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렛 고마워 (Merci pour le chocolat, 2000) B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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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렛 고마워 (Merci pour le chocolat, 2000) B평

by 김영준 (James Kim)

  끌로드 샤브롤의 '초콜렛 고마워'는 대단한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소름끼치는 심리극을 만들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흔히 소름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온갖 재료와 장치로 섞어찌개를 끓이는 요란을 떨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유롭고 우아하게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솜씨는 가히 놀라움의 경지라 할 만 하다. 맞다. 바로 이런게 백전노장의 관록이다. 이 양반 영화는 가장 고상하고 평화로운 장면이 남들 영화의 어지간한 사지절단 떡실신 피분수보다 사람을 소름돋게 한다. 재주라면 그것도 재주다. 그는 이 작품의 모티브를 히치콕의 '의혹 (1941)'에서 부분적으로 얻었노라 고백했는데,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그가 대표적인 '히치콕 추종자'인 것은 이미 삼척의 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아니 근데, 세상에 '히치콕 추종자'가 좀 많은가? 모두 우리나라로 데려와 양팔 간격으로 세우면 온수에서 장암까지도 가겠네. 

  샤브롤이 히치콕식 서스펜스를 재구성하는 주된 도구는 중산 가정의 허구다. 엄격히 계급 분법을 적용하자면 샤브롤의 인물들 중 일부는 중류라기보단 차라리 상류에 가까운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조차 보다 더 윗물에서 노니는 인류를 향한 동경으로 마음이 시달리고 있으니 여전히 등식은 무리없이 성립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겉으로는 한없이 우아하고 평온하게 보이지만 사소한 의심에도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세계 - 이들의 일상은 아주 천천히 무너져내린다. 언뜻 슬로우모션같다. 하지만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다. 충분히 곱씹을 시간을 갖고 이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지켜보는 무기력감이란 찬란하도록 비현실적이다. 히치콕의 '의혹'이 완벽한 결혼 생활을 의심함에서 출발했다면 샤브롤의 '초콜렛 고마워'는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의심함에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가능성'이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택도 없는 소리도 아니라는 뜻이다. 유전인지 우연인지 모를 음악적 재능이 그렇게 동작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초콜렛의 제법이 그렇게 작동한다. <그랬으면 좋겠는데>와 <그럴지도 모르는데>가 중첩되는 창백한 욕망의 전시회 - 얼굴을 붉히지 않고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웃지 아니하며 웃고 울지 아니하며 운다. 그게 무섭다. 소름이 목덜미부터 후덜덜 돋는다. 단 한 번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결코 나른하지 않도록 불안하다. 신기할 정도로 낭비가 없다. 화룡에 점정을 찍는 리스트의 '장송 행진곡'은 불안의 반복을 거듭케하는 도식상 뻔한 알레고리지만 그렇다고 그걸 "뻔하다"라고 말했다간 크게 경을 칠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게 바로 거장의 위엄이 아닌가 한다.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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