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공일오 사사삼에 칠칠팔육
낙농콩단

054. 공일오 사사삼에 칠칠팔육

by 김영준 (James Kim)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어느 날 갑자기 내 휴대폰으로 전송된 문자메세지에 찍혀있던 전화번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번호는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 년 넘게 만난 여자의 핸드폰 번호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국가대표 숫자치다. 내 부실한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휴대폰 주소록은 총 오백 서른세 명의 전화번호와 생일을 외우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능력 좋은 휴대폰도 그 번호만큼은 주인을 찾아 대응시키지 못했다. 주인 없는 번호. 미지의 번호. 코드명 엑스.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지극히 '타타타'적인 번호.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안녕? 참 오랜만이지? 그간 좀 바빴어. 공부도 좀 했고 여행도 좀 다녀왔거든. 넌 어떻게 지내니? 시간 되면 한번 연락이라도 주지 않을래?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발신인을 알 수 없는 문자 메세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이천삼년도 어느 날이었다. 그게 몇 월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있는 잡무들일랑 깡그리 무시한 채 등받이 의자에 기대고 앉아 고민을 했다.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바로 그 번호,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륙. 그건 내가 아는 사람의 번호일까, 모르는 사람의 번호일까. 제대로 걸려온 번호일까, 잘못 걸려온 번호일까. 물론 아는 사람의 번호라면 제대로 걸려온 셈이고, 모르는 사람의 번호라면 잘못 걸려온 셈이겠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만약 모르는 사람의 번호라치면, 어른일까 아이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서울 사람일까 서울 사람이 아닐까, 이성애자일까 동성애자일까, 어투로 봐서는 분명 여자가 아닐까 싶은데. 그럼 누구일런가. 명자, 광자, 순자, 경자, 미자, 말자, 베티, 레이첼, 클라라, 마가렛, 낸시, 주먹 쥐고 일어서… 그 생각에 너무 골몰하던 나머지 음료수를 쏟았다. 어디에? 키보드에.

 

그동안 나는 북유럽 어딘가의 작은 섬나라에 있었어. 몸이 좋지 않아 한동안 요양을 했었고, 쉬는 김에 겸사겸사 거기서 할 일도 있었지. 그간 연락하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마운틴 듀'라는 탄산음료는 키보드 위에 그대로 쏟아져 지글거렸다. 버튼과 버튼 사이의 얇은 골짜기를 타고 초록빛 맑은 액체가 흘렀다. 솟아오르는 거품의 무리를 보면서 참 거짓말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올해로 컴퓨터를 사용한 지 어언 열여섯 해가 되었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그 대부분의 시간에 끊임없이 탄산음료를 마셨건만 - 그게 항상 '마운틴 듀'인 것은 아니었지만 -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바로 오늘이 십 년에 한 번 온다는 '재수가 유난히 안 따르는 그날'인가 보다. 그러는 사이에도 음료는 골짜기과 골짜기를 힘차게 정복해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 힘은 탄산에서부터 나왔을 것이다. 저런, 이게 무슨 일이야.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이고, 조심 좀 하지. 몇몇이 휴지를 뭉치로 뽑아 손에 쥐어주었다.

 

이국의 밤이란 묘한 느낌이라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내가 태어나서 여태껏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눈을 뜨고 가장 왕성하게 움직이는 시간'에 침대에 누워 눈을 붙여야 하거든. 눈을 감아도 눈을 뜨고 있는 듯한. 그게 어떤 기분인지는... 아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야.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노아의 대홍수, 아니 마운틴 듀의 상세한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나는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이라는 미지의 번호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 왼쪽이 갑자기 가려웠다. 정확히는 귀 위 2센티미터 지점이다. 약 0.3센티미터의 반경을 두고 가려움의 진동이 넓고도 깊게 퍼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 달려있는 변압기 때문인가 - 머리 높이에 변압기를 놓고 살아본 적이 있는가? 정말 끔찍한 일이다 - 싶었지만 변압기에서 나오는 유해 전파가 귀 위 2센티지점의 가려움을 유발한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분명한 이유는 알 수가 없겠다. 나는 그 진원지를 긁적이기 위해서 오른손을 뻗었다. 가까이 있는 왼손을 놔두고 왜 멀리있는 오른손을 움직였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바로 옆에 달려 있는 변압기때문인가 싶었지만, 변압기에서 나오는 유해 전파가 '왼손'과 '오른손'의 구별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이 또한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겠다. 비행기처럼 이륙하려던 오른손은 노트북 바로 앞에 놓여있던 '마운틴 듀'의 초록색 캔과 충돌한다. 워낙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의자인 '오른손'도, 피해자인 '마운틴 듀'도, 목격자인 나도 어안이 벙벙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극심한 물리적 충격에 뒤로 고꾸라진 '마운틴 듀' 캔은 순간적으로 위액과 담즙의 6대 4 혼합물로 추정되는 초록 액체를 토해내었다. 오른손은 이 처참한 사건을 두고, 앞에 마운틴 듀가 있었는지 미처 몰랐다고 항변하고 있으며, 약삭빠른 왼손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은 모르게 해야'한다는 격언을 들먹이며 자신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는 곳에 가서 살아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나쁘지 않은 일이야. 때문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게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쁘지 않기도 하고. 몸속 깊숙이 지독히도 배어있는 다른 세계의 향기를 걷어내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어.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마운틴 듀로 피해를 입은 지역은 다음과 같다. 정통으로 마운틴 듀의 연두빛 세레를 받은 S와 D를 중심으로 A와 E와 W와 X등 인접 지역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런 키가 망가지는 것은 피파 2003을 즐기는 마니아들에게는 정말 끔직한 일이다. 슛과 패스와 센터링과 질주가 모두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톡 쏘는 연두빛 강물은 키와 키 사이의 계곡을 따라 빠르게 퍼졌다. Q와 R과 Z와 C가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곧이어 숫자 2와 숫자 3이 포위될 무렵, 막다른 골목에 숨어있던 Tab 키와 Caps Lock 키와 좌측 Shift 키가 해일처럼 넘어오는 마운틴 듀에 몸을 떨었다. 오른손의 '퍽치기'로 인하여 서러운 피해자가 되었던 마운틴 듀는, 키보드와의 관계에서는 뒷목을 부여잡고 차에서 내리는 무시무시한 가해자로 돌변, 자기는 그저 길이 있으니 길을 따라 달려갈 뿐이라고 뻔뻔스레 외쳤다. 그 길이 꺾이는 Ctrl키의 주변에서는 연두빛 향기가 물결치며 꺾였다. 저러다가 침식작용으로 Ctrl 키의 좌방과 하방이 날카롭게 깎여나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고 진군을 거듭, Alt키와 한자키를 넘어 Space 키까지 뻗어나가며 X와 C와 V와 B를 통해서 내려온 다른 줄기의 부대와 연합하여 세를 키웠다. 아차차.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나는 흐름을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흐름이 느려졌다. 100 밀리리터 남짓 남아있던 마운틴 듀가 거의 모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노트북 키보드 위로.

 

내 멋대로 갑자기 연락을 끊어놓고선,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나 연락을 하다니 나도 참 우습기는 해. 그렇지만 답장이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된다. 혹시 네 번호가 아닌 것은 아닐까, 내가 없던 사이 휴대전화 번호를 바꾼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엉뚱한데 문자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노트북의 최고 장점은 키보드와 모니터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노트북의 최고 단점은 키보드와 모니터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키보드에 탄산음료를 쏟았다는 것은 곧, 노트북 전체의 명운이 위태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만히 보면 키보드란 굉장히 우스운 장치다. 컴퓨터라는 대단히 복잡한 덩어리를 조작하는 이 얇고 명민한 판대기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구조가 단순하다. 키 버튼이 있고 그 아래 조그만 고무 멤브레인이 있다. 또한 멤브레인의 아래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시트가 있다. 버튼은 고리 걸쇠와 플라스틱 홈에 의해 고정되는데, 이러한 키 버튼 뚜껑의 뒤쪽에는 플런저라고 불리는 공이가 새겨져 있다. 우리가 키를 누르면 공이가 고무 멤브레인을 누르고, 눌려진 고무 멤브레인으로 인해 아래에서 서로 떨어져 있던 두 개의 시트가 만나면서 전류가 흐르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누르면 눌리고, 눌려서 서로 닿으면 통한다는 게 키보드의 근본적 원리다. 말하자면 지금 이 글도 그런 작용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기호가 기호가 인식되고 조합되어 얻어진 결과물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끈은, 그러니까 너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란 이 015로 시작하는 열 자리의 핸드폰 번호밖에 없구나.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야. 갑자기 떠났다가 불현듯 돌아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양 엄지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러 메세지를 실어 보내는 것뿐이네. 그저 이 가냘픈 끈이 아직 연결되어 있기만을 바라며.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진돗개, 삽살개, 풍산개. 하나, 둘, 셋. 어쨌든 비상사태. 나는 노트북을 '시옷'자로 뒤집었다. 초록색 국물이 후두둑 책상으로 떨어져 나갔다. 노트북이 고장 나지는 않았을까. 누군가 에어 건을 가지고 왔다. 나는 총을 쏘듯 압축된 공기를 뿜어내어 키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마운틴 듀의 작은 흔적들을 날려 보냈다. 바람의 힘은 대단했다. 고장난 우주왕복선의 구멍을 통해 실내의 모든 것이 우주로 빨려나가듯, 그 와중에 몇몇 우주인들이 난간을 붙잡고 거센 압력에 저항하다가 결국엔 끌려나가듯, 키보드의 어딘가를 닥치는 대로 붙잡고 버텨보던 방울방울들도 하나하나 차례대로 저 멀리 튕겨져 나가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래도 미더워보이지 않았는지 또 다른 누군가 헤어 드라이기를 가지고 왔다. 젖은 머리를 말리는 그 작은 기계말이다. 세기를 중으로 맞춰놓은 상태에서 키보드에 더운 바람을 쏘아 보냈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듯 간간히 쓰다듬었는데, 그때마다 젖어버린 키의 무리들이 달그락거렸다.

 

저기... 혹시 문자 메세지 받으시는 분이 김유석씨 아니신가요? 혹은 그가 꼭 아니라도 그와 아는 사이는 아니신가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아니라면 아니라고 답장 하나만 보내주세요.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나는 밤 사이에 키보드를 '시옷 자'의 이상하고도 위태로운 자세로 유지시켰다. 그래야 불의의 사고로 안에 흘러 들어갔던 액체들이 '중력'에 이끌러 다시 흘러나오게 된다고, 누군가 일러주었던 탓이다. 정말 그의 순진한 생각대로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젖은 걸 말린다고 모든 상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S 키와 D 키를 중심으로 A 키와 E 키와 W 키와 X 키등 극심한 집중 공세를 받은 키들의 움직임이 끈적끈적했다. 누르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갔다가 서서히 다시 올라오는 그 느낌이 마치 끈끈이 주걱이라도 안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그때마다 쩍, 쩍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Ctrl 키와 Space 키는 조금 더 상황이 심각했다. 누를 때마다 퍽, 퍽 소리가 났다. 심지어 눌려진 채로 몇 초씩 붙어있다가 호두 까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오기도 했다. 어이, 이 서류 좀 타이핑해 주겠어? 라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걸 받아다가 옆에 두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쩍, 쩍, 쩍, 쩍, 쩌적 퍽, 척, 쩍, 퍽, 퍽, 쩍, 쩍, 쩍, 쩍, 쩌적. 자음은 아니 찍히고 모음은 찍히는 통에 '머리 없는 좀비'들이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제공의 새하얀 백지 위에 열을 지어 돌아다녔다. 살짝 맛이 간 Space 키 덕분에 띄어쓰기가 거의 되지 않았다. 그래서 힘껏 누르게 되면 우리의 Space 키는 바닥에 완전히 들러붙었다가 열 줄에서 스무 줄이 띄어지고서야 서서히 떨어져 나왔다. 이제 더 이상 키의 무리들은 예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힘으로 눌려져야 말을 들었으니 나름의 함수 하나씩은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S 키를 누를 때는 평소보다 150퍼센트가량 더 힘을 주도록 해, X 키를 누를때는 평소보다 더 빨리 눌렀다가 잽싸게 떼도록 해, 컨트롤은 항시 눌려져 있으니까 사용하지 않을 때는 손톱으로 끝을 들어내어 빼두도록 해. 이런 식의 새로운 지침이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좋아요. 그래도 답장이 없군요. 당신이 김유석씨가 맞아도, 맞지 않아도 나는 이제 상관없어요. 답장이 없다는 것은 당신이 맞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 사이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을 거예요. 좋아요. 나는 계속 이렇게 문자 메세지를 보낼 거예요. 당신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키보드의 단순한 구조를 떠올린 나는 최후의 방법을 택했다. 키를 하나씩 벗겨내고 떼어내어 끈적임을 닦아내고 다시 키를 조립하는 것이다. 자그마치 16개나 되는 키를 분리해 내고 숨어있던 키보드의 속살을 다용도 티슈형 세척 클리너로 닦으며 나는 다시 그 휴대폰 번호를 떠올렸다. 주인 없는 번호. 미지의 번호. 코드명 엑스. 광선유라는 남자는 누구고, 그에게 문자를 보내는 당신은 또 누구냐.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지극히 '타타타'적인 번호.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륙. 정성스레 닦아낸 A 키와 S 키를 퍼즐 맞추듯 다시 키보드에 끼우고 D 키를 집어 들었을 무렵, 휴대폰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문자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문자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이번 일요일에 시간 되니? 만나자. 우리. - 공일오사사삼에칠칠팔육. 

 

 

(2004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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