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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고백해야 하는데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4.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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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이런걸 물어보는게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만약에 5분 뒤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물론 당신이 받았던 질문이 이와 정확하게 같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저 밤하늘의 별보다도 많고도 많은 수정 및 응용형 질문 유형이 존재하니까.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남아있는 시간이 '5분'이 아니라 '10분'이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시간이 '10분'이 아니라 '1분'이었을 수도 있다. 또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물었을 수도 있고,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버릇없이) '뭐냐?'로 질문을 맺어버렸을런지도 모른다. 심지어 '당신의 눈 앞에 공중전화가 있고 주머니 속에는 백원짜리가 딱 한 개 남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수 분 이내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가장 전화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는 식으로 쓸떼없이 디테일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간에. 그런 류의 질문을 한두 번쯤은 맞닥뜨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다. 서기 1990년대에는.


2. 긴급속보다. 긴장하고 들어주시라. 풀린 눈은 좌우로 팽팽히 잡아당겨 안내섬광이 모니터를 뚫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을 주도록 하고, 아무리 빳빳한 종이라도 단번에 반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콧날을 바싹 세우자. 다만 보톡스에 얽힌 아픈 사연이 있는 이들이라면 상기 두 과정에서 너무 힘을 주지 않기를 권한다. 그게 잘못되면 내가 지금 전해줄 긴급속보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황이 펼쳐지고야 말테니까. 그리고 이제 입, 이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놀란 나머지 이빨이 강냉이 튀어 나가듯 나갈 수가 있으니, 윗니와 아랫니를 꽉 깨물어 붙이도록 한다. 혀를 깨물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복싱 선수들이 사용하는 마우스피스라도 끼우고 와라. 이제 다들 준비가 되었는가? 그럼 공개하도록 한다. 


3. 지구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소식이다. 지금으로부터 24시간 후에. 


4. 아마 질문하고 싶은게 많을 것이다. 앞뒤없이 냅다 사람들을 불러다놓고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떠벌리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만도 하다. 나는 그 모든 의문에 성실히 답해줄 충분한 의사를 가지고 있다. 단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받겠다. 차례차례 줄을 서서 번호표를 뽑아들고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교양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로 질문을 해 주길 부탁드린다. 교양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이나, 교양있는 속물들이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이나, 교양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부산말, 교양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고대 서울말, 아기 얼룩말이나 제주 조랑말, 그리고 에스페란토를 비롯한 기타 외국어로의 질문은 정중히 사양한다. 이 점만 지켜준다면 얼마든지 열과 성을 다해서 내가 아는만큼 답해줄 것이다. 절대 이 글의 말미는 '이 글을 복사해서 한 시간 내에 다섯군데에 올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어쩌고 저쩌고.' 따위의 저주로 끝나지 않음을 믿어주었으면 한다. 지구가 멸망하면 저주고 뭐고 다 소용 없다니까. 


5. 다만 당신들이 질문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질문을 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그 질문에 내가 답을 하는 동안에도 (똑! 딱! 똑! 딱!) 시계가 간다는 사실은 잊지 마시길 바란다. 민방위 훈련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한번 반복한다. 지구는 지금으로부터 24시간 이후에 멸망한다. 나중에 가서 괜히 나 때문에 소중한 24시간을 허비했다고 원망해서는 안된다. 그런 소리나 듣자고 당신들에게 이 중대한 비밀을 일러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질문을 꼭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 사람들, 설사 시간을 이렇게 다 써버리더라도 궁금한걸 물어보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 사지가 배배 꼬여버릴 것 같은 사람들, 어차피 24시간이 남아도 할 일이 없으니 여기서 한가롭게 이야기나 나누고 싶은 사람들, 마감이 24시간 이내에 닥쳐서 그 전까지 기사를 써내어야 하는 기자님들 (이런 상황에서도 신문을 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마지막 날인데 마감을 어긴다고 설마 편집장이 댁들을 죽이기야 하겠나?) 이라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나도 입이 아프니까. 내 말을 믿던 안 믿던 그건 당신들 자유다. 하지만 나라면 지금 여기서 바보같이 '지구가 멸망하는 이유'나 물어보려고 기다리지는 않겠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나?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택시를 잡지. 내가 너무 일찍 말했나? 24시간이 너무 길어서 감이 잘 안오나 보지? 차라리 딱 10분만 남겨놓고 말해줄 걸 그랬다. 그럼 정신이 번쩍 들텐데. 


6. 아직도 여기 남아있는 당신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지구가 23시간하고도 (잠깐 시계 좀 들여다보고) 정확히 56분 후에 망한다니까. 지금 볼펜이고 노트고 마이크고 노트북고 다 그대로 두고 뛰쳐나간 기자양반들 못 봤나? 이제 아마도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 그 전에 하고 싶은 것도 없나? 지구가 망한다는데 아쉬운 것도 없나? 그러기에 진작에 친구를 좀 사귀지. 당장 달려가서 손을 꼬옥 잡고 함께 도망칠 애인도 없나? (하긴 도망쳐봐야 지구가 망하는 판에 도망칠 곳이 없기는 하다.) 그래도 지구 최후의 순간을 따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건 ‘빼빼로 데이'나 ‘고래밥 데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중요한 날이라는 말이다. 하다못해 짝사랑이라도 없나. 당장 달려가서 한번은 고백해봐야지 않겠나. 지구가 멸망하기전에 서둘러서. 그러다가 우리 사이 어색해질까 두렵다고? 24시간 후에는 '너희 사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 지구가 망하면 쪽팔림이고 어색함이고, 나발이고 다 먼지로 돌아간다니까. 물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당신은 '좋은 친구로 남고 싶었는데……. 내가 괜한 짓을 했나봐' 하고 한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좋은 친구로 남으나 남지 않으나 매한가지로 지구가 망하면 모두 끝이다. 그러니까 어서 달려가 보라는 말이다. 과감하게 고백해보란 말이다. 까짓거 한 번 살고 가는 인생, 내일이면 지구도 없는데 쪽팔린게 뭐 대수냐는 말이다.
7. 그도 아니면 가슴에 맺힌 한 같은 것도 없나. 이를테면 선생에게 원한이 사무쳐 이를 벅벅 갈며 졸업식만 기다리는 고등학생처럼, 뒤끝을 감당하지 않아도 좋을 ‘그 날이 오면' 언제고 과감하게 한 번 손을 봐주려고 했던 원수같은 이도 없었나. 직장 상사나 군대 선임, 못된 친구. 언제고 한 번 혼쭐을 내주어야지 다짐한 적은 없었나. 잘 다듬어진 육모 방망이나 공사장에서 방금 막 가지고 나온듯 따끈따끈한 쇠파이프,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자동차 트렁크에 숨겨두지는 않았나. 그랬다면 축하한다. 지구가 절단나기 일보 직전인 지금이 바로 '그 날'이 아닌가. 그 날이 왔으니 두 팔 벌려 만세를 부르고 차를 몰아 웬수덩어리들을 찾아가라. 그리고 원하는대로 '아작'을 내버려라. 십년 묵은 체중이 쑤욱 내려가도록. 지구가 망하는 판에 그 체중, 그 똥배, 모두 그냥 가지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 운이 없어 경찰에게 잡혀 쇠고랑을 차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내일이면 범법자이거나, 아니거나 모두 먼지가 되어 우주 저 멀리 날아갈텐데. 


8. 아, 그래도 당신들은 이 자리에 남아있다. 진심으로 그 지독함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9. 정말 대책없는 당신들. 최소한 '예금 잔고'는 있을 것이 아닌가. 당신들은 이제껏 지구가 당장 망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테니까, 맛난 것도 사먹고 좋은 차와 좋은 집도 사려고 열심히 꿍쳐둔 돈이 조금은 있을게 아닌가. 그거 그렇게 두어서 뭐할건가. 지구가 망해도 최소 오천만원까지는 예금자 보호가 적용될 줄 아는건가? 지구는 은행 이름이 아니다. 망한다고 세금을 끌어다 지원해줄 정부도 없고, 거액을 들여 합병해 줄 다국적 기업도 없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로 지구가 망하면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도 못 건진다니까. 당신들은 그동안 힘들게 일해서 은행들 배만 불려준거야. 얼른 달려가서 몽땅 찾아다 써야하지 않겠어? 까짓거 지구가 망하면 몽땅 게임 오버인데 마이너스 통장도 개설하고, 카드도 될대로 되어라 마구 긁어보고, 그러다보면 신용불량자가 되겠지만, 그러면 뭐 어때. 지구가 망하면 신불자(信不者)나 불신자(不信者)나 다를게 없다니까. 이제껏 그 돈 모으느라 못 먹고 못 입었던 한, 지구가 망하기 전에 다 풀어야지. 내일이 없는 마당에 그게 위로가 되겠느냐만은 그래도. 어쩌면 '정말 정말 맛있는 것'을 먹는다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 '정말'이 두 번 들어갔다는건 '정말' 맛있다는 뜻이니까. 그래, 최후의 만찬. 나라면 당장 전화기를 들어서 최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하겠다.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 기껏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어린 송아지'로 만든 스테이크가 혀에서 녹아드는 풋풋함도 맛보지 못한다면 그게 말이 되냐고. 샹들리에 불빛을 영롱히 반사하는 적포도주를 한잔 곁들여가며, 조만간 지구와 함께 멸하고 말 불멸의 음악가들의 불멸의 클래식을 귓가에 담아가며. 


10. 내친김에 옷도 한번 해 입고 말이다. '아르마니'니 '휴고보스'니 말로만 들어보던 명품들도 한번은 몸에 걸쳐봐야하지 않겠나. 칼 안든 도둑놈을 연상케하는 '빈폴 티셔츠'의 가격표에서조차 정전기를 일으키는 당신에게 그건 간을 배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와 다름이 없겠지만, 역시 상관없다. 내일 지구가 망하는데 간이 배 안에 있건, 배 밖에 있건, 배 타고 떠나건 무슨 상관이겠나. 여력있으면 차도 하나 뽑아라. 이제껏 만원 버스와 만원 지하철, 합이 이만원짜리 '대중교통 인생'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자유로워봐야하지 않겠나. 포르쉐를 몰고 아우토반에서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은 어떤가? 오렌지빛 석양이 등 뒤에서 부서지고, 당신의 보랏빛 스카프는 깃발처럼 펄럭이고, 선글라스 위에 마지막 지구의 모습이 정물처럼 맺히고, 어떤가? 지구의 마지막 날을 맞는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11.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당신들은 아직 남아있다. 지구가 멸망하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인가? 내일이 없다는데도 가슴에 사무친 여한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기 남아있는 우리 모두는 여태까지 정말 헛 살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 좀 해야하겠다. 


12.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한 불안은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끊임없이 존재하여왔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언젠가는 있으리라는 논리는 간단하지만 신의 섭리이기도 했다. 시작이 없었으면 끝도 없었을 것이고, 끝이 없었으면 있지도 않을 끝을 두려워할 까닭도 없겠으나, 그랬다면 우리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테니까. 눈 두개에 코 하나, 그리고 입이 하나 달린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주 먼 옛날부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최후의 날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그려보고는 했다. 당신들도 아마 익숙히 들어왔을 것이니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갑자기 빙하기가 닥쳐 전 인류가 얼어 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다던지, 저 먼 우주로부터 소행성이 하나 형형하고도 우아하게 날아와 지구의 옆구리를 통타할 것이라던지, 화성이나 그 밖의 어디에서 외계인의 무리가 접시 타고 날아와서 이제껏 우리가 단 한번도 상상치 못했던 무시무시한 무기로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진다던지, 하는 불가항력적인 것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인류가 그 끔직한 종말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바로 우리나라와 니네나라가 '가오' 때문에 핵무기를 한 두발씩 주고 받다가 지구가 절딴나는 경우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숲을 밀고 도시를 지은 덕분에 온실기체가 점점 늘어나 결국은 '지구 온난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목을 조르게 되는 경우,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간, 혹은 그 외 다양한 종별, 성별 조합의 부도덕적이고 부적절한 행위가 연속되고 중첩되면서 돌연변이를 일으킨 치명적 바이러스가 공기에 실려 아프리카에서부터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경우, 혹은 그 바이러스가 CDC(질병통제센터)의 어느 미친 과학자에 의해 대도시 한 복판에 살포되는 경우, 기타 등등이다. 


13. 그럼 그 중의 어떤 이유로 23시간 48분 후에 지구가 멸망하게 되느냐. 아마 당신들은 이게 알고 싶어서 공사가 다 망한 와중에도, 아니 다망한 와중에도 스물 네시간보다 소중한 시간 12분을 허비하며 이제껏 꾹 참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그 전에 해야만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런 게 어디있냐'고 항의한다면 ‘그런 게 여기있다'라고 뻔뻔스럽게 답해줄테니 그럴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를 않는게 좋을 것이다. 지구가 멸망하는 이유는 그 다음에 들려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놀랍고 (놀라워봐야 내일이 끝이다) 충격적이며 (그 충격은 채 하루를 가지 못할 것이다) 아마 당신이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 (오늘밤 꾸는 꿈이 당신의 마지막 꿈이다) 장담한다. 이제 남은 24시간, 아니 23시간 47분은 나에게나 당신에게나 귀중한 것이며, 나는 결코 비싼 밥 먹고 헛소리를 하는 실없는 사람이 아니다. 내 말을 믿으면 남고 믿지 못하겠으면 여기를 떠나라.

 
14. 그럼 지금부터 아주 잠시만 내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강원도 횡성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확히는 '2녀 1남'이라 해야할 것이다. '아들 딸 구분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가 제 2의 국시(國是)나 다름없던 시절, 위로 누나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모님의 '아들'에 대한 유별스런 집착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누나들은 '맥심 커피믹스'를 한 봉지사면 덤으로 딸려 나오는 250밀리 '네스카페' 캔커피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15. 나는 불면 날아갈라 쥐며 꺼질라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금지옥엽으로 자랐다. '삼세번째 얻어진 귀안 아들'로서의 인생은 순탄했다. 외계인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열다섯이 되던 해 나는 UFO를 보았다. 일회용 스티로폼 접시처럼 생긴 그것은 전광석화처럼 하늘을 가르고 날아와 내 앞에 사뿐히 안착했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외계인은 눈이 세 개 달리지도, 입이 네 개 달리지도 않았다. 사람과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았다면 당신들은 믿을 수 있겠나? 외계인들은 모두 미인이었다. 바비(Barbie) 인형처럼 예쁘고 날씬했다. 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언어를 구사했다. 고작 열 다섯이었던 내가 지구상의 모든 언어에 대해 알 수는 없었겠지만 그건 분명히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는 물었다. 왜 당신들은 모두 여자들뿐인가요? 그들은 내 말도 알아 들었다. 우리 종족은 원래 여자들밖에 없었거든요. 그들은 러시아 인형 마크로시카(Matrioshka)처럼 번식했다. 큰 인형을 열면 작은 인형이 나오고, 작은 인형을 열면 그보다 더 적은 인형이 나왔다. 모두 바비 인형처럼 예쁘고 날씬했다. 나는 지구에서 8000광년이나 떨어진 NGC6357 성운, 그 훨씬 너머에 있다는 여인국, 아니 여인성을 상상했고, 그날 밤 처음으로 몽정을 경험했다. 


16. 그들은 말했다. 언젠가 지구가 멸망하는 날이 올거에요. 나는 그들의 언어를 몰랐지만 그들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죠? 난 이제 겨우 열다섯인데. 아주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들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방주를 만들라고. 그래서 새로운 별을 찾아 떠나라고. 그들은 자기들이 타고 온 비행접시에서 작은 셔틀 하나를 꺼내어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청태산 중턱에 묻어 주었다. 그날이 오면 이걸 파내고, 여기에 태울 지구의 생명체들을 모으라고 했다. 왜 그걸 나에게 알려주는 거죠? 나는 대통령도 아니고 국군 아저씨도 아니고 육백만 불의 사나이도아닌데? 그들은 그냥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때마다 길고 가는 속눈썹이 깜빡 거리는게 참 매력적이었다. 


17. 그로부터 얼마 후 코미디언 김병조는 '지구를 떠나거라아아.'라는 유행어를 히트시켰다. 그건 지구에서 숨쉬고 살 '자격'이 없는 인간들을 향해 던지는 통렬한 야유였는데 어쨌든 이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내일이면 떠날 지구도 없어진다. 우리는 떠나기 싫어도 모두 떠나야 한다. 


18. 이제 알겠나? 이게 지구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별로 중요하지가 않은 이유다. 까짓거 아무려면 어떠냐. 중요한건 우선 지구가 망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살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우리의 방주는 축구장보다 약간 더 큰 셔틀이다. 만화 주제가마냥 ‘모두 같이 함께 달려가면’ 좋겠지만 셔틀 안에 공간이 없으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하루 안에 '결혼할 여자(남자)'와 '소 한 마리'를 끌고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으로 돌아오라고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나는 노아처럼 나름대로의 규칙을 만들었다. 암 수 한쌍의 육축과 지구에 아무런 미련과 감흥과 여한이 없는 사람들 삼백명만 데리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시험에 들게 했다. 그게 돈이든 사랑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아쉬움과 그리움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이 자리를 뛰쳐 나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결코 지구를 그리워하지 않을 불쌍한 당신들, 그리고 나. 고맙게도 막판에 정수기 다단계인줄 알고 몇몇 사람들이 나가버려 딱 삼백명쯤만 남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말아라. 나는 결코 당신들을 속박하거나 구속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건 그건 당신들 몫이다. 만약 나와 함께 지구에서 8000광년이나 떨어진 NGC6357 성운 너머로 날아가겠다 하는 사람들은 차례로 나와서 서약서에 지장을 찍어라. 


19. 여기 앞에 앉아계신 두 사람이 진행을 도와주실 것이다. 왼쪽은 우리 사업의 사무를 봐줄 경리 아가씨 미스 리, 오른쪽은 우리 셔틀을 운전해줄 기사 아저씨 - 초행길인데 잘 부탁드린다. 서약이라고 해봐야 별게 아니다. 첫째로 우리와 뜻을 같이 함에 있어서 딴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 형제다. 둘째로 이 서약으로 어떤 예상치 못한 '불이익'이 닥치더라도 나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당신들의 선택권을 인정했다. 강제로 나를 따라오라고 한 적이 없다. 셋째로 내일이면 쓸모 없어질 지구의 화폐를 한데 모아보자는 것이다. 어차피 지구가 망하면 모두 휴지조각으로 돌아갈 것들이나, 아직은 우리에게도 돈이 필요하다. 여행하는 동안에도 생필품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 상자안에 돈을 모아서 삼백명이 먹고 입고 쓸 것들을 마련해야지 않겠나. 그러니 아낌없는 협조를 부탁드린다. 자금이 모이는대로 미스 리와 기사 아저씨가 이마트에 다녀올 예정이다. 


20. 아 참, 신용카드는 받지 않는다. 

 

 

(2004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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