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스쿼시와 도그파이트
낙농콩단

039. 스쿼시와 도그파이트

by 김영준 (James Kim)

  자랑은 아니지만 학교 다닐 때 체력장에서 5급을 받았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도 아니라, 내리 8년간 5급을 받았다. 고등학교적 담임 선생님은 8년 연속 체력장 5급은 이 동네는 물론이고 서울시를 통틀어도 몇 명 나올까 말까한 경이적 기록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시다시피 체력장 5급이란 어느 한 두 종목만의 낙제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전 종목에 걸친 고른 낙제와 최소한의 싹수도 보이지 않는 성의없음이 보기좋게 융합되어야 비로소 달성이 가능한 것이다. 그 영광된 기록을 면면히 살펴보자면 감탄을 금할 수가 없는데, 8년간 기록된 턱걸이 횟수가 합이 5회라던가 (8회가 아니라 5회인 까닭은 마지막 3년 동안, '최초도약시 엉거주춤 턱이 달랑말랑 얍삽하게 카운트 한 개 기록하기' 방법이 국제 턱걸이 협회 INA에 의해 엄격하게 규제되었기 때문이다) 8년동안 합산한 제자리 멀리뛰기 기록이 투수와 포수사이의 거리에 불과하다던가, 8년동안 합산한 팔굽혀펴기 개수는 화씨로 환산한 물의 끓는 점만큼 될까 말까라던가. 때문에 나는 운동에 대한 심한 컴플렉스를 가지게 되었다.

 

  몇 해 전, 내가 스쿼시 학원에 등록했을 때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비밀리에 작성된 B스쿼시 센터 내부 문건에 따르자면 나는 순발력, 지구력, 완력, 이런력, 저런력, 기타등등력, 모두가 우ㅇ수한 스쿼시맨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나에게 있어 그나마 하나 쓸만하다고 분석된 것은 상황 판단력이었는데, 그 쓸만한 판단을 처리할 하드웨어가 부실하여 결국은 도루묵이라고 강사들은 입을 모아 지적하였다. 강사들은 자기들끼리 하는 말로 각자의 수강생을 '멍멍이'라고 불렀다. 이 또한 내부 문건에 명시된 아주 은밀한 사실이다. 따라서 공개될 경우의 파장을 고려하여 내부 고발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 강사들은 그들의 '멍멍이'를 아주 열심히 훈련시켜 주기적으로 대련을 붙였고 이를 역시 자기들만의 은어로 '개싸움(도그파이트)'라 불렀다. 나의 멍멍이와 너의 멍멍이가 싸움을 벌이니 개싸움이라는 그 말이 틀리지는 않다. 그런데 이 개싸움이라는게 재밌다. 로또보다 통쾌하고 토토보다 짜릿하다.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뛰고 함께 땀흘리며 키워낸 자식같은 멍멍이들이 안겨주는 승리이니 그 재미가 각별하다. 나의 재미와 너의 재미를 자축하고자 이 개싸움에는 돈이 걸렸다. 처음에는 한 푼, 두 푼이었던 것에 금새 떡값, 절값, 술값, 안주값, 라켓값이 붙고, 누가 붙였는지, 왜 붙었는지 모를 부가가치세마저 포함되면서 판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단다.

 

  판돈이 불어나면 언제나 승패의 가치도 동반 상승하는 법이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이 참에 동료들끼리 밥이나 한 번,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자고 시작된 것이 금방 본인과 가문과 지역사회의 자존심이 걸린 거대한 문제로 변모하였다. 그 자존심의 크기는 저울에 매달수는 없으나 판돈의 무게를 통하면 간접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사들은 승리를 갈망했다. 눈 앞에서 나의 멍멍이가 남의 멍멍이를 이겨주기를 바랐다. 이길려면 멍멍이가 잘해야 된다. 다른건 잘해봐야 소용이 없고 스쿼시를 잘해야 한다. 스쿼시를 잘하는 멍멍이를 수강생으로 두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환골탈태법. 보통 수준의 멍멍이를 정말 끊임없는 훈련과 비법의 전수를 통해 우수한 멍멍이로 다시금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날로먹는법. 애초부터 뛰어난 멍멍이가 학원에 다니게 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사기성 스카우트다. 아시다시피 첫번째 방법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강사들 자신도 정말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뛰어다녀야만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두번째 방법은 간편하고도 심히 간단하여 널리 추천할만하다. 때문에 강사들은 두번째 방법을 애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스쿼시 강사 경력 7년차의 준 전문가가 스쿼시의 '스'자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어리버리 쭈삣쭈삣 B스쿼시 학원을 등록, 미리 입을 맞춰놓은 C강사의 멍멍이가 되어 다른 초보 멍멍이들을 처참히 때려잡는 희대의 승부 조작 사건도 일어나는 등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나를 멍멍이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할 강사가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기초적 체력 트레이닝에서부터 시작하여 꼬박 6개월은 라켓질을 시켜야 비로소 강습을 시작할 수 있는 '불량 멍멍이'였다. 개싸움의 결과와 판돈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멍멍이는 불량 멍멍이다. 그런 불량 멍멍이는 그냥 내쳐버려야 마음도 편하고 속도 편하고 참 좋을텐데, 그건 어디까지나 강사들 마음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걸고 B스쿼시 학원을 운영하는 B원장님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 그럴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나는 정처없이 떠도는 '저니맨'이 되었다. 어제는 이 강사의 멍멍이가 되었다가, 오늘은 저 강사의 멍멍이가 되었다가, 내일은 다시 다른 강사의 멍멍이가 되는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믿고 성스러운 개싸움에 출전시켜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들을 패배의 구렁텅이로 인도하였다. 불량 멍멍이인 내가 출전할때 걸리는 판돈의 배당은 상대와 관계없이 항상 바닥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B스쿼시 센터의 내부 문건에서 내가 ① 늪 ② 백전백패 ③ 독이 들었지만 성배는 아닌 그냥 잔 등으로 암호화되어 기술되고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당시 나의 세번째 강사였던 G씨는 나의 스쿼시 혼(魂)을 알아봐준 최초의 인물이었는데, 그 사연은 2003년 모월 모일의 개싸움과 관련이 있다. 당시 나의 대련 상대는 쌍문동에 사는 스쿼시 경력 6개월의 40대 여성. 자신의 멍멍이가 못 미더워 아예 수건부터 곱게 빨아와 여차하면 던질 준비부터 하던 강사 G씨는 상대의 멍멍이가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읽었다. 희망의 조각을 발견한 그는 여느 날과는 달리 나의 팔다리까지 주물러주며 작전을 주문한다.  

- 아줌마들은 공기저항이 크다. 마르고 날씬한 네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며 강하게 흔들어야 한다. 

- 같은 이유로 앞뒤로 흔들어도 좋을 것 같다. 평행주차와 공간지각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느냐? 딱 봐도 못 따라올 것처럼 보인다.
-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백핸드로 스윙하는 과정에서 신체구조상의 어려움을 가지게 된단다. 상대는 오른손잡이다. 그러니 너는 될 수 있으면 상대의 왼편으로 공을 보내거라.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좌우로 정말 빠르게 움직였다. 한 번은 왼쪽으로, 한 번은 오른쪽으로 일부러 골라가며 쳐내고 다시금 코트의 중앙을 점유했다. 앞뒤로도 흔들었다. 한 번은 앞쪽으로, 한 번은 뒷쪽으로 멀리, 그리고 다시금 코트의 중앙을 점유했다. 나름대로 소속 그룹에서는 뛰어난 아주머니인지는 몰랐지만 스무살 이상 어린 나의 스피드를 따라오기에는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15분이 경과했을 때 점수는 7 대 1. 내가 7, 아주머니가 1. 난생 처음보는 나의 파이팅에 B스쿼시 센터 직원 일동은 모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간 불량 멍멍이로 평가절하되어 있던 내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예측을 완전히 뒤엎는 결과로 G씨는 사상 최대 배당의 잭팟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불량 멍멍이를 우량 멍멍이로 개조시켜 개싸움을 싹슬이한 제 2의 '거스 히딩크'로 추앙받기 일보 직전이었고, '무엇보다 기본기에 충실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잠은 충분히 재웠어요' 따위의 인터뷰를 녹음하기 이보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내 체력이 바닥났다. 참고로 B스쿼시 센터의 내부문건에도 내 지구력은 썩 좋지가 못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투지가 넘친들 몸을 움직일 기운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다. 그냥 상상에 맡기도록 한다.


(200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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