는 대중들이 (재능이나 성취의 여부와 무관하게) 죽은 가수의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잠시 잊었다. 어느 순간 에보니는 불운하게 요절한 재능있는 가수가 되었다. (물론 블랙-인퓨즈드 아시아계 소수인종에 여성이면서 고아에 미투 선언을 한 용기 있는 성소수자라는 스트레이트 플러시급 패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작동했다.) 반면 나의 지위는 안타깝게 요절한 예비 스타와 성추행 의혹이 있었던 지위와 권력을 지닌 백인 남자로 강등되었고 말이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내 스스로가 그렇게 느꼈고 위키피디아 역시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렇게 작성되어 있다. 생존인물에 대한 논란이므로 주의를 요한다는 노트가 묘하게 더 거슬렸다. 


  어느 별이 뜨는 순간에 다른 별은 진다. 비상은 추락을 동반한다. 그 애의 상승 공선은 나의 하강 곡선과 어느 지점에선가 극적으로 교차했다. 그리하여 나의 권능으로 그 애에게 부여한 커리어를 내 스스로 친히 거두려는 나의 계획은 보기 좋게 수포로 돌아갔다. 빨대 탄생. 여전히 빨대가 꽂힌 상태였다. 죽은 그 애가 산 나에게 빨대를 꽂고 있었다. 그 애가 훔쳐간 ‘My Heart Belong to Daddy’ 편곡 버전이 빌보드 싱글차트를 해덕대구처럼 (아니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나는 내 자신이 갑자기 한 줌의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맙소사. 라디오에서 나오는 그 노래를 듣고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 애의 커리어에서 일종의 슈가 대디였는지도 모른다. 단지 교환관계가 조금 다를 뿐. 그 애가 내게 빼내가려던 단물은 역시 나의 재능과 경험과 경력과 인맥이었다. 그걸 바탕으로 수렁에서 벗어나 4년전 설레는 마음으로 로스엔젤레스에 가져온 달콤하고 당돌한 꿈을 되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 애의 계획은 뜻대로만 되지 않았지만 나의 계획 역시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 더 밑지는 장사였는지는 이제 답이 나온 것 같다. 아! 신의 유머감각이란 얼마나 고약한가! 


  결국 '쎄 마그니퓌끄 - 어 콜 포터 어드벤쳐’의 제작은 중단되었다. 나를 둘러싼 잡음과 논란에 후원자들이 부담을 느꼈던 탓이다. (문화계에 있어 예술가와 후원자 사이의 이 빌어먹을 함수 관계는 어떻게 중세 이후로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어쩌면 예상된 수순이었지만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내 평생 이 바닥에 있어 왔지만 가장 아래 계급의 코러스 걸 하나가 전체 프로덕션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황당한 경우는 또 처음 보았다.


  같은 달에 나는 두 건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친애하는 잭슨 여사의 상태가 끝내 호전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진정으로 슬픈 일이었고 나는 내 인생과 경력의 일부가 그녀와 함께 영영 떠나버린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음은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산타모니카의 유명인사 닥터 “닥” 페퍼가 설명할 수 없는 사고를 당했다. 경찰은 그의 은밀하고 위험한 부업이 결국 사단이 되었을 거라 이야기하지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마치 레이저에 베인 듯한 상처를 보면서 나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 무렵 나의 애제자 케이틀린은 세번째 자해를 했다. 십년 지기였던 케이틀린의 부모는 이제 나와 우연이라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 좋은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나와 에보니의 ‘비너스 클럽’에서의 잘못된 만남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닥터를 해친 거지? 그 악마는 이미 땅 속에 묻혀있는데?)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 형체 없는 악의가 나를 향해 다가올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시작을 내가 했으니 끝도 내가 볼 수 밖에 없었다. 잭슨 여사와 닥터 “닥” 페퍼에 생긴 일로 죄책감에 괴로운 나날을 보냈던 것도 물론이다. 스트리트 분짜/짜조에게 크게 한 방 먹은 20온즈 스테이크의 심정으로 나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임을 깨달았다. 닥터 프랑켄슈타인의 딜레마. 멀리는 파라켈수스부터 가까이는 마리 퀴리까지. 나의 운명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악몽의 싱코페이션을 끝낼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단 하나.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 있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아무 일 없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너무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좋은 여자였고 그녀와 결혼했던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였다. 말 그대로 그녀가 최고였다. 그녀는 세익스피어 소네트이자 미키 마우스이자 모나리자의 미소와도 같았다. 결혼 전 한창 우리가 뜨거웠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그녀의 모든 점을 사랑했고 그녀가 내 일부만이라도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마지막 통화를 끝내며 짧게나마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났다. 나는 알았다. 이것이 완전한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거실로 돌아와 시리에게 그 분 음악을 하나 틀어보라고 주문했다. 내게 아직 운이 남았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시리의 선택은 스탄 게츠와 빌 에반스가 함께 연주한 ‘Night and Day’였다. 이들의 연주에는 노래가 없었지만 가사는 이미 다 머릿속에 있었다. 

 

♬ Day and night, why is it so
That this longing for you follows wherever I go?
In the roaring traffic's boom
In the silence of my lonely room
I think of you
Night and day ♬


  정말 그 분은 한 단어도 허투로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최고의 작곡가 중 한 명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작사가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평생 그의 뒤를 따라 살아왔던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나는 조니 워커 석 잔을 연거푸 들이킨 다음 천천히 차고로 향했다. 배기 가스로 한바탕 파티를 벌일 작정인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뭐 있겠는가? 아직은 이른 밤이고 시간은 차고 넘치는데.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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