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과일사탕을 만들자
by 김영준 (James Kim)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는 비슷한 종류의 날이면서도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한 달 간격을 두고서 공격과 수비가 교대하게 된다는 사실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하게 초콜렛과 사탕이라는 외형적인 차이에서 오는 문제도 아닌 듯 하다. 뭔가 더 중요한 이유가 안쪽에 꼭꼭 숨어서 웅크리고 있을 텐데, 어째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누가 뭐래도 뭘 줘보고, 또 받아 보았어야 그런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에는 친구가 받은 초콜렛을 얻어먹고, 화이트 데이에도 친구가 받은 사탕을 얻어먹는 주제에 '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의 미묘한 차이, 나아가 그 시대적 의미'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하튼간에 솔로 입장에서는 둘 다 '쓰잘떼기 없는 날'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런 '데이'들이 밤중에 담을 타고 넘어와서 직접적으로 내 목을 조른다거나, 침대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그런 날들이 어쩔 수 없이 야속한 이유는 그 고유의 축제성 때문이다. 필경 제과업계의 검은 음모가 뒤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 그리고 유사분열로 생겨난 수많은 날들은 은연중에 간접적 피해자를 양산한다.
가령 지난 발렌타인 데이에 "이런 날 초콜렛을 받지 못하면 생뚱맞죠"라는 문구를 내 걸었던 한 편의점을 떠올려보자. 실제로 "어이쿠. 우리 남자친구님께서 생뚱맞아서는 안되겠다"하면서 초콜렛을 구입하는 분들이 계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나는 생뚱맞은 사람이 된다. 과연 생뚱맞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 '생뚱맞다'는 형용사로 '(하는 짓이나 말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고 엉뚱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는 짓이나 말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하고 엉뚱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약간 엉뚱한 구석이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렛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엉뚱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가 힘들다. 그 편의점은 이번 화이트 데이에도 같은 내용의 문구를 내걸었는데, 그 결과 나처럼 영문도 모른 채 생뚱맞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집에 돌아온 나는 직접 '과일사탕'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종로 3가나 그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복잡한 동네에 가면 노점상에서 파는 과일사탕말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언뜻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생각해 보건대, 결코 집에서 못해 먹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먼저 냉장고를 뒤져서 과일을 찾았다. 딸기와 바나나와 배가 나왔다. 기왕이면 키위를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딸기 이외의 다른 과일로도 사탕을 만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닥치는대로 해보는 수 밖에는 없었다. 배는 조금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나나는 충분히 가능할듯 싶었다.
조리법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하기 위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설탕과 물을 넣고 140도까지 끓여서 시럽을 만들어야 한단다.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140도인지 알 수가 있을까? 마땅한 온도계도 없고, 그렇다고 대충 감으로 온도를 알 수 있을 만큼 경험이 풍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화학공학을 4년이나 배워놓고 - 물론 화학공학이 과일사탕 만들어먹는 학문은 아니지만 - 이럴 때 속수무책이라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도무지 모르겠을 때는. 역시 인류 최후의 방법을 써야 한다.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기도 하다.
"엄마. 설탕을 끓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언제 140도인지 알 수가 있어?"
어머니께서는 깜짝 놀라서 달려오시더니, 나의 위대한 작업을 강력히 반대하셨다. 주방도구가 망가진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못쓰게 되어버릴 과일이 아깝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 그리고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마지막 이유였다. 그러더니 아예 가스레인지 근처에도 못 오게 하신다. 이런 날에는 과일사탕이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2003년 06월)
'낙서와 농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전적인 부탁에 대처하는 방법 (0) | 2003.07.13 |
---|---|
차포 떼고 장기를 두는 사람 (0) | 2003.06.15 |
십 년 후의 동창회 (0) | 2002.12.01 |
초코파이를 부셔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0) | 2002.09.15 |
베이글이 있는 빵집 (0) | 2002.05.19 |
블로그의 정보
낙농콩단
김영준 (James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