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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과카몰리 블라바드

낙농콩단/Season 16-20 (2016-202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9.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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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이 아셔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정말로 카를로스 델 가도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갓! 지저스!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하는 소리인가!) 나는 그저 뉴욕주 시라큐스에 본부가 있는 NCAA라는 (미대학스포츠협회가 아니다) DHS 산하의 (참고로 택배는 DHL이고 DHS는 국토안보부다) 연방 대테러 특수 기관의 특수 요원으로 이 잠재적 문제 조직 안에 잠복해 있을 뿐이다. 누가 내게 언더커버 오퍼레이션을 지시하였냐고? 물론 시라큐스의 본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시라큐스의 덜 떨어진 책상벌레들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묵묵히 자기들이 시킨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카를로스 델 가도는 (물론) 위험한 인물이다. NCAA의 요주 인물 목록 탑 500에 13년 연속 포함되었다. 어쩌면 앞으로 13년을 더 포함될 수도 있다. 물론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기관마다 정보의 소스가 다르고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며 판정 기준 또한 제각각이기 때문에 타겟에 대하여 언더-에스티메이션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고 오버-에스티메이션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카를로스는 티후아나 태생이고 미국 국경을 건너와 샌디에고에 정착한 사업가다. 그의 사업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있고 (손 세차장 체인과 동전 세탁소 체인)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극단적 히스패닉 운동 지원). ’엘 포꼬 로꼬’라는 이름의 이 조직은 지난 10년 동안 무려 287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소요 사건의 배후를 자처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모든 일이 카를로스와 그의 무리들이 벌인 건 아니기는 하다. (당연하다. 굳이 직접 확인하지 않더라도 일년 평균 28.7회는 말도 안되는 수치 아닌가!)  아무리 요주 인물이고 요주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연평균 28.7회 수준의 테러 기획력이 있다는 건 사실 말이 안된다. 장담하건데 염병할 탈레반도 아마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모르는 건 시라큐스의 덜 떨어진 책상 벌레들 뿐이다.


*


  이 언더커버 작전을 처음 지시받은 것은 2007년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겨우 서른 세살이었고 또 결혼 10개월차의 신혼이었다. 시라큐스에서는 내가 이 일(카를로스 델 가도의 조직에 잠입하는 것)을 맡을 수 있는 가장 유능한 요원이며 기관 내에 나보다 나은 적임자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카를로스는 히스패닉. 나도 히스패닉. 문득 그 바탕에 인종적인 편견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증거도 없었다). 백인 사회에서 히스패닉으로 그럴듯한 커리어를 쌓았다는 원죄로 평생 겪어왔던 일이다. 누군가 이유 없이 나를 앞에 내세우거나 (갑자기 비행기를 태우면) 열에 아홉은 그런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인 의도가 숨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도 알았다. 더 뛰어난 능력과 이력을 자랑하는 요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 중에는 이 언더커버 작전을 끝내주게 잘 수행할만한 요원들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게 돌아온 이 제안이 실상 부드러운 협박이라는 사실을. 그 말은 내가 이 제안을 거부하는 순간 나의 커리어 또한 산으로 가리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외통수였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티후아나로 끌려가 카를로스 델 가도에게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거나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캔자스 외딴 시골 지부로 좌천당해 지루하고 무의미한 서류 작업에 깔려 죽거나. (토토! 우리 마을에 왜 대테러 연방기관의 지부가 있는지 모르겠어!) 둘 다 끔찍한 결말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변명 같지만) 당시 나는 젊었고 (변명의 여지없이) 커리어 초년생답게 의욕이 넘치는 상태였다. 물론 제안의 협박적 성격이 (그리고 그 안에 은근하게 포함된 인종차별적 의도가)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또 효과적으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은 부분도 있다. 나는 타의에 의해 외통수에 몰렸다고 믿고 싶지 읺았다. 다른 누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원하지도 않았다. 기꺼이, 충성스럽게, 스스로의 의지로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모두가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작전은 (순전히) 그들이 원했던 것이다. (문득 내가 그들의 의도에 말려들어간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아무튼 분명히 내가 먼저 가겠다고 했던 적은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그랬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라큐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에 대한 의심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많이 불쾌하다. 나아가 분통마저 터진다. 아니, 글쎄, 지들이 시킨 일 아닌가. 오히려 앞장서서 믿어주고 지켜줘도 시원찮을 판에 의심을 한다고? 그것도 내가 변절하지 않았는지를 두고?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


  시라큐스의 덜 떨어진 책상벌레들은 실제 언더커버 작전을 수행해 본 일이 없다. 그들에게 보고를 받는 덜 떨어진 (하지만 더 올라간) 고위직들 역시 실제 언더커버 작전을 수행해 본 일이 없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현장 경험이 풍부할수록 고위직에서 멀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정부 기관에서 유효한 법칙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들은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혹은 무슨 상황을 다루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언더커버 작전에 가장 근접한 경험은 퇴근 후 소파에 앉아서 CBS의 ‘언더커버 보스’를 시청한 정도일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J.W. 매리어트 주니어가 자사 소유 체인인 ‘레지던스 인 바이 메리어트’에 숨어 들어가는 언더커버와 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다혈질 테러리스트인 카를로스 델 가도의 조직에 숨어 들어가는 언더커버 사이에는 진실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일이 잘못되어 봐야 멜론과 칸탈로프를 썰다 말고 몰려온 사람들의 싸인 요청을 받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일이 잘못되면 몰려온 카를로스의 똘마니들에게 끌려가 멜론이나 칸탈로프처럼 썰리지 않을지 걱정을 해야한다. 심지어 그 놈들은 썰기 전에 산 채로 가죽부터 벗길지도 모른다 (카를로스야 워낙에 가죽 벗기기를 좋아하기로 유명해서 닉네임이 ‘가죽을 벗기는 자’란 말이다).

  요점은 이거다. 일단 걸리면 안된다. 한 번 사는 인생, 조국을 위해 몸 바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의미 없이 개죽음을 당하는 것도 솔직히 참 별로다. 자! 바로 이 지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가 태어난다. 이 언더커버를 걸리지 않으려면 나는 내가 그들 조직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하고 가능하면 의심의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시라큐스에서 내게 주문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라큐스가 그들 조직을 주목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잠재적 테러리스트?) 내가 그들 조직의 일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잠재적 테러리스트!) 충분히 시라큐스의 주목을 받고도 남을 일이다. 따라서 시라큐스에서는 내가 정말로 그들 조직의 일부가 된 것은 아님을 수시로 거듭 확인받기를 원하는데, 일부러 나서서 그 증명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언더커버가 들통날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 시라큐스에서 내게 지시한 목적에 어긋나며 다른 말로는 곧 ‘작전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캐치-22’적 상황은 내가 이 조직 안에서 카를로스 델 가도에 물리적으로 가까워질 수록 악화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언더커버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나는 시라큐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모른다. 천리안이나 천리 밖을 내다보는 수정구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다.
- 부국장님, 에르네스토가 ‘델 타코’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델 타코’는 카를로스 델 가도를 지칭하는 타겟 오브 인터레스트(TOI)용 암호다. (히스패닉계 요주 인물에게 ‘델 타코’라고? 과연 그 누가 NCAA의 조직 문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 그래, 바람직한 일이기는 한데…
- 마음에 걸리시는 일이 있습니까?
- 그래, 실은 그렇다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에르네스토가 돌아섰으면 우린 어떻게 해야하지?
- 아! 부국장님!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 그렇지. 물론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만약에, 아주 만약에.
- 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계속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습니다.
- 자네도? 역시 내 느낌이 맞았어. 분명 뭔가 있어! 그렇지? 

  내가 너무 드라마틱하게 구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와이프는 나를 두고 항상 ‘드라마 퀀’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언더커버 중에 이런 기막힌 입장이 놓이고 나면 내 문제라고만 보기도 어렵다. 분명 시라큐스에서는 내가 ‘가죽을 벗기는 자,’ 아니 카를로스 델 가도에게 접근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동시에 내가 카를로스 델 가도에게 접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나를 의심하는 그들의 저의를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작전의 성공인지 작전의 실패인지도 사실 모르겠다. 심지어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들이 언더커버라는 용어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의구심이 든다.

  내가 카를로스 델 가도 조직에 잠입한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리고 5년은 우라지게 긴 시간이다. 그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사이 시라큐스의 본부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는 (부득이)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상관에게 보고할 기회도. 동료와 협동할 기회도. 지원팀에 협조를 요청할 기회도. 그것이 언더커버의 속성이다. 그리고 부족한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그 사이 나는 나대로 기약없는 언더커버에 지쳐 답답한 나날들을 보냈고 본부에서는 본부대로 나를 쥐고 흔드는 맛이 예전같지 않다고 느꼈을 수 있다. 그러다보면 없던 오해도 자라나고도 남는다. 간단히 말해 시간이라는 녀석이 엿판을 짠 것이다. 


*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계기가 있었다. 에비, 에비아나 델 가도.

  에비. 그녀는 아름다운 여자다. 우리는 4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물론) 언더커버용 결혼생활 말이다. (참고로 결혼 15개월만에 남겨두고 온 진짜 와이프는 시라큐스 교외의 웨스트베일의 신혼집에서 잘 지내고 있다 -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에비를 내게 소개시켜 준 사람은 물론 코드 네임 ‘델 타코,’ 아니 카를로스 델 가도였다. 잠복 2년차, 그러니까 2009년 여름이었다. 금요일이었다. 카를로스와 나는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는 본질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자신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일적인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면서 사적으로도 믿을 수 있는 오직 다섯명만이 그의 저녁 식사 파트너가 될 수 있었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에 한 명씩 정해져 있었다. (금요일은 내 차례이고 말이다.)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는데 카를로스 똘마니들의 표현에 따르면 신기록이라고 했다. 이렇게 빨리 카를로스의 환심을 산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이 내가 이 요주 인물의 엉덩이에 얼마나 많은 키스들을 했단 이야기인지 아마 여러분도 대충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무튼 그 날 우리는 선샤인 드라이브와 포인세티아 로드가 만나는 자리에 위치한 치폴레(Chipotle Mexican Grill) 매장으로 향했다. 패스트 푸드에 단골이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면 카를로스는 바로 그 치폴레 매장의 단골이었다. (그러고보면 시라큐스에서 그의 TOI 닉네임을 ‘델 타코’라고 붙인 점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카를로스는 ‘델 타코(Del Taco)’는 물론 ‘타코 벨(Taco Bell)’도 좋아하지 않았다. 일편단심 ‘치폴레’만이 진짜 멕시칸 음식이라고 주장했다. 언젠가 내가 다시 시라큐스로 돌아가게 된다면 상부에 보고해서 이 부분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날 카를로스는 난데없이 ‘세 사람을 위한 테이블’을 요구했다. 나는 당황했다. 직원도 당황했다. 물론 직원이 당황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나는 우리 두 사람이 갔는데 세 자리를 달라고 하기에 당황했지만 직원은 패스트푸드점에 온 손님이 테이블 안내를 요구해서 당황한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직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아무데나 앉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조그마한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좋은 얘기인지 나쁜 얘기인지 몰랐지만 아무튼 사람 앞에 두고 돌아서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좋게 들리는 일은 드물다. 맥락상 좋은 이야기일 수도 없었다. 나는 당황했다. 카를로스는 성격이 불 같은 남자다. 여차하면 그 직원을 레드 칠리 살사와 함께 소프트 토틸라에 말아 구덩이에 던져 넣고 중형 포크레인을 불러 묻어 버릴 수도 있었다. 다행히 카를로스는 웃어 넘겼다. 
- 조크요. 조크. 우리가 넓은 테이블을 잡겠다는 뜻이었수다. 아주 특별한 날이니까!
  나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세 사람을 위한 테이블’이라는 표현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세 사람? 특별한 날? 

  궁금증은 주문 과정에서 한결 더 깊어졌다. 카를로스는 먼저 스테이크 타코 (옵션으로 브라운 라이스와 핀토 콩과 칠리 콘 살사와 토마토 살사와 토마틸로 레드 칠리 살사와 사워 크림) 세 개에 스테이크 부리또 보울 하나, 그리고 16 온즈 루트 비어를 주문했다. 카를로스의 치폴레 표준 주문 메뉴다. (그렇다. 그걸 한 자리에서 다 먹는다.) 의아한 것은 그 다음에 과카몰리 베지 브리또 보울 (옵션으로 검은 콩과 프레스 토마토 살사와 사워 크림)과 16 온즈 제로 슈거 코카 콜라를 더 시켰다는 사실이다. 카를로스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메뉴를 주문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치킨 토핑조차 계집애들을 위한 옵션이라고 우기는 남자다. 나는 이 언더커버를 시작하기 전에 10년간 채식주의자로 살았고 지금도 (언더커버 때문에 어쩔 수는 없지만) 여전히 건강한 위해 붉은 고기는 선호하지 않는다. (여기 오기 전에 치폴레 같은 체인에 내 돈 내고 들어가 본 적이 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따라서 카를로스와 같이 치폴레에 오면 나는 주로 치킨 타코를 시키는 편인데 그건 이유로 항상 그에게 놀림을 당한다. 
- 어이, 에르네스토! 그거 아나? 자넨 계집애 같은 놈이야. 세상에 사내 자식이 치킨이나 먹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는 닭울음소리를 흉내내며 나를 자극했다. (꼬꼬댁 꼬꼬꼬꼬 - 다들 아시지 않는가?) 예전의 나였다면 그런 식의 놀림은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연히 언더커버 작전 수행 중인 요원이고 그런 짓궂은 표현은 카를로스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임을 알았기에 그냥 웃어 넘겼다. 그리고 미지의 세 번째 손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특별 손님의 치폴레 취향 뿐이었다. 검은 콩과 프레스 토마토 살사와 사워 크림을 얹은 과카몰리 베지 브리또 보울. (이 유일한 단서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눈치를 챘는지 카를로스가 한 마디 덧붙였다. 
- 베지 브리또 보울은 숙녀분을 위한 것이라네, 내 친구여. 
  숙녀? 카를로스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레벨의 사람은 조직 전체에 나를 포함하여 다섯명 뿐이고 (당연히) 모두 남자였다. 우리의 저녁 식사 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거래 조직의 두목급 정도가 아니고서야 단촐한 저녁 시간을 방해받도록 놓아둘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숙녀라니! 티후아나의 세차 여왕이라도 모셔올 참이란 말인가? 물론 살사와 사워 크림을 듬뿍 섞은 브리또 보울 앞에서 숙녀라는 지위는 그리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음식과 음식물 쓰레기의 정확히 중간 지점에 치폴레가 있다고.

  하지만 막상 그녀가 나타났을 때 나는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평생 보아온 어떤 여자보다도 (미안한 이야기지만 웨스트베일에 남겨두고 온 진짜 와이프를 포함해서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작은 얼굴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매력적인 웃음. 가지런한 치아.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성에 대한 개인적이고 은밀한 선호, 그러니까 가느다란 종아리와 더 가느다란 발목과 아기처럼 작은 발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두 사이즈가 US 4, 그러니까 약 205 mm 정도였다 - 정말이다). 그녀의 하이힐은 장난감처럼 작게만 보였다. 발등에 살짝 푸르스름하게 정맥이 비치는 것이 아기처럼 작은 발과 맞물려 묘한 흥분감을 주었다. 나는 눈을 떼지 못했고 카를로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 어깨를 호탕하게 두드렸다.
- 에르네스토! 자네 완전히 넋이 나갔구만.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두려움도 느꼈다. 뒤이어 그가 내 귀에 대고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이자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에르네스토,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티를 내면 쓰겠나?’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저 카를로스의 악의 없는 짖궂음이 발동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괜히 제 발이 저렸던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 이 숙녀분의 이름은 에비아나, 가족들은 에비라고 부른다네. 사랑스러운 이름 아닌가?
  그리고는 껄껄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는데 그 말에 문득 정신이 아득해졌다.
- 자네 짝이야, 에르네스토.


*


  이 대목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카를로스 델 가도의 사업장(손 세차장 체인과 동전 세탁소 체인)이 운영되는 방식 말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평범하게 보이는 사장님이다. 총 직원이 130명에 이르는데 그들 대부분은 정상적인 세탁 혹은 세차업체의 평범한 직원들이다. 그중에서 카를로스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따로 떼어내 관리하는데 이 레벨에 있는 직원들은 정상적인 세탁 혹은 세차업체가 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 (그 무렵 나도 그 레벨에 막 접근한 참이었고 말이다.) 카를로스는 완전히 (100%도 아니고 120%도 아니고 무려 150% 이상) 자기 사람이라는 판단이 선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심복으로 삼는데 그 다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사용하는 몇 가지 장치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소개팅 주선이다. 자기가 소개시켜 준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함으로써 부하의 충성을 공고하게 다지는 한편 그 여자들을 통해 부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을 햇었다. “술을 먹이면 얼결에 진심이 나온다. 고기를 먹이면 서서히 진심이 나온다. 하지만 사랑에 빠뜨리면 마지막 한방울까지 진심을 짜낼 수 있다.” 그 결과 심복들을 카를로스 델 가도라는 남자와 사업적으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분리될 수 없는 운명 공동체로 묶이게 된다. 이 부분은 시라큐스에서 사전 브리핑을 받을 때 이미 입수하고 있었던 정보다. 나도, 그리고 시라큐스의 본부에서도 어느 시점에 일어나리라고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그가 소개시켜 준 여자가 아기처럼 작은 발을...... 아니, 델 가도라는 성을 가지고 있더라는 사실이었다.      

- 이걸 봐, 에르네스토. 이 일회용 포크, 일회용 스푼, 일회용 나이프을 보라고. 얼마나 단단하고 질이 좋으냔 말이야. 맥도날드나 보통 패스트푸드에서 나눠주는 싸구려 포크, 스푼, 나이프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바로 여기에 치폴레의 성공 비결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카를로스의 치폴레 예찬이 또 시작되었다. 매번 같이 식사할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이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그처럼 일회용 나이프를 엑스칼리버 보듯이 전등에 비춰보며 감탄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에비아나 델 가도. 그녀는 이런 복잡한 내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새침하게 포크로 부리또 보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오빠가 놀리는 말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고 때때로 삐친듯 혀를 빼꼼 내밀었다. 나를 거의 처다보지 않으려고 몸을 배배 꼬았다. 나는 사전 브리핑 때 접했던 그녀에 대한 정보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티후아나에 남겨 두고 온 카를로스의 이복 여동생. 그래서 나이 차이도 꽤 났던 기억이 났다. 작전 파일에는 그녀의 졸업 앨범 사진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어린애라고만 생각했다. 샌디에고로 건너올 줄 몰랐으니 당연히 작전 상의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카를로스 밑에서 일하는 단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고 만날 거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자네 짝이야? 카를로스가 자기 이복 여동생과 나를 엮어주고 싶어 한다고? 정말로?

- 치폴레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네, 에르네스토.

  카를로스는 쩝쩝거리며 자기 할 말만 이어 갔다. 이 말도 그의 주된 레파토리 중 하나다.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나는 알고 있다. 

 

‘살사와 사워크림을 잔뜩 넣은 소프트 토튈라 타코 3개를 포장해다가 먹어본 적이 있나, 에르네스토? 은박지 안에서 토틸라끼리 눅눅하게 들러 붙고 살사와 사워크림이 축축하게 새어 나오며 쌀이며 콩이며 토핑들이 서로 뭉개지며 뒤섞이지 않나. 그래서 은박지를 딱 여는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잖나. 이건 마치 내 내장 속에 음식이 쌓여있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아. 얼마나 멋진가! 먹기 전에 이미 먹은 후를 볼 수가 있다니! 그리고 또 그 순간 얼마나 슬퍼지냐는 말이야. 우리 인간이란 아무리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근사한 곳에서 고상한 척 하면서 식사를 해도 결국 내장 안에 그런 식으로 음식이 쌓아놓고 살아가는 동물에 불과한 것을. 그렇지 않은가? 에르네스토?’ 


  아마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거릴 것이다. 너무 많이 들어서 나도 다 외울 정도였다. 너무 많이 듣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날만은, 그 날만은 달랐다. 나는 에비아나 델 가도라는 아름다운 여성에 매료된 나머지 그가 무슨 말을 하던 신경이 쓰이지가 않았다.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무조건 맞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녀는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빨대로 소다를 마시며 자기 이복오빠와 나를 흥미롭게 번갈아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갓 떠오른 초승달을 연상하게 하는 미소였다. 

  그 날 저녁부터 나는 에비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데이트를 하던 기간 동안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치폴레였다. 카를로스는 항상 셋이 함께 만나는 것으로 우리 데이트가 시작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치폴레를 뱃속에 넣고 만날 수 밖에 없었다. 먹고 난지 한두 시간만 지나면 엉덩이에서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가 움파파 움파파 시작되는 그 빌어먹을 음식. 세상에! 데이트 날 멕시코 음식을 먹는 사람이 어디있냔 말이다. (아마 멕시코 사람들조차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언더커버 중이었고 작전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는 카를로스 델 가도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아마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 데이트의 시작을 함께한 카를로스가 우리 데이트의 끝까지 함께 하느냐고. 음…… 나는 그 의문에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겠다. 대개 우리는 카를로스의 운전사가 모는 카를로스의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여 카를로스와 함께 해변이나 공원을 산책하고는 했다. 그리고 나서는 카를로스가 미리 예약해 놓은 다운타운의 ‘더 웨스틴’이나 ‘앰버시 스위츠 호텔’로 이동하여 카를로스와 함께 클럽 라운지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카를로스는 항상 같은 호텔의 코너 스위트에 자기 방을 예약하였고 한 단계 낮은 스위트나 게스트 룸을 예약하여 우리 둘에게 카드 키를 건네주고는 했다. 

  첫 날 우리는 부끄러워하면서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 왜 있지 않은가. 좋아하는 영화나 감명깊게 읽은 책 같은 여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그러다가 청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가스 누출이 일어나면 서로 다시 얼굴을 붉히고 십대 청소년들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정확히 어떻게 전기가 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세 번째는 그런 식으로 데이트를 하고 나니 그녀 또한 가스 누출에 신경을 쓰지 않기 시작했다. 파티오의 긴 쇼파에 앉아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황급히 걸어가는 사이에 21발의 예포를 엉덩이로 만들어 내고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한 번 방어막을 걷어내고 나니 차츰 나도 덜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우리는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너나 할 것 없이 엉덩이로 연주를 했다. 때로는 멋진 합주를 완성하기도 했다.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욕조에 앉아 거품 목욕을 하다가, 심지어 함께 사랑을 나누다가도 여지 없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나중에는 조금도 신경쓰지를 않게 되었다. 그런 마당에 더 이상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부끄러워하겠는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3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고 카를로스가 기꺼이 나의 신랑 들러리가 되주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적어도 한가지는 맞았다.

  치폴레는 우리가 누군지를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가?   


*


  아, 어쩌면 이 대목에서 여러분이 가졌던 의문은 다른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맞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유부남이다. 내 진짜 와이프는 시라큐스 교외의 웨스트베일의 신혼집에서 지내며 이라크로 파병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그 파병 나간 남편이 나다. 시라큐스의 NCAA 본부는 이런 식의 고약한 스토리들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들이다. 그리고 그게 먹힌다. 일개 시민의 신상 따위는 손쉽게 조작하는 연방 기관 특유의 힘 덕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직종 사람들의 배우자들이 대개 지나치게 순진한 탓도 있다. (그 또한 참 신기한 일이다.) 나의 와이프 같은 경우에도 ‘남편의 이라크 파병’이라는 극적 요소에 심취하여 별 의심없이 쉽게 믿어 버린 경향이 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군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뭐, 적어도 아직까지는)  못해 본 것 같고 또 미합중국이 현재 이라크에서 진행 중인 전쟁이 없다는 사실에도 (역시 적어도 아직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그녀가 동부 백인 엘리트 집안의 장녀이자 아이비 리그 출신 전직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아! 그리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여러분 중의 짖궂은 몇몇은 조금 더 깊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내 진짜 와이프의 구두 사이즈가 궁금할 수도 있겠지. 그저… 구두 사이즈로 유명한 케이트 윈슬렛만큼 크다고만 해두기로 하자. 그렇지만 내가 와이프를 사랑하지 않고 결혼했다는 뜻은 아니고 지금 와이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정말이다.

  아무튼 요는 내 스스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한 날 한 시도 잊지 않고 있으며 (비록 결혼반지는 빼두었지만) 에비 델 가도와의 또 다른 결혼 생활은 작전의 일부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뭐랄까… 배우들처럼? 그래, 맞다. 배우들처럼! (실제로 언더커버 작전에 투입되는 요원들을 대상으로 제공되는 교육 코스에는 스스로를 배우처럼 생각하도록 암시하게 하라는 내용이 있다. 정말이다.) 가령 배우들이 영화나 텔레비젼 쇼에서 결혼 생활을 연기한다고 해서 정말 그 상대배우와 결혼을 한 것은 아닌 것처럼. 예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진짜 부부처럼 생각하는 레이 로마노와 패트리샤 히턴이 실제 부부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배우들이 연기할 때와는 다른 점도 있음은 인정한다. 우리는 나름 진짜 결혼을 한 상태이고, 음… 그러니 또 진짜 결혼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해야 하고 뭐 그런 부분은 있기야 하다. 어느덧 에비 델 가도와의 결혼 기간이 진짜 와이프와 함께 지낸 시간보다 약 4배 정도 길었던 것 같고 그 사이 우리는 아마… 어림잡아 백만번쯤 사랑을 나누었던 것 같다. (물론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애비 허니비는 (내가 이야기했었나? 그녀를 부르는 애칭이라고?) 그 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에 누워 유튜브로 고양이 동영상을 보는 데 할애했고 그 사이 나는 그녀를 위해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다. 가사 일을 모두 마치면 나는 침대 아래쪽에 걸터 앉아 그녀의 US 4 사이즈 인형 같은 발을 마사지 하고 US 4 사이즈 구두를 신겨보는 놀이를 하고는 했다. (이것이 진정한 결혼 생활 아닌가?) 사랑스러운 애비 허니비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녀는 유튜브 고양이 동영상만 틀어놓으면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한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4년 동안 나는 US 4 사이즈의 펌프스 힐, 웨지 힐부터 옥스포드, 청키 힐, 콤마 힐, 쿠반 힐, 스푼 힐, 에스파드릴 힐, 판타지 힐, 콘 힐, 핍 토 힐, 스틸레토스, 플랫폼 힐, 스퀘어 힐, 슬링백 힐, 프렌치 힐, 키튼 힐, 컷 아웃 힐, 앵클 스트랩 힐, 뮬스, 앵글 부츠, 하이힐드 부츠를 색깔 별로 수집해서 그녀에게 신겨보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건 아는데 들리는만큼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냥 나는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엄마 구두를 몰래 신고 돌아다녔고 여성 구두의 아름다움에 거부할 수 없을만큼 끌렸을 뿐이다. (만약 내가 어려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구두 디자이너가 되었다면 크리스챤 루부탱만큼 성공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 야옹이 동영상 조금 더 보면 안돼? 올드 엘파소?
  그녀는 고양이를 항상 야옹이라고 불렀고 (아유! 귀여워라!) 나를 올드 엘파소라고 불렀다. ‘애비 허니비’가 그녀의 애칭이라면 ‘올드 엘파소’가 나의 애칭인 셈이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작고 귀여운 발을 두 손으로 들어 발끝과 발목과 발뒤꿈치와 발등에 입을 맞춘 다음에 택배 상자를 뜯고 꺼낸 구두를 들어 보였다.
- 애니 허니비, 그러지 말고 이 구두 좀 신어봐! 오늘 아마존에서 도착한거야.
  물론 그녀는 언제나 귀찮아했다. 그 예쁜 다리와 예쁜 발을 갖고도 고작 크록스만 신고 돌아다녔고 한 번도 좋은 구두에 관심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기구절창할 노릇이다.
- 으흥, 귀찮아. 야옹이 동영상 더 틀어줘.
  그러면 나는 짐짓 화가 난듯 양 허리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 그럼 야옹이 보고 있어. 내가 신겨줄께.
  그리고 나는 그녀의 발바닥을 살짝 간지럽혔다.
- 킥킥킥. 간지러워, 하지마. 올드 엘파소.
  그녀가 몸을 비틀다가 가스가 새어나온다. 뽕뽕뽕. 저녁에 살사들 듬뿍 얹어 먹은 듬뿍 치폴레 탓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도 긴장이 풀려 가스를 내보낸다. 북북북. 애비 허니비가 꺄르르 웃는다. 아이처럼 이를 활짝 드러내고. 서로 웃다가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가 시작된다. 뽕뽕뽕! 북북북! 웃다 지친 나는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한다.
- 애비 허니비, 우리 앞으로 치폴레를 좀 작작 먹어야겠어!
  애비 허니비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다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유튜브 창을 닫고 맥북을 덮어 협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럴때면 카를로스의 명언이 귓가에 맴도는 듯 한다.  
- 치폴레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네, 에르네스토.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시라. 물론 나는 본연의 직분에도 충실했다. NCAA 요주 인물에 13년 연속 노미네이트된 그 분과 그 분의 업장과 그 분의 비밀 조직을 감시하는 임무 말이다. 단지 그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애비 허니비에게 구두를 사주고, 그녀에게 구두를 신겨보고, 그녀에게 구두를 신겨놓은 채로 사랑을 나누었을 뿐이다. 

 

*


  이제 이 이중생활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인 것 같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난 항상 그게 문제다.) 문제의 사건이 터지기 몇 달 전부터 시라큐스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했다. 몇 번이나 아무 문제가 없느냐고 반복해서 질문을 했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면 미심쩍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카를로스와 나의 공통점을 은근히 암시하는 일도 있었다. 맞다. 인종적인 부분 말이다. 그게 참 골 때린 게 내가 맥시코계라고 멕시코계 타겟의 조직에 잠입을 시켜놓고 이제와서는 내가 맥시코계라서 못 믿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런 이상한 조짐이 몇 차례의 통화에서 반복되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카를로스 델 가도가 결국 큰 사고를 쳤다. 정확히는 '엘 포꼬 로꼬'가 사고를 쳤다. (혹은 그렇다고 주장했다.) 샌디에고에서 북쪽으로 30 마일 떨어진 에스콘디도시 외곽의 작은 트롤리 역사에 독성 가스를 살포한 것이다. 다행히 저상 열차의 개방형 역사라 피해가 적었고 역무원들의 초동 대처가 빨라 당시 플랫폼에 있었던 일곱 승객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어 가벼운 치료를 받는 정도로 끝났다. 하늘이 도왔는지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사건 발생 5시간 후에 ‘엘 포꼬 로꼬’가 배후를 자처하고 나섰다. 뉴스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경우, 대개 사람들은 동네 세탁소 주인과 상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NCAA에게 ‘엘 포꼬 로꼬’는 (언제나) 카를로스 델 가도와 동의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본부 사람들이 단단히 열 받았다. 왜냐고? 기관에서 막대한 자원을 들여 기껏 언더커버 요원을 심어 놓았는데 테러의 징후라고는 개뿔 포착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 심어 놓은 언더커버 요원이 바로 나다. 그래서 본부에서는 새벽 두 시에 내게 전화를 했다. 그것도 스피커 폰로. 그것도 (아주 악랄하게) 스피커 폰이 아닌 척하고. (이제 와서 이야기지만 좀 개 같은 놈들 아닌가?) 

  고양이 동영상을 보다가 입을 헤 벌리고 잠든 애비 허니비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침대를 빠져 나온 나는 조용히 침실 문을 닫고 1층 거실로 살금살금 내려와 전화를 받았다. 부국장의 심복 알렉세이였다. (난 미합중국의 연방 대테러 특수 기관 내에 러시아 놈들이 득실거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이야기했던가? 우리 아버지는 냉전 시대의 FBI 요원으로 러시아 스파이를 추적하는데 평생을 바친 분이다.) 

- 에르네스토 요원, 뉴스를 보았소?
- 무슨 뉴스요?
- 테러요, 테러. 샌디에고에서.
- 아, 봤습니다. 에스콘디도는 생각하시는 것만큼 여기서 가까운 곳은 아니에요.

  침묵.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 가깝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에르네스토.
-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나는 조용히 움직여 리모컨을 집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화면이 깜빡거리자마자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애비가 마지막으로 E! 채널에 놓고 전원을 껐던 모양이었다. 천천히 버튼을 눌러 채널을 돌렸다.
- 델 타코. 델 타코가 문제요. 
- 카를로스가요?

  도다시 침묵. 순간 나도 아차싶었다. TOI를 이름으로 불렀으니까. 그것도 성 빼고 이름만.
- 델 타코가 카르니타스 부리또 콤보를 팔기 시작했다고! 정신 차려, 에르네스토!
  뭔 소리냐고? 위험 인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리다. 그걸 꼭 저딴 식으로 (마치 대단한 암호인 것처럼) 하고 자빠졌다. 일단 이 대목에서 나는 기분이 좀 나빴는데 (새카만 후배 새끼한테 정신차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건 그럴만도 했다.) 바보처럼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채널을 돌려 마침내 도착한 CNN에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독가스 살포 사건에 ’엘 포꼬 로꼬’가 조금 전 배후를 자처하고 나섰다는 소식.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 카… 아니 델 타코에서 오늘 하루 종일 타코 2개에 3달러 믹스 앤 매치 행사를 했소. 
  이건 또 뭔 소리냐고? 해석하자면 위험 인물이랑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알렉세이가 침묵했다. 순간 이상한 사실을 캐치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볼펜을 끄적거리는 소리와 물컵을 내려놓는 소리와 껌을 딱딱 씹는 소리가 (작지만 또렷하게)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 사실을 진작에 몰랐을까? 새벽은 고요한 시간이다. 시라큐스에서나 샌디에고에서나. 하지만 내가 600만불의 사나이가 아니라면 반대쪽 수화기 너머 새어 들어오는 주변 소리를 그렇게 구별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그 반대쪽이 연방 기관이라면 (그것은 모든 통화를 녹음하거나 모든 통화를 보안 회선으로 돌린다는 뜻이다. 보안 회선으로 돌린다고 말하고 녹음하는 경우도 있고 보안 회선으로 돌린 줄 알았는데 계속 녹음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였다. 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개 놈의 새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걸고 자빠진 것이다.  

- 정말 이상한 징후가 없었소? 에르네스토 요원. 
- 없었소. 전혀 없었소.
- 지난 번에도 그 이야기를 했잖소.
- 그렇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 하지만… 아무 일도 있잖소.
- 아무 일도 있는 건 아니오. 설령 ‘엘 포꼬 로꼬’인지 ‘엘 로꼬 포꼬’인지가 배후를 자처했다고는 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잘 아시겠지만 급진주의 세력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선언을 하기도 하고. 
- 너무 안이한 생각 아니오?
  뭐? 안이하다고? 그게 잠복 근무 중인 사람에게 할 소리인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분기에 한 번, 그러니까 3개월 간격으로 나는 본부와 통화를 했다. 마지막 통화는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항상 카를로스 델 가도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결국 일이 터지지 않았냐는 말을, 그러니까 순전히 너의 책임이라는 말을 저들은 하고 싶은 것일테다.  

- 음, 에르네스토 요원? 꽌 리입니다.
  NCAA의 인사팀장 똥 쭈완 꽌 리의 목소리다. 수화기를 건네는 소리나 지연 현상 없이 바로 훅 치고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스피커 폰이라는 짐작이 틀리지 않은 듯 했다. (그건 그렇고, 명색이 미합중국의 안전에 직결된 연방 기관에 중국 놈들도 이렇게 많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은지 모르겠다.)
- 꽌 리 팀장. 오랜만이오.
- 예, 일단 아셔야 할 것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 어떤 면에서요?  (니들에게? 아니면 나에게?)
- 음… 저희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은요. 에르네스토 요원이 이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확 열이 받았다. 내가 알고 있었는지가 중요하다고? 정말 카를로스와 '엘 포코 로코'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지들 나름대로 건설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저들이 하는 짓은 엉뚱하게도 나를 의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사팀 사람이 왜 작전실에 들어와 이 대화에 끼어들고 있단 말인가. 아! 나는 뒷목을 잡고 천천히 쇼파에 앉았다. 어쩌면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겠지. 급여와 경비 처리. 본부에서는 그 부분을 건드리고 싶은 것이다. 왜냐고? 테러를 막지도 못하는 언더 커버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있으니까. 급여는 웨스트베일에 사는 아내에게 입급되고 있다. 동시에 샌디에고에서 내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별도의 경비가 추적 불가능한 계좌로 내게 지급되고 있다. 그들로서는 그 이중으로 들어가는 돈이 아까운 것이다. 그들은 내내 그 돈을 아까워했다. 아무리 돈이 아깝다고 한들, 테러를 알면서도 숨기고 묵인했느냐고? 그게 할 소리인가?

- 그게 중요합니까? 
- 물론 중요하지, 에르네스토 요원.     
  부국장의 목소리였다. 역시 스피커 폰으로 돌려놓고 모두가 둘러 앉아 있는 것이다.
- 드디어 나오셨군요. 도대체 거기 지금 몇 명이나 모여있는 겁니까? 대머리 아저씨도 오시는 중인가요?
- 말 조심하게. 아무리 대머리여도 국장은 국장이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들 좀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난들 저들을 열 받게하고 싶었겠는가?
 

- 잘 생각해 봐. 자주 보고를 해줬으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 언더커버 중에 어떻게 자주 보고를 합니까? 본부와 접촉 빈도가 잦아지면 발각될 확률도 올라가는 걸요.

- 자네가 미리 제 때에 보고만 해줬어도 막을 수 있었을 일이었을 수 있어.
- 아무 일도 없는데 무슨 보고를 합니까?
- 뭐라고?
- 징후가 없었으니까요. 아까 알렉세이 요원에게도 설명을 했고 아마 옆에서 다들 몰래 훔쳐 들으셨겠지만 배후를 자처했다고 정말 그들이 기획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 기획을 했으니 배후를 자처했을 수도 있지.
- 기획을 했으면 제가 뭔가 알아챘을 겁니다.
- 자네가 놓쳤는지도 모르지.
- 저는 훈련받은대로 표준 지침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카를… 아니 델 타코에는 이상 징후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일전에 보고드린 바와 같이 이 작자가 테러리스트 프로파일에서 심각하게 벗어나는게…
- 세상에! 또 '아메리칸 아이돌'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 아니 꼭 그럴려던 건 아닌데... 아무튼 매주 '아메리칸 아이돌'에 투표하는 테러리스트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습니까? 
- 그 정도야 위장일 수도 있지.
- 제가 판단하기에는 위장이 아닙니다.
- 자네가 틀렸을 수도 있지.
- 그런 식으로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이 임무가 아무 의미 없죠.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식으로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한단 말인가.


- 에르네스토 요원, 부국장님 말씀은요. 단지 이 상황이 염려스러워서 하시는 말씀이오. 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엔 큰 일이 터지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잖소. 
  이번엔 부국장의 다른쪽 팔인 게르하르트가 끼어들었다. 알렉시이와 함께 기관의 싱크탱크인 척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싱크홀 같은 놈들이다. (참, 이 놈의 기관에는 독일놈들도 많다. 내가 얘기했던가? 우리 할아버지는 나치 사냥꾼이셨다고.)

- '델 타코'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다음에 큰 일을 칠 것이 걱정되면 본부에서 적합한 조치에 나서면 되지 않소.

- 모든 액션에는 충분한 근거가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그 근거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 여기서는 신중을 기하고 있소. 아까도 말했지만 NCAA에서 지침을 받은 그대로. 
- 압니다. 하지만 당신은 현장에서 상황을 보고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오. 요원이 전해주는 이야기만으로 짐작하다보니 답답한 부분도 있고.
- 그럼 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막말로 요원이 마음 먹고 보고를 누락한다면 모든 정보를 요원에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표적을 놓칠 수 밖에 없잖소.
- 마음 먹고 누락? 결국 그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요?
- 자네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 아닌게 아니잖아요!
- 그래도 미리 보고를 했어야지!
  다시 부국장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아니, 도대체 무슨 보고요!
- 테러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 어떻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알고 보고를 합니까? 내가 무슨 염병할 존 앤더튼인 줄 압니까? 이게 무슨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요?

  스피커 폰으로 돌려놓고 둘러 앉아있는 작전실의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자기들도 모르는 거지. 당국에서 애초에 카를로스 델 가도를 주목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미 본토에서 대단히 가까운 거점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부분도 있다. 카를로스는 티후아나 토박이고 그의 조직 본거지도 티후아나에 있다. 엎어지면 바로 미국 국경이라는 지정학적 요소가 반영되어 높은 위험 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엘 포코 로코'의 경우 실제 인력 규모, 자금 규모, 추진력, 기획력은 미국 영토 내에서 일을 벌일 수준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동안 언더커버를 하면서 수집한 정보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가능성. 단지 가능성이다. 아주 사소한 가능성에도 사전 대비를 하고 제어 장치를 걸어 놓는 것이 우리 기관이 하는 일의 특성이니까.

- 진정하게. 올드 엘파소.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있었던 내가 계속 쏘아 붙이려는데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누가 한 말이지? 알렉세이? 게르하르트? 부국장? 꽌 리? 잠시 갸우뚱하며 균형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뭐라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수화기 저편에서 키득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달팽이관 깊숙히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그 단어. 올드 엘파소. 올드 엘파소?
 
- 야옹이 동영상 조금 더 보면 안돼? 올드 엘파소?
  무슨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애교부린 여성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수화기 저편에서 이런 말을 했다.  

- 애니 허니비, 그러지 말고 이 빨간색 앵클 스트랩 힐 좀 신어봐! 오늘 아마존에서 도착한거야.
  약간 새된 목소리의 남자가 한껏 목소리를 낮게 깔고 그 말을 이렇게 받았다.

- 으흥, 귀찮아. 야옹이 동영상 더 틀어줘.
   나는 바보처럼 아무 대꾸도 못하고 넘어오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 그럼 야옹이 보고 있어. 내가 신겨줄께.
  도대체 이게 뭔가.

- 킥킥킥. 간지러워, 하지마. 올드 엘파소.
  도대체 이게 뭔가?

- 뽕뽕뽕! 북북북! 애비 허니비, 우리 앞으로 치폴레를 좀 작작 먹어야겠어!
  도대체 이게 뭔가!

  그들은 웃었다. 열 명이 웃는 것도 같았고 백 명이 웃는 것도 같았다. 우라질 스피커 폰을 틀어놓고 개 같은 놈들이 작전실에 몇 명이나 모여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마치 내가 존재하는 현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침실에서. 애비 허니비와 나의 은밀한 보금자리에서 벌어졌을 법한 대화를 시라큐스의 그들이 흉내를 내고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뭐 대충 그런 식의 레파토리는 맞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저들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음성 녹음을 하고 있었다면 영상 녹화는 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실로 아찔해졌다. 순간 도망치고 싶었다. 잠시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이 모든 것이 그냥 꿈일지도 몰랐다. 그래, 일단은 한 발 물러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애써 진정하고 이렇게 말했다.
-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군요. 이만 끊겠습니다. 다음 정해진 날짜에 보고를 드리죠.
- 자네 와이프가 이 사실은 알게 되면 어떨까?

  참! 이 인간들. 바닥을 모르는군.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이건 임무잖습니까. 
- 정확히는 임무의 일부죠.
  인사팀의 똥 쭈안 꽌 리 팀장이 끼어들었다.
- 여하튼 간에. 
- 그렇게 즐기실 줄은 몰랐고요.
  수화기 저편에서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 배우들이 기혼자 역할을 맡아 다른 배우와 부부를 연기한다고 그걸 비난할 수는 없잖소. 레이 로마노와 패트리샤 히턴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실제 부부 사이가 아니고.
- 누구요?
- 레이 로마노, 그리고 패트리사 히턴.
- 그게 누군데요?  
- ‘모두가 레이먼드를 사랑해’도 몰라요?
  그때 다시 알렉세이가 끼어들었다.
- 에르네스토 요원, 꽌 리 팀장은 그 쇼를 못 보고 자란 세대요.
  내가 미친 놈이지. 말을 말자.

- 아무튼 간에. 내 말 뜻은 다들 알겠죠?
- 많이 즐겼다는 뜻이오?
  다시 키득거리는 소리가 새어들어왔다.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부국장이 다시 한 마디를 던졌다.
- 자네 와이프가 알아도 상관없다고?
  그 말을 받지 말아야 했는데.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 제 와이프는 제가 이라크에 파병 가 있는 줄 알텐데요. 그런 고약한 거짓말을 기획한 사람은 제가 아니고요.
- 아니, 그 부분 말고. 애비 허니비에 대해서.
  다시 키득거리는 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지금 도대체 무슨 장난질을 하는 건가!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이 잡것들이 월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다시 한 번 몸서리쳤다.

- 그 애가 뭐요? 
- 자네와 살기 시작할 때 성인이 아니었던 건 알지?
-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저랑 15년쯤 차이가 나는 건 사실이고 그 점은 대단히 죄송하지만 (응?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죄인으로 몰아가는 건 아니죠.
- 아니네. 애비아나 델 가도는 자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열살쯤 어려.
- 하지만 작전 파일에…
- 잘못된 정보였어. 
  처음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바싹 타들어갔다.
- 왜 그게…
- 델 타코의 이복 여동생은 멕시코에서 태어났잖아. 그쪽 관청이 뭐 어지간 하겠나?
- 그러면…
- 손글씨로 9와 0은 때때로 상당히 비슷해 보이지? 자, 그래서 자네 와이프가 알아도 된다고? 
  나는 애비 허니비와의 4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떠올렸다. 내가 말했던가? 우리가 백만번쯤 사랑을 나누었다고. 그 말에는 약간 과장된 부분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휴우.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 노스다코다주 헤팅어 카운티의 미러 레이크 애비뉴 근처의 치폴레 매장에서 과카몰리를 만들고 있는 이유다. 그날 밤 나는 짐을 싸 도망쳤다. 잠깐만 머뭇거렸어도 카를로스 델 가도의 똘마니들에게 켈론과 칸탈로프처럼 썰렸을 것이다. (심지어 썰기 전에 산 채로 가죽부터 벗겼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카를로스가 나의 언더커버를 알았다는 것은 NCAA가 의도적으로 내 신분을 노출시켰다는 뜻이다. (버린 패를 처리하는 그들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다섯 개 주를 떠돌다가 결국 여기에 정착했다. 미구엘 페르난디도라는 새로운 이름과 신원을 만들어서. NCAA가 나를 찾을 수 없을만한 곳으로. 카를로스 델 가도도 나를 찾을 수 없을만한 곳으로.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을만한 곳으로.

  껍질을 벗긴 아보카도를 스테인레스 믹싱 보울에 넣고 과카몰리 스매셔로 으깨고 또 으깬다. 소금, 후추를 뿌리고 잘게 다진 양파와 토마토를 섞는데 슬그머니 눈물이 난다. 누가 볼까봐 더 열심히 손을 놀려 섞고 또 섞는다. 샌디에이고에 남겨 둔 애비 허니비가 생각이 난다. 떠나기 전 나는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물론 발끝과 발목과 발등과 발뒷꿈치에도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느껴지던 그녀 온도와 새근거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기억이 난다. 뒤이어 아픈 깨달음이 폐부를 찌른다. (맞아. 다 자란 어른이 그렇게 고양이 동영상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 웨스트베일에 남겨 둔 와이프도 잠깐 생각이 난다. NCAA에서는 늘 하던대로 그들 버전의 ‘번 노티스’를 발행하였을 것이고 (내가 공식적으로는 이라크에 파병간 군인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므로) 가족들에게는 전사 통지가 전해졌을 것이다. 동부 엘리트 집안의 장녀이자 아이비 리그 출신 리버럴인 와이프는 현재 이라크에서 진행 중인 전쟁이 없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21발의 예포와 함께 국기를 절도 있게 접는 영화에서나 보던 장례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와이프는 비슷한 동부 엘리트 부유층 집안의 친구들에게 둘러쌓인 칵테일 파티로 위로를 받을 것이고 아릴랜드식 식탁 위에는 주치니 캐서롤이며 터키 미트로프, 혹은 마카로니 앤 치즈, 어쩌면 치킨 타말 파이가 비닐 랩에 덮힌 채로 산처럼 쌓여 식어갈 것이다.

  치폴레 매장에서 일하다보니 가끔은 카를로스 델 가도의 그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치폴레가 생리 작용에 촉매가 되는 것은 캘리포니아나 노스다코다나 마찬가지니까. 손님들 중에 식사 중에 실수로 가스를 내보내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경우가 있다. 카를로스 델 가도. 가죽을 벗기는 자. 아! 우리가 비록 이렇게 안좋게 끝났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 흥미로운 인물이었고 재미있는 친구였으며, 그의 이 말 만큼은 명언중의 명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치폴레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네, 에르네스토.

  휴! 하루에 과카몰리를 몇 킬로그램이나 만드는 건지! 팔이 저릴 지경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도망자 신분으로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 문제도 있고 놈들이 노스다코다까지 추적해 올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 목적도 있다. 놈들이 매장으로 치고 들어오는 순간에 적어도 나는 빈손이 아닐 것이다. 카를로스 델 가도와 그 졸개들이 나를 찾아내는 날이 오면 일단 나는 과카몰리 스매셔를 들고 버텨볼 것이다. NCAA에서 은밀한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나를 찾아내는 날에도 나는 과카몰리 스매셔를 들고 버텨볼 것이다. 그러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경우를 대비하여 조리대의 아래에는 암시장에서 구입한 스미스 앤 웨슨 44구경 매그넘이 한 자루 숨겨져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 나와 유명해진 모델 29이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도망자가 사용하기에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뭐 사실 크게 상관 없다. 단 한 발. 단 한 발만 제대로 나갈 수 있으면 되니까.

 

(201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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