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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오션사이드는 언제나 맑음

낙농콩단/Season 16-20 (2016-202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9.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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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나의 우상. 지금 남자가 30 피트 앞의 주니어 스위트에 있다. 그리고 나는 방에 들어갈 있는 카드 키를 갖고 있다. 나는 잠시 짧은 몽상에 빠진다. 마치 30 , 그러니까 내가 한참 그를 따라다니던 시절에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는 최고의 상종가를 올리던 밴드의 리더였다.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고 그를 추종하는 수백만 팬들 중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보일 이유는 없다 (, 당연히 그랬다). 하지만 짧은 몽상 속에서 그는 내게 관심을 보인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내가 오션사이드 다운타운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의 1 바에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짧은 몽상 속에서 나는 바로 자리에 있다. 시점에는 내가 아직 미성년자이므로 그는 칵테일을 내게 권하면 안되지만 역시 그런 부분까지 세세히 따지지는 말기로 하자. 이윽고 그는 카드 키를 내민다. 자기가 묵고 있는 주니어 스위트 룸의 카드 키다. 그리고 그는 바를 떠난다. 남은 선택은 오롯이 몫이라는 듯이. 나는 망설인다. 옳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연모하는 스타와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기회를 마다한다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스타라는 이름의 열병을 앓는 십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갈등하면서 올라간다. 갈등하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쭈빗거리며 1피트씩 가까워진다. 그러다 기어코 30 피트 앞까지 왔다. 바로 복도의 끝이 주니어 스위트다. 투숙객의 이름은 던컨. 밴드버클-, 베이비!’ 리더 메인 보컬.

 

  잠시 나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는 한물 로커고 나는 호텔의 메이드다. 남자는 30 피트 앞의 주니어 스위트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방에 들어갈 있는 키를 가지고 있다. 단지 던컨이 내게 직접 건네 키가 아니라 하우스 키핑을 위한 마스터 키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염탐이라도 하듯이 방문 앞까지 걸어간다. 25 피트, 20 피트, 15 피트, 10 피트. 5 피트, 자리에 멈추어선다. 문고리에 걸려 흔들리는 ‘Do Not Disturb’ 표지를 본다. 아래는 선명한 초록색으로 칠해진 ‘Save the Planet’ 표지도 걸려 있다. 벌써 닷새 째다. 남자는 닷새째 밖으로 나오지 않고 닷새째 하우스 키핑을 스킵하고 있다. 프론트 데스크에서도 고객 요청이 있기 전에는 먼저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잠시 자리에 머물다가 나는 클리닝 카트를 돌려 복도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청소해야 다른 방들이 있기 때문이다. 좋거나 싫거나, 내가 해야 일이었고 이제 던컨이나버클-, 베이비!' 낡은 기억의 쓸모없는 조각일 뿐이다.

 

*

 

  ‘Save the Planet’ 캠페인은 투숙객이 하우스 키핑 서비스를 받을지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대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는 제도다. 하우스 키핑의 빈도와 정도를 줄이면 자원의 과잉 투입을 방지할 있으므로 환경에도 기여할 있고 (정말?) 더불어 호텔의 운영 비용까지 절감이 가능하기에 (사실 부분이 핵심이다) 힐튼이나 매리어트나 인터콘티넨탈 같은 거대 체인에서부터 작고 이름 없는 지역 호텔들까지 나름의 방법으로 시행을 늘려가는 추세다. 이제 투숙객들도 굳이 크게 필요를 느끼지 않는 하우스키핑 서비스보단 멤버쉽 포인트 혹은 금액 바우처를 받는 편을 선호한다. 역시 취지에는 십분 공감한다. 솔직히 매일 수건을 바꿀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수건을 한두 사용한다고 일이라도 나나?) 솔직히 매일 카페트 청소를 필요도 없다. 하우스 키핑을 스킵해도 기타 서비스나 어메니티는 요청에 따라 골라 받을 있으니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우리 메이드들 중심으로 생각하자면 조금 복잡한 문제가 된다. 일의 할당량이 줄어드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일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은 결국 일자리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진다. 더불어 눈에 띄게 줄어든 수입도 문제다. 하우스 키핑을 스킵하였으니 그만큼 팁을 적게 주어도 된다는 주장인데, 기본급이 원체 낮은 우리 같은 직종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다. 주위 메이드들 모두 하나 같이수입이 줄었다 하소연한다. ‘이제 그만 때가 되었다 말도 단골 레파토리다. 물론 실제로 자진해서 그만 사람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없다. 우리는 그만 두고 곳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팁이 줄고 수입이 줄었어도 이것이 입에 풀칠이라도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어떤 전문성도, 이렇다 경력도 없는 싱글 맘에게 덜컥 좋고 안정적인 직업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리샤는 올해로 열두살이다. 애가 대학에 들어가 독립할 때까지 앞으로 6년은 남았다. 그때까지는 버텨야 할텐데 또한 마음대로 의문이다. 

 

  하긴 내가 그만 두기 전에 호텔이 망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는 같다. 호텔, 씨스케이프 (Seascape Inn). 창업주가 바다(Sea)라는 단어와 탈출(Escape)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만들었다는 이름. 호텔은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카운티 오션사이드 시의 다운타운에 위치하고 있다. 던컨과버클-, 베이비!’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들의 전성기에 나도 그랬던 것처럼) 호텔에도 찬란한 전성기가 있었다. 근처에 그리 높은 건물이 없던 시절, 크리스탈 비치와 오션사이드 피어가 내려다보이는 좋은 위치에 씨스케이프 인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묵어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유명 인사들이 다녀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퇴임 후의 해리 S. 트루먼, 취임 전의 지미 카터, 피어스 브로스넌, 피터 가브리엘, 그룹 등등. 주니어 스위트 몇몇 방에는 그들의 서명이나 사진이 남아있기도 하다. 좋은 시절이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마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씨스케이프 인은 그냥 한물 록밴드 같다. (‘버클- 베이비처럼?) 이상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늙고 초라한 외양과 쓸데없는 오기만이 남은. 이제는 어떤 방에서도 크리스탈 비치나 오션사이드 피어가 내려다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최상층의 스위트에서도. 오른쪽에는 메리어트 계열 브랜드의 호텔이 생겼고 왼쪽에는 힐튼 계열 브랜드의 호텔이 공사중이다. 하나를 건너면 역사가 오래된 윈드햄 호텔이 있다. 거대 체인에 편입되지 않은 우리 호텔은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인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알리샤가 성인이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은 내가 아니라 호텔일 수도 있다. 이제 씨스케이프 인에서 묵는 유명인사는 없다. C 가수나 D 영화배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쇠락하고 볼품없어진 인생들만 곳에서 만난다. 아니면 정말 극단적으로 예산을 세이브하려는 배낭 여행족. 그래도 씨스케이프 인은 2 호텔로 분류되고 있고 익스피디아 닷컴에서의 평가도 5 만점에 3.2 정도로 , 비교적 선방 중이다. (아마 가격적인 메리트가 적어도 1 가까이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영비는 날로 증가하고 수익성은 떨어지니 자연스럽게 원가 절감의 낌새가 느껴질 밖에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낌새를 가장 먼저 눈치챌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메이드들이다). 하루에 하던 청소를 며칠에 번으로 줄이고, 체크리스트의 확인 사항을 백개에서 열개로 줄이고, 베개 위에 올려놓던 초콜렛을 개에서 하나로 줄이고, 기본으로 제공되던 생수를 병에서 병으로 줄이고기타 등등. 심지어 욕조 청소를 일주일에 번만 적도 있었다. 커피잔? 젖은 티슈로 얼룩만 닦아내고 말았다. 아이스 버켓? 지난 년간 번도 씻은 기억이 없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요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들은 (말이 좋아 ‘Save the Planet’ 캠페인이지) 실상 환경과 아무 연관이 없다. 

 

  7일째. 주니어 스위트의 남자는 오늘도 하우스 키핑을 스킵했다. 이쯤되면 기록적인 사건이다. (직원들끼리 이미 며칠까지 칩거가 이어질지 베팅을 걸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나가고 들어오는 모습을 적도 없다. 담당 메이드인 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보안실 직원이 CCTV 돌려보았는데 체크 정말로 일주일 동안 남자는 들어가고 나간 적이 번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방문객도 없었다고. 나의 클립 보드에는 그가 체크인한 날짜와 프론트 데스크에서 내려온 지침이 싸구려 볼펜으로 대충 흘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있다. ‘절대 방해하지 .’ 그리고 별표가 되어 있다. 장기 투숙 고객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체크인 날짜는 있지만 체크아웃 날짜는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요즘 방에 내고 묵으려는 사람도 없으니 호텔 입장에서 호박이 넝굴채 굴러온 격의 일이기는 하다. 호박이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 문제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담당 매니져에게 일을 보고했다. 따지고 보면 투숙객의 이상 행위를 보고하는 것도 우리의 은밀한 임무 하나이니까. 하지만 매니져는 정작 시큰둥한 눈치다. 던컨이 나름 우리 호텔의 로얄 고객이기 때문에 원하는대로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씨스케이프 인에 특별한 멤버쉽이나 로얄티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볼품없는 호텔에서 통산 324박을 기록한 거의 유일무이한 손님이다.

- 뭐, 주니어 스위트잖아. 별의 사람들이 묵지. 대개는 돈이 많고. 

- 그래서요?

- 뭐가 그래서야. 많고 이상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면 방에서 며칠 동안 나올 수도 있단 거지. 

- 그래도 일주일 째인데요?

- 릭 던킨인가 사람이잖아. 이번이 방에 처음 묵는 것도 아니고.

- 던컨이요. 던킨이 아니라. 

- 뭐가 되었든 간에. 이제까지 체크아웃 적은 없었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 설마 그러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 좋은 ? 무슨 좋은 ? 

  매니져는 잠시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보이더니 이내 실소하고 만다.

- 에이, 그럴리가.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 지금처럼. 

-그냥 지금처럼이요?

- 그래, 지금처럼. 청소 해도 되면 좋잖아. 방이 작은 것도 아니고.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매니져처럼 고정급의 비중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니 있는 말이다. 방에 묵는 손님들은. 대개 팁도 후하게 준다. 씨스케이프인이 이렇게 몰락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니어 스위트 손님들 중에는 번에 10달러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건네주는 경우도 많았다. 청소를 건너 뛰면 팁도 줄어든다. 일주일 연속으로 건너 뛰면 어림잡아 족히 50달러 이상 손해를 보는 셈이다. 스위트 플로어의 유일하게 좋은 점이 바로 팁인데 말이다. 다른 층의 일반 객실을 청소하다보면 팁이 손님도 많고 팁을 놓지 않는 손님도 있다. 관광객이 쓸모없어진 동전이나 놓고 가는 경우도 있다. 요즘처럼 크레디트 카드 사용이 일반화된 세상에서는 동전들은 받아도  곳이 없다. (관광객들에게 동전이 처치곤란이라지만 사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은행에 가서 지폐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은행에 못가면 코인스타라도 찾아서 바꿔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되겠지만 계속 그런 이상한 느낌이 든다. 정말로 좋은 . 혹시 어릴적 우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자연적으로든 아니면 인위적으로든 ( 가지 가능성을 모두 고려한다는 것은 지난 30 가량의 기간 동안 그의 커리어가 얼마나 꾸준히 극적으로 하향 곡선을 그렸는지를 암시한다.) 조금 신기한 것은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났더래도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있을 같단 사실이다. 충격이 없지야 않겠지만 생각보다 크게 충격을 받을 같지는 않다. (,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중고생에게 록스타는 세상의 전부지만 중년에게 록스타는 세상 전부를 제하고 마지막에 남은 우수리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 없어도 딱히 아쉽지 않고 잃어도 딱히 아깝지 않은 . 

 

  알리샤는 중학생이고 따라서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애는 인디 록밴드코경유위삽관 서브 기타리스트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을 세상이 무너진 식음을 전폐했다. (내가 보기엔 놈이 약에 취한 상태에서, 헬멧 없이, 과속으로 달렸으니 정당한 어느 정도는 논리적 귀결이 아닌가 싶다.) 과거 4인조 보이밴드스위트 카르마 사이비 종교에 빠져 루이지애나의 농장에서 단체 음독으로 영생에 이르는 길을 택했을 때도 그랬다. 또래 초등학생들과 함께 동양식으로 영을 기리는 절차를 (행위? 예식? 퍼포먼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유트브에서 배워와 음식을 차려놓고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벌였다. (내가 보기엔 이단 종교에 빠져 앞뒤 구분을 못한 저능아들에게는 바칠 음식조차 아깝다.) 애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이가 들고, 아이를 키우게 되고, 먹고 살기까지 팍팍하게 되면 그런 사건들 따위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정말 던컨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내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 - 주니어 스위트와 층의 담당 메이드로 지어질 도의적 책임들, 겪어야 이런저런 귀찮은 질문들 (경찰에서부터 언론, 그리고 호텔 관리자들에 이르기까지),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다음 결국 방을 쓸고 닦아 원상태로 만들어야 하는 뒤치닥거리의 부담까지. 모든 부담에 비하자면 어릴 우상이 접시물에 코박고 나자빠진 정도는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 고약한 상상에 잠시 빠져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잠시 망설이다가 받는다.

-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부인. 저는 테샤의 엄마인데요. 알리샤의 같은 친구요. 혹시 알리샤가 집에 왔나 해서요.

- 아니요. 저는 아직 직장이에요. 아직 퇴근 전인데.

- 그러시군요. 조금 우리 애를 픽업하러 헉교에 왔는데 없는 거예요. 수소문해보니 애들 말로는 알리샤랑 같이 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붙어다니는 멤버들이라나 뭐라나.

  나도 모르게 끄응 소리를 낸다. 대충 알만한 스토리다. 또래 애들이 나그네쥐처럼 우르르 몰려 다니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종종 있는 일이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테샤라는 아이의 얼굴을 기억해보려고 애쓰지만 솔직히 가물가물하다. 어디 알리샤의 친구가 한둘이었던가. 어쩌면 최근 들어 새로 사귄 친구인지도 모른다. 

- 혹시 알리샤가 연락이 되면 물어봐주실 있을까요? 

- 예, 물론이죠. 그럴께요. 알게 되면 바로 연락드리죠.

- 지금 연락드린 번호가 번호에요. 부탁 드릴께요.

 

  사실 요즘 애들은 휴대전화도 있다. 옛날처럼 소재 파악이 안된다고 걱정할 일도 아니다. 시계를 보니 여덟시하고도 십분인데 그쯤이면 늦은 축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시각이다. 알리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요즘 애들 대부분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지만 받고 싶을 때만 전화를 받는다.) 알리샤가 염려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것은 테샤네 엄마라는 사람의 목소리 속에 은근히 배어 있는 불안감이다. 딸이 새로 사귄 친구를 경계하는 듯한 방어적인 자세. 그리고 친구의 부모에게 일찌감치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마음. 아마 부모가 싱글맘에 2 호텔에서 일하는 메이드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경계심은 커질지도 모르지. 테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학교 친구들은 해변에서 내륙 쪽으로 조금 떨어진 교외 주택 지역에 살고 있을 것이다. 비스타 같은 동네. 아니면 딕시 빌리지, 피르 마운틴, 로마 알타. 해안을 따라서라도 칼스바드 같은 동네. 우리처럼 관광지의 시내 복판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12층을 담당하는 같은 부서의 동료에게 부탁을 했다. 메인터넌스는 마무리했으니 혹시라도 14층에서 무슨 요청이 있으면 처리를 도와달라고.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서로 뒤를 보아주는 것이 메이드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이기도 하다.

- 오케이. 그런데 말이야.

- 그 ?

- 방에 틀어 박혀서 나오지 않는 남자가 있다는 말이야. 주니어 스위트.

- 아! 방이 ?

-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져도 그냥 두고 보자고 했으니까. 그리고 만약 누군가 들어가 봐야 한다면 그건 담당 메이드인 내가 직접 하고 싶었다. (‘버클- 베이비 리더 던컨이어서는 아니고…) 옷을 갈아 입다가 잠시 주니어 스위트의 손님을 떠올리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워버렸다. 당장은 애들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애들이 대충 어디에 있을지는 짐작이 갔다. 오션사이드 아닌가. 다른 곳도 아닌 오션사이드. 따라서 애들이 갈만한 곳도 정해져 있다. 해변, 아니면 피어. 바다는 청소년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 일이다. 나도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나도 시기를 겪었다. 있을 곳이 따로 있진 않다. 해변을 따라 어디에선가 또래 애들끼리 모여 놀고 있을 것이다. 휴대 전화로 케이티 페리나 시아의 히트곡을 틀어놓고 엉덩이와 팔을 좌우로 점점 빨리 흔들어 대며 ( 춤을 뭐라고 부른다더라? 백팩 키드 ?) 자기들끼리 깔깔대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탈 비치에 다다라 천천히 해변을 따라 걷는다. 바다 편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오렌지색 석양을 뿌린다. 저녁 무렵의 바닷바람에 흔들거리는 야자수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다새들이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이미 해변은 관광객들과 청소년들로 빼곡하다. 저녁 이후 산책을 나온 지역 주민들도 보인다. ’버드인지 뭔지 전기 스쿠터의 무리가 곡예를 하듯 군중 사이를 재주 좋게 빠져 나간다. 혹시나 놓칠새라 구석구석 살피지만 알리샤나 눈에 익은 친구들은 보이지 않는다. 애들 또래가 너무 많기에 잠시 피로감을 느낀다. 더러는 해변 화롯가에 불을 피워놓고 둘러서서 백팩 키드춤을 추고 있다. 누가 보던 말던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알리샤와 친구들도 근처 어딘가에서 저렇게 놀고 있을 것이다. 알리샤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받지 않았다. 오션사이드 피어에 이르도록 아이들을 찾아내지 못한 나는 피어를 따라 바다쪽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밀물처럼 나가는 사람들과 썰물처럼 돌아오는 사람들이 피어를 가득 메웠다. 피어의 끝에 방금 네온사인에 불을 넣은 레스토랑루비스 보였다. 대단한 고급 식당은 아니지만 바다 가운데서 식사를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많은 곳이다. 일년에 한두 , 특별한 날이면 곳에 가고는 했다. 오션사이드 토박이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이 있는 장소 하나다. 남편에게 처음 프로포즈를 받은 곳이기도 했다. 식사를 하고 낚시를 했었나 낚시를 하고 식사를 했었나. 그는 바다에서 반지함을 건져 올렸다. 안에 반지가 있었는데 아마 교묘한 속임수를 썼을 것이다. 그는 손재주가 좋았으니까.

 

  어느새 노을은 물러가고 하늘에는 서서히 보라빛 잉크가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피어의 가장자리를 따라 가로등이 켜졌고 가로등마다 낚시꾼이 냉장고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피어의 끄트머리, ’루비스 둘러싼 정사각형 데크에 이르자 낚시꾼들 사이에 꼬맹이들이 보였다. 알리샤와 친구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예상대로 해괴한 백팩 모시기 춤을 추고 있었고 어른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안도하는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 알리샤! 얘들아!  

  애들은 손을 흔든다. 애들 주변의 구경꾼들이 황급히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낚시꾼들은 황급히 낚시대를 물에 드리웠다. 기가 막히는군! 아이들의 밝은 표정이 화를 돋우는 하였다. 마치 내가 찾으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여유가 만만한 표정들. 나는 화를 눌러 참고 아이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병아리 떼가 어미닭을 따라오듯 녀석들은 종종 걸음으로 나를 따라 피어를 거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계속 팔을 좌우로 흔들어 대는 해괴한 춤을 추면서. (맙소사! 미칠 노릇이다!)   

- 저 사람들은 누구야?

- 몰라요. 관광객? 낚시하러 사람들?

- 모르는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있었어?

- 어울리지 않았어요. 우린 그냥 우리끼리 춤을 추고 있었고 아저씨들이 와서 구경한 거예요.

  어느 아이인가가 끼어든다.

- 동영상도 찍었어요. 유튜브에 올릴 거예요!

  피로가 밀물처럼 밀려오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구 말마따나 언젠가 인류가 멸종한다면 그건 유튜브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끔하게 주의를 주어야 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이 애들에게는 말해봐야 소용이 없단 사실 또한 안다. 어차피 귀에 읽기다. 나는 테샤네 엄마라는 사람의 번호로 재발신을 누르고 상황을 설명하였다. 애들 모두 있고. 해변에서 그냥 놀고 있다고. 안전하게 놀고 있다고. 놀다가 정신이 팔려 전화를 받았다고.  

 

- ‘체인스모커스패닉 디스코같은 가수였어요?

  난데없는 알리샤의 질문이었다. 

- 뭐가?

- 스위트룸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단 손님이요. 예전에 엄마가 좋아했던 가수라면서요.

  애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뭐, 그렇다고 해두자. 

  아이들의 눈이 왕방울만해진다.

- 뭐? ’패닉 디스코 동네에 왔다고? 

- 아니, 옛날에 정도 스타였던 아저씨래.

- 옛날 언제요? 5 ? 10 ?

  정확하게 1989년이버클- 베이비 전성기였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늦었다. 얘들아, 빨리 가야지. 부모님들이 기다리고 계셔.

- 와! 엄마들 세대의 패닉 디스코래.

  그러고보면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은 엄마들의 악몽을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 ‘ 체인스모커스,' ‘패닉 디스코,’ ‘머신 켈리’… 솔로, 듀오, 그룹, 밴드를 가리지 않고 죄다. (차라리조나스 브러더스쪽이 안심이 된다.) 물론 그건 옛날에도 그랬다. ‘섹스 피스톨즈그레이트풀 데드데스 큐티 댐드버즈콕스 비교적 최근의그린데이 킬러스까지. 우리 엄마도버클- 베이비 (밴드명에서부터) 질겁을 했었다. 아마 악마의 음악을 하는 작자들이 ( 시절 어른들은 밴드를 이런 식으로 취급했다.) 자기 딸들을 납치해서 야반도주라도 아셨던 같다. (“ 잡아, 자기야!”라고 외치면서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나왔다.

- 엄마, 웃어?

-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빨리 가자. 너무 늦었어.  

 

*

 

  오션사이드는 언제나 맑음. 동네 아이들이 길벽에 스프레이로 그려놓은 그래피티가 보인다. 대개는 사실이다. 오션사이드는 언제나 맑다. 특히 타지역 사람들은 오션사이드에 궂은 비슷한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당연히) 오션사이드에도 궂은 날은 있다. 때로는 지역 특유의 방식으로 험한 날씨가 찾아온다. 강풍을 동반한 폭우. 높은 파도 높이. 심한 날이면 해안 인접 지역 홍수 주의보, 피어 출입 차단, 그리고 서핑 금지령이 따라 붙는다. 많으면 일년에 열흘에서 보름정도 그럴 때가 있다. 바로 오늘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사이로 열을 맞춘 야자수가 나란히 춤을 추었다. 난방을 살짝 올린 실내 공기로 인해 창에는 엷은 김이 서렸다. 이런 날이면 씨스케이프인의 많은 손님들이 방에 틀어 박혀 하루를 보낸다. 자연스럽게 메이터넌스를 스킵하는 손님도 많아진다. 메이져 호텔 체인들은 혹시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작은 호텔에서는 조금 일이 줄어드는 편이다. 담당 복도 청소, 오늘 체크아웃한 손님의 객실 청소, 회수한 수건과 목욕 가운의 세탁 그래도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휴게실에서 엉덩이를 붙일 틈은 있다. ( 호텔을 모래사장으로 만드는 서핑족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일이 정말 10분의 1 줄어든다.) 가끔은 매니져급의 눈을 피해 메이드들끼리 마시고 수다를 시간도 있다. 내리는 오션사이드에서나 가능한 특권이다. 

 

  나는 담당 플로어의 퇴실한 손님의 객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문제의 주니어 스위트 바로 방인데 손님들은 아주 달랐다. 객실에 묵었던 단란한 가족은 쉬지 않고 눈에 띄이는 스타일이었다. (일곱살 쌍둥이 남자 아이들을 데려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고맙게도레이트 체크아웃같은 고약한 요청도 하지 않았고 다음 예약 손님 또한 없었기 때문에 (폭우 강풍 경보 중의 오션사이드는 사실상 개점 휴업이다) 마음이 한결 여유로웠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카펫용 청소기를 돌렸고 유리창을 다닥거리는 굵은 빗소리의 장단을 만끽했다. 큐리그 머신의 캡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보고 몰래 내려 마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매니져에게 걸리면 경을 칠지도 모르지만 이런 내리는 날에 커피 없이 어떻게 버티겠는가. 그때 별안간 호출기가 울리면서 메세지가 들어왔다. 

 

  [ASAP MAHIMAHI]  

 

  ASAP 모두 아는 말인데 보통은 다음에 객실번호가 붙는다. (말하자면너의 담당 객실 호로 빨리 가봐라라는 이야기다) 객실번호가 아닌 경우는 가지 뿐이다. 씨스케이프 인의 스위트 . 창업주와 매니져가 개의 객실에코스탈 트리오,’ 그러니까 해변의 삼총사라는 애칭을 붙여 놓았는데 중의 하나가마히마히이고 그것이 지칭하는 객실은...

- 실레합니다. 미시즈 존스.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열린 객실 사이로 황동색 깡통 머리가 고개를 디밀고 있었다. 투구를 뒤집어 같은 계란형 머리통과 물빠짐 배수망처럼 크고 동그란 메쉬 구조의 , 그리고 뾰족한 코와 우체통 편지 투입함처럼 생긴 입구멍. 맙소사! 로봇이잖아! 그리고 그냥 로봇이 아니라, 그냥 로봇이 아니라

  그건 누가 봐도 C3PO였다. 그러니까,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멀대같은 로봇 말이다. 나는 말을 잃었다.

-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미시즈 존스.

- 아아니에요.

- 저희 마스터께서 미시즈 존스를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잠시 저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 마스터요?

- 그렇습니다. 방에 묵으시는 분입니다. 담당 메이드가 미시즈 존스이시고요.

 

  방이면 주니어 스위트이고 따라서 방에 묵으시는 분은 던컨씨라는 이야기가 된다. 로봇은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인가? 던컨씨에게 로봇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로봇 청소기 아닌 진짜 로봇이 이미 이렇게 돌아다니는 세상이 되었나? (처음 듣는 소식인데 도대체 언제?)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동안 그렇게 방의 상황을 궁금하게 생각했었는데이제와서 정말 방에 들어가기는 선뜻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것도 괴상한 깡통 로봇을 따라서 말이야.)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주니어 스위트는 나의 책임이고 손님의 요청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나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나는 앞치마에 손을 닦고 홀린 사람처럼 그를 따라 나섰다. 

 

 *

 

  다행히 마히마히아니 주니어 스위트는 엉망이지 않았다. 보통 이런 식으로 칩거하는 밉상 손님들은 룸을 개판 오분전을 만들어 놓기가 다반사인데 그런 경우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용 흔적이 있는 침대 정도만 빼면 내가 마지막으로 메인터넌스를 했던 일주일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쇼파 위에 널부러진 (널부러진?) 가죽 껍데기 정도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의 무의식은 시점에버클- 베이비 리더 던컨을 찾아 헤메고 있었는데 어쩌면 강력한 방어기제가 눈으로 광경을 믿지 않도록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랬다. 사실 가죽 껍데기는 사람이었고, 노인이었고, 그것도 아주 나이가 많아 어쩌면 백살도 훌쩍 넘을 것처럼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요다와 일대일로 대결을 벌여도 좋을만큼 주름이 대단했고 (오해는 마시라. ’스타워즈레퍼런스를 반복하는 것은 의도한 부분은 아니다. 다만 깡통 로봇의 이미지가 각인된 이후 의지와는 다르게 생각이 그쪽으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앙상하여 뼈가 드러난 부분과 앙상하나 뼈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으로 이루어진 노인은 게슴츠레하지만 튀어나온 작은 눈을 땡그르르 굴렸다. 잠시 눈이 마주친 같았는데 내가 먼저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음저기요? C3PO? 누가 모셔오라고 하셨다고

  [ 이름은 C3PO 아니야. ’씨쓰루핍홀이지.]

  노인이 끼어들었는데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작아 귀를 기울여 집중해야만 비로소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마치 소리내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뭐랄까? 전음 비슷한 것을 통해 머릿속으로 전달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씨 뭐라고요?

  [씨쓰루핍홀. 이름 그대로야. 완전 변태 같은 놈이지.]

- 마스터 던컨. 그건 오해입니다. 저는 그냥 주인님이 걱정되서 들여다 뿐입니다.

  씨쓰리피오를 닮은 로봇 씨쓰루핍홀이 변명을 했다. 황급하게.

  [! 그래? 내가 걱정되서 작은 구멍을 뚫고 샤워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고? 말을 누가 믿겠어!]

  하지만 이내 노인은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하긴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제 없이는 혼자 샤워도 못하는데 말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마치 가면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가면은 과장되게 움직였다. 흡사 얼굴의 모든 주름을 ( 많은 주름을!) 사용해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같았다. 분명 로봇은 그를 마스터 던컨이라고 불렀다. 주니어 스위트 투숙객. 그리고 그는 로봇을 (C3PO 아닌씨스루핍홀이라는 이름의 로봇을) 자신의 요양 보호 로봇이라고 소개했다. 정확히는작은 구멍을 내고 자기 샤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요양 보호 로봇라고 했다.

 

  나는 던컨이 (80 후반십대 소녀들의 우상으로 통했던 바로 던컨이) 마른 장작깨비 같은 노인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받아들일 있었다. (그러니까 프론트 데스크 CCTV 찍혔다는 남자는 던컨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던컨씨의 매니져이자 자산관리사라고 했다.) 이제 록스타가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이자 없어도 딱히 아쉽지 않고 잃어도 딱히 아깝지 않은 존재) 그의 나이 모습에 조금은 충격을 받았던 같다. (게다가 요다보다도 주름이 많잖아!) 어디에선가 서글픈 마음이 밀려들어 왔다. 스타도 팬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지만 시간의 세례는 보통 팬들쪽에게 유효한 것인 알았다. (가령 로드 스튜어트나 배리 매닐로우를 ! 우리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타임 라인 위에서 고운 할아버지가 되어 늙어가고 있잖아.) 그런데 이쪽은 세월이 드러나는 정도가 아니라 정통으로 두들겨 맞은 느낌이랄까. 보통 사람들 대비 3배속쯤으로 압축해서 맞은 것처럼 늙어버렸다. 심지어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 보호 로봇이 (도대체 뭐가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필요한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는 무슨 일로?]

  요다의 얼굴을 왕년의 꽃미남이 말했다.

- 아, 손님이 부르셨지 않습니까. 들어오라고요.

  [맞다, 그렇다. 내가 깜빡했다.]

  맙소사! 정신까지 오락가락하는 거야?

- 마스터 던컨, 마스터께서는 서비스를 시키려고 하셨습니다.

  씨쓰루핍홀이 지적해주니 그제서야 던컨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가면을 뒤집어 같은 묘한 느낌이 드는 함박웃음. 

  [맞다. 서비스. 그렇지.]

  서비스 때문에 담당 메이드를 부르는 손님은 없다. 룸에 비치된 전화를 들고 내선 0번을 누르면 되는 일이다. 전화로 주문하시라는 설명을 해주어야 할까? 그는 씨스케이프인의 VIP인데 (통산 324 기록에 빛나는) 그걸 몰랐을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메모지를 꺼내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 어떻게 주문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씨쓰루핍홀이 끼어들었다.

- 미스터 던컨께서는 피넛버터 젤리 샌드위치를 드실 겁니다. 그런데 피넛 알러지가 있으니 피넛 버터는 빼주십시오. 그리고 젤리 알러지도 있으니 그것 또한 빼주십시오. 

  내가 잠깐 멈칫하는 사이에 (나도 어렸을 때는 훨씬 두뇌 회전이 빨랐는데 말이다) 던컨이 먼저 폭죽같은 웃음을 (소리 없이) 터뜨렸다. 뒤이어 씨쓰루핍홀도 박장대소하며 손으로 배를 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던컨씨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고 있으면서) 그제서야 내가 완전히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이 없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담당인 주니어 스위트에 아무 일도 없어 아무튼 다행은 다행이었다. 나는 다시 나가려고 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을 던졌다.

- 던컨씨. 사실 예전에 제가 팬이었어요. ‘버클- 베이비. 그러니까 30년쯤 전에 말이죠.

  노인네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했다. ‘아니, 아직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라는 표정. 그러더니만 너무도 흡족하게 마른 장작깨비 같은 손을 들어 흔들었다. (흔들었다기보다는 올렸다가 떨어뜨린 같기도 하고.) 씨쓰루핍홀이 중력을 거슬러 노인의 손을 잡아 들어 좌우로 흔들어 주었다.

  [그럼 팬서비스라도 해드려야지. 얼마만에 만나는 팬인데.]

- 맞습니다. 마스터 던컨. 얼마만에 만나는 팬인데 서비스라도 해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래라도 뽑을까?]

- 노래라도 뽑으시는게 좋겠습니다. 마스터 던컨.

 

  씨쓰루핍홀은 가방을 열고 디지털 키보드를 꺼내 잡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가장 위에 놓여있던 잡지의 헤드라인은오션사이드에서 방문하여야 명소 10이었다) 그리고 던컨씨를 번쩍 안아 들었다. 모습이 너무 가뿐하게 보여 비현실적이었다. (마른 장작개비가 다른 마른 장작개비를 들어올렸어!) 로봇은 공을 등뒤로 돌리는 농구선수의 묘기처럼 노인을 뒤로 보냈고 (맙소사! AGT, 아메리카스 탤런트라도 내보내야 장면이다) 노인은 힙색처럼 로봇의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씨쓰루핍홀은 디지털 키보드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음이 맞는지 보려는 딩동거렸고 (? 디지털 아닌가?) 이윽고 익숙하게 연주를 시작했다. 약간 어색하게 좌우로 어깨를 흔들고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하는 꼴이 무슨 전위 연주의 대가라도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로봇이 로봇처럼 행동하고 있는 같기도 하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로봇은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건반을 또르르르 흝었다.

- 마스터 던컨, 저는 준비 끝났습니다.

  뒤에 매달린 던컨씨가 (헤벌쭉) 함박웃음을 지어보이고 (콜록콜록) 목청을 가다듬었다. 물론 소리는 모기 기침 소리만큼 작게 들렸지만 말이다. 씨쓰루핍홀이 뭔가 깜빡 잊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던컨씨도 부축해서 일으켰고 자신의 뒤에 바싹 붙여 세운 다음에 자신의 허리춤에서 혁대를 풀러 자신의 몸과 던컨씨의 몸을 둘러 단단히 묶었다.

- 마스터 던컨, 확성기능을 쓰십시오.

  [어디지? 어떻게 해야하지?]

- 제 흉추뼈 T3번에 울대뼈를 가져다 대십시오.

 

  확성 모듈이 어디에 있어도 이상하겠지만 복판에 있다는 것도 애매한 일이었다. 던컨씨는 자리에 자기 목젖을 붙여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워낙에 몸이 물오징어처럼 늘어지고 스스로 지탱할 기력이 없으니 여간 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느릿느릿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과정은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보다 못한 내가 그를 잡아 씨쓰루핍홀의 등판에 (흉추뼈 T3번에) 목젖을 붙일 있도록 도와주었다. 여전히 엉성하기 짝이 없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같았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구색은 갖춘 했다. (던컨씨는 앙상한 팔로 있는 힘껏 자신의 전용 요양 보호 로봇의 엉덩이를 잡고 있었다. 만에 하나 놓치기라도 하면 나는 것처럼.)

  [ 염병할 놈아! 박자는? 박자를 줘야지.]

- 알겠습니다, 마스터.

 

  씨스루핍홀은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었다. 하나님, 맙소사! 남자 둘이 (아니, 로봇 하나와 남자 하나이기는 하지만) 나란히 붙어 서서 엉덩이를 일정한 박자로 앞뒤로 흔드는 광경은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남사스러움을 불러 일으키기에 (단언하건대)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뭔가 마디 하려는 순간에 노래가 시작되었고 나는 깜짝 놀랐다. 죽어가며 앵앵대던 노인네가 갑자기 매력적이고 풍부한 저음의 바리톤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I close my eyes, then I drift away
Into the magic night, I softly say
A silent prayer like dreamers do
Then I fall asleep to dreams, my dreams of you
In dreams I walk with you, in dreams I talk to you
In dreams you're mine, all of the time
We're together in dreams, in dreams

 

  로이 오빈슨. 우리 엄마는 그를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지. 노래 한 곡을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불러내는 남자라고. 릭 던컨이, 한때 ‘버클업, 베이비’의 프론트 맨이었지만 이제는 완전 한 물 가서 사람들에게 다 잊혀진 릭 던컨이. 지금 이 순간 전설의 로이 오빈슨 뺨을 때릴 정도로 환상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내 눈 앞에서. 믿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들이 서로 바싹 붙어서 (슬로우 고고 템포로) 앞뒤로 히프를 흔들고 있단 사실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역사상 가장 기괴하고 몽환적인 발라드 ‘In Dreams’가 그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반쯤 장엄하면서도 반쯤 허무한 피날레에 다다르자 (이 대목에서 씨쓰루핍홀은, 따따따 따따따 부서지도록 건반을 두들겼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들은 공연을 마친 마술사처럼 과장되게 고개를 숙여 관객의 성원에 보답했고 그 과정에서 던컨씨는 연체동물처럼 미끄러져 훌러덩 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로봇의 팔에 아슬아슬하게 잡힌 채로 틀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던컨씨가 내게 말했다.

  [아가씨도 한 곡 뽑아봐요.] 

- 제가요?

  [내가 빅 오처럼 노래할 수 있다면 또 혹시 알겠소? 아가씨는 쌔씨처럼 노래하게 될지.]  

  씨쓰루핍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렇습니다. 미시즈 존스. 제 뒤에 한 번 붙어보세요. 제 흉추 3번에 목젖을 붙이고요.

- 괜찮아요. 다음에, 다음 기회에요.

  극구 사양하는데 갑자기 노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을 앙 다물고 급한 사람처럼 로봇의 어깨를 때렸다. 공중에 떠 있는 다리도 허공을 버둥거렸다. 덜컥 겁이났는데 씨쓰루핍홀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 알았어요. 마스터. 노래도 뽑았으니 시원하게 푸푸를 보실 시간인 같습니다.

- 푸푸요? 그게 뭔데요?

  말은 물어보지 그랬다.

- 푸푸. 저희 마스터께서는 노래를 하고 나시면 대장 운동이 활발해진답니다. 덕분에 변비는 없으시죠.

  그들이 화장실로 들어간 사이에 나는 쇼파에 주저앉았다. 약을 주더니 기어이 병도 주는군. 아주 끝내주네. 어릴 우상의 배변활동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겠어. 방에 돌아가면 매니져에게 걸리든 말든 커피는 마셔야 판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미니바에서 미니어쳐 콜렉션에 손을 대야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테샤네 엄마의 번호였다. 설마하는 마음 그대로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내용의 전화였는데 문제는 강풍과 폭우로 해변이 패쇄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테새네 엄마는 지금 애들 엄마들이 모여서 시내쪽로 출발하려고 하고 있는데 교외에서 들어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같으니 가까이에 있으면 먼저 찾아봐 달라고 말했다. 당연히 가까이에 있는지 알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던컨씨와 씨쓰루핍홀과 시선이 마주쳤다. 통하 내용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 미시즈 존스. 해변은 강풍과 폭우로 지금 안전하지 않습니다.

  [ 염병할 놈이 맞아. 아가씨 혼자서 어쩌려고?] 

- 방법을 찾아봐야죠. 

  던컨씨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혹은 그냥 목뼈가 흔들렸던 같기도 했다.

  [걱정 마요. 우리가 도와주리다.]

- 뭘요?

  [아가씨는 지금 하려는건데?]

- 애들을 찾으러 간다고요.

  [그러니까, 바로 그거. 그걸 도와주겠다고.]

- 맞습니다. 미시즈 존스. 우리가 같이 가겠습니다.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날은 어둡고 밖에는 비가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는 중이었다. 애들이 따라간 낚시꾼들이 어떤 인간들인지를 모르지만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혼자 가는 것보다 누구라도 있으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깡통 로봇과 연로하신 왕년의 록밴드 리더가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난감해 하며 미적거리는 사이에 그들은 나갈 채비를 하느라 한바탕 난리굿을 벌였다. 로봇은 노인의 옷을 갈아입히고 위에 노란색 비옷을 씌웠다. 막말로 해골바가지에 비옷을 입힌 격이었다. 그리고 다시 노인을 업었고 멜빵과 혁대를 조여 등에 단단히 묶었다. 내가 뭐라 허락하기도 전에 그들이 앞장섰다. 나는 이기는 따라나섰다. 

 

  오션사이드는 언제나 맑음. 하지만 간혹 고약한 날씨도 우리 동네를 찾아온다. 날이 바로 오늘이다. 바람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빗물은 화살처럼 쏟아졌다. 우리는 굴다리와 홍수 경계선과 경고 표지판을 따라서 달렸다. 나는 뜀박질을 (어쩌면 정말 오래간만에) 하고 있었고 씨스루핍홀은버드라는 이름의 전동퀵보드를 타고 옆을 나란히 달렸다. 그럼 우리의 록스타 던컨씨께서는? 씨스루핍홀의 등에 업혀 아기 코알라 혹은 아기 보노보처럼 매달려 있었다. 로이 오빈슨의 노래 가사와는 조금 차이가 있군. ( 속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속에서, 나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빗물 사이로 힐끔힐끔 던컨씨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빗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알멍충이처럼 헤벌쭉 웃고 있는 얼굴을. 염려가 되었다. 만약에 위험한 상황이라도 벌어진다면 백발노인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 (, 물론 깡통 로봇은 없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잠시 옛날 생각도 했다. 남자가 매력을 과시하면 (그러니까 상의를 입지 않은 상태로) 무대 위에서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그러니까전자기타 박살내기라던가인간 동력분무기라던가) 보여주던 시절의 모습을. 향후 솔로 데뷔를 하고 나면 데이비드 보위, 프랭크 자파, 앨리스 쿠퍼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되던 록스타를. 그리고 순간 세월의 무게를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그때 나는 십대 중반이었는데 이제 사십대 중반이 되어 있고 같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 남자는 삼십대 중반이라고 속였기 때문에 지금 무려 백살이 넘은 노인이 되어있다. (아니! 양반이 나이를 속여도 적당히 속였어야지!) 그에게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시간의 흐름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30 동안 특별히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던 하다. 가끔은 사는 그런 식이다. 텔레비젼을 켜놓고 잠든 것처럼 허무하게 시간이 흘러간다.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장의 스틸 사진 같은 기억은 실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이나 상상의 산물이었는지 때로는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남편에게 받았던 프로포즈처럼. 그리고 알리샤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잃은 것처럼. ’버클- 베이비 던컨과 그의 (충성스러운) 요양 보호 로봇과 함께 속의 피어를 달리는 장면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기억이다. 내게도 번은 분기점 같은 것이 있었다. 2 호텔의 메이드로 일하며 손님들이 주는 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 어쩌면 다른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총천연색 반짝이가 뿌려진 같은 다른 길이.

 

  피어의 끝은 비워져 있었고루비스레스토랑은 문을 닫았다. 강한 빗줄기는 북을 치듯 피어의 바닥을 북을 두들겼다. 밀려오는 파도는 피어의 양끝을 적셨고 사열한 가로등은 눈물을 흘렸다. 사람이라고는 찾을 없었다. 바다새들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빗물의 짭조름한 맛에 얼마나 흠뻑 젖었는지 깨달았다. 씨쓰루핍홀의 황동 표면에도 물기가 어려 반짝거렸고 던컨씨의 얼굴은 쏟아지는 빗물에 퉁퉁 불어가는 중이었다. (요다에 버금가던 주름이 조금 줄어들어 페시 정도의 주름으로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우리는 하릴없이 거꾸로 돌아 육지쪽으로 향했는데 50 미터쯤 남은 지점에서 (유명한 피쉬 칩스 가게 타코 보일 무렵에) 던컨씨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같았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로 인하여 정확히 듣지 못했는데 씨쓰루핍홀이 재빠르게 옮겨 전해주었다.

- 마스터 던컨께서 말씀하시길, 날씨에도 낚시를 하는 미친 놈들이 있답니다.

 

  로봇이 가르키는 방향을 보니 피어의 아랫쪽으로 낚시대 개가 빠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고래가 물었어도 그렇게 미친듯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날씨에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낚시를 하겠는가? 바로 우리가 찾던 무리들이 맞을 거라는 감이 왔다. 그렇다면 아이들도 가까이 있을 것이었다.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역시 비바람 속에서 다른 어떤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난간을 뛰어 넘어 피어의 아래쪽으로 뛰어 내렸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이들은 그곳에 있었다. 정체 불명의 남자들도 자리에 있었다. 며칠 전에 아이들이 어울리던 남자들인 같기도 하고 아닌 같기도 했다. 어쨌든 아이들과 남자들은 나란히 서서 백팩 키드 춤을 연습하고 있었다. (하나님 맙소사! 나이 또래 애들에게는 무슨 전염병이라도 도는 거야?)   

- 얘들아, 여기서 뭐하고 있어?  

  알리샤와 아이들이 쪽으로 뛰어 왔다. 물에 흠뻑 젖은 새앙쥐 꼴을 하고서. 집집마다 아이들을 씻기려면 더운 물을 욕조 가득 받아야 판이었다. 남자들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능청스럽게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 비가 많이 와서 우리가 여기로 데려왔어요. 피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가 집에 보내려고요.

  말이 거짓말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서핑 주의보에 홍수 경계선 안쪽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공지한 날인데 말이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들은 걸음 다가왔다.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겁을 먹은 티를 수도 없었고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

-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 뭐라고요? 아줌마? 들려요!

  목소리를 높여본들 서로 알아듣기도 어려울 것이다. 섞을 것도 없이 그냥 서둘러 빠져나가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순간 남자 하나가 갑작스럽게 다가와 어깨를 움켜쥐었고 (얼마나 힘이 센지) 어깨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공포와 두려움이 몸의 핏줄을 타고 요동을 쳤다. 알리샤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 엄마를 놓아주세요?) 다른 아이들도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그러지 마요?) 하마터면 나도 소리를 지를 뻔했다.

 

- 선생님, 치우십시오. 

  때마침 길을 돌아서 내려오던 던컨과 씨쓰루핍홀이 도착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일행이라고 안도감이 들었다.

- 이 깡통은 뭐야?

- 뒤에 매달려 있는 노인네가 있는데? 

  남자들은 로봇을 비웃었다. 아기 코알라 혹은 아기 보노보처럼 혹은 작은 힙색처럼 로봇의 뒤에 매달려 있는 던컨씨를 두고도 배꼽을 잡았다. 다행히 내버려두더니 씨쓰루핍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나는 알리샤와 아이들을 조금식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씨쓰루핍홀에게 놀라운 힘이 있기를. 로봇답게 놀라운 힘으로 나쁜 사람들을 던져버리고 그런 능력이 제발 있기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냥 노인을 돌보는 평범하고 선량한 요양 보호 로봇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냥 노인과 로봇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올드맨 ...쓰루핍홀?) 머리가 지끈거렸다. 

- 요즘 사람들은 정말 예의가 없으십니다.

- 그러는 너는 요즘 사람이냐? 어디서 굴러온 깡통이냐? 

- 굴러온 없습니다. 걸어왔습니다.

  [거짓말마라. 염병할 놈아. 전동 퀵보드를 타고 왔잖아.]

- 이것봐라. 꼴에 세트로 농담도 하네. 죽을래?

- 아닙니다. 살고 싶은데요.

 

  남자가 씨쓰루핍홀을 강하게 밀쳤다. 로봇은 넘어지면서 던킨씨가 다치지 않도록 몸을 틀었다. 다시 남자들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이어지는 했다. 남자들은 힘으로 싸우고 로봇은 입으로 싸웠다. (누가 남자들과 대거리를 주고 받으라고 데려왔냐는 말이다.) 아이들은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남자가 있어 뭔가 힘의 균형이 맞고 견제가 같다는 생각은 아마 틀렸던 싶었다. 사내들은 씨스루핍홀의 멱살을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붙잡고 흔들었고 가엾은 로봇은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인형처럼 흔들렸다. 덩달아 던컨씨도 폭풍 속의 비닐봉지처럼 헐레벌떡 나부꼈다. 애들을 뒤로 보내고 막아선 유일한 보호자로 나는 잠시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로 인해 곤경에 빠진 저들을 두고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아이들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알리샤가 내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내려보니 입 모양으로 경찰차가 오고 있다는 뭐 그런 내용인 것처럼 보였다. 무작정 난간을 타고 뛰어 넘어오기 전에 그 생각을 먼저 했어야 했단 생각에 살짝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나는 가까스로 한숨을 쉬며 아이의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  

 

  아이들은 무사했고 각자 부모를 따라서 집으로 돌아갔다. 딕시 빌리지로, 피르 마운틴으로, 비스타로, 칼스바드로, 로마 알타로. 시내에 남는 가족은 우리 밖에 없었다. 씨쓰루핍홀은 어깨와 옆구리를 포함한 여러 곳이 찌그러졌지만 어렵지 않게 수리받을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던컨씨였다. 고령에 비를 많이 맞고 타박상까지 입은 왕년의 록스타는 결국 비스타 근처에 있는 트라이시티 종합병원에 입원을 밖에 없었다. 보름쯤 지난 던컨씨가 나와 알리샤를 부른다고 연락을 받았다. 병실에 찾아가니 말끔하게 수리를 마친 씨쓰루핍홀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 어서 오십시오, 미시즈 존스. 그리고 꼬마 아가씨. 

  온갖 장비와 도관에 이리 저리 연결되어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던컨씨의 모습은 예전보다 딱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것이 책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게스츰레하게 눈으로 우리를 맞았지만 안에는 반가움이 서려있었다. 알리샤가 함께 것을 크게 기뻐했다. 그는 보름 전의 모험을 (분명 모험이라고 말했다)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비록 그래서 건강이 악화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지난 10년여의 시간 동안 그렇게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는. 무슨 시한부 다루는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만한 소리였다. 

-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안녕, 반가워. 네가 알리샤로구나.]  

- 네, 이름이 알리샤에요.   

  던컨씨는 링거를 맞지 않는 쪽의 손을 내밀어 알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할아버지가 옛날에체인스모커스만큼 인기가 많으셨어요?

  [체이.. 체이스은행이 어쨌다고?]

- 마스터 던컨,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듀오의 이름입니다. 은행이 아니라. 

  던컨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뜻처럼 보였다.

- 할아버지, '패닉 앳 더 디스코'는 아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에요.

  [페니 마샬의 디스코 파티에 너도 갔었다고?]

  보다 못한 씨쓰루핍홀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 마스터께서 오늘 미시즈 존스와 우리 꼬마 숙녀분을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 그게 뭔데요?

  [선물을 주려고.]

- 선물이요?

  [그래서 선물. 염벼아니 고철덩어리 녀석을 너희 가족에게 보내려고 한단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전화로 이미 오갔던 이야기였다. 던컨씨의 매니져 자산관리인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버클- 베이비 프론트 맨이었던 남자에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같지 않다는 말로 에둘러 이야기를 전했다. 말은 슬펐지만 나는 로봇을 입양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부정적이었다. (애는 하나로도 충분히 감당이 안되었다.) 그러자 던컨씨가 나와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던컨씨가 나와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백살이 넘은 나이에 병원에 한 번 체크인을 하면 다시 체크아웃을 하기는 글렀다는 말을 했고 병원 안에서는 요양 보호 로봇이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지적했다. 그러니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망할 고철 덩이를 위해서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다. 좋은 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은근히 여러 모로 쓸모가 많다면서. 귀찮은 집안일도 도맡아 하는 것은 물론, 춤과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고 (이미 확인한 것처럼) 피아노도 곧잘 친다고. 단지 샤워 커튼에 구멍을 뚫고 몰래 샤워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못된 버릇이 있으니 점만 조심하라고. 그리하여 과거 여고생 팬과 무대 록스타였던 우리의 관계는 오늘 호텔 메이드와 은퇴한 록스타 사이가 되었고 끝내 (로봇) 양도인과 (로봇) 양수인이 되고 말았다.  

- 짱이다. 이 삼촌은 이름이 뭐에요?

  [ 녀석 이름은 씨쓰…]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던컨씨가 눈치를 채고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에 알리샤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이 녀석 이름은… ‘빅 오’란다.]

- 비고요? 비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가 미소를 짓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눈과 눈이 그 순간 마주쳤고 뭔가 통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단 둘이서만 알 수 있는 암호처럼. 샌드맨이 몰래 뿌려놓은 총천연색 마법의 가루가 어느 순간 우리의 꿈을 하나로 연결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꿈 속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속에서, 나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속에서, 당신은 나만의 것이고. 우리는 내내 함께이지, 속에서, 바로 속에서.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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