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006. 사랑과 우정 사이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0. 12. 17.

본문

  여러분, 오늘 하게 될 실험은 사랑과 우정 사이의 평형을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저는 CBE-38317 ‘화공기초실험 II 1/2’ 의 책임조교를 맡은 크리스 P. 베이컨(Chris P. Bacon)입니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자, 오늘은 첫 시간이니 과목 소개로 시작해봅시다. ‘화공기초실험 II’면 ‘화공기초실험 II’이지 ‘화공기초실험 II 1/2’이란 무엇이냐. 말인즉 ‘화공기초실험 II’이나 ‘화공기초실험 II’를 더 이상 재수강 할 수 없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수강생들을 위해 개설된 ‘화공고급실험 I’과의 사이에 있는 일종의 징검다리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킹스크로스역의 9와 3/4 승강장 같은 거라고 보면 되는데 차이가 있다면 이 승강장은 아무 문제가 없는 보통의 승객이라면 일부러 거쳐갈 필요가 없다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과목을 신청하지도 않았겠죠).


  자! 시작합시다. 일단 모두들 떠들지 말고 주목해 주세요. 아니, 제발 떠들지 말라고요. 어이! 거기! 떠들거면 나가라고! 그래, 거기! 나이키 모자 쓰고 아디다스 티셔츠 입은 남학생하고 실험대 위에 마크 제이콥스 핸드백 올려놓은 여학생! 어라? 정말 나갔네요. 진짜로? 와!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숭늉도 못마신다니까요. 자자, 나머진 주목!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쇼는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자! 앞서 소개한 것처럼 오늘 여러분이 하게 될 실험은 사항과 우정 사이의 평형을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칠판에 ‘실험제목’과 ‘실험목표’가 써있습니다. 한번씩 읽어 보시구요. 이 실험은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옆 사람과 장난치거나 잡담하지도 마시고요. 무엇보다 절대 실험실을 뛰어다니지 마세요.


  여러분 앞의 비이커에는 적갈색의 혼합물이 담겨있습니다. 이 용액은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무척 마음 아파하는 중생의 심장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니 너무 하드코어처럼 들리지만 약간은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원액은 너무도 미묘하고 다루기 힘든 물질이므로 대단히 위험합니다. 물론 모든 수강생들에게 원액으로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는 (당연히) 예산의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조교들이 여러분의 실험을 위해 이것을 순수한 물에 희석하여 준비하여 놓았습니다 (그렇다라도 무척 주의해야 한다는 점을 잊진 마세요). 


  앞에는 하트 모양의 실험장치가 있을것입니다. 장치의 상단부에는 예의 그 적갈색의 용액을 넣어야 하는 투입구가 하단부에는 두개의 배출구가 있습니다. 왼쪽의 배출구로는 우정의 용액을, 오른쪽의 배출구로는 사랑의 용액을 분리하고 정제하여 빼내는 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실험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반응기 속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갈등을 조장하고, 다시 갈등을 해소시켜서 평형을 이루게 하는 일련의 작업을 매주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신 에로스가 되어 때로는 금화살을 쏘고 때로는 납화살을 쏘아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편의상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을 피노키오,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연모의 대상을 신데렐라라고 부르겠습니다. 사실 이름이야 원하는대로 정하고 붙여도 됩니다. 미키와 미니? 바비와 켄?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 보니와 클라이드? (이건 아닌가요?) 낡은 느낌이 드는 옛 소설들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K와 P, 뭐 그런 식으로 해도 됩니다.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영화광이라면 기어-행크스-그랜트-퍼스와 로버츠-라이언-배리모어-애니스턴, 그런 식으로도 가능합니다. 남녀의 성구분 역시 다분히 임의적이어서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와 바질 홀워드? (가능합니다.) 캐롤과 루이즈? (물론입니다.) 잭 트위스트와 어니스 델 마? (아마도요?)   


  이 실험은 총 다섯 개의 페이즈, 그러니까 총 5단계로 구성됩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페이즈 2 이상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런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잘 알지만 사랑의 열병은 생각만큼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페이즈 4?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사랑과 우정의 전반적인 갈등의 양상과 그 조절법을 이해함으로서 종래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의 현실과 상식을 넘어선 최종단계까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다들 알겠습니까? 
  실험은 10주 과정으로 되어있습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진행하는 것이 허락됩니다. 다만 매주 조교들이 진척 상황을 체크할 것입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작은 갈등 한 개씩은 만들어 내고, 또 반드시 해소시켜야 한다는 점은 잊지 마십시오. 중요한 건 갈들이 일어나고 풀려나가는 과정에서 다음 페이즈로 올라갈 계기를 마련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고로 평가항목 역시 이런 부분에 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예상치 못할 창의적인 사건과 신선한 전개 방식을 생각해 낸다면 플러스 점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본 과목의 신성함을 모독하거나 담당 조교들의 권위를 모욕하거나 다른 조의 실험을 방해하는 일은 엄히 다스릴 것입니다. 참고할 겸 경고할 겸, ‘화공기초실험 II 1/2’ 과목의 수강코드가 정해진 이래 발생했던 몇 가지 불행했던 역사들을 다 함께 짚어보고 갑시다. 


  먼저 1986년. 피노키오가 자기 몸을 (신데렐라의 이상형에 가까워지도록) 셀프 개조하는 그로테스크한 전개를 구현한 학생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의 감각 역치가 많이 달라져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그때는 그렇지가 않았답니다. 특히 셀프 개조를 10주 내내 (서서히, 강도를 올려) 반복하다 마지막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는 조금 극단적인 부분이 있어서 담당 조교들은 물론 담당 교수님도 충격에 빠졌던 일이 있습니다. 위원회의 격론 끝에 D+ 학점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다음은 1991년. 피노키오를 노인으로 신데렐라를 미성년자로 설정한 (할아버지와 소녀) 반응기가 있어 해당 조 학생들이 전원 제적처리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92년 반대로 (할머니와 소년) 반응기가 등장하여 역시 해당 조 학생들에게 마찬가지의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본 실험에 있어 미성년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수 없게 하는 ‘나보코프 룰’이 바로 이때 정해진 것입니다. 이 룰이 학생들의 창의성 발현에 부정적인 제약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1994년, 피노키오와 신데렐라를 두 개로 분리된 한 사람의 자아로 결론짓는 충격 반전을 감행한 무시무시한 수강생들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난 놈들'이었지요. 우리 학과와 담당 교수님들 및 당시 조교님들은 그 수강생들의 충격적 발상에 경악하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최고점을 부여하고 바로 퇴학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신데렐라의 영혼이 레테의 강을 건너고 (음…) 이승에 남은 육신에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피노키오라는 설정이었습니다 (최대한 고상하게 표현한 거지만 직성적으로 말하자면 네크로… 그겁니다). 앞서 수강생들과는 다른 의미로 무시무시한 놈들이었고 역시 앞서 수강생들과는 다른 의미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어디보자, 1995년입니다. 짖궂고 장난기 넘치는 수강생들에게 ‘나보코프 룰’을 피해 장난을 쳐보자는 것은 꽤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야 재밌었겠죠? 그 학점으로 졸업하고 사회에 나갔을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과연 재미있을까요?) 그래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의기투합하여 본격적으로 에로티시즘에 초점을 맞춰서 반응기를 구성했습니다. 그러니까 1주차부터 피노키오와 신데렐라가 껴안고 뒹구는데 그것이 아무 사건 전개 없이 무한 반복되는… (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아무튼 훗날 우리 학과에서 일명 ‘O의 이야기’ 사태라고 회자되는 큰 파문을 남기고 그 학생들은 제적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1998년. 반응기 안을 병동으로 만드는 설정은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추천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피노키오를 에이즈 환자로, 신데렐라도 에이즈 환자로 설정한 학생들이 D-학점을 받았습니다. 그 학생들은 물론 “우리 반응기 속에서 벌어지는 반응은 뮤지컬 ‘렌트’에 필적한다”는 항변을 하였습니다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요. 마지막으로 얼마 전인 1999년. 피노키오가 신데렐라를 도끼로 토막 살해하는 반응기를 구성한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악질적인 사례였던 것이 아무 논리도 이유도 없이 1주차에 그렇게 시작을 했거든요. 심지어 갈등을 만들고 풀어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그 친구들은 반응을 일으키고 그 결과를 관찰하는 과학적인 부분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도끼와 토막 살해라는 부분에만 과도할 정도로 집착해서 큰 우려를 낳았어요. 제적은 당연하고 학교측에서는 “지금 ‘화공기초실험’이수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이 친구들 정신 세계 검증이 급선무다”라며 해당 학생들이 정신과 전문의 상담을 받도록 조치했습니다. 이후 여러분들이 이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이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단계별로 구성되어 있는 매뉴얼입니다. 잘 읽고 숙지하여 착오없도록 하십시오. 


* 페이즈 1 (강도 15) 개인안의 내적 갈등 * 


  이 시점에서 주어지는 외부의 충격은 아주 가벼운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데렐라의 옷에 (그 옷은 대개 하얀 옷이더군요) 남자가 잉크를 엎지른 다던가 (그 잉크는 항상 검은 잉크더군요), 무심코 여자가 욕실문을 열었을때 남자가 반신욕을 하고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연의 신이 두 손을 번쩍들고 혀를 끌끌찰 정도의 절묘한 타이밍으로 만나고 헤어짐을 조작하십시오. 한가지 유의하셔야 할 것은 이 시점에서는 너무 급하게 갈등을 키우기보다는 두 사람의 친밀도를 확실히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는 어차피 마지막 단계까지 성공적으로 실험을 수행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그저 그 기반을 닦는 첫 단계입니다. 너무 일찍 힘을 뺄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들어 낸 사소하고 (전형적이며) 가벼운 (그러나 절대 우연적인) 사건들이 모여가면서 피노키오와 신데렐라 사이에 정이 쌓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드시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 단계의 특징은 잠시 흔들렸던 평형이 이내 균형상태로 되돌아 가야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피노키오나 신델레라가 이미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정의내리고 분명한 확신을 갖고 행동하도록 방치한다면 다음 단계로의 전개가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페이즈 1에서의 가장 좋은 전략은 미묘한 갈등 속에서도 평정심을 찾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말하자면 가벼운 잽을 날리는 것처럼) 방식입니다. 피노키오도 적절히 스스로를 제어하고 신데렐라도 그런 마음을 비교적 잘 헤아려주어야 합니다. 전개가 약하다고 전혀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결코 페이즈 1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은 갈등의 불씨 하나쯤은 살려놓는 것이 이후의 조작에 유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피노키오가 '육남매의 장남’ 혹은 ‘빚만 10억’이라던가, 신데렐라가 '편모슬하에서 가난하게 성장’했거나 ‘신생아 때 병원에서 뒷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라던가 하는 식의 아주 쓰잘떼기 없는 단서들 말입니다. 당장이야 중요한 문제가 아닌지 몰라도 피노키오와 신데렐라가 서로 밀고 당기는 본 게임이 시작하게 되면, 이런 아무것도 아닌 문제들이 따끈따끈한 화두로 부상하게 될 것입니다. 


* 페이즈 2 (강도 30)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 I* 


  남녀관계의 본질이란 무릇 오해와 그것의 드라마틱한 해소에 있습니다. 오해가 얼마나 굵직하느냐, 그리고 그 해소가 얼마나 극적이냐에 따라서 두사람의 친밀도는 급격히 상승할 수 있습니다. 페이즈 1을 넘어서는 강도 30에 해당하는 충격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피노키오와 신데렐라의 사이에 제3의 인물을 (이하 제 3의 인물은 임의로 다스베이더라고 부르겠습니다) 등장시켜 이른바 '삼각관계'를 이루는 것이 가장 손쉽고 수월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수강기호 CBE-2848 <삼각관계론>을 참고하십시오) 


  제 3의 인물 다스베이더를 남성으로 투입한다면 표준적으로 통용되는 모델이 있습니다. 업무량은 그리 많지 않으면서도 능력이 있다고 사료되는 미남입니다 (사실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말이 안되는 소리기는 합니다). 일찍이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드류 P. 위너 (Drew P. Wiener) 교수가 한 논문에서 밝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인공 피노키오가 마주하는 갈등의 크기는 다스베이더의 외모, 집안, 경제력, 사회적 지위, 여가 시간, 이동 거리에는 비례하고 성격, 얼굴 두께, 업무량에는 반비례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만약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격무에 시달리며 밤에는 또 술자리에 시달려 위장약을 챙겨먹어야 하는 라이벌이라면 피노키오에게 커다란 압박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다스베이더가 아주 온화하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면 (일단 피노키오와 신데렐라의 사이에 끼어들어 멍멍이 판을 만들 이유도 없거니와) 피노키오가 너무 부담을 갖지 않거나 반대로 너무 쉽게 물러서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스베이더에게도 나중을 위해 필요한 비밀들이 있고 이미 이 단계에서부터 사소한 단서들을 넣어 놓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국내 굴지 모 그룹 회장의 숨겨진 아들 (혹은 딸 혹은 손자 혹은 손녀)’ 혹은 ‘국내 굴지 모 그룹 회장의 시간 여행자’ 혹은 ’국내 굴지 모 그룹 회장의 숨겨진 영능력자’ 따위로 말입니다. 그럼 이제 알맞게 설정하고 조합한 다스베이더를 반응기 속으로 투입하십시오. 다스베이더는 투입 직후부터 신데렐라와 유난히 잦은 마주침을 일으키며 피노키오를 자극할 것입니다 (전술한대로 갈등의 크기기 다스베이더의 여가 시간 및 이동 거리와 정비례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된 사실입니다). 


  이제 반응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의깊게 살펴보십시오. 피노키오는 신데렐라와 새로운 인물인 다스베이더 사이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감지하게 되며 다시 우정의 평형은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에 피노키오는 스스로를 제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 결과 조금씩 분리되어 가던 액체 또한 다시금 엉망으로 섞여서 보기에도 금즉한 적갈색을 띠게 될 것입니다. 그 혼란의 정도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투입된 다스베이더가 얼마나 뻔뻔스럽고 오해스러운 장면을 마구 남발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노키오의 마음을 마구 휘몰아치는 거센 풍랑을 만난 듯 흔들리게 만들 수 있다면 여러분은 두 번째 단계의 조작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때 깨어진 평형을 원점으로 돌리는 난이도는 페이즈 1과 비교하면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다스베이더를 반응기 안으로 다스베이더를 투입하도록 주문을 할 수 있지만 그는 (혹은 그녀는) 통제 변인도 조작 변인도 아닙니다.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다스베이더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비단 피노키오만이 아니라 우리 실험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손을 때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물론 시간이 약이라고 언젠가는 다시 평형에 이를 것은 사실입니다만 한 학기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조작을 가하고 그 결과를 관찰하도록 되어 있는 이 실험 수업에 있어 그런 식의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런 경우 성적 감점에 대한 우려를 피해가기는 어렵습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여러분의 성적은 소란은 일으키기는 하되 결코 그 평형을 잃지는 않도록 조작하는 능력으로 평가받습니다.


* 페이즈 3 (강도 50)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 II*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남녀관계의 본질이란 무릇 오해와 그것의 드라마틱한 해소에 있습니다. 페이즈 2의 강도 30을 넘어가는 갈등과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제 3의 인물과 반대 성역할을 하는 제 4인물을 하나 더 집어 넣는 것입니다 (이하 제 3의 인물은 임의로 라푼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바야흐로 ‘사각관계’ (혹은 ‘쌍각관계’)의 실현입니다. 동서고금의 많은 연애물에서 (꼭 짜고 치는 것처럼) 남자 둘 여자 둘이 등장하는 것에는 다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네 남녀의 사랑과 우정은 급기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도가니로 접어들게 되는데…’ 따위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멍멍이 소리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 4의 인물 라푼젤를 여성으로 투입한다면 역시 표준적으로 통용되는 모델이라는 것이 있으며 역시 이 역시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드류 P. 위너 (Drew P. Wiener) 교수 연구팀이 복수의 논문을 통해 발표한 사실입니다. 제 4의 인물 라푼젤은 통상 신데렐라와 반대의 성격을 지니는 캐릭터로 설계가 됩니다. 즉 신데렐라가 ‘청순가련 시골소녀형'이라면 라푼젤은 ‘도도한 도회지 여성의 전형’이어야 균형이 맞다고 받아들여집니다. 반대로 신데렐라가 ‘외로워도 슬퍼도 해맑게 웃는 억척발랄 캔디형’이면 라푼젤은 ‘외롭거나 슬프면 떼를 쓰는 철부지 부잣집 무남독녀형’이 딱 맞아 떨어집니다. 라푼젤의 역할은 신데렐라의 카운터 파트로 피노키오의 심신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푼젤의 적절한 활용이 이 과목에 높은 성적을 끌어낼 수 있는 묘미와도 같습니다. 


  문제는 라푼젤 역시 다스베이더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기에 한 번 깨어진 평형을 원점으로 돌리는 난이도가 더 올라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스베이더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혹은 그는) 통제 변인도 조작 변인도 아닙니다. 일단 반응기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면 우리 실험자들 역시 그녀를 (혹은 그를) 마음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라푼젤이라는 팩터는 피노키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전까지 우리는 피노키오의 마음에 예측 가능한 모델을 적용할 수 있었지만 하나 이상의 변수를 다루어야 하는 이제부터는 기존 모델의 활용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라푼젤의 투입은 ‘하이 리턴’을 위한 묘수이나 ‘하이 리스크’를 안아야 하는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잘 쓰면 약이지만 못 쓰면 독’입니다). 


  작은 팁을 하나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다 싶을 때는 오히려 긴장의 끈을 풀어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때로는 이보 전진을 위해 일부 후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차근차근 두 사람의 갈등을 키워나가되, 짧게나마 갈등 곡선이 정체 및 하강하는 시기를 삽입하여 일종의 쉼표를 찍어주세요. 사실 주어진 상황은 너무나 뻔합니다. 관건은 이런 뻔함 속에서 얼마나 기가 막히고 신선한 상황을 적시 적소에 삽입하느냐는 것입니다.  


* 페이즈 4 (강도 75) 개인과 집단간의 갈등 * 


  여기에서부터 가해지는 충격은 정상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의무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의 머리로는 생각해 낼 수가 없는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사각관계’라는 비현실적 조작으로 이리저리 꼬아놓아도 강도 50인데 이 단계는 무려 강도 75에 해당합니다. 그 이야기는 ‘칼만 안 들었지 강도’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수강생 여러분의 '사랑과 우정 사이' 조작 실험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는 여기서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이 페이즈에서는 우선 새로운 관계 정의가 내려집니다. 예를 들면 매도인과 매수인, 임대인과 임차인, 도급인과 수급인, 위임인과 수임인, 간선상차와 간선하차 (이건 아닌가요?) 등으로 말입니다. 이제까지 제출된 레포트에서 찾아낸 아주 뻔한 방식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봅시다. 첫째, (마침 형편이 넉넉치 않은) 신데렐라네 집에 남는 방 하나에 (마침 홈리스 처지를 목전에 둔) 피노키오가 월세로 들어갑니다. 이 경우 방세에 마음을 실어 보내는 것으로 '사랑과 우정 사이'에 이어 '임대와 임차 사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다스베이더와는 달리 업무량이 과중한) 피노키오가 아래 두고 부릴 사람을 채용하는데 (라푼젤과는 달리 직접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신데렐라가 지원합니다. 이 경우 고용계약에 마음을 실어 보내는 것으로 '사랑과 우정 사이'에 이어 '고용과 피고용 사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필) 신데렐라가 원청업체에서 일하는데 (하필) 피노키오의 회사에 하청을 주거나 (하필) 법정에 서게 된 피노키오의 변호를 (하필) 신데렐라가 맡게 되거나 하는 등 ‘지킬 박사도 아닌데 기이한 사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이 페이즈에서는 피노키오와 신데렐라 (그리고 넓게 잡아서 다스베이더와 라푼젤까지) 등 관계 당사자만이 아닌 주위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게 됩니다. 새롭게 내려진 관계 정의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주변 사람들입니다. 친구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고 물론 가족과 친척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주인공들의 일에 관심이 많고 말도 많습니다. 게다가 입에서 입으로 말을 옮길만큼 여가 시간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주변 인물들은 나름대로 냉철한 분석을 통하여 두 남녀의 관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방법만으로 제멋대로 사건에 개입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일일이 조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통제도 안됩니다.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어떤 모델도 적용이 안됩니다. 페이즈 3까지가 몇 개의 말을 보드 위에서 이리 저리 조작하는 정적인 체스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플래툰(올리버 스톤, 1986)’의 죽음의 계곡 전투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스티븐 스필버그, 1998)’의 오마하 해변 상륙 작전을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뜩이나 다스베이더의 공세와 라푼젤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그리고 신데렐라를 향한 감정을) 지켜내기 위해 아둥바둥대던 피노키오는 당연히 더더욱 궁지에 몰리고 더욱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피노키오가 하얀 색 수건을 링 위로 던지는 일도 허다하게 벌어집니다. 그만큼 이론과 계산만으로는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우정을 각각 정제해내기 어려운 단계이고 단 한 번의 실수로 한 학기의 실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예민한 단계입니다. 이 과목의 역사에 있어 많은 수강생들이 이 단계에서 한 학기 농사를 망쳤습니다. 6주 내지 7주차까지 훌륭한 성취도를 보이다가도 이 대목에서 ‘블랙 아웃’된 경우가 허다합니다. ‘블랙 아웃’은 우리 과목에서 조교와 수강생들끼리 사용하는 전문 용어인데 속된 말로 하면 ‘나가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쪽 비이커 (그러니까 사랑 비이커와 우정 비이커) 모두에 오정어 먹물처럼 보이는 검정 폐수가 나오고 하트 모양 실험 장치 및 내부 반응기도 까맣게 물들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한 번 그 현상이 벌어지면 (특히 이 시점에서는) 수습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쯤되면 여러분에게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는 D 학점과 F 학점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정도일 겁니다.          


* 페이즈 5 (강도 100) 개인과 우주와의 갈등 * 


  이쯤 되면 거의 ‘막 하자는 얘기’라고 볼수가 있겠습니다. 강도 100. 다시 말해서 세상 공기 속을 떠다니고 있을 수많은 잠재적 가능성들이 아무 여과없이 실현되어 버리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단계입니다. 숨만 쉬어도 폭발하고 숨만 쉬어도 고장나며 숨만 쉬어도 욕을 먹고 벌집이 됩니다. 이 단계로 접어든 이야기들에 비하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제롬 로빈슨 & 로버트 와이즈, 1961)’는 코믹 활극쯤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반응기 속 상황은 막 나가더라도 여러분까지 막 나가서는 곤란하겠지요? 대단히 정교하게 조작하지 않으면 단박에 끔찍한 엔딩과 끔찍한 성적을 마주할 수도 있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페이즈에서는 앞서 등장한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비밀을 안고 등장하며 그 비밀들은 일말의 여지없이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됩니다. 아마 수강생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래봐야 페이즈 4의 확장판 혹은 파워업-키트 정도 아닌가?’ 혹은 ‘무슨 우주와의 갈등 씩이나 된다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페이즈의 핵심은 등장한 비밀들간의 연결이 다분히 비논리적이고 무작위적이며 고약하고 빙퉁그러졌다는 부분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의 장난’이 아니고서는 적절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정도랄까요? 


  심지어 이 페이즈에서 연쇄 폭발하는 비밀들은 두 남녀 사이의 관계를 사랑도 우정도 아닌 새로운 것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가장 유명한 사례 하나를 복기해봅시다. 피노키오의 아버지(어머니)와 신데렐라의 어머니(아버지) 사이의 결코 적지 않은 과거 인연을 폭로하는 기법 말입니다. 그 결과 그들에겐 더 이상 피아의 구분이 무의미해집니다 (지켜보는 우리만 기운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단군 할아버지까지 올라가야 자신들의 혈연적인 관계를 입증할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들은, 생각보다 무척 가까운 곳에서 운명의 실타래가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마 경악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같은 종이라는 생물학적 이유 이상의 동질성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건 피노키오가 다스베이더의 공세나 라푼젤의 유혹, 촉새 동료들의 입방아,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 당숙, 당고모, 사돈 어른의 참견을 넘어 급기야 사회 및 도덕과도 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와 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노키오는 이제 진정한 수준의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사랑이라는 도박판의 판돈으로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수강생 여러분도 남아있는 역량을 모두 몰아넣어 피노키오를 궁지로 몰아넣으십시오. 불을 뿜는 용을 등장해도 좋습니다. 날개 달린 호랑이가 활개를 쳐도 좋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어그러질 것입니다. 땅이 구름처럼 갈라지고 하늘에선 바다가 내릴 것입니다. 피노키오는 이제 눈이 하얗게 뒤집혀진 살아있는 불덩이입니다. 그의 운명을 지휘하고 변주하는 여러분이 만들어낸 아마겟돈과 온 몸으로 충돌해야 합니다. 이것이 빅뱅(Big Bang)입니다. 수강생 여러분들의 조작 끝에 계기판의 숫자가 강도 100을 정말로 달성했을 때 꼭 반응기 안을 한 번 주의깊게 들여보기를 권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만 가득할 것입니다. 그간의 모든 소동과 소란이 한 줌의 재로 화하여 드넓고 고요한 우주 공간 어딘가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조교가 이 과목의 수강생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이번. 학기 ‘화공기초실험 II 1/2’의 10주 과정 실험을 모두 마치게 됩니다. 분리 정제된 양쪽 물질이 담긴 두 개의 비이커를 은박지로 조심스럽게 싸서 조교에게 제출하십시오. 참고로 문제 없이 실험을 끝낸 수강생들이라면 사랑 비이커에는 핑크색 용액이 우정 비이커에는 하늘색 용액이 분리되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실험의 진행 과정 및 조작 기록은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하여 제출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매주 실험이 끝났을 때는 다음 조를 위해서 꼭! 반응기의 전원을 끄고 실험 기구를 깨끗하게 정리합시다. 이상입니다. 지금까지 긴 오리엔테이션을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이제 ‘사랑과 우정사이’ 첫 주차 실험을 시작해봅시다.

(2000년 12월)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