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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첫사랑 연작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1. 6. 3.

본문

1960 

초록빛 소나기


  소년의 이름은 철수였고 소녀의 이름은 영희였다. 철수는 장차 영농후계자로 자라날 어엿한 시골소년이었고, 영희는 장차 명문여중과 명문여고를 거쳐 명문여대에 들어갈 예정인 오색 영롱한 도시소녀였다. 시골소년과 도시소녀의 조합이란 우리가 황순원의 '소나기' 이래로 너무도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이라 충분히 넌더리를 낼 법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소녀의 깔끔 단정함에 소녀는 소년의 무한한 자유로움에 필연적으로 이끌리게 된다. 역시 뻔하다고 하겠지만 한번 그들의 옷매무새를 살펴보자. 선천적으로 면역기능이 부실하여 몸이 약한 소녀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하얀색 레이스가 달린 하얀색 블라우스와 선홍색 치마를 입고 있다. 반면 성난 황소도 거꾸러뜨릴만치 튼실하여 면역기능이라는 것이 애초에 필요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소년은 소매가 없는 낡은 러닝 셔츠와 할아버지의 작업복을 대충 잘라 만든 낡은 반바지를 입고 있다. 


  시냇물을 처음보는 소녀는 그것이 마냥 신기해서 하염없이 들여다 본다. 맑디 맑은 시냇물에는 전혀 다른 두 아이의 모습이 어른어른 비치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해도 자연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해야 할텐데, 시냇물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은 하나도 공평하지가 않다. 집안의 수준이 드러나고, 도농간의 격차가 드러나며, 고로 사회적 지위가 드러나고 자본사회적 계급마저 드러나 버리는 아주 완벽한 콘트라스트이다. 초라한 소년은 시냇물이 재미가 없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등하교길에 보고 또 보고, 심심해서 한번 보고, 정겨워서 또 한번 보고, 집에서 아버지한테 몽둥이 찜질 당할때마다 씻으러 오느라고 또 보게 되는 시냇물이 당연히 재미없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에 흐르는 물을 몽땅 마셔버리고도 싶다. (그러면 비쳐 보이는 것도 없겠지.) 그러나 동네에서 사내답기로는 제일 가는 것으로 평판이 자자한 소년은 대장부 체면에 여자를 두고 그냥 가버릴 수는 없다. 홧김에 멋쩍게 돌멩이나 하나 집어 물수제비나 뜬다. 


  통통통통. 조막만한 돌덩이가 수면을 줄기차게 튀어 다니면서 동그란 파문을 만들어 낸다. 신기해 하는 소녀의 눈도 동그래진다. 돌덩이가 튕기는 곳마다 소녀의 새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소녀의 새하얀 얼굴에도 파문이 인다. 
- 저기…… 그거 나도 가르쳐 줘. 


  콩닥콩닥. 자기도 모르게 피가 얼굴로 몰린다. 긴장한 소년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자신의 이름이 '저기'가 아니라 '철수'이고, 자그마치 한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가 감히 자기에게 반말을 했으며, 그것이 이 동네에서 유일한 장군감으로 회자되는 재목이자 인근 꼬맹이들의 실질적인 대장으로 군림하는 자신의 위엄에 누가 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소년은 오로지 씩씩하고 멋지게 보여야 겠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이미 전기가 끊어진지 오래다. 이 놈의 누전 차단기가 어디에서 내려간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머리는 돌려야 한다. 오토로 안되면 스틱으로 전환해서라도 돌려야 한다. 무식하게도 무지하게도 보이면 안되기 때문이다. 전혀 무식하지도 무지하지도 않아보이는 예쁜 소녀는 예의 그 커다란 눈을 좌우로 굴리며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있다. 소년은 세련되고, 그 뭐라더라, 교양있어 보일 말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전등이 나가고 이젠 어둠이 사로잡은 머릿속을 쥐들이 튀어나와 마구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소년은 딱딱한 머리를 굴렸고, 소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렸다. 하얀색 블라우스와 선홍색 치마의 면역기능마저 결핍된 소나기적 소녀에게는 눈망울을 한나절이라도 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듯 했다. 소년은 여러 측면에서 아무래도 '짱돌'보다는 ‘돌멩이’가 어휘 선택상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그건 말이야. 돌멩이를 집어서…… 


  던진다, 놓는다, 날린다, 후린다, 꽂는다, 소년의 머릿속은 대단히 복잡해졌다. 물수제비의 탄력적이고도 역동적이며 힘이 넘치는 모습에 걸맞는 동사에는 무엇이 있을까. 도대체 뭐라고 해야 교양이 있어 보일까. 아, 세종대왕께서는 어쩌자고 이렇게 복잡다단한 표현이 가능하도록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자, 한글을 만드셨을까. 깜깜한 머릿속에서 깜깜한 '쥐'들은 전후좌우로 마구 돌아다녔다. 이러다가는 페스트 따위에 걸려서 조만간 뒤지고 말기라. 사실 소년에게 물수제비는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등하교길에 뜨고, 또 뜨고, 심심해서 한번 뜨고, 정겨워서 또 한번 뜨고, 집에서 아버지한테 몽둥이 찜질 당할때마다 씻으러 오는김에 또 뜨게 되는 물수제비가 당연히 재미없다. 고민하는 소년의 모습이 맑은, 그러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는 않은 시냇물에 어른어른 비치운다. 어른어른. 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누나.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던지고, 놓고, 날리고, 후리고, 꽂는 이외의 멋진 말을 생각해낼 수 있는 세련되고 교양있는 어른이 되고 싶누나. 


풍덩. 


  새침한 외모와는 달리 성격이 급한 소녀는 돌연 실어증에 걸린 소년을 뒤로 하고 나름대로 아무거나 집어서 일단 시냇물에 던져 보았다. 그 귀여운 손놀림이 제법 야무지기는 하였으나 소년의 돌과는 달리 소녀의 돌은 물 속 깊숙히 꼬르륵 가라 앉아 버린다. 소녀는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다. 장차 명문여중과 명문여고를 거쳐 명문여대에 들어갈 예정인 영롱한 도시소녀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확 주저앉아서 땡깡이라도 부리고 싶지만, 아버지의 정계진출과 집안의 명예에 누를 끼칠 수는 없다. 홧김에 소녀는 벌떡 일어나서 뒤쪽으로 뛰어간다. 당연히 앞으로는 뛰어갈 수는 없다. 앞에는 시냇물이 있었으니까. '던진다'와 '날린다'로 최종 후보를 압축하고 보다 교양있는 표현을 고민하던 소년은 깜짝 놀란다.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비록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소년은 돌맹이를 아무데나 던져놓고 그 뒤를 따라 달린다. 이런 사연으로 도시소녀와 시골소년은 경운기도 지나가지 않을 한적한 산길을 달리게 된다. 풀잎을 밟고, 풀잎에 스치고, 풀잎에 베이고. 바람을 밟고, 바람에 스치고, 그러나 바람에 베이지는 않고. 


  교양있는 아이로 키워진 물수제비를 못 뜨는 소녀와 교양있는 어른이 되고 싶은 물수제비에 이력이 난 소년은 그렇게 달린다. 혹여 그들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지적 존재가 있었다면 필경 흐뭇한 미소를 지었으리라. 문제가 있었다면 소년의 심장이 너무 튼실하여 힘차게 피를 내뿜었고, 소년의 팔이 너무 탄탄하여 매섭게 공기를 가르고 움직였으며, 소년의 다져진 다리가 스프린터의 그것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땅을 디뎠다는 것이다. 그게 문제가 되는 이유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런 양태의 달리기는 로맨틱한 사랑놀음에 완벽히 부적합하다. 둘째로 운동회의 계주라면 모를까, 사뿐사뿐 공놀이하는 강아지처럼 뛰어가는 소녀를 따라가기에는 너무도 진지하고 심각한 주법의 러닝이다. 셋째로 그렇기때문에 소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소녀는 덜컥 겁을 집어 먹어서 소년이 은근히 따라와주기를 바라며 인적이 뜸하고 분위기가 오붓한 산속으로 사뿐히 깡총거리는 대신에, 마을로 도로 내달리게 된다. 그것도 마치 범에게라도 쫓기는 것처럼. 소년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하고 중요한 소녀가 소녀보다 몇 배나 덜 중요하고 덜 중요한 소년에게 쫓기는 광경을 본 마을 어른들은 빗자루, 나무 몽둥이, 절구공이, 대대로 전해오는 육모방망이, 기타 손에 잡히는 온갖 물건을 들고 나와서 소년을 흠씬 두들겨팼다. 이것이 열살 꼬마들의 이상야릇한 로맨스가 고대 희랍의 비극을 능가하는 비극으로 끝나버린 일천구백육십년의 초록빛 사연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1985
분홍빛 여우비


  소년의 이름은 민수였고 소녀의 이름은 은정이라고 했다. 그들은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이제 막 층층이 새로 올라가는 새 아파트들과 비교하기엔 조금 낡았지만 그리 오래된 편은 아니라 당분간 재건축되기에는 어려운, 그런 아파트였다. 같은 아파트, 같은 단지, 같은 동하고도 이웃에 사는 그들은 같은 유치원을 비슷하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현재는 같은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방과 후에는 같은 속셈학원에 다니고 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굳이 이들의 관계를 정의내리자면 '단짝'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아이들이 단짝이면 부모들 사이에도 자연히 교분이 생긱기 마련이다. 부모들 사이의 친분이 아이들은 친하게 만드는 경우와는 또 반대의 케이스이다. 도대체 부모들이 무슨 속셈으로 애들을 함께 속셈학원에 보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옛말에 '남녀칠세 부동석'이라 했는데 어쩌자고 국민학교 3학년이나 된 애들을 붙여 놓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들은 매일 같은 자리에서 속셈학원의 셔틀버스를 기다렸고, 버스에 올라선 바로 옆자리에 앉았으며, 물론 속셈학원에서도 나란히 앉았다. 이미 몇몇 주책맞은 선생들은 두 아이의 장래를 염려했으며 몇몇 되바라진 애들은 두 아이의 정분을 온 동네로 퍼뜨리고 다니느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 중차대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온 세상을 통틀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순수한 당사자들과 자식들을 철통같이 믿고 있는 양쪽 부모들, 합이 이 더하기 사, 여섯 명 뿐이었다. 온 세상에서 오로지 여섯 명. 


  물론 당장은 소년과 소녀의 우정이 더할나위없이 순수한 성질의 것인지 몰라도,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 문제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세상에는 수많은 나누기가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이며 손쉬운 것이 남과 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출생당시 주민등록 번호부터 갈라진 1과 2의 차이는 언제고 반드시 드러나서 두 아이의 우정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적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이렇듯 인생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사건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법이다. 


  그 문제의 어느날, 그때까지 무 결근과 무 사고와 무 자식의 3무의 '트리플 크라운'을 자랑하던 속셈학원 셔틀버스의 기사 마동탁씨는 그만 장위동에서 월계동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복부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로 아침을 때운 것이 화근이었나, 아니면 점심에 기사식당에서 퍼먹은 메기 매운탕에 문제가 있었나, 그것도 아니면 하루종일 버스에 앉아서 수행해야 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드디어 몸에 이상이 온 것인가, 고민을 거듭하던 찰나에 2차 통증이 엄습했다. 아랫배에 걸리는 하중으로 미루어 보건대, 유감스럽게도 이 아픔은 격무, 내지는 극무에 기인한 것은 아니지 싶었다.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비상 깜빡이를 켜고, 브레이크를 두어 번 밟아 셔틀버스를 한적한 아파트 단지의 공터에 세워 놓은 다음에, 바람처럼 (목격자에 의하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뛰어내려 인근 화장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가 하오 16시 42분. 사실 이때 버스는 아파트 단지를 한바퀴 돌고 석계역을 지나 다른 아이들을 태우러 달려가고 있었어야 옳았다. 


  사건은 3무의 버스기사 마동탁씨가 화장실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소요되었던 15분 사이에 일어났다. 달리 말하자면 그가 그렇게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우선 이때의 셔틀버스 안을 살펴보자. 지직거리던 FM 라디오에서는 가수 전영록이 사랑을 쓰려거던 제발 연필로 쓰시라고 외쳐대고 있었고, 새까맣게 색이 바란 조그만 8인승 승합차의 맨 뒷자리 시트에는 민수와 은정, 이렇게 두 아이만이 달랑 나란히 참으로 오붓하게도 앉아 있었다. 같은 시각에 다른 아이들은 아마도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각자의 아파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민수와 은정은 그들의 아파트가 속셈학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인 이유로 남들보다 먼저 버스를 타게 되었을 뿐이고, 정말 그 뿐이었다.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조차 몰랐다. 


  하기야 늘상 붙어 다니던 애들이, 버스 안에 단 둘이 남겨졌다고 해서 달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문제는 그 날이 바로 문제의 그 날이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그 날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사랑은 연필로 쓰시라는 가수 전영록 때문도 아니었고, 창밖으로 바스라진 낙엽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서늘뻑적한 초가을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문제의 그 날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버스 안, 그것도 낡은 9인승 승합차의 좁은 좌석, 문제의 그 날은 소녀로 하여금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엉뚱한 소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다른 차원의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전영록과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에 관한 생각이었다. 소년이 물었다. 물론 아래턱을 벌려 치아와 치아의 사이에 뭔가를 강압적으로 고정시켜 물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이야기다. 
- 야, 저 노래에서 말이야, '사랑을 쓰려거던'이 맞냐, 아니면 '사랑을 쓰려거든'이 맞냐? 


  그러나 소녀는 '든'과 '던'의 차이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시 소년과 소녀의 사이에 과연 정신연령상의 차이가 있었는지를 이제와서 가늠하기란 어렵지만, 소녀는 보다 실용적이며 보다 흥미로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전날 보았던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말이다. 남여 주인공의 결정적 장면, 가수가 어디에 숨어서 부르는지 돌연 아련하게 울려퍼지는 러브 테마와 뜬금없이 원을 그리며 쉴새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카메라, 그 속에서 그들이 그 날 방영분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바로 그 독특한 방법. 
- 혹시 말이야…… 너 있잖아, 그…… 뽀뽀해봤어? 


  소년은 그 말뜻을 금새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둔해서 그런지도 몰랐지만, 곧바로 소녀가 밀어제끼는 바람에 생각할 틈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승합차의 검푸른 시트에 밀려 눕혀진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서 바둥거렸지만, 아침마다 동네 수영장에서 단련된 강인한 소녀의 팔은 소년의 어깨를 억세게 찍어 눌렀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살포시 소년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분홍빛은 이내 소녀의 입술에서 소년의 뺨으로 옮겨졌다. 소년의 뺨은 빨갛게 물이 들었다. 덩달아 소녀의 뺨도 빨갛게 물이 들었다. 쑥스러움. 그들은 벌떡 일어난다. 꿀이라도 훔쳐 먹은 것처럼 아무 말도 없이, 소녀는 왼쪽 창문을 내다보고 소년은 오른쪽 창문을 내다본다. 3무의 버스기사 마동탁씨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연필로 사랑을 써야만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고 외치던 라디오속의 전영록은 이제 '천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기이한 사연에 관하여 불러제끼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는 플랜카드와 상모를 뒤집어 쓴 호돌이의 그림이 억센 바람에 힘차게 휘날렸다. 이것이 열살 꼬마들의 이상야릇한 로맨스가 무안하디 무안한 침묵으로 끝나버린 일천구백팔십오년의 분홍빛 사연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2010
자주빛 작달비


  소년의 이름은 니키, 소녀의 이름은 새라라고 했다. 니키와 세라는 대강당에서 치뤄진 학예회 뒤풀이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아이들은 무알콜 음료를 마시며 메가리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클럽음악과 눈이 따갑기만한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 로봇 동작처럼 알 수 없이 반복되는 춤을 추었다. 여기서 클럽음악이 지루하다는 것이나, 사이키 조명에 눈이 따갑다는 것은 그런 문화를 지독히 혐오하는 편집자의 논평일 뿐 정작 학예회 뒤풀이에 참여한 아이들을 좋아했을 수도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니키와 새라도 좋아했을 것이다. 그들은 암실수준의 50럭스의 조명 아래에서 미친듯이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둘이 추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만치 흥겨울 그 때, 어둠속에서 니키의 팔목과 새라의 팔꿈치가 스치면서 그들의 운명적 지침은 돌아가기 시작한다. 춤을 추면서 누군가와 몸을 스치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닐진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이 찌릿하다. 이런 경우, 신상명세 파악은 바로 들어가 주는 것이 예의다. 니키가 묻는다.

- 몇 학년이야?
  자고로 질문은 짧아야 맛이고 대답은 더 짧아야 맛이다. 6시 방향에서 11시 방향으로 핑크색 머리를 쓸어넘기며 새라가 답한다. 
- 3학년.
  3학년? 아직 어린애다. 좌우로 스탭을 밟으며 니키가 속으로 웃어보인다. 
- 난 4학년인데. 3학년이면 아직 분수가 뭔지도 모르겠네.
  제 분수도 모르면서 센 척하기는. 그렇게 녹록히 넘어가지 않는 새라는 새초롬히 튕겨준다. 
- 그래도 구구단은 다 떼었어.


  니키는 감탄한다. 얼굴만 반반한게 아니라 유머 감각도 전교에서 제일이로다.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니키는 새라에게 노골적으로 가까이 가기 시작한다. 새라 역시 구구단을 운운한 자신의 튕김이 제대로 먹혀들어갔음에 만족하는지라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촌스럽게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고, 그들은 냅다 춤만 춘다. 눈이 부시도록 현란한 춤사위 속에서 그들은 결코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저 위대한 그루브 가문의 적계 자손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름을 묻지도 않는다. 전화번호를 묻지도 않는다. 주소와 본적을 묻지도 않는다. 형제가 몇인지, 자매가 몇인지, 그것도 알 바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같은 조명 아래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인지도 궁금하지가 않다. 그런 것을 물어본다면 촌스러운 거다. 잘나지 않아도 되고, 예쁘지 않아도 되며, 능력이 없어도 되지만, 촌스러운 건 안된다. 촌스러운 것은 이 시대 최대의 죄악이다. 니키의 주머니에 베레타 25구경이 들어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언젠가 소년이 이루말할 수 없이 촌스러워지는 날, 아무리 노력하고 피눈물을 흘려도 최신 트랜드를 따라갈 수 없고 다시는 쿨하다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되는 날, 그런 날이 온다면 망설임 없이 입에 총구를 밀어넣고 방아쇠를 당길 예정이다. 뒷통수에 바가지만한 구멍이 난 채 흉칙하게 쓰러지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 편이 촌스럽다는 모욕을 견디는 일보다는 나을 것이다. 
- 봉사 활동 시간은 채웠어? 4학년부턴 진급하려면 봉사 점수가 필요하다며.
  춤을 멈추지도 않고, 눈길을 주지도 않고, 새라가 물었다. 일부러 하는 무관심한 척이다. 산전수전 다 겪어가면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올라간 니키에게는 그 뻔한 새침함이 모두 들여다 보였다. 
- 아니, 아직. 하지만 언제나 봉사하는 삶을 살고있지. 지금도 당신을 위해 봉사하는 중이고.


  새라는 순간적으로 움찔한다. 느끼함도 이정도면 1등급이다. 프라이팬에 베이컨을 구우면서 나오는 기름을 모아서 쌀을 씻어서 밥을 지은 다음에, 그 밥에 우유를 말은 다음에 치즈를 얹고 다시 전자레인지에 돌린 것만큼 느끼하다. 표정은 그보다 더하다. 그야말로 역하기 그지없다. 피어스 브로스넌과 피어스 브로스넌을 합친 표정이다. 괜히 제임스 본드가 쓰던 베레타 25구경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온 몸을 휘감아 오르는 거부반응,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느끼함도 느낌이고 느껴지니까 느끼함이다. 무엇보다 최소한 촌스럽지는 않다. 느끼한 것은 용서가 되어도, 촌스러운 것은 절대 용서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럼 저 4학년 남자는 충분히 용서가 된다. 적어도 아직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맛이 가버리는 날이 오면 그때가서 없애 버리면 되는 일이다. 새라는 그런 날에 대비해 책가방 속에 학생용 나이프와 고무 장갑, 그리고 공업용 토치를 가지고 다녔다. 촌스러워지기 전에 알아서 순순히 떠나지 않으면 녀석들의 심장에 나이프를 꽂아줘야 하니까. 고무 장갑이 필요한 이유는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공업용 토치가 필요한 이유는 여타의 증거를 태워버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바로 소년이 4학년이라는 사실이다. 목에 매단 뼈 목걸이, 일부러 반쯤 태워버린 머리, 허벅지에 차고 있는 총기, 성한 곳이 없는 손등, 겉으로 보기에는 밤마다 이륜 구동기를 타고 신설동 로타리를 누비는 날라리처럼 생겼는데, 아직까지 쫓겨나지 않고 학교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고학년으로. 아아,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니는 진정한 한량이구나. 
- 미안하지만, 조금 있다가 혈액 샘플 좀 주시겠어?
  진정한 한량인 소년은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이다 말고 물었다. 
- 피는 왜? 나 피 뽑는거 싫은데.
  피? 갑자기 무슨 피? (설마 이 4학년 녀석이 뱀파이어?) 소녀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피 뽑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러나 소년은 단호했다. 입에 주사기를 물고, 소녀의 팔을 두어번 찰싹찰싹 때린 다음에 정맥을 찾아내고 다시 소녀의 팔목에 고무줄을 묶었다. 현란한 사이키 조명 탓에 고무줄이 반짝반짝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너가 맘에 든다. 그런데 나는 자유분방하기는 해도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야. 때문에 만약 우리 이전 세대의 어딘가에서 유전자가 혼합되어 있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을거야. 또한 네 지문을 얻어가서 경찰 기록을 조회하고, 인터폴에게도 한번 의뢰해볼 예정이야.
-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 약속하지. 만약 너에게 아무런 질병이 없고, 우리가 남매지간이 아니라면, 혹은 8촌의 안쪽으로 들어오는 가까운 친척지간이 아니라면, 그리고 너에게 아무런 범죄 기록이 없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너를 만난다. 내 이름 니키를 걸고 약속하지.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라.


  소년은 소녀의 팔에 주사기를 꽂고 일정량의 혈액을 뽑아내었다. 그것을 다시 튜브에 옮겨 담고선 정성껏 견출지를 붙여 주머니에 넣었다. 지하실에 가져가서 분석해 볼 요량이다. 정말 쉽지 않은 요청을 잘 견디어주었기에, 소년은 소녀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래서 협조해준 대가로 빵과 우유, 그리고는 '최신 영화표'를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내뱉은 언약의 증거를 보여주겠노라고 선언했다. 소년은 주머니에서 먹지와 바늘과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는 팔을 걷어 올리고 문신을 새겼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이키 조명 아래 미친듯이 몸을 놀려대는 아이들, 그 사이에서 피를 뽑힌 소녀와 자신의 팔뚝에 사랑의 증표를 수놓는 소년, 이 모든 것들이 지리하게 이어지는 단조로운 클럽음악 위에서 춤을 추었다. 3학년인 소녀는 자유분방하지만 나름대로 윤리적이고, 무모하지만 그만큼 과단성도 있는 이 4학년의 소년이 어째 싫지가 않았다. 그의 주머니에서 리나, 케이트, 스칼렛, 줄리아, 엘리자베스,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이 붙은 혈액 샘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것이 열살 꼬마들의 이상야릇한 로맨스가 배신과 분노로 얼룩진 너저분한 비극으로 끝나버리게 된 이천십년의 자주빛 사연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2035
진회색 산성비


  소년의 이름은 1011001, 소녀의 이름은 1010011이었다.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모두 1로 시작하는 까닭은 이 숫자들이 주민등록번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기 2035년을 살고있는 어엿한 소년과 소녀였다. 다만 0과 1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지금과 다를 뿐이지. 소년도 0과 1로 이루어졌고 소녀도 0과 1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사용자 기반의 인터페이스가 갖춰진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만났다.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연은 곧 운명이었다. 프로그램이 내재한 치명적인 오류로 인하여, 원래는 만나지 않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소년과 소녀는 운명적으로 만나버렸다.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는듯한 기계적 세상 속에서도 우연한 만남이란 존재하는 법이다. 잘못 연결된 전화가 인연을 부르기도 하고 잘못 배달된 이메일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두 아이는 서로에게 절실하게 반해버린다. 그리고 소년이 먼저 말을 건넨다. 참고로 다음은 휴대전화의 번호가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이다. 
- 0110011100110010100001? 
소년이 빙그레 웃으면서 답한다.
- 0110011100110010100001? 
소녀도 빙그레 웃으면서 답한다.
- 0101100111000100111101. 

 

  아아, 진실로 운명적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다음날 바로 프로토콜 변환기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같이 만나서 0과 1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세상을 그려 나갔다. 수많은 시그날들이 0과 1로 화하여 그들의 사이를 오고 가기 시작했고, 그들이 잡아먹는 막대한 전력의 양만큼이나 커다란 감정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웃음도 0과 1이었고 눈물도 0과 1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랑의 언어들이 오갔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시스템이 다운될 지경이었다. 소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메모리가 딸린다는 생각을 했고, 소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주 프로그램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식 디스크 청소를 해주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매일같이 레지스트리 청소기를 돌려야 한다고 할지라도, 마냥 좋았다. 그들은. 


  어느 날엔가 소년은 소녀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0과 1로 만들어진 오토바이를 타고 0과 1로 만들어진 기타를 뒤에 싣고 소녀의 집을 찾아갔다. 소녀의 집 역시 0과 1의 조합체였다. 소녀의 집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소년은 메신져에 로그인을 했다. 또르르르르. 설 익은 사과처럼 생긴 아이콘이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 010100. 
  어서 일어나 차앙- 문을 열어보라는 뜻이었다. 소녀는 0과 1로 만들어진 커튼을 젖히고 0과 1로 만들어진 창문을 열었다. 0과 1이 사탕가루처럼 반짝거리는 밤하늘이 펼쳐졌다. 소년이 다시 메세지를 보냈다. 
- 1000010000100. 
  백년에 한 번 별들이 세상 그 어느때보다도 반짝거리는 날이 있는데 바로 오늘이 그 날이야, 라는 뜻이었다. 소녀는 그제야 비로소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0과 1로 만들어진 오토바이에 기대선 소년이 거기에 있었다. 소년은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지도 않았고 오토바이로 기타를 타지도 않았다. 대신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0과 1로 만들어진 기타였다. 
- 10100010111101101010101, 
  01011010010010010101001. 
  먼 옛날 지구에 살았다는 돈 맥클린이라는 가수의 노래였다. 소녀는 감동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감동 또한 0과 1의 조합체였다. 


  이윽고 소년은 소녀를 집안에 소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소녀를 집에 데려오기 이전에 부모님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어 보기로 했다. 소년의 아버지 역시 0과 1로 구성되어 있었고 소년의 어머니 또한 0과 1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뜻밖에 반색을 하며 소년의 말을 반기었다. 
- 010000100101 
  뭐 하는 처자냐는 뜻이었다. 쓰잘데기없는 짓 그만 두고 공부나 하라는 뜻에서 다리 몽댕이가 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은 신이 났다. 그는 소녀의 사진을 한 부 카피해서 부모님께 보여드리기로 한다. 자신감이 생기니 좀 달뜬 기분에 짐짓 목소리를 내리깔고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라며 과감한 선언마저 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조금 전까지 기분 좋게 아들의 소년의 부모님은 펄쩍펄쩍 뛰었다. 소년은 직감적으로 양친의 맥박이 0과 1사이를 빠르게 왔다갔다하고, 그때마다 0과 1로 만들어진 무수한 불길한 신호들이 거실의 공기를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불안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엄숙하게 말했다. 
- 00010011. 
  네가 올해 몇살이냐는 뜻이었다. 
- 10. 
  열 살이라고 소년은 답했다. 
- 010100110. 
  소년의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열살은 조금 빠르지 않니?’ 라고 말했다. 
- 0010100010.
  소년은 항의했다. 아까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잖아요. 
- 110001101000 01110110010101. 
  ‘소스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집안이잖니?’ 라는 뜻이었다. 
- 01001011011000111011010101. 
  소년의 부모님은 단단히 화가 났다. 그들은 소스 공개를 주장하는 소녀의 집안이 지나치게 헤프고 뼈대가 없으며 보안에 취약하다고 말했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차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소녀가 좋고 소녀는 소년을 좋아한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하지만 소년의 부모님은 한결 같았다. 


  문제는 소년이, 역사상 많은 신파극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부모의 뜻을 한번도 거역해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년은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밤이면 밤마다 0과 1의 오토바이를 몰고 0과 1로 만들어진 도로를 0과 1의 원리로 불이 들어오고 꺼지는 신호를 무시한 채 달리며 분을 삭힐 수 밖에 없었다. 소스 공개라니. 그 딴게 무슨 상관이람.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소년은 속도를 올린다. 속도계의 눈금이 100을 가리킨다. 
  그 사이 소년의 어머니는 소녀를 만났다. 0과 1이 만나는 곳에 있는 읍내의 0과 1로 지어진 한 까페에서였다. 
- 010000100010001010010101010001. 
  정말로 그 앨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렴, 이라는 뜻이었다. 이 말과 함께 소년의 어머니는 핸드백에서 하얀색 봉투를 꺼내어 0과 1로 단단히 만들어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약간의 망설임과 약간의 경멸감을 담아 봉투를 슬쩍 소녀 쪽으로 밀어 놓았다. 솔직히 주고 싶지도 않지만 주지 않을 수도 없어 준다는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이 묻어나는 동작이었다. 봉투 안에는 0과 1이 어지럽게 쓰여있는 이 시대 상품 가치의 척도가 수십장 들어가 있었다. 
- 100100? 
  ‘이게 뭔가요?’ 라고 소녀는 되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파르르 떨리던 눈가의 근육이나 바들바들 진동하던 입술 끝은 이미 그것이 뭔지를 알고 있어 제 스스로 먼저 움직이고야 말았다. 소녀가 봉투를 좌우로 벌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기가 무섭게 소년의 어머니는 쐐기를 박았다. 
- 0001000100010. 
  ‘액수가 적은게냐?’ 잔인함과 모욕감과 경멸감이 방사형으로 토핑된 피자와도 같은 말이었다. 과연 소녀는 잔인함과 모욕감과 경멸감이 쫄깃쫄깃하고 오독오독 씹히는 기분을 느끼고야 말았다. 어른을 만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는 것이 유사 이래 큰 실례였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소녀는 먼저 짐을 챙겨 일어서려 한다. 
- 100010100100. 
  ‘저한테 돈은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라는 뜻이었다. 다만 그 이후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몰랐다. 용감하게 '그래도 1011001씨와 저는 헤어질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해야 할지, 아니면 '당분간 잘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한 발자국 물러 서야 하는 것인지 몰랐다. 어느 편이 더 옳은 일일까. 세상 일이란 산수와 같지는 않아서 명쾌하게 어느 하나를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소녀는 그냥 뛰쳐 나온다. 
- 0010010001001001010 
  ‘결국은 너만 다치게 될거야.’ 등 뒤로 낮고 조용하게 남겨진 그 말이 내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폭주를 마치고 소년이 집에 돌아왔을때 소년의 아버지는 싫다는 소년을 데리고 집 앞 포장마차에 간다. 포장마차 또한 0과 1을 덕지덕지 이어붙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0과 1의 꼼장어와 0과 1의 소주 한 병과 0과 1의 콜라 한 병을 주문한다. 자기 앞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소년의 잔에는 콜라를 따른다. 그리고는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황급하게 들이킨다. 크아. 
- 1001010101010110101010 
  이제 늙어서 그런지 술만 마시면 정신이 0과 1을 왔다갔다 하듯 깜빡깜빡거린단 말이야, 라는 뜻이었다. 소년은 손을 받쳐들고 아버지의 빈잔에 술을 따랐다. 0과 1로 이루어진 알코올 분자와 분자가 술잔 안에서 회오리를 일으켰다. 
- 0101001010? 
  아버지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라는 뜻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가득 찬 잔을 다시 비워내었다. 1이 되었던 잔은 다시 0이 되었다. 소년도 고개를 돌리고 콜라를 꿀떡꿀덕 목으로 넘겼다. 사실 좀 목이 말랐다. 1으로 가득 찼던 소년의 잔도 0이 되었다. 
- 0010100101? 
  ‘글쎄다. 무슨 할 말이 있을꼬?’ 라며 소년의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소년은 텔레비젼 드라마를 많이 보았는지라 그 웃음이 그냥 웃음이 아님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문득 소년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0101001010? 010? 
  '아버지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거죠? 그렇죠?’ 라는 뜻이었다. 
- 000.
  소년의 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할 말이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 100100? 
  소년은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 001…….   ‘사실은……’ 이라고 소년의 아버지는 운을 떼었다. 그건 아주 긴 이야기였다. 소년이 태어나기도 전의 아주 멀고도 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0과 1로 이루어진 우주. 작지만 커다란 어느 한 구석에서 빛을 내던 별이 폭발하며 탄생한 세상의 시작. 분수처럼 뻗쳐나가던 0과 1의 시그널. 우연이 만들어낸 0과 1의 덩어리가 이뤄낸 너와 나 그리고 우리라는 존재. 비록 형체는 없지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0과 1의 존재. 그리고 어느 날엔가 우연히 이루어진 0과 1의 인연, 0과 1의 웃음과 0과 1의 눈물이 빚어낸 감정의 잉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소년은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언뜻 스쳐가는 불길함을 떨쳐낼 수가 없어서 몸서리를 친다. 
- 1010100. 
  ‘그만하세요.’ 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 1001010010. 
  ‘제발 그만하세요.’ 소년은 이미 모든걸 알 수 있었다. 같은 '에니악'의 자손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던 1011001의 소년과 1010011의 소녀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하나의 핏줄로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배다른 남매 - 소년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힘없이 철퍽 바닥에 주저않았다. 그 참에 콜라병이 쓰러지며 0과 1의 콜라가 쏟아졌다. 쏟아진 콜라에서는 세상의 진리라도 보여주겠다는 듯이 1의 거품이 올라와 터지며 0이 되었고 0의 거품이 터진 자리를 1의 거품이 생겨나 메꾸었다. 
- 01010111000? 1010001101001011?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이건 텔레비젼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 아닌가요?’ 라고 소년은 물었다. 
- 01010010 1010001010101001010…….
  ‘말이 되지 않아도 그게 사실인 것을 어쩌겠니…….’ 소년의 아버지는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소년의 이름은 1011001, 소녀의 이름은 1010011이었다.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모두 1로 시작하는 까닭은 이 숫자들이 주민등록번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기 2035년을 살고있는 어엿한 소년과 소녀였다. 다만 0과 1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지금과 다를 뿐이지. 소년도 0과 1로 이루어졌고 소녀도 0과 1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사용자 기반의 인터페이스가 갖춰진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만났다.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프로그램이 내재한 치명적인 오류가 원래는 만나지 않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그들을 서로 만나게 했다. 운명이라기보다는 우연이었다. 우연이 아니고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0과 1로 구성된 시스템의 관습에 저항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간다. 천천히,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마치 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1011001의 소년과 1010011의 소녀는 손을 잡고 시스템으로부터 도망친다. 시스템이란 거대한 철문과도 같다. 소년과 고녀는 있는 힘것 문을 민다. 하나 둘 셋. 쉽지가 않다. 다시 하나 둘 셋.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시 하나 둘 셋.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새하얀 빛이 몰려 들어와 시야를 어지럽힌다. 이 밖으로 발을 내딛으면 어떻게 될까? 모든게 사라진 0의 세상일까? 모든게 채워진 1의 세상일까? 소년과 소녀는 아직 어려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하나 둘 셋. 그들은 손을 맞잡고 뛰어내리기로 한다. 아주 천천히 페이드 아웃. 이것이 서기 2035년에 있었다는 10살 짜리 소년과 10살 짜리 소녀의 1과 으로 이루어진 진회색 사연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200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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