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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졸업 무도회, 우리들의 잊지 못할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4.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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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드스톤 고등학교의 졸업 무도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엊그제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꽤나 감개가 무량하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좋은 일도 많았고 나쁜 일도 많았다. 물론 정량적으로 따져보자면 나쁜 일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지만, 그래도 학교란 시스템의 본질적 무용함을 생각하자면 이쯤해서 더 큰 손실 없이 “굿 바이” 하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테다. 


  졸업 무도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면서 가장 바빠진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다니엘 슬랜터 (Daniel Slanter)이다.그는 이 졸업 무도회 준비의 총 책임을 맡아 진행을 진두 지휘할 뿐만 아니라 (친구들은 그의 이름이 Dance ‘round Here라는 표현을 연상하게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식축구팀 주장이자 프롬 킹 후보로 나서 지지자들의 성원에 보답하여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무도회가 끝남과 동시에 동급생인 에밀리아 스테인(Emilia Stein)양을 데리고 위스콘신을 떠나야 하는 세 가지 미션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에밀리아는 그의 졸업 무도회 파트너이자 프롬 퀸 후보다. 예쁘고 인기 많으며 성적까지 좋으며 고로 지난 3년 동안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는 주인공이었다.


  졸업 무도회라는 것이 종종 예상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흐를 수야 있다. 하지만 그날 밤으로 프롬 킹이 프롬  퀸을 데리고 평생 살아오던 동네를 떠날 수준의 일이라면 손으로 꼽을만한 사건일 것이다. 댄의 친구들인 우리는 모두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댄은 천하태평이었다. 그의 표정은 딱 이런 식이었다. ‘그까짓 도망, 치면되지 뭐 그리 대수라고 호들갑이야?’ 정말 그까짓 도망인가? 우리의 염려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엠(에밀리아의 애칭)의 아버지 프랭크 N. 스테인 영감의 딸 사랑은 보통 지독하지 않은 것으로 반경 100 마일 내에 소문이 자자하다. 둘째, 엠은 위로 오빠를 셋이나 두었으며 스테인 형제들의 막내 여동생을 향한 애정 역시 보통 지독한 것이 아니다. 셋째, 전술했다시피 엠의 인기는 보통 수준이 아니고 열렬히 그 애를 사모하는 십대 남학생들이 순순히 물러나리라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백번 양보하여 ‘사랑의 도피’가 성공했다고 치더라도 이후 댄과 엠 앞에 다가올 운명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다). 상기 이유들을 고려하자면 이렇게 서둘러 도망처야 할 이유란 정말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뭔질 알아? 
  우리의 우려 앞에 댄은 되려 이렇게 되물었다.
- 뭔데? 
- 열여덟살짜리 여자애를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하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번뇌해야 할 당사자가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 너 완전히 미쳤구나. 제정신이 아니야. 
- 아니야. 난 미치지 않았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쉬운 일이 열아홉살짜리 여자애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이니, 열여덟살짜리의 경우에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맞아. 
- 그럼 스무살짜리는? 
- 세상에서 세 번째로 어렵겠지. 
- 그러니까 한 살을 먹을 때마다……. 
그래, 정확하게 바로 보았어. 나이와 난이도는 반비례하지. 고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데리고 도망쳐야 한단 말이야. 
  그 태평함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


  댄의 셈법은 명쾌했다. 하지만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상황은 심각했다. 엠의 아버지 스테인 영감은 (그의 풀 네임은 프랭크 N. 스테인(Frank N. Stein)이다.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지 않는가?) 며칠 전 갑자기 묵은 사냥총을 꺼내 정성들여 닦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서 짧은 나이프를 벼리기도 했다. 영감은 “오리 사냥철이 돌아와서”라고 설명했지만 마을 안에 그 말을 곧이 듣는 사람은 없었다. 영감은 백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오리의 머리통을 맞추는 명사수로 유명했다. 오십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도 표적에 정확히 나이프를 던질 줄 알았다. 어느덧 귓가에 흰머리가 빼곡하게 자라났지만 왕년의 솜씨는 어디 가는 것이 아닌 듯 했다. 


  또 다른 징조도 있었다. 영감은 큰 개 세 마리를 키웠는데 모두 45 킬로그램이 넘는 블러드 하운드들이었다. 블러드하운드는 후각이 발달한 품종으로 사냥에 아주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술 더 떠서 영감은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아이들을 적당히 굶주리게 하여 독기를 끌어올리는데 이미 몇 주 전부터 그 짓을 시작했다. 영감은 블러드하운드라는 품종명이 위험하게 들릴 뿐 실제로는 온화하고 침착하며 충성스러운 친구들임을 강조했지만, 가장 작은 이빨조차 웬만한 성인의 엄지 손가락 보다도 크다는 녀석들에게 한번만 스쳐도 전치 5주라는 섬뜩한 소문은 우리 마을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꽤나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물론 거기에는 영감이 그 아이들에게 각각 바스커빌, 쿠조, 다스베이더라는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자신만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었던 부분도 단단히 한 몫을 하였지만 말이다. 


  우리가 나고 자란 위스콘신주에서 통상 오리사냥철이라고 하면 9월 말에서 11월 말 사이를 본다. 지금은 5월 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


  엠은 영감의 막내딸이다. 위로 줄줄이 남자 애만 셋 다음으로 얻은 고명딸인데다가 나이 사십줄에 터울을 십년이나 두고 어렵게 얻은 자식이라 그런지 각별함은 더해 보였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라, 애지중지 키워왔다. ‘엠은 왜 사랑스러운가?’ 그 질문의 답은 이거다. ‘사랑받고 자라서.’ 거기까지는 좋다. 사실 예쁘고 똑똑하고 상냥한 십대 여자아이가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안 예쁘고, 안 똑똑하고, 안 상냥한 십대 여자아이보다야 백 번 나을 것이다. 문제는 그 아이에게 한 조각 그림자라도 비칠까 싶으면 원인 제공자를 빠짐없이 색출해 서슴치 않고 응징하는 영감에게 있었다. 엠이 하이킹을 하다 넘어졌을 때는 굴삭기를 몰고 가서 산을 깎아버렸다. 엠이 수영하다 물에 빠졌을 때는 포크레인을 몰고 가서 강을 메워버렸다. 우리 마을 특유의 평탄한 지형을 두고 혹자들은 영감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마치 각종 신화에서 지구가 만들어지던 시기를 묘사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런 엠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보이 프렌드가 있었을리 만무했다. 꺾기 어려운 꽃일 수록 더욱 꿀벌을 유혹하는 법이라고 불운한 도전자들만 득시글거렸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오래지않아 두 손을 번쩍 들고 백기투항을 했다. 물론 드물게 적극적으로 나섰던 녀석들도 있었다. 엠의 미모가 만개한 쥬니어 하이 때부터 지금까지 총 여섯명의 용기있는 자가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만약 댄이 일곱번째 용기있는 자라면 우리 친구의 미래 또한 심히 걱정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이야기를 쭉 열거하자면 크리스티 소설에 나오는 인디언 인형 노래처럼 느껴진다. 


첫번째 남자아이 티모시 드레이크는 어느날 실종되어 지금까지 소식이 없지. 녀석이 어디에 있을지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알 뿐.
두번째 남자아이 앤서니 반스는 떠돌이 집시패에게 총을 맞고 일주일간 사경을 헤메다 하늘로 떠났지. 위스콘신 촌구석에 집시들이 왜 돌아다녔는지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알 뿐.
세번째 남자아이 빈센트 매코드는 인근 야산에서 맹수에게 물린 채로 발견되었지. 관할 경찰이 사자 아니면 표범의 이빨자국이라고 주장했던 이유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알 뿐.
네번째 남자아이 블레이크 앤더슨은 옥수수 밭 한 가운데서 정신이 나간채로 발견되었지. 4대를 살아오던 앤더슨 집안이 그렇게 서둘러 야반도주 해야만 했는지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알 뿐. 
다섯번째 남자아이 마이크 허스트는 마을 곳간 서까래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지. 활기가 넘쳐서 문제였던 열여섯살 소년이 무슨 이유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알 뿐.
여섯번째 남자아이 다니엘 슬랜터가 다음 차례라고들 말하지. 신이 아니어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아무래도 좋게 끝나기는 글렀다는 것.

  물론 이런 비극적 사건들 뒤에 영감이 있었으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누구나 느끼고 있다. 머릿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어른거리는 그 인과관계의 미묘한 그림자를. 


  참, 엠에게는 세 사람의 오빠도 있다. 큰 오빠 소니와는 십오년, 둘째 오빠 프레도와는 십삼년, 막내 오빠 마이클과는 십년 터울인데 이들 모두 스테인 가문의 찐한 피를 타고 나서 사냥에 능하다. 쏘면 쏘는 족족 오리의 머리통을 꿰뚫어서 우리 마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명사수 스테인 삼형제'라고 부른다. 소니-프레도-마이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의 삼형제 아닌가? 그렇다. 마리오 푸조의 ‘대부’에 등장하는 콜리오네 3형제의 이름과 같다. 이 또한 영감의 문화적 취향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감이 세 아들들 소니-프레도-마이클과 충견 바스커빌-쿠조-다스베이더를 좌우에 거느리고 사냥에 나서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필름 느와르의 한 장면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댄은 우리의 염려에 이렇게 되묻고만 있다.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뭔질 알아? 
  미친 놈. 고상하게 말해주고 싶지만 더 적합한 표현이 없다.



*
 


  졸업 무도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다니엘은 여전히 희희낙락이다. 오히려 보는 우리가 더 불안 불안하다. 댄은 마치 졸업 무도회가 끝나고 절대 도망치지 않을 사람처럼 태연자약하게 무도회를 준비했다. 초대장 발송 현황을 체크했고 샌드위치, 케이크며 펀치, 소다수가 부족함없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특히 졸업 무도회 담당 지도교사를 도와 주류 반입 계획을 초장에 무산시키는 데 주의를 집중했다. 경비 및 소사 아저씨들과도 수시로 접촉하여 '무도회 홀'로 쓰여질 체육관이 안전한지, 출입구 통제 방안이 있는지 등의 문제를 심층 논의했다. 또한 기술실 직원들과 조명은 몇 룩스 정도가 적당하며 음량은 어느 정도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들리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특수효과를 담당한 2학년생을 닥달하여 7번의 리허설을 실시했다. 그러는 중에도 쉬지 않는 멀티 태스킹으로 어렵게 섭외한 브라스 밴드 ‘What the Hell Is Going On?’ 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꽃집에서는 내일까지 장미 오백송이에 백합 오백송이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등의 문제 또한 놓치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무르익었다. 자동 펌핑 기계는 수백 수천개의 색색들이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었고 트럭 한 대 분량의 오색 색종이 가루가 차곡차곡 박스에 담겨졌다. 몇몇 준비 위원회 아이들이 ‘프롬 퀸'에게 수여할 지팡이에 금딱지를 붙이느라 호들갑을 떠는 통에 잠시 소란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무도회는 순조롭게 준비되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졸업 무도회만 성공한다고 만사형통이 아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들이고, 그래서 진심으로 댄이 염려스러웠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를 체육관 뒤편으로 불러내어 넌지시 계획을 물으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 정말 가는거야? 
- 뭘? 
- 도망말이야. 사랑의 도피인지 뭔지. 
- 물론이지. 더 이상은 묻지마. 비밀이거든. 
  그의 표정은 밝고 명랑하다 못해 싱글벙글이었다. 

  오히려 우리들이 불안에 떨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 중 일부는 밤잠을 설쳤고 우리 중 일부는 악몽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일부 서로 일치하기도 했다. 


  모든 꿈은 키 큰 옥수수 밭의 합창으로 시작한다. 노래는 낮은 음조로 시작하여 서서히 바람의 길을 따른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린다. 머리로는 희망을 생각하지만 발길이 닫는 곳마다 남는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의 냄새를 따라 세 마리의 사냥개가 달린다. 마을 사람 모두가 안다. 그 개들의 이름이 바스커빌, 쿠조, 그리고 다스베이더라는 사실을. 컹컹거림은 홈통을 때리는 빗소리 같기도 하고 어쩌면 푸가(fuga)처럼 들리기도 한다. 푸가의 어원이 라틴어로 ‘도망치다’에서 왔다지. 공포를 흡수하여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검어지는 사냥개들의 뒤로는 (콜리오네 삼형제의 뺨을 치고도 남을) 스테인 삼형제가 따르고 있다. 등에 엽총을 맨 그들은 오토바이를 적당히 느리게 몰며 사냥개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아이들과 사냥개들의 간격은 서서히 줄어든다. 이내 따라잡힌다. 소녀가 먼저 넘어진다. 손을 놓치는 순간 소년은 깨닫는다. 이것이 마지막임을. 사냥개들은 소녀를 무시한다 (그렇게 훈련받았다고 한들 놀라울 것도 없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찾아 달려오던 오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토바이의 속도를 늦춘다. 소녀는 힘껏 발버둥치지만 끌려가지 않을 방법은 없고 애타게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는 꿈처럼 아득하게 들판을 따라 흐를 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소년과 세 마리 사냥개 사이의 문제다.


  소년은 턱시도 주머니에서 글록 26을 꺼낸다. 아버지의 서재 서랍에서 훔쳐온 것이다. 몸을 돌려 사냥개들에게 한 발을 발사한다. 초심자의 행운일까? 총알은 가장 앞서 달려오던 바스커빌의 뺨을 스친다. 바스커빌은 조금 느려졌지만 덜렁거리는 얼굴 거죽을 사이로 피를 쏟으면서도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총알에는 그만한 운조차 따르지 않은 채 끝없는 옥수수의 행렬 아래 어딘가 붉은 흙 속에 의미없이 박힌다. 그 사이 소년을 따라잡은 쿠조는 소년의 오른쪽 다리를 문다. 소년은 미식축구 선수로 사냥개들 세 배 무게의 사람과 맨 몸으로 상대해왔지만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경우는 처음이다. 다스베이더에게도 따라 잡히자 소년은 쥐덫에 걸린 작은 쥐처럼 나동그라진다. 오른손에는 아직 글록이 있다. 쿠조를 향해 발사한 세 발 중 한 발은 매서운 사냥개의 등판과 그의 다리를 함께 관통하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질 못한다. 어느새 왼 팔을 공격하는 다스베이더를 향해 세네 발을 연달아 쏘아보지만 배가 반쯤 열린 상태에서도 더 미친듯이 물고 늘어지는 놈의 독기에 전의를 상실한다. 때마침 도착한 바스커빌의 모습은 말 그대로 눈에서 불을 뿜는 마견과도 같다. 더는 남은 총알도 없다. 그제야 소년은 깨닫는다. 어차피 이렇게 끝나고 말 일이라는 사실을. 


  옥수수 밭 한 가운데서 의식을 잃어가며 소년은 미래를 본다. 그리고 인정한다. 설령 사냥개들과 스테인 삼형제과 스테인 영감을 피해 도착했다고 ‘사랑의 도피’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다가올 미래는 낙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촌구석 고등학교의 미식축구팀 주장이었던 (그러나 대학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했던) 그가 타지, 그것도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막노동판을 전전하거나 우체통에 전단을 구겨 넣는 따위의 일 밖에 없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경비 일을 얻을 수도 있을까? 한편 아리따운 소녀는 어떨까? 촌구석 고등학교라지만 예쁘고 똑똑하기로 유명했던 에밀리아는 (그래, 어느 순간에는 엠이 아니라 에밀리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금 더 상황이 나을 수는 있을 테다. 까페 아르바이트생 아니면 간이 식당의 웨이트리스 정도에서 시작을 하겠지. 더 큰 문제는 추격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냥개들과 스테인 삼형제과 스테인 영감은 평생 그들의 뒤를 쫓을 것이다. 푸가의 어원이 라틴어로 ‘도망치다’에서 왔다지. 안 그래?



*


  댄과 엠의 사이를 스테인 영감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워낙 딸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선 예민한 촉수를 가진 양반이라 진작에 (어쩌면 둘 사이에 이상기류가 흐르기도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통한 소식통이 전해준 정통한 정보다. 그럼 댄이 어떻게 여지껏 해코지 당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사실 그 부분이 참 미스테리다. 티모시 드레이크에서 마이크 허스트까지의 사례들처럼 의문의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이 정말 천운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너희 그 얘기 들었어? 
  한동안 누군가 득달같이 달려와 이렇게 운을 떼면 그건 십중팔구 댄이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레파토리도 다양했다. 어떤 날은 돌에 맞았다. 어떤 날은 개에 물렸다. 어떤 날은 복면 괴한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어떤 날을 위협적인 총소리에 쫓겼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귀신까지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영감이 영매가 아닌 이상 귀신까지 부릴 수는 없을테니 그건 뻥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 어떻게 위스콘신을 벗어날 생각인 걸까? 
  식료품집 아들 크리스 P. 베이컨(Chris P. Bacon)이 물었다. 그의 집은 이번 졸업무도회에 식자재를 대면서 꽤나 짭짤한 재미를 보았을텐데 그 중에는 물론 베이컨도 포함되었다.
- 걸어서? 아님 차 타고? 주 경계를 넘어가는데 여권까지는 필요없잖아. 
- 진지하게 하는 얘기는 아니지? 
- 뭐, 어때? 정작 장본인이 진지하지 않은데. 
  나는 시큰둥하게 손을 들어 세상 가장 속 편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댄을 가리켰다. 
- 난 우리 마을도 벗어나기 전에 잡힐 거라고 생각해. 
  나도 크리스의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댄이 어떤 마술을 부리던 옥수수 밭을 벗어나 큰 길로 접어들기 전에 영감과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붙잡힐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옥수수 밭에서 사건 사고가 터지는 건 우리 마을에선 딱히 신기할게 없는 일이다. 간단한 확률 문제다. 사방 천지가 옥수수 밭이니 현장이 옥수수 밭이 아닐 확률이 현장이 옥수수밭일 확률보다 낮은 것이다. 하다 못해 보안관이 노상방뇨범을 잡아도 현장은 십중팔구 옥수수 밭인 것이 당연하다. 밤이면 그 옥수수들은 찬 바람에 흔들리며 서걱서걱거렸다. 소름이 오싹한게 꽤 무섭다. 달려도 달려도 옥수수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밤 사이 그들 무리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아니 어쩌면 그 깊고 어지러운 곳에서의 일은 하느님도 모르실 수도 있다. 어느날 아침엔가 떠오르는 태양이 그 모처에 널부러져 있을 댄의 차가운 몸을 비춘다해도 우린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


  졸업 무도회가 오늘이다. 난 턱시도를 입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껏 머리를 다듬었다. 너무 모범생처럼 보여도 곤란하겠지만 너무 양아치처럼 보여도 곤란하겠다. 내 파트너 도로시는 기품없는 남자를 싫어한다. 참, 그녀는 오늘 밤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올 것이다.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생으로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며 미디움 템포 블루스에 맞춰 춤을 출 것이다. 라랄랄라. 단 한 번 뿐인 졸업무도회 - 우리들의 잊지못할. 


  내가 체육관에 도착했을 땐 2시 30분이었다. 이미 오늘을 위해 특별 초대된 브라스 밴드 <왓 더 헬 이즈 고잉 온?>이 도착해서 두밥, 두비두밥, 두비두비두밥, 한창 리허설을 벌이는 중이었다. 
- 브라스 밴드 이름이 ‘What the Hell Is Going On?’이면 음악에 비해 너무 센 거 아니야? 
  졸업무도회 준비위 중 한 사람이기도 한 식료품 점 아들 크리스의 지적이다. 
- 록 밴드라도 그런 멍청한 이름은 웃겼을 거야. 
  우리는 무대 위의 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몰래 키득거렸다. 


  모든 준비는 순조로웠다. 체육관 지붕에는 수천개의 풍선이 달렸고 창문에는 두꺼운 모직 암막 커튼이 달려 우리의 성스러운 무도회를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게 했다. 은은한 조명은 교도소의 판옵티콘(Panopticon)처럼 돌아가며 성스러운 홀의 구석구석을 비추었고 어디선가 소시지 굽는 냄새가 났다. 우리는 과일 펀치와 진저에일로 마른 목을 축였다. 다섯시가 되면 저 문으로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쌍쌍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누가 '프롬 퀸'이 될까?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의견이 분분했다. 아무튼, 오늘로 이 지겨운 십대 시절은 쫑이다. 이제부턴 진저에일이나 레모네이드 대신에 하이네켄이나 버드와이저를 마시리라. 


  아니나 다를까 무도회 준비위의 총책을 맡은 댄은 열성적으로 상황을 지휘했다. 맞다. 그러고보니 그는 지난 시절동안 총학생회장이기도 했다. 오늘 그는 졸업무도회를 차질없이 진행시키는 한편으로 그의 파트너 엠과 함께 이 곳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는 성인이나 진배가 없는만큼, 엠의 아버지 스테인 영감의 반대로부터 도망쳐 사랑의 도피를 하려는 것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들인 우리는 그를 걱정하는 차원에서 그가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에 돈을 걸었다. 크리스는 위스콘신 주 경계까지는 갈 거라고 보았고 나는 우리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잡히거나 사살될 거라고 보았다. 결과는, 큰 이변이 없는 한 내일 뉴스를 보면 알 수 있을 터였다. 


  이윽고 다섯시가 되었다. 문이 열리며 쌍쌍의 선남선녀들이 홀 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도 휴대전화로 메세지를 보내 도로시의 위치를 확인하여 중고 머스탱을 몰고 그녀를 데리러 갔다.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체육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댄과 엠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 또한 이제 막 홀에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젠장, ‘프롬 퀸’과 ‘프롬 킹’은 사실상 물 건너 갔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은 멋지고 아름다웠다. 다니엘은 내가 머리털 난 이후로 보았던 그 어떤 턱시도보다 세련된 턱시도를 입었고 (품을 줄였는지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이더군) 엠은 긴 생머리를 치렁치렁 흘려내리고 쇄골은 물론 그 아래 다른골까지 훤히 드러나는 하얀 드레스를 살랑거리며 에미상을 받은 배우처럼 웃었다. 난 가능하면 엠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의 까탈스런 아버지라면 저런 과감한 드레스를 용서했을리 없고 그걸 쳐다보는 놈들 또한 용서할리가 없다. 언제 어디에서 응징의 헤드샷이 날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

 

  졸업 무도회는 십대의 많고 많은 순간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까. 도로시를 안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단 한번도 이 학교, 이 시절에서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다. 성적도 중간, 운동도 중간, 남들처럼 미식축구팀에 들어가려 안달했으나 결국은 못 뛰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도로시도 나와 비슷했다. 그녀는 치어리더가 되고 싶어했으나 단신이라는 서글픈 이유로 그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고 누구의 눈에 띄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있기에 존재하는 가련한 중생들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우리가 주인공이다. ‘프롬 퀸’과 ‘프롬 킹’은 아니어도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조명은 우리를 위해 내리고  밴드는 (그래, 비록 이름은 황당하지만) 우릴 위해 노래한다. 소시지와 케이크와 소다수가 넘쳐나는 꿈의 낙원이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도로시의 눈을 바라보며 뱅글뱅글 돌고 있노라니, '평생 동안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총 소리가 들린 건 정확히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시점이었다. 타앙. 타앙. 타앙. 정확히 세 발이었고 시계를 보니 여덟시 사십칠분이었다. 곧이어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고 트럭이 급회전하는 듯한 휘루루 끼이익,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컸던지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동작을 멈출 정도였다. 밴드 또한 노래를 멈추고 벙뜬 표정이 되었다. 우리들은 웅성거렸다. 가장 먼저 머릿 속에 떠오른 건 다니엘이었다. 그의 천운이 드디어 다했구나……. 식료품집 아들 크리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파트너를 내버려둔 채 나를 찾아왔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듯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밖으로 뛰어 나갔다. 하지만 이미 겁을 먹은 아이들이 귀가 울리도록 웅성거리고 전화질을 하는 통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댄은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엠도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밤은 고요했다. 총이나 개나 트럭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우리들은 초조하게 웅성거렸다. 
- 설마, 아직 무도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도망치려고 한 거야? 
- 설마, 이제 겨우 8시 17분인데? 벌써 잡힌거야? 
  정신없는 와중에 브라스 밴드 ‘What the Hell Is Going On?’의 멤버들이 쭈삣쭈삣거리며 다가왔다. 
- 저기…… 얘들아, 연주는 계속 할까? 
  뭐야, 정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진짜 ‘왓 더 헬 이즈 고잉 온?’ 이다.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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