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내정자는 나오라
낙농콩단

041. 내정자는 나오라

by 김영준 (James Kim)


  광선유(廣宣流)는 초조감을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기장으로 마련된 사온서(司醞署) 별채가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시중드는 아이에게 "혹여 주부(主簿) 나으리를 뵐 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아이는 "시험장에서 대면하기 이전에 미리 주부 나으리를 뵙는 것은 금하여져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광선유는 괜히 머쓱해져 다시 문을 닫고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그렇다고 마음이 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심장이 떡방아 찧듯 쿵덕쿵덕 뛰어 가슴을 부여잡고 있고 때때로 거세게 숨을 골랐다. 그리곤 혼잣말로 '어이하여 다른 유학(幼學)들은 나타나지 않는가, 어이하여 다른 유학들은 나타나지 않는가'하는 중얼거림을 반복했다.


  기적처럼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거진 오시(午時)가 다 되어서였다. 그는 지대공(地對空)이라 하는 자로 풍채가 듬직하고 성격이 호방해보였다. 봇짐을 탁상 위에 올려놓기가 무섭도록 살갑게 "처음 뵙겠소이다. 쌍문골에서 온 지가 대공이라 합니다" 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광선유 또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 손을 맞잡고 "반갑소이다. 난 광선유요" 라며 화답했다. 그때 마침 한 사람이 더 별채에 들어왔다. "나는 공문도(孔紋導)라고 합니다. 여기 계신 다들 사온서에 직장(直長) 자리가 탐이 나서 오신 겁니까." 짓궂은 그 말에 지대공이 호통하게 웃어제꼈다. "그러는 그쪽은 어떻소. 직장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듯한데 주부라도 꿰어찰 작정이오?" 공문도는 빙긋 웃으며 "직장이든 주부든 종 6품이요 7품인 하급 관직인데.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그 정도에 만족해서야 쓰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광선유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얼어붙은 분위기가 좀 풀리자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섣달 추위에 덜덜 떨리던 몸도 조금은 녹은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지대공은 "한 명만 뽑는다 하더이다"라고 했다. 모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가 전부입니까? 우리 셋만. 시험을 치게 되는 것입니까? 다른 지원자가 있기는 한 것입니까?" 그 물음에는 모두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공문도가 지대공과 광선유를 두루 둘러보며 말했다. "실레지만 출신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보이는 만큼 성격 꽤나 급한듯한 지대공이 먼저 나서 "물론이오. 뭐 그게 실례까지 되겠소. 난 쌍문사숙 출신입니다. 백치 치하문(恥下問) 선생의 아래에서 공부했지요." 공문도가 유난스레 호들갑을 떨며 "정녕 백치선생님의 후학입니까? 말로만 듣던 그 분의 제자를 여기에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라고 하자 지대공 또한 손을 내저으며 "지나친 말씀입니다. 전 스승님의 발 끝도 따라가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광선유 또한 백치선생의 크고 높은 이름을 들어 본 일이 있었다. 지난 사화 때 줄줄이 죽어나가는 뜻있는 선비들을 보며 부끄러울 일이 백가지도 넘는다, 하여 호를 백치로 바꾸고 낙향(落鄕) 당대의 사표(師表)였다. 물론 고향이 쌍문골인지라 낙향해 보아야 사대문을 벗어나 얼마 가지도 않았지만 그 곳에서 후진들을 모아 평소 좋아하기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술을 만들고 담그는 일을 가르치는 쌍문사숙은 명문 중의 명문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쌍문사숙 출신이 오다니 오늘 쉽지는 않겠는데, 광선유와 공문도 모두 이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숨기려고 애를 썼다.

 

  다음은 광선유 차례, 공문도가 나서 채근했다. "선비께서도 출신을 말씀해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광선유는 "나는 문래 광씨 집안의 자손으로 조부께서는 내자시(內資寺) 판관으로 계셨고 선친께서는 사도시(司導寺) 주부로 계셨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아 더 승차하지 못하시고 일찍 물러나 고향 원조골에 학당을 짓고 훈장질이나 하며 여생을 보내셨습니다. 마침 제 할미가 손 맛이 좋아 술을 기가 막히게 담근다는 소문이 퍼졌고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 작은 양조(釀造) 교습소를 열었는데……." 지대공이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혹시 선비께서 말씀하신 그것이 '원조 욕쟁이 할머니 양조장'아닙니까?" 광선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습니다." 지대공은 "아니, 정말로 욕쟁이 할머니가 그대의 조모님이라면 나는 그대를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했고, 공문도 또한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자리는 하나이옵고 오늘 쟁쟁한 분들만 이 자리에 오셨으니 제 운이 다했음에 원통할 뿐입니다." 광선유는 그들의 호들갑에 괜히 머쓱하였으나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이때 이미 시각은 오시를 지나 미시(未時)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면접은 늦어도 미시에는 시작할 것이었다. 


 

  지대공이 나서서 공문도를 채근하길,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선비께서도 출신을 말씀해 주시지요. 그래야 피차 공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문도는 빙긋 웃으보이며, "그럴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원가 걸출하신 분들 앞이라 말을 꺼내기가 심히 부끄럽습니다." 지대공은 그 급한 성정을 드러내며 "괜찮소"라고 버럭 끼어들었고 광선유도 애가 타서 "빨리 말해보시오"라고 했다. 일설에는 광선유가 "괜찮소"라고 하자 지대공이 "빨리 말해보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공문도는 "나는 충청도 광천에서 올라왔습니다. 광천 공씨 집안의 삼남이고 스승 없이 독학으로 양조를 배웠습니다. 내세울 것이 일천하나 일단 기회만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여 실력을 내보일 자신은 있습니다." 광선유와 지대공은 예상 외라는 표정을 숨기려고 애썼고 최선을 다해 그를 존중해주는 척 했다.

 

   공문도는 모른 척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헌데 내가 우려하는 것은……." 지대공이 그의 말꼬리를 따라 밟았다. "우려하는 것은?" 공문도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이 사온서 직장 자리에 이미 내정자(內定者)가 있다는 소문입니다." 광선유와 지대공은 자기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하면, 이미 누굴 뽑을지 정해 놓았다는 뜻입니까?" "그럴리가요. 술을 만드는 사온서의 책무가 여타 기관에 비해 중대한 것은 아니나 이 또한 엄연한 나라의 관청입니다. 일을 그렇게 막되게 처리할 일이 있겠습니까?" 공문도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왜 두 분 선비님들에게 출신을 물었겠습니까? 일단 분을 가라앉히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라고 했다. 광선유가 과연 생각해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

 

  "하면, 선비께서 하신 말씀의 뜻이란 개인적 연줄을 타고 내려온 사람이 있겠다는 것이로군요." 공문도가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대공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혹여 그대가 내정자는 아닙니까?" 라고 했다. 공문도는 고개를 찬찬히 저으며, "내가 만약 내정자라면 두 분 선비님들께 그런 의문을 털어놓지는 않았을 겁니다."라고 했다. 듣고 보니 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더구나 공문도는 세 사람 중 가장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명문사숙 출신인 지대공이나 유명 양조장을 꾸리는 집안에서 온 광선유에 비하자면, 그는 오히려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래도 가장 오해를 사기 쉬운 처지가 된 지대공이 먼저 나섰다. "혹시나 해서 내 그대들에게 이 이야기는 털어놓을까 합니다. 내 스승님 백치선생은 제자가 관직에 나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난 오늘 면접도 몰래왔소만. 그 이유는……." 공문도가 재빨리 말을 끊고 나섰다. "알고는 있습니다. 백치선생이라면 관직이라면 치를 떠는 분이시니." 광선유도 수긍이 간다는 표정으로, "내 오늘 계속해서 지선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속일 사람 같진 않습디다."

 

  이를 놓치지 않고 공문도는 "하면 광선비께선 어떻습니까?" 하고 광선유를 슬쩍 떠 보았다. 광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나요? 촌에 있는 나의 할미가 한양에 올라와 사온서 관원들 뒷주머니에 돈꾸러미라도 두둑히 넣어주었단 말씀입니까? 허허, 너무들 하십니다. 그리고 혹여 내가 내정자라면 내가 약조된 시간보다 두 식경이나 일찍와서 벌벌 떨고 있을 턱이 있었겠습니까?" 지대공이 나서길, "맞소. 내가 내정자라면 면접 직전에나 나타날 것이오." 공문도가 벌떡 일어섰다. "맞습니다. 우리 셋 모두 내정자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담 지원자가 모두 몇인지 알아보는 것이 먼저겠군요. 우리가 전분지 아님 다른 이가 또 있는지……." 


 

  공문도는 문을 열고 시중드는 아이를 불렀다. "예, 나으리.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아니다. 얘야. 다름이 아니라 오늘 이 별채에 모두 몇 분을 모시기로 되어있는지 아느냐?" 아이는 "넷 이옵니다" 라고 답했다. 공문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냉수 석 잔만 부탁하마"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광선유는 "아직 하나가 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라고 했다. 공문도도 "우리 셋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 하나가 내정자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며 맞장구를 쳤다. 아이가 가져온 냉수를 단숨에 들이킨 지대공은 "그럼 우리는 부르지나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까지 다리 아프게 걸어와서 뭐 하는 짓이랍니까?" 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아직 대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나머지 한 사람에 대해 확신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광선비나 공선비, 모두 그런 부정한 방법을 쓸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 아직 안 온 그 사람, 그 자가 바로 내정자일테요." 광선유도 덩달아, "맞소. 내정자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소." 공문도도 혀를 끌끌 찼다. "나라 꼴이 어찌 되려고 이런 하급관직 하나에도 참담한 부정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때, 밖이 부산스러워졌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문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양반 하나가 별채 앞에서 시중드는 아이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저 자일 겁니다." "드디어 내정자가 나타났군요."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데." "나이 먹을수록 욕심은 더해지는 법입니다." "암요. 부끄러움은 덜해지고 말입니다." "아무튼 좋겠습니다. 그렇게 직장 나으리가 되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인물에게 험담을 퍼부었다. 그악스러운 저주가 쏟아지는지도 모른 채 미지의 인물은 서서히 별채로 다가왔다. 



 

  "어! 내정자가 옵니다." 

  광선유와 지대공, 그리고 공문도는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침을 떼었다. "우리가 눈치챘다는 걸 내정자에게 보일 필요야 없지 않겠습니까." 지대공의 말에 모두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미지의 인물은 산산이 쏟아지는 태양을 등지고 서서 더 들어오지도 다시 나가지도 않은 채 말했다. "다들 안녕하신가? 자네들이 바로 오늘 면접을 치게 될 지원자들이로구먼. 미안하게 되었네. 나는 사온서 주부 어도단(語道斷)이라 하네. 급한 용무가 있어 사가에 좀 다녀오느라 차마 관복을 입지 못해 아직 이 모양임을 용서하시게. 십 분 후 면접을 시작할 테니 다들 최선을 다해 준비해 주길 바라네. 세 명 뿐인가? 하나가 오지 않았군. 하면 시험은 그대들 셋 만을 모시고 치러질 것이니 그렇게 알게." 



 

  그렇게 그는 문을 닫고 나갔다. 광선유, 지대공, 공문도, 세 지원자는 한동안 망연한 표정을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지 않았겠습니까? 내정자가?" 긴 침묵을 깨뜨린 것은 지대공이었다. "안 올리가 없지요." 공문도가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기껏 손을 써 놓고 어찌 다 된 밥을 마다하오리까." 광선유도 거들었다. 그들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뭔가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서로 저 놈이 내정자이면서도 내정자가 아닌 척하는구나, 저마다 속으로는 분통을 터뜨렸다.

 

(200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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